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12-14 확실한 것으로 시작
14. For we are made partakers of Christ, if we hold the beginning of our confidence stedfast unto the end;
‘확실한 것’은 따져봐서 수긍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음’을 들추어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믿지 않음’=‘악심’이기 때문입니다. an evil heart of unbelief,
악하나는 것은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두루 남들의 의견을 경청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어야 될 내용과 직접 만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정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어야 될 것들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주입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늘 숙제 같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한 번 잘했다고 해서 그 후에는 자동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도 이와 같습니다. 어제 신앙생활했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도 유효한 신앙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기분 따라 삽니다.
한결같이 상쾌한 느낌이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을 유지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따라서 한결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면 한결같이 자신의 가치가 무無(=없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율법의 취지는 이스라엘이 앞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음을 늘 인정하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인간도 장래에 대해서 감히 장담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여튼 인간은 장래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하고 대처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점이 확실합니다. 로마서 4:15-16에 보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확실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