062강-눅 10장25-27(영생 얻기)-luk1101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0:25-2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한 모양입니다.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은 굉장히 냉철하게 자기 표정을 감추고 아무 속내도 들키지 않고 사무적으로 다가서는 것 같지만 자기 속내를 다 들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먹한 관계에서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보통 두 개 있어요.
날씨 이야기, 음식이야기 이 두 가지입니다. 그 두 개의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는 서로 감정이 안상할 것이라고 보통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면 ‘요새 날씨 보통 아니지요?’라고 하면 상대방에서 ‘날씨 진짜 춥네요.’ 하면 그 둘 사이가 좋은 관계에요. 그런데 ‘날씨 참 춥지요?’ 하니까 ‘예, 딱 당신 성질 같네요.’라고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는 그냥 날씨 이야기를 해서 이 서먹한 관계를 풀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뒤끝 있는, 감정 섞인 이야기가 나오네요. 사람들의 모든 만남이라는 것은 아무리 자기가 숨기고 싶어도 주체 대 주체의 만남,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꾸려놓은 어떤 세계관이 따로 따로 이미 존재하기에 그 두 세계가 충돌하지요.
대륙 간의 충돌에 의해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 충돌에서 불똥이 튀게 됩니다. 본문에서 율법사가 예수를 만날 때 곱게 만나지 않습니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는 알아?’ 하는 식으로 시비조로 나왔어요. 그걸 본문에서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여기 있는데 그 기준에 당신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시험하겠다. 내 기준에 부합하면 앞으로 사귈 것이고 안 맞는다면 오늘부로 그만 헤어지자.’라는 식으로 다가온 겁니다.
예수님과 율법사의 만남이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로서 만났다고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에서 우리는 아이스크림처럼 혹은 솜사탕처럼 그렇게 순하게 만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장 47절 에 보면 이런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하는 말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지나가면서 그 사람을 알아버립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오히려 당황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날 압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하시기를 ‘네가 무화과나무에서 홀로 기도할 때 내가 그것을 다 듣고 있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교회를 나오든 안 나오든 어떻게 살든지 간에 세 살 때, 일곱 살 때, 스물일곱 살 때, 마흔 여섯 살 때 어디서 무슨 짓을 했든지 나는 너를 다 안다.’는 겁니다.
‘나는 너를 다 알고 있는데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 네가 무화과나무에 혼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미 그 광경을 주시했다. 나는 내 사람이 누군지를 다 알거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나대거나 까불거리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창세전에 너를 구원하기로 작정되어 있다. 다만 내가 너를 찾는 것은 작정된 자가 결국에 하늘나라로 꾸준히 가고 있음을 목격하는 즐거움을 나(주님)는 갖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다 아는 거예요.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도 몰라요. 내가 내일 뭘 해야 될지, 모레가 되면 어떤 성질을 부릴지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지나오면 알지만 앞으로 주어지는 날에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어요.
나 자신도 모르면서 나름대로의 자기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놀랍게도 들어가는 생각이란 ‘나도 나를 잘 모르니 예수님도 나를 잘 모를 거야.’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먼저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나다나엘아, 나는 너를 안다. 끝!’ 이야기가 끝나버렸습니다. ‘나다나엘아, 나는 너를 안다.’
성경전체에서 보여주는, 구원받은 사람이 처음 예수님 만났을 때의 특징이 이 특징입니다. ‘베드로야, 뭐하고 있느냐?’ ‘고기 잡고 있습니다.’ ‘고기 그만 잡고 이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아주 일방적으로 불러내버려요.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앞에서 우리가 뭘 좀 안다고 깝죽댈 수가 있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아시는데 ‘예수님, 제가 뭘 하면 복을 받겠습니까?’라고 새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같잖겠습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복을 받겠습니까?’라고 묻는 취지와 심보를 다 안다는 거예요. 저에게 메일로 상담을 요청한 내용이 있어서 소개하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 이익만을 위하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 답변은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는 그 의도마저 일단 뭔가 다른 이익을 노리는 것이 있기에 일단 이 이익은 보류하겠다는 심보를 드러낸 겁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이익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사고방식을 바꾸시면 됩니다. 아하, 나는 항상 내 이익만 챙기는구나.’라고.
심지어 남에게 희생하고 봉사하겠다는 그것마저 뭔가 내 희생을 상대 쪽에서 알아줌으로서 나에게 존경이라는 반대급부가, 반사이익이 되돌아오는 것을 생각하기에 그것은 자기가 만드는 일종의 게임에 불과한 겁니다. 물론 거기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겠지요. 그냥 사세요. 그리고 그냥 사는 그것이 단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이익만 챙기면서 그냥 사는 겁니다.
그런 취지로 답변을 보냈습니다만 나다나엘 본문과 연관시켜 보면 그렇게 나만 챙기는 방식으로 무화과나무에서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무슨 심보를 가지고 홀로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하는지 그 내용을 이미 다 아는데, 그것마저 다 네 이익을 위함인데 그 이익을 추구하든 말든, 그것과 관계없이 이미 ‘나는 너를 안다’ 는 거예요.
분류작업 끝, 분류작업이 끝나버린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행동을 하고 난 뒤에 그 행동을 봐서 ‘아, 이것은 나쁜 놈이구나. 너는 지옥가거라.’ 혹은 ‘너는 천당가거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분류작업이 끝나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합격자명단이 컴퓨터 하드에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그 상태에서 수험생들은 수험번호를 적어 넣고 자기시험을 칩니다.
7662번, 김정일, 이렇게 써놓고 시험을 치는 겁니다. 그런데 합격과 불합격을 이미 대학당국에서 알고 있어요. 합격이냐 불합격이냐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그 결과를 그냥 내가 통보받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라는 곳에 우리가 만약 시험을 쳤다면 거기도 이미 합격자와 불합격자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우리 이름을 대면 거기서 합격통지서와 불합격통지서가 오는데 합격통지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이란, 주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아신 것처럼 ‘아, 주께서 이미 다 알아서 챙겨주셨구나.’라는 사실을 통해서 막 기뻐하는 거예요. 그런데 불합격자는 뭘 생각하느냐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불합격도 합격으로 바뀔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안다는 것은 귀에 안 들어오고 내가 잘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자기가 자기를 보기, 여기에만 집착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집착을 하고 있으니까 주께서 아신다, 여기에 대해서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우리가 어떤 이익을 취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큰 허물이 안 되는 이유는 원래부터 우리가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그 큰 문제 앞에서 그런 허물은 문제조차 되지를 않지요.
그것을 이미 감안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합격’이라고 하신 거예요. 본문에 불합격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의 질문이 뭐냐, 율법사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성경전문가, 목사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사람은 다른 직업은 없어요. 고기 잡는 것도 아니고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하루 온 종일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대로 생각하는데, 생각할 때는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여기 눈앞에 있다, 내 앞에 있는 이 성경말씀이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성경말씀을 내 밖에 두면 안 되고 이 성경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게 되면 내 안에 성경말씀이 살아 있을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율법이 성취된 것을 보고 나를 구원할 것이다, 라는 전제를 깔고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성경말씀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데 어떻게 하면 이 바깥에 있는 이 성경말씀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가?’ 그것을 연구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교육하고 알려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근본적으로 모르는 것이 있어요. 뭘 모르냐, ‘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가? 나는 왜 영생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왜 영생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어야만 하는가? 영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시원하게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 존재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영생,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라 합시다.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갈까? 천국에 가게 될까, 지옥에 가게 될까? 그런데 왜 나는 이런 생각을 꼭 해야만 하는 사람이냐.’ 하는 그 이유를 본인이 몰라요. 뭔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뭔가 잃었기에 그 잃은 것을 찾아야 되는데, 그 잃어버린 것이 나에게 분명히 좋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잃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 천국가고 영생 얻는 것, 그것을 되찾아서 내 안에 다이아 반지처럼 쿡, 집어 넣어버리면 비로소 나는 만족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은 ‘왜 잃어버린 천국이 있어야 만족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본인은 생각하십니까?’ 라는 겁니다.
지금 말이 꼬여서 잘 이해가 안 되실 것 같은데요, 사람이 뭔가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엄마, 밥 줘!’ 하면 엄마가 밥 주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생각을 아주 깊이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서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아들아, 네가 왜 밥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느냐?’라고 하면 아들이 뭐라 합니까? ‘헐~!’(엄마 돌았어요?)
‘엄마, 나 배고프다니까.’ ‘밥을 안 먹으면 왜 배고파야 되는데?’ ‘난 그걸 모르겠어.’ ‘그 이유를 대 봐. 외계인은 밥을 안 먹어도 되는데 너는 왜 밥을 먹어야 돼?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른 그 이유를 대 봐라.’ ‘엄마, 미쳤어요? 엄마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데요?’ 아마 그렇게 나올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비비 꼬는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영생이라는 말을 그 당시 율법사들, 율법을 전공한 사람도 모를뿐더러 오늘날 우리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영생을 모르면서 뭔가 좋은 것이 미흡된 것이 있는데, 다른 것은 다 가졌는데 뭔가가 정말 중요한 것이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것마저 마저 채우면 참 좋은 것인데,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남자에게 참 좋은 것이 뭔가가 진짜 있는데……) 에라, 그것을 천국이라 하자, 영생이라 하자,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어떤 요소가 빠져있고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다, 하는 것은 남들 앞에서 비로소 그것을 찾아요. 옆 사람이 가만있으면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모릅니다. 20년 전에 김치냉장고 처음 나올 때 사람들은 그런 것 필요 없었습니다. 땅에다 김칫독 묻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이웃이 와서 ‘김치 냉장고 들여놓는다.’ 하는 순간 ‘김치냉장고? 김치냉장고라고? 그것은 나한테는 없는 미흡한 것인데, 나한테는 없는 결핍인데.’
그때부터 김치냉장고가 그리워지는 겁니다. 대체 나라는 인간이 무엇이 필요한지 본인도 모르고 있다가 불쑥 불쑥 등장하는 타인의 모습을 통해서 ‘아, 맞아. 나는 저것을 원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회사에서의 승진도 마찬가지고 아파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예쁜 얼굴, 자기 딴에는 머리 잘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잘 나온 머리모양 보면 ‘바로 저거였어. 미용사한테 저 머리모양으로 해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 말을 못해가지고 그냥 김 태희 스타일로 해달라고 했더니 이상한 모양으로 나왔잖아. 바로 저 스타일이었는데.’ 이런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에 보내주신 것은 구원받으라고 보내준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영생이라는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그런 미흡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나에게는 천국, 영생이 빠져있는가?’ 이런 쪽으로 자기를 보면 되는데, 그것이 사고방식의 전환인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맞아, 영생이 빠졌어. 주여, 영생 주옵소서.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본문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니까요. ‘네가 뭔데 영생을 운운하느냐.’ 그 말입니다. ‘나는 왜 영생이 필요한 존재인가, 라는 것을 네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느냐.’ 그 말이지요. 달라고 하지 말고……,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듯이 살 것도 없으면서 친구 따라 장에 가면서 ‘너는 뭐 사러 가는데?’ 하니까 ‘나도 몰라.’ 하는 식과 똑같은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참 주님 보시기에 같잖지요. 왜 그런가, 주님께서 미리 나다나엘을 아는 것처럼 미리 아는 자가 따로 있는데 탈락되기로 작정한 자가 영생을 운운하니까 참 웃기는 거예요. 자기에게 해당되지도 않는 것을,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해서 뭔가를 한다는 거예요. ‘무엇을 하여야.’
내가 무엇을 실천에 옮겨서 얻은 영생 같으면 그것은 자기가 만든 영생입니다. 왜, 내가 실천했기 때문에. 내가 만든 영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영생나무, 생명나무에게 인간을 추방시켰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인정한 거예요. ‘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쫓겨난 인간들 속에서 무슨 운동이 벌어졌느냐, 영생 되찾기 운동이 벌어졌어요. 영생 줄 분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유사영생나무, 유사생명나무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시체보관소에요. 전부 다 죽은 자들이 모인 거예요. 죽은 자들이 모여서 심심하니까 옆에 있는 관 뚜껑 열고 ‘어이, 아저씨.’ 하니까 ‘이게 어디서 말을 놓나? 난 80먹고 죽었다.’ ‘죄송합니다. 난 70년 만에 죽었는데, 그런데 형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서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죽은 할아버지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단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어디 있더라? 아, 그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단다.’ 여러분, 율법 지키면 구원받습니까? ‘생명나무(영생나무)로 오지 마!’ 하고 차단시킨 그 당사자가 예수님입니다. 모든 인간은 생명나무로 오지 말라고 차단시킨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다시 말해서 ‘너는 사형!’하고 내렸는데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포승에 묶여서 끌려가면서 한다는 소리가 ‘저, 집행관님!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돈 십만 원만 빌려주세요. 다음 달에 갚겠습니다.’ 이것은 자기주제파악을 못하는 거예요. 곧 죽는데도 다음달에, 다음 달에 갚겠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다시 한 번 통과하는 겁니다.
왜 너는 불합격 될 수밖에 없고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왜 생명나무를 따 먹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가를, 선악으로 따졌을 때, 따질 수밖에 없는 율법을 제공하는 겁니다. 율법을 제공하게 되면 그 율법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차단시키는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리 교회 나오고 성경말씀 지키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영생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이고 처음부터 인간존재자체가 영생을 못 가져야 되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겁니다. 그 율법을 봅시다.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할 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보면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라는 이것이 율법의 정신인데 왜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성사되지 않느냐하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려면, 모든 결정권을 말씀을 지키는 나의 몫으로 일체 돌아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율법을 지켜야 돼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 이것 지키면 영생을 주시겠습니까? 이것을 내놓을 테니 그 보상으로 영생 주세요.’라고 되돌려 받기 위해서 시도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맡기는 상황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마저도 자기 미흡한 것을 땜질하기 위한 용도로 다루고 가지고 놀겠다는 거예요.
‘당신은 나한테 필요한 것만 주면 돼.’ 하는 식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결국 누구를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나한테 투자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충성한 거예요. 그리고 이 한계에서 인간이 벗어날 길은 전혀 없는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마저도 ‘할 수만 있거든 이 쓴 잔에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옆 사람 들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과 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 이 잔이 지나가서 그냥 예수님 속편하고 수월하게 하겠다는 그것마저 율법은 용납하지 않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 과정은 ‘나의 솔직한 마음은 이 고난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마저 내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절대로 내 뜻대로 하면 안 됩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반드시 아버지 뜻대로 하셔야 됩니다.’라는 생각을 거치지 아니하면 율법에 접근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율법사가 율법을 몇 년 동안 공부했는지 모르지만 율법은 어느 한 구절 한 구절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조로 되어 있어요. 예를 들 테니 이해해 보세요. 지금은 동전 세는 기계가 따로 나와 있지만 옛날에는 아주 유치한 방법으로 했어요. 10원짜리 같으면 10원짜리에 맞는 홈을 파서 동전을 부어놓고 탈탈 털어서 채워지면 채워진 단위(백 개짜리 틀이면 천원)만큼 헤아려서 세었습니다.
그게 하나의 지형도를 이루지요. 동전모양의 홈, 혹은 골이 패인 거예요. 붕어빵 틀에서 붕어빵 나오고 국화빵틀에서 국화빵이 나오잖아요. 율법은 하나의 틀이고 지형도예요. 우리가 지키는 용도가 아니고, 붕어빵이 몸부림 쳐서 붕어빵모양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죠. 저도 한때 붕어빵 구워 봤어요. 기분 좋으면 앙꼬 많이 넣어주고 기분 나쁘면 앙꼬 조금 넣어서 사가는 사람의 운이다, 하면서 상인의 횡포도 부려봤습니다만, 이렇게 붕어빵 틀은 하나의 지형도가 되어서 그 안에 밀가루를 부으면 붕어빵이 되는 만큼의 밀가루만 그 틀에 차면 그 이상 넘치는 것은 다시 밀가루 통으로 돌아가요.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의 분류작업인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는 나다나엘처럼 구원받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려내는 하나의 틀, 하나의 지형도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지형도란 말이 무슨 말이냐, 어떤 지형이 있는데 그 위에서 물을 붓는다면 그 물은 자기의 갈 길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이런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 물은 저 아래까지 용기와 의지와 투지를 다해서 곱고 예쁘고 편하게 내려가리라.’ 이런 것이 물에게는 없습니다. 물은 그냥 골이 좁으면 좁은 대로 가다가 넓은 골이 나오면 넓게 퍼져서 가다가 낭떠러지 만나면 폭포가 되어서 떨어지고 그냥 지형대로 흘러가다 보면 제일 끝자락까지 내려가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줄줄 흘러가는 대로 가다보면 저 끝에 가보면 하나는 양이 되고 하나는 염소가 되고, 하나는 좋은 고기가 되고 하나는 나쁜 고기가 되고, 한쪽은 긍휼의 그릇이 되고 한쪽은 자비(긍휼)의 그릇이 되고, 이쪽은 천국가고 저쪽은 지옥에 가는, 그런 겁니다.
일방적이에요. 이 지형도, 위에서 물 부으면 그냥 흘러가듯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있는데 붕어빵이 이 붕어빵틀을 관리할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 쉬운 예를 들면 그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보고 ‘내가 이미 안다. 나는 너를 알거든. 네가 무화과나무에서 기도를 하든지 안 하든지, 나를 만나든지 안 만나든지 상관없이 나는 너를 알며 따라서 네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믿어야지, 영생 얻어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그게 아니야.’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흘러가게 하시는 대로 흘러가다보면 나중에 그 사람이 뭘 느끼느냐하면, ‘제가 이 율법을 지킨 적이 없고 율법이 유도하는 대로 저는 흘러갔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내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내가 지금 모든 것은 다 갖췄는데 뭐가 부족한 게 있어. 그것은 잃어버린 고향 같은 것, 내가 죽으면 천국 갈지 혹은 지옥에 갈지, 그것이 아슬아슬하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왕이면 죽어서 천국을 가야 하는데 천국에 보내주겠다는 곳이 교회니까 절에 가는 것보다는 교회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만든 게임이죠. 게임에서 필요한 것은 실천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한테 묻듯이 목사한테 묻는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영생의 개념이 잘못되었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자꾸 묻는 거예요. ‘무엇을 해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여기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날씨 이야기를 할 때 그냥 영생이나 천국이나 날씨 이야기, 예를 들어 날씨가 춥다고 이야기할 때 이것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제 3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주체가 딱 부딪히면 ‘날씨 보니 딱 네 성질하고 똑같다.’ 하는 것이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나다나엘이 예수님 만났을 때 나다나엘이 뭘 느꼈느냐하면, 그냥 놀라버린 거예요. 무화과 나무아래 혼자 있었는데 그냥 지나가시면서 다 알아버렸으니까.
‘대체 누구십니까? 날 아시는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렇게 놀라는 순간 두 번 다시 사람이 무섭지를 않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체와 구원자의 만남입니다. 사람이 무섭지 않다는 말은 사람하고 상대해도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제일 힘든 게 뭐냐, 사람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사람을 상대하면서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힘듭니다.
누구를 안 만날 수는 없어요. 누구를 만나는 것은 좋은데 누굴 만나더라도 예수님 지형도에 의해서 만나야 될 사람을 그냥 만난 것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아볼로, 게바, 바울 이런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볼로나 게바나 나 바울, 이들 중에 십자가 진 사람들이 누구냐?’ 그 말입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고 하는 거예요.
아무도 안 졌지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진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아볼로파가 있고 게바 파가 있고 사도바울파가 있느냐?’고 사도바울 본인이 이야기해요. ‘내 편이 왜 있느냐.’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게 있으면 안 되고 십자가 지신 분이 예수님인데 그런 것이 왜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자꾸 목사를 상대하고 사도를 상대해서 그런 거예요.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나한테 없는 미흡한 것을 상대방을 통해서 뽑아서 내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자기게임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저 사람만 하나 있으면 되겠다, 혹은 온전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행함이고 실천입니다. 이런 식으로 영생은 오지 않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에게는 있을 필요가 없고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야기한 것은 ‘너는 애초부터 영생나무에서 추방된 존재야.’라는 것을 통보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추방된 존재로서 영생이란 이미 물 건너 간 거야. 이제부터 영생이 너에게 있고 없고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만 제공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는 사람에게만.
자기 쪽에서 달란다고 덜렁 주는 것이 아니에요. 대전 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천국 가는 사람 중에서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사람은 한명도 없어요.’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는 공자, 소크라테스, 맹자, 석가, 예수 중에서 골라서 믿기 때문에 자기선택과 자기결정력에 의해서 누굴 선택해 버리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결정력을 다시 자기에게로 회수하는 것 밖에는 안돼요.
자기가 즐기는 게임에 불과한 겁니다. 자꾸 예수를 믿으라고 닦달을 내니까 예수 믿는 척을 해야 되니 믿는 척을 해주는 거예요. 예수 믿어주고 지옥가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리고 ‘네가 사람들 다루고 만나는 것이 참 힘들지? 그리고 그 사람들 만나는 와중에 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으로 인해서 상당히 괴롭지? 그 가운데 하나님 믿고 예수까지 믿으려고 하니 안 그래도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괴로운데 예수까지 만나는 사람에 추가되니 참 바쁘지? 네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 (그 다음에) 그런데 내가 그걸 다 알거든!’
주님이 이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생이 되어버렸어요.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영생이 우리에게 와서 ‘네가 교회에서 헛짓, 헛짓, 또 헛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무화가 나무 아래서가 아니라) 네가 보성상가 2층에서 하고 있는 것을 다 봤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생방송 하다가 끊겨서 애쓰는 것을 다 봤고……, 다 봤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내가 다 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이 뭐냐, 그 율법을 예수님 본인은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가? 우리는 율법 지킬 자격도 안 되고 지켜봐야 자기가 만든 조작된 영생을 소유하면서 ‘나, 영생 받았다.’ 하면서 억지를 부릴 인간이니까 그것은 안돼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지키는가?
인간은 아무리 율법을 연구해도 거기서는 자기 모습밖에 안보입니다. 뭐 하나 지키면 ‘나는 이것 지켰다.’라고 일기장에 써놓고 ‘1월 28일, 나는 율법 또 지켰다. 나는 왜 이렇게 착한 것인가. 1월 29일, 나는 기도하기를 지켰다. 기도를 빠뜨리지 않는 철저한 나 같은 신앙인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라. 2월 3일, 구정이다. 나는 제사 안 드렸다. 언제 내 믿음이 이렇게도 자란거지?’
거울에다 자기얼굴을 닮은 예수를 그려놓고는 그 앞에서 맨 날 ‘거울아, 거울아.’ 하면서 제사 드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봉헌하고 자기가 자기한테 경배하는 짓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지키는가,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원치 않은 쓴잔이 있어요. 그 쓴잔을 인간은 율법을 아무리 봐도 밝혀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쓴 잔, 그 쓴잔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니고 정말 지옥가야 마땅한 자기백성들의 죄를 자기에게, 율법의 정신, 지형도에 따라서 자기에게 몰려온 것을, 자기가 지은 죄도 아닌데 남이 지은 죄에 대한 그 모든 징벌과 채찍 맞음과 그 고난과 모든 저주가 예수에게 다 와르르 몰려온 거예요. 무슨 댐이 터진 것 같아요.
예수님에게 몰려온 그것은 자기가 택한 백성이 한평생 지은 모든 죄가 다 쏠려오는 거예요. 그 저주의 아우성, 그것이 마구 쏠려오니까 그 쏠려오는 그 무서운 저주의 무게, 그 무게를 보통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밝혀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냥 율법은 그저 지키면 되고, 뭘 하면 되고, 맨 날 자기가 지키니 하니, 그런 것만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저주가 온통 자기한테 뭔가 몰려온다는 것, 저주가 몰려와서 원치 않는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만 쏠리도록 만들었지 아볼로나 사도바울이나 베드로한테는 안 쏠리게 만들었거든요.
그 쓴잔을 주님만 마셔야 된다는 그것, 그게 바로 십자가인데 율법사는 그 십자가를 모르는 겁니다. 왜 십자가가 필요한지, 왜 십자가를 통해서만 영생이 주어지는지를. 그 이유는 애초부터 우리는 영생하고 무관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 높이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강제로 주입된 겁니다. ‘네 안에 있는 생명은 네가 실천에 옮겨서 얻은 생명이 아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서 이 예수님만이 주가 되셨다.’라는 그 내용이 삽입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비로소 율법이라는 것이 뭔지를 아는 거예요. ‘아, 율법이라는 것은 내 주장을 하면 안 되는 거구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는 물음조차도 의미 없는 거구나. 영생 얻을 자격도 못되면서 영생 운운 한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내 위주로 생각하면서 그저 남에게서 나한테 없는 것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었구나.’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나는 너를 알거든’ 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그 앞에서 우리라 하는 것은 그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담는 그릇으로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질문자체가 우리에게서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지금은 유행가를 거의 부르지 않습니다만 전에 불렀던 노래가운데 이 수미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기억이 나요.
바닷가 모래위에 얼굴을 그리는 거예요. 바닷가에 얼굴을 그리는 그 일은 매일같이 우리가 하는 거예요. ‘나는 이 부분이 미흡해.’ 하면서 조금 더 수정해서 얼굴을 그려보지만 바닷가로 밀려오는 그 파도는 매일같이 올라와서 우리가 그렸던 그 얼굴을 지워버려요. 한 번 지워지면 떡국 한 그릇 먹는 그 일 년이고 십년 지워졌으면 떡국 열 그릇 먹은 십년이에요.
한 90번 지워지면 90년, 나중에 죽으면 깨끗하게 지워지겠지요. 맨 날 자기 얼굴 그리고 지움을 당하고, 또 그리고 지움을 당하고, 우리는 그렇게 평생 동안 내 얼굴 그리는 헛짓을 하다가 볼일 다 보는 거예요. 여기다 천국 한 번 지어볼까,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그것도 날라 가야 돼요.
다만 한 소리 ‘나다나엘아, 나는 네가 누군지를 안다.’ 그 순간 나다나엘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모든 무거운 짐, 성경말씀을 지켜야 구원된다는 모든 무거운 짐, 내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모든 무거운 짐, 교회 나와야 천당 간다는 이 모든 무거운 짐, 목사들이 교회에서 사기 쳐온 모든 율법적인 그것이 다 헛짓하는 것임을 아는 겁니다. 예수 만난 적이 없으니 그저 교회 와서 자기 얼굴 한 번 그려보는 것, 기생들이 손님 없을 때 화투 패 놓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모래위에 그린 얼굴처럼 사라져도 주께서는 뻔히 다 아시고 그 사라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았던 그 용서, 그 나(주)의 용서를 증거 하라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자기게임, 자기도박에 빠져서 자기가 자기한테 투자하는 입장에서 무슨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되겠습니까?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하는가를 다 안다.’는 그 말씀 하나에 이제부터는 주님을 만나서 사람 만나는 그 모든 부담에서, 목사 만나는 부담에서, 교인들 만나는 부담에서, 마귀 만나는 부담에서 해방시켜 주신 그 십자가의 피만을 높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