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역사와 묵시

아빠와 함께 2021. 11. 16. 18:37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6 - 역사와 묵시

21,10,18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변화산 이야기 !!

오늘은 교재 14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데, 28절에서 36절입니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 변화산 사건 !!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2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묵시세계' 라는 것인데, 이것 외에 달리 적당한 어떻게 표현할 말이 없다는 것이죠.

굳이 달리 말을 하자면 '무시간'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즉 묵시와 무시간인데, 이게 둘 다 어렵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역사가 있는데, 그러면 이 역사는 무시간이 아니고 시간이 된다는 말이죠. 이러한 두 가지 요소가 여기 변화산 이야기에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기가 힘든다는 것이죠.

이렇게 묵시세계와 역사세계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고 하는 것, 그러면 그 공존하는 현장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역사세계, 즉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묵시세계, 즉 천국에서 사시는 분들도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 묵시세계와 역사세계의 공존 !!

다시 말씀을 해드리면, 지금 우리가 변화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산은 산인데 변화가 일어나는 산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고 하니, 묵시세계와 역사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묵시는 시간이 없는 것인데, 여러분은 이게 상상이 됩니까? 그리고 역사는 시간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묵시와 역사 중에서 어느 것이 잘 이해가 됩니까? 그것은 당연히 역사, 즉 시간세계는 이해가 잘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 역사라는 것은 과거가 생각나는 것인데, 즉 "과거가 없이는 나도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과거라는 말이 어렵다면 그냥 지난날이라고 해도 되는데, 그러면 "지난날이 없이는 지금의 나도 없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은 들으면 듣는 순간 착착 몸과 마음에 착착 달라붙는데, 그 누구라도 이러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화산에서 역사를 대표하는 인간들이 누구인고 하니, 거기에 3명이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일부러 3명을 뽑았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12명인데, 그 중에서 대표로 다시 3명을 뽑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역사세계에서 3인이 등장했다면 묵시세계에서도 3인이 등장하는데, 즉 예수님, 모세, 엘리야,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모두들 공존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렇게 공존한다는 것, 그것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 너희들은 이것을 믿어?

왜냐하면 모세와 엘리야는 역사세계에서 볼 때, 그들은 과거의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분명히 베드로는 지금 현재를 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서로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교회에 와서 사람들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현재 역사 속에 있는 자기에게, 즉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기에게 뭔가가 주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우리 인간들은 '믿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옆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심지어 귀신들도 때가 되면 모두 내보내야 하는데, 그런데 만약에 모세와 엘리야도 같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현재에 함께 있는 식구들이 너무나 많이 늘어난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교인이 몇 명입니까?" 라고 물으면, "예, 우리교회는 250만명 정도 됩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식구들, 또한 모세와 엘리야까지 모두 다 동원해서 계산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저 혼자서 웃고 있는데(ㅋㅋ),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것은 미친놈이 하는 헛소리라는 겁니다.

* 예수님은, 묵시와 역사가 공존하시는 분 !!

그렇게 과거의 인물이 현재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중간에 예수님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인데, 즉 묵시와 역사를 함께 지니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란 말이죠. 예수님의 본질은 시간이 없는데, 잠시동안 역사에 나타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역사적인 인물로만 본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는 시간을 능가하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지금 변화산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지? _ 예, 우리는 지금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 물론 너희들은 시간 속에,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살고 있지만, 그러니 시간에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진정 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즉 나 예수가 묵시와 역사가 공존하는 분인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을 믿는 너희들도 역시 묵시와 역사가 공존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를 믿을 수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말을 어렵게 하든 쉽게 하든,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지금 우리가 변화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말을 쉽게 해서 알아듣고, 어렵게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있다는 것이죠.

* 나에게 문제가 있다 !!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나는 스스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나서도, 그 문제에서 벗어날 재주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 앗, 유령이다 !!

어제 주일학교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같이 어울리신 것이 아니라 홀로 그들을 떠나가셨다는 겁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배를 타고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그때가 저녁 정도가 되었는데, 그러니 이제 곧 밤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뭍으로 가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가로질러 간다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지나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면서 그만 밤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냥 풍랑만 일어도 겁이 나는데, 주위가 캄캄해지니 더 무서웠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뭍에서 배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셨다는 것이죠. 이게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 14: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마 14: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마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누가 유령인가?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변화산에서는 묵시와 역사가 공존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미 고인이 된 모세와 엘리야까지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11명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있고, 그리고 예수님은 배가 아니라 뭍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뭍에 있는 예수님이 바다의 배에 있는 그들에게로 걸어갔다는 겁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게 자기들 역사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만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인간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방금 제가 "나에게 문제가 있다" 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정상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으로 교회에 가서 정상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정상적인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그러하지만 성경 속으로 들어가면, 애초부터 우리 자신은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죠.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잘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하면 곤란한데, 그래서 교회에 온갖 똥파리들이 다 들끓는다는 겁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죠. 우리는 문제가 있을뿐더러,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주님 쪽에서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 앗, 주님이다 !!

그러자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보았는데, 그런데 베드로가 가만히 보니 유령이 아니라는 말이죠. 어디서 많이 본 분인데, 그래서 "앗, 주님이다" 라고 하면서 그만 배에서 뛰어내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제자들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베드로가 그야말로 이상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베드로는 땅인지 물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 밤중에 바다에 뛰어드는 놈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베드로가 자기가 의식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이 당겼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 누군가가 매일 당기는 삶 !!

제가 강의초반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걱정이 되는데,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이 누군가가 당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누군가가 매일 당기는 삶이 되려고 하면, "어제까지의 시간은 사라졌다" 라는 것이 먼저 요건으로 갖추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어제까지의 시간이 사라지면, "오늘은 새로운 날이고, 나는 새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게 오늘강의 결론인데, 앞으로 이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어제까지의 시간이 사라지지 않으면, 즉 오늘이 새로운 날이 아닌 어제의 연장선이라고 하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그만 역사가 된다는 겁니다. 즉 시간의 노선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산에서의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평소에 살아가던 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고 있는데,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니 그것을 제자들이 보고 "앗, 유령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상대방을 보고 유령이라고 하면 자기들은 멀쩡하다는 것인데, 즉 자기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정상이라고 여긴다는 것이죠. 자기들이 옳다는 말이죠. 그래서 변화산의 상황으로 성경을 모두 바꾸어 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바르게 살자" 라고 하면 곤란한데, 그런 것들은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변화산, 즉 묵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제가 과거에 신학교 교수들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는데(ㅋㅋ), 분명히 성경에 있는데도 명색이 신학교의 교수라는 작자들이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 주님의 품속으로 뛰어든 베드로 !!

아무튼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유령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베드로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배에서 뛰어내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베드로는 어디로 뛰어내렸습니까? "1)바다, 2)예수님", 몇 번입니까? 2번인데, 그렇게 예수님에게로 갈 때는 자기 자신의 문제가 있고 없음, 그런 것은 주님이 당겨주시는 삶 속에서는 통과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매일 같이 우리는 당겨주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어제까지의 자기는 사라지고, 오늘은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이죠. "내가 성경을 백독했다. 전도를 백명했다. 내가 이 교회에 50년을 다녔다" 라는 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겁니다. "시아버님 점심을 차려드려야 하는데" 라고 하는 것도 과거와의 연을 끊지 못해서 그렇고 말이죠.

* 어제까지의 나는 이미 사라졌다 !!

오늘은 새로운 삶인데, 그런 새로운 삶에서 묵시, 즉 무시간의 요소가 없다고 하면 우리는 죽었다는 겁니다. 주님이 당겨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오늘 인생은 내가 살겠다" 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존재이지, 결코 주님이 당겨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나를 당겨서 살려주셨을 때, 그것이 바로 새 사람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요건이 무엇인고 하니, "어제까지의 나는 이미 사라졌다" 라는 것인데, 제가 지금 구라를 치는 것이 아닌데, 어제의 자기 자신을 가지고 와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가지고 올 수가 있습니까? 분명히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어제의 자기는 없는데, 그냥 사진 속에서만 남아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집에 있는 아내를 보고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해야합니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집에 있는 아내도 주님이 새로운 아내로 만들어서 붙여주셨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새 사람만이 이해할 수가 있는데, 아내는 그것을 몰라도 자기가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 그냥 둘이서 살면 심심하다고 20살짜리 아이도 새롭게 붙여주시고, 또한 강아지도 새롭게 붙여주시고, 그렇게 모든 것들이 주님이 새롭게 붙여주시는 새로운 삶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무엇을 믿고 열심을 내고 하는,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과거의 이야기라는 말이죠.

* 그만 물에 빠진 베드로 !!

아무튼 베드로가 배에서 뛰어내린 것은, 물을 보고 내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고 내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언제 물에 빠졌습니까? 그것을 물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인데, 그러면 "내가 미쳤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어제까지 베드로는 물 위를 걸은 적이 없는데, 즉 "어제의 나는 물 위를 걸은 적이 없는 나", 그게 바로 베드로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물 위를 걷고 있는 자기를 보고서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인데, 그러니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을 때, 뭔가 하나의 '경과'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물 위를 걸으면 안 되는, 물에 빠지는 인간이다" 라고 하는, 그런 경과를 반드시 거쳐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렇게 베드로를 물 속으로 빠지게 하시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십니까? 베드로가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미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구원인데, 즉 빠진 자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당겨주시는데,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죠.

* 예수님의 별세 !!

역사의 세계에서 묵시의 세계로 가는 것,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할 수가 없는 것인데, 변화산에서의 모세와 엘리야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들었다는 말이죠.

묵시세계의 화젯거리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인데, 이재명과 윤석열의 대선대결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그것이 묵시세계의 화젯거리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별세' 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서 새롭게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복음이 없는 교회를 두고 '4H클럽' 이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제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라는 말이죠.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이런 단체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교양과 친목의 모임이라는 겁니다. 그냥 역사라는 것이죠. 아무런 생명이 없는데, 그냥 단지 기분만 업이 된다는 겁니다.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자기도 희망이 있다는 것인데, 과거에 기대했던 욕망을 미래에 주님이 이루어주신다고, 그런 희망은 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묵시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라는 말이죠. 자기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갑자기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어떤 지식을 획득하느냐에 따라서 문제해결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실제로 하신 일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유령으로 오셨고, 그리고 베드로는 물에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만 물에 빠졌는데, 자기 자신을 바라보다가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이 당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연한데, 내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빠져죽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건져내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셨다는 말이죠. 베드로로 하여금, 즉 베드로에게 묵시적 요소를 덧입힌다는 겁니다.

* 피막 !!

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은데, '피막' 이라고 말이죠. 즉 투명한데, 뭔가 둘러싸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피막으로 둘러쳐진 사람, 이것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 한 표현대로 하면, 묵시적 피막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죠. 물론 막이 투명하니, 없는 줄로 알고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는데,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처럼, 성령을 받은 12사도와 사도바울처럼, 이 세상의 그 누구라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둘러싸고 있기에 말이죠. 성령을 받은 성도가 같은 성도를 대할 때도 그러한데, 다가서기 전에 먼저 성령을 만나기 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를 보고 욕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셨는데, 그 인간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반면에 성령을 받지 않은 인간들은 자기 과거사로 둘러싸고 있는데, "나는 이 정도야. 나는 이렇게 잘았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자기의 과거에 대한 위신과 체면으로 둘러싸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얼마든지 함부로 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성령이 없으니까 말이죠. 마귀의 종은 쓰레기 취급을 해도 된다는 겁니다.

* 소유인가? 섬김인가?

그래서 성령의 피막으로 둘러싸여진 자는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소유용이 아니라는 말이죠. 대인관계에서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타인을 자기 소유물로 본다는 겁니다. 교인은 목사를 소유물로 보고, 목사는 교인을 소유물로 본다는 것이죠.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그리고 이웃과 이웃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인간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유물로 본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인간 자아는 외부의 것을 자기가 소유하는 식으로 자기에게 끌어당긴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 가진 욕망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굳이 소유하려고 하면 개나 고양이나 그렇게 할 것이지, 사람은 결코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반대로 말씀하시는데, 소유가 아니라 섬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섬기면 안 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보고 잘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는 피막이 있다는 겁니다.

* 여보, 물 한 그릇을 주세요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부부가 이렇게 있는데 둘 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죠. 물론 상당히 드문 경우인데, 아무튼 둘 다 성령을 받았다는 겁니다. 피막으로 싸여있으니 성령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저 사람에게 무엇을 하겠다" 라고 하다가도, 성령을 통과하게 되면 성령께서 지시를 내리게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여보, 물 한 그릇을 주세요" 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도권에 남편에게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말이죠. 즉 "너는 내 지시대로 아내에게 물을 가지고 오도록 지시를 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보, 물 한 그릇을 주세요" 라고 하면, 아내도 역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답변을 아내가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먼저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께서는 외부의 지시를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남편이 아니라 같은 성령의 지시다. 그러니 군소리하지 말라고 순종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결론은, 범사에 감사하라 !!

그래서 아내를 물을 가지고 남편에게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고마워하는 게 아니고 누구에게 합니까? 성령에게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절차가 제법 복잡한데, 그런데 이것을 왕창 다 모아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한 마디로 요약을 하는데, 즉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런데 아내가 아니고 자기가 물을 떠서 마실 때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도 역시 성령이 시켜서 한다는 겁니다. "너는 손이 없나? 네가 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도 역사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데, 이렇게 감사가 나온다면, 그것은 모두 성령의 일이라는 겁니다. 일의 성사여부와 관계없이 말이죠.

* 출발은 자기 욕망, 그러나 !!

아무튼 이렇게 피막이 있는데, 그러면 출발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욕망이라는 겁니다. 그 출발점은 육적인 것이란 말이죠.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여기에 무엇이 둘러쳐져 있다는 겁니까? 성령이 둘러싸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육적인 존재인데, 그야말로 이기주의자이고 그 안에는 욕심이 가득히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결과는 무엇이 나온다는 겁니까? 감사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감사가 나오면서 자기 생각, 자기 의도, 자기 목적이 완전히 작살이 난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생각, 자기 의도, 자기 목적이 날아갈 때, 자기는 여전히 불신자로 등장하게 되는데, 자기가 불신자가 되는 즐거움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존재에 국한되는 '나', 그런 자에게 주님이 손을 내밀어 건져내신다는 것이죠. 베드로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피막이라는 겁니다.

* 함께 계신 주님이 만들어주신 상황 !!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순서,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그대로 해보려고 한다고 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라는 겁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묵시와 역사의 공존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혼자 있으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는데, 그런데 함께 계시는 주님이 상황을 만들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감사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지, "내가 이것을 알았으니 한번 해보자" 라는 것도 하나의 요령이고, 그것도 자기 목적이고 의도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것은 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나는 잘났어. 나는 제대로 된 성도가 맞아"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별세, 즉 십자가의 죽으심이 빠져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교재 14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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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역전' 이란, 십자가에서 수직적으로 뿌려오기 때문에, 수평적 시간으로 보면 역전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무리 거짓말로 에서를 속이고 에서가 무슨 일을 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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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다 지워진다 !!

여기에 보면 야곱과 에서를 언급하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조금 전에 제가 "과거는 다 지워진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과거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다 지워지는데, 왜냐하면 오늘은 새로운 날이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전혀 공감하는 분위기가 아닌데 말이죠(ㅋㅋ).

자꾸만 과거를 당겨오니 반성이 생기는데, 그렇게 되면 그 반성이 자기를 괴롭힌다는 겁니다. "지금의 이런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과거에 그렇게 애를 섰다" 라고 하게 되면 자꾸만 후회가 되고, 그러면 그만 감사가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묵시적 존재가 아닌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죠. 그러면 변화산의 취지를 그만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한다" 라고 하면, 그러면 변화산의 의미가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과거는 늘 지워지는데, 지금 제가 하는 말이 틀렸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과거를 꺼내서 내놓아보라는 겁니다. 여러분의 과거, 즉 어제를 지금 내놓을 수가 있습니까? 그게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분명히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지나간 과거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다른 사람이 "네가 어제 그렇게 했잖아?"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해서 하는 소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 구원받지 못한 자가 구원받은 자의 입장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데,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다 대꾸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없어진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없어진 것이란 말이죠.

* 인간의 역사와 포도원 !!

이제 교재 154페이지를 보겠는데, 교재를 건너뛰는 것이 아니고 중간의 내용들은 다 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마태복음 21장의 내용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이라고 했는데, 즉 인간의 역사를 포도원으로 설명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하셨다는 겁니다.

(마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제가 조금 전에 "과거는 사라진다" 라고 했는데, 혹은 이것을 "과거는 죽어 없어진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역사, 즉 시간에서 결코 벗어나지를 못함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이 물 위를 걷는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데,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자기가 자기를 당기는 것은 신앙이 아냐 !!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니 걸은 것인데, 그래서 다시 걸으라고 하면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물만 보면 뛰어들어서 걷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주님이 당겨주셔야 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당기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장난치는 것인데,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주님을 속이는 짓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조작이고 연출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시간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시간 속에 있어버리면 변화산, 즉 묵시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묵시세계에는 예수님 외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다는 말이죠.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묵시세계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반면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죠.

* 시간의 역전 !!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의 역전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가 아직 남아있는 시간이지만, 즉 그들에게는 미래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미래의 시간이 미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작동해서 변화산의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묵시에게 역사로 갈 때 예수님도 죽지만 구원받을 자도 하나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죽게 하심으로서, 묵시세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 과정 속에서 베드로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되는데 말이죠.)베드로가 과거에 가졌던 기대, 즉 자기 목적과 의미가, 예를 들어서,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그런 것도 모두 다 사라진다를 말합니다. 그런 이것을 모두 다 합쳐서 한 글자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육(肉)' 이라고 합니다.

* 피막의 효과 !!

앞서 교재 149페이지에서 "시간의 역전이란, 십자가에서 수직적으로 뿌려오기 때문에, 수평적 시간으로 보면 역전으로 보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묵시세계에서는 과거가 없다는 겁니다. 현재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묵시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말이죠. 그 중에서 묵시적 요소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별세는 아직 아니지만 말이죠.

그런데 야곱의 경우에는, 야곱이 아무리 아버지인 이삭을 속이고 형인 에서를 속이고 해도 구원에는 변화가 있습니까? 전혀 없는데, 그것은 묵시의 효과가 현재 역사 속에 있는 야곱에서 미리 당겨져서 적용이 되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게 피막의 효과라는 말이죠.

* 시간에서 공간으로, '예수 안' !!

이것을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아예 시간을 없애버리고 공간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렇게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면, 즉 묵시를 공간화를 하게 되면, 그것은 '예수 안'이 되고, '성령 안'이 되고, '십자가 안'이 된다는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별세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서는 너희는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 정도가 되면 에베소서 2장 6절 말씀이 떠올라야 하는데, 즉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말이죠. 여기서 이 '앉히시니' 라는 것은 과거형인데, 우리 대구강의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5절에서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라는 구절도 역시 마찬가지 의미라는 것이죠.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것이 바로 변화산의 내용인데, 즉 묵시와 역사의 공존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른교회가 되자" 라고 하는 것은 성경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런 것은 일종의 탐심이라는 겁니다. 한국교회를 걱정하지 말고 자기나 잘하라는 말이죠. 아무리 바른교회가 되려고 해도, 한 달이 지나면 바르지 않는 교회가 되어있는데, 어차피 다 망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의 망함 속에서 !!

그러면 여기 교재 154페이지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망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신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망하게 해서, 그 속에서 진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에게서 온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말씀을 하셨는데, 구원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배신자들이고 망한 자들인데, 그런데 그런 망함 속에서 구원이 나온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망했지만, 그들 속에 들어있는 약속은 생생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요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 너희 아비는 마귀다 !!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의 후손인데, 후손은 그 조상을 닮기 때문에 뱀의 후손이 뱀처럼 생겼다고 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고, 여기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뱀의 후손은 너무나 멀쩡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윤리 도덕적으로 우수하다는 말이죠.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인간들이 시도하는 윤리도덕의 최정점에 누가 있다는 겁니까? 이들 바리새인들이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말씀의 생활화'는 악마의 작품 !!

이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삶이 바로 '말씀의 생활화' 라는 것이죠. 말씀의 실천인데, 즉 말씀은 말씀으로 끝나면 안 되고 생활 속에서 드러나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삶의 역사화인데, 즉 자기를 역사화시키겠다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찬란하게 의미가 있는 것으로 계속해서 유지를 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야말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뱀의 후손들이 드러내는 특징인데, 즉 뱀의 복제품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보고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욕을 한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그러하다는 말이죠.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악마는 있지만 보이지 않고 인간들만 이렇게 보이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새끼를 깐 인간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악마가 궁금하다고 하면, 악마가 스스로 깐 그 새끼들을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 새끼들이 하는 행동이 곧 악마가 시킨 것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이 바로 악마가 퍼트린 의식이고 사고체계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악마들의 모토가 말씀의 생활화인데, 인간들 중에서 그들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가능성을 총동원하면 바리새인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어차피 천국에는 갈 수 없는데, 그런데 그게 천국에 가는 길인 줄 알고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란 겁니다.

* 악마의 새끼로서, 역사에 기대를 걸고 !!

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인데,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게 됩니까? 그게 바로 역사에게 기대를 거는 것인데, 그게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라는 말이죠. 요즘 화성으로 이사를 갈 계획까지도 세우는데, 이런 것이 다 역사에 기대를 걸어서 하는 겁니다. 물론 신학도 여기에 포함이 되고 말이죠.

이런 것들이 다 악마의 자식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여기 과학에는 의학, 물리학, 생물학도 다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역사자체를 발전시키자는 것이 사회학인데, 또한 언어학, 경제학, 행정학,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인간들의 삶의 공동체를 보다 더 나은 것으로 발전시키려고 하는 짓이라는 말이죠.

여기에서 철학은 보다 더 나은 윤리와 도덕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증진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과거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죠. 미래의 역사는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측면에서 발달된 역사를 이루자는 것인데, 그게 바로 철학이라는 겁니다. 그런 이것들이 다 악마의 작품이라는 말이죠.

* 개혁주의 신학 !!

그것이 교재 155페이지에 나오는데, 즉 역사를 믿는다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의 미래를 믿는 것인데, 역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완벽한 이스라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게 마귀의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에 교회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완벽한 교회되기, 완벽한 신자되기, 그것이 곧 악마의 생각이고, 이것이 곧 '개혁주의 신학' 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5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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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어설펐지만 뛰어난 신학자들로 말미암아 완벽에 가까운 진리를 갖추었습니다. 루터, 칼빈, 워필드 등등의 뛰어난 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했기에, 지금의 개혁주의 신학은 손댈 것도 없이 완벽한 신학이 되었으며, 내가 지금 이 신학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나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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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전문가의 말을 들어라 !!

목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데,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는데 왜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고 하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이 남들이 모르는 것을 해야 자기가 스승 노릇을 할 수 있고, 그래야 돈도 생기고 권위가 산다는 겁니다. 말씀에 대해서 자기는 프로라는 것인데,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목사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 지식 쪼가리를 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장래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말이죠. 달리 말하면 "여러분의 개인적인 역사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교회에 오세요. 그러면 천국까지도 보장을 해드립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나는 불신자고, 해결책도 없다 !!

이것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르는데, 그게 창세기 15장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거에 배운 것은 과거지사이고, 그런 것들은 다 사라졌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피막이 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너는 항상 불신자이고,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데, 그런데 그 해결점은 너에게 없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해주신다는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이것이 있어주어야 매일 매일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예수 안' !!

아무튼 오늘 강의에서 이것 하나만 기억해도 되는데, 시간이 공간으로 변한다는 말이죠. 즉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이라는 겁니다. 이 공간에서는 시간이 흐르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즉 확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미 천국에 왔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성령께서는 '예수 안' 이라는 공간을 돋보이기 하기 위해서 시간을 잘라버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는 잊어라" 라는 것인데, 과거에 자기가 잘한 것도 있어버리고, 잘못한 것도 잊어버리라는 말이죠.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공간 안에 함께 계시면서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부터 새로 태어났다고 여기면 되는데, 거울을 보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리 지금은 늙어 보이더라도, 20년 이후를 생각하면 지금이 젊다는 말이죠. 90대에 70대를 돌아보면서, "아니 내가 이렇게 젊었을 때가 다 있었나? 계단을 다 오르다니?"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미래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그 시대에 필요한 힘은 그때그때 주님이 주신다는 말이죠. 감사가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감사가 모든 것을 이기는데, 하지만 잘남은 모든 것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죠. 잘남은 악마에게 지는데, 왜냐하면 계속해서 잘나야 되기 때문에 말이죠.

이제 교재 157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창세기 15장의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제법 어려운데 말이죠. 15장 9절에서 11절을 보겠습니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 3년된 제물 !!

여기에 '3년'이 나오는데, 제물들이 왜 3년이냐는 겁니다. 그리고 제물을 이런 방식에 맞추어져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것을 지금부터 살펴보고자 한다는 겁니다. 또한 이것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의 운명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죠.

* 강의를 다시 정리하면 !!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축약할 필요가 있는데, 처음에 변화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땅에는 역사적인 존재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고, 그리고 산 위에는 묵시적인 존재인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역사에서 묵시로 갈 때 모세와 엘리야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모세의 죽음도 아니고 엘리야의 죽음도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역사적 요소와 묵시적 요소가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역사를 경유해서 다시 묵시로 되돌아가는 그 경로가 예수님의 별세 안에 함축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는 시간이 아니고, '십자가 안' 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공간이라는 겁니다. 즉 시간을 공간으로 바꾼다는 것인데, 이것을 제가 피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했는데, 즉 '피막 안의 존재' 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주님의 별세를 통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에 자기 백성들을 동참시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들이 역사에서 묵시로 가려고 하면, 주님이 원형이 되어서 이룬 이 코스에 합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역사에서 묵시로 가는 것을 '부정(否定)'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서 "나,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자기 부인, 즉 부정을 경과하고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자기 부정 !!

그렇다면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의 핵심이 어디에 있다고 보면 됩니까? 자기 부정의 반대말이 자기 긍정인데, 즉 긍정이 아니고 부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제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역시 자기 부정인데, 그렇게 되어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즉 십자가로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에 첫 발자국을 떼었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제사의 제물은 원형이고, 거기에 제사를 드리는 자나 그 제사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 즉 아브라함 언약에 소속된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은 그 부정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역사세계에서 묵시세계로 가려고 하면 '부정' 이란 모습으로 표현이 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여기 역사세계에서는 생명나무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면 부정의 코스를 밟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런 부정의 코스로 유명한 것이 불교인데, 그런데 불교는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오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를 부정하심으로서 생명나무로 가게 된다는 말이죠.

부정에서는 긍정으로 갈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부정의 세계에서는 그런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불교이고 천주교인데, 즉 "십자가를 믿으면 당신은 좋아질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부정은 자기가 사라지는 것인데, 부정해서 자기가 긍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긍정은, 오직 예수님만 !!

오직 예수님만이 긍정이 되는 것인데, 우리도 같이 더불어서 긍정이 되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피막 안에서 우리는 불신자가 되어서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신자는 주님의 충분하고, 주님의 신자됨의 효과를 불신자가 누리는 공간, 그것을 두고서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데, 과거에 자기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을 때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러하다는 겁니다. 지금 주님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역할로서 자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부정을 통해서 부정으로, 즉 부정의 극한으로 간다는 겁니다. 역사의 입장에서 볼 때 말이죠.

* 제물이용이 아니고, '제물뿐' !!

이것은 제사의 제물을 이용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남는 것을 제물뿐이라는 겁니다. 이 제물이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확대된 것이 예수 안이고, 그것이 곧 천국이라는 말이죠. 이게 아들의 나라인데, 살짝 예수님을 이용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침례교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데, 즉 "여러분은 율법으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박옥수의 구원파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씨앗을 골고루 뿌려놓았는데, 성경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말이죠. 그래서 뱀의 새끼들이 두루 두루 다 퍼져있다는 겁니다.

아무튼 인간자체를 긍정해주려고 환장을 했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별세를 이야기한 것이지, 자기들의 구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모세와 엘리야가 선지자인데, 선지자는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개인적인 활동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과 관련되어있다는 말이죠.

구원파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피막이 없는데, 즉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령은 받지도 않고, 성경지식만 가득하다는 말이죠. 성경을 천 번을 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인간은 문제가 있고 그 해결책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 억울한 피의 생산 !!

아무튼 창세기 15장의 제물에 있어서, 그 첫 번째는 부정의 세계라는 것인데, 그래야 역사에서 묵시로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부정의 세계에 대해서 여기 교재 157페이지에 보면, '억울한 피의 생산'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여기 창세기 15장의 제사는 아브라함을 위한 제사가 아닌 하나님 자신을 위한 제사인데, 즉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고, 주님의 주되심을 위한 십자가라는 겁니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 자신이 주님에게 꿰차여져서 주님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12장 1장에 나오는 '산 제물' 이라는 것인데, 우리 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데,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의 세계가 아니라 누구의 세계라는 겁니까? 주님의 세계라는 것이죠.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다시, 왜 '3년된 암소'인가 !!

이제 교재 158페이지를 하겠는데, 여기에 지정된 제물인 3년된 암소가 나오는데, 그러면 왜 수소가 아니고 암소이고, 또한 1년이나 2년이 아니고 3년이냐는 겁니다. 그것을 따져보자는 말이죠. 첫 번째는 '부정' 이라는 것인데, 이 부정적인 요소를 담은 인물이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나중에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자기 아들인 이삭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이삭의 운명의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양이 많고 소가 많은 것이 아니고, 이삭이 죽임을 당하는데, 그게 바로 자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라는 겁니다. 즉 이삭의 핵심은 죽음인 부정이라는 말이죠.

* 제물의 인격적인 구체화, '이삭' !!

이삭은 약속에 의해서 태어나야 하는데, 그 약속을 미리 보여주는 모습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수양이라는 겁니다. 그 제물의 인격적인 모습, 즉 구체화, 그것이 바로 이삭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 태어날 수 없는 인물인데,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사라의 몸을 임신할 수 없도록 조치를 다 취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것에서 산다는 게 아니라, 여기에 글자 하나를 더 넣어서, "죽은 것에서만 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죽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주님의 죽으심과 삶이 우리 인생에 동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죽이시고, 또한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서 우리를 매일 살리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은 살아있어서 일하고 계신다" 라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겁니다. 2021년 10월 18일에 피막을 두르고 이렇게 만나게 해주셨다는 것이죠. 황송하게도 말이죠.

이삭은 없는 존재인데, 그런데 그 이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제물을 드렸다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이 있었고 제물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뒤에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곧 이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 야곱의 자손, 그 자손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역사라는 것은 뱀의 자손들이 자기 복제물을 퍼트리기 위해서 진행이 되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뱀의 클론들이 설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역사 속에 약속이 들어오면서 묵시로 들어왔고, 그 약속이 아브라함이 보여주는데, 그게 바로 제사제물이라는 말이죠.

* 성도의 위상 !!

그렇게 들어올 때는 부정적으로, 즉 죽는 모습으로 들어오는데, 이 땅에서 억울한 피를 흘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 160페이지에 보면 "이삭은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이 낳은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데, 이삭은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잉태치 못한 것인데, 즉 사라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잉태치 못했는데, 그런데 존재는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오늘날 성도의 위상인데, 즉 "내가 나를 예수를 믿게 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태어난 나는, 나에게 없는 존재다 !!

3대째 모태신앙의 집안이 자기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태어난 나는 나에게 없는 존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성도인 나는 애초부터 나에게 없는 존재다" 라는 것인데, 즉 "나를 죽이고 나를 통해서 새로 만든 존재가 성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참 감격스러운데, 강의가 끝나고 먹을 오늘 점심이 생각나지 않고(ㅋㅋ),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될지,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이게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이 직면해있는 문제라는 겁니다.

* 아비 없는 자식, 그리고 '3' 이란 숫자의 인격화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3명의 천사를 보내셨는데, 제물의 '3' 이라는 숫자를 거기에 박아 넣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물 자체가 인격화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3' 이라는 숫자가 인격화가 되어야 시간이 공간이 되는데, 즉 '예수 안' 이라는 공간이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3년' 이라는 것은 1년, 2년, 그리고 3년이 아니고, '3년' 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은 암소로 시작해서 암염소, 수양,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뒤에 보면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도 나오지만, 그것들을 빼면 이 제물들은 인간과 함께 6일째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새는 5일째 만들어졌고 말이죠.

그렇게 6일째 만들어진 짐승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대표적인 표시로서, 암소, 암염소, 수양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수소가 아닌 암소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없는 자식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3년은 기간이 아니고 인물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암소가 왜 들어가는고 하니, 그게 레위기와 민수기에 가면 세분화가 되는데, 소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소가 제물 가운데 최상급이라는 겁니다. 그 밑에는 염소이고, 더 밑에는 양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7월 10일 대속죄일에 소와 염소를 잡는데, 즉 전체를 다 아울러서 한 마리를 잡을 때는 양이 아니고 소를 잡는다는 겁니다.

* 구원은 '단일의미'로 !!

그래서 대제사장 위임식 때도 제물로서 소를 잡는데, 이것이 전체를 다 아우른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이것을 서울강의에서 '단일의미' 라고 했는데, 그 강의제목이 '문제없음'으로 되어있지 싶은데, 당시에 강의제목을 정하는데 있어서 끝까지 고민이 좀 있었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개인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단일의미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야 공간이 되는데, 즉 같은 공간에 피막으로 둘러 쌓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자기가 잘해서 구원을 받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튼 여기에는 최상급의 제물이 동원되는데, 즉 전부를 다 아우른다는 말이죠.

여기서 창세기 15장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여기에 보면 제물을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중간을 쪼개는데, 그것은 내부본질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본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대상이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로 무엇인가 통과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주목하라는 것이죠.

그때 솔개가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 솔개는 위에서 땅에 있는 제물을 자기의 식용 음식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솔개에게 있어서 그 제물은 비선택인데, 즉 부정성이 들어가 있지를 않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솔개가 하늘에서 제물을 보고 "내가 이것을 먹고 죽어야지" 라고 하면서 내려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물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제물은 부정성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렇게 때문에 "살아있는 내가 더 살기 위해서 이 제물을 소비해야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솔개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만 쫓아내어 버렸다는 겁니다.

* 횃불의 등장 !!

그리고 밤에 되었는데, 그 제물 중간으로 누가 통과합니까? 17절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솔개가 아닌 횃불이 통과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횃불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그것들을 용서하지 않고 모조리 다 불에 태워버린다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렇게 불태운다는 것은, 불에 태우면 재가 되는데, 즉 창조를 무효로 만들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이제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로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인데,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역사 속에는 발전이 아니라 불 심판, 즉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로서 지나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제물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제물의 본질을 보여주는 분이 누구냐는 말이죠.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이 죽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제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시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가까운 미래에는 이삭이 왔고, 그 다음은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의 종결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성립이 된다는 말이죠. 그 이후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시간의 흐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여기서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 부정성을 경유한 이스라엘 !!

아브라함이 3년된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그의 자손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 제물의 덩치가 커지게 되는데, 그 나라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무엇을 경유해야 합니까? 부정성을 경유해야 하는데, 그러면 역사에서 묵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이라는 나라에 가서 죽을 고생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역사 속에서 압제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역사가 지배하는, 뱀의 자손이 지배하는, 즉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역사뿐이다. 그게 전부다" 라는 것에서 억울하게 부정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 엑소더스(EXODUS) !!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는데, 이게 구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구원은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구원은 받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런 부정성을 경유하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와서 어떻게 됩니까? 그게 창세기 15장 마지막에 나오는데, 그렇게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죠.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인간이 아는 역사세계에서 빠져나와서 묵시세계로 들어가는데, 그 과정을 구출, 혹은 구원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올 때는 '나'로 나왔지만, 들어갈 때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제물과 역사와 묵시가 일관성이 있게 연결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만이 진리이고 주님만이 길이고 주님만이 생명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이 만들어졌고, 그리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저희들을 택하신 줄로 압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항상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10,26 오후 2시에 마침.

목사님, 강의시간이 무려 3분이나 감격 속에서 길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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