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신학
바울신학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에게 나타난 일을 바울이 어떻게 이 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여호와의 언약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또 연관이 있다고 단정해 버릴 수 있는 객관적 증거는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으로 풀어나가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제일 충격적인 사건은 십자가에 저주받아 죽은 그 인물을 하나님께서 그를 주가 되게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점은 바울이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감을 일시에 허물어 버린 사건을 경험한데서 비롯 되었습니다(사도행전 9:1-9).
살기등등한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가는 바울은 그 당시만 해도 나사렛 예수는 완전한 여호와에게 이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죽음이 율법대로 하나님의 저주의 표정인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23).
저주받은 자를 저주하는 것은 하등의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당사자를 여호와께서 주가 되게 하셨다면 바울 자신이 단순히 구원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니라
유대교가 안고 있는 신학 자체에 큰 변혁이 일어나야 됨을 느꼈습니다.
유대교 신학의 중심은 여호와와 이스라엘간에 언약으로 표현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언약 때문에 세상을 버리면 버렸지 이스라엘은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결국 사흘만에 여호와께서 다시 죽음에서 일으켜 주가 되실 그 당사자를
이스라엘이 힘을 모아 그를 자기 세계 밖으로 죽음으로 몰아낸 것밖에 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경우라면
이스라엘이 평소에 생각하고 자신있어 해 왔는 언약 해석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이 만천하에 노출된 셈이 됩니다.
어디서 잘못된 것입니까? 문자적으로 빈틈없이 지혜를 짜 모으고 했을텐데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개 같은 이방민족에게 메시야를 죽이는 일을 수행하게 하시지 않고
고상하고 거룩된 생활 하기로 소문난 언약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 일을 저지르게 해서
그들에게 창피와 죄책을 한꺼번에 뒤집어 씌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명예에 손상이 갈텐데 말입니다.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여호와의 속 마음을 몰랐던 게 됩니다.
그러면 옛 언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像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버렸던 자의 건짐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여호와의 생각은 "버림"이었습니다(마태복음 27:46).
그런데 그 분의 버림은 단순히 나사렛 예수 개인만의 버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주는 세례에 함께 동참함으로 말미암아(마태복음 3:13-15)
온 우주에 대한 심판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온 심판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버림당함은 여호와 자기 백성의 버림입니다. 이로써 이 순간 모든 것이 無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회심 전의 바울과 유대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은
그는 여호와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죽음도 이스라엘의 운명과 하등 상관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은
유대교의 생각은 이스라엘 민족 자기네의 입장에서 언약을 이해하고 있는 반면
교회는 예수님 입장에서 그들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도 자신을 구원할 때만 비로써 전 세상에 구현된다고 유대인들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유대교인들은 사도들과 같은 동시대 사람들이고 꼭 같이 예수님의 소문과 그 분을 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평소에 말씀하신 그 주장이나 사상에 대하여 귀담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제3자들 보다 예수님을 덜 연구했다기 보다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데 기인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특별 교육을 받았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예수님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였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의 경우와 같이
사람에 의해 버려짐을 당했던 분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단순히 그 버림에 참여한 자를 정죄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의 수단으로 예수님의 사건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계시의 방편이라는 점에서
가롯유다의 행위가 잘 했다거나 하나님도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도록 도우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언약이 우리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나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여지를 주기 위함이 아닌 것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행동이 이 시대에 침투 되었을 때에
중심점은 우리의 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행위에 있습니다.
물론 은혜와 사랑과 자비가 우리 인간들의 무지와 죄성과 대조하고 비교함 속에서 부각되지만 초점은 역시 사랑에 의한 구원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현실은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이제는 율법적인 것보다는
이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거부하는 자에게 사정없이 심판으로 주어지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정리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더 이상 모든 일에 있어 인간과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일한 언약 상대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언약 상대자는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언약 상대자(그리스도)가 해야 될 일은 훼손된 언약을 재건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창조사역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창조가 우선이 아니라 우주 창조가 우선입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기독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관을 언약 가운데서 파악하고
그 다음 그 언약 수행자의 입장에 선 그리스도에게 우주론 근원을 맡기고
그 우주 가운데서 인간이 아닌 "형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바로 인간학에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폭 넓게 펴져 있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공개 되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나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한번도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언약하신 분과 언약 상대자가 분명히 밝혀진 상태에서 창조사역을 재조명하기 때문입니다.
언약 관계에서 나타낼 내용은 딴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조사역 같으면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창조 사역은 완성됩니다(창세기 2:1).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완성된 사랑과 공의가 드러나는 창조가 될 때 비로소 창조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창조에 어떤 결함도 없음을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탄식하는 것 가운데서 말입니다(로마서 8:23).
그러니깐 사도 바울은 이는 필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골로새서 1:15-17).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정향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만물의 통일의 속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0).
구원론은 이제 창조론의 기초가 되며 내용이 되어집니다. 창조의 완성체로서의 구속입니다.
창조에서 출발했던 구속의 역사는 창조의 숨겨진 지혜와 비밀을 밝혀지는데서 도착 지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9/골로새서 1:9).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위해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하나님다움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 천하를 덮어 버릴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형상이 구체적으로 인격화되어 역사 속에 나타난 증거로
나사렛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을 듭니다(골로새서 1:15/고린도 후서 4:4).
이것은 단순한 창조가 아니라 창조에 담긴 하나님 형상이 됨과 동시에
옛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건들은 신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해주는 증거 관계를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적 입장에서 비로소 그 실질적 의미가 주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설명 되어지며
신약 성도들은 구약에서 얻어진 교훈과 훈계가 역사가 존속하는 한 늘 반복된다는 점에서 그것을 적용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가치와 중요성에 무조건 기대를 걸게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아담 즉 인간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순한 피조성만으로 규정 지을 것이 아니라 창조 사역을 담당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담을 생각합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피조성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해야 될 일을 그가 그르쳤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입니다.
창조론에
구약에서는 피조성에서 풀이 되지만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구속했다는데서
아담은 그리스도와 대비해 볼 때 어떤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을 통한 자신의 형상의 다른 면을 보이는데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해석의 초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의 역할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는 그 사망의 왕이 된 상황을 극복했는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로 나와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22-23에서는 창세기 1:22-24에 나오는 한 몸 되는 사상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이에 연관시킴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언약 하에서도 부부관계는 그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의 사랑의 면을 보여 주는데 한 몸 되는 목적과 동기가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이 사실은 타락이후 아담이 하와에게 보여준 원망의 말은 (창세기 3:12) 한 몸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미흡한 처사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노아와 하나님간의 언약도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봅니다.
창세기6:3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상대한 것은
노아 보다는 노아라는 형상을 통해 언약을 이 지상에 세워두기 위함이었습니다(창세기 6:18).
따라서 노아를 통해 나타난 그와의 언약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 8:22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창조질서를 신실해서 유지한다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구약의 의미로 볼 때는 말씀이 전 세계 널리 펴지게 되는 자연이 주는 배경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시편 19:1-3).
그 배경이라는 하나님이 제시한 우주적 증거는
그 누구도 여호와의 말씀을 알지 못해서 못 받아드린다는 핑계를 허용되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홍수로 마땅히 벌써 멸망당해야 하는 인간세계가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 여호와는 나에게 어떤 증거와 언질을 준 적도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노아언약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무시하고 나오는 말인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도 아버지께서는 비를 내리신다는 말씀을 하시므로 말미암아 노아언약의 은혜를 강조했지만
이제는 새언약이 완성된 장에 서서는 바울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야 될 그 언약적 근거는 노아언약에 있음을 천명함으로
노아언약이 비로소 복음전파 하는 그 자체로 완성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노아언약이 악인과 선인 구분 없이 자연질서가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것처럼 이 귀한 복음도 마치 햇빛이나 공기나 비가 무상으로 제공되듯이 전달되는 바로 그것이 노아언약이 지향한 완성의 모습이요 거기에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약에 있어 노아 역할을 하는 것은 창조 언약의 완성으로서 새로운 형상을 지닌 몸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의 몸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 4:6-9 에서 일한 것도 없이 義로 여기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자의 증거로 아브라함이 등장됩니다. 그러나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안한 것이 아니라 믿으니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창세기 15:6). 그러나 그가 믿은 약속의 내용은 그가 기대한 식으로는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방 식은 바로 자신이 만국의 아비가 되기로 한 때로 부터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 이 주시는 자식을 바랄 수 없는 가운데 고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므로 아브라함은 비로소 복의 근원에 예속된 자로서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믿음의 대상이 아님). 아브라함 시절 때 아브라함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이고 그 자식을 통해 나의 연약함 때문 에 이루지 못한 언약의 완성을 내 자식을 이루어 주리라는 기대였습니다(창세 기 22:17-18). 그러나 그 이삭조차 언약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몰랐습 니다. 다만 바울에 있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새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어떤 공로가 하나님의 복과 영생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있다면 그것은 이삭도 아니요 야곱도 아니요 오직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갈라디아서 3:16).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의 형상은 복이 주어질 권리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며 아 무리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언약상대자로 하여금 자신 을 否忍하도록 하는 방편이었고 핵심은 자신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 재확인 되 는 약속의 가치를 인정하는 그 마음가짐이 하나님이 원했던 형상입니다. 곧 죽 임과 그리고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마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의란 바로 경건치 않는자를 가리워줌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그 실상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 다. 모세를 통한 언약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모세 율법은 이 스라엘 생존의 방편으로 준 것입니다(신명기 28장). 이스라엘의 모든 움직임은 율법의 저촉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율법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일 때는 하나님의 축복권 밖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 족을 통해서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율법의 엄위성과 초월됨은 그 어느 누구로 부터로도 방해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출애굽기 19장). 그런데 이스라엘 은 이 율법을 자기 민족의 구원과 연관 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들 행위의 정당함과 자기들 선택의 우월성을 율법 가지고 증명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공정성과 엄위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약화되고 무시 되었습니다. 그것 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그 율법이 지향한 바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 다.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율법의 義됨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율법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개입된 것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는데 있었으며 이스라 엘 전부를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아래 두려함이었습니다(로마서 3:19-20/7:9/갈라 디아서3:10,19,22/5:4). 저주 가운데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버림 받 았다는데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뜻에서 모세 율법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 과 은혜만의 진리로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한 몽학선생이라고 판정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4). 다윗언약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을 보게 됩니다. 옛 언약 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의 왕이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총체적으로 구원의 기능을 가진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왕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봉사 를 다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보이고자 했던 형상은 인 간의 구원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아브라함 언약과 맥락 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 같이 그 왕이라는 직책 에 대하여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主의 입장에 서 있는 것 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왕 은 그들이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 처럼 여호와의 종의 역할은 양을 목숨을 바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 왕위 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의 죄책 때문에 그러합니 다. 왕들이 주의 종으로서 임무를 다할 때 비로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주의 위치에 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언약은 누가 주이며 누가 진정한 왕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현재 누가 이스라엘을 통치 하고 있 느냐를 보여 주고자 하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 성이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림으로서 온 우주 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확인을 시키고 또 그 죽음이 자기 백성의 죄책을 담당 한 죽음이라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또 그의 주 되심은 아브라함언약과 모세 율법의 완성자로서 주이기 때문에 그 분은 안에서 새로운 선택된 자의 사역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상대자로 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데 초점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우주내의 피조 물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에도 언약관계가 원래부터 존재했음이 비로소 예수님 이 주가 된 입장에 와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은 (로마서8:19) 이미 피조세계내에 선택된 자들이 주와의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 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이 비록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의 등장으로 이미 아브라 함 언약으로 예고된 바는 있지만 그들은 (혈통적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의 그림 자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정적으로 밖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데 달리 관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한 언약을 수행하였습니다. 온전한 형상을 드러낼 무리들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의 방법은 예레미야 31장 31절과 에스겔 36장26정-27절에 예고된 방식대로 따른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6:3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언 약은 육체와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상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있어 영 이란 비실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란 어떤 특수한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에스겔 36:27이나 요엘 2:28-32에 볼 것 같으면 종말이 왔 다는 증거로 하나님이 특정인들에게 내려지는 게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생각하면서 마지막 때의 현상으로서 성령이 왔다고 여깁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사도가 어떻게 해석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마는 성령의 보증이라는 표현을 봐서 종말의 현상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에베소서 1:14 로마서 8:23 고 린도 후서 1:22). 그렇다면 성령과 영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갈라디 아서 3:2에 보면 성령을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성령이 육체와 대조가 되는 형식이 됩니다. 종말 때 성령께서 오신 이 유는 바로 육체로 율법을 이루려고 하는 그 인간의 행위를 정죄하고 그 자리에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됨을 세우려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진 관계 가 성령의 주도함에 의한 관계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라 할 구 있고 육이란 성 령과 관계없이 인간의 육체로 하는 행위 위에 일하는 모든 모습들 그런 상태를 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이란 종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이며 육이란 영에 의하여 고발 당하고 정죄 당하는 옛 것 전부를 두고 말합니다. 육이 이런 대접을 밖에 없는 것은 사도바울이 보기에 옛 세계가 그리스도를 죽임에 넘긴 순간 부활로 말미암아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도래하는 세계와는 어떤 접촉점 이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바울은 종말이 가져다 준 역사 속에서의 갈등을 영과 육이라는 두 세계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장차 주님이 다시 오셔서 부활할 것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연약성과 죄 악성을 인간의 피조성에 근거한 몸이라는 표현보다 여호와의 관계성에 가까운 육체라는 표현이 (창세기 2:7/6:3)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 되어 영광스럽게 되셨고 그 분에 창조 언약에 의해 새로운 의미에 있어 피조성 을 지닌 성도의 몸도 나중에 부활된다면 성령께서도 육을 부정해도 몸은 부정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을 정리해 보면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관계가 이어진 몸을 가지고 영이라고 하는 것이고 육이란 부활한 그리스 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하나를 이루지 못한 육신을 두고 말합니다. 그 관계는 누구에 의해서 성립되는가 하면은 바로 성령입니다. 여기서 과연 성령님의 낮 아지심이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낮아지심 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으로 이룩된 주의 차원을 높 아지심 답게 확장해 나아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할 은 모든 무릎으로 주 앞에 굴복시키고 그리스도가 심판 주 되심을 만 천하에 알리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9-11). 바울은 예수님의 人子으로서의 묵시적 활 동을 성령의 오심으로 확인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심이 바로 마지막 심판 때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종결 짓기 위한 오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성령님이 그 진리됨을 가지 고 이 종말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활동 근거로 삼는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고 또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생을 살도록 충동질 한 것이 성령님이라면 성령님은 예수님 통해 묵시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로 역사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시작이 바로 세례였습니 다. 묵시적 인물이 역사적 인물에 뛰어들어 종말의 사건을 先取했다면 이제는, 그래서 이루어진 묵시적 나라의 form을 성령께서 이 마지막 때에 그대로 적용 시키는 방식이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방식을 벗어난 활동은 하시지 못합니 다. 왜냐하며 그 나라만이 역사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아 브라함 언약에 따라 자기 백성을 찾아 갈 때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 사람에게 적용이 되되 예수님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역사 쪽에서 묵시 쪽으로 세례가 되도록 하십니다(로마서 6:1-5). 이것은 (로마서 6:1-5)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참여인 동시에 그 열매에로의 참여입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묵시적 존재로 신분이 전환된 것입니다(다니엘 7:22). 심판에서 구원에로서 연합입니다. 성령 께서 예수님 때와 꼭 같은 활동을 시키지만 예수님 경우와는 달리 방향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라는 것이 한 순간만을 이야기할 수 없 고 예수님이 역사에 뛰어들어 자기 백성과 합류하는 것이 언약의 완성이듯이 성령께서 그 완성된 언약에 기초로 하여 예수님이 뛰어들게 했던 언약의 대상 이 누군가는 역사가 끝날 때까지 밝혀 질 것입니다(에베소서 1:4). 그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밝혀 질 때까지 예수님을 고난 속에서 밀어붙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도와 교회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연합 되었기에 역사 속에서 고 난의 길을 아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로마서 8:17/갈라디아서 4:29). 이것이 또한 세례의 결과입니다. 이제 세례받은 자의 생활은 마치 예수님이 자기 백성 과 연합한 결과로 가장 죄인된 모습(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으심)으로 내려가듯이 이들의 생활도 자기를 부인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그리스도의 형상 을 이루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24/4:19). 성령께서는 날마다 그 사람 속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일으켜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 (고린도 후서 4:10-12/빌립보서 3:12). 그러나 성화란 우리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신분됨을 재확인 하는 것이지 결코 한걸음 두걸음 계속 완전성에 이르는 내적 성숙의 과정으로 이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노력이 결국 온전한 참여에 있었지 결코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들 처럼 죄를 많이 지 을 수 있을까에 힘씀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거룩이란 분리의 개념이지 아직 미 완성을 향한 성장도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은 거룩이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피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심정을 토로한 것 입니다. 옛 언약 안의 이스라엘은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이제 새 언약은 그리 스도의 몸이라는 위치 때문에 성도를 통해서 역사에 구현됩니다. 옛 제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만이 드러나도록 그들로 하여금 은사를 주어 산 제사를 드 리도록 하여 자신의 옛 모습을 죽이고 몸으로 하고 신체를 가지고 하는 봉사를 하게 하므로 의식이 아니라 생활로 영적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로마서 12:1-13). 바울에 있어 신체의 강조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신체성을 가지고 보여준 것과 같이 형상의 구현에 있어 일치성을 갖기 위함입니다. 문제 는 누가 그 사람을 최종적으로 이끌고 가느냐에 있습니다. 이 싸움이 성도에게 발생됩니다. 성도는 아담을 흙되게 한 세력과 우리를 그 세력에서 불러낸 분의 사랑의 부르심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갈등과 투쟁에서 벗어 나고자 人子됨의 마지막 사건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인내와 소망이 요구됩니다(빌립보서 4:5). 성령께서 기어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처럼 (로마서 8:10-11)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성령께 서 우리들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은사를 주시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로마서 8:27-39). 재림의 날이 올 때에는 이런 갈등과 투쟁의 시절도 사라지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 상급은 기업과 상속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예수님이 언약 상대로서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 받은 상급을 우리와 더불어 누리도록 우리에게 증여하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어떤 자는 물주는 자로 참여하게 되고 어떤 자는 심는 자로 참여되지만 그러나 결국 거두기까지 역사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 전서 3:5-15). 바울의 신학을 다시 정리해 본다면 바울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고난, 십자가에서 의 죽음심 그리고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 마지막 재림이라는 이 그리스 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바로 구약이 예언한대로 마지막 때에 묵시적인 사건을 간주해서 이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에게 한 약속을 달성 하였으 며 그것이 역사 속에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느냐를 규명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란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관심 둘 것이 아니라 늘 예수님에게 일어난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심을 두도록 자기를 죽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묵시적인 인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결국 우리에게 증거하고 싶 었던 것은 모든 만물이 주께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사 실입니다(로마서 11: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