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3 - 없음의 세계
21,09,0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 !!
오늘은 교재 13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창세기 6장 3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라는 말이죠.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동물 for that he also is flesh for he is mortal because he also is flesh
라고 되어있는데, 이미 하나님 쪽에서 판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도 여기 3절에 보면 나오는데, "사람이 육체로 변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체가 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 기존의 것(육체) + α !!
여기서 육체는 기존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육체가 아닌, 육체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기존의 것 + α'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존의 것 외에 하나님이 덧붙여준 것이 있다는 말이죠. 오직 이것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가 않지요?
기존의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고,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하면 기존의 육체에다가 무엇인가가 더 추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분의 것이 말이죠.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창세기 6장 이후에 나오는데, 그가 곧 노아라는 겁니다.
* 언약, 그리고 방주 !!
노아도 물에 빠진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데 노아에게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덧붙여주신 것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을 창세기 6장 8절에서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한데, 그렇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언약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 언약이 어떤 것인고 하니, 그것을 '방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있어서 지금 쉽게 하고 있는데, 창세기 6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는데, 만약에 함께 해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의 고집이고 아집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으면 함께 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억지를 부려서 "하나님이여, 우리 교회와 함께 하소서. 우리 가정과 함께 하소서" 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도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태도이고, 자기 욕망에만 도취가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고 우기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고 그 이유도 설명하셨는데, 그것은 인간은 그냥 육체가 되기 때문인데, 그 육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존의 있는 것을 가지고 그냥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행태라는 것이죠. 그렇게 죽을 때까지 이 땅의 것을 가지고 밀어 부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육체가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육체가 있는데, 그렇게 육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그러한 원인제공을 하는 셈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노아는 어떻습니까? 노아도 역시 육체인데, 그런데 그 육체에 하나님이 덧붙여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체적으로 잣나무로 만든 방주라는 것이죠.
* 방주가 먼저인가? 비가 먼저인가?
이 방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는데, 이 방주의 취지를 알기 위해서 권사님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너무 긴장은 하지를 마시고 말이죠(ㅋㅋ). 권사님, 방주를 먼저 만들었습니까? 그게 아니면 비가 먼저 왔습니까? 너무 어렵나요?
지금 여러분이 웃는데, 이게 웃을 일이 아니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방주를 만들 때 비가 오지 않았는데, 그러면 방주는 그 당시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란 말이죠. 마치 오늘날 신앙인과도 같은데, 신앙인이 지금 이 땅에서 어디에 쓸모가 있습니까?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방주가 의미는 갖는 것은 어느 경우인고 하니, 제가 보기를 제시해드리겠습니다. "1번, 장마가 졌다. 2번, 태풍이 몰려온다" 라고 하면, 이럴 경우에는 방주가 필요합니까? 굳이 필요하지가 않다는 말이죠. 이런 것은 우리가 대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인간의 가능함, 즉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극복이 된다는 말이죠.
* 헛짓 !!
달리 말하면, 장마나 태풍은 인간의 육체로서 방어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의 육체로 대비가 가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 방주를 만든 노아가 뻘쭘해진다는 말이죠. 인간들의 노력으로, 즉 댐을 쌓고 축대를 튼튼히 해서 대비가 된다고 하면, 노아가 방주를 만든 짓은 무슨 짓이 되는고 하니, 그야말로 '헛짓'이 된다는 겁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했는데, 왜냐하면 노아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성경 창세기 6장에서 분명히 그렇게 밝히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입은 것이 구체적으로 방주인데, 그런데 그 방주를 만든 것이 그만 헛짓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노아의 이웃들은 아무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억지로 만들어내는 믿음이 아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은혜로서의 믿음은, 그것은 노아의 삶을 봐야 되요 노아의 가는 길을 봐야 됩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심지어 가족이 봐도 아무런 쓸데가 없는 짓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신앙인데, 장래를 대비하는 짓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장래를 대비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육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이고, (또한 방주는) 장래를 대비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렵습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나' 라는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잘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죠.
여기서 베드로전서 3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겨우' 여덟 명이라 !!
여기에 보면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라고 하면서, 그 뒤에 부사를 붙여서 "겨우 여덟 명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겨우' 라는 것이 곧 무엇이라는 겁니까? 이 '겨우'가 곧 '은혜'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쓰레기들을 모두 모아놓은 쓰레기더미에서 노숙자가 하루종일 뒤져서 500원짜리 동전을 4개 구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2,000원이 되는데, 그것을 두고 "겨우 2,000원을 구했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곧 은혜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방주는 엄청나게 크게 만들었는데, 그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이 겨우 8명이라는 말이죠. 달랑 노아의 한 가족, 그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바꿔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혜라는 것은 없었고, 그냥 육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노아로부터 이야기하면 안 되고 육체로부터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육체로 시작해서 인간이 구원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즉 "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 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왜 현실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자" 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왜 천국에 가지 못하는가?" 라는 것, 그것부터 먼저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교회를 50년, 60년을 다녀도 천국에 갈 수가 없는데,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게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육체에게는 오지 않는 은혜 !!
그러니 은혜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결코 아닌데,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리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그 육체가 그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순수한 마음이라도 해도 은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인간이 육체이기 때문에 순수한 것도 없지만 말이죠. 자기 딴에는 순수하다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렇지 않다고 단정을 지어놓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것인데, 홍수가 1차, 2차가 있었다는 말이죠. 1차 홍수 때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재미를 보았다면, 그러면 2년 뒤에 2차 홍수가 오면 사람들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목수를 동원해서라도 방주를 만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은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
다시 적어보겠는데, "은혜가 은혜답게 되려고 하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헛짓이 되어야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노아 자신도 그게 헛짓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요구하는 쪽으로 보면 곤란한데, 즉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너는 육신을 가지고 있어? - 예, 있습니다. 거울에 비치는 육신이 있습니다. - 그러면 나는 너와 함께 하지 않겠다" 라고, 그렇게 이미 단정지어졌다는 겁니다.
* 은혜를 입은 노아 !!
그러면 우리는 삐쳐서 "노아는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노아는 은혜를 받았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리고 사고 팔고 했다는 겁니다.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눅 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사고 팔고 하는 것은 주로 자영업자들이 하는 것인데, 물론 우리도 하지만 말이죠. 그리고 먹고 마시고 하는데,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굶어가면서 교회에 나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시집과 장가를 가는 것, 즉 번식도 본능적인 것인데, 그렇게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
그것을 세 글자로 '관심사'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인간들의 모든 관심사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지요? 그것을 일주일 가운데 하루 동안 교회에 가지고 와서는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자기의 육체됨은 애써 감추고, 그것은 전혀 고려하지를 않고, 평소에 하든 짓, 즉 헛짓이 아닌 자기 육체에게 쓸모가 있다고 자부했던,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이 6가지의 질서를 가지고 교회에 가지고 와서 마음껏 활용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로가 대표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첫째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러면 왜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가 잘 되어야,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시집가고 잘 장가가고 잘 사고 잘 팔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두 번째가 코로나가 물러가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코로나가 물러가야 합니까? 코로나가 물러가야 예전처럼, 2년 전처럼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시집가고 잘 장가가고 잘 사고 잘 팔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코로나가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장사도 잘 되지 않고, 결혼식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그만 세상의 확장이 되고 말았는데,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이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평소에 하던 관심사를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와서는, 거기에 하나님을 개입시킨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셔서 단정을 지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육신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교회에 와서는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이 기도로 마구 터져 나오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 노아의 대표기도 !!
그렇다면 지금까지 강의한 이론에 의하면, 과연 노아가 장로가 되어서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은 우리 육신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노아가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내용은 어떠하겠느냐는 것이죠.
그게 국가일까요? 아닌데, 물론 코로나도 아니고, 그것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5초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자기 부인'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이 있는 곳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인데, 즉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하면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떤 은혜인고 하니, 자기의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 관심사가 아니고,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오늘날 방주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 있음의 세계, 없음의 세계 !!
지금까지는 어렵지 않았지 싶은데, 여기까지 이해를 했다고 여기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인데, 이 창세기를 한 줄로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에서 있게 한 것', 그게 바로 창세기이고 창조라는 말이죠.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있음'이 먼저입니까? '없음'이 먼저입니까? 없음이 먼저인데, 그러니 있음은 없음의 부수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말이 조금은 이상합니다만, 없음이 이렇게 있고, 그 없음으로 있음을 경유해서 없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인데, 즉 중앙에는 없음이 있고 그 바깥에는 있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있음은 그 있음이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고, 즉 "내가 있다" 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최종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의 있음', '너의 있음', '국가의 있음', '교회의 있음', 그것은 전부가 다 없음으로 사라져야 하는데, 그게 있음을 경유해서 없음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죠.
* 있음을 경유한 없음의 세계 !!
그러면 처음부터 없음이라면 그 없음으로 되지 않고 왜 있음을 만들어놓았는고 하니, 없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겁니다. 하나는 "생명나무가 없음의 세계에 있었다" 라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창조이전의 세계인데, 그 세계는 생명나무의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선과 악인데, 즉 "창세 이전에 선과 악이라는 취지가 있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없음의 세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생명나무의 취지는 나중에 천국이 되고, 그리고 선과 악의 취지는, 여기서 악이 계속해서 살아나야 하니, 그것은 곧 지옥이란 말이죠.
여기에서 이 없음의 세계, 즉 생명나무와 선악의 취지, 그것을 우리가 만들어진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분명히 없는 세계인데, 그런데 그것을 있음을 경유해서, 이런 두 개의 취지가 없음의 세계에 애초부터 있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란 말이죠.
*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여기서 로마서 9장을 보겠는데, 이것은 여러분이 아시니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야곱의 그의 형인 에서의 경우에, 창세 전에 야곱이 있었습니까? 없었는데, 그리고 에서도 역시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없음인데, 하지만 태어나면 있게 된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없음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있음의 세계가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로마서 9장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 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을 하셨다는 말이죠.
(롬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없음의 세계는, 있음의 세계의 설계도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없음의 세계가 있음의 세계의 설계도면이 되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모든 있음의 세계는 없음의 세계에서 계획이 된 대로 펼쳐진다는 말이죠. 그리고 1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나를 더 덧붙이는데,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에서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또한 야곱이 아무리 악한 일을 하더라도, 모든 되어가는 일은 어떻다는 겁니까? 야곱은 천국에 가게 되어있고, 에서는 지옥에 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지옥을 위한 에서이고, 또한 천국을 위한 야곱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데, 야곱은 위한 천국은 아니고, 천국을 위한 야곱이라는 것이죠. 즉 "나를 위한 천국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없음의 세계가 그 목적이고, 있음의 세계는 일시적이라는 것이죠. 있음을 경유해서 없음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복습해보면, 아까 홍수가 먼저인지 방주가 먼저인지를 물었는데, 분명히 방주가 먼저였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보기에 노아가 방주를 먼저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홍수가 들이닥쳤다는 말이죠. 그러니 노아가 방주를 만들 당시에는 홍수가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노아를 보고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노아를 보고 "왜 방주를 만듭니까?" 라고 했을 것이 분명한데, 요즘 말로 표현하면 "집사님,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지금 있는 세계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라는 것인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제가 조금 전에 '헛짓'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방주를 만드는 것이 노아의 아이디어입니까? 그게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은혜는 있는 성도로 하여금 어떻게 합니까? 현재에 있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없는 세계를 위해서 있는 자기를 뭔가 꼼지락거리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바로 은혜라는 말이죠.
현재 눈에 보이는,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들은 있는 세계를 더욱 더 있게 하는 것은 매우 잘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육체라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매일같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나오는데, 그래서 기도를 해도 그런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기도를 통해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대가가 무엇인지, 그래서 십일조를 해도 그 대가를 바란다는 겁니다. 자기 아이가 공부를 잘 할지, 신랑이 돈을 잘 벌지, 그렇게 자기 가정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하늘나라의 확장이 어떻게 저떻고 한다는 겁니다.
* 소망은 보이지 않아 !!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하지만 소망은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하는데, 눈에 보이는 소망을 바라는 자들을 보고 비웃듯이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다시 말해서, "당신은 신자가 맞습니까? 신자가 맞다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하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은 기도내용에 포함시키지를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보이는 것은 그냥 이 세상에 맡기라는 겁니다.
방주는 홍수가 오지 않을 때 만들어지는데, 그러면 이 방주는 어디를 지향하는고 하니, 있음의 세계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없음의 세계라는 말이죠. 즉 "나에게는 있음과 없음의 세계가 공존한다" 라고, 성도는 그것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홍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그것은 미래의 세계인데, 즉 "미래의 천국세계와 현재의 지옥과도 같은 이 세상이 나에게 함께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는, 그게 본드가 되어서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함께 있는 세계는 있는 세계가 아니고 없는 세계라는 말이죠.
* 예수님은 없다 !!
기도가 끝날 때는 그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그런데 그 예수님은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이는 것들의 총집합이 있음의 세계인데, 없는 것을 누가 볼 수 있겠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없음의 세계에 속하는데, 있음의 세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없음의 세계에 계신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그냥 "예수님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없다고 여기는고 하니,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거울에 비추어보면 분명히 보이는데, 그러면 예수님도 자기처럼 있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거울에 비추어보면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예수님도 같이 서있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수염을 기른 어르신네가 인자한 모습을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내가 나와 함께 있느니라" 라고 해주면 된다는 겁니다.
* 유령이다 !!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제자들이 한 말인데, 편의상 베드로라고 하고, 베드로는 "유령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있음의 세계에 포함되지 않은 자가 왜 등장을 하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있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육체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게 있음의 세계의 원칙이라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데, 25절에서 33절을 보겠습니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물에 빠진 베드로 !!
예수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셨는데, 그 순간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있다는 말이죠. 베드로는 있음을 통해서 없음의 세계를 표현하고 묘사해주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살아가는 것이 좀 나아졌습니까? 생활지원금이 더 나오고 했느냐는 말이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렇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물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지 않으면, 아예 물에 빠질 일이 없는데, 왜냐하면 처음부터 물 위를 걸을 마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자부했고, 그러면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는데, 그래서 함께 있는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얼마나 걸었습니까? 얼마 가지 못했는데, 왜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까? 바다의 그 풍랑을 보고 빠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풍랑은 누가 보냈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람을 준비해서 보내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물 위를 걷지 않는 베드로, 그리고 물 위를 걷다가 그만 풍랑을 보고 겁이 나서 물에 빠진 베드로, 그 둘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육체와 함께 하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 너무나도 정당하다는 겁니다.
* 모든 있음의 세계는 거짓이다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모든 있음의 세계는 거짓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저도 거짓이고 여러분도 거짓이고, 모두가 다 거짓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있음이 제대로 된 있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육체가 모두 다 거짓이기 때문에, 그래서 늙고 병들고 하면서 죽는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육체의 소멸과정인데, 세포가 점점 더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거짓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반면에 주님은 영광스럽게 계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3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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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 라고 해도, 인간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난무합니다. 그러면 그 신들은 다 어디서 온 겁니까?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 이라는 책을 통해서, '종교란 인간이 희구하고 있는 것을 무한자로 간주하고 이를 경배한다' 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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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를 경배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을 외부에 '투사(投射)'를 한다는 겁니다. 내부에서 외부로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든 말든, 인간들은 지속적으로 경배할 대상을 찾게 되고, 그 대상을 내부에서 외부로 투사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만들어낸 신이고, 자기가 섬기고 싶은 신이라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 13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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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기아스' 라는 B.C 45년경의 고대 철학자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원숭이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신은 원숭이를 닮았고, 지렁이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신은 지렁이를 닮았고, 거북이 나라가 있다면 그 신은 거북이를 닮았다. 따라서 인간 나라의 신은 인간을 닮은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조작해냈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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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주장하기를, 신이 자기와 닮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야 서로가 통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신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고 해야한다는 것이죠. 그게 자기에게 부합이 되는 신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인데, 그래서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우상이 그렇게 많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이 '우상' 이라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인데, 그러면 여기에서 그들도 아담의 자손이고, 또한 우리도 역시 아담의 자손인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도 역시나 동일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상을 끄집어내었다고 하면, 우리도 우상을 끄집어낸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신은 우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있음 자체가 거짓이니 말이죠. 있음은 오직 있음의 세계만 붙들고 있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을 개별자라고 하는데, 이렇게 '나'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나는 나 때문에 나 혼자 산다" 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기억 속에는, "지금의 나가 되기 위해서, 내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다 들어가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긴머리 소녀야 ♬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오세복' 이야기를 했는데, 이두진과 오세복이 '둘 다섯' 이란 그룹을 만들었고, 그들이 부른 노래가 '밤배', '긴머리 소녀' 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그 오세복 씨가 죽고 말았다는 것이죠. 여러분도 젊었을 때는 긴머리 소녀를 부르고 했는데, 그렇지요? 자도 그 노래를 좋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오세복이 작곡을 했고 불렀기 때문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자기가 필요하고 좋다고 하면서 모은 것들, 그런 쓰레기들의 집합체가 곧 '나'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누군가에게 오세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그 사람이 죽었나?" 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물론 저는 오세복을 만난 적도 없는데, 노래만 들었다는 말이죠.
지난 9월 2일에 이수미가 폐암에 걸려서 죽었는데, 그녀는 과거에 '여고시절'을 부른 가수라는 겁니다. 다들 아시죠? 저와 나이가 동갑인데, 만 69세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수가 죽었다는 소식에 왜 마음이 멍멍하냐는 것이죠.
* 깎여나가는 '나의 있음' !!
이 '있음' 이라는 것은, 주위에서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면, 자기의 있음도 역시 깎여나간다는 말이죠. 오늘은 참석하지 못했는데, 우리 장로님이 조카의 장례식에 가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의 세계로 가고 있더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네가 죽던 말던 나만 멀쩡하면 돼" 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사실 이수미는 별로 그렇지 않지만, 만약 자기 동생이나 자식이 죽는다고 하면,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잡아야 한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멀쩡합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나의 있음은 결코 홀로 있음이 아니다" 라는 것이죠. 즉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는 육신 !!
주위에 있던 사람이 죽게 되면 자기 있음이 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공포가 밀려오면서, 자기의 있음이 그만 깎여나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은혜를 받았으니 없음의 세계다" 라고 하면서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도, 주위에서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되면, 그러면 갑자기 허무를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허무를 느낀다는 것은, 평소에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다는 겁니까? 없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있음의 세계에 푹 빠져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아무리 십자가가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해도, 우리의 이 육신은 속일 수가 없다는 것이죠. 자기가 아무리 노아처럼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삶은 역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바로 그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염려는 누가 한다는 겁니까? 이방인들, 즉 지옥에 갈 자들이 한다는 것이죠. 있음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거기에 속한 자들이 말이죠.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 들고 와서 "제발,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업이 어떻고 코로나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머릿속에는 온통 있음의 세계가 가득한데, 그래도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있음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은 우상인데, 즉 거짓된 것이란 말이죠.
여기 교재 134페이지 중간에 보면, "종교는 인간의 자기 대상화의 산물이면서, 그런 기원을 망각하거나 은폐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는 없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망각하거나 은폐하려는 경향으로서 종교가 있다는 겁니다.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계속해서 교재 135페이지를 보면, "내가 만든 것은 가짜입니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사도행전 9장 5절에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진짜라는 겁니다. 즉 핍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라는 자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습니까? 믿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우상임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전혀 몰랐다는 말이죠. 자기는 제대로 된 하나님을, 전통적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 이 짝퉁아 !!
모든 주위에 있는 있음의 세계에서 다 역사적으로 인정을 해왔던 하나님, 그래서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 줄로 알았다는 말이죠. 교회에서 정통 개혁주의를 얼마나 많이 이야기를 합니까? 바로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거기에 동참하게 되면 진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한 자가 누구였다는 겁니까? 그게 바로 사울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울에게 누가 찾아왔는고 하니, 진짜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럴 때 그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나를 핍박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네가 살아온 모든 것이 나를 핍박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먼저 내밀면서 사울을 만나주신다는 말이죠. 즉 "이 가짜야, 이 엉터리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예수님을 핍박한 사울 !!
그래서 사도행전 9장 5절에 의하면, 사울은 이제 어떤 사람인고 하니, 사울이 새롭게 규정이 되는데, 여호와를 믿고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서, 예수를 핍박하는 자로, 그렇게 사울이 변했다는 것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핍박한 사울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받지 못했습니까? 이게 중요한데 말이죠.
구원을 받았는데, 그러니 구원받는 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곧 진짜 하나님을 핍박한 자다" 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자인데, 그것이 곧 '자기 부인' 이라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는 핍박을 하는 자라는 것인데, 그런 당사자로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자기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데, 주님 쪽에서 먼저 찾아와서 사울과 함께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살인자이고 죄인 중에 괴수이었지만, 창세 전에 나를 선택한 그 설계도에 의해서 나는 구원이 되었어야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바로 없음의 세계에서 잠시 잠깐 있음의 세계에 있는 형태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없음'에 대해서 !!
여기서 '없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이제 복음을 알았는데, 그러면 여러분은 집에 혼자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분명히 그렇지요? 없음의 세계를, 즉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우리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그런데 그때 마침 '딩동' 하면서 손님이 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관심사가 갑자기 어디로 바뀝니까? 예수님에게서 그만 손님에게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없음이어야 하는데, 손님이라는 있음이 된다는 말이죠.
* 제발 좀 꺼져주세요 !!
그래서 문을 열어주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는 사람도 있고, 혹은 "도를 아십니까?" 라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가 심방을 올 수도 있고 말이죠. 그런데 이런 있음이 있는 순간은, 그 모든 일어나는 일은 누가 있는고 하니, '나'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나' 라는 것은 거짓이고, 곧 신, 즉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만 중요하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 오든지 간에 대충 이야기를 하고는, 속으로는 뭐라고 합니까? "제발 좀 꺼져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와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절대적인 '나'가, 자기 집에 방문해달라고, 그렇게 상대방을 초청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손자가 오면 "제발 꺼져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손자는 너무 보고 싶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야, 손자가 보고 싶다. 제발 한 번 데리고 오너라" 라고 해서 손자가 왔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원한 것이기 때문에, 꺼져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초청하지 않은 있음이 왔을 경우에는, 그것도 혼자 있고 싶은데 왔을 경우에는 죽여버리고 싶다는 것이죠. 정말 그러한데, 물론 속으로 "어서 죽어라" 라고 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대충 둘러대면서 얼른 내보내고 싶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초청한 손자와 아들과 며느리라고 하더라도, 서너 시간 정도는 괜찮은데, 점심을 먹고 가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저녁까지 먹고 자고 간다고 하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말이죠. 사람은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늘 함께 있으면 싫은데, 자기가 초청했을 때만 와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부르면 와서 소원을 들어주고, 그리고는 얼른 돌아갔으면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자기는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거짓인데, 즉 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했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사단인데, 사단은 자기 있음이 있으면 항상 찾아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 본색을 노출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있음을 고집하는, 그 있음을 절대화를 시키는 자기가 악마와 한 통속이라는 말이죠.
* 나는 투명인간 !!
그래서 집에 있어도 자기를 투명인간으로 만들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없다고 여기게 되면, 만약에 쓰레기만 있다고 하면 그 집에 도둑이 오겠습니까? 가지고 갈 것이 없어서 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악마도 시비를 걸 것이 없으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를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있음을 지키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자기의 우상됨을, 절대화를 지키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는 오지 않는데, 그것이 아니고 자기를 지키려고 하면, 어느 토굴에 있더라도 찾아온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성질을 돋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육신이 있는 이상 항상 악마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악마 탓을 하지말고, 자기가 자기 있음에 정신이 팔려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데, 그런데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겁니다. "나는 남들보다 더 살아야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거짓의 존재로서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교재 13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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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항상 시간상 '과거→현재→미래'로 나아가기 때문에, 이 미래는 과거의 조작이고 표절입니다. 이 미래 안을 뜯어보면, 그 안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과거가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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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는 과거의 조작이고 표절 !!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내용을 분석해보면, 거기 소망은 과거에 자기가 경험했던 것이란 말이죠. 과거의 경험 중에서 보상을 받고 싶은 것이라든지, 자기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것, 그런 것들이 기도에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코로나가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는 것은, 코로나가 없던 시절을 자기가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는 것은, 옆집 아이가 전교에서 1등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는 1등은 좀 그렇고, 10등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그게 자연스럽게 기도내용이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항상 '나 있음'이 파괴되는 것, 그것이 흠집이 나는 것, 즉 '나 있음'이 마음에 들지 않게 있었던 것, 그런 결핍된 것을 빨리 보상해달라는 식으로 기도라는 형식으로 요청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있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있음을 제대로 된 있음으로 갖추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자기는 만족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있음의 욕망이 기도시간에 드러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표절' 이라는 겁니다.
* 시계(시간)폭발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과연 어떻게 응답을 해주실까요? 그런 성도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아주 성실하게 응답을 해주시는데, 그것을 4글자로 '시계폭발'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우주에는 해와 달과 별이 있는데, 그게 시계가 된다는 것이죠.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시간을 정하시는데, 그런데 주님은 시계를 아예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주님의 기도응답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 속에서 자기 우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과거에서도 그랬지만 미래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신으로서 기대를 걸고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계폭발, 즉 시간을 없애버리면, 즉 우주 자체를, 그 해와 달과 별을 없애버리면, 그게 곧 응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는 겁니다.
* 잠시 보여준 하늘나라 !!
바로 그 체험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했는데, 어디서 했습니까? 그게 바로 변화산인데, 베드로가 "여기사 좋사오니" 라고 했다는 말이죠. 해와 같이 빛나는 예수님과 엘리야를 보고서는, 모든 시간과 다 단절하고, 그만 거기에 주저앉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드릴 테니, 그만 우리 여기서 모든 것을 종결시킵시다" 라고 나왔다는 말이죠.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다시 말해서, "우리 함께 있읍시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우리의 미래모습이라는 겁니다.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는, 더 이상 자기 손상됨과 자기 소망으로 인해서 쫓기지 아니하는, 그냥 지금 있는 것으로 대만족이 되는 상태, 그것이 바로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잠시 보여준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 천국에는 선악나무는 없고, 생명나무뿐 !!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열매가 달리고 잎이 무성한 나무가 하나 나오는데, 그게 바로 생명나무라는 말이죠. 그런데 천국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선악나무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은 이미 따로 처리를 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이 없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고 하니, 당연히 천국에 간다는 것이죠.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육체에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
그렇다면 주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라고 하신 것은, 악은 에서에게 실어버리고, 야곱에게는 선, 즉 하나님의 의를 실어버린다는 겁니다. 사랑으로 말이죠. 그러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야곱이 가지고 있는 것은 육체인데, 그 육체에 하나님의 언약이 온다는 겁니다. 노아의 경우에는 그 언약이 방주였는데, 야곱의 경우에는 그것을 '야곱언약'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야곱에서 약속에 오게 되면, 그 약속에 의해서 야곱의 있음은 약속의 있음인데, 그것은 없음의 세계인데, 그 없는 세계의 있음에 의해서 야곱의 있음은 그만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바뀌는데,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말이죠. 하지만 에서는 이름이 바뀌지 않는데, 그것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고 악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뭔가 죄에서 의로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바뀌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온다는 말이죠. 노아약속, 아브라함약속, 이삭약속, 야곱약속, 요셉약속, 모세약속, 다윗약속 등등,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약속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최후의 약속인데, 이게 히브리서에도 나온다는 겁니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관심사의 '교체' !!
이 마지막 약속을 '교체'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현재 우리의 있음을 제거하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인데, 즉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히게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죽고 새로 살아나는 것인데, 즉 겉 사람은 죽이고 속 사람은 살리는 것이란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은혜인데, 즉 관심사의 교체라는 겁니다.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라고 하는, 그런 것이 관심사가 아니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인데, 주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제가 아까 사도행전 9장 5절에서 누구를 핍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 '나' 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 그 있음은 없음의 세계에서 오신 분에 대한 핍박기능과 작용을 하는 '나' 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은 이미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죠.
* 더 살고 싶어요 !!
우리는 이렇게 자기가 있다고 하는 그 있음을 절대로 부정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 있음, 즉 육신으로 인해서 자기 몸이 점점 아프고 늙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잘 아팠다. 그냥 죽어야지" 라고 나옵니까? 그게 아니고, "더 살고싶어" 라고 합니까? 당연히 더 살고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병원에 가서는 정기건강검진을 하고, 매일 영양제도 먹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백신을 맞더라도 아스트라제네카보다는 더 비싼 모더나를 맞고 싶어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우리는 뭔가 더 과시를 하고 싶어하는데, 그야말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면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이죠. 오히려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서 그 애착이 점점 더 강렬해진다는 겁니다. 그것을 집착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 그런 것을 우리에게 체험토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버리시게 하시는 은혜인데, 버릴 때 그냥 좋게 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구질구질하게 버리게 하신다는 말이죠. 즉 "이것이 거짓된 진짜 네 모습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까발려주시는 것이 곧 은혜라는 겁니다.
* 한석봉과 마더 !!
그게 교재 137페이지에 나오는데, 여기에 한석봉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한석봉의 어머니가 자식교육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래서 유학을 보낸 자식이 오랜만에 집에 오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만 불을 끄고서는, "나는 떡을 썰겠다. 너는 글을 쓰거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요즘 국가대표 훈련방식과도 비슷하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해서 나중에 불을 켜보니, 엄마가 쓴 떡은 그야말로 일정한데 자식인 한석봉이 쓴 글은 삐뚤삐뚤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야단을 쳐서 다시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다들 아시죠?
그런데 엄마가 과연 자식의 글에 대해서 평가할 자격이 됩니까? 떡은 제대로 썰었고, 그리고 글씨는 엉망이라는 것을 과연 누가 판단을 해야하느냐는 말이죠. 정년 그렇게 하고 싶으면, 떡을 쓰는 달인과 글씨의 대가를 불러놓은 다음에, 그리고 나서 결정을 해도 해야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지 말자"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나' 라는 것은 80을 살던 90을 살던 주님을 핍박하는 존재로서 확정이 난 다음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더 좋게 보려고, 자기가 평가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게 되면 항상 자기 연민과, 그리고 자기에게 가산점을 주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핑계와 변명이 늘어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죄인이 죄를 지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정당화인데, 즉 자기 의를 나타내는 몸짓과 말과 태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인간이 자기를 평가하면 말이죠.
* 인간이 그리는 자기 그래프 !!
그렇게 인간이 자기를 평가하면 마음 속에 그래프를 그리게 되는데, 그게 어떤 그래프인고 하니, 처음 교회에 나가면 1년차, 2년차, 3년차, 그렇게 해서 40년차가 되면 마음 속에 무슨 그래프가 생기는고 하니, 과거 시간개념이 있기 때문에 그래프를 그린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래프가 낮았는데, 그런데 이제 40년, 50년이 지나고 나니 그게 천상에 가깝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데, 그것을 '성화론'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거짓인데, 자기가 자기를 평가한다는 말이죠. 시장에서 떡을 썰었으면 떡만 썰어야지 어디 아들의 글씨를 평가하느냐는 겁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천하의 한석봉인데, 그의 글이 왜 비뚤한고 하니, 그것은 한석봉 체라는 말이죠. 일반인들은 도저히 평가할 수가 없는 글씨라는 겁니다. 그런데 떡만 썰던 엄마의 눈에는 그게 비뚤비뚤하게 보였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편의상 제가 지어낸 것이지만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있음을 지키기 위해서 평가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온 동네 귀신들은 다 들어온다는 말이죠. 즉 "당신은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이렇게 벌을 받았다. 목사를 험담해서 이렇게 되었다" 라는 식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사업에 망하고 자식이 말을 듣지 않고 몸이 아프고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자기가 행동을 올바로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평가를 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바로 우상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교재 138페이지에 보면 고린도후서 3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13절에서 18절까지 누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모세의 있음과 수건 !!
여기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라고 하고, 14절에 보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면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별히 함께 해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모세 있음 + 수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있음에 수건을 덮어야 없음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가 있고, 전달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수건을 항상 덮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약이니 말이죠.
* 죄인으로서의 '있음' !!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수건을 벗겨주시는데, 그렇게 수건을 벗겨주었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없음에서 바로 있음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없음의 세계에서 오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 앞에서 있음이란 것은, 그 어떤 핑계와 구실을 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죄인으로서의 있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에 의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유가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관계가 의로운 관계라는 겁니다.
*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
여기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 자들은 자꾸만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데, 얼굴은 완고해서 수건을 쓴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들을 보고, "너희들은 얼굴을 수건을 쓴 것처럼 완고하게 나의 편지를 읽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읽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이라야 살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미 살았기 때문에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그렇게 문자에 매이지 않으면 자기 평가에 대해서 스톱하게 되는데, 달리 말해서 그 관심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해주신 그 은혜에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내일 굶던 말던 죽던 말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있음의 자기 일이 아니라, 없음의 주님의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꾸만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동네 귀신이 다 들어온다는 말이죠. 동네 귀신들의 종류를 열거해볼까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헌금하지 않아서 그렇다. 목사험담을 해서 그렇다. 예배를 빼먹어서 그렇다. 남들이 도와달라고 할 때 외면해서 그렇다" 라고 하는, 그게 동네귀신이라는 겁니다.
* 이제는 수건을 벗고 !!
그러니 동네귀신들에게 그만 농락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성령을 받지 못했으면, 그러면 지옥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령에 오게 되면, 그동안 자기를 힘들게 했던 수건을 벗게 되는데, 그러면 진짜 자기 모습이 노출이 된다는 겁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는 죄인이다" 라는 것인데, 자기가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핍박한 죄인으로 드러나면 되는데, 그 자체로 주님에게만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에게 찾아와서 "너는 나를 핍박한 자로다" 라고 하시면서 기어이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창세 전에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어서 기어이 천국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인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은혜로 우리에게 찾아왔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9,13 오후 6시에 마침.
평생 주님을 핍박한 죄인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