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불신자

아빠와 함께 2021. 10. 12. 21:48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5 - 불신자

21,10,04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이해불가 !!

오늘은 교재 14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그 제목이 '7강, 언약의 연속성' 이라고 되어있는데, 언약의 연속성이라고 하면 무엇은 아니라는 겁니까? 일단은 시간의 연속성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언약적으로 살았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그 당시의 선지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 선지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이해 안됨' 이라는 것인데, 즉 "당신이 살아가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과 밉상을 받았다는 말이죠.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게 되면, 실제로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으면서 살았다는 말이죠. 그게 그들 삶의 특징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 그러지 말고 그들과 좀 맞추어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올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성신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이죠. 신약은 성령이고 구약은 성신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성신이 오게 되면, 성신은 의도적으로 그 당시 인간들의 시간성을 그만 엎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당시 시간성을 엎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기억'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이렇게 기억대로 사는 것을 두고서 '상식'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믿음으로 살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들도 강조를 하고 말이죠.

* 변비가 와요 !!

그런데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 긴장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살면 편한데, 그런데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엄청나게 집중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상식으로 살던 사람이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그만 변비에 걸린다는 겁니다(ㅋㅋ). 전혀 자기 몸에 맞지를 않다는 것이죠.

이렇게 믿음으로 살겠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마치 건설현장에서 제일 높은 타워크레인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시위를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는 말이죠. 물론 월급을 올려달라고 농성을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은 썩었다. 그러니 나처럼 살아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영적생활을 유지해야한다는 심리적인 엄청난 중압감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긴장도를 높이게 되는데, 즉 "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해. 나는 영적인 사람이지 육의 사람이 아니야" 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몸이 견딜 수가 없는데, 그래서 변비가 오고 한다는 겁니다.

* 위선자 !!

그러면 그 모든 하는 것들이 어떻게 됩니까? 그만 '위선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즉 위선자가 되는 기술을 익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델을 찾게 되는데, 그런 위선자의 모델이 누구인고 하니까, 잔느 귀용, 토마스 아켐스퍼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기철이나 한경직 목사,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불교 쪽에서는 성철 스님 등등,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을 따라붙어야 고공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남들은 낮은 땅에서 살지만 자기는 혼자 높은 곳에서 산다는 겁니다. 마치 성자처럼 말이죠. 왜냐하면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했으니, 거룩한 성도라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니까,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하니까, 사실은 그 중압감이 얼마나 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처음 1년 동안은 자기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서, 앞에서 말한 교회사에 나오는 위인들처럼 살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1년이 지나서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하면서 무엇을 배우는고 하니, 요령을 배운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저 장로님은 신앙생활을 50년 했다고 하는데, 내 꼬라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심하네. 그래도 천국에 가나?" 라고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겉은 거룩하게 하고 속으로는 챙길 것은 모두 챙기고, 그러니 위선자가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위선자가 되면 자기 자신이 괴로운데, 왜냐하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은 자기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종교라는 함정에 그만 빠진 것이란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뜻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고공시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내려오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그냥 흙을 뭋이면서 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목사가 설교시간에 말하는 그런 거룩한 생활이 아니라, 그냥 땅에서 살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 몰상식 !!

그러면 땅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고 하니, 상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상식보다도 약간 높은 것이 교양이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 집안은 뼈대가 있는 집안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교양도 돈이 있어야 교양이지, 돈이 없으면 상식으로 다시 주저앉는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 교양 수준으로 올라가라는 것이 아니라 상식 수준으로 내려오되, 그 상식 앞에 글자 하나를 더 붙여서, 그것을 '몰상식'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래도 내가 교회에 다니는데, 몰상식적으로 살면 안 되지"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살아보면 이것이 우리의 몸에 딱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동안 자기를 속이면서 살았는데, 몰상식적으로밖에 살 줄을 모르는 인간이,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는 독수리가 되어서 하늘을 날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믿음으로 살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위선적으로 산다고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말이죠.

안에는 몰상식이 들어있고 겉으로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니, 그래서 입에서는 여호와증인처럼 성경말씀이 마구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덮는다는 말이죠. 사실은 우리가 몰상식보다 더 내려가야 하는데, 그것은 곧 '죽어 마땅함'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상식보다도 더 위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고공시위라는 말이죠.

* 죽어 마땅함 !!

그래서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데, 그러면 땅에서는 상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상식과 믿음을 반대로 생각하면 되는데, 이 믿음은 위로 반대가 아니라 더 아래라는 말이죠. 그것이 몰상식인데, 이 몰상식보다도 더 아래에 있는 죽어 마땅함, 이것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라고 했는데, 주님이 힘을 주셔서 서있다는 말이죠.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놓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숨을 쉰다고 여기니 따로 어떻게 성도가 되겠다고 설치는데, 숨을 쉬는 것도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성도의 생활이라는 말이죠. 자꾸만 자기를 조작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살면, 그러면 그 자체에서 믿음이 용출이 되는데, 계속해서 올라온다는 겁니다.

* 용출되는 은혜 !!

며칠 전에 스페인의 어느 섬에서 화산이 터졌는데, 마그마가 시속 700미터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마을을 비롯해서 섬 전체를 모조리 다 태워버렸다는 말이죠.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성도는 껍데기인데, 거기서 주님의 은혜가 용출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성도가 오늘날의 선지지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상식적으로 산다" 라는 것은, 적어도 자기는 어떻다는 겁니까? "나는 몰상식하게 살지 않는다" 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고공시위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 정당성이고 또한 자기 의로움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따로 편집해서 드러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상식적으로 산다는 것이 그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다른 사람들은 몰상식하게 살지만, 나는 상식적으로 살아. 왜냐하면 나는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편집에 나선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욕을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선지자인데, 그 선지자의 경우에는 자기 몸은 그야말로 껍데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껍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있는데, 껍데기 자체가 아니고 말이죠. 화산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는 마그마가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는 그냥 사는데, 몰상식보다 더 못하게 산다는 말이죠. 그런데 은혜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그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고 "이것은 내 힘이다" 라고 했는데, 열심히 운동해서 만들어낸 자기 힘이라는 말이죠. 그게 우리의 상식인데, 그런데 그 상식보다 더 내려가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상식에 머물면 자기 정당성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그 정당성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면 그게 하나의 배틀이 된다는 겁니다. 즉 "누가 누가 더 정당한가?" 라고 하면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싸움을 하려고 하면 일단 자기 정당성을 확고히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다" 라고 하는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니 영업사원을 하는 것보다도 농사를 짓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죠. 농사를 지을 때는 말도 하지 못하는 흙과 대화를 하면 되는데, 산화규소(SiO2)와 말이죠. 하지만 사람과 대화를 하려고 하면 긴장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 너는 흙이다 !!

주님께서는 창세기 3장에서 "너는 흙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성도의 경우에는 그 안에 은혜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분명히 흙인데, 그 안에 은혜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인간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결코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는 말이죠.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어렵다고 하면 그것은 이유가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는 반드시 방해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자아' 라는 말이죠. 이것은 허구인데, '나' 라는 것이 방해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망가지기 싫다는 것인데, 또한 껍데기가 되기 싫다는 겁니다. 자기 안에서 은혜보다도 자기 잘남이 계속해서 분출되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 기억으로 구성된 '나' !!

이 '나' 라는 것이 주님의 뜻에 도전을 하는데, 그렇다면 이 '나'는 무엇으로 구성이 되어있는고 하니, 기억으로 구성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왕년에' 라고 하는데, 그렇게 기억으로 구성된 것이 '나' 라는 말이죠. 그것을 '정체성(Identity)' 이라고 하는데, 뜯어보면 그 안에 기억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억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과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기억은 지금 자기가 만들고 있다는 말이죠. 현재에서 기억을 만드는데, 과거에서 괜찮은 것을 골라서 말이죠. 추억이나 기억은 과거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지금 자기가 만드는데, 그러면 왜 만드는고 하니, 자기 정당성을 자기가 지켜내기 위해서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기억이라는 것을 지금 자기가 조작하고 있다는 것인데, 과거의 시간들을 말이죠.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기억, 자기 의로 뭉쳐져 있고, 그 기억은 "나는 무조건 의롭다. 나는 신이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무리 순해 보이고 인격이 좋아 보여도 속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일종의 연기인데, 인간은 자기가 절대적인 신이 된 이상, 항상 외부에 자기 정당성을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 그것이 정녕 안 되면 스스로 죽음 속으로 물러간다는 겁니다.

* 가롯유다 !!

그게 자살인데, 대표적인 인물이 가롯유다라는 말이죠. 자기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잠시 가롯유다의 사고방식을 살펴보면, "나는 스승에게 못할 짓을 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것은 가롯유다가 반성을 하고 있는 겁니까? 회개를 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스승에게 못할 짓을 했다" 라고 하면서 받은 돈도 돌려주고 했다는 말이죠.

성경이 난해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악마가 인간에게 이런 짓을 시킨다는 겁니다. 반성처럼 보이고 회개처럼 보이는 짓을 악마가 시킨다는 말이죠. "제가 주님에게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이게 성령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인고 하니, 그게 사탄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반응은 무엇인고 하니, "그래서 왜?" 라고 나오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어떤 것에서 나오는고 하니, 자기가 조작하고 편집한 선과 악 가운데서, "이번 일은 선이 아니고 악이니, 그 악에 대해서만 용서주세요" 라는, 그런 태도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용서를 받은 악은 선이 되는데, 그러면 자기 정당성은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나무를 심어놓고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지만, 악마가 인간을 부추겨서 선과 악의 지식이 들어있는 열매를 따먹게 해서 인간에게 그것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 무엇을 해도 선과 악의 지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선을 맛보았다는 것인데, 그래서 항상 악과 대비되는 상태에서 선을 규정하게 된다는 말이죠. 선은 반드시 그 옆에 악이 놓여있게 되는데, 그래서 "나는 저쪽이 아닙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나는 그 정도로 인간 말종은 아닙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 윤리와 도덕 !!

그것이 선이 되는데, 그러니 악마는 인간을 선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사회적으로는 그것을 '윤리' 라고 하고, 개인적으로는 '도덕'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동양철학에서도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어쨌던 자기는 선한 사람으로 계속해서 살고 싶다는 겁니다. "왜 선하고 싶은가?" 라고 물으면, 그런 것은 묻지 말라고 하는데, 자기는 무조건 선하고 싶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선한 나를 누구라도 건드리게 되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마지막에 누가 건드립니까? 주님이 심판을 하시는데, 그래서 그 주님을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결정이 선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선한 것으로 이미 그 운명을 확정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니 그만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선과 악 중에서 악을 보고 악하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을 함께 묶어서 악하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즉 선과 악이 합쳐져서 악이 되는데, 하지만 인간은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묶여진 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나는 무조건 선이다 !!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무조건 선이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이라도 자기를 흠잡을 수 없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형적인 사탄의 앞잡이 되는데, 그런 대표적인 자가 바로 가롯유다라는 말이죠. 예수님을 팔아먹었는데, 그리고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반성까지 했다는 겁니다.

자기 잘못에 대해서 자기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가 속죄하려고 했는데, 그러한 자가 바로 악마에게 속한 자라는 말이죠. 속죄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그런 자가 바로 전형적인 악마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악마가 그런 식으로 인도한다는 말이죠.

회사에서 온갖 나쁜 짓은 다 해놓고, 거기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들어내려고 무슨 짓을 합니까? 유니세프와 같은 단체에 회사 이름으로 기부금을 내고 한다는 겁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목사에게 순종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것이 마귀의 짓이라고, 과연 어떤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말이죠.

* 저임금 고효율의 파티마 병원 !!

그야말로 완전히 무임금인데, 천주교가 그렇게 해서 커왔다는 겁니다. 파티마 병원의 수녀들의 월급이 50만원 정도라고 하는데, 그래야 자본이 모이고 병원이 커진다는 것이죠. 수녀원에서 된장과 간장을 파는 이유도 그러하고 말이죠. 주의 이름으로 봉사한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노동은 시키되 월급은 적게 주겠다는 것인데, 그게 천주교가 해왔던 짓이고, 오늘날 교회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신천지도 그러한데, 그렇게 해야 조직이 커지고 힘이 모인다는 겁니다. 교주가 되려면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정상적인 임금을 주고는 모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노동착취를 해야 기업이든 교회든 커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자본은 미래성이고, 그 미래성을 위해서 지금 누군가가 희생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 희생을 하면 하늘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이슬람인데, 오늘날 종교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위선인데, 기업이든 교회든 간에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는데, 오히려 "가만히 있어라. 내가 하겠다" 라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그게 곧 은혜인데, 하지만 그냥 줘도 먹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그냥 주시겠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저도 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주님은 "너는 몰상식보다 더 내려가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죽어 마땅함' 인데, 주님은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취직을 시켜서 살려줄게"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긴장감이나 심리적 중압감,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닌 자기 조작이라는 겁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니면서 그렇게 속아왔다는 말이죠.

* 노아언약 !!

방금 이야기한 것이 곧 성경에 나오는 노아언약인데, 즉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언약이 처음 나오는 것이 노아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교재에 나오는 '언약의 연속성'을 하면서 처음 언급한 것이 이 노아언약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창세기 6장 17절과 18절을 보겠는데,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는데, 그 광경을 신약의 마태복음에서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라고 하는데, 즉 상식이란 말이죠. 이런 상식이 통하고 유지되는 세계, 그런 인간적인 세계가 갑자기 들이닥친 하나님의 홍수로 인해서 물에 잠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육지에 사는 짐승들도 죽게 된다는 것이죠.

(창 6: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번, 죽여야 하겠다. 2번, 살려야 하겠다" 라는 것인데, 이 중에서 몇 번입니까? 1번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육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물로서 다 없애버리고 말았는데, 그래서 노아언약에서는 인간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죠. 노아가 있다고 우기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 없애기 위해서 홍수를 내리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과 짐승을 없앤다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그 창조에 대해서 스스로 부정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은 그 순서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1번, 하나님이 하나님을 친다(죽인다). 2번,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것도 죽인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8장 20절에 나오는데, 노아홍수가 끝나고 난 다음에 말이죠.

* 하나님이 하나님을 쳐 !!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기에 보면, 노아가 홍수가 끝난 다음에 방주에 동승했던 정결한 짐승 중에서 골라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데, 이 번제라는 것은 모두 다 태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태우는 불이 심판의 불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깥은 물로서 심판을 하시고, 방주 안에서는 가장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을 골라서 불로 태워서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정결하고 거룩한 것을 태웁니까? 그러면 이것은 거룩한 창조물이 거룩한 하나님에 의해서 태워지는, 즉 심판해지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치신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종교는 이런 것이 없는데, 이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친다고 하는 것은 거룩한 분이 거룩하지 못한 것을 쳐야한다는 말이죠. 죄에 대해서 그 책임을 물으면서 치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물론 가끔은 국가에서 죄가 없는 사람을 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을 정권교체시기에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고, 악한 사람은 벌을 주고 착한 사람은 상을 주는 것이 상식이라는 겁니다.

* 선악을 몰라도 유지되던 에덴동산 !!

하지만 그러한 선과 악에 대한 결정이, 그게 과연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 즉 선악을 모르는 상태에서 에덴동산이 유지가 되었습니까? 되지 않았습니까? 유지가 되었는데, 그러면 그렇게 유지가 되는 에너지와 동력은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죠.

우리는 매일 선과 악만 생각하는데, 그런 윤리와 도덕, 즉 선과 악을 몰라도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몰라도 에덴동산이 제대로 잘 돌아갔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를 다시 찾으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 만들어졌고 에덴동산에서 살았는데, 그것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죠.

* 부정이 포함된 완벽 !!

여기서 이 '에덴' 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완벽한 희열의 동산'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완벽함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부정(否定), 즉 "무엇을 하지 말라" 라는 것이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 부정이 조건이 되어서 완벽함을 유지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믿는 것이 곧 천국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기 때문에 말이죠. "너는 이 완벽한 천국에 거들지 마라" 라는 것인데, 즉 "네가 도와준다고 하면서 하는 짓거리가 천국에는 방해가 될 뿐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원리인데,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로 본다는 말이죠. 성령이 남편이 되었기에, 그래서 아내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구하지 않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이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냥 내 품에 있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그냥 드루와 !!

대중가요에도 복음적인 것들이 제법 있는데(ㅋㅋ), 남진의 '둥지' 라는 노래에 보면, "그냥 내 둥지에 와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둥지를 '예수 안', 혹은 '남편 안' 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런데 아내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남편은 율법적인 남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로마서 7장에서는 성령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내는 어떻습니까? 아내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남편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남편이 율법적인 남편에서 용서하는 남편으로 바뀌었다는 말이죠. 즉 "그냥 드루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의 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죠.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런데 어떤 노래도 있는고 하니까, '바다에 누워' 라는 노래에 보면,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작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나 하나' 라는 말이죠. 주님이 남편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남편이 해주신 모든 것을 모독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아내가 되어서 주님이 남편이라고 하면서도 평소에 남편이 없이 살았던 그 행세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주여,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같이 살면 되는데, 그런데 계속해서 "저는 남편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같이 살고있는 남편이 무엇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냥 같이 살면 되는데, 왜 자꾸만 믿는다고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믿음 자체의 정당성을 보장해달라는 것인데, 즉 "나도 아내 값을 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혼자 살면 되지, 굳이 남편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내가 된 자는 아무 값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다시금 창세기 8장으로 돌아와서, 왜 더러운 짐승을 잡는 것이 아니고 거룩이 포함된 깨끗한 짐승을 잡는고 하니, 그렇게 짐승을 잡으니 주어진 것은 땅이라는 겁니다. 이게 좀 어려운 문제인데, 중간에 노아홍수가 있었고, 홍수 이전에 땅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홍수이후에 또 땅이 있다는 겁니다.

* 무지개 !!

그러면 이 두 땅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창세기 9장에 나오는데, 그게 무지개라는 말이죠. 홍수이전에는 무지개가 없었고, 이후에는 무지개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무지개는 일종의 '프레임' 인데, 우주를 덮는 거대한 상자와도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지개가 땅을 덮고 있는데, 그 어떤 원리를 지켜주는 보호막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창 9: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창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예를 들어서, 호텔요리에 보면 쟁반에 음식이 그냥 담겨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위에 뚜껑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굉장한 음식이 들어있는 줄로 알고 들어보는데, 그러면, 삶은 계란이 달랑 하나 들어있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아무튼 그렇게 큰 박스로 둘렀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무지개가 무엇을 보는고 하니, 땅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거룩한 제물이 흘린 피를 이 무지개가 주목하고 있다는 말이죠. 원래 이 땅에는 피가 없는 땅인데, 그런데 이제는 피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개인적인 피는 아벨이 흘렸지만, 본격적으로 인류전체를 상대하게 될 때는 무지개가 피를 주목한다는 것이죠. 즉 "거룩한 피를 흘렸다" 라는 겁니다.

* 악함에도 불구하고 !!

그래서 창세기 8장 마지막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노아가 정결한 제물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니,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 받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이 '악함' 이라는 단어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서 그냥 봐주고 넘어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완전히 뒷끝작열이라는 말이죠(ㅋㅋ).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흠향시는데, 그런데 그 주위에는 악함과 악함이 포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지개가 떴다고 하면, 이 무지개는 보호역할인데, 즉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증거이고, 그래서 계속해서 이 땅이 유지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은혜가 은혜가 되도록 주어지는 것은, 이 땅의 많은 영역 가운데서 중심부가 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정결한 제물의 피라는 말이죠. 그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악하다는 것을 아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우리 인간을 멸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그게 21절과 22절에 보면,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질서체계를 유지시켜주시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이 땅이 유지가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악하다고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의 착함도 아닌데, 인간은 착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악함을 무시하고 놓치면 반칙이라는 말이죠.

* 인간구원은 없다 !!

하지만 그렇게 악함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고 하는 것은 누구 덕분인고 하니, 정결한 피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두고 '언약'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란 것은 주어진 언약구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인데,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인간구원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인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구원파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이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이 "당신은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즉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지요? 그러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비단 구원파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 모든 교회가 다 그러한데, 그런 식으로 전도하는 것 자체가 마귀가 시킨 것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개인구원은 없는데, 그래서 어제 낮에 "이 세상에 행복이란 아예 없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행복, 즉 복을 바라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행복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주제파악을 해야하는데,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악하면서 행복을 바란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행복, 즉 복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사람들이 마치 파리 떼처럼 달라붙는다는 말이죠. 부흥사들이, 아니 목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그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행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데, 그래도 행복하지 않아서 불평을 늘어놓으면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하시고 봉사하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렇게 해서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독수리처럼 위로 날아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돈을 더 내세요" 라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없어 !!

그러니 다단계 사기꾼에게 걸린 것인데, 인간에게 행복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나라가 주님의 나라이지 우리 자신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기꾼에게 속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데,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악한 인간이 주님에게 쓰임을 받는다고 하면, 그것보다 더 감사할 일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언약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는 것이지, 그 언약을 소유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언약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밤하늘에 보면 별들이 있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보면서 그 별을 헤아린다는 말이죠. 특별히 시인들이 그렇게 많이 하는데, 윤동주의 경우에는 "별 하나, 별 둘" 그렇게 헤아리면서 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별을 헤아리게 되면 자기가 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우리 자신이 별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별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늘의 궁창에 올라가서 하나의 별로 박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별 자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일부분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헐리우드의 스타는 아니고 말이죠(ㅋㅋ).

사람들은 이렇게 천국이 있으면 그 천국에 자기가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기는 계속해서 살아있게 되는데, "나는 천국에 가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별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별이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별 자체가 둥지인데, 우리교회에도 별이 있는데, '남별이' 라고 말이죠(ㅋㅋ).

* 너희는 별 집단 !!

그래서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두고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별의 집단'으로 보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가면 그게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의 언약에서 탈락하면, 너희가 별이 되어도 그 별에서 탈락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신 28: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이라

이것을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데, "너희들, 앞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생활을 잘해라. 알겠지?" 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구원이 아니고 별의 집합체, 즉 언약의 집합체다" 라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별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욕심이라는 겁니다. 그런 생각이 아무리 난다고 해도 말이죠.

오늘 교재의 제목이 '언약의 연속성' 인데, 이것은 "시간의 연속성이 아니다" 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즉 언약과 시간은 영속성의 방향이 서로 반대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교재 148페이지를 보면, 거기에 누가복음 9장 31절, 즉 변화산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 예수님의 '별세' !!

여기에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서로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여기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세 분이 말씀하시는 그 주제가 나온다는 말이죠. 세 분 중의 한 분인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땅의 시간에서는, 예수님보다 모세가 선배고 엘리야가 선배라는 말이죠. 심지어 세례요한도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5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라고 하는데, 즉 시간의 역전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이렇게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것은, 기존의 시간은 완전히 무시를 당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시간의 역전현상 !!

조금 전에 제가 "인간의 과거라는 것은 현재의 내가 조작한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인간은 과거를 찾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상대방이 "과거에 내가 이랬다. 저랬다" 라는 것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들어주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현재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자기가 대충 편집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당성인데, 그래서 "나는 옛날에 이렇게 죄를 지었다" 라고 하는 것도 자기 정당성의 일종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그렇게 자기 죄를 안다는 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현재의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인간의 하는 모든 말은, "나는 상식적으로 괜찮은 인간이야" 라는 것을 변명조로 늘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아인쉬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시간을 역전시켜서 자기 운명을 뜯어고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나는 이런 인생을 살기 싫어. 재벌가문에서 태어나고 싶어" 라고 해도,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돌고 도는 시간루프가 불가능한데, 즉 타임머신이 발명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바로 "물리적으로 시공간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아인쉬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주가 있다면, 그것을 식빵처럼 쪼개본다는 말이죠. 그러면 'A' 라는 우주가 있고 'B' 라는 우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A' 라는 우주에서 오늘 2021년 10월 4일에 일어난 일이, 'B' 라는 우주에서는 이미 500년 전에 일어났다는 말이죠. 같은 좌표에서는 동시성이 되지만 다른 좌표에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인쉬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관찰해서 실제로 이 이론을 증명했다는 말이죠. 그게 빛의 속도인데, 빛으로 인해서 이 우주공간이 곡면처럼 휘어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간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어떤 둥근 구의 표면처럼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 있는 물체에 의해서 안으로 쑥 들어가면, 그만큼 중력도 달라진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빛의 코스가 곧바로 직선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굽어진 곡면을 따라서 오는데, 그래서 시간은 차이가 난다고, 그렇게 아인쉬타인이 예언을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후대의 과학자들이 아프리카의 개기일식을 관찰해서 증명을 해냈는데, 해가 밝다가 일식으로 인해서 잠시 어두워질 때를 조사해서 말이죠.

같은 좌표에서는 통하지만, 다른 좌표에서는 시간조차도 그때그때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현재라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과거일 수도 있고 또한 미래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간과 공간도 다 상대적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바꾸어서 말하면 "절대적인 것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별세신학 !!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의 구원, 즉 자기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대해서, 그게 시간의 역전 정도가 아니고 시간의 출발점, 즉 시간이 화산의 마그마처럼 용출되는 그 출처는 있어야 하는데, 그 출처가 무엇인고 하니, 땅의 시간이 죽는 그 지점이 하나님 나라의 시간의 시작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곧 예수님의 별세인데, 그 별세로 인해서 세례요한의 말처럼 시간이 역전된다는 겁니다. 모든 시간은 한 구멍을 향해서 몰리고 쏠려서 빨려드는데, 마치 블랙홀처럼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것을 변화산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서 말이죠. 그래서 '별세신학' 이라고 해서, 어떤 목사가 있었는데 말이죠. (녹취자 - 혹시 이중표 목사인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믿는 것은 가짜 예수다" 라고, 즉 "내가 어디에서 죽었습니까?" 라는 것을 묻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는 십자가에서 벌써 죽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현재 내가 살아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불신자란?

그러면 불신자는 무엇인고 하니, 그 개념이 새롭게 규정이 되어야하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이 불신자가 아니고, 우리가 가롯유다를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죠. 불신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행했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 그들이 곧 불신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행했던 모든 것은 어디에 집약이 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신학, 즉 유대교라는 말이죠. 그 전문가들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죽일 때 주도했던 3종세트, 즉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

여기서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관리했던 자들이고, 또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생활화를 외쳤다는 말이죠. 즉 말씀은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말씀을 연구했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어를 원어라고 하면서 문자에 매달려서 말이죠.

그 당시에는 언어를 쥐고 있는 자들이 엘리트인데, 국가는 문자해독, 즉 법의 해독이란 겁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데, 그들이 검사와 판사들이라는 말이죠. 국가는 법으로 짜여져 있는데, 그리고 그 법은 문자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문자가 언어구조에 의해서 인간의 실천을 강요한다는 것이죠.

사두개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로서, 즉 "성전이 없으면 우리는 택한 백성이 아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다" 라는 겁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성전만이 아니고 율법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조상들은 말씀을 듣기만 했지 실천에 옮기지 않아서 망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서기관들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하려고 하면 말씀을 더욱 더 연구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3종세트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불신자' 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배신을 때렸던 배신자들이라는 겁니다. 교회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는 자들이 불신자가 아니고, 절에 가는 자들이 불신자가 아니고, 그러니 불신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양성되고 있다는 말이죠.

* 오늘날 교회는 불신자 양성소 !!

옛날에 이스라엘이 했던 것을 하나님은 받지를 않는데, 주님은 주님이 하신 것만 받으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껍데기이기 때문에 말이죠. 주님은 껍데기인 우리와 함께 살면서, 주님이 하신 것만 주님은 받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받는데, 껍데기로서 말이죠.

그러니 그 껍데기 안에는 주님이 하신 것만 담겨있어야 하는데, 과거에 이스라엘이 했던 것들이 들어있게 되면, 그게 바로 언약에 대한 위반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평생동안 하는 짓은 위선인데, 그 위선은 자기 기억에서 나오고, 그 기억은 과거에 있었던 것들 중에서 괜찮은 것들을 끌어 모아서 지금의 자기를 정당화는 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살만 해서 이 땅에 산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착하다고 하면서 살라고 해서 산다. 하나님이 나의 착함을 보고 복을 주셔서 산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즉 선악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셨으니 바르게 살자" 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이미 이스라엘이 다 해봤던 것들이라는 말이죠. 여러분이 복음서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을 가졌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특히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사울 시절에 얼마나 열심히 설치고 했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열심의 강도가 세어지면 세어질수록 누구를 핍박하는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그런 짓을 한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사울에게 죽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진짜 예수님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그 예수님의 자리가 자기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지금 자기 자신에게 한 번 질문을 던져 보라는 말이죠.

자기 정당성을 받아주는 자리입니까? 그게 아니면 자기로 인해서 핍박을 받는 자리입니까? 주님을 핍박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는 정당하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 관계를 설정하고 나서 복음서를 읽어보라는 것인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말이죠. 그러면 이해가 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실력을 믿고 어렵게 해보겠는데, 여기서 요한복음 2장을 보겠습니다. 이것도 시간의 역전과 관련이 있는데 말이죠. 2장 1절부터 4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요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 예수님의 '때' !!

여기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하는 결혼식인 것 같은데, 그런데 손님들이 오는데 그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에게 부탁을 하니, 예수님께서 "어머니!" 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보면 그야말로 생뚱맞은 것인데,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나오시느냐는 말이죠. 그냥 좋게 "나는 여기에 포도주를 만들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런 것을 만들기 싫습니다" 라고 해도 되는데, 왜 굳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오는데, 그 이유는 더욱 생뚱맞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자기와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자기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보고 "어머니, 지금 제가 포도주를 만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뭐라고 하십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나오시는데,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라고 했는데, 마리아가 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는고 하니까,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의 때, 즉 예수님의 시간 바깥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마리아 당신의 때' 라는 겁니다. 이 때는 세상 자체를 대변해주고 있는데, 즉 "당신이 놀던, 당신이 속해있는 세상, 그때 흐르던 시간, 당신의 때인데, 그러니 그 당신의 때와 내 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시는데, 그것은 여자가 속해있는 인간의 때는 예수님 자신의 때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아울러 이야기하시면서, 진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자기의 때를 몰고 온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 예수님이 제공한 것은 물인가? 포도주인가?

것이게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예수님을 포도주를 제공하셨습니까? 그게 아니면 물을 담은 항아리를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까? 포도주가 아니고 물인데, 인간들의 때로 보면 분명히 물이라는 말이죠. 물론 마리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치를 챘는데, 예수님께서 시간의 역전을 통해서 장차 자신이 해야할 일, 즉 자기 때를 앞당겨서 보여주신다는 것을 말이죠. 그것을 '표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경우에도,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만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움직이는 표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되어서 황홀해야 하는데, 우리가 스스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을 두고 '성도'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지순례를 간 것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물이 든 항아리를 제가 직접 보았는데(ㅋㅋ), 가나안 동네에 가서 말이죠. 물론 그 당시 항아리는 아니고 비슷하게 생긴 것을 가져다가 놓았다는 겁니다. 그런 항아리에 물을 채웠는데, 누가 봐도 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하인들이 그 물이 든 항아리를 가지고 가는데, 과연 얼마나 갔을 때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을까요? 만약 그 거리가 10미터라고 하면, 9미터 99센티를 갔을 때도 역시 무엇이라는 겁니까? 여전히 물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의 때로 보면 물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서 마셔보니, 물이 아니고 포도주라는 겁니다.

* 자기 부정이 없으면, 주님의 일이 아냐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주님의 때는 인간을 부정하는 요소와 관계가 있다는 말이죠. 아까 무지개는 무엇을 주목한다고 했습니까? 땅에 흘린 피인데, 그러니 인간을 부정하는 요소와 직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자기 부정이 나타나지 않으면 주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아무리 연구해도 주님의 일을 알 수가 없다. 나의 지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라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때는 인간의 부정성을 포함해서만 나타나는데, 그래서 인간은 물로 여기고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그게 주의 때에 합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측도 못하고 예상도 하지 못한,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보통 잔치집에 가게 되면, 처음에는 맛있는 포도주가 나오다가 나중에는 맛이 좀 떨어지는 것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 집의 경우에는 어떻게 뒤에 좋은 포도주가 나오느냐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조금은 따질 수가 있는데, 술이 취했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구별할 수 있느냐고 말이죠(ㅋㅋ).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지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 저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복을 받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두고 '신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불신자 !!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강의제목을 '불신자' 라고 하겠는데, 불신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곧 불신자임을 인정할 때, 그런 자가 곧 신자라는 말이죠. "불신자, 나오세요" 라고 하면, 주저하지 말고 "예,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손들고 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가 자기 부정을 내부에 장착하고 있는 자라는 말이죠.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하나의 성경지식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나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뭐라고 합니까? "얘들아, 예수님이 시키는 것은 토를 달지 말고 그대로 해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리아는 뭔가 예수님이 일을 벌린다는 것을 알았는데, 마리아 자신의 때와 예수님의 때를 구분하는 것을 보아서 말이죠. "아하, 인간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지 않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벌리시는 일은 인간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없는데, 오히려 인간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주님의 고난이 재료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자살하신 것이 아니라 맞아죽으셨는데, 때리는 그 역할을 인간들이 하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만 가롯유다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즉 "끝까지 나는 나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속죄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택했다는 겁니다. 물론 사탄이 그렇게 했는데, 하지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반대였다는 말이죠. 물론 그들도 배신을 하기는 했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니,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강의한 것으로 바꾸어서 표현을 하면, "나의 때는 이미 없어졌고, 찾아오신 주님의 때에 모든 것이 함몰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죽던지 살리던지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 자체가 사랑인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를 너의 허리끈을 잡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물론 사도바울도 예수님에게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당했는데, 자기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지금 이 대로의 모습으로 !!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곧 주님의 성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무엇을 더 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모습 이 대로가 주님의 성과이고 열매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인데, 목이 말라서 물을 길러오기는 오지만 진짜 물은 우물 속에 들어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 그분이 곧 자기의 샘물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가스펠 송에 보면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 라고 하는 가사가 있는데, 다들 이 노래를 아시죠? 최미가 불렀는데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 헛된 것이 우리 때에서는 헛되지만, 그것이 주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헛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성도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열심히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만드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주님의 일인데, 자기가 알아서 해야할 자기 일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입고 먹고 자고 하는 그 모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자기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데, 그러니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된다는 말이죠.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상식으로 사는 것이 편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주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 진짜 편안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롯유다처럼 억지를 부리면서 살지 않게 해주시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주님의 일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10,12 오후 5시에 마침.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게 주님이 만들어주신 포도주임을 알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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