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사모님들과 목사들

아빠와 함께 2021. 10. 9. 16:02

사모님들과 목사들

 

 

고린도전서 4:9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모님이란 목사와 결혼한 여자를 말한다. 이들은 목사를 한 남편으로 간주해서 결혼한 것이지 복음을 더 듣고 싶어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자체적인 능력이 발휘되는 세력권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4:9의 말씀은 그냥 성경책에만 박혀 있는 문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음 속에 있는 성도들을 통해서 발현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사모님들은 이런 사실에 관심 없다. 그냥 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 가정을 남편과 더불어 꾸미기 위하여 결혼했다. 당연히 사모님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은 이 가정 꾸미기에 초점이 모아진다. 어떻게 하면 보통 사람들이 가정을 꾸미는 식으로 우리도 그런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을까에 정신을 다 쏟는다.

 

 

 

이로서 한 가정 내에 두 개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나뉘어져 있게 된다. 복음을 아는 목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복음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가공할만한 위력으로 복음 스스로가 능력을 자기 위에 매일같이 퍼붓고 있음을 감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 비해서, 사모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평소에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그 실적을 얻어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즉 노력 여하에 따라 보통 사람들이 꾸려 나가는 그 가정을 자신들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생각의 중심이 원만한 가정 꾸리기에 있다. 따라서 사모님들이 이해하는 복음이란, ‘원만한 가정 꾸미기’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성도가 복음대로 살고, 복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원만한 가정 꾸리기는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보장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사모님들은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생관에 준해서 사모님들은 목사들의 행위를 주시하고 때로는 잔소리를 해댄다.

 

 

 

“당신은 다른 목사들처럼 타락하지 말고 당신만큼은 말씀대로, 복음대로 똑바로 살고 목회하란 말이야. 그래서 우리도 남들처럼 원만한 가정을 유지하자 말이야”

 

 

 

사모님들이 생각하는 바른 사모상이란, 남편이 복음대로 소신적으로 목회하도록 자신의 인생관마저 포기하고 전적으로 순종하고 협조하며, 교회 행사에 앞장 서서 봉사하고 헌신적으로 솔선수범하며 가정 생활에서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고 여긴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모님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남편 인생관을 흡수 통합시켜서 없애버리면서까지 희생하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만한 보통 사람들의 가정을 책임져 주는’ 보상책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모님들의 태도보다 더 악랄하게 노골적으로 복음을 반대하는 태도가 달리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남편(목사) 곁에서 수 십년간 관찰해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손에 쥐어주는 것이 전혀 없음만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모님은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은 견딜 수 없다. 결국 남편에게 속고 하나님에게 속은 것이 너무 억울하고 분통터질 질이다. 자신의 인생관까지 포기하고 행여 남편의 복음적 인생관이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감안해서 참고 또 참고 남편의 복음적 목회관에 헌신적으로 희생해 왔는데 그 허비한 꽃다운 청춘을 대체 누구에게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보상이 안된다면 복수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결국 하나님에게 보복하는 식으로 태도가 돌변하는 것처럼 사모님들도 목사를 상대로 보복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9의 말씀, 즉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라는 말씀은 안중에도 없다.

 

 

 

그동안 사모님들은 어린 마음에 복음이 진리며 옳은 줄 알고 순진하게도 남편의 인생관에 흡수 통합하는 것이 옳은 길인 줄 알고, 그 옳다는 성과를 은근히 기대해왔었다. 그러나 말짱 꽝이었다. 맨 처음 결혼 초기에 은근히 희망했던 소박한 ‘나의 가정’ 꾸미기는 도리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사모님들은 더 이상 남편 목사의 인생관을 믿지 못한다. 당연히 ‘복음 믿는 생활’도 마음 속에서 철거시켜버렸다.

 

 

 

이제는 남은 방도는 다시 자신이 인생관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그 인생관은 딴 게 아니다. “더 이상 하나님 믿지 말고 내 가정을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얼마나 살려고 애쓰느냐에 따라 살아남을 뿐이다. 이 외 다른 진리가 없다. 그동안 하나님을 믿을 만큼 믿었고, 우리 남편이 복음대로 산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자부했다. 그러나 실제 손에 돌아가아 오는 것이 전혀 없으니 그 복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그저 농담일 뿐이다.”

 

 

 

사모님들이 억울한 것이 남편인 목사에게만이 아니다. 교인들도 밉게 보인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온갖 세상 것을 다들 즐기면서, 순진하게 복음만 붙들고 살아가는 목사 가족에 대해서 입바른 칭찬만을 동냥하듯이 가끔 던져주는 안일함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역시 목사님 가정은 우리 보통 가정과는 달라. 로마서 12장의 말씀대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변화를 받아 오로지 말씀 중심으로 사니 우리 일반 평교인들은 언제쯤 저런 목사님과 사모님의 수준이 이를꼬! 부럽다”라는 돈이 안 되는 위로와 격려만을 늘어놓고서는 목사 가정을 그저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애완동물 보듯이 보고들 있기 때문이다. 목사 가정도 그들과 같이 실제 자본주의 체계 안에 놓여 있음을 감안하지 않고서 마치 구름 위 천사들이 사는 동네에서 사는 것인줄 착각하고 있다. 교인들이 편하게 위로할 그 순간에도 목사 가정을 책임지는 사모님들은 속에서 불이 난다.

 

 

 

폭발할 지경이다. 현실 삶과 복음이라는 이름의 농담 사이에서!

 

 

 

그렇다면 사모님들의 복수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것은 남편은 자기 인생관 속에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사모님) 수 십년 동안 남편의 인생관이 진짜 진리인양 여기고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주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비실제적이고 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이제는 아내 자신의 인생관을 전면에 내세워서 주도권을 쥐고 내 식대로 가정을 꾸려나가겠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 대해서는, 교인들은 십자가 복음이란 농담을 진리처럼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기에 당신은 계속 복음만을 증거하고, 복음대로 사는 진실한 목회자로 위장하되 그 복음을 밑천으로 돈이 들어오는 쪽으로 행동을 취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헌금 안 하는 자는 복음도 모르는 자로서 단체로 지옥 갈 교인들이다’라는 점을 강변하는 식으로 설교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살자고 목사 되었고, 살자고 목회하는 것이니, 교인들이 각자 자기네들 직업으로 밥먹고 사는 것처럼 우리 목사 가정도 목회를 통해서 밥 먹고 사는 게 뭐가 나쁘냐 라는 것이다. 이 점을 전에는 쉬쉬했지만, 이 쉬쉬가 되레 교인들 정신머리를 안일하게 만들어서 당신의 복음이 교인들을 방종케 했으니 이제는 뽄 때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뭐가 못나서 우리 가정이 이토록 비참하게 살아야 되나? 미쳤나? 우리만 손해보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고유한 품위와 품격을 갖출 권리가 있다. 목사 가정이 돼지 우리가 되어야 속 시원하겠나. 내 앞에서 복음이나 하나님 이야기하지 말라. 돈 안되는 복음이나 하나님은 비구체적이고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당신같이 착하고 복음대로 사는 자를 대형 교회 목회자로 만들어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내 말은 복음 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되 이제는 희생적으로 그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받으란 말이야. 고객이 원하는 것을 주고서는 상품 값은 받아 챙겨야 할 게 아니야. 나까지 바보되기는 싫다!”

 

 

 

졸지에 고린도전서 4:9의 말씀은 또다시 모독 받는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러한 사모님의 강변이 자주 있고부터 목사는 자기 인생관을 포기하게 된다. “아, 말씀이란 가만 있어도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경책 속에서 탈출 못하고 현실화되지 못하고 구체화되지 못하는 활자로 된 교훈적 문구에 불과하구나. 그래, 성경이라는 이름의 지하창고에 말씀을 넣어두고 있다가 설교 시간에서 잠시 내가 깨워서 교인들 앞에 소개하고, 다시 지하 창고에다 처넣어두면 그만이다. 이제부터는 말씀 보는 시간 따로, 내 생계를 위한 시간 따로 두어야지”라는 식으로 나온다.

 

 

 

결국 목사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포기한다. 목회는 돈이 되지만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돈이 안되고 또한 돈을 벌 시간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을 벌 시간을 위하여 돈이 안되는 시간이 떼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그저 돈 벌기 위한 기능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남편(목사)의 태도에 사모님은 매우 흡족한 한다.

 

 

 

왜냐하면 실은 그동안 돈이 없이 불편한 가정인 것이 아니라 인생관이 상호 달라서 불편한 가정생활을 끌어왔던 것이다. 부부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서로 인생관이 일치되어 서로가 하는 일이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고 도리어 도움이 될 때, 비록 많은 수입을 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비할 데 없이 다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다. 어느 여자들이 이런 소박한 최소한의 가정 행복을 추구하지 않겠는가! 사람 사는 맛이 이런데 있는 것이다. 누가 자기를 아직도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 인생인가! 아내는 남편이 이런 자가 반려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평생.

 

 

 

머리가 둘로 갈라지면 그 자체로서 비정상적인 신체가 되는 것처럼,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인생관을 쫙 둘로 나뉘어져 있다면 금고에 억만 금이 있은들 무슨 소용인가! 사모님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결코 ‘돈 많은 목회자상’이 아니다. 목사가 돈만 안다는 주위의 소리가 들리면 그것조차 사모님 자존심에 손상이 가는 상황이다.

 

 

 

참으로 사모님들의 원하는 바는 아내의 인생관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아내의 존재를 무시만 하지 안한다면 아무리 힘들어 고된 세파도 서로 격려하며 이겨 나갈 수 있다고 여자들은 믿고 있다.

 

 

 

하나님도 잊고, 십자가 복음도 잊고, 이제는 눈에 보이는 우리 둘의 마음을 한데 모아 그저 평범한 가운데 소박하고, 욕심없이 하루하루 이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 이것만이 사모님들이 진정 원하는 바다.

 

 

 

고린도전서 7: 33-34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사모님들은 이런 성경 말씀까지 다 가정을 깨는 말씀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목사 된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옆에서 코치한다. “여보,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상처 되는 구절은 언급하지 마시고 그냥 건너 뛰세요. 당신이 그 대목 언급 안하면 교인들은 성경에 그런 대목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 알면 하나님이 먹고 살도록 돈 주실 줄 알고 순진하게(?) 결혼했던 사모님들이 목사 부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배우고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다. 인간이란 항상 주도권 싸움을 벌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하는 것을 말이다..

 

 

 

“아, 사람이란 둘만 만나면 하나의 주도권을 두고 상호 싸우다가 패배한 쪽의 인생관이 승리한 쪽의 인생관에 흡수 통합되는구나”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란 절대로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의 행복, 자아의 인생관, 자아의 존재성을 하나님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주어도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양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나를 사랑해주어도 내가 원하는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모님들을 익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고 복음이고 다 쓰레기 통에다 갖다버리는 것이다.

 

 

 

일단 내가 세상에 나타나 존재하는 이상, 나는 영원한 절대 신으로 존재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 사도님은 반가운 소식을 들려준다. 때가 온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쓸어 가버린다는 반가운 때가 닥쳐온다는 것이다.

 

 

 

“때가 단축 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고전 7:29)

 

 

 

때는 홍수 같아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다. 그 어떤 경우라도 다 쓸린다. 사모님들도 때가 찾아오면 다 휩쓸려 사라진다.

 

 

 

말씀은, 말씀이 알아서 자신의 내용을 성취하신다. 목사의 임무는 이것을 교인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독스럽게 사모님에게 당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목사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곧 자기 상황임을 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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