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로역정 ]에 대해서
저자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베드포드셔의 두메 마을에서 땜장이 아들로 태어나,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평신도 설교가 및 저작가로 활동하다가 목사 임직을 받았다. 그러나 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감금을 당했다. 「천로역정」은 옥중에서 1678년에 집필한 것이다.
줄거리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이 세상의 광야를 걸어 다니다가 어느 동굴에 이르게 되었고,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자게 된다. 꿈을 꾸게 된다. 꿈에 한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자기 집을 등지고 섰는데,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등에는 큰 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펴서 그것을 읽으면서 울었고 무서워하였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슬픈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 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멸망시'에 있는 자기 집에 돌아가, 아내와 자녀들에게 괴로움을 털어놓았지만 (창세기 19장과 베드로후서 3:7에 나오는 최후의 불심판)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하고 울며 들을 거닐다가 ‘전도자’를 만났다. 전도자는 그에게 "저기 있는 문이 보입니까?"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마태복음 7:13에 나오는 좁은 문) 전도자는 다시 "저기 있는 빛은 보입니까?"하였다.
그가 보인다고 대답하자 전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 빛을 향해 곧장 가면 문이 있을 터이니, 그 문을 두드리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크리스챤을 멸망시를 떠나 그 빛을 향해 달려갔다. 아내와 자녀들이 뒤 따라와서 울부짖으며 되돌아가자고 졸랐으나,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그는 귀를 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하고 외치며 광야 저편을 향해 달려갔다. 이웃에 사는 '완고한 사람'은 떠나지만 '연약자'는 잠시 동행하게 된다. 하지만 ‘낙심의 수렁’에 빠지자 짐이 가벼운 ‘연약자’와 짐이 무거운 크리스챤은 잠시 절망한다. ‘연약자’가 크리스챤에서 화를 내면서 “조금 밖에 오지 않았음에도 이토록 어려운 일이 닥친다면 앞으로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단 말입니까? 나도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불평하면서 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
반면에 크리스챤은 상대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기에 때문에 절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 때 ‘도움자’가 등장해서 조언한다. “왜 징검다리를 보지 못했습니까?” 크리스챤은 말한다. “두려움 때문에 징검다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도움자’는 손을 내밀어 크리스챤을 ‘절망의 수렁’에서 빼내준다. “이곳이 공포, 의심, 낙심이라는 진흙을 가득 덮여있어 사람들은 징검다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오”라고 잔소리한다.
다시 길을 다가가 ‘세상지식인’을 만난다. 이 자는 크리스챤을 유혹하는 자이다. 그는 크리스챤의 가는 길을 ‘적법’과 그 아들인 ‘정중’의 집으로 인도하여 안착시키려는 자이다. 즉 법을 준수하고 정중하게 살면 크리스챤이 짊어진 무거운 짐이 다 벗겨지고 해결될 것이라고 꼬드기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집으로 통하는 길에 언덕이 가로 막고 있었고 그 언덕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크리스챤은 자신의 결정을 곧 후회하고 있을 때, 최초의 ‘전도자’가 다시 나타나서 크리스챤을 나무란다. “‘적법’과 ‘정중’은 모두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당신의 무거운 짐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실은 거짓된 자들입니다.”
‘전도자’와 헤어지고 크리스챤은 좁은문을 향하여 재출발하지만 늘 조마조마하다. 그 뒤에 강가에서 ‘무지’와 ‘거만’과 ‘게으름’이라는 세 사나이를 만나게 되는데 모두 발에 쇠사슬이 묶여있다. 도와주려고 하니 모두 계속 잠만 청했다. 크리스챤은 세상이 참 위험하다고 느낀다.
마침내 좁은문에 도달했지만 주변에서 화살이 날아든다. 크리스챤은 좁은문을 두드렸다. (마태복음 7:7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러자 안에서 ‘선의’가 문을 주면서 화살 쏜 자의 정체를 말해준다. 그 자는 바알세불(귀신의 왕)인데 좁은문에 들어서는 사람을 시기해서 화살을 쏘아댄다는 것이다. 크리스챤은 ‘선의’에게 자신이 진 무거운 짐을 벗겨달라고 하자 ‘선의’는 말한다. “나와 그 누구도 당신의 짊을 벗겨줄 수는 없습니다. 다시 좁고 곧은길을 따라서 구원의 장소에 가면 그제야 무거운 짐이 벗겨질 것입니다.”
다시 어떤 집을 만나게 되는데 ‘해설자’의 집이다. 이 집에 들어서자 해설자가 크리스챤에 물을 뿌리고 청소를 해준다. 그리고 말한다. “이 먼저는 당신이 세상을 살면서 묻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 당신의 죄로 씻을 수가 있습니다”
그 해설자의 집은 어느 인간이 쇠창살에 갇혀 있다. 그 자는 한 때 믿음 좋다고 생각했고 천국 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상 안락과 기쁨에 빠져서 그 꼴이 된 사람이다. 아무도 그를 쇠창살에서 끄집어낼 자가 없었다. 해설자 집에 시범케이스로 갇혀 있는 것이다. 주의들 하라고.
다시 어떤 문을 만나는데 그 문에 옆에서 책상이 있고 그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책이 한 권 놓여있다. 거기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감히 그 문을 통과 못하고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서 말한다. “이 문을 통과할 테니 내 명단을 저 책을 적어주시오” 그러자 무장한 군인들이 그를 저지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용기를 꺾을 수 없어 기어이 문을 열어주게 된다. 이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챤은 신앙여정에 있어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크리스챤을 꿈을 꾼다. 왜 유독 신자만 무거운 짐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여전히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구원의 벽에 다다랐고 그는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사투를 벌린다. 그러다가 그 벽 끝에 열린 무덤을 보았고 좀 더 올라가니 십자가가 있었다. 그 십자가 그림자를 밟는 순간,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무거운 짐을 벗겨져서 데굴데굴 굴려서 열림 무덤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놀라서 십자가를 바라본다. 자기가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십자가만 바라봤을 뿐인데 무거운 죄 짐이 벗겨진 것이다. 비로소 그토록 소망했던 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때 세 천사가 나타나고 두루마리를 크리스챤에게 건네주면서 “이것 없이 천국에 못가니 간 간수하라”고 당부시킨다.
그러나 그가 가는 앞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형식주의’와 ‘위선’을 만난다. 이들 둘 다 좁은문을 거치지 않고 규칙에 어긋나게 천국가려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오른쪽, 왼쪽으로 나와 있는 멸망의 길로 사라질 뿐이다. 크리스챤도 피곤해서 정자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사이에 두루마리 책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몰랐다. 이 때 ‘겁쟁이’와 ‘의혹’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겁에 질러 있다. 두 마리의 무서운 사자를 만나는 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크리스챤은 그제야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두루마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자 다시 정자 있는 곳으로 가서 찾아와서 그 중 어느 대목을 읽는다. “더 좋은 나라를 구하라 곧 하늘나라니라” ( 마태복음 6:33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과연 두 사자는 만나게 되는데 크리스챤을 공격하려고 으르렁거렸다. 그럴 때 ‘주시(注視)가 나타나서 도와준다. “걱정 마세요. 사자는 묶여있습니다.” 예정시간보다 늦게 문지기집에 도착했지만 ’분별‘이라는 아가씨의 도움으로 ’평안‘이라는 이름의 이층 방에서 편히 쉬면서 재 충천할 수 있었다. 내일은 마귀와 싸워야 했다.
길을 떠나지 전에 아가씨는 무기창고에 각종 무기로 무장시켜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에베소서 6:13-18)
'어려움의 산'을 지나,'겸손의 골짜기'에서 악마와 싸운다. 악마는 크리스챤의 약점을 언급하면서 다시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기를 협박하지만 크리스챤은 용기를 내니 본격적으로 반나절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다. 크리스챤이 상처입고 칼까지 놓치게 된다. 이 밀리는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크리스챤에게 칼에 쥐게 하셔서 악마를 찔려 결국 승리케 하신다. 악마는 용의 날갯짓하면 멀리 달아나버린다.
많은 상처를 입은 크리스챤을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아래로 데려가서 나뭇잎을 따게 하시는 그 잎사귀로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타난다. 크리스챤을 칼을 꼭 쥔다. 숱한 사람들이 골짜기 좌우로 떨어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거기서 지옥의 연기와 냄새가 올라온다. 이 윙윙거리는 소리에 크리스챤은 잠시 주춤하지만 다시 용기를 낸다. “나는 주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당당히 나아가리라!”
어느새 모든 유혹을 이기고 끝없는 늪의 고난의 길을 지나고 난뒤 '독실한 신자'와 동행이 된다. 그러나 ' 허영의 저자'에서 그들은 시민에게 회개하라고 전도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다. 거기서 '독실한 신자'는 순교의 죽음을 당한다.
크리스챤은 탈옥하여 거인이 살고 있는 '의심의 성'에 들어갔으나 다시 체포된다. '절망자'는 크리스챤에게 자살을 권하지만, 그는 '구원의 열쇠'로 탈옥하여 기쁨의 산에서 쉬고 난 뒤, 많은 시련을 이기고 마침내 사하강(死河江)에 도착한다. 금빛 옷입은 천사들은 이 강을 속히 건너라고 재촉한다. 사하강을 건너 천국 문에 이르게 된다. 그 '도성'은 태양처럼 빛났고, 거리는 황금으로 깔렸으며, 시민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와 거문고를 들고 있다.
(평)
허구에 해당되는 문학 작품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허구입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과 틀립니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 증거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이다. 복음 안에 있는 성도가 세상을 사는 삶은 천로역정에 나오는 주인공 ‘크리스챤’의 인식과 확연하게 다르다.
첫째,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돕기 위한 책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지독한 집념을 죄라고 거부하는 책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5-2
6)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대해서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너희들은 구원에 대해서 도통 알지 못하느니라”는 취지를 유발하시면서 구원에 나서신다. 그래서 사람들의 상상력은 실제 구원작업에 전혀 보탬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 훼방하게 되는데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도를 닦아서 구원받겠다는 심보이다. 여기에 온갖 장애요소들을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둘째,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명확하게 모른다.
멸망당할 공간에서 빠져나와서 천국이라고 규정된 지역으로 이동하겠다는 발상은 “우선 살고보자”는 식의 사고방식인데 이 사고방식 자체가 육신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육신의 연약함’이란 인간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사고방식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비-현실적 내용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육신이 지속적으로 악마의 지배를 받기에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염원이 곧 “지상에서 천국으로!”라는 탈출 본능이다. 어떻게든 이 고해의 세상에서 벗어나야 행복이 보장되고 그래야지만 지상에서 당했던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보상의식의 발로로서 구원을 염두에 두게 되는데 이 자체가 육신이 육신답게 보여주는 죄악성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배후에는, “나는 영원히 고생할 존재가 아니다. 나는 저주받아서는 안될 존재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나 의나 거룩이나 예수님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육신의 평안과 안일에 최종 존재 이유를 두고 살고 있다는 증거다. 곧 최종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셋째, ‘예수 안’이 지니는 언약적 의미를 모른다.
언약 안에서 인간은 ‘육’으로 지칭되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다루어진다. 따라서 구원받겠다는 존재 그 자체마저 어떻게 십자가 앞에서 ‘육’으로 평가받아야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이 육이 되는 이유는, 죄를 분출하는 자리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게서 나오는 죄의 양상 중의 하나가 ‘고생을 하더라도 참고 기어이 나라는 존재를 구원받은 존재로 탈바꿈 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로 인하여 인간은 구원될 수 있는 환경과 그렇지 못한 환경을 임의로 결정짓게 되는데. 예를 들면, 자신의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면 천사 내지는 선한 하나님의 작용으로 해석하고, 반대로 자신이 생각해놓은 그 구원의 방식을 저지하면 그 세력을 악마로 간주한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단 내지는 악마에 속한 인물로 오인 받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마 12:24)
즉 인간들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관점과 반대 관점을 가지고 진리를 정립하려고 하게 되는데 이는 배후에서 악마가 사주하고 있기 때문이다.(엡 2:1-3) 따라서 십자가 사건에만 근거해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이점을 성도에게만 알려주므로서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이끌어내신다.(딤전 1:15)
이처럼 ‘예수 안’이라는 언약완성의 공간은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성도를 죽은 자로 회수하고 예수님의 긍휼만 증거하는 증인으로 방출시키는 자리다. 이 안에서 개인적으로 도 닦고 수련하는 작업은 허락되지 않는다. 날마다 그런 육적인 시도 자체를 정죄하는 공간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천로역정에서의 크리스챤은 자신이 상상한 것과 겪은 모든 것은 실은 필히 자신이 망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 개꿈에 불과한 것임을 고백해야 하고, 이런 개꿈을 매일같이 예수님의 피로서 부정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런 상상력을 피해서 이루어진다. 그 이유는 바로 그런 상상력을 지닌 자로 인하야 억울하게 피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 피만이 성도를 구원하는 능력인 데 왜냐하면 그 피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근본적으로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확정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예수님 피 복음 소식은 끝까지 미련하고 영원토록 미련하다. 성도는 이 사실에 절감하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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