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강-눅24장 36-43(나는 있느니라)1209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36절에서 4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41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4:36-43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라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니라.”
예수님께서 나타나기 이전에 제자들끼리 모여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말하기를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이미 예수님은 죽은 존재고 제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죽은 존재이기에 무덤에 있어야 할 사람이고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위해서 떠났는데 예수님이 안 죽고 우리와 동행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언급을 합니다.
그렇게 되니 제자들에게 뭐가 화제 거리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것이 화제 거리가 되고 말았어요. 여기서 우리가 잠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구태여 안 살아나시고 우리 기억 속에 그냥 훌륭하신 분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하고 그 다음에 사도들이 어떤 종교라든지 자기 사상을 전파할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되지요. 공자가 부활하지 않더라도 공자의 사상은 북한과 남한과 중국과 동남아까지 꽉 차 있고 부처가 부활하지 않더라도 실론, 인도, 동남아, 중국, 일본, 한국에 이미 점령이 되어 있고 마호메트가 꼭 부활하지 않더라도 아프리카나 서남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 터키 지역에 90퍼센트 이상을 점령하면서 종교로서 국가를 단합시키는데 훌륭하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단합에 역할을 했다는 말, 국가라 하는 것은 가정과 가정이 모인 거잖아요. 가정과 가정들이 모였다는 말은 이슬람교를 가지고 한 가정이 화목하게 마음을 일치했다는 말인데 가족끼리 마음이 하나 되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같은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정이 화목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내가 행복하고, 그러면 되었잖아요. 우리가 종교에서 뭘 더 얻겠다는 겁니까? 그것만 챙기면 대단한 것 챙긴 거잖아요. 우리가 무슨 욕심을 더 내겠습니까? 부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어떤 종교교주가 부활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감화 감동을 줄 수 있는 체제, 어렵게 말해서 그런 심적 구조가 우리 인간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좋은 게 좋잖아요. 너무 특이하게 나서면 거부감이 나타납니다. 만약 네 명이 한 가족이라면 넷 중에서 둘은 교회 나가고 둘은 가정행복이 성립이 안 됩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데 마냥 떨어져 있을 수는 없고 벌초도 해야 되지, 추석 때는 모여야 되고, 설날 때도 모이게 되는데 모여서 고스톱 치면서 안철수냐 박근혜냐 그 이야기 하다가 좀 더 나가면 기독교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어느 교회가 어떻고, 어느 교회 목사가 술집에서 술 먹고 있었다는 식으로 죽죽 나온다는 말이지요.
중들만 룸살롱 가는 것이 아니고 목사도 룸살롱 가서 합동 측 세 거두가 모여서 뭔가 했다, 그런 것이 막 나오는 거예요. 누구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 대구성명교회 누구라고, 광주신일교회 누구 목사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만. 그런 이야기에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는 스며들 여지가 없어요. 거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왜 스며듭니까?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모든 인간, 교회가 어떠니 비판하고 기독교가 이러니저러니 하고 불교가 어떻고 종교가 어떻게 대통령이 누가 되고, 그렇게 입에 씹는 재미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을 당황스럽게 그리고 입장 난처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제발 살아 있는 사람끼리 놀도록 놔두라는 말이지요. 우리 살아 있는 사람 끼리끼리 놀도록,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주께서 덜렁 부활하지 마시고. 죽으신 분에 대해서 제사는 잘 드려줄테니까. 제사 또는 예배라 하지요. 일요일 아침마다 제사는 정기적으로 잘 드려줄테니까.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시고, 떡이나 먹고. 옛날 조상은 떡이나 대추나 감 먹지만 교회는 십일조 먹잖아요. 그거나 먹으면 되었잖아요. 그만 되었고 그 다음에 우리 살아 있는 사람끼리 이상적이고 괜찮은 교회, 사랑과 희생과 돌봄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교회, 그것만 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만 해도 가정이 화목하지 않겠어요?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그런 식으로 종교 하나 만들려는, 사업이나 벌리려는 모든 것들을 적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되도 않는 발상임을 까발리기 위해서 부활하신 겁니다. 인간이 모여서 할 수 있는 것은 성만찬 세례식이지요. 인간이 모여서 할 수 있는 모든 것, 예배, 제사, 미사,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고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괜히 모여서 경건한척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진리라 하는 것은 끝에 오기 마련이에요. 시작에는 안 옵니다. 끝에 진리가 오거든요. 끝에 진리가 오게 되면 그 앞에 했던 모든 인간의 몸부림은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그 사람의 장례식에 가면 되지요. 장례식이 화려한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렇게 설치면서 천 년 만 년 살듯이 나대다가 결국 죽었다는 겁니다. 차에 받혀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벽에 받혀서 죽는 거예요. 그 죽음이라는 벽은 손톱으로 긁어봐야 그 벽이 구멍 나지 않습니다.
새가 새장 안에서 까불어봐야 인간 안에서 놀듯이 인간은 죽음이라는 그 새장 안에서 잘난 체하면서 찧고 까불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힘 빠지니까 죽음의 위력에 그냥 주저앉고 말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알려면 결혼식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전도서 7장에 보면 나와 있거든요. 결혼식이라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완료가 아니고 만료가 아닙니다. 그게 진실의 완료가 아니에요. 신랑신부가 둘이 만나 결혼했다. 신랑과 신부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둘이 만나는 것은 각자 처녀 총각으로 자기 집에서의 성장과정이에요.
둘이 만난 것은 결혼식에서 만났다고 해서 만난 것이 아니고 둘이 최종적으로 어디서 만나는가, 둘 다 죽는데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아하, 당신이라는 인간은 죽는구나.’ ‘당신도 만만치 않아. 당신도 죽어.’ 이렇게 죽음이라는 한 지점에서 비로소 신랑이 무엇이며 신부가 무엇이며 그동안 내 아내며 남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죽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는데 죽는 우리가 그동안 무슨 짓 했어, 물으면 글쎄 무슨 짓 했더라? 죽는다는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안 죽는다는 식으로 버티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 쓸데없는 짓을 했고 부질없는 오기를 부리면서 잘난 체하면서 서로에게 과시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어떤 의미에서 한 편으로는 제자들 입장에서 속 시원한 면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있었을 때는 자기들이 대장들이 아니잖아요. 대장 빠지니까, 사자 죽으니까 밀림에서 토끼가 왕 노릇 한다고 저희들이 대장질 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놀라버린 겁니다. 한 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래서 본문에서 뭐냐, ‘귀신이다.’라고 한 거예요. 부활하신 예수님보고 귀신이라 했습니다. 솔직한 이야기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 나타나면 ‘어, 귀신이다.’ 이야기한다 이 말이지요. 참 솔직한 거지요.
그 귀신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뭐냐, 본인들은 아직 귀신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본인이 누구인줄 모르는 거예요. 왜, 끝에 안 가봤으니까, 진실과 진리에 접촉을 안 해봤으니까 자기는 사람이라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 귀신 아니거든.’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네가 귀신이야, 네가.’ 귀신인자가 귀신 아닌 자 보고 귀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자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이 귀신 아닌 이유가 자기에게는 살과 뼈가 있다는 겁니다. 살과 뼈가 있는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방식으로 왔기 때문에 예수 당신이라는 인간은 분명히 인간 같은 종류는 아니다, 이렇게 평가를 내린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41절, 42절에서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먹을 것을 찾았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을 보고 중세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잡수시고 난 뒤에 예수님의 똥이 나왔느냐, 그걸 또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끼리, 우리 가정끼리, 우리국가가 단결되면 그만이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라는 데에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 필요치 않아요. 우리끼리 만족하고 우리끼리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데 있어서의 예수님의 부활은 거추장스럽지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한 것도 문제지만, 이것도 참 짜증나는 일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더 골칫거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만난 사람을 인간으로 쳐 줄 것인지, 우리 동네 사람으로 받아줄 것인지 배타시해야 될 것인지 그 문제가 남아 있거든요.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게 되면, 우리교회에 나타났다면 우리는 공포스럽습니다. 굉장히 무서워요. 본문에도 그들이 무서워했다고 되어 있어요. 굉장히 두렵습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이 이해하는 똑같은 사람의 모양새로 왔을 때는 전혀 이 스승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내가 내 본질, 진실, 항상 진실은 끝에 나타나니까, 십자가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진실 된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너희들이 두려워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평소에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어떻게 믿었다는 말인가, 그 믿음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기라는 말입니다. 네가 스스로 조작해서 스스로 믿은 것밖에 안되잖아요. 편하게, 내가 같이 인간들끼리 섞여서 밥 먹고 잠 자고 전도하고, 이렇게 편하게 대하지를 못하고 ‘아이고 무서워라. 어쩌면 좋아. 이럴 수는 없느니라. 이러시면 안 되옵나이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은 대체 그러면 너는 그동안 이 예수 나를 믿은 것이 아니고 네가 생각한, 네가 고안하고 조작한 그 예수를 자기 편한 쪽으로 믿는 척을 한 것뿐이에요. 가짜라는 말이지요. 믿음도 아닌 것이 믿는 척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뭘 믿는가, 자기 몸만, 자기 편한 것만, 자기행복만 믿어왔지요. 예수라는 것을 동원해서 자기만 믿은 거예요. 제가 안양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술과 이 복음, 말씀이 다르다고 했어요. 이 마술이라는 것은 뭐냐, 내 몸에서 나오는 어떤 기를 통해서 내 주변 상황을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조작해내는 것을 마술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현실이 잠시 위치를 바꾸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현실의 규칙이 잠시 바뀌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뽑아내는 식으로 현실을 조작해내겠다는 그 의지, 그런 기술이 마술이에요.
제가 그것을 마술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편한 용어로 바꿔버리면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서의 신앙이라는 거예요. 신앙은 곧 마술이에요. 중보기도에서 어떤 효과를 주게 되면 나에게서 나온 능력이 내 주변의 현실이 내가 원하는 질서로 잠시 되면서 나는 그것을 통해서 기뻐하면서 ‘야, 나는 신앙인이 맞다. 나는 주의 종이 맞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이 맞다.’라고 자기에 의해서 다짐을 하겠다는 그 기술,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성경을 다 쓸까요, 새벽기도 연속으로 나올까요, 십일조를 할까요, 이 모든 기술이 뭐냐, 현실을 내가 원하는 식으로 변경시켜 보겠다는 야무진 자부심, 또는 열성과 집착과 집요한 집념, 그것을 교회들은 ‘믿음이 좋습니다!’ 또는 ‘은사 받았네요.’ 또는 ‘성령의 역사입니다.’라는 식으로 유도해 줬어요.
왜, 교인들이, 오는 손님들, 고객들이 그것을 원하니까,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고객이 왕이니까 맞춰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에요. 그러면 복음은 뭐냐, 복음이라는 것은 그 따위 마술, 신앙이니 기독교니 복음이니 삼위일체니 온갖 좋은 이름을 다 끌어 들여서 그런 것 가지고 마치 참된 신앙이고 진리로 아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해서 내가 천당 가겠다는 야욕으로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희석시키고 엷게 만들고 깔아버리게 만들고 사라지게 만들어버리면서 떠오르는 십자가중심의 구조 틀, 말씀의 구조 틀,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구조 틀, 이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면 치킨 집에서 조리하는 것을 보면 생닭을 기름에 막 튀길 때 기름방울이 튀면서 튀겨지잖아요. 그럴 때 그 기름 안쪽이 굉장히 뜨겁지요. 주인장이 튀겨진 통닭을 들어내면 기름기는 쭉쭉 빠지고 위에는 후라이드 치킨만 남지요. 그때 그 틀이 있잖아요.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쇠로 만든 그 틀, 바로 그것이 복음의 틀, 말씀이 갖고 있는 틀입니다. ‘나’라는 것은 거기에 찾을 수가 없어요. 나의 희망, 나의 기대, 세상에서 내 가정은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나의 간절한 염원, 거기에는 그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튀겨서 삭제해 버려요. 성경에는 내 중심이라는 것을 용납을 안 합니다. 허용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제자들 구원받으라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44절에 보면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얘야, 제자들아! 내가 부활할까, 말까? 내가 너희 좋은 대로 할게.’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소망과 의견, 이런 것은 전혀 반영이 안돼요. 모세에게 남겨준 하나님의 모세언약, 약속이지요, 약속대로 순차대로 절차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이고 부활이고 승천이고 지옥이고 천국입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이게 굉장히 기쁘지 않습니까? 왜 쓸데없이 마술을 부리려고 해요? 마술이 안 되는데.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말씀은 인간의 몸의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말입니다. 말씀 틀에서는 인간의 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어려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것에 내 몸이 받쳐주지를 못하는 몸이 하나의 현실로서 옷 입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식으로 내 몸, 내 DNA가 안 따라줍니다, 그 이야기에요. 그리고 내 DNA 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DNA 도 마찬가지고 내 몸만 아니고 저쪽 몸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은 이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중요해요, 하지만, 나는 안 되지만 그 안 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도 내 몸은 노림수가 있는데 안 되는 것도 어떻게 되도록 좀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도 내 몸이에요. 이럴 때 우리는 불교와 비교해 보면 복음과 불교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는 것이 있어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
이런 식으로 죽 외웁니다. 외우기 싫으면 녹음기 틀어놓고 시주 돈만 받으면 그만이에요. 이 주문을 왜 하느냐, 주문 안에 들어 있는 그 세계에 내 몸이 일치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뭘로? 반복적인 주문, 언어를 통해서. 일종의 마술이죠. 이 세상은 너무나 고해가 많고 고통이 많고 괴로우니까 내 몸이 말하기를 ‘이 세상은 힘들고 나도 힘들다.’ 그러면서 내 몸이 말하는 것은 ‘내 몸이 원하기를 내 몸은 이것을 바란다. 내 몸은 편한데서 살고 싶고 이상적인 현실 속에 살고 싶다. 그 고상한 뜻을 내 몸아, 어떻게든 네게 이루어내라.’ 그게 바로 불교라는 것이고 그게 바로 마술이에요.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게 맞는 종교를 선택하고 채택할 자유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어떻게 보느냐, 그게 바로 신으로부터의 자유에요. 신을 섬기는 척하고 신에게 순복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신의 간섭과 고난마저도 탈출하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약간 고개 숙여주는 척 하는 거예요. 궁극적인 노림수는 있습니다. 그게 뭐냐, 신마저도 최종적으로 떨어버리기 위해서. 신마저도 귀찮아, 예수도 귀찮고 부처도 귀찮고 다 싫어요. 그래서 나머지 나 빼놓고는 다 귀찮아. 결국 나만이 신인 것을 우뚝 세우기 위해서 중간에 내가 이 세상현실과 일치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고상한 사람들을 만나서 한 수 배워서 나중에 어느 정도 익혀 놓고는 떨쳐버리고 내가 신이라고 외치고 싶은 이 자유성, 우리는 내가 나를 말릴 수가 없어요, 평생토록.
내가 나를 감당 못해요. 내 욕심과 욕망을 내 몸이 감당 못해요. 현실이 어떠냐 하는 것은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원한다, 나는 뭘 원한다, 그것이 나한테 중요한 문제지 네가 원하는 대로 현실이 안 된다는 그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소리를 내 귀에 들리게 하지 말라, 라는 식으로 우리는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고맙게도 예수님이 제자 분들이에요. 이런 속사정을 한마디로 외친 것이 뭐냐, ‘어? 귀신이다.’ 그 말입니다. 귀신이다! 주님은 ‘네가 귀신이다, 네가! 네가 귀신이야!’
37절에 보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의심이 일어나는 마음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우리의 마음은 의심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맞는 것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과연 그런가 하여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미 마음자체가 의심을 유발시키는 마음이 있기에 뱀이 와서 ‘한번 생각해 봐라.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 그것 따먹는다고 죽겠나. 네가 신이 될까 그것이 싫어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지 다른 사람 말을 한 번 들어봐라, 자꾸 고집부리지 말고.’ 그런 식으로 할 수 있고.
예수는 구름타고 온다 할 때 마귀가 와서 ‘구름을 탈 수가 있겠나? 예수님 몸무게가 70킬로그램이나 나가는데 구름이 받쳐주겠어? 구름타고 온다면 시차가 있는데 한국에 오면 그 시간에 미국은 어떻게 하는지, 그러면 구원도 시차적으로 받는가? 생각해봐라. 말이 안 되잖아. 지구가 둥근데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동시적으로 볼 수가 있겠어, 안 되는 거야. 한 번 생각해 봐.’ 항상 우리의 모든 의심은 내 몸은 진리의 중심이라는 것, 모든 현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이 몸 하나 잘되기 위해서 돌아간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내 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전부 다 비 진리로 간주하는 그것이 하나의 성격으로 굳어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해도 우리는 이렇게 듣습니다. ‘예수님, 그 말 지키면 뭐 주렵니까?’ 항상 내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거 지켜줄 테니까 나에게 뭘 줄 겁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참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가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37절에 보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이 대목이 있잖아요. 이 대목을 우리가 예수님 말씀부터 생각하지 말고 먼저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의 심정부터 먼저 이해합시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살과 뼈, 이것을 제자들은 육신이라 생각하고 그리고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누구를 좋아한다, 할 때는 이것은 사상이나 정신이잖아요. 그것을 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사랑은 무게도 잴 수 없고 부피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살과 뼈, 이것은 육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동물이나 기계하고 다르고 책상이나 걸상하고도 다르니까 책상 걸상은 영이 없지만 인간은 영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이라는 것은 뭐냐, 육신 빼놓고 나머지 인간 내 몸을 구성하는 그 여분의 잉여된 것, 그것을 가지고 영이라 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하는 그 생각과 오늘날 우리가 하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고 나서는 겁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아니야.’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 보기에 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것은 육이고 여기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영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영이 아니고 오히려 이 몸 따로 있고 영은 따로 있다는 그것까지 합쳐서 그것을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마저 육에 포함된다면, 그러면 영은?
영은 인간은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영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영이 그것이 영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영이 그 영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영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몸을 가지고 육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할 때 그 영이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육을 뺀 나머지가 영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줄때만 그것이 영인데 그 영은 주의 몸, 예수님의 몸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몸? 부활의 몸이에요.
이 말을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 못 알아듣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못 알아듣는다는 이 말은 이미 기존에 자기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고집이 있었던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은 뭐라 해도 밥 먹을 수 있고 뼈가 있고 살이 있는 이것은 육이고 여기서 나온 믿음이나 소망 사랑 같은 것은 정신의 세계이고 영의 세계다, 라는 이 생각은 포기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죽어라고 쥐고 있겠다, 라는 이 되도 않는 고집이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이 고집이 있는데 어떤 제자 둘이 와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의 부활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할 때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젯밤 꿈에 누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게 누구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괜히 그거 이야기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삐질 수가 있으니까요. 사모님은 우리 교회 교인들이나 생각하지 박사교회 교인들까지 생각하나, 이렇게 되니 누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꿈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꿈에 누구를 봤는데 혹시 그 중에 누구를 만나게 될까, 이러거든요. 그게 마술이에요. 보세요. 내 꿈에 그게 나타났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어떤 누구를 만난다는 그 현실은 내가 꾼 꿈 중심으로 그 순간만큼은 재편성되어야(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 나는 하나님과 관련성 있고 하나님도 나를 버리지 않고 사용하는구나, 이걸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내 몸을 아직도 포기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모님이 믿음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하나의 예를 든 거예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이 몸, 육신이 있는 이상 이 육신의 티를 팍팍 다 내면서 살게 되어 있어요. 육신의 티가 뭐냐, 꿈 꿔놓고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된다는 식으로 전부 다 내 중심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는 않습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예를 들었잖아요. 어떤 사람이 죽을 때 자기가 죽으면 관은 대리석으로 해 달라고 했다고. 죽어가는 판에 자기 관을 대리석으로 하든지 뭘 로 하든지 왜 관여합니까? 그럴 때 자식들은 안한다고 하지 말고 예, 해놓고 그냥 나무 관으로 하면 돼요. 죽은 사람이 벌떡 깨어날 일도 없고.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안 된다니까요, 주님은! 귀신인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지만 주님께서는 모세언약대로 살아나셔야 되기 때문에 그 후라이드 치킨 기름틀처럼 이 세상은 틀로 꽉 짜인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입장이기에 전부 다 우리 몸 중심이 아니고 전부 다 예수님 몸 중심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그 말려든 것을 신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려든 것을 신앙이라고 하고 나의 소망은 주님의 소망으로 대체되어 버리고 주님의 나라가 졸지에 내 나라가 되어버려요. 그 대신 나의 나라는 밟아야 돼요. 완전히 밟아버려야 돼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식을 자기가 만든다는 것. 간단한 문제에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자식을 만들어요. 고마운 점은 뭐냐 하면, 나밖에 모르는 이 육신을 가지고 천사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자기 자식을 만들어내요.
믿음 좋고 괜찮은 사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고 더럽고 치사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가지고 거기서 다지는 거예요. 요리할 때 칼로 마구 내려치잖아요. 우리교회 예배할 때 식당에서 점심준비 한다고 막 다지는 소리 나잖아요. 그 소리까지 녹음 다 될지 싶어요. 그렇게 다지게 되면 뼈가 다져져 버려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우리를 구원하는 후라이팬 틀이 나와요. 말씀의 틀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더러운 인간이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어요. 더욱더 더러워야 돼요. 이것은 막 사는 것보다 더 막나간다 지금.
우리가 더욱더 더러워야 돼요. 막 사는 정도가 아니고 지금보다 더욱더 더러워야 돼요. 그리고 성령께서는 다지고 다지면서 우리는 놀라고 또 놀라야 됩니다. 주님께서 살아 있는 것을 감 잡고 또 놀라야 됩니다. 나는 내 몸 중심으로 버티려고 했는데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에 나오는 예언대로 주께서 일을 진척하다 보니 나는 거기에 재료로 들어간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형제, 천국의 백성은 이렇게 다진 고기를 가지고 다지고 또 다져서 거기서 죄라는 것이 나와요. 죄가 나오고 그 죄에 예수의 피를 섞어서……, 이게 완전히 천국 래시피 라고 할 수 있지요, 이걸 섞어서 천사보다 귀한 천국 백성을 만듭니다.
그렇게 래시피대로 만들어진 그 자녀는 면류관도 반납해 버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치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까불더라도 천국 가서 자기 면류관 쓰고 주님 보좌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주님 제가 면류관 쓰니 자태가 잘 나옵니까, 이렇게 까불어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국교회나 전도 많이 했다고 까불고 다니지 진짜 천국 가는 사람은 까불 수가 없어요. 까불 수는 없지만 까불지요. 내가 안 까불고 싶어도 내 몸이 나의 대체물이 아니니까 내 몸은 내 몸대로 놀고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놀아요. 그러니까 늘 까불어요.
그래서 우리는 알아요. 아이고, 까불이. 우리는 알지요. 로마서 7장 17절, 18절에 그 까불이가 나옵니다. 18절에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 속에 괴물, 짐승이 들어 있다는 그 말이 아닙니까? 그것을 누가 안다? 내가 아는 거예요. 왜? 주님의 모세언약, 선지자언약이 하나의 틀로써 말씀의 구조로 들어 있어 버리니까,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와버리니까 ‘누구야, 그리스도 몸을 이렇게 죽인 자가 누구야?’ 할 때 ‘저요’라고 손 들 수밖에 없어요.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고 내가 나한테 답변하는 거예요. ‘누구야, 예수의 몸을 죽인 사람은? 예수의 피는 누구 때문에 흘렸는데?’ ‘이 까불이 제 몸 때문에 흘렸습니다.’ 이 대화를 본인 안에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이 로마서 7장처럼,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꿈을 꿔도 내가 얼마나 내 중심으로 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실제 현실로 박사교회 교인중의 누구를 만나게 될지, 하고 그런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처럼. 어떤 분은 말하기를 꿈에 남편감이 있다고 하니까 돈 주고 사고 싶다는 거예요. ‘얼마면 되겠어?’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어요,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예수님이 죽은 분으로서 살아나는 것, 그러니까 살아났다는 것은 ‘너라는 존재의 이유는 나를 죽게 만들고 사흘 만에 부활하게 만들기 위해서 너는 거기에 래시피대로 그냥 들어온’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우리는 오히려 기뻐합시다. ‘아, 주님의 말씀의 구조에 이미 편입되었구나.’ 하는 사실을 보고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그리고 우리는 평생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 밖에 모르는 인간으로서 편입되었기에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문장, 그 문장을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을 대체해 버리는 겁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을 이 까불이인 내가 지키려고 설치다가 그것마저 그것이 예수님 죽이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을 ‘죄인 이리와’ 해서 그것도 주님이 불러주고 ‘너 의인되게 했다. 다 이루었다.’ 하는 것도 주님의 말씀의 이루심, 십자가의 피에 근거해서만, 그리스도 몸의 자기 죽음에 근거해서만 우리에게 그 대체능력이 발휘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라는 거예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우리 육체 따로 있고 몸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몸과 그리스도 몸을 비교시켜서 내 몸은 자기 잘난 체 하는 것밖에 모르고 주님은 그 잘난 체 하는 것 때문에 계획 잡힌 대로 죽으셨다는 그 사실, 피 흘리셨다는 그 사실을 엮으면서 성령께서는 역사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말합니다. ‘네 마음대로 한 번 까불어봐라.’ 연세 많은 분은 까불고 싶어도 얼마 안 남았어요. 연세 60이어도 한 삽 십년밖에 안 까불었는데 나중에는 힘이 없어서 까불고 싶어도 못 까불어요. 한 30년 까불어도 제법 까불 수 있습니다. 어린애들은 한 80년 까불 수 있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다지고 또 다지고 그렇게 다져주셔야 되는데 다진 그 속에 다 뜯어보니까 뭐가 들어 있어요. 이게 뭐지? 보니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말씀이 나옵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는 죄의 법을 섬긴 것이 우세했고 영, 정신이라는 것은 내 육한테 당하지를 못해요. 내 죄한테 내가 당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8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이미 그것을 익히 아시고 그것을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몸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해요.
나밖에 모르는, 죄밖에 모르는 우리 몸이 ‘아이고, 그래 봐줄게.’ 그것이 아니라 그게 꼭 필요했다는 겁니다. 누굴 위해서? 그리스도 몸이 하시는 그 업적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했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도 주님께서 천국에 데려갈 이유가 생겨버린 겁니다. ‘나 너 놓치고 싶지 않아. 네가 있음에 내가 주 되는 거야. 네가 있음에 내 은혜가 더욱 더 은혜답게 되는 거야.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대상자로 나는 너를 데리고 가야’ 되는 거예요. 그걸 주의 몸의 지체라고 하는 겁니다. 머리를 위해서 지체가 존재하는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얼마나 불평을 해 댑니까? 불평이라는 것이 뭐냐, 자기 마술실력이 영 한계에 이르렀다, 그 말이거든요. ‘주여, 헌금 원하십니까? 헌금 해 드리지요. 남들 헌금 잘 안하는데 제가 혼자 합니다. 이래도 제 뜻대로 안 해주시겠습니까? 기도는 안하냐고요? 기도 제가 빡세게 해 드리겠습니다. 새벽기도요? 그것도 해 드리지요.’ 마치 유대인들처럼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나는 죄인이라고 외치는 짓들을 하는데 사실은 마술을 통해서 내가 믿는 사람임을 확정해 보려는 어설프게 짝이 없는 그 까불이, 그것마저 하나의 육입니다.
성령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이미 드러나 버린 그 끝에 있는 그 진리를 위해서 우리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흔쾌히 그리고 고맙게, 범사에 감사하고 즐겁게 자기 몸을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전에는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구가했지만……, ‘하나님마저, 이젠 예수님마저 귀찮아.’ 나는 나로 인해서 즐겁다는 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었는데 그것을 주께서는 고맙게도 날마다 죽이는 죽음을 통해서 그 발목을 잡아주시니, 이 철없는 나를 죽음이라는 확실한 진리로서 완벽하게 잡아주시니 그 죽음마저……, 나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죠, 나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이 함께 죽는 그 죽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내가 바로 귀신처럼 살아온, 마귀의 앞잡이로서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사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두려운 것이 없다는 말은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뭐 부러운 것이 없어요. 어떤 누구보다도 고귀한 신분으로서 산다는 것, 날마다 죄를 짓는 고귀한 신분, 앞뒤가 안 맞아 보이는 모순되는 이것,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일어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밖에 모르면서, 주님생각 해본적도 없으면서 행운은 잔뜩 기대하는 어설픈 육적놀음에 저희들이 평생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미리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바라보면서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 황공스럽게 다가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