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4 - 힘찬 능력
21,09,14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성령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
오늘은 교재 13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를 미리 말씀을 드리면, 오늘은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여기 교재에도 나오지만,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보면,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고 여기 17절에 보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라는 것이죠. 일종의 공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은, "당신은 자유롭습니까?"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실력을 믿고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면, "성령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자유가 없는 곳에는 성령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이 없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그게 사도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육' 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자유가 없는고 하니까, 우리의 육, 즉 육체, 혹은 육신 때문에 자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육은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자기 부모로부터 만들어진 것인데, 자기보다 먼저 부모님이 계시고, 그 부모님으로 인해서, 즉 어머니와 아버지가 양쪽이 모두 다 육이기 때문에, 그래서 육이 태어난다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분해가 되는 육 !!
이렇게 육이 있으면, 그렇게 있으니 '존재' 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유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육의 있음, 그것으로 인해서 자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자유를 주신다는 것은, 이 육의 존재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육을 그만 분해를 해버린다는 말이죠.
어제 오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은 육체이니 고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기체로 바뀐다는 말이죠. 흙으로 부서지다가 태워버리면 공중의 기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분해인데, 그렇게 분해가 되는 현상이 일평생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동반되어서 세월이 흘러가면 인간은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살다가 죽게 되면 박테리아가 달려들어서 분해를 시킨다는 것이죠. 미생물이 한 때 살았다고 하는, 그 유기질을 그만 무기질로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성경은 그 무기물을 흙이라고 하는데, 즉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고체에서 기체로 분해가 되는데, 이것을 누가 한다는 겁니까? 박테리아가 하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하시는 일은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들을 원형(原型)으로 돌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죠. 원래의 상태로 말이죠.
그런데 이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여기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주의 영'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우리 인간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 시간을 개입시켜서 그만 늙게 만들어서 분해를 해버리는데, 즉 원형에서 온 것을 그 원형으로 다시 되돌리는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 액체자아 !!
주일 낮에는 이것을 'Flux' 라고 했는데, 이 플럭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흐름'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흐름의 특징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흐름을 잘 표현한 것이 액체라는 말이죠. 그래서 고체가 기체가 되기 이전에 액체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주일 낮 시간에 '액체자아' 라고 표현을 했다는 겁니다. 즉 액체와 같은 '나', 날마다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흘러간다는 것이죠.
우리가 거울을 보면 자기가 고체인 줄로 알겠지만, 하지만 어제와 비교를 해보면, 그만 늙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래 만에 보면 그만 다들 얼굴이 쭈글쭈글하다는 말이죠. 아이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어릴 때는 얼굴을 만지면 탱글탱글한데,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재미로 아이를 낳는다는 말이죠(ㅋㅋ).
* 아, 탱탱하던 나의 피부 !!
어떤 사람은 5명까지 낳았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귀엽다' 라고 하다가, 나중에 힘이 드니까 '너무하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극장'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죠. 정작 엄마는 전복을 키우고, 아이는 친정 엄마가 다 키운다는 겁니다. 하나도 힘든 세상인데, 5명을 키우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는 말이죠.
아무튼 어릴 때 그렇게 빛나고 탱탱하던 피부가 그립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에는 자기에게 보고 싶어하는 그런 요소가 없다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소실이 되어간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성령, 즉 주의 영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왜 고체를 액체로, 즉 흐름으로 바꾸시는고 하니,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경우에는,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령을 주도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인데, 하지만 그 이전까지 성령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난 다음에, 즉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오르고 난 뒤에는 성령을 보내고 보내지 않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결정하신다는 말이죠.
* 성령을 받는 분이 성령을 주신다 !!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면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저분이 성령을 받는데, 그것은 본인이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등극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는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요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러면 "성령을 받는 분이 성령을 주신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처음 나오는 어려운 대목인데 말이죠. 왜 성령을 받은 자가 성령을 주시는고 하니, 그것은 곧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상태를 그대로 재생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 사라지는 자아 !!
이게 왜 어려운고 하니, "나는 천국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성령이 필요하다. 누가 주지? 주님이 주시는구나. 그러면 주님에게 부르짖어야지" 라고 하면, 그러면 자기는 액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고체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즉 자기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자기는 옛날 그대로 있다고 여기는데, 그래서 "예수님만 성령을 받나? 우리에게도 좀 주시면 좋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이 그만 그 사람의 모델이 되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를 고체인 상태에서 분해를 시켜서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예 '나' 라는 존재를 없애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애는 것을 '자유' 라고 하는데, 제가 처음에 강의를 하면서 자유가 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라고 했지요? 무엇이 있는데, 그렇게 자기가 있게 되면 "세상이 돌아가는 그 모든 것이 내 욕망에 맞추어져야 한다" 라고 하는 부담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주눅이 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도를 해도 자유가 없는 기도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꼭 응답이 되어야할 텐데" 라고 하는 것인데, 즉 남들에게 "당신은 기도를 하면 응답이 되네요" 라는 기대감이 가득한 상태에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잘못된 기도를 한다기보다는, '나' 라는 존재로 인해서 주님이 준비하신 자유를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죠.
* 누나의 새벽탁송 !!
예를 들어서,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는 총각이 있는데, 마침 그 근처에 시집을 간 누나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남동생에게 매일 새벽에 찾아와서는 밑반찬을 정성껏 만들어서 주고 간다는 것이죠. 그것을 일명 '새벽탁송'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면 그런 경우에 남동생이 따로 반찬을 만들면 되겠습니까? 만약에 따로 만든다고 하면, 그것은 누나가 준 반찬을 먹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누나를 무시하는 것도 되지만, '나' 라는 존재가 우선이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 입맛이 우선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유가 아닌데, 누나 입장에서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남동생을 죽은 존재로 간주하고, "너의 것이 아닌, 누나가 입을 것 먹을 것을 준 공로로, 즉 누나의 노력으로 자라게 되면, 그 남동생은 누구의 소유가 되는고 하니, 누나의 소유가 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자유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항상 무엇이 충돌되는고 하니, 주님이 은혜로 주신 것과 자기가 따로 할 수 있는데, 즉 자기 존재를 부각시킨다는 말이죠. "아하, 내가 이렇게 실력이 좋았어? 인간성이 좋았어?"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부르짖으면 준다고 하니, 자기가 알아서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자기는 사라지기 싫다는 것인데, 자기 있음을 있음 그대로 끌고 가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면 고체가 계속해서 고체가 되는데, 즉 존재와 존재의 연결이라는 겁니다.
* 틈새 !!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로 어려운 대목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성령을 받은 자의 모델이라고 했는데, 여러분도 기억이 나지요?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틈새' 라는 말이죠. 즉 틈이 생겼다는 것이죠.
여기서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을 보겠는데, 제가 강의를 하면서 가능한 한 성경을 직접 찾지는 않으려고 하는데, 찾는 것도 힘이 들고, 그리고 계속해서 찾아보면 여러분이 평소에 성경을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이 들통이 난다는 겁니다(ㅋㅋ).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오해해서 받아들이는고 하니,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 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고, 즉 육이 이렇게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본다는 말이죠. 틈새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있고 예수님이 있고,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나는 죽어도 살고, 살아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 거침이 없는 성령의 능력 !!
하지만 이 요한복음 11장의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의 어떠한 거침이 없는 능력, 성령이 개입하셔서 틈새를, 즉 예수님은 모델이라는 겁니다. 죽었던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셨는데, 죽은 예수님을 살려내는 것이 성령의 거침이 없는 능력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요한복음 8장 11절에, 아니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잠에서 깨어난 거북이 !!
예를 들어서, 거북이가 움직이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데, 그러면 그 위에 먼지도 쌓이고 낙엽도 떨어지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는 모르지만, 거북이가 잠에서 깨어나서 움직이면 거침이 없이 낙엽이든 뭐든 다 날아간다는 말이죠. 부활의 능력은 그렇게 거침이 없다는 겁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곧 성령의 능력인데, 그야말로 거침이 없다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이렇게 있으면, 여기에 코로나가 덮이고, 북한의 핵문제가 덮이고, 또 대통령 선거가 덮이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만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뭔데?" 라고 하면서, 마치 거북이가 잠에서 깨어나서 움직여서 낙엽을 치우듯이 그렇게 자기를 덮고 있는 것들을 다 치워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말씀은 자기가 잘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데, 그러니 자기 자신은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어서 예수님의 능력을 증명하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 육의 한계를 보여준 부자청년 !!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스스로 자기를 완전하게 하려는 자가 등장하는데, 4글자로 '부자청년'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는 온전한데, 그런데 그 온전함을 더 완벽하게 하려고 예수님에게 왔다가 근심하며 돌아갔는데, 즉 육의 자리로 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이 부자청년을 왜 언급하시는고 하니, 이것이 육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겁니다. 육은 그게 좋은 힘이든 나쁜 힘이든 이 세상의 힘을 모으는데, 그리고 그 힘을 축적한다는 말이죠. 육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힘을 끌어 모은다는 겁니다. 그게 고체상태라는 말이죠.
자기가 완전해질 수 있는 힘은 모두 다 끌어 모으는데, 교회에서 주장하는 성화론이 그렇다는 겁니다. 1단계, 2단계, 그렇게 해서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힘을 비축하는데, 즉 불멸의 위신의 챙긴다는 겁니다. '불멸의 위신' 이라는 말은 처음 듣지 싶은데, 다른 말로 하면 끝이 없는 자기 명예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자기 이름을 더 높이는 바벨탑 정신이라는 겁니다.
이게 육인데, 그러니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비축용으로 여기는데, 그리고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까지도 거기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믿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는 그 믿음까지도 다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가 삼남매였는데, 즉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라는 겁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데,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데, 즉 요한복음 11장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데, 그 뒤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난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죠.
구원이란 것은, 인간은, 즉 육이라는 존재는 그 본색이 어떠한지, 그것을 노출시키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달려가신다는 겁니다. 즉 "나의 믿음이 나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 자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은 성령이 임해야 하는데, 성령도 없이 자기 믿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데, 즉 육으로 이해하는 성경과 성령으로 이해하는 성경이 다르다는 겁니다. 육으로 하는 성경해석은 어떻게 해도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성령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육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육과 영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말이죠. 육은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거울에 비친 것이 곧 육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하나의 플럭스, 하나의 흐름으로 보시는데, 즉 분해과정에 있다는 말이죠.
* 나는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입장에서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상태가 아니고 말이죠. 그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9장에 가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상태에서 요한복음 11장의 "나는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을 다시 보면, 그 의미가 어떻게 됩니까? "내가 먼저 죽어도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내가 너에게 준 성령으로 인해서 나를 믿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니 이것은 자기가 잘 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죠. 별로 어렵지 않은데, 우리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라고 하는,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겁니다.
* 힘찬 부활의 능력 !!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혼자 놀고 계십니까? 성령을 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아주 부지런히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이 첫 번째 모델인데, 즉 첫 번째 부활인데, 우리는 두 번째 부활이고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도 부활을 합니까? 우리도 역시 부활을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기에 말이죠. 물론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 해당사항이 전혀 없지만,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예수님의 거침이 없는 그 힘찬 능력이 그야말로 힘차게 왔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의 존재이유, 즉 우리가 이 땅에서 분해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분해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분해가 되도록 맡기면 된다는 겁니다. 분해가 되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힘찬 능력, 즉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3일 동안의 틈새가 있었는데, 우리는 이 틈새가 너무나도 무섭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서워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자기가 무서워한다는 것은 존재가 있다는 것인데, 그 존재가 스스로 자기 방어를 하려고 하다가보니 무섭다는 겁니다.
* 평생을 벌벌 떨면서 !!
오늘 분해라는 말을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고체인 컵이 있으면 깨어질까 신경이 쓰이지만, 하지만 액체인 물이 흘러있으면 닦으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행주로 닦았다고 해서 아깝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마치 깨끗한 유리컵으로 여기고, 그렇게 평생을 보호해오면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모습인데, 그야말로 평생을 벌벌 떨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 집안을 이렇게 거들내어 버리면 어떻게 하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을 보시고 그만 우셨다는 겁니다. 물론 엉엉 우신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죠. 답답해서 흘리신 눈물인데, 즉 "이 답답아, 너희는 액체야. 왜 너희들의 능력으로 살려고 해?" 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라는 말이죠.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다시 하겠는데, "나는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을 보면서, 자기에게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을 살아서 일하고 계신다" 라는 것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만이 고체인데, 우리는 주님 앞에서 흘러간다는 말이죠.
* 생수의 강 !!
여기서 에스겔서 47장을 보겠는데, 가능하면 성경을 직접 찾지 않았다고 했지 아예 찾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47장 1절을 보겠습니다.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여기에 보면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라고 되어있는데, 즉 고체인 성전 밑에서 액체가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관성이 있는 작업인데, 성령을 이렇게 주신다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요한복음 7장을 보면, 37절과 38절입니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여기 38절에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만들어진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액체가, 즉 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물이 바로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생명수 강이라는 말이죠.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우물가의 여인 !!
생명나무가 천국에 고체로 있는데, 그것을 이 지상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액체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강물이 흘러간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4장에 보면 그 유명한 우물가의 여인이 나오는데, 여인은 고체이고 우물은 액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인이 우물을 긴다는 것은, 그 액체는 고체에 해당이 되는 액체가 된다는 말이죠.
(요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주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우물로 만드시는데, 그래서 다시는 물을 길지 않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 그 물을 마시면 목이 마르지 않는다는 말이죠. 바로 이 두 가지를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주님에게 이용을 당한 것인데, 그 물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주님에게 소유를 당했다는 겁니다. 우물로서, 즉 주님의 자기 생산물로서 말이죠. 그러면 주님이 생산한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나무 과실인데, 그것을 계속해서 생산하는 가게로서 우리를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는 것을 통해서 계속해서 부활의 영이 나온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령은 부활의 영이니 말이죠. 부활의 능력, 즉 죽어도 사는 능력과 살아도 죽지 않는 능력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기 위함인고 하니,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도 신나게 말이죠.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일이 무섭습니까? 무섭지 않습니까? 전혀 무섭지가 않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존재는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기에 말이죠.
그런데 살아가면서 무서워한다는 것은, 말씀이 지시하는 그 자리에 자기가 들어서 자기에게 지시를 했다는 겁니다. 즉 "나를 지킬 것은 나밖에 없다" 라는 것인데, 고체인 자기를 방어하는데 평생을 다 보내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 고체 안에는 자기 자식과 자기 재산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자유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는 것인데, 그러니 자유를 가로막은 것은 바로 누구라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 불멸의 위신 !!
목사가 교인들에게 왜 목돈을 강요하는고 하니, 푼돈을 내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큰 액수를 헌금하게 되면, 그게 그만 자기 소유가 되어서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평소에 부조를 한 것이 있어서, 자식을 결혼이라도 시켜서 본전을 뽑고 나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을 팔아서 그 일부를 교회에 헌금을 했다고 하면, 그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복음이 아니고 돈 때문에 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불멸의 위신' 이라는 겁니다. 불멸의 이순신이 아니고 말이죠(ㅋㅋ). 인간은 "내가 이 정도야" 라고 하는 자기 위신 때문에 살아간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여기는데, 그것을 자기 연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아침마다 "오늘도 착하고 바르게 살자"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닦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닦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나이가 들어서 치매에 걸리면 불멸의 위신이 아니라 불멸의 망신이 된다는 겁니다. 온갖 해괴망측한 것들이 다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60대가 되면 "요즘 내가 정신이 없어" 라고 하는데, 아직은 그게 퍼센트가 낮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70이 되면 반반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80이 되면 망측스러움이 다수라는 겁니다. 그것을 고상한 말로 '노망' 이라고 하는데, 노망이 들린 장로가 되고 노망이 들린 권사가 된다는 말이죠.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한데, 장로가 교회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준다고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분해가 된다는 말이죠.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목사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게 자유를 누리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나' 자신이 가을의 낙엽처럼 완전히 부서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존재에 대해서 무엇이 유효한고 하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는 말씀, 그 말씀은 오히려 더 빛이 난다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그 말씀을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자기가 믿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말씀이 말씀대로 되도록 모든 것을 조정해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즉 "너는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육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인데, 육은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육과 같이 있지 않는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 쪼개진 인생 !!
그래서 오늘 강의제목을 불멸의 위신이 아니고 '쪼개진 자아', 혹은 '쪼개진 인생' 라고 하고 싶은데, 그야말로 틈새라는 말이죠.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어제의 '나'가 있고 오늘의 '나'가 있는데, 그러면 성령께서는 이 존재에 개입을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틈새가 있는데, 그 틈새가 원천인데, 즉 창조의 원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 틈새에 성령이 개입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고린도후서 13장을 보겠는데, 4절입니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라고 되어있는데, 지금까지 강의를 하면서 예수님은 모델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첫 번째의 모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델이 이 땅에서 강하게 살았습니까? 약하게 살았습니까? 약하게 살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인들이 이 성경본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힘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왜 힘을 추구합니까? 약한 것에서 강하게 되고 싶다는 말이죠.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 불행한 것보다는 행복하게 되고 싶다는 겁니다. 약해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죠.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그렇게 학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남자 가수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는데, "여자여, 여자여, 약해지면 안 돼 ♬" 라고 말이죠. 어떤 여자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는데, 사회에 나가서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남자들에게 하류인생으로 취급을 받는 게 너무 싫다는 겁니다.
* 여자는 없고, '마이너스 남자' !!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여자는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여자는 없다는 겁니다. 여자가 아니고 '마이너스 남자' 라는 것인데, 남자가 되려다가 실패한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여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자는 무엇인고 하니, 여자는 주님과 함께 있는, 그리고 성령이 여성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안상홍이 많이 우려먹었는데, 물론 전혀 엉터리라는 겁니다.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땅에서는 여자가 없는데, 남자가 되고 싶어하는 마이너스 남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남자는 무엇인고 하니, 플러스 남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땅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구박을 받는데, 그러면서도 남자를 사모한다는 겁니다. 이게 정상적인 것은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받게 된 징벌이라는 말이죠.
아기를 낳는 고통을 남자에게 준 것이 아니고 여자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여자가 먼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과거의 지난 일로 생각하신 적이 없다는 것인데, 계속해서 그것을 챙기신다는 것이죠. 즉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네가 따먹었잖아" 라고 하시는데, 그야말로 뒤끝작렬이라는 겁니다.
* 하나님의 뒤끝작렬 !!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규정인데, 즉 "인간은 이렇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집어넣고 인간을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육이 되었다는 것은, 흙에서 와서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인데, 즉 죽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이 한 짓을 잊지 않고 추궁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이 한 짓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태어나는 족족 그 정보를 거기에 다 심어 넣어버리는데, 모든 인간에게 말이죠. 남자는 남자로 새기고, 여자는 여자로 새겨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는 아담이 받는 징벌, 그리고 여자는 하와가 받는 징벌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 죄의 노출 !!!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욕망의 흐름' 이라고 보고 싶은데, 그 욕망의 흐름은 이 틈새, 즉 원천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고 하니, 그것은 '계통'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지어진다는 말이죠. 이 계통을 위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은 쪼개지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의 원천이 그만 노출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원천을 한 글자로 '죄'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죄를 노출시킨다는 말이죠.
성령이 오셔서 육을 쪼개게 되는데, 즉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 인간의 존재와 존재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화산이 터지면서 밑에 있던 마그마가 올라오는 것과 같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인간의 원천이, 즉 창조의 원천이 나온다는 것이죠.
처음 아담과 하와가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을 현재화시킨다는 겁니다. 처음 있었던 그 일을 지금 현재의 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선악과를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흐름으로 자기 안에 그만 내장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육으로 덮었지만 성령이 오셔서 쪼개버리니 어떻게 됩니까? 그 원천의 흐름으로 인해서, "너는 무엇을 해도 죄야" 라는 것으로, 그렇게 이미 죄인으로 규정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 무책임, 무의무 !!
그러면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어떤 책임도 지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데,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해서, 자기가 뒤늦게 착한 일을 하고 예수님을 믿고 한다고 해서 상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마치 운명과 같다고 할 수가 있는데,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죽은 것이 말이죠.
하나님은 분명히 뒤끝이 있는데,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서 섭섭하지가 않습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설계해서 만들고 싶은데, 하지만 우리는 근원적으로 육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주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서 전화만 걸려와도 놀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경상도 말로 표현하면 "나는 이제 우째 사노?"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 소유가 있는 곳에 위기에 온다 !!
어제 부산강의에서 "소유가 있는 곳에 위기에 온다" 라고 했는데, '소유성과 위기' 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말이죠. 인간에게 있어서 위기라는 것은 항상 자기 것이 있어서, 그런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위기감각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지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했는데, 자기에게 의미를 다하고 책임을 다할 때 자기 것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기에 말이죠.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자기가 요청도 하지 않은 성령에 의해서 쪼개지고 말았는데, 그래서 나온 죄는 자기가 뒤늦게 허겁지겁 수습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지킬 것도 없고 죽어도 마땅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한 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
여러분은 이게 섭섭합니까? 제가 지금 몇 차례 이 질문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로마서 5장 17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죄인이 될 것처럼, 한 분이신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여러분, 그래도 섭섭합니까? 우리가 쪼개져야만 이 원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그 원천, 우리는 무책임이고 무의무인데, 그런데 그 원천에 고맙게도 성령께서 손을 대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성령의 능력은 어떤 능력인고 하니, 죽은 자를 3일만에 다시 살리시는 능력인데, 즉 3일의 틈새를 주었다는 겁니다.
* 3일의 틈새 !!
이게 참 어려운 대목인데, 만약에 여러분이 죽어서 3초만에 깨어났다고 하면, 그러면 "이런 시겁했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3초가 아니고 3일인데, 그러면 그 틈새를 도대체 누가 메울 수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완전히 죽은 분을 성령이 임해서 부활시켰다는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영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이래도 이게 기쁜 소식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같이 눈만 뜨면 "우짜노? 우짜노? 어떻게 이런 일이?" 라고 하면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니까, 그러니 힘든 인생이 된다는 말이죠.
왜 자꾸만 겁을 집어먹는고 하니, 주님이 지시하는 그 자리를, 평소에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를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너는 이렇게 해야지. 책임을 다해야지. 절제해야지. 그래야 복을 받아" 라고, 그렇게 목사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교인들도 그것을 원하고 말이죠.
그래서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을 말씀해주세요" 라는 것만을 요구했지, "내가 분해되는, 내 존재를 날려보내는 방법은요?" 라고 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을 요구한 적도 없고, 또한 들은 적도 없다는 말이죠. 그저 요령, 통밥, 처세술, 그런 것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그저 자기 것을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굶어 죽든지 말든지 자기의 집 값만 올라가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 자기 검열 !!
그렇게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에게 지시를 내리는데, 그것을 이번 부산강의에서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 검열'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자기 검열에 엄격했던 자가 바로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청년인데, 그것도 그냥 청년이 아니라 부자청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그 자기 검열의 '나'를 관통해버리고 만다는 것이죠. 즉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 부자청년은 그만 놀라서, "내가 상종할 분이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죠.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사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미 주님을 떠난 상태인데, 가짜 주님을 세워놓고서 떠나지 않은 것처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면 "도저히 상종하지 못하겠네" 라고 하면서 떠나고 만다는 것이죠. 가짜 예수고 가짜 복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교회를 부흥시켜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제가 '불멸의 위신' 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자살해서 죽는다고 해도 자기 위신만은 영원하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자기 위신, 혹은 자기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육에서 나온 것인데, 그렇게 자기에게 매여있으니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자유가 없다는 말이죠.
* 주님, 미안해요 !!
누나가 새벽마다 가지고 온 음식에 대해서는 "누나, 미안해" 라고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기가 음식을 만들어서 해먹는 그 남동생처럼, 오늘날 교인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 미안해요" 라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아무리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또 살아서 믿으면 죽지 않는다" 라고 해도, "주님, 미안해요. 제 인생은 제가 꾸려나가겠습니다"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고체인데, 깨어지지 않은, 즉 틈새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쉬운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동네 깡패들이 싸움을 하면 무엇을 들겠는가? 1번 벽돌, 2번 스티로폼" 라는 것인데, 여기 두 개의 보기 중에서 몇 번입니까? 1번이라는 말이죠. 왜 스티로폼이 아니고 벽돌을 듭니까? 그것은 깨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그렇게 깨어지지 않은 자아가 평생을 통해서 자기를 내리치고 있다는 겁니다.
대구에 자기 부동산에 여러 군데 있다고 한다면,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어느 부동산에 내면 돈을 다 많이 받을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마리에는 벽돌이, 아니 짱돌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자아가 있으면 거기에 딱딱한 벽돌이 쌓여있어야 남들의 공격에 대해서 방어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그 방어가 곧 '불멸의 위신'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이 교회의 장로다"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자기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 살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것은 자유가 없는, 즉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성령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틈새에서 나타난 것인데, 물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고, 예수님의 활동의 다 성령의 활동인데, 그 성령이 예수님을 흐름으로 몰아넣었는데,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십자가로 말이죠.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산상설교를 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목사가 설교를 다 하고 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목사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이죠. 십자가를 진다는 모델은 주님께서 정하신 것인데, 성령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몰아넣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고 끝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십자가에 죽기까지 몰고 가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원천에서 나온 계통인데, 즉 사슬처럼 연결이 되었다는 말이죠. 자기가 어제 깨지면 여기에 틈새가 생기고 오늘 깨지면 또 틈새가 생긴다는 겁니다. 이런 틈새를 잇고 이으면 그게 계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연결이 되는 것은 이 틈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역할을 누가 하시는고 하니, 육인 우리는 할 수 없고, 그것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 당신은 과연 자유하십니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도 감당이 되지 않아서 곤란해지는데, 그래서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는 말이죠. 성령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성령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제 강의를 한 시간 했는데,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자유하냐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가볍습니까? 두렵습니까?" 라는 것인데, 성령이 온다는 것은 주님의 지시가 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응용문제를 하나 드리겠는데, 어느 청년이 이제 군대에 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총각 딱지를 뗀다고 하면서 이상한 곳에 데리고 갔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 청년이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것은 하지 못한다" 라고 나왔을 때, 그것은 과연 잘한 짓이냐는 겁니다. 그것도 역시 자유함이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 쪼개질 몸이기에 그렇다는 말이죠. "나는 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 그것은 주님의 지시가 아니라 자기 양심의 지시라는 겁니다.
* 살아온 기억이 다 다르기 때문에 !!
양심, 즉 윤리와 도덕은 자기 기억인데, 그래서 사람마다 윤리와 도덕이 다 다르다는 말이죠. 양반들의 윤리도덕과 평민들의 윤리도덕, 그리고 쌍놈들의 윤리도덕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온 기억의 내용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말이죠. 어떤 특정인간의 기억이 우수한 것이 아닌데, 사람이 살아온 기억이 다르면 윤리도덕의 기준이 다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개인도 그렇고 시대도 다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조선시대와 지금이 다르다는 말이죠. 그것은 인간의 기억이 달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억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지난 주일에 여기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기억은 습관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습관은 인간의 타고난 욕망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은 기계인데, 악마가 인간에게 욕망을 주어서, 그것이 곧 자아인데, 그 자아가 자기를 더 키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하다가보면 그게 습관이 되고, 인간은 그 습관을 기억해서, 그 기억을 진리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런 예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 파티마의 기적 !!
1917년 10월 17일에 포르투칼의 파티마에 7만명이 모였는데, 그들이 다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니 거기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것을 영화로 만든 것이 '파티마의 기적' 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1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려 10탄을 넘어간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천안의 성모 마리아 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전 세계에 퍼져있는 종교현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실제로 그러한지 그 피눈물의 성분도 조사를 해보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했던 짓거리를 오늘날 교인들이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면서 한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이전에 네가 한 기적을 그대로 다시 행해봐라. 그러면 내가 믿어주겠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자유는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인데, 자유는 죽을 수 있는 것, 즉 자기를 없앨 수 있는 것이 곧 자유라는 말이죠. 마리아 상의 피눈물을 조사해서 자기가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그런 것이 없이 지금 이 시점에서 죽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자유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님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데리고 실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네가 죽을 수 있느냐?" 라는 것인데, 즉 "네가 사는 이유는,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너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분해되고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진짜 기적이라는 겁니다. 마리아 상이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마귀가 파티마의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병에서 낫는 것이 마치 믿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유혹을 한다는 겁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런데 포르투칼의 파티마에서 7만명이 모두 다 마리아를 본 것이 아니고 양치기 소년 3명이 보았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는 그냥 먹구름과 태양만 보였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10월 17일이 처음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여러 번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런데 마리아가 3명의 소년들에게 한 말이 "기도할 때 그냥 하지말고 묵주를 가지고 해라" 했는데, 그게 마리아의 계시였다는 겁니다.
악마가 종교를 만들었고, 그것을 그대로 베껴서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완전히 악마의 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라는 것은,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더 오래 살게 해주십니다" 라고 포장을 해서 상품화를 시켜놓은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악마가 종교를 유포를 시켰다는 겁니다.
* 예수님,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죽으면 실패자라고 여기는데, 그런 자들에게 요한복음 11장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물론 그 현장에 저는 없어서 그 여자들이 예수님의 멱살을 잡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먼저 예수님에게 자기 오빠가 많이 아프다고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빨리 가지 않았는데, 죽고 난 다음에 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오빠가 평소에 예수님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함부로 대하고 하지 않았는데, 그렇지요?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했다는 겁니다. 그 집안이 예수님을 아주 잘 섬겼다는 것이죠. 물론 마리아는 말씀에 욕심에 많아서 음식 만드는 것은 좀 소홀히 했지만 말이죠.
그러니 다른 집은 몰라도 자기 집에는 제일 먼저 찾아올 줄로만 알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육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빠가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찾아오니 얼마나 토라지고 삐쳤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내가 이럴려고 예수를 믿었나?"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판이라는 겁니다. 집안이 잘 되려고 종교를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꾸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형국이란 말이죠. 물론 나중에 마리아가 알고 비싼 향유를 예수님이 죽기 이전에 발에 붓게 되는데, 그것은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인생은 없다는 말이죠.
* 무의무, 무책임, 무의미 !!
다시 말해서, "나는 무의무적이고 무책임적이고, 그야말로 나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두 글자로 '자유'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성령을 받아야 무의무할 수 있고 무책임할 수 있고 무의미할 수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챙길 것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위신만 포기하면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자기 위신 안에 자기 이름이 들어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전부가 다 자기 이름에 노예가 되어있으니 말이죠. 남의 집 값은 떨어져도 자기 집 값만 오르면 된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 집에 자기 위신이, 자기 이름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 강의를 정리하면 !!
이제 강의를 정리하고자 하는데, 오늘 강의의 취지는 무엇인고 하니까, 육으로 아는 예수님과 영으로 아는 예수님, 그 차이는 바로 틈새였다는 말이죠. 존재가 갈라지는 틈새라는 겁니다. 자기 존재가 갈라지면, 그러면 그 틈새, 하나님의 원천, 즉 창조이전의 주님의 욕망, 욕망이라고 하면 표현이 좀 그러한데, 그러면 주님의 뜻, 플럭스,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 주님의 흐름에 한 평생을 실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흐름, 그게 성전에서 나오는 액체라는 말이죠. 혹은 생수의 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살려서 떠다닌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 라는 존재가 갈라져야 드러나는 틈새, 그 원천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해결되는고 하니, 우리의 죄가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즉 죄로 인해서 죽은 자를 의로 살린다는 말이죠. 예수님 한 분이 순종함으로서, 그분의 은혜를 받은 자는 난데없이 무엇을 해도 의가 되고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강의 도중에 제가 "여러분, 섭섭합니까?" 라는 것을 여러 번 물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묻고 싶다는 것이죠. "여러분, 기분이 좋습니까?" 라고 말이죠. 우리는 선악과를 보지도 못했는데, 그것을 따먹었다고 하면서 저주를 퍼붓게 되면, 그래서 우리가 늙어죽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뜻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통인데, 그런데 다른 계통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 계통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속한 자는 내부에 흐르는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무엇을 해도 의인이 되어서 생명수의 강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 안에서 우리를 태워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에게 의무감을 가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너무 자기 목적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는 "오늘도 무슨 은혜를 주셔서 나를 쪼개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그런 주님의 기다리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는 주의 뜻대로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나의 뜻을 고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악마에게 그만 농락을 당하고, 자유가 없는 무서워서 벌벌 떠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주의 성령께서 그런 존재를 깨트리시고, 그래서 생명수의 강에서 헤엄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9,29 오후 9시 30분에 마침.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는 죄를 날마다 회개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