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주님의 환경

아빠와 함께 2021. 11. 16. 18:38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7 - 주님의 환경

21,11,0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아브라함 언약 !!

오늘은 교재 16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제목이 '8강, 아브라함 언약' 이라고 되어있는데, 노아 언약은 방주를 만드는 것이고, 아브라함 언약을 제물을 바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계속해서 신약방향으로 나가게 되면, 제물을 바치는 것에서 사람을 바치는 것으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하나님을 바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참으로 신기한데, 우리 생각에는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그냥 조용하게 흘러가면 될 것만 같은데, 그런데 하나님은 자꾸 이 세상에 손을 대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멸망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계속 집어넣으시고, 그리고는 그 집어넣은 것만을 빼내어 가시는데, 그 집어넣는 것이 할례언약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노아 언약은 방주를 만드는 것이고, 즉 배를 만들어서 구원을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배로 구원이 되려면 홍수심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홍수가 나서 배가 없이는 구원이 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홍수심판을 통해서 방주에서 무엇인가가 따로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제물인데, 그것을 지난 시간에 '제물 바치기' 라고 했다는 겁니다.

* 자꾸만 바뀌는 상황 !!

처음에는 방주 안에 들어가기, 그것이 구원인데, 그 다음에는 제물을 바쳐서 구원되기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방주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지금 방주를 만들어서 들어간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상황이 홍수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바뀌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홍수는 어디로 갔는고 하니, 홍수사건 안에서 홍수는 사라지고, 홍수사건이 제물을 바치는 것과 관련이 되어서 더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 언약에 오게 되면 이삭을 바치게 된다는 말이죠. 사람을 바치는데, 즉 자기 아들을 바치지 않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여러분도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데, 즉 믿음 노선의 조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노아는 왜 믿음의 조상이 아닙니까? 노아는 왜 믿음의 조상에 포함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는 말이죠.

이 믿음이란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충분하게 무엇을 해야하는고 하니, 인간 행함의 한계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믿음이란 것은 인간 행함은 받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 인간은 충분히 범죄하지 못한다 !!

이것을 어려운 말로, "인간은 충분히 범죄하지 못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죄를 지어도 충분하게 지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만약에 어떤 사람이 충분하게 죄를 짓는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 행함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자기가 행한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숨을 쉬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숨을 쉬었으니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데, 즉 "나는 교회에 왔으니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기도를 했으니, 헌금을 했으니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모태신앙이니 천국에 보내주세요. 나는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석했으니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충분히 범죄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그런데 문제는 ⓑ충분한 죄인을 우리 힘으로는 달성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완전한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구원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처럼 들리기도 하고, 반대로 난감한 소식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말이죠. 그렇지요?

대충 죄를 지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느 정도 죄를 지어야 하는고 하니, 두 번 다시 자기 행함을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다시 내 행함을 주장하는가 봐라" 라고, 이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50년 교회에 다닌 것을 나의 자랑거리로 주장하는가 봐라" 라고 나와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가?

그러면 아브라함은 왜 믿음의 조상이 되는고 하니, 그 어떤 자기의 행함도 구원에는 전혀 소용이 없음을 아브라함이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행함의 조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최초로 알려준 자가 곧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율법이 바로 할례율법이라는 겁니다. 여기 대구강의에서 여러 차례 이 할례율법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상황이 바뀌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물이라면 방주가 되는데, 홍수사건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그 이후에 살고 있는데, 그러니 방주를 만들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양이나 소를 잡으면 됩니까? 물론 아브라함 시대에는 그게 되었는데, 지금은 역시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상황이 그때의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상황이란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충분히 범죄하지 않았던 시대라는 말이죠.

* 하나님이 맞아죽어야 !!

그렇다면 인간이 충분히 범죄한 상태는 무슨 상태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상태, 그것이 충분한 범죄한 상태라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맞아 죽지 않았다고 하면, 아직 인간에게는 남은 죄가 있다는 것이죠. 충분히 죄를 지으려고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죽여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과 5장과 같은 곳에 보면, 사도들이 뭐라고 설교를 하는고 하니, "오신 하나님이 죽으셨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인데, 그 주님이 곧 구약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너희가 죽였던 그분을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당시의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게 무슨 원리인고 하니, 충분히 범죄한 자만이 더 이상 자기 선함과 잘남과 같은 자기 의를 챙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 왜 복음을 방해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그렇게 하게 되면, 남들은 하지 않은 것을 자기는 했다고 하는, 그게 자기 기억에 잔상으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 이능우 집사님의 봉사 !!

오늘 이능우 집사님이 일찍 오셨는데, 저를 보고 "목사님, 지난번에 칠판닦기를 너무 축축하게 해서 잘 지워지지 않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서 사과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일종의 봉사라는 말이죠.

강대상에 꽃꽂이를 한다든지 피아노를 기증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 사람은 거기에 신경을 쓴다는 겁니다. 그래서 꽃이 시들었다든지 피아노 소리가 이상하면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말이죠. 악한 일이 아니고 선한 일을 자기가 했다고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때부터 신약의 때까지 계속해서 양을 잡고 염소를 잡고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에게 바친 민족은 자기들밖에 없었기에, 거기에 대한 자부심과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 망했다는 것이죠.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아라" 라고 한 것은, 어린양을 잡으라는 것이 아니고, 누가 죽는다는 것인데, 그게 누구입니까? 양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만든 원칙에 하나님 자신을 희생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하나님의 죽으심 !!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무엇을 믿고 행하는 것을 두고 복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자기가 만든 원칙, 거기에 하나님 자신이 핵심요소로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은 기독교도 아니고 천주교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데,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구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어느 시장에 가면 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형태가 있고 만질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방주는 크기가 있는데, 축구장 크기 정도가 되는데, 그리고 소와 양은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잡아서 드리면 된다는 말이죠. 솔로몬 성전은 만들면 되는데,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 복음은 곧 사건 !!

그런데 마지막 끝에 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뭔가 구체적인 형체가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사건' 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누가 독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비켜나간다는 말이죠. 아무리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해도, 자기가 십자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용이 되어지는 것이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편배달부가 자기가 편지를 써서 각각의 집집마다 돌리고 합니까? 다만 자기는 전달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전하고 돌릴 물량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그 직업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편지나 물건을 맡기기 않기 때문에 말이죠.

* 설교자는 하루살이 !!

그것은 설교자도 마찬가지인데, 주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방송에 나가서 까불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려고 행복 전도사로 설치는 것이란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주의 종이 아니고 사람의 종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람의 종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죠. 주시지 않으면 전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너는 왜 그 집 결혼식에 가지 않았어?" 라고 하니,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참석하지?" 라고 해서 유명해진 개그맨이 있는데, 조세호라고 말이죠(ㅋㅋ).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자기가 주님께 받은 것이 없으면 당연히 전할 것이 없는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학교를 나와서 거기서 배운 것을 전하면, 그것은 사람의 종이라는 말이죠. 주의 종은 반드시 주님에게 받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 있어서 전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그게 없으면 당장에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없으면서도 강대상에 서면 반칙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설교자에게 주어진 몫이라는 겁니다.

마귀는 이미 교회를 사람의 일로 전환을 시켰는데,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것들을 동원해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이죠. 물론 성경도 동원하는데, 여호와의 증인이 그런 짓을 잘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지옥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말이죠.

* 복음의 자유함 !!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고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특징들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을 받지 않으면 성경은 해석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데, 성경은 문자로 읽으면 안 되고 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그 영이 무엇인고 하니까, 17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이 전하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장애나 방해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코로나가 되든 그 무엇이든 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증거가 된다는 말이죠.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러니 주님이 우편배달부나 택배기사에게 물건을 넘겼다고 하면, 전쟁이 나도 물건은 반드시 전달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핑계거리도 있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복음에 맞추어서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 각각의 맞춤환경 !!

제가 처음에 강의를 하면서 반대로 들릴 수도 있는 내용을 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홍수가 났을 경우에는 방주가 대비책이 된다고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홍수가 나서 방주가 필요하다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인데, 즉 방주의 가치를 위해서 거기에 맞추어진 환경이 따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엄청나게 고생을 한 대목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런 힘든 환경 가운데서도 복음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런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고후 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좋은 환경이 주어져서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참 신기한데, 어떤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환경에 적합한 복음의 내용이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환경을 탓한다고 하면, 그것은 지식을 전하는 경우이지 주님이 주신 복음은 아니란 겁니다. 사도바울은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 다시 하면 !!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하겠는데, 노아 때의 구원은 방주였고, 아브라함 때는 양과 염소와 소를 바치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추가적인 지시를 내린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인데, 그러면 양과 염소와 소의 지향점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사람을 바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방주를 만들면 되었는데, 홍수환경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 환경이 달라지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달라지는 것에 병행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환경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홍수가 사라짐으로서 방주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데, 여기에서 홍수는 홍수사건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즉 "홍수사건 속에서 홍수가 사라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홍수가 사라지고 방주도 사라지는데, 그러면 홍수사건은 어디에 입력이 되는고 하니, 양과 염소와 소를 바치는 곳에 입력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사람을 바치는 것이 되는데, 하지만 신약에 오면 사람을 바치는 것으로는 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을 바쳐야 한다는 겁니다. 방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원칙에 자기 자신을 투입시키는데, 오직 그 내용만을 하나님은 받으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받지 않는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충분히 범죄할 수 없기 때문인데, 인간의 행함으로는 충분히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충분히 죄를 짓지 않으면, 아직도 자기에게는 선한 것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상상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에게 선한 것이 남아있다고 여기면, 선한 행함을 주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때에 이삭을 바침으로 말미암아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인간이 어디까지 충분히 죄를 지을 수 있는지, 그것을 아브라함 때부터 보여주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을 행함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노아는 믿음의 조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할례언약 !!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떤 식으로 인간의 충분한 범죄함을 보여주는고 하니, 아브라함에게는 할례언약이 있다는 말이죠. 양을 잡고 이삭을 잡고, 그리고 할례언약까지 한다는 겁니다. 할례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행함이 출발하는 인간의 육, 바로 그 육 자체를 하나님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할례언약은 인간의 육에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에다가 하나님의 약속의 요소를 그만 문신처럼 새겨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인(印) 맞음' 이라고 하는데, 즉 남성의 생식기 끝을 하나님의 약속이 점유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

그러면 여기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인물이 되고 마는데, 동일한 신체인데 그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여기에 개입된 것이 바로 할례언약인데, 동일한 인물이고 동일한 덩치라는 말이죠.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람이라는 인간과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이 어떤 차이가 있는고 하니,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에게서는 희한하게도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이 나온다는 겁니다. 아브람 계열이 있고 아브라함 계열이 있는데, 아브람 계열은 행함의 계열이고 아브라함 계열은 믿음의 계열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반면에 행함의 계열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의 행함을 자기 노동의 대가나 삯으로서 여기게 되는데,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충성하고 봉사를 하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그 무엇을 바라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노동을 했으니 당연히 그 대가를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 또 다시, 충분히 죄를 짓지 못한 인간 !!

조금 전에 이야기한 원칙에 의하면, 인간의 행함에 있어서 그것이 아브라함 때는 무엇이 부족했는고 하니, 이게 벌써 3번째인데, 인간은 충분히 죄를 짓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충분히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 행함에 기대를 건다는 말이죠.

"목사님, 일주일에 교회는 몇 번을 나와야하고, 헌금을 얼마나 해야하고, 전도는 얼마나 해야합니까?" 라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자기가 충분히 죄를 짓지 않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행함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들이 나올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게 아브람 노선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 노선은 무엇인고 하니, 행함이 나오는 게 아니라 선물, 즉 은혜가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하는 것도 모두가 다 선물이 된다는 말이죠. 지금 자기가 살아있는 것도 선물이 되는데, 왜냐하면 충분히 범죄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 다시, 아브라함과 할례언약 !!

다시 하겠는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갈 때는 할례언약이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할례언약 자체가 인간을 육에서 영으로 바꾸어주는, 그런 트랜스와도 같은 역할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이 충분히 범죄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할례언약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골로새서 2장을 보겠는데, 11절과 12절입니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노아의 홍수나 방주는 노아 사건 속에 흡수가 되어버렸는데, 그러면 구약의 할례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역시 할례사건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더 이상의 할례는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할례사건 속으로 들어갔기에 말이죠. 그러면 할례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여기 11절과 12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 다음에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할례사건이라는 것이죠.

* 모든 것이 십자가 사건 안에서 !!

무슨 말인고 하니, 뒤에 나오는 최종적 사건 안에 앞에 있는 사건들이, 즉 모든 율법이 사건화가 되어서 그 안에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을 잡을 필요가 없고, 할례가 필요가 없고, 십일조가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마지막 사건인 십자가 사건 안에서 해소가 되어서 말이죠. 그래서 지금 방주를 만들어도 소용이 없는데, 사건화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산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 몸뚱아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사는 것이 십자가 사건 안에서 사는 것이란 말이죠. 즉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새로운 환경을 우리는 또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환경으로 인해서 우리는 또 다시 오늘의 목숨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죠.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곧 사건 !!

이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받아들여야하는 믿음의 내용에 관한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사건이라는 겁니다.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 아니고 우발적인 것이란 말이죠. 물론 그 사건의 조종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 사건을 완성시킨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려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살려고 설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인생은 살아봐야 실속이 없다는 말이죠. 다들 살만큼 살아봐서 알겠지만(ㅋㅋ), 남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남은 여생을 둘이서 편안히 보내려고 해도, 자식들이 대출을 받고 해서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것이죠. 땅 덩어리라도 조금 있으면 더 그렇고 말이죠.

* 나는 주님의 주변환경 !!

그러니까 죽을 때 아무런 실속이 없는데, 이제라도 믿음의 반열에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의 노선에 말이죠. 그래서 "주변 환경이 있고, 내가 살았다" 라는 것을 몽땅 다 묶어서, "예수님이 계시고 나는 주변환경이다" 라고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변환경에 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이 나를 살려내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가져야 하는고 하니, "아하, 저것을 어떤 중심을 증거하라고 꽂아놓은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오는데, 그게 요셉이라는 말이죠.

요셉의 경우에, 그가 꿈을 꾸게 되는데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해와 달과 별이 되어서, 그 중앙에 있는 자기에게 절을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구조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꿈의 계시, 즉 예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 우리 인생에는 복수할 원수가 없어 !!

그래서 어제 낮에 "복수는 하나님의 예언이 좌절된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라고 했는데, 자기가 예언한 것에 대해서 반대한 경우를 맞이한 자에게만 복수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는 복수할 원수가 없다는 말이죠. 모든 원수와 그게 대한 심판은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우리가 심판하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드라마를 보면 모두가 복수극인데, 그것은 무엇을 반영하는고 하니, 실제로 칼을 들고 총을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 복수의 마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일이 꼬인 것은 전부가 다 남의 탓인데, 이것 때문에 자기 인생도 슬퍼진다는 것이죠.

* 까이기 전에 까라 !!

우리 인간의 원칙 가운데는 "까이기 전에 까라"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이혼의 원칙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부부는 이렇게 하라"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경우는 둘 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죠.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만, 둘 다 그렇다는 말이죠.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복음이 없는 자들에게 부부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동업자라는 겁니다. 서로가 사랑해서 사는 것이 아닌데, 물론 처음에 철이 없을 때는 그러했지만 말이죠.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돈 없이는 살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돈 때문에 서로 같이 산다는 말이죠. 이게 진실인데, 돈이 없는 행복은 없다는 겁니다. 돈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복음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인간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돈의 한계를 넘게 되는데, 즉 "돈을 벌지 못하는 당신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어떤 선물입니까? "이 땅의 인생은 포기해라. 천국에 가면 진짜 제대로 된 남편이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주님이 그런 비실비실한 남편을 붙여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복음을 모르면 헤어져도 괜찮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또한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여기고 살라고 한다는 겁니다. 돈이 없으면 헤어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없으면 헤어지라고 한다는 말이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헤어지라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말고 하는 것에 구애받지 말라는 겁니다. 복음을 핑계삼아서 자기 욕망을 쫓아서 아내와 헤어지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인데, 그렇게 되려면 사건의 내막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고전 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지금까지 교재 164페이지와 165페이지를 했고, 이제 166페이지로 넘어가겠는데 말이죠. 거기에 앞서 165페이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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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지 방주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이제는 방주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홍수 속에서는 방주가 빠지지 않았지만, '홍수 의의' 속으로 방주가 빠져 사라져야 되고, 홍수 사건은 계속해서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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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시대로의 돌입 !!

이제 이게 무슨 밀인지 알겠지요? 방주가 남긴 것은 짐승의 피인데, 제물로서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방주는 빠지고 홍수사건은 계속해서 유지가 되면서, 이제는 양의 피나 소의 피를 바름으로서 용서가 되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교재 166페이지로 가면, 여기에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홍수로 인해서 다같이 살아남은 자들, 그게 여덟 식구인데, 그런데 그들 안에서 내분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게 창세기 9장 이야기인데, 20절에서 23절입니다.

(창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 보이는 환경, 보이지 않는 사건 !!

여기에 보면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그만 술에 취해있는데, 이것이 바로 환경이라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합니다만, 환경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 구원의 비밀, 복음,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서 적절한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그 환경은 볼 수 있는데, 하지만 그런 환경을 유발시킨 핵심요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해와 달과 별은 보이지만 사건, 이것은 결국 십자가 사건인데, 이 사건은 환경을 유발시키기는 하지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보이는 환경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 독가스 훈련 !!

논산 훈련소에 가면 마지막 코스가 독가스를 마시는 것인데, 일단 방독면을 쓰고 안에 들어가게 해서는 조교가 벗겨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군가를 부르게 하는데, 그 가스가 보통 독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오면 구토를 하고 난리가 난다는 것이죠. 왜 이렇게 합니까? 전쟁에서 적군들이 독가스를 살포하면 방독면을 반드시 써야한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한 훈련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음과 같이 상상을 해보는데, 그렇게 독가스 연기를 피우면 다들 방독면을 쓰게 되는데, 그런데 한 사람이 쓰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그냥 연기였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아주 독한 가스연기였는데, 그런데 그게 어느 시점에서는 방독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그냥 연기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 할례, 안식일, 십일조 !!

구약에서 "십일조를 하라.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하라" 라고 하면, 이것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기도라는 겁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그리고 구제도 했다는 말이죠.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기서 구제는 왜 하는고 하니, 이사야서에 보면 구제를 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구제를 하지 않으면, 즉 형제를 돕는 기금이 마련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그만 멸망을 시켜버리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말았는데,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보니, 그들이 출애굽기가 에스겔서에 보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그리고 말라기에 보면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할례언약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구제를 하고, 금식을 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들은 온전한 나라, 즉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선택된 민족이고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 메시야를 살해하는 환경 !!

그러면 이 환경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자기들이 스스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만든 환경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오신 메시야를 살해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행함은 충분히 범죄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인간이 충분히 범죄를 하려고 하면, 그 최종점이 누가 있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맞아죽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충분한 범죄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반성하면 되는데, 그 값을 물어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죽인 것은 물어준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퉁칩시다" 라는 것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영원히 되지 않는데, 즉 "영원히 나의 행함으로는 내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고, 두 글자로 '복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비밀인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바로 이것을 전했다는 겁니다. 즉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독가스, 즉 심판의 소식을 모르고 살아가는데, 굳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백신을 맞으면 되고, 예수를 믿지 않아도 대통령 투표권이 있고, 예수를 믿지 않아도 누리를 호를 쏘아 올리면 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아쉬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면 아쉬운 것이 없는데, "어찌할꼬?"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살아가면 되는데,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없다는 겁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그런 갈급함이 말이죠. 육한 속한 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그야말로 생뚱맞다는 겁니다.

(시 42:1)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계속해서 교재 116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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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의 하체를 보고 덮었다고 했어요. 처음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의 첫 번째 현상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었어요. 벌써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된 인간이 아니지요.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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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 !!

시간이 걸려도 이것을 좀 설명해야 하는데, 이게 무척 어려운 대목이라는 말이죠. 옷을 벗으면 부끄러운데, 그런데 혼자 있을 때는 부끄럽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부부사이는 어떤가요? 역시 부끄럽지 않은데, 여러분은 부끄럽습니까? 그것은 내숭을 떠는 것이라는 말이죠(ㅋㅋ).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우리 인간은 옷을 벗어도 부끄러움은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겁니다. 옷을 입으나 벗으나 근원적인 수치는 사라지지를 않고 계속해서 잠복이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자기 의'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담의 경우에는, 옷을 벗는 것에 대해서 이유도 모르고서 부끄러워했다는 것이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가 범죄했다는 느낌은 있는데, 그러니 범죄에 대한 변명은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부끄럽다고 하는 것은 범죄를 했을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러면 아담은 자기의 창조를 압니까?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이 범죄하면 부끄럽다고 하는 것을 익히 아시고, 그런 조건을 인간 안에 집어넣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범죄하기 이전에는 벌거벗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범죄를 하고 난 뒤에는 자동적으로 부끄러워하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죠.

해독주스를 마시고 나면 피부가 벌겋게 되는데, 피를 걸러내는지는 몰라도 그러한 현상이 생긴다는 겁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인데(ㅋㅋ), 그만큼 우리 육신은 외부의 새로운 요소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데, 자기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말이죠. 그러니 인간 전체가 모두 다 부끄럽다는 겁니다.

* 노아가족의 내부분열 !!

그러면 노아가 술을 마시고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은, 정작 노아는 자기에게 부끄럽지 않은데 그런데 노아의 자식들은 노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말이죠. 노아는 구원사건을 품고 있는데, 그러면 노아의 가족은 둘로 나뉘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환경이라는 말이죠.

노아를 제외하면 7명인데, 셈과 야벳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하면서 담요를 가지고 그 부끄러움을 덮어준다는 겁니다. 이 행동은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경우와 자기들을 일치시킨 것인데, 아버지에게 해준 것도 되지만, 그게 자기들의 처지임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비록 술은 아버지가 마셨지만, 아버지의 신체와 자기들의 신체를 일체화시켰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나안과 함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신체와 자기들의 신체를 분리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노아사건에서의 분리인데, 즉 덮어주심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분리가 되었다는 말이죠.

여기까지는 대부분이 알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들이 방주에서 같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같이 나왔는데, 여기서 내부분열이 일어날 줄은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내부분열이 발생할 줄은 말이죠.

* 우리 가족만은 구원을 받았어 !!

이것은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그들은 방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계속해서 간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방주에서 8식구가 구원을 받았는데, 그러면 저주는 이제 상관이 없고 복의 민족으로 계속 간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구원받은 방주 안에서 저주를 받을 인물은 나올 일이 없다고, 그렇게 확신을 했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것은 '자기 구원' 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인데, 자기가 있고 7명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구원의 핵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환경으로서 작용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자기 구원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 자기 존재 자체가 주님의 여기 계심을 드러내는 환경의 일부라는 것은 전혀 고려치 못했다는 겁니다.

* 그러면 여러분은?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자기만 천국에 가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러면 그것은 함과 가나안 오해한 것과 전혀 다르지가 않다는 말이죠. 요즘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구원을 받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세요.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게 과연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냐는 겁니다.

성경을 마구 동원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과연 맞느냐는 것이죠. 그것이 전도이고 복음의 전파가 맞느냐는 겁니다. 교회에서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저주가 끊어집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멘,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손을 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손을 들고 나오는 것이 곧 행함인데,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가 결심해서 예수님을 믿고 손을 들고 나와서 고백하는 것, 그것만은 아직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를 살린다고 본다는 말이죠.

* 아하,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죄구나 !!

지금 말이 복잡해지고 있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야 목사야, 내가 예수님을 믿고 헌금을 하는 것도 주님의 일이고 주님의 은혜인 것을 믿기에 하는 것이지, 이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나는 신자가 맞잖아?" 라고, 그렇게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자가 과연 신자가 맞습니까? 그렇게 하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주인공이 누가 되는 겁니까? 자기 부인이 되지를 않는데, '나' 라고 하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결코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유발시킨 환경인데, 우리 좋아라고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환경으로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충분하게 범죄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죄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죠.

* 복의 전달과정 !!

지금 창세기 9장이 무슨 이야기고 하니, 아버지인 노아의 복이 자식들에게 어떻게 전달이 되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버지고 자식은 자식이기에, 그것이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동으로 되면 이런 내용이 나올 이유가 없는데, 그냥 '믿습니다' 라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복의 전달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버지의 복은 아버지의 복이고, 자식의 복은 자식의 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연결이 되려면 여기에 무엇인가가 개입되어야 하는데, 아버지인 노아가 이미 구원사건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노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건이 자식들에게 확산될 때, 그것이 어떤 식으로 되는지를 지금 살펴보려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뻗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지를 홀라당 벗었는데, 그만 하체를 드러냈다는 것이죠. 평소에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 일을 발생했다는 겁니다.

이런 노아의 행동은 그야말로 실망스러운 행동인데, 인간의 행함이 충분히 범죄하면 실망스럽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노아가 저렇게 행동하면 되나?" 라고 하면서 꾸짖게 된다면, 이것은 어느 쪽입니까? 저주받은 쪽이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그러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그렇게 자기가 결심해서 구원을 받았느냐는 것이죠. 그게 아닌데, 창세기 6장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러분이 교회에 오래 다니고 하면 성경말씀을 다 안다고 여길 수 있는데,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이죠.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하면, 사람들은 노아가 은혜를 소유한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고 은혜가 노아를 지배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노아야, 까불지 말라" 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있어서 활동하고 있다는 환경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를 일종의 환경으로 이용하셨다는 말이죠. 노아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 자신의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 노아를 데리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고, 그리고 그 홍수를 무사히 통과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분인가를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노아가 대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라" 라는 그 무서운 홍수심판, 인간 각각의 대상을 묻지 않는 대규모의 심판을 감행하시는데, 그런 가운데도 노아는 살아남았다는 말이죠. 그것은 노아가 받은 은혜 때문인데, 그게 바로 신약에 오면 십자가의 은혜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러한 십자가의 대단함을 안다고 하면, 아버지의 그런 꼬라지를 보면서, 즉 하체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러한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방주를 거쳐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아버지는 별 볼일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에 덮어줌이 있다"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노아 자체가 은혜로서 덮어줌이 있다는 것인데, 즉 덮어주는 담요의 의미가 노아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입장이나 내 입장이나 동일하다" 라고 여기게 될 때, 그게 바로 복이 전달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고 삼일만에 부활을 하셨는데, 바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도가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 라고, 그렇게 일치를 시켰다는 겁니다. 멋있는 부활과 자기를 일치시킨 것이 아니고, 못 박히신 십자가라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은 자기가 죽어야 하는데, 자기를 대신해서 주님이 죽으셨다는 겁니다. 자기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인데, 즉 "나는 죽어 마땅한 범죄자로서 충분하다" 라는 것이죠. 물론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인데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착하고 바르게 살아라" 라는 게 아니고, "너는 주님의 일하심으로 파장된 환경의 일부이다" 라는 겁니다.

그게 교재 167페이지에 나오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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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에서 공룡이 떠오르면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예수님의 구원여파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생겨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내가 파도를 만들어낸 것이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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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e you ready?

연못에 공룡이 떠오르면 당연히 물결이 생기는데,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파장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리고 거기서 구원을 받는 자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성령이 관여하시는데, 그 성령의 여파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율법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까지 성령세례가 오게 되니, 예수님이 뜨니 그들도 같이 뜨게 된다는 말이죠.

지금 칠판에 영어문장을 하나 쓰겠는데, "Are you ready?" 라고, 즉 "들릴 준비가 되었나요?" 라는 겁니다. 휴거가 될 준비가 되었느냐는 말이죠. 오늘 강의내용이 바로 이것인데, 즉 "주님과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라는 겁니다.

* 파도타기 !!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도 들려야 한다" 라고 하시는데, 주님은 성령에 의해서 늘 들릴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러한 인생을 사셨다는 겁니다. 항상 아버지에게로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것이죠.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교재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교회마다 다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그 뒤에 보면 "내가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주님이 일으킨 파도에 휩쓸릴 뿐이라는 말이죠.

* 아, 옛날이여 ♬

일종의 파도타기인데, 놀이동산에 가면 자기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파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냥 LP 레코드판에 바늘을 하나 올렸을 뿐인데, 자기 입에서는 찬양과 찬미가 마구 흘러나온다는 것이죠.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르게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 마음을 주관하사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아, 옛날이여' 라는 노래일 수도 있는데,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은 사람의 그 어떤 행동과 노래도 주님 앞에서는 찬송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를 위해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리고 그런 사람은 주님이 뜰 때 같이 뜬다는 겁니다.

*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곧 죄 !!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바리새인은 자기 구원의 여파를 자기가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노아 아버지처럼 하체를 드러내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나쁜 짓을 해서 죄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게 죄입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짓이라는 말이죠.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 구원의 능력, 그리고 사건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의 지식이 아니고 구원의 능력인데, 그것은 반드시 사건화가 된다는 겁니다. 구원의 능력은 자기 소유가 가능하지만, 구원의 사건이 되어버리면, 자기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일방적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만 살래. 나는 죽을래" 라고 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것을 듣는 고넬료의 경우에는, 그 베드로의 지식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란 것이죠. 베드로에게 천사가 오고, 그리고 고넬료에게도 천사가 왔다는 겁니다. 천사가 양쪽에 다 주선을 했다는 말이죠.

(행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행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 10: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행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 10: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렇다면 부부의 경우에, 남편과 아내가 다 복음을 알았을 경우에는, 남편이 복음을 안다는 지식이 아니고, 아내가 복음을 안다는 지식이 아니고, 둘 사이를 20년 전에 부부로 맺어줄 때, 그때 이미 주님의 사건이 가동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복음이 작용하고 아내에게 작용해서, 그렇게 복음과 복음이 작용하게 되면, 그게 하나의 선물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넘게 하신다는 겁니다. 아내는 남편이 몸이 아프고 능력이 없어지면 헤어질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남편도 아내가 바가지가 점점 더 심해져도 헤어질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그게 아니고, 아프고 돈이 없는 것도 주의 선물이고, 바가지도 주의 선물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지금 표정들이 영 이상한데(ㅋㅋ), 제가 행함을 강조했나요? 지금 아프지 않아도 서서히 아프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런 일들이 생긴다는 말이죠. 지금은 돈이 있어도 나중에는 다 떨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기다리면 주께서 그런 한계상황에 부딪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처음부터 십자가 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사람이고 말이죠.

* 대자대비한 하나님 !!

여기 교재 167페이지에 보면, "사람을 용서해주면 그냥 용서해주면 되는데,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용서해주어야, 그래야 진정한 용서가 아니냐는 겁니다. 대승불교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데, 그래야 대자대비한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죠.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말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불교가 더 아량이 넓고 크다는 말이죠. 하지만 복음은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까? 인간구원이 곧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일하심이 복음이지,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복음을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반드시 자기 구원과 결부시켜서 복음을 이해하는데, 그러니 이것이 바로 마귀의 짓이라는 겁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을 이용하겠다고 나서는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죽이겠다는 것과 동일한 소리라는 말이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죽일 거야"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라는 겁니다.

신천지, 안상홍, 박옥수, 안식교, 여호와증인, 지방교회 등등, 그들의 출발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왜 시비를 거냐?" 라는 것인데, 내세우는 게 자기 구원밖에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 그것만 내세운다는 말이죠.

* 기어이 저주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 !!

고집도 이런 고집이 없는데, 문제는 기존 교회도 전혀 다르지가 않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이익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노아를 통한 함과 가나안의 모습인데, 즉 "같이 구원받은 방주에서 나왔는데, 설마 여기서 저주받은 자가 있을까?" 라고 하는, 그 발상 자체를 하나님의 약속은 피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어이 저주받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 9장의 노아가족의 내용이 그대로 말씀으로 자기 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셈이니 복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인 셈의 요소와 저주인 함의 요소를 둘 다 발생을 시켜서, 도대체 누가 무슨 일을 하셔서 저주에서 복으로 옮겨지게 되었는지, 그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의 그저 덮어주시는 은혜로, 행함을 묻지 않는, 범죄한 자에게 행함을 물으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값없이 그저 주시는 은혜만 계속해서 나타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는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주님의 환경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 시작은 항상 자기 중심으로 보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 중심으로 바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11,05 오후 5시에 마침.

매일 한계를 뛰어넘는 기적의 삶을 살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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