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10625a 누가복음 6장 32절(예상)-이 근호 목사
오늘은 209페이지 다니엘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 209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그렇게 되어 있죠.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인간,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주체성, 그 다음에 역사, 역사라는 개념. 만약 인간이 없다면 주체성 없게 되고, 역사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다 없애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하실 일이에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인간 없애고, 인간 없애면 주체성 없고, 주체성 없으면 역사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거 다 없애는 거에요. 인간, 주체성, 역사 다 없애는 겁니다. 없앤다는 말은, 이 세 가지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게 자아에서 나왔거든요. 자아, 나. 나에서 나왔다. 내가 나를 보면서 인간이라고 하고, 인간이 만들어졌으니까 나는 어떻게 하느냐, 나는 어떤 존재냐 하는 주체성, 그리고 그 주체성이 역사를 만들 때 여기에 뭐가 들어가냐 하면 노동을,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노동이 힘든 이유는 일이 힘든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여기 뭐가 들어가서 인간을, 자아를 힘들게 하느냐하면 예상을 하기 때문에 힘든 거에요. 인간이 노동하면서 예상 없이 노동하는 거 봤습니까? 반드시 요거 하게 되면 요거 얻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죠. 예상하는 것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거에요. 예상한다는 것은 과거에 내가 이렇게 기대했는데. 자, 과거 나오죠. 지금은 현재고, 미래는 내가 여기에다가 노동을 투입했으니까 투입한 성과만큼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예상하고 인간은 일을 하는 겁니다.
노동이 일이죠. 주께서 이거 다 없애죠. 주체성, 노동, 이거 다 없앱니다. 역사도 예상하니까 다 없애버려요, 허구죠 허구.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건 자아를 없애면 한꺼번에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 자아가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을 못해요. 생각을 못하고 일단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 있는 나가 예상을 하는 거에요. 내 노동, 노동이라고 표현했는데, 행함 또는 행동, 일 다 같은 말입니다.
자, 내가 노동을 하고 이렇게 예상하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노동하게 되면 그 결과를 예상하기는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없애는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언약, 즉 약속이죠. 약속을 이 땅에 보내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제일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이 땅에 들어왔다는 게 참 신기했어요.
하나님이 이 땅에 들어와서 지하철 탄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백신 주사 맞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거리에 두리번거리고 구경 다니고, 하나님이 식사 같이 하고, 잠 오면 밤 되면 주무시고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에요? 하나님인데, 그냥 하늘에 계시면 되는데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오신 거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섞였다고만 생각하지, 오셔서 어떤 변화, 바꿔치기 하는 거, 어떤 일으키는 변화가 뭔 줄을 모르는 겁니다.
그것은 없애는 겁니다. 오셔서 하시는 일이 자아 없애고 이거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주님께서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거, 그게 전부 다 이걸 없애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언약이 언약대로 구현된다, 또는 성취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문지영이라는 여자 분이 있는데, 나이가 서른 됐나 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피아니스트에요. 잘 못 들어봤죠? 조성진, 임동혁, 임동민 이 사람들은 유명하죠? 문지영, 이 사람은 잘 못 들어봤을 거에요. 아버지, 엄마가 1급, 2급 장애인이에요. 굉장히 가난해요. 한 달에 80만원 최저생계비 받고 살아가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사람이 2015년도 busoni 스위스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콩쿨에서 15년 동안 우승이 없었어요. 그 콩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1등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1등은 안뽑고 2등만 뽑는 그 대회에서 15년 동안 비어있던 1등을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사람이에요. 거기 말고도 유명한 콩쿨에서 우승했는데, 어릴 때 일곱 살 때 집에 피아노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회나 근처 학원에 가서 아이가 사정을 하는 겁니다.
처음에 피아노 알 때는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은데, 자기 집에는 피아노가 없으니까 건반을 그림으로 그리고, 휘파람을 속으로 불면서 손가락으로는 치고 이렇게 피아노를 자습하는 거에요. 나중에는 커서 교회 같은데 부탁해서 하루 6시간씩 연습했는데, 이때 이 사람 별명이 참 중요해요. 별명이 뭐냐 하면,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가 집에 피아노가 없어요.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어요. 그러면 유대인은 뭐냐, 하나님이 있는 유대인이 돼요. 하나님이 있는 유대인. 그 하나님이 있는 유대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이 있으니까 자기 주체성과 역사를 접지를 못하잖아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있으면 뭐가 둘러싸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시간과 공간의식 속에 인간이 둘러싸여 있는 거에요. 하나의 캡슐처럼, 풍선 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 시간이 역사죠. 공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출신, 내가 어디 출신이다, 이걸 갖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야 인간의 자아가 구성이 되고, 유지가 되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는 하나님으로 오신 거에요.
하나님 없는 하나님. 하나님 없는 하나님에다가 뭐 하나를 또 추가하느냐 하면, 인간 없는 인간을 또 추가해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로 인간과 하나님 모두를 인간의 주체과 객체 모두를 예수님 하나에 다같이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 말은 이 땅에 인간도 없을뿐더러 자아도 없고, 역시 하나님도 없는 셈이에요.
하나님이 없는데 인간들이 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요청하는 겁니다. 요청하는 거에요.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질문할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아 하나님께서 만드셨구나. 내가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정할 수밖에 없어요, 나를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과 하나님이 되셔서 기존의 하나님도 없애고, 인간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 같은 인간 없고 하나님 같은 하나님 없다, 이렇게 설명이 되거든요.
물줄기를 한번 상정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처음에 물이 가득한 데서 물줄기가 흐르면 내려오면서 물이 퍼지겠죠. 물줄기가 퍼진단 말이죠. 그렇다면 처음에 내려오는 한 물줄기가 아무리 가짓수가 벌어져도 전부다 한 줄기에서 나왔죠. 이거 굉장히 쉬운 말이죠. 어렵지 않잖아요.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하나님을 가지고 물줄기 삼아서 지상으로 내려 보내 버리면 이게 언약이 돼요. 언약.
언약 안에는 진짜 인간, 진짜 하나님이 다 들어있는 거에요. 진짜 인간, 인간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자아죠, 자아. 그래서 진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다면, 진짜 자아도 예수님이라는 그 분, 그 참된 인간의 자아만 하나님께서 인정합니다. 그러면 지상에 있는 여러 가지 자아들이 있잖아요. 온갖 우리를 포함한 자아들, 이 자아들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그들의 자아를 인정하고, 긍정하면서 신, 곧 하나님이죠. 하나님과 기어이 만나려고 애를 쓰는 거에요.
하나님께 잘해보려고 여러 가지 말씀으로 애를 쓰겠죠.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을 검다고 합시다. 예수님의 검은 자아가 위에서 내려와 버려요, 위에서 내려와 버리면 이 자아와 이 자아가 충돌이 되지요. 이 예수님의 자아가 우리 자아를 문제 삼는다, 또는 시비 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문제 삼는 거에요.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겁니다. 네가 말한 자아는 원래 없는데 너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지? 너 어디서 나온 거야? 라고 질문을 던지는 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2,33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죠. 여기에 누가 나오느냐하면 너희가 나와요 너희. 우리 인간 보고, 자아들 보고 너희라 합니다.
너희, 자아들. 자아+자아+자아들이 되겠죠. 자아들에게 뭐라 하느냐하면 '너희들아 내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약속으로 한번 너희에게 문제 삼는다' 문제 삼는 거에요, 약속으로. 너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면, 이것은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는 거에요. 죄인들도 그 정도 수준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실컷 저희들끼리 좋다, 좋다 했는데. 죄인들이니까, 죄인들은 죽으면 어디 갑니까? 지옥가죠. 지옥 가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할 줄 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너희 유대사회의 자아들이 하나님 만나서 천국에 가겠다 하는 사람들은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죄인들도 할 수 있는 그것보다 더 많이 해야 되겠죠. 저 사람이 내게 안잘해줘도 내가 잘해주는 그 정도까지 나가야된다, 이 말이죠. 그렇죠? 그러면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한다, 못한다 판정을 누가 합니까? 자아가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산상설교 등 말씀을 가지고 이 자아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판정하는 그 기준, 자아가 만든 기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옳다, 그르다를 판정하는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거에요, 시비거시는 거에요. 저 사람이 내게 못해줘도 나는 누가복음 6장 32절처럼 잘해줄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인간의 생각으로써. 그런데 잘해줬다, 못해줬다는 기준이 뭡니까? 못해줬다 잘해줬다 기준을 누가 정했어요? 본인이 정한 거에요, 본인이. 본인이 정한 거라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제가 정한 그 기준이 잘했다 못했다 기준인데, 내가 제대로 기준 정해서 한번 따져볼까 이렇게 나왔을 때는 아무리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사랑해도 무엇의 한계를 못벗어난다? 자아의 판정이라는 한계를 자아가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제가 정한 한계를 제가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걸 문제 삼는 거에요. 시비 거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 당신은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가?
자아? 내가 할게. 하나님? 내가 할게. 내가 하려면 시비 걸어서 인간의 한계가 ‘아, 나는 자아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자아 노릇 못하면 아까 세 가지 얘기했죠. 내가 인간이라는 것도 인간이 아니올시다, 그 다음에 주체성, 이것도 아니고, 거기서 나온 나의 예상, 나의 노동력의 효과, 결과, 기대 이런 것도 하나의 뭐냐 하면 다 허빵이고 허구에 불과한 거에요,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다 허구에 불과한 거에요.
주님께서는 내가 알아서 할게. 왜? 너희들 생각하기에 나는 뭐냐 하면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니까. 따라서 너희들이 말하는 인간도 없고, 너희들이 말하는 자아는 없고 너희들이 말하는 하나님도 나한텐 없다 이 말이에요. 오직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 문제가 곧 답이 돼 버렸어요. 문제 풀어라가 아니라 문제 자체가 곧 답이에요. 그 앞에서 풀 생각해선 안돼고요.
옛날에 초등학교 때 많이 했잖아요. 머리 좋아진다고 암산. 75492전이요, 42359전이요 플러스 얼마 하잖아요. 그러면 수판 들고 계산하잖아요. 그 계산 하지마! 그러면 뭐하느냐? ‘75492’ 그게 답이에요.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가 답이 되는 거에요. 그 플러스에서 어떤 값을 내는 거, 그 값에서 인간은 탈락이란 말이죠. 인간은 값을 내면 안돼요. 인간은 내가 뭘 한다는 그 자체가 있지도 않은 자아가 그 짓한, 허구적인 것이 허구적인 결과를 냈다, 그게 답이에요.
주욱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없다, 이게 답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없어요. 역사고 뭐고 나는 나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언약은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잖아요. 나는 없어요. 없음으로 가게 만들고 죽음으로 가게 만드는 거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은.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이게 별로 어려운 말은 아니에요. 자, 인간은 자아가 있죠. 인간이 자아라 우기는 게 있죠. 자아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쉽게 ‘나’ 라 합시다. 나를 표현할 때 나는 남자냐 여자냐, 노인이냐 소년이냐 이렇게 구분한단 말이죠. 또 나는 이 나라 국민이냐, 이방인이냐 구분되는 거에요. 잘산다, 못산다 이렇게 구분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 남녀, 노소, 건강하다 아프다 이런 게 있더라도 이런 것들이 나에게 색깔을 입히는 거에요. 왜 색깔을 입히냐 하면 내가 나답게 나의 정체성,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여자인데 남자 옷 입고, 남자인데 여자 옷 입으면 자기 정체성이 남들 보기에 혼란을 일으키잖아요. 내가 누구라는 것을 남에게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그 사회가 요청하는 나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색깔을 입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색깔을 한번 지워보세요. 남자, 여자라는 이걸 한번 지워보잔 말이죠. 지워버리고 내가 나이가 뭐 스물다섯 살 먹은 애가 1급 공무원이라고 하죠? 그러면 또 ‘나이가 정치합니까? 20대는 정치하지 말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죠. 전부다 나이문제잖아요. 나이도 없애버리세요. 몸이 건강하다 아프다 이것도 없애버리세요. 육체에 관한, 키가 몇 센티냐, 키가 2미터 10센티냐 그런 것도 없애버리세요.
색깔을 지워버리면 남는 게 뭐냐? 남는 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물컹한 순두부> 순두부가 색깔이 하얘요. 만지면 고체인지 액체인지 구분 안되게 물컹 들어가는 거에요. 고정형태가 없이 무너지는 거, 저는 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할 때 이게 적절하다고 봐요. 고체도 아닌 것이, 액체도 아닌 것이 뭔가 이상한데 이게 사회적인 요거 하나 색깔 입혀놓으니까 뭐인 것 같아요. 치마 입으니까 여자 같애. 그런데 여성에서 여성성을 빼보잔 말이죠. 나이 36살이다, 56이다. 56을 빼보자 말이죠.
장로님 나이 70 떼버리시면 뭐가 남습니까? 나이 70얼마 떼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지금 장로님 70초반이잖아요.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나만 남아요. 아무것도 없는데 나만 남는다고요. 아무것도 없는데 이거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괴물이 왔냐, 유령이 어디서 튀어 나왔냔 말이죠. 이걸 문제 삼고 지적해 들어가는 거에요. 나가 없어야 되는데 이게 왜 생겼냔 말이죠, 나가 없어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이게 수상하다는 겁니다.
손에 쥐면 물컹한 순두부에 불과한 이것이 갑자기 옷 입고 학교 교육받고, 나는 뭐 고등교육 받았다 하니까 갑자기 뭔가 사람인양 대우받아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들을 하고 있는 거에요. 도대체 나라는 게 없는데 나라는 게 어디서 나오느냐? 이것을 주님께서 규명을 하시는 겁니다.
이걸 여기 논문에서는 짐승이라 하죠, 악마에요. 악마, 짐승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노동이 서글픈 것은 예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서글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몸 피곤한 건 기본이고, ‘그래, 힘들지만 나중에 월급날 돈 나오잖아.’ 예상합니다. ‘참아야지 뭐. 서글퍼도 참아야지.’
그런데 자아라는 게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주님께서는 이걸 없애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 자아들을 가마솥에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에요. 자아들, 복수를 '자아' 하나로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A4용지를 하나 준비했는데요. 화살표를 길게 그렸습니다. 이걸 화살표 처음지점과 끝 지점이 맞닿게 동그랗게 말아볼게요. 그러면 시작한 것이 어디로 갑니까? 결국 시작한 처음 지점으로 오지요.
인간이 처음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누구밖에 없었습니까? 나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밖에 없었죠. 그걸로 됐잖아요, 충분하잖아요. 처음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그러한 존재로만 인간이 태어난 겁니다. 자아가 영원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학교 선생님들은 알지만 인간의 자아들이 어떠냐? 자아들이 오글오글거리고 굉장히 시끄러워요.
예를 들어, 옛날 국민학교에 애들이 많아서 복도가 길어서 4학년 복도가 12반까지 있었다면,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에 한번 가보세요. 가보면 막 떠들거든요. 4학년 11반에서 10반 갈 때, 그때는 조용해요. 다시 10반 가면 또 떠들어요. 많은 미꾸라지 같은 오물오물한 자아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그 쉬는 시간에 막 이야기한다고요, 제가 잘났다고.
그리고 통성기도 할 때 한번 보세요. 웬 자아들이 그렇게 들끓는지 ‘주여 믿습니다.어쩌고..’ 되게 시끄러워요. 시끄럽다가 목사한테 마이크가 있으니까, 그게 권위 아닙니까. 마이크 있잖아요. '주여, 할렐루야' 하면 다 조용해져요. 자기가 마무리 기도하면 되죠. 자기가 유일한 자아이기 때문에. '다른 자아들 죽어, 너희들. 꿇어, 다른 자아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우리 자아를 문제 삼기 위해서 오시는 겁니다. 꼴좋다. 잘 노네. 네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너희들 예상 많이 했지, 그렇지? 내가 너희들 자아가 어디서 왔는가, 수상한데서 왔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너희들답게 심판해줄게. 저주해줄게 하고 주님께서 이 땅을 어슬렁거리죠. 죽죽 다니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 논문의 210페이지 봅시다. 210페이지 밑에서 열한 째줄.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 우리는 천국에서 쫓겨난 공동체‘ 라는 것을 그 유대 공동체가 스스로 자기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이게 인간 자아의 한계입니다. 자기를 자기가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근원적으로 증명 못하면서 그저 우기기만 하는 거에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 구원을 보장해주세요, 이런 식이에요. 여기 있는 게 뭐 자랑인가?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난 걸 큰 자랑으로 여기는 거 같애. 뭐 벼슬 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내 구원을 보장해 달라 또 예상하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행함이죠, 노동이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구원해달라. 또 예상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상은 이미 끝났어요. 이 화살표는 이미 오신 대로 가버립니다. 주님께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주님께서 관통해서 그냥 주님께서 일을 쫙 하고 전람회, 미술관가서 관람하고 그냥 집에 가요. 한번 둘러보시고. 끝났어요.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로 시작해서 주께로 돌아가요, 끝났어요. 주님만이 자아고 그 외에는 자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건 자아가 아니고 허빵이에요, 허빵. 허구란 말도 아깝다. 허빵이에요, 허빵.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기껏해야 나를 둘러싼 사회성, 이것만 자꾸 만들어내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네가 만들어내는 것과 내가 준 것하고의 차이를 알라는 거에요. 네가 만들어 낸 것, 자꾸 만들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아까 누가복음 6장 보셨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너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만 잘해주게 되면 그건 누구도 그 짓한다? 죄인들도 그 짓하죠.
그러니 네 실력으로 내가 죄인이라 규정하는 규정에서 네가 벗어날 재주 있거든 네가 한번 몸부림쳐봐라. 벗어날 재주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주님께서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규정에서 인간은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이미 율법 자체가 죄인은 이렇다고 규정했으면, 그 죄인 규정에 해당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도 우리는 주님이 정한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재료나 어떤 능력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도구가 없어요.
자, 여러분들이 잠시 예수님이라 칩시다. 여기 논이 있고 방금 모내기 끝내서 논에 물이 많아요. 논두렁이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되어서 한 번 걸어봅시다. 여기에 개구리가 울겠죠. 특히 밤 되면 더 울죠. 개굴개굴 시끄러워요. 이쪽에 가면 이 쪽 나라에서 개굴개굴 일본. 이쪽 미국에 가면 개굴개굴, 아파트 무너졌다고 개굴. 러시아 가면, 북한 가면, 온 천지에 자아들의 개구리 우는 소리, 자아가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그런 사회성 가지고 다투는 개구리의 울음은 주께서는 듣고 그냥 가버립니다.
다시 209페이지 봅시다.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세상 관’ 정립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을 구성하면서 결국 자기 존재 가치를 향한 주체적 의미로 귀착되기 때문에, 이것이 왜곡된 해석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인간의 역사관을 공격하고 늘 위기와 종말로 몰아세우는 묵시적 작용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메시아를 세워놓으셨는데, 그 분의 ‘인자로서의 기능’을 다니엘에게 주어진 70이레의 계시와 관련지어 파악해 본다.”이게 바로 한글 초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 현장에 앉아있던 교수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을 거에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그들의 말을, 그때는 놀리는 걸로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를 가지고 인간을 개조하려 하거든요. 지금 안좋은 인간을 그들은 신학자니까, 또는 목사니까 인간개조에 나서는 거에요, 인간개조.
아까 우리가 공부한 거 한번 봅시다. 정리하면 인간은 자아가 중심에 있는데 그걸 뭘로 둘러쌌다 했습니까? 사회성으로 둘러싸여 있죠. 인간은 사회성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면 둘러싸여 있는 안을 자아라 하고, 바깥에 둘러싼 것을 주체성이라 합니다. 안에는 자아성이고, 자아성을 주체성으로 둘러싸는 거에요.
주체성은 뭐가 있어야 돼요?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이게 나와야 되죠.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나이가 적습니다, 나는 늙었습니다, 나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안가졌습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아픕니다, 나는 직장이 뭡니다. 이게 전부 다 사회성이고 주체성이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짓을 했단 말이죠. 그러면 신학교 교수나 목사들이 그 사람이 교회 왔다 하면 이 목사가 뭘 해야 되냐 하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주체성이 질이 떨어지니깐 질 나쁜 주체죠. 남한테 해코지하는 주체성이니깐, 이걸 남에게 도움 주는 성경말씀, 산상설교 같은 거 그 시대에 옮겨가지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인간개조에 나선단 말이죠, 인간개조에.
그 신학자나 목사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하죠. 교회가 그거 말고 다른 노림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인간개조 해줬다고 고맙다고 돈 받고 하잖아요, 커미션 받고. 그런데 주님이 와서 이 주체성을 건드려 버리면 전부 다 암반층이 나타나요. 그 사람이 분명히 개과천선해서 술 끊고 담배 끊었는데, 결국 모든 자아성을 위에서 이렇게 언약으로 건드리니깐 어디에 닿아도 뭔가 딱딱한 암반층이 나와요, 암석처럼.
이게 뭐냐 하면 자아 자체가 수상한 거, 문제가 있는 거에요, 자아자체가. 인간개조 했는데 뭐는 안 뚫렸어요? 자아는 드릴로 뚫리질 않는 거에요. 자아는. 어떤 경우라도 자아만큼은 인간개조, 인간성, 신학 같은 거 ,철학 같은 거, 윤리, 도덕이 전혀 먹히질 않는 거에요.
선생님들 학교에서 많이 경험한 거죠? 아버지한테 얻어터지고 학교 가면, '너희 아버지 나쁘나?'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술만 안먹으면 착해요' 그러죠. 술 먹는다, 안먹는다, 사회성이죠. 사회성을 제껴 버리면 어떻다? 그 바탕은? 착하다는 겁니다. 착하다는 말은 제발 사람이라고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 자신이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체 인정할 마음이 없어요.
누가복음 6장 32절에 지금 기준이 다르거든요? 내가 저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기준과, 주님이 보시기에 잘해준다는 기준이 달라요. 모든 율법, 모든 이웃사랑, 모든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기준이 달라요.
여기 인간이 있습니다. 보통 인간들, 인간들이라고 하지만 오늘은 '자아들'이라고 하죠. 인간의 자아들과 그리고 주님이 보시기에 잘 대해주었다, 누구에게? 원수에게, 또는 타인에게 잘 대해 주었다는 기준이 주님이 원수에게 잘 대해주는 것과 인간이 잘 대해주는 게 달라요. 주님은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이게 모든 율법의 완성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것보다 인간에게 잘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이게 제일 잘하는 거에요.
그러나 인간의 사회성에서 인간들은 인간이 자아가 있고, 사회성으로 둘러쌌다 했죠. 기억하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해줬다, 못해줬다는 것은 내 사회성을 키워주면 잘한 거고, 내 사회성에 흠집을 내면, 이건 못해준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이런 공식이 나옵니다.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가 진정 꽃보다 아름답다> 이 사회에서는 저런 사람이 최고입니다. 사람은 속아도 돈은 속지 않습니다.
아휴, 당신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돈을 봉투에 넣어서 ‘사랑해요’ 이거는 찐찐찐짜에요. 돈은 안속아요, 사람의 말은 다 속아도. 그래서 특히 회사에서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그 사람만이 진짜 그 직장에서 원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순수하게 복음 아는 사람이 취직 못합니다. 했다가도 뛰쳐나와요, 뛰쳐나옵니다. 이 사회는 나의 개조를 원하는데, 어떤 개조냐 하면 '너도 부자처럼 인간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느냐? 그럼 널 채용할게. 너를 취직 시켜줄게' 그걸 요청하는 사회에요, 이 사회가.
이게 더럽다고 해서 피해 다니죠. 우리 아는 사람도 그랬는데. 취직 하라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계속 안하는 거에요. 그리고 집에서 술만 드시는 거에요, 우리 아는 가까운 분 중에. 이 회사는 이래서 인간성 더럽고, 저 회사는 저래서 근로환경 안좋고, 저래서 안좋고 이래서 안좋고.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아.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다는 거에요. 나는 이 세상은 이해 못할 만큼 너무 정의롭고 진실해서 세상이 나를 못 알아준다. 지금부터 50년 후에만 태어나도 내가 이런 수모를 안당할텐데, 하면서 계속 술만 잡수셨어요. 내가 목격자니까요, 우리 집안사람이니까.
술만 맨날 마시면서 세상 탓 하는 거에요. 그것도 신문 보고 이거 죽여야 돼, 이러면서. 어디 좀 취직하라 하면, 한 사흘 일하면 코피 나서 못한다 하고. 코피는 물만 마시면 채워집니다. 헤모글로빈이 있기 때문에 물만 마시면 채워지거든요. 상사, 과장이 꼴 보기 싫어서 못가겠다, 나를 갈군다는 거에요. 왜? 일을 못하니 갈구지요, 일을 못하니까.
직장에 직원이 백 명이 있는데 99명은 오늘도 돈을 위해서 달려가자 이러고 있는데, 이 사람은 오늘도 자아를 어떻게 빛낼 것인가, 이렇게 자기 생각만 하니 맞을 리가 있어요? 안맞으니 직장 못다니죠. 자기에게 색을 칠하는 그 색칠이 싫다 한다면 결국 남아있는 것은 물컹한 순두부만 남아있어요, 자아라는 게. 이 자아가 그렇게 제대로 된 색깔을 못 만난다면, 자아 자체가 도대체 이 괴물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건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걸 자꾸 정당화 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옳다고 우기지 말고.
그래서 210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 다시 한 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지 말라 너희들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이렇게 규정을 했잖아요. 그러면 유대사회는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입니다. 근데 그 공동체가 뭐가 문제냐 하면 자기가 주님한테 지옥 간다는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근거를 본인이 찾아내지를 못하고 있는 거에요. 남이 나를 안 알아준다고 자꾸 사회 보고 불평하지 말고 안 알아줄 만 해서 안 알아주거든요. 그만한 정당성을 나에게서 찾아내야 되는데, 그걸 찾아내는 안목이 결함이 생긴 거에요. 이건 문제가 있는 거에요.
그렇다면 마태복음 8장에서 로마의 중대장, 백부장 나오죠. 그 백부장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백부장은 어디 가느냐? 너희 본자식들은 지옥 가고 그 빈자리를 그 백부장 같은 믿는 자가 채운다 할 때, 도대체 백부장의 자아는 기존의 유대사회의 자아들과, 개구리들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어떤 차이가 있었어요? 백부장이 하는 일이 있죠.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러니까 얹혀서, 본인이 본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화살표 되신 주님, 주님한테 얹혀있는 거에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전에는 바탕이 악마로부터 온 이상한 바탕이었죠, 주님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의 짐승에 뿌리를 두고 있던 거에요. 근데 주님 만나고 바탕이 어떻게 됩니까? 짐승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걸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 쪽으로 모든 의미가 마감되는 게 아니고, 자꾸 누구를 겨냥하느냐,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면 주님을 가리키는 거에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주께서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할게요. 이 말은 <나의 노동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내 노동이 없으니까 뭐가 없어요? 내가 예상한다는 게 성립 됩니까, 안됩니까? 성립이 안돼요. 내가 예상한다는 게 성립이 안돼요.
나의 노동은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를 놀지 못하게 한다.' 나를 그냥 이 땅에 놀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내 시간과 내게 주어진 공간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다룰 수 있는 시간 공간이 아니고, 이거 누구 겁니까? 주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가 논다, 또는 내가 놀고 싶다가 성립이 안 되는 거에요. 집에서 그냥 있다고 노는 게 아니에요. 회사 가도 내가 놀겠다는 심정으로 회사 가면 노는 게 되거든요. 어쨌든 간에 나를 놀지 않도록 그렇게 주께서 나를 받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노동은 없다.’에요.
그러면 그게 없으면 주님의 노동밖에 없고, 그러면 그 결과는 내가 예상할 필요 없이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답이기 때문에,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기 때문에 내가 그 결과에 대해서 예상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종이 건방지게 예상할 필요가 없지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도착지점에 와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장래에 대해서 아무리 어떻게 된다 한들 그 현장이 뭡니까? 그 현장이 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고, 주와 함께 있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영국을 가든, 한국에 있든 그건 전혀 상관할 바 없어요. 왜?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 자체가 답이거든요, 그 자체가.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10625b 누가복음 6장 32절(예상)-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나의 의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의도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주님의 의도만 알고 있으면 돼요. 내가 사는 것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내가 몇 년을 살든 그런 것 걱정하지 마시고 주님의 의도가 무엇이냐, 원래 그걸 알라고 이스라엘이 선택된 겁니다.
나의 의도가 아니고 주님의 의도인데 자꾸 나의 의도에서 뭔가 자꾸 생산돼요, 만들어진다고요. 주님은 이 생산된 것을 부수고 부정하고, 부정하고, 이 충돌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성도되는 과정은 성도 본인도 모르고 이해 안 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내 것이 아님을 수시로 증명하는 거예요. 내가 내 것이 아님을 수시로 증명하죠.
그래서 이 과정이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과정이에요. 잃어버렸다가 늘 되찾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꾸 새롭게, 새롭게 알게 되니까 세상 사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지금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힘든 거거든요,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니까. 잃어버릴 때 그냥 잃어버리면 자기 파괴이고 자살인데 그게 아니고 이게 증명이 되는 거예요.
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과정 속에서 주님의 사건, 주님의 의도가 들어올 때만 너는 성도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반복될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힘들지 않게 사는 방법입니다.
이 말을 다시 하면 내가 나를 지켜서는 안 된다.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지킬 대상이 아니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평생 엉뚱한 것만 지켜왔다, 엉뚱한 것, 지킬 필요도 없는 엉뚱한 것을 지켜놓고 이걸 가지고 승리했다고 합니다. 빈체로~ 빈체로~ 자기가 승리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복음에서, 성경에서, 주님 나라에서 정말 기쁜 것은 모든 인간의 자아들은 전부다 무승부에요. 오늘 제목은 <무승부>입니다. 이긴 자, 패자 자체의 게임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뭔가 지킬 게 있어야, 지킬 내가 있어야 지켰다 했을 때 승리감에 도취되는데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다툼을 무승부로 만들어버려요. 어어어어~ 바둑 두다가 바둑판을 엎어버려요. 장기 두다가 장기판을 엎어버리는 거예요. 고스톱치고 있는데 화투판을 담요채로 휙~던져 버리는 거예요.
또 화투치나? 확 던져 버릴 때. 무슨 뜻일까요? 승부할 수 있는 마당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마당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자꾸 승부하고 게임하고 승리하려고 하는 이 마당을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승리를 장담하고 증명해주는 이 공간을 사람들은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의 장. 역사가 나를 증명해줄 것이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지, 역사의 장. 사적 개인사도 마찬가지이고, 사적인 소박한 개인사도 포함해서 역사의 장이에요.
주님께서는 이 역사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무승부이기 때문에 게임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마치 허공에다가 글자 써놓고 읽어보라고 하는 것처럼. 이건 성립이 안되잖아요. 안개 낄 때, 작대기 가지고 쓰면 잠시 동안은 안개가 걷히겠지만. 그래서 이 역사를 공격하는 것이 언약이에요. 언약의 특징은 여기에 아무 것도 없다, 달리 이야기하면 여기에 아무도 없네, 이게 언약의 핵심입니다. 영화관에 한 백 명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보고 여기 나 혼자 왔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버릴 것들만 있기 때문에 지킬 만한 것들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 자아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나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여기 중간에 예수님의 자아가 끼어들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됨과 동시에 예수님의 품 안에서 예수님의 의도로 주님의 뜻에 의해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는 게 아니고 주님 자신만 지키면 돼요. 주님 자기만 지키면 우리는 덩달아 주님 품 안에서 보호받음이 성립되는 겁니다. 주님의 의도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다른 한 곳에 있다면, 사회성이 있었잖아요. 이 사회성을 주님의 의도로 바꾸는 거예요. 사회성은 역사이지만, 주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둘러싸는 겁니다. 약속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너희에게 찾아왔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이제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 또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또는 다른 신약에 있는 성경책들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죠. 굉장히 쉬운 겁니다. 그런데 이 점을 주의해야 하는데, 내가 여기 있었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 목표나 예상이 되면 안되고, 중간에 예수님이 끼어들게 되면 아무것도 아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인간 속에 오셔서 다니시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고. 평소에는 나같은 인간들만 옹기종기 모여서 제 잘났다 하고 싸우고 다녔는데 인간들만 있는 그 속에 하나님이 오셔서 인간들과 섞여서 다니신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인간세계에서 뭘 하시려고, 굳이 인간세계에 섞여서 사시느냐 하는 거예요. 그 말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굳이, 그 천사 셋을 아브라함 가정에 보낸 이유가 뭡니까? 없는 약속의 자식을 생기게 만들고, 그 자식은 어디서 생겼는지 알리기 위해서 네가 아버지 된 손으로 한번 죽여 봐라, 죽였는데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양이 대신 해서 살아났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데서 살아났고 없는데서 있게 한, 그 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성도라는 것을 만든 겁니다.
그러면 성도를 둘러싸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의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우리와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앞으로 뭘 할까가 아니라 주님의 의도로 지금 이 자리에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숨 안쉬어도 되는데 숨을 쉬는 거예요. 백신 안맞아도 되는데 백신 맞게 하신 겁니다. 누구 의도로요? 주님의 의도로 하신 거예요, 주님의 의도로. 나는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집에서 놀까요? 가 아니라 논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집에서 내가 놀까요? 라는 말을 하는 일을 주께서 하게 하셨으니까. 그럼 계속 그 일만 할까요? 그것도 안되죠. 그것도 네 생각이고. 그래서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생존은 주님의 의도이다.> 그러면 여기서 나의 의도는 무엇이며 주님의 의도는 무엇이냐. 이 차이성을 통해서 언약이 증거 되고, 언약이 증명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도가 생기면 나의 의도가 항상 같이 나와야 돼요. 나의 의도가 뭐냐? 나는 놀고 싶습니다. 주님의 의도는? 놀고 싶다는 이것은 너의 의도였다. 네가 놀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상사가 나 욕하고 돈 못 번다고 나에게 따질 거잖아요. 그게 바로 예상이고, 예상이 문제입니다. 너에게 따지든 말든, 그 상사도 누가 배치했어요? 주님이 배치한 거예요. 어떤 손님이 와서 나를 닦달내고, 나를 모독하는 것도 누가 배치했습니까? 주님이 배치하신 거예요.
성도는 주님이 주신 사건, 그 언약 사건이 지금 실제로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죠.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는 이 땅에 주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주님이 어슬렁거리며 일하신다는 거예요. 그걸 성도가 아니면 누가 증거 하겠어요? 성도의 똑똑함을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성도로 하여금 잃어버렸다가 얻는 사건의 반복 속에서 그것이 우러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러나오게.
수련회를 앞두고 있는데, 성경지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죠. 다니엘이 뭐고 이스보셋이냐, 므비보셋이냐 다 중요하지 않아요. 성경지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지식을 인간이 확보하려는 것은 뭐냐? 내 자아를 증명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 성경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뭐냐, 성경지식을 확보하려는 것이 너의 의도였다는 것을 증명하죠. 성경지식 알아서, 주의 뜻을 알아서 뭘 하겠다는 거에요? 천당 가려고 예상을 하는 거에요. 자꾸 나를 예상하려고 하는 거에요. 예상 안해도 되는데, 예상을 하니깐 자기의 노동력에 대해서 의미를 두게 되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211페이지 봅시다. 여기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수정합니다. ‘인간의’를 ‘인간이’로 수정합니다. “인간이 짐승의 지배 밖으로 따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이 나의 나됨을 어디서 확보하느냐? 예수님이 오셔서 그 정체를 밝혔는데, ‘너희 아브라함 자손들은 천국에 못가고 지옥 간다.’ 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슬렁거리면서 자기 주변에 있는 유대사회에 그렇게 얘기할 때, 그들은 숙제를 받은 거에요.
네가 지옥 가는 것을 네가 스스로 증명해보라는 숙제를 받은 겁니다. 숙제를 받아보니까, 아무리 따지고 아무리 연구하고, 갖고 있는 성경지식을 총동원해도 내가 당연히 지옥 간다는 것을 밝혀내지를 못하고 있는 거에요. 그렇다면 그들은 뭐냐, 결과적이죠. 결과적이에요. 본인이 뭘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어떤 원인에 의해서 그냥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채로 지옥 가는 결과를 떠안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아는 어디서 나왔는가?
211페이지에 보면, 자아라는 것은 짐승의 지배 안에서만 그 이유가 드러나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라 짐승과 상대하는 거에요. 짐승과 상대한다면 내가 이 자아가 성경지식을 확보한다는 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거에요. 성경지식=사회성입니다.
나를, 자아를 감추는 새로운 주체성 확보 차원에서, 나를 지키고 둘러싸서 나를 사회에서 알아주는 주체성 확보 차원에서 성경지식을 있는 대로 다 끌어 모으고 있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이건 나의 의도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 자체가 곧 말씀이 되는 거죠. 예수님 자체가 곧 하나님 뜻이에요.
왜냐하면 인간도 여기서 나오고, 천국도 여기서 나오고, 하나님도, 아버지도, 모든 율법도 여기서 나오고 모든 산상설교 율법의 완성도 예수님에게서만 나오고, 다른 데는 다 막혀있어요. 그러니 지식을 백날 쌓아도 우리는 주의 뜻에는 전혀 접근 못하는 겁니다. 지식은 많아도 접근이 안돼요.
어제인가 오늘인가 서목사님이 수련회 교제 올려놨죠. 여러분들이 교제를 보실 때, 서론 읽지 말고 본론부터 보세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본론은 하나의 이야기책이에요. 다윗은 이렇게 했고, 뭐가 어려워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다 익숙하고, 성경공부 한 10년 한 사람 같으면 다 아는 이야기에요. 다 아는 이야기를 한 거에요.
근데 서론을 보게 되면 뭐야 이거? 굳이 이걸 알아야 돼? 이렇게 되죠. 서론 부분에 ‘믿음이란 자아의 기억이다.’ 이렇게 나오죠. 믿음은 엉터리다, 이 뜻이에요. 그냥 본인의 기억에 불과한 거에요. 왜냐하면 그 본론에 성경을 많이 봤잖아요. 그 성경지식이 자아가 지옥 간다는 것을 증명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출발점 자체가 나는 괜찮은 나이기 때문에, 괜찮은 나가 안괜찮은 나로 뒤바뀔 일은 없어요.
내가 노동해서 내가 지식을 확보해서 '그래, 나는 지옥가야 맞아 '라고 증명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어요. 인간에게 핍박 받지도 않습니다. 악마와 상대할 필요도 없어요. 알아서 겸손한데 뭐 땜에 오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성경을 대충 읽었겠어요? 얼마나 심사숙고 했겠습니까?
나름대로의 과정 속에서 얼마나 순수하고 정직한, 진정성 있는 신앙이라고,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의 신앙에 대해선 하자가 없어요. 꼭 여러분 같지 않습니까? 아무리 따져 봐도 내 자체가 문제를 발견 못한다니까요. 십자가 믿지, 나는 맨날 죽었다고 인정하지, 내가 사는 것은 주의 은혜라고 하지, 단지 지식으로 건성으로 하는 게 아니고 진실로, 진심으로~진심으로~ 나는 오직 주님만 믿습니다. 주께서 아시죠?
이렇게 사는 사람이 유대사회에서 2만 5천 466명 있습니다.
주의 뜻은 우리 인간에게 전달하면 이렇게 되는 거에요. 1번, 너를 지키지마라. 그러면 우리는 지식으로 오케이, 지키지 않겠습니다. 근데 2번이 문제에요. 2번, 그래도 지키고 싶은데요. 이거 2번 어떻게 할 건대요? 날 지키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처리할건데요? 이거 처리 못합니다. 자아를 이 욕망이 무능력하게 만들었어요. 성도는 이걸 평생 체험합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죠. 내 속에 선한 법을 알면서도 악이 더 센데 어떡합니까. 내가 내 맘대로 되지를 않는데 어떡하라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악마를 찾는 방법이 악마의 앞잡이 된 우리를 그냥 뚫고 지나가는 거에요. 우리를 비켜서 가는 게 아니라 우리 안의 자아를 겨냥해서 계속 들어오는 겁니다.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한대요.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를 증거 하지 않고, 자꾸 자아를 건드려서 십자가 본래의 뜻을 훼손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에요. 십자가 이야기만 해야지 왜 자아 이야기를 하느냐, 십자가 바로 이야기하면 알아들을 사람은 다 알아들을 텐데, 이렇게 얘기한대요. 십자가 사건이 나를 제치고 일어난 사건입니까? 그렇지 않죠.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그렇게 객관화시키지 않고 주관화시켰습니다. 나는 죽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할 때, 십자가 사건이 나를 덮친 거에요. 십자가 사건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교과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 여기 있음을 문제 삼는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1번 되고 싶은데, 2번이 되는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 필히 일어나야 될 사건으로 간주되는 거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에요. ‘죽어라 이 2번아’. ‘내가 나를 그래도 지키고 싶다’ 이것은 내 스스로 죽는다고 해도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시는 거에요. 나를 날마다 죽여 버리는 거에요. 저주로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일어나는 욕망을 밟는 거에요. 이게 뭐냐.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현장이 되게 하시는 것, 내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현장 되게 하시는 것. 지키지 말아야 되는데 지키려는 욕망이 올라올 때, ‘그래, 잘 올라왔다. 오늘도 한번 밟혀봐라.’
‘지키고 말아야 되는데’라고 할 때 덩달아 올라오는 게 바로 예상이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있다면, 이틀 뒤에 사흘 뒤에 나는 어떻게 될까 예상하는 겁니다. 이 예상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죠. 이게 역사이기 때문에. 날마다 내 역사를 또 시작하는 거에요. 어제까지는 죽었고 오늘부터 또 내 역사가 시작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논문의 주제가 뭐냐? 역사에 대한 언약의 공격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바로 짐승이 퍼질러 놓은 거에요, 인간들이 마음껏 솜씨를 발휘하라고. 악마가 인간을 부추겨서 퍼질러 놓은 거에요, 역사라는 게.
그래서 210페이지 봅시다. 서론부터 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이 의도가 어디에 나오냐 하면요, 236페이지에서 238페이지까지 나오죠. 최만수부터 해서 최영헌, 칼빈, 카일, 몽고메리, 포르튀우스, 헹스텐베르그, 하젤, 에드워드 영, 간하배, 간하배는 우리나라 선교사에요. 이희락 그리고 이들을 따르고, 추종하는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들, 그리고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70이레를 역사적으로만 해석하는 거에요.
70이레만 역사적으로 해석할까요? 성경 전체를 역사적으로 해석할까요? 성경 전체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거에요. 왜? 역사란 것은 내가 뭘 행하면 무엇이 나올 수 있고, 어떤 좋은 것을 주면 내가 개조되는가? ’나‘라는 게 개조되는가? 모든 학문이 그거에요. 인간에 의한 인간개조. 지금 그 일 하고 월급 받잖아. 제발 이거 무시하지마라 하면서 유식한 지식을 알려주잖아요.
그러면 그걸 그냥 알려줍니까 아니면 네가 이거 하나 알게 되면, 그 다음에 뭐가 된다는 뭘 해요? 예상을 하죠 예상을. 고3 여고생한테 네가 지금 잠 안자고 공부하면 남편이 바뀐다 하잖아요. 요새 젊은 애들 같으면 나 결혼 안해요 하면 끝나지만. 굳이 남편 있어야 됩니까? 하면 되지만. 당근을 주는 겁니다. 못할 때는 채찍을 주고.
왜냐하면, 이 사회성 자체가 사회성에 있어서 당근은 뭡니까? 돈이죠, 돈 있음이고. 채찍은? 돈 없음이죠. 돈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데 왜 이런 것이 걱정거리가 되냐 하면 이 사회성 안에 자아가 들어있거든요. 자아는 무조건 나는 지금도 잘되지만, 무조건 나는 인정받아야 돼. 이유가 없어요, 자아는. 이게 악마의 얼굴이잖아요, 악마의 얼굴.
자아가 인간에게는 유령입니다. 몸은 있지만, 자아는 없어야 되는데 자꾸 생겨나는 거에요, 자아가. 자아가 유령이 아니고 실제라고 하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유령 취급 받는 거에요. 진짜 인간, 진짜 하나님이 유령취급 받고, 곧 없어질 인간은 귀신같은 존재이면서도 자기는 영원할 줄 알고 있어요. 영원히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갈 때 그냥 가지 않죠. 이 사회성으로 이렇게 둘러싸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어떻게든 유대공동체를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인정해주어서' 여기 화살표 보겠습니다. 화살표 이쪽으로 갑니다. 이걸 뭐라고 보느냐하면, 창세기부터 시작된 구약부터 화살표 갑니다. 이게 신약까지 간다는 거에요. 이걸 사람들은 언약으로 보지 않고, 역사로 보는 거에요. 언약이 역사화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역사가 허구거든요. 역사가 왜 허구냐 하면, 자아가 시간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역사 방법밖에 없어요.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자아는 유령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고 실제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역사가 실제로 있었다는 걸로 증명해나가는 거에요. 게티스버그 라고 남북전쟁 때 결정적인 전쟁이 게티스버그에요. 거기서 아브라함 링컨이 연설을 했는데, 딱 3분 연설했어요.
그 앞서 연설한 사람은 그 당시 대법원장인가, 총장인가 한 시간 반이나 연설했어요. 그 뒤에 아브라함이 3분 연설 했는데 앞에 한, 한 시간 반은 사람들이 모르고, 뒤에 한 아브라함 연설만 딱 기억나는 거에요. 아브라함 연설의 핵심은 뭐냐 하면 United States of America 라는 말이 한 번도 안들어가요. 국가도 안들어가고 적군이란 말도 안들어가요. 오직 들어가는 것은 뭐냐 하면 관념적인 거에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게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이것만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신학적 교리 같은 거에요. 이 세상의 국가는 흥망성쇠가 있더라도 변치 않아야 될 가치는 뭐냐?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그거 있잖아요. 이런 자유와 평등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 나라도 영원할 것이다. 정철 종합영어에 나오는 그 유명한 문장이죠. 나라가 널 위해 뭘 해줄까를 기대하지 말고 네가 나라를 위해 뭘 해줄까를 생각하라. 자유와 평등.
이게 하나의 뭐가 되냐 하면, 그때 그 당시에 링컨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때 링컨의 자아가 무슨 뜻으로 이 얘기 한줄 알아요,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모르는데 오늘날 우리가 이 역사를 가지고 올 때, 이 역사는 남의 역사지만 이걸 이해한다는 지식이 될 때 사회성에서 이게 하나의 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나는 일종의 아브라함 링컨이 되는 거 같죠. 나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볼 때 나를 칭찬할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나는 귀신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고, 허구, 허빵도 아니고 실제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것도 다 가져오는데, 그걸 역사에서 가져오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 유대사회. 유대사회가 구약을 그런 식으로, 구약에 있는 모든 언약을 현재 있는 유대사회가 꼭 있어야 될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용하는 이것이 우리 주님 보시기에는 '너희 아비는 악마'가 되는 거에요. 이 논문 발표할 때 그 자리에 있던 교수와 목사들이 무슨 말인지 몰랐을 거에요. 네가 악마라는 거에요, 네가.
지금 성경을 보면서도 왜 예수님께서 ‘너희 본 자식들은 지옥 간다.’는 얘기를 왜 했는지를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어요. 이게 남의 이야기인줄 알아요. ‘이런 못된 바리새인, 예수님을 핍박한 바리새인, 저리가. 나완 상관없어. 우리는 예수님 좋아하지요. 그죠?’ 이러고 예수님 십자가 사건을 자기 역사 속에 끌어당기는 거에요. 주님이 무슨 역사를 남겼습니까? 역사를 박살냈지요.
주님은 역사를 언약으로, 사건으로 바꾼 거에요. 역사를 남긴 게 아닙니다. 사건으로 바꾼 거에요. 역사는 없어요. 내가 없기 때문에 역사도 없어요. 그냥 제각각 개구리 우는 논밭이에요. 개굴개굴. 사람이 가까이 가면 가만히 있다가 지나가면 개굴개굴 울어대는, 꼭 개구리 우는 것 같아요. 미꾸라지를 가마솥에 넣고 소금 치면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데 불 떼면 잠잠해져서 푹 삶아져서 국물 되지만. 주님께서 모든 인간의 자아를 지옥 불에 집어넣는 이유가 제발 그만 나불대라 이 말이에요. 역사가 어떻다느니, 역사는 흐른다~독도는 우리 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지옥에서나 찾아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인정해주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과" 자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 이거 이야기하면 오늘 강의 정리됩니다. 언약은 말씀이잖아요. 언약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언약이에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사건, 행하심, 행하심의 의도, 이게 언약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약을 뭐로 바꾸냐 하면, 일관성을 만들려고 언약을 역사로 바꾼 거에요.
언약을 역사로 바꿈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은 언약의 일부로서 구원받는다고 자기 예상을 안전빵으로 확보하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지식이잖아요. 이게 자아가 있고 교회라는 사회성이죠, 교회라는 사회성.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내 것이 아님을 증명하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죽었지요. 죽거나 없는 거에요. 언약에서는 두 가지입니다.
언약의 출발점은 뭡니까? 없는 데서 있게 하기 때문에 없는 게 출발점, 또는 뭡니까? 죽은 거. 죽은 데서 살리는 거에요. 살리는 능력자를 믿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있게 하시는 분을 믿어야 될 거 아닙니까? 자꾸 나의 있음, 나의 살았다는 것으로 주님의 있음을 대체하려고 하지 마시라 말입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십자가 언약이 없어요. 그 사람은 ‘나 살았다, 나 구원 받았다’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지 주님을 증명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거든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주님 자신이 인간이고, 주님 자신이 하나님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 없다',' 인간 죽었다'를 통해서 주님 자신이 참된 인간이고, 참된 하나님인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명하시는 거에요. 참 쉽지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매사에 내가 내 것이 아님을 증명하면 돼요.
미끄러졌다. 아프다. 가만 있어보자. 내가 아플까 주님이 아플까, 주님이 아프게 하실까? 아, 주님이 아프게 하셨구나. 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어제 넘어져서 죽어야 되는데, 오늘까지 수명이 이어지는 것 보니 주께서 살게 하셔서 이렇게 넘어지게 하셨구나. 그런데 병원에 갈까, 말까? 뭘 예상하느냐? 또 예상하죠. 병원에 가면 낫겠나? 나으려면 돈 드는데, 안가면? 좀 더 아픈데, 참을까?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예상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노동의 괜찮은 예상은 돈이 남는다.>는 것. 병원 가는 것도 노동이고, 안가는 것도 노동이거든요. 항상 어느 것이 좋냐, 좋다는 말은 어느 경우가 돈이 더 모아지느냐는 거겠죠. 미국 같으면 넘어져서 병원가면 천만원 내라 하면 참아야 되겠죠. 안아파서 병원 안가는 게 아니라 돈 아까워서 안가는 거죠. 그래서 그걸 통해서 주께서는 ‘역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게 안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 사건이 되는 겁니다, 늘.
그 다음에 봅시다. 계속 나갑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되면 역사가 되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율법 없는 자'로 보았죠.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역사로 바꿨거든요. 옛날 모세가 준 역사 안의 것과 연결되어 있는 율법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일당들은 율법 없는 자에요.
그러니까 그들은 율법 역사 안에 들어오면 구원이 되고, 율법 밖에 떨어진 사람은 이단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귀신들 또는 이단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욕을 얻어먹었어요. ‘너희들은 이단이다. 왜? 율법 역사 속에 포함이 안되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모세를 포함한 율법을 존중하는 그들에게 ‘모세가 너희를 정죄해버리면?’, 지금 모세는 어디 안에 살아 있습니까? 모세라는 인물은 지금 누구 안에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안에 있죠. 예수님 안에 있는 모세가 모세를 존중하는 인간 역사를 고발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어서 기존의 모든 역사에 대한 공격용 무기로써 사용되는 겁니다. 이 논문 서론 부분에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역사와 악마가 어떻게 조인트되어 있는 지를 그 연결점을 찾아야 된다는 거에요. 그냥 뭐 귀신 나온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역사라는 게 악마의 몫이다 라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중요한 거에요.
210페이지에 밑에서 열 번째 줄에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땅' 자, 이제 유대신학입니다. 땅, 그들이 인정하죠. 왜냐 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이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씨, 자기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씨죠. 땅이 있고 씨가 있다는 말은 물질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잖아요. 땅, 흙 만져지잖아요. 자기 몸, 여기 있잖아요. 있는데 그들은 역사와 먼저 연결해버리죠.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브라함 자손에게 준 땅이라고 해석을 해버린 거에요. 성경적으로 해석을 하는 거에요. 땅과 씨를 준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약속대로 이루어졌다고 본 거에요.
만약에 우리 집사님이 그럴 리 없겠지만, 국세청에서 조사해서 이 집은 탈세했기 때문에 전부다 가져가야겠다고 통보를 하고, 그 다음날 국세청 직원하고 만일을 대비해서 경찰 몇 명이 와서 '빨리 들어와, 가져와' 해서 이게 뭔가 보니, 티비가 너무 작아서 85인치 티비 걸어놓고, 새 냉장고로 갖다 놓고 가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빼앗길 줄 알았는데, 빼앗기기는커녕 도로 갖다 주지요. 그렇게 되면 내가 세금 안내서 다 빼앗긴다는 그 의미가 소실되고 날아가 버리죠. 그렇죠?
지금, 우리는 죄인이다 하나님의 배치가 와야 돼. 하면서 하나님이 땅 주셨고, 티비처럼, 냉장고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을 주셨다면 이 몸을 포기할 거에요? 아니면 쥐고 있어야 돼요? 이 국가, 이 이스라엘 사회 국가를, 어떻게 이 사회성을 포기할 겁니까? 믿음으로 지켜야 됩니까? 믿음으로 지키죠. 그 지킴의 결과가 십자가거든요. 그 지켜야 된다는 것의 결과가. 하나님이 이거 주시고 저거 주셨기 때문에 이건 빼앗기면 안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의 의도로 주신 거기 때문에 주신 자도 주님이요, 냉장고 정도가 아니고 내 목숨을 가져가신들 내가 ‘저를 왜 죽이십니까?’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하는 겁니다. 자아는 숫자로 하면 제로에요. 완전히 없는 거야. 없으니깐 넌 죽든 살든 이미 죽은 거야. 너는 없는 거고 죽은 거야 할 때, 이것이 그다지 괘씸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 안들죠? ‘안들죠?’ 하니깐 갑자기 힘이 쭉 빠지네.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를 않죠. ‘가져가세요. 주께서 채워주신 겁니다. 필요한대로 쓰시다가 다 썼다 싶으면 가져가세요. 뭐 나이 따지지 마시고요 주님.’
그래서 지금 역사와 짐승을 조인트, 연결시킨다 했죠. 그럴 때 유대사회가 훌륭한 사례, 실례가 돼요. 그들은 뭐냐? 땅과 혈통만은 건드리지 마라, 근데 건드리신 분이 누구입니까? 누가 ‘너희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바로 이 땅에 인간과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걸 건드리는 것이죠. ‘너희 아비는 악마다. 너희들은 죄의 종이다.’ 죄에 갇혀있다는 말이에요. 죄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거에요.
인간의 한계는 죄의 한계에 갇혀있는 겁니다. 갇혀있는 너희는 자유를 못찾고 있고,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유를 찾기는커녕 오히려 이 세상이 더 좋아 보이고 더 귀히 여겨지고 더 아까운대요. 그걸 지키고 싶은대요. 그래서 여기 계속 봅시다. '아브라함의 신체와 연계된 혈통에 기초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실체로는, ‘짐승’이라는 묵시적인 의미를 드러내보여야 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언약과 짐승과의 조인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짐승에게 뭘 하느냐하면, 역사를 끄집어내게 하죠. 그런데 짐승은 눈에 안보이죠. 눈에 안보이는데, 인간들은 역사의식을 갖고 있으니 하면서, 인간은 자아가 살아 있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역사에서 나오는 게 바로 국가이고, 언약 쪽에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차원에서의 죽음입니까? 누가 재판했어요?
이방나라 빌라도와 그 당시의 국가, 유대사회의 바리새인들한테 국가적으로 죽임을 당했죠, 제거를 당했죠. 바로 예수님을 건드림으로써 국가가 현재 짐승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는 역사 없이는 생겨나지 않아요. 국가는 반드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사가 없어요. 예수님 쪽에 있는 성도는 뭐냐 하면 역사 없고,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지금 그런 식으로 우리를 앞장세워서 국가, 역사가 짐승에게 소속되어 있고, 이것이 바로 죄에 소속되어 있고, 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뭐가 없냐하면, 자유가 이 땅에 자유가 없는 겁니다. 갇혀있고, 지배받고 통치 받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이래서는 3년 가겠다 정말. 여기 보면 '구원의 약속 보장적인 연속적인 흔적은' 이렇게 얘기할 때 목사님들은 대번에 알아요. 신학교에서 교회사 배우잖아요. 교회사 배우고, 교회 역사 배우죠. 그리고 각 교회가면 당회장실에 옛날 당회장부터 죽 있잖아요. 우리 교회 있다가 다른 교회 간 사람, 선교사 간 사람, 죽은 목사, 사진 걸려있죠? 큰 교회 가면 검찰청처럼 쭈욱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교회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보존했다는 말은 그만큼 정통성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것 가지고 그들은 교회를 유지하려고 한단 말이죠. 그리고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마음에 자부심을 가지는 이유가 여러분, 자부심이란 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아가 사회를 향해서 나타내는 게 바로 자부심이에요. 나도 넣어줘, 나도 너희와 한편이다, 이게 자부심.
자부심 있다는 말은 자아는, 나는 못 죽겠다는 거에요. 없음으로 가지 않고, 죽음으로 가기 싫다는 거에요. 나는 있음에서 나오고, 현재 살았다는 모습으로 뭐든지 출발하게 해주오 .제발 그렇게 해주오 라는 거에요. 주님이여 제발 내가 살아있고, 내가 구원받았고 이런 가치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발 please, 이게 자부심이에요. 이게 신앙적 자존감이에요. 나를 좀 건드리지 마라. 나 신앙인이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거에요.
짐승! 이 짐승은 맨날 역사만 생각해요. 4대째 기독교 집안.
제가 서론에 이야기 한 것은 ‘바로 그런 식으로 지금껏 성경해석이 되어 왔습니다.’ 라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묵시문학과 선지서도 해석해왔습니다.’ 라고 제가 이야기하기 위해서 서론 부분에 1페이지 위에서부터 열째 줄까지 그렇게 써놓은 거에요. ‘여러분들의 성경해석은 다 틀렸습니다.’ 이 이야기 하는 거에요.
다음 시간에는 211페이지 위에서 다섯째 '인간이 짐승의 지배 밖으로 따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은 짐승의 지배 아래에서만 자기의 주체를 정립하는 형편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것은 ‘죽어라, 십자가 안에서 내가 네 주체를 정립해줄게. 십자가 안에서. 네 사회성 말고 나의 언약 안에서, 역사 아니고 언약 안에서, 언약 사건 안에서 네가 새사람 되게 해줄게.’ 이게 다음 시간에 우리가 생각해봐야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숨 붙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없어야 되는데 있고, 죽어야 되는데 살았던 이 기쁨만 주님의 살아있음의, 주님의 살아계신 의도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광주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이스라엘의 이질성 (0) | 2021.09.26 |
---|---|
3.추상성 (0) | 2021.07.25 |
1.함께 하심-70이레해석 (0) | 2021.05.30 |
땅이 사라짐 (0) | 2021.04.25 |
부활의 능력b (0) | 202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