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강림과 십자가(이근호)130412

아빠와 함께 2013. 5. 19. 08:42

 

서울 의존교회130412a (강림과 십자가)―이 근호 목사

 

살후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살후 2: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주님이 강림을 하신다는데 주님께서 꼭 강림할 이유가 있습니까? 주님은 이미 이 땅을 떠나서 천국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사를 했으면 거기서 잘 살면 되지 자기가 옛날 살던 누추한 옛날 집으로 도로 와서 폼 잡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이 예수님을 포기 했다 하면 그럼 잘 먹고 잘 살라 하고 예수님은 또 예수님의 세계에 가서 거기에 새 살림 차리고 살다가 자기 백성이 죽으면 그곳으로 끌어 댕겨서 거기에 살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지금 복음이란 게 뭐냐 하면 강림이 복음이 아니에요. 강림이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입니다. 십자가가 복음이니까 십자가로서 죄 용서 받고 죄 용서 받았으면 아무리 죄인도 의인됐잖아요. 의인 되었으면 의인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 어디냐? 그것은 예수님이 미리 가서 자리 잡아 놨습니다. 어디에? 하나님의 나라에, 아들의 나라에, 그러면 우리는 죽어서 우리 영혼을 그쪽에서 당겨 올려 오면 된다는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이 내가 소망이 있는데 나의 소망은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게 소망인데 사람이 죽으면 주와 함께 거하면 그것으로 됐지 뭐 더 욕심 낼 필요가 뭐가 있느냐? 여러분,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잖아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겨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화가 난다 이 말이죠.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천국 갈 사람인데 세상에서 앞집에 있는 부자부터 해서 심지어 골목에 강아지까지 나를 되지도 않는 존재로 간주해서 그동안 구박한 것을 천국 가서 생각해 보니 보통 부하가 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에게 한 일주일만 휴가 내 주세요. 해서 자기가 살던 동네에 가서 몸은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놀라운 하늘의 능력을 품었겠지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도 얼굴이 그렇게 빛났는데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갔다가 왔으니까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자기 괴롭혔던 왕따 시켰던 인간들을 멱살 잡고 살짝 밀었는데 7키로 날아가 죽었더라 뭐 이런 것 있잖아요. 그 다음에 자기 무시했던 강아지 두 마리 잡아서 보신탕 해 먹고 그 다음에 부자 집에 가서 야 너희들 산다고 나 인간 취급 안했지? 암행어사 사또처럼 어사 패 내 놓고 너희들 부정 축적한다고 했던 것 전부 다 법에 호소해서 다 집어넣고 아 참 부자는 죽었죠. 죽었으니까 나사로가 어디 까지 찾아가는지 하면 지옥까지 찾아가는 거예요. 약간 뜨겁지만 참으면 되니까 주의 능력이니까 뜨거운 것도 참을 만 하고 가서 ‘나 천국 살던 나사로인데 부자 나와!’불려 나와서 ‘아이고 거지 나사로 아닙니까?’ ‘이게 어디서 거지래! 너 나보고 심부름 시켰지? 꿇어앉아! 손들고 있어’이런 식으로 한껏 복수하면 얼마나 재미있는 사도행전 29장이겠습니까? 사도행전은 28장까지 밖에 없어요.

 

29장에 그런 것 하나 써 놓으면 이 땅에서 예수 믿으면 설움 당해도 그래 나중에 내가 천당 가서 다시 올 때 다시 한 번 보자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으냐 이 말이죠. 제대하고 난 뒤에는 예비군으로 가기 때문에 부대장도 터치를 못하는 거예요. 이미 제대를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껏 행태를 부리고 살면 ‘사람이 그런 맛이 있어야 예수를 믿지’ 여기서 김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나중에 나이 많아 돌아가실 때 천국 가서 계시지 말고 한번 씩 내려와서 그동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혼내 주고 ‘나 천국 갔다 약 오르지?’ ‘아이고 목사님 그렇습니까? 난 천국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이제 내가 부활했으니까 나를 믿고 천당가자!’ 이렇게 전도하면 전도가 훨씬더 효과적으로 되지 않겠어요?

 

사람의 몸은 이렇게 복수하는 재미가 있어야 살맛이 나는데 그냥 가 버리면 이 땅에 대한 설움과 분통과 한 맺힘은 어떻게 풀라고? 천국 가서 이를 바득바득 갈기보다는 아예 한바탕 해 치우고 속 시원하게 가도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미 아버지 품에 가셨잖아요. 문제는 이 땅에 다시 올 이유가 없잖아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에 무엇을 갈구려고 오셔요? 무슨 볼일이 남아서 볼일 다 이루었다 하고 가시면 그만이지 주께서 왜 오시는데요?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보면서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내용을 포함시켜 해석하기가 뭐한 거예요.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석했는데 그래서 다 이루어서 잘 있어라, 너희들아 하고 가 버리면 이러니 제자들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하면 천사가 와서 보기는 뭘 쳐다봐? 주께서 다시 오실 테니까 복음을 전하라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 갈 때에 그 구름타고 올라가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다시 오신다는 그 이유가, 다시 오신다는 그 원리원칙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실 때 구름 타고 올라갔어요. 올라갔을 때 닭 쫓던 개꼴이 되는 거예요. 좋겠다 혼자 구름 타고, 우리는 뭐고? 나도 한번 구름을 타볼까? 타보세요. 안개도 못 타는 게 무슨 구름을 타요? 몸무게 때문에 떨어지는데…….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듯이 어디 빚쟁이들한테 쫓기는 것도 아니고 혼자 가 버리면 남아 있는 의존 교인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2천 년 전에 주님이 구름 타고 올라갔어요. 여러분들 지금 뭐합니까? 왜 안 따라갑니까? 두레박이 안 내려와서요? 불 수레가 대리 운전 안 나와서 그런 거예요? 주께서 다시 오시는데 우리가 갈 필요가 있습니까? 언제 오시는데? 우리 생각은 그래요. 다시 올꺼 없이 주님 올라가실 때 같이 데려가면 되잖아요. 어차피 베드로 같은 사람 앞으로 살날이 50년도 안 남았어요. 그 50년 앞당겨서 미리 데려가면 된다니까요.

 

제 취지를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뭉개 구름 타고 올라 가셨잖아요. 밑에 누가 있습니까? 밑에는 제자들이 전부 다 위를 쳐다보잖아요. 멍하니 보내는 거예요. 좋으네 주님 혼자 올라가니 그러면 여기는 뭐냐? 박수만 칠까요? ‘주님 저희들은요?’ 이러니까 옆에 천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주님이 올라간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또 이상스러운 게 그럼 주님 가신 그곳은 천국이 아니란 말이 되잖아요. 내가 갔다가 한군데 볼일보고 올게 이런 뜻이잖아요. 너희들이 보는 대로 다시 오겠다! 뭐 주님께서 화장실에 갔어요? 여기서 볼일 못보고 위에 갑니까? 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주님 가신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는 거예요. 애 하고 같이 엄마가 시장에 가는데 애 보고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 엄마는 잠깐 볼일보고 올게’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이는 ‘엄마! 나도 가!’하면 ‘이 못된 것, 어디를 따라 와? 여기 가만히 있어! 하여튼 지지리도 말도 안 듣지, 가만있어 가만있으면 내가 튀김하나 줄게’가만 있으라 했는데 벌써 2천년이 넘었어요.

 

우리는 계속 서 있어요. 서 있다가 늙어 죽고 그 다음에도 또 다른 사람이 서 있고 또 죽고 계속 죽는 거예요. 왜 이 자리에 오느냐 말이에요. 우리 상식으로서는 주님 가신 그 쪽에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그 쪽에 가야 되는데 왜 이 자리에 오느냐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이 내 소망이 있는데 내 소망은 뭐냐?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거잖아요.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이 주님 계신 저쪽이 우리보고 이 자리 지키라는 이 자리는 아니란 말이죠.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느니라. 하늘에 있으면 생명 따라 하늘로 가야지 왜 이자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 자리를 지킵니까?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는데요.

 

복음이라는 것은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눈앞에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충만한데 거기에 강림이란 옵션은 왜 끼었느냐? 강림, 그것을 안 믿으면 지옥 가는 겁니까? 강림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러면 지옥 가는 거예요? 강림을 보태야 천국 간다면 그러면 십자가로만 구원받는 게 아니네요?

 

히브리서에 보면 나와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더 이상 다른 제사는 없나니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너는 거룩하게 되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요? 그냥 살아! 그러면 살면? 늙어 죽어! 늙어 죽으면? 죽으면 주와 함께 편안하게 쉴 것이다. 히브리서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이사 갈까요 말까요? 이사 가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우리는 나그네요 우리의 본향은 어디에 있느냐? 본향은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것이 맞는다면 그러면 우리를 이 땅에 주께서 오지 마시고 주께서는 그냥 거기에 계시고 주가 강림하지 말고 천사가 강림해서 우리를 데려가던지 아니면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게 영혼이니까 영혼만 천사를 통해서 데려가던지 그래서 저쪽에 합류하는 게 좋지 주께서 친히 이 구질구질한 이 세상에 다시 얼굴 들이대고 올 이유가 없다니까요. 강림할 이유가 없는데 강림이라 하니까 뭔가 우리가 빨려 드는 느낌 들고 뭔가 우리가 복음에서 누락된 느낌도 들고 이것을 집어넣으려니까 십자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 흠집 생기는 것이 걱정되고, 이 문제 어떻게 할 거예요? 평소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강림이 그리워해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십자가가 좋아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강림입니까? 십자가 입니까? 십자가 그 피를 볼 때 마다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어떤 행동을 해도 이미 용서받았다는 그것 때문에 오늘 죽어도 오늘 밤에 낙원에 간다는 그것 때문에 알잖아요.

 

그러면 강도가 만약에 강림을 몰랐더라면 강도는 불합격이네요? 강도는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해 놓고 ‘강도야! 오늘 밤 낙원이 좋지?’ ‘좋습니다.’ ‘그런데 혹시 나의 강림을 아느냐?’ ‘그것은 금시초문입니다.’ ‘에이, 큰일 날 뻔 했다 나가! 꺼져!’하고 쫓아 내 버립니까? 이 문제에 있어서 누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자 라는 말을 했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한다는 말은 사람이 무엇을 파악을 할 때,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병균은 눈에 안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열이나 병균에 감염됐을 때 감염될 때 병균이 처음 존재한 것이 아니고 이미 여기 병균이 가득 찼는데 그 사람이 걸리고 그 사람 다음에 옆 사람도 걸리고 보니까 ‘아, 이미 병균이 여기에 존재하는 구나!’하지만 감염돼서 몸이 열이 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 거예요.

 

쉬운 예로 모든 사람은 다 죽는 것을 알잖아요. 죽는 것을 아는데 어떤 사람이 죽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죄를 졌습니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죄를 품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 사람이 90을 살고 돌아가실 때 성경이 보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죗값으로 죽는 거거든요. 그러면 죽을 때 그때 교통신호 위반해서 죽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착한 일, 착한 일, 착한 일 하다가 마지막 나쁜 일하나 딱 했는데 그것 때문에 ‘너는 어디서 죄를 져! 죽어라!’해서 죽는 것은 아니란 이 말입니다. 이미 인간의 존재로서는 죄인인데 사람이 자기의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남의 죽음, 남의 장례식이 아니에요. 남의 장지에 가서 ‘어이구 저것을 보니 저 사람의 죽음이 내 죽음이구나!’이렇게 느끼기고 싶어 하지만 뒤에서 ‘웍’하면 ‘아이고 깜짝이야, 놀랬잖아, 간 떨어질 뻔 했잖아!’이렇게 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저 관속에 있는 사람과 같으려면 간이 이미 떨어졌어야 돼요. 간이 ‘웍’ 하면 ‘뭐, 죽은 사람인데 뭐?’이렇게 돼야 될 텐데, ‘아이고 안됐다’하고 있는데 뒤에서 ‘웍’하니까 ‘아이고 간 떨어질 뻔했다!’이렇게 하는 것은 나는 아직 까지 죽은 것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그 사람 죽음이지 내 죽음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요즘 tv에 남자 세 사람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이름이 포맨인데 분명이 네 명인데 한 사람 어디 갔지? 한 사람이 의존 교회 여기 있네. 뭔가 누락됐는데 인간이 자기 죽음을 인식하려면 자기가 자기의 누락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내가 빠졌다는 것은 내가 있는 한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특수한 경험입니다.

 

여기 이게 비타 500이 아니에요. 착한 비타500이에요. 여기 쓰여 있어요. 착한 비타500이 맛이 어떤가는 먹기 전에는 몰라요. 그 다음에 마시고 난 뒤에 ‘아 달싹하네.’이렇게 알잖아요. 맛을 알려면 내가 먹기 전에 나도 살아 있어야 되고 먹고 난 뒤에도 내가 살아 있어야 돼요. 세상의 모든 체험이라 하는 것은 체험 뒤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체험했다가 되는 겁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여기에 누가 독을 타서 먹고 난 뒤에 죽어 버리면 ‘목사님, 목사님, 맛이 어떻습니까?’하면 죽은 사람한테 말을 하면 뭐합니까? 이미 죽어 버렸는데요. 본인은 알겠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제가 복잡하게 이야기했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런 겁니다.

 

인간의 인식론과 하나님이 너는 이런 인간이라고 지적 해 줘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문제점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모든 주님의 하는 일이 지금 혼선입니다. 헷갈리는 겁니다.

 

주님이 강림했다는 것은 온전한데 의미를 두면 안돼요. 이미 세상은 주님이 장악을 했다는 존재론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가 느껴야 되는데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살기 때문에 어디? 어디? 구름이 어디 있는데? 만날 안 보인데요. 안 보이는 것은 그것은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내가 주님 오시는 것을 볼 때 그 때, 주님의 강림을 비로소 나는 믿겠다. 확인 하겠다 해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주의 강림이, 오신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십자가가 과연 온전한 십자가냐 하는 문제입니다. 십자가 알고 그 다음에 부활도 따로 챙기고 그 다음에 강림을 챙길 때 십자가 더하기 부활 더하기 강림을 삼종을 한 세트로 묶을 수 있을 때 그게 과연 십자가 믿는 믿음이다. 이 말입니다. 왜? 우리 자신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한테 오류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십자가를 따져 봅시다. 강림은 어려우니까 놔두고 십자가에 왜 돌아가셨느냐 하면 우리한테 오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한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한테 죄인이다. 이 말인데 죄인이라는 말을 바꾸어 봅시다. 십자가가 우리한테 세상을 보는 인식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그 문제가 어디서 생긴 지를 그 문제를 모릅니다.

 

4월 26일에 신천지하고 토론할 예정으로 날짜가 잡혀 있는데 거기서 묻는 문제가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하고 두 증인이 누구냐 하고 해 입은 여자의 뭐냐 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뿌리는 뭐냐? 분노의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렇게 묻는데 그것 알아서 뭐하는데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 자체가 오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가짐이 이미 오류가 된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부모 밑에 애가 나왔습니다. ‘엄마’ ‘왜?’ ‘엄마가 무엇이죠?’ ‘아빠’ ‘왜?’'아빠가 누구죠?’ ‘삼촌’ ‘왜?’ ‘삼촌이 누구죠?’그러면 그 집안이 다 이구동성으로 ‘야, 뉘 집 자식인고?’ 이렇게 물을 것 아닙니까? 아빠라 하는 것은 남자로 생긴 너의 부모야 하고 이렇게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묻는 다는 것은 아빠를 아빠로 인정하지 않고 형을 형이 아니고 삼촌을 삼촌이 아니고 내가 새삼스럽게 새롭게 알아 가겠다는 자기의 의지의 발로입니다.

 

왜 세상은 내가 납득이 안 되느냐? 내가 납득되도록 재정리하고 정돈 해 나가겠다는 그 고집이 주님 보시기에는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햇빛이 그리고 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어느 과학이 증명했습니까? 누가 증명했습니까? 아무도 증명한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비라 하는 것은 태평양 근방, 적도 근방에 있는 바닷물의 기온이 적도이기 때문에 상승해서 수증기가 되고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에 편서풍에 의해서 작용을 해서 이끌려 가면서 기류가 양쪽으로 북반부 남방부로 고기압, 저기압 모여서 기류에 의해서 비가 오잖아요. 거기에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왜 끼어듭니까? 하나님이 비를 내려요. 하나님이 비를 내린다는 것이 전통이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내가 납득이 되도록 차근차근 따져 보면 비라 하는 것은 구름이 있고 구름이라 하는 것은 해류의 수증기가 증발돼서 모여서 지구 자전에 의해서 에너지가 기류가 모인 것뿐인데 거기에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똑바른 사람입니다. 따져 보자는 겁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 우리한테 강요하지 말고 예수여! 우리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마! 우리가 당신을 조사 하겠어! 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율법에 의해서 증거 대봐라 하니까 ‘율법으로 두 사람이 증인이 되면 분명히 이것은 합당하다, 첫째 내가 메시야인 것을 내가 증인하고 또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메시야인 것을 증거하는 거야’ 지금 이것을 말이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 제가 메시야입니다. 제가 증명해 볼 까요? 내가 메시야고 우리 아버지가 나 보고 메시야라고 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쪽에서 뭐라 합니까?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이야기해야지 너 혼자 납득되면 무슨 소용 있느냐? 우리가 납득이 돼야 당신을 믿어 줄지 말지를 우리가 결정할 것이 아니냐?”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 애비에 합당한 마귀 자식으로 티를 팍팍 내도록 내가 너희를 유도 했다는 겁니다.

 

내가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너희들이 모르는 소리를 해 줘야 너희들이 죄의 지배를 받고 악마의 종인 것이 내 앞에서 들통이 날것이 아니냐!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글쎄 그 말이 모세의 율법에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느냐 내 놓으라는 거예요. 주님이 말합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쳐서 우리가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법의 완성은 뭐냐? 사랑이란 말이죠. 사랑인데 이 사랑은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법은 사랑으로 완성되는데 완성되면서 인간이 경유하는 것은 너희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너희들은 사랑을 오히려 미움으로 바꿔 하는 것을, 죄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기 위해서 율법이 옴으로서 죄를 증가 시켜서 그 죄에 대한 사랑, 죄가 있음에 그 죄를 용서함으로서 비로소 죄가 있는 자리에 나타난 사랑, 그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고발할 때는 고마운 줄 알아라 이거예요. 죄가 들어 날 때 우리는 주님을 전혀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할 때 그때, 사랑이 여기 있으니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게 아니고 먼저 사랑이 나타나서 사랑할 줄도 모르는 너희를 내가 일방적으로 내 피에 의해서 사랑했어! 너희는 내 사랑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와중에서 우리가 건질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에게 오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네 생물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그것에 궁금해 한다는 자체가 그게 주님 보시기에 오류라는 사실을 본인들이 모르는 거예요. 성경에서 네 생물이라 하는 것은 네 생물이 무엇이냐가 아니고 네 생물은 이런 식으로 지금도 지배하고 있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 생물이 만약에 누구누구다 하면 성경에다 아예 옮겨 적지 뭐하려고 네 생물이라 했겠어요? 일곱 머리 열 뿌리 로마 나라 같으면 차라리 로마라고 쓰지 뭐 때문에 성령께서 ‘아, 내가 헷갈렸나? 아 모르겠다 일곱 머리에 열 뿌리 하자!’그렇게 몰라서 썼습니까? 어이고 하나님이 인간보다 못해요? 일곱 머리 열 뿌리를 로마로 바꿔 쓰지 바꿔서 쓰면 누구나 다 알건데 ‘로마, 우리 아는 단어!’이렇게 될 건데 일곱 머리 열 뿌리하니까 이게 뭔지? 일곱 머리 열 뿌리를 로마라고 단정 지을 때 우리가 아는 것만 믿겠다는 것 때문에 누가 죽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십자가 필요 없는 구원, 십자가 피가 외면해도 될 수 있는 그것, 그것은 내 쪽에서 새롭게 모든 것을 현실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 쪽에서 재정립하겠다고 실시하는 그 실시가 바로 결국은 십자가라는 사건을 자아내게 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죄를 용서하겠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마저도 처음부터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조건하에 만들어 지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주가 존재해야만 그게 세상이 되고 다른 말로 하면 그게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겠죠.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돌아가시고 강림하신다는 그러한 사건들은 인간들의 인식론 자체가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고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처음부터 주님이 빠지고 세상만 덜렁 있는 세상이냐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에덴동산에 선악과 있었고 생명나무 있었죠.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뭐냐? 나무에 주목하지 않고 자기가 뭘 따먹고 싶다, 자기 자신에 주목한 거예요. 주님이 어떤 식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있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게 우리 인간들의 기본 관심사가 된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주와 함께 보여줄지가 아니고 저것을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저것을 어떻게 따 먹지? 누가 따먹으라고 꼬였으면 좋겠다, 따먹으면 더 잘된다고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다. 관심사가 자기 자신한테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한테 관심이 있는 이상은 사실은 그 에덴동산은 잘못된 에덴동산이에요. 우리가 인식한 에덴동산이지 주님이 존재하는 존재론적 에덴동산이 아니거든요. 같은 에덴동산에 있으면서 우리가 인식 한도 내에서만 에덴동산을 생각했는데 저것 정도는 따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담과 하와는 가지고 있었고 뱀도 그 생각을 했었어요.

 

보암직하지? 따먹어라 따 먹으면 네가 신이 될 수 있다. 신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이 주님 앞에서 어떤 상황이냐를 사람들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요. 왜냐 하면 내가 따 먹고 싶다는데 주가 왜 튀어나와? 여기 양갱이가 있습니다. 안이 비워 있습니다. 왜? 내가 먹었으니까 왜 빈곽이냐 하면 mp을 집어넣기 위해서 비워 있는데 이것을 내가 먹으면서 주께서 이것을 보면서 뭐라 했을 건데 라는 생각을 안해요. 왜냐 하면 만약에 주께서 먹지말라 하면 먹고 싶어도 안 먹어야 돼! 이런 생각을 제가 하지 않았다니까요. 주께서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요청해도 하나님은 응답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짜증이 나는 거예요. 백날 외쳐도 응답이 없으니까 응답이 없으니까 답변을 누가 만드느냐 자기가 만들어요. 자기가 질문해 놓고 자기가 답변해 놓고 하는 말이 주의 응답이다. 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것은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너하고 함께 있는 거예요.

 

자기가 조작해 놓은 자기 모습과 함께 있는 거예요. 네 생물이 무엇이냐? 네 생물은 뻘겋다. 그 답변한다는 그 자체가 오류 있는 자기가 질문하고 오류있는 자기가 답변하는 해 놓고 자기가 자기 한테 맞다고 우기는 거예요. 십자가 지는 이유는 모르고 …….

 

함께 있는 주님이 십자가 지신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중에 그 주님은 보라색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나중에 주님은 강림하셔서 온 세상을 홀로 심판하는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의미는 딱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이 세상은 내가 항상 함께 존재론적으로 있었다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강림하시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강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라졌다고 여기는 우리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고 주님 까불 데더니 인간손에 죽었구나! 그래 주님 없이 우리끼리 살자!’라고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재 정립해 나가는 이 세상에서 ‘아니야, 세상이라 하는 것은, 현실이라 하는 것은 주님을 빼 놓고 세상,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착각하고 우리가 조작하고 우리가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현실, 세상이라 생각한다.’고 이렇게 보는 거예요.

 

간단한 쉬운 예로, 가정주부들 가계부 알뜰살뜰 쓰시지요? 그 가계부 쓰는 것 하고 강림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강림하는데 가계부는 왜 씁니까? 강림하면 가계부 홀라당 다 타는데……. 가계부 쓸 때 그냥 쓰지 않아요. 빨강펜, 파랑펜, 노랑펜으로 알록달록하게 나중에 보면 쉽게 찾게 표시하고 전기세 영수증, 수도세 영수증 쫙 모아 붙여요. 강림하시면 다 날아가는데요.

 

가계부를 쓸 때에 가장 확실한 사실은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나는 더 살아야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세상으로만 그 정도로만 테두리를 쳐버려요. 이 세상은 내가 살기 위한 세상이다. 만약에 북한이 쳐들어온다면 미국에 있는 삼촌에게 ‘삼촌, 빨리 초청할 준비해 놔!’터지면 초청받아 빨리 가게 왜? 이 세상은 북한이고 남한이고 중요한 것은 현재 살아있는 내가 더 살아야 된다는 그것만이 내가 정리정돈한 유일한 현실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주님이 강림하신다는 요소가 전혀 끼어들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평소에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요소가 내가 생각하는 현실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초등학교 학생이 중간고사 시험 보면서 ‘주여, 중간고사 시험칠 때 주께서 언제 강림하십니까?’이런 것 생각 안 하고 시험 치잖아요. 빨리 시험치고 놀러 갔으면 좋겠다 이것만 생각하지 주님이 강림하시는데 언제 합니까?

 

시험 치면서 모든 요소에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이 여기에 포함이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인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을 해야 되는가? 신앙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늘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늘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것을 깨어 있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 주님이 그 주님입니다. 십자가에 지신 그 주님이잖아요. 십자가 안 믿는 사람은 한이 맺혀서 교회 다니면서 손해 본 것, 교회 다니면서 전도하면서 남한테 퇴짜 받은 것이 복수심으로 누적이 돼서 ‘주님이 오시기만 해 봐라, 내 전도 안 들은 너희 집이 홀라당 저주 받을거야! 내가 복음 전하는데 안 받았지? 너희들 천사들이 왔을 때 불타는 것을 쌍안경을 끼고 똑똑히 사진을 찍고 혼내줄거야’ 하는 것, 지옥 가는 겁니다.

 

얼마나 십자가를 몰랐으면 주의 강림을 기다리겠습니까? 십자가로 속이 안 풀리니까 주의 강림을 부르는 거예요. 시나리오 찾아내서 언제 쯤 오실까? 주유소 가서 기름 준비해서 신랑올 때 기름 준비하라고 하니까 그런데 문제가 기름이 경유인지 휘발유인지 그게 구분이 안돼서 문제이지 참기름인지 어쨌든 기름 준비해서 가려하는데 그런 식으로 준비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믿음은 없고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을 안 알아주는 자기 친척들, 친구들, 자기 가족들에 대한 한 맺힌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강림이라는 것은 사적인 복수심을 대신 해 주기 위한 주의 강림이에요. 그런 사람은 분명히 교회에 돈, 재산 받쳤을 것이고 주께서 오신다고 감람산 비슷한 곳에 가서 할렐루야 그런 곳에 가서 그것도 흰옷 한복 맞춰 입고 가서 주 오신다고 주여 어서 오십시오! 했는데 오기는 비만 오죠. 오는 게 있어요. 중국에서 황사가 옵니다. 노란 황사가 옵니다.

 

여러분, 점쟁이가 뭐 때문에 점쟁입니까? 점쟁이가 지금의 한 맺힌 것, 조금만 기다리면 한 풀고도 남을 시원한 복수가 기다립니다. 그것 때문에 점치러 오는 거예요. 오만 원 주고 점치는 겁니다. 오만원이 문제입니까? 어떤 때는 일억주고 천만원주고 굿하는 것보면 한 맺힌게 있기 때문에 복수하고 싶기 때문에 복수를 대신 갚아주면서 언젠가는 당신한테 당신이 승리할 겁니다. 당신은 패배자가 아니고 승리자가 될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고 자하는 거예요.

 

가르니까 주님의 강림은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들통 내는 아주 멋진 효과가 있어요. 주께서 강림한다고 하니까 일도 안하고 재산 다 팔고 산에 가서 주의 강림만 기다리고 있거든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일하지도 않는 가족이 숟가락으로 넣었던 것, 다시 입 벌려서 식도로 내려가는 것 퍼내야 돼요. 다른 말씀은 지키면서 이 말씀은 왜 안 지켜요. 주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왜 이 말씀은 안 해요?

 

살후 3: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양식 값 하라 말입니다. 밥 값하라는 이 말입니다.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고’ 너 몫의 밥값을 내가 일해서 줘야 되냐 말이죠. 그런 식으로 남자들은 죽도록 일하고 여자는 놀면서 밥은 같이 먹네 아니 더 먹네. 왜 네 양식을 내가 벌어야 되지? 이 더러운 세상, 이 불공평한 세상, 왜 네 양식을 내가 벌어야 되느냐 말이야 각자 양식 벌어야지 그래서 주부의 일당은 8만원입니다. 주부라고 하는 것은 집에서 일하는 남자도 주부라고 해 줍시다.

 

이 법에서는 주의 강림이라는 것이 안 나옵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에서 그러면 일하면 자기 양식 값하면 구원받습니까? 안 돼지요. 자기 양식 값 하는 이건희, 구원받습니까? 양식값 했다고 많은 사람 살리는데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삼성그룹? 지옥 가잖아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라는 것이 항상 우리가 인식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안을 해 줘야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것이 주와 함께 있을 때만이 세상인데 사람들은 이미 자기 위주로 세상을 딱 만들어 놓고 오실 메시야보고 내 일에 협조해 주면 당신을 메시야라고 믿어 주고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못되게 해 주면 당신은 내 손에 죽는 거야! 그런 식으로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은 죽여라! 해서 얻어맞아 죽었잖아요. 죽여라 해서 얻어 맞아 십자가 죽고 난 뒤에 하는 말이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네 위주의 현실과 세상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세상과 그 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냐? 주께서 죽어서 성문밖에 나갔을 때 그 밖에 나간 그 현실, 그 세상이 십자가가 포함된 현실이 진짜 하나님이 생각하는 세상이고 현실인 겁니다.

 

주의 십자가 죽음을 누락시키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주의 십자가를 받아 주려고 하니까 내 자체가 오류 있는 인간으로 발견이 되잖아요. 알뜰살뜰 가계부 쓰면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야지! 보람찬 하루를 끝내노라면 하면서 열심히 사는 재미, 그 재미로 사는데 거기에 주의 십자가가 쏙 들어가 버리면 그러면 이것도 오류가 있는 게 돼요. 왜? 주의 강림이라는 것을 가지고 살 때, 마지막 다 쓰고 오늘 번것 27만원, 쓴 것 17만원 합계 주의 강림! 뭐 이렇게 습니까? 합계 8만원 이렇게 쓰지 8만원 자리에 합계 주의 강림 이렇게 씁니까? 안 쓰잖아요.

 

늘 우리는 주의 강림을 귀찮아하고 쓸데없는 소식이라고 배제하고 누락시키고 차 버리고 외면하고 우리는 내가 살아있는 그 살아야된다는 그것만 이 현실만 현실이고 이 세상만 세상이라고 그렇게 여기고 살잖아요.

 

주의 강림이라는 것은 이미 떠나 버린 너의 세상과 너의 현실은 주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 현실은 이미 있는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것은 불에 뭉개지고 부셔버리고 깨져야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존재론적으로 이미 있기 때문에 네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다 네가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은 내 중심대로 내가 잘 되는 쪽으로 돌아 가야된다는 것은 오해라는 겁니다. 가계부를 쓰고 해야 됩니다. 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했으니까 모든지 열심히 하고 착실히 하고 반듯이 하고 남한테 피해 끼치지 않고 자기 밥벌이 자기 양식을 챙기면서 오후에 늦게 와서 그야말로 김종환이 불렀던 존재의 이유의 가사에 나오잖아요.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손엔 작은 너의 사진뿐 너를 다시 만나면 꼭안고 놓지 않으리

헤어져 있던 시간만큼 알수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 하게해 니가 있어 나는 살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 갈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 갈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왜 지루하고 피곤하고 희망도 없고 일어설 가능성도 없고 그저 피곤하고 치쳐서 뻣는 것 밖에 없는데 난 도대체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야! 그러면 너가 주님이십니까?

 

이미 주와 함께 있으면 거지라도 천국이에요. 거지 나사로 천국 갔습니다. 물론 거지가 가계부를 쓰지는 않았어요. 뭐 쓸게 있어야죠. 들어온 게 있어야죠. 오늘도 개가 두 마리 핥았다 이런 것 쓸까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은 지금 뭉개 져 가고 있다는 것을 가계부에 쓰시기 바랍니다. 오늘 꼬락서니하고는 아이고 이 더러운 세상, 빨리 죽는게 낫지 하고 이런 식으로 알뜰살뜰 쓰시기를 바랍니다. 이놈의 더러운 세상, 아이고 이것도 세상이라고 살아가는 내 의도가 수상하고 당겨서 자살하지 말고 늙어죽는게 제일 좋아요. 늙어 죽을 때까지 더러운 세상, 주님을 배반할 만한 세상, 주님을 배반하는 세상이 뭐가 좋다고 여기서 살아 보려고 이 아부, 저 아부를 벌리고 있는지 아이고 밥 먹고 살려고 하는 나도 똑같은 인간이다. 이런 식으로 사실 때 수입25만원, 지출 17만원 남는 것은 주의 강림으로 나온다 말입니다.

 

서울 의존교회130412b (강림과 십자가)―이 근호 목사

 

하늘나라가 이 때입니까? 할 때 그 때와 시는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요. 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때와 시를 우리가 알아야겠습니다.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세상과 현실은 우리는 옳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참 세상과 현실이 참 현실이라고 우리는 자신만만합니다. 하는 그런 뜻이거든요.

 

우리가 이미 살아온 현실과 세상이 전부니까 우리에게도 그 정보를 알려주시면 우리가 대비해서 바르게 살겠습니다. 할 때 그 때와 그 시는 모른다고 했어요. 그 말이 무슨 싸움이냐 하면 내가 그때 만일 2개월 후, 3개월 후를 분명히 해 두시면 우리가 그동안 미진하고 바르게 못산 것, 착한 일 못한 것 다 착하게 하면서 주님 오실날을 대비해서 반듯한 정결한 신부로서 제대로 마음 자세를 갖춰을 때 그때 주님께서 딱 오신다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5, 4, 3, 2, 1, 0! 오셨다! 착 하면 됩니다. 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그런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 땅에서 내 쫓게 만드는 오류있는 생각이라는 겁니다. 종교로 구원받아요? 누구 좋으라고요? 누구 현실을 긍정하라고?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현실이 그게 내 중심이거든요. 내 중심의 현실, 내 중심의 시간, 그것이 주님이 함께 한 그 세상과 그 현실은 아닌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함께 한 현실과 세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너희들이 같이 있는 현실에 대해서 주님 해석과 인간의 해석이 사뭇 다른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겁니다. 오셔서 부셔 버리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세상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새 하늘과 새 땅은 헌 하늘과 헌 땅이 교체되면서 만들어 져요.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야, 좋으네!’그게 아니고 ‘주와 함께 있는 세상이네’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부셔져야 될 헌 하늘, 헌 땅은 오직 인간들이 오직 인간을 위해서 인간만을 위하여 인간 자신이 건설해 나가는 그런 문명국가가 부셔져야 될 세계에요. 그 문명 국가의 대표적인 것이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인데 큰성 바벨론,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음녀라고 해요. 음녀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원래 바람 난 여자거든요.

 

원래 섬겨야 될 남편을 섬기지 않고 남편 없다고 여기고 새로운 남자를 향하여 바람이 났다 이 말이에요. 음녀와 바벨론이고 바벨론이 큰 성이 이게 현대 세상이라면 결국은 이런 식으로 세상이 굳혀서 있다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사라져야 될 그 이유를 비로소 너희들이 살아가면서 너희들이 혹독하게 그것을 다 보여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빼 놓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구축해 봐야 기껏 주님 앞에서 음녀나 바벨론이라고 평가 받을 뿐이다. 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너희들이 알아라 이 말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예수님이 없는 가정, 교회에서 예수님이 빠져 버린 교회, 이 모든 것은 음녀이고 큰 성 바벨론에 해당되는 것이고 거기에는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을 가지고 굉장히 사람들은 기분 나쁘게 생각해요 왜 기분 나쁘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뭔데 내가 만든 세상을 왜 때려 부수려고 하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방금 뭐라 했어? 네가 뭐라 했지?’ ‘내가 만든 세상이요’ 또 세상에다가 자기를 집어넣어요. 내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해야 된다? 바로 내가 여기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세상이여야 한다하니까 주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니까 그게 기분 나쁜 거예요. 어떻게? 인식론적으로.... 하여튼 우리의 인식이 문제에요.

 

‘주님은 좋겠네, 자기는 편하게 놀고,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하게 해 놓고 주님이 우리한테 한 게 뭐있나?’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도 뭡니까? 인식론적으로 이 세상이 주님의 세상인 것을 모르고 주님 세상 따로 있고 내가 세상 따로 있는데 주님이 진짜 주님이고 좋은 분이라면 내 세상도 좀 신경좀 써 줘야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이 35세가 되어서 결혼을 했는데 그 결혼한 신혼부부가 아버지 집에 들어 왔습니다. 하는 말이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 어머니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아버지, 어머니가 귀 싸대기를 치면서 ‘이게 이게 모신 거냐? 이게 더부살이지 네가 우리집에 와서 사는 거지 이게 모신거야? 이게 어디서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내세우나?’집 살돈이 없어서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나와도 살게 할까 말까 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 연로하니까 이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가 돈 벌어서 네가 집사야지 어디 빌어먹고 살면서 자기 잘못을 감추려고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하숙비 내! 방 월세 40만 원내! 반찬값, 전기 계량기 따로 하고 수도요금도 따로 내고, 아들집은 한달에 3만원, 우리집은 2만원나오고.....

 

그렇게 아버지가 허세를 부리면서 전기세 받아! 하면 옆에 엄마가 참아라! 해 놓고 야야 고생되지 아버지가 속마음이 아니다 하면서 다 도와줘요. 아버지 허세부려봐야 다 소용 없어요. 엄마가 와서 아버지 모르게 자식한테 다 줘요. 엄마는 자식한테 퍼 주는 순간, 엄마의 존재의 의미가 있어요. 영원히 퍼 주는 자가 엄마에요.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 챙기면서 받는 것이 자식이에요. 그래서 엄마 없는 자식은 서러워요. 은혜 주시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값없이 주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간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면 바로 그 때와 그 시는 모른다는 이 말을 통해서 인식론적으로 주님하고 지금 다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면 다툴 일이 없지요. 하늘에다가‘하나님, 나와! 얼굴 대봐! 따져보자! 우리를 왜 힘들게 하는데?’하겠는데 직접 하나님이 육신이 돼서 나타나니까 하나님 붙드는 대신 주님의 멱살 붙들기 좋잖아요. 주님이 태권도 5단도 유도 3단도 아니니까 그냥 흔들면 흔들리니까 너무나 나약하게 오셨기 때문에 싸다귀를 때리고 눈 감기고 이 옷을 누가 가져갔을까! 놀림을 당해도 아무 소리 안하죠. 그 정도로 주님이 없는 세상이어야 살만한 세상이라는 인식을 계속해서 인간들은 그동안 품고 온 거예요. 그냥 부수면 안됩니다. 주님으로서 부셔줘야 이 세상이 처음부터 주의 세상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주의 강림이 요구되는 겁니다. 원래 주인이 오시는 겁니다.

 

이런 비유는 전에 포도원 비유에서 나왔지요. 아들을 보냈는데 말을 안들을 때는 직접 가서 그 농부들을 다 죽인다고 했지요? 주의 강림이라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추가 되는 액션이 아니고 처음부터 주님께서는 주인인데 한 번도 인간으로부터 주인으로서 대우를 받아 본적이 없었던 거예요. 그것이 마지막에 강림 때에 이제는 전적으로 불로 심판하심으로서 그때만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주님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사실이 구약 때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오늘 이 시간에는 구약을 한번 보도록 합시다. 구약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에서 유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유가 생겼어요. 왜냐 하면 구약의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일을 하십니다.

 

언약이 뭐냐 하면 바로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것을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에 뭐가 빠집니까? 언약에 누가 빠집니까? 언약에서 인간은 빠집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누구끼리 의논해서 결정 나는 이야기입니까?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결정 난 것에 대한 효과가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자 하는 사람은 많더라도 많은 것이 전부이죠. 왜? 자기가 사는 게 힘드니까 죽어서 좋은 데 가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이 다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구원되는 것은 일체 인간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여! 저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왜 신경 쓰십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필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뭐 볼 것 있다고요? 볼 것이 없어 구원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 저를 구원하시죠? 저는 피 같은 것은 몰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피 없이도 나는 이 현실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피를 집어넣어서 피는 현실이 현실이라는 것을 왜 알려 주십니까? 그러한 감사와 부끄러움이 한데로 엉켜서 섞여서 그저 고맙고 고마울 뿐이죠. 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가 관여하지 않았기에 더욱더 감사합니다. 이것을 성부와 성자, 또는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해서 저에게 이미 다 이루어 진 것을 통보할 뿐이죠.

 

통보만 합니까? 아예 우리 안에 들어가 사시죠. 성령께서 인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으시고 들어와 사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몸 전체를 압수해 가요. 이미 소유권이 등기필증이 넘어 갔어요. 계약서에 성부와 성자의 피, 피만 계약되어 있습니다. 계약금이 뭐냐? 피입니다. 우리의 전도, 선교, 헌금, 예배참석 일체 이런 것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이미 계약이 끝났어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된다 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가 했던 그 언약의 결과물이고 예수님의 작품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내가 원하는 자를 살 수 있는 권한이 나한테 있다 아버지께서 모든 권한을 내게 맡겼으니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자를 내가 살린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주께서 원해서 제가 구원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결국 뭐냐? 결코 원해도 안 될 일을 주께서는 일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구원받겠다고 원한다고 되지 않을 일을 그 원함과 상관없이 주께서 원해서 이미 여기 차고 들어와서 장악했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런 언약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언약은 존재론적으로 창세전부터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있는 이 타락한 세상에 범죄한 이 세상에 들어올 때는 범죄 했기 때문에 범죄 한 것은 존재론적으로 따질 수가 없어요. 인식론적으로 구원을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인간들은 나름대로 주체가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름대로 주체가 됐다는 것은 이 세상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의 내가 믿을 수 있는 주체는 나 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이미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하나의 신이기 때문에 내가 신이고 주님의 신들은 나를 위할 때만 좋은 신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주체이기 때문에 세상을 내 위주로 다 생각하는 겁니다.

 

한 예를 들어 가인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하나님이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죠. 가인이 생각할 때는 왜 안 받느냐? 하는 겁니다. 왜 안 받습니까? 정답은 왜 받아야 되는데? 이게 정답이에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지 않습니까? 정답은 뭡니까? 왜 내가 너를 구원해야 되지? 왜 이러누? 네가 뭔데? 너를 구원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하나님! 동생은 왜 구원해 줍니까? 하나님이 물을 꺼에요. 동생이 구원되지 말아야 될 이유가 뭔데? 제가 형이거든요. 형은 제사 안 받고 동생은 왜 받습니까? 내 맘대로다 왜? 내 마음대로 구원하는데 네가 주체인 행세를 하네! 네 독자적으로 세상을 구성하고 있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이 독자적으로 도시를 만들잖아요. 그게 가인의 후손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에덴의 동쪽 아닙니까? 제임스딘 나오는 영화입니다. 가인이 사는 세계와 아벨이 사는 동네가 다릅니다. 옛날에 미국 보세요. 얼마나 복음적이었습니까? 요새는 한데 섞여서 가인이고 아벨이고 없어요. 유럽의 축구하는 것 보세요. 축구 경기장에 7만명 모입니다. 종교에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에요. 부산에 사직 구장 야구할 때 한번 보세요. 롯데 할 때 보세요. 부산 갈매기 부르면서 거기는 사람들이 3만5천명 이상 못 들어가요. 복음 집회할 때 안와요. 십자가 복음 전할 때는 거기 안옵니다. 내가 주인공입니다. 부산에서는 롯데 이야기해야 해요. 울산에서 현대차 안 타면 욕먹어요. 울산에서 대우 차 끌고 다니다간 욕 얻어 먹어요.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에요. 왜? 우리가 주체니까 그렇습니다.

 

참 그것을 보면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입니까 교회가 예수님을 섬겨야 할 건데 자기 교회를 섬길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입니다. 이 세상 전부가 가인처럼 이미 자기가 세상은 자기 위주로 되어야 된다는 생각에 꽉 차 있을 때 여기에 어떤 것도 하늘나라에는 없습니다. 그게 뭐냐?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에 뭐가 들어 오느냐? 그 길을 찾아 하나님의 언약이들어 온다. 언약이 들어 올 때 언약과 세상의 만남의 자리에서 스파크가 터지면서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피가 나옵니다.

 

정결한 짐승을 잡는 것, 그 피, 피가 적시면서 위에서 하늘나라 무지개가 보이면서 누구든지 피를 무시하는 자는 저주할 것이다. 피를 기준으로 새로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 피를 흘리면 저주 받는다고 했어요. 왜냐? 그 피는 이미 너희들이 죽을죄인 것을 알려주는 기준인데 그 기준을 삭제시키는 것, 그것을 건드리는 이후로 거기서 저주가 뿜어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선악과 따 먹어 버리면 죽잖아요. 그러면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선악과 따먹었습니까? 아니죠. 따먹고 싶었는데 죽음이 따라 왔잖아요. 사람들은 죽음은 떼어놓고 과일만 먹으려고 했는데 그게 호락호락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안잖아요. 걸려들었어요. 주님께서는 죽음을 전파하는 용도로 선악과를 심어놓고 인간이 따먹자 온 세상은 저주와 심판으로 죽음으로 깔려 있고 거기에다가 물심판이란 언약을 주어줄 때 그 언약의 정당성, 피 흘림의 정당성이 드디어 죄 뒤에서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피 중심입니다. 피라는 것은 아직 까지 희생 제물 동물의 피죠. 사람의 피는 아니에요.

 

그러다가 드디어 무에서 유가 되는 기운이 나오기 시작 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한 가정을 찾습니다. 뭐냐? 아브라함 가정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에게 주께서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나타나면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으면서 아브라함 가정에서 결정적인 것, 진짜 이제부터 짐승의 피가 인간의 피로 연결되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잡습니다. 번제를 드립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아니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잡습니다. 아들을 잡을 때 그 아들이 아들이고 아들을 잡을 때 그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아버지에요.

 

숨어 있던 언약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드디어 피라는 이름으로 피라는 흔적으로 지상에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버리면 어떤 현상이 되느냐 하면 기존에 육적인 세계에서는 대가 끊기면 안되지요? 대가 끊기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아들이 없는 하늘나라에 일체 아무도 하늘나라 갈 수 없는 그런 세상인 것을 분명하게 밝혀 낼 수 있게 된 겁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요단강에 왔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아는 기쁨이요 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애 낳고 했습니까? 결혼은 뭡니까? 어떻게 됐어요? 자식도 못보고 죽고 사라졌지요. 그러면 이 땅은 뭐가 없다? 아들이 없는 세계죠. 아들이 없는 세계인데 아들이 있는 세계를 아들의 나라로 새로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만드신 거예요. 천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였던 흔적을 가지고 있던 페인트를 벗겨내야 되고 그 페인트를 벗겨 내면 예수님이 진짜 아들이라는 것을 영원토록 드러내 주는 새나라 새 땅이 그 페인트 안에 분명히 드러날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이라 하는 것은 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니까 피조물들도 이미 주님께서 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뭔가 절차와 조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까 피조물들이 허무하게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그 절차에 나서신 주님의 뜻에 의해서 허무해 질 것은 허무해 지고 탄식할 것은 탄식해야 된다는 사실을 피조물들이 수용하는 겁니다.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주께서 주인이 되셔서 새롭게 만드는 현실과 세상이 따로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에요. 예수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않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세상은 페인트 벗겨지듯이 벗겨져야 됩니다. 불로 타 버려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 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해서 먹이고 입히시고 하는 거예요. 일하게 하시고 노동하게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가계부를 쓸 때 잔돈까지 알뜰히 쓰세요. 왜? 주께서 주신 은혜니까요. 그리고 수입 얼마, 지출 얼마 빼기 나머지는 뭐다? 주의 강림, 주께서 지금 강림하시는 다른 말로 해서 주께서 함께 하시는 세상에 지금도 가계부를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라 말입니다.

 

어떤 때는 수입 25만원 지출 17만원 되지만 어떤 때는 수입 10만원, 지출 45만원 빼기하면 주께서 오심 해 놓고 괄호 열고 오늘도 탄식함, 지쳐 쓰러져 잠이 들어요. 네가 있기 때문이야 존재의 의미 한번 쓰고 또 탄식하면서 이래서 못 산다. 이래서 죽어도 못산다. 탄식하면서 어서 주의 날이 오기를 항복해야죠. 기름준비한다고 기름사지말고 그러게 성경이 말하는 탄식중에 말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서 진짜 이 세상 속에다 하나님 계심을 삽입할 때는 인간의 인식론적 때문에 영원히 살아야 될 분이 오히려 인간들 때문에 죽어야 되는 분으로 역설적인 반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등장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태도 없는데 태가 죽었는데 죽은 데서 살고 없는데 애가 생겼고 분명히 먼저 죽었던 아들이 옆에 있는 수풀에 있는 수양 때문에 이삭이 살지요. 그러면 이삭을 살리기 위해서 수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양이 수양되기 위해서 이삭이 미리 앞당겨서 보조 역할 한 겁니다.

 

진짜 이순신은 수양이고 이순신 역할을 하는 영화배우 김명민은 그냥 역할이고 진짜 이순신 장군은 흉탄에 맞아 죽었고 영화배우 김명민은 지금도 마라톤 뛰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할이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할 뿐이고 진짜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고,,,,, 세상에 죽지도 않는 인간이 보혜사라고 우기니.... 사도 바울이 보여서 합니까? 아니죠. 사도 바울이 내가 십자가 졌느뇨? 했잖아요. 나는 십자가 진적이 없다 무슨 뜻입니까? 오직 십자가 지신 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그분이 다 담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남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진짜 복음이에요.

 

우리 자신한테는 기대를 안 갖는 기쁨을 주는 겁니다. 내가 남을 전도해서 구원해야 된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남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진짜 부모라도 자식을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우리 부모 되는 사람은 굳게 믿읍시다.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주님의 자식도 아니고 그냥 생긴거예요. 뭐 어떤 사람은 기도 할 때 내 자식은 이래 되야 하고 저래 되야 하고 이렇게 한다면 주님 앞에 책망받을 겁니다. 네가 다 해라!

 

주님의 자식은 특징이 있어요. 없는데서 생기고 죽은 데서 사는 두 가지의 특징을 누구나 다 갖고 있어요. 그것을 지금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구약의 이런 나라가 있어요. 이스라엘입니다. 이삭처럼 없는 나라입니다. 없는 나라인데 생겼고 이삭처럼 이 나라가 물에 빠졌어요. 홍해 바다에 빠졌어요. 살아서 두꺼비처럼 했죠. 그 두꺼비가 열두 돌로 요단강 건너갈 때에 기념물로 만든 거예요. 두꺼비야 우리가 여기서 죽을 건데 살았다고 돌 열두개를 취해서 기념탑을 세웠는데 지금은 없지요.

 

이 이스라엘의 운명은 항상 없는데서 있고 죽은 데서 살리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을 죽이기 위해서 많은 나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포진되어 있습니다. 원산에 한 미사일 두 개 있고 신의주 한 세 개 있고 백두산에 원자폭탄 몇 개 있어서 항상 침공해야 돼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 하면 미사일 날아옵니다. 미사일 날아와서 서울의 땅값이 똥값 됩니다. 아마 이 동네는 안 떨어질거예요. 원래 땅값이 아 비싸기 때문에 강남에 떨어질거에요. 그 비싼 자리에 원자폭탄 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주께서 몰아넣으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운명을 띄고 났는데 이스라엘이 그런 운명을 띄게 하도록 하였던 그 핵이 다윗이에요. 다윗은 항상 쫓겨 다닙니다. 다른 민족이 다윗을 치는게 아니에요. 같은 민족인 사울왕이 다윗을 그렇게 괴롭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어찌하여 주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나와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 다음에 뭐죠? 의의 길로 가는 이죠. 주의 이름은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등장할 때는 이 세상 속의 하나님입니다. 아까 제가 했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주인되시는 분이 함께 계실 때만 그게 세상이라 하는 것 그런데 그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지요. 주변의 이방 나라는 그 점을 일체 인정하지 않지요.

 

주변의 있는 압몬과 블레셋 이런 모든 나라들은 이 세상은 누구의 나라이어야 됩니까? 누구 중심의 나라입니까? 자기 좋아야 되는 나라이죠. 의존교회 이렇게 있으니까 주위에 아파트 주민들이 의존교회 파이팅! 의존교회 살려야 된다! 의존교회 안 도와주자! 이렇게 통장들이 회의 하던가요? 의존교회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아난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키워 주지 않으면 누가 키워줄까? 뭐 이렇게 하는가요? 저 교회는 왜 그리 조용해? 이상해 뭐지? 왜 이리 조용하지? 보통 교회에서 떠들어서 집값 내려가는데 저 교회는 조용한 것 보니까 집값 내려가지않도록 배려를 해 주니 고맙네! 뭐 이런 식으로 상당히 고맙게 여기지요. 우리 교회는요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요. 원래 교회 들어서면 집값 떨어진다고 걱정들을 하는데 걱정을 안해요. 1년 2년 조용한 게 아니고 10년째 조용하니까 의존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에서 일체 안 도와 줍니다. 오히려 저걸 헐어 버리고 어떻게 지을까 하는 그 생각 하겠죠. 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배워야 돼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앞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잘라 버립시다. 남는 게 뭐죠? 우리는 애초부터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우리는 이방 민족과 똑같은 입장이어야 되는데 왜, 저희들을 구원해 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주님 중심되시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 먼저 너희들에게 찾아왔다 뭐하러요? 언약으로, 언약이 뭔데요? 피제사. 언약궤 피제사, 지성소의 피제사, 피가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7장 9장 10장 쭉 나오죠. 그것을 구약 때부터 그림자로서 보여 준 거예요. 실체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거예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너도 그렇게 나도 그렇게 전부 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그 티를 팍팍 내니까 하나님이 귀찮아요. 하나님의 말씀도 꼴도 보기 싫어요. 가계부 열심히 쓰면서 진짜 신이 있다면 내 하는 일이나 도와줘라 도와주면 내가 당신도 섭섭지 않게 해 줄게 하는 것 밖에 안돼요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교환 어렵게 이야기하면 경제, 이 세상의 모든 유지는 주는 게 있으면 받는게 있고 받는게 있으면 주는게 있어요. 모든 것이 교환으로 직결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데 돈을 얼마 줬습니까? 여러분들이 콩나물 사는데도 돈 주잖아요. 교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의 피를 믿고 구원받는데 돈을 얼마를 냈습니까? 거저지요.

 

그러면 교환이 돼야 되는데 예수님의 피는 어떻게 됩니까? 교환이라는 규칙과 질서에서 이탈해 버리죠. 바리새인들이 이게 싫은 거예요. 착한 일 한 만큼 상급도 더 받고 복을 더 따낼 때 내가 착한 일 해 줬으니까 주님도 섭섭지 않게 해 주는 것이 우리한테 익숙해 진겁니다. 내 노동 대가로서 내가 사는 거예요. 이게 교환되는 겁니다.

 

물론 주변에 어려운 사람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무상으로 도와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있어요. 뭐냐? 거저 받았으니 고맙다고 이야기해라! 그러니까 처음에 욥이 하나님께 고난 받았을 때 굉장히 자기는 이해 안 되는 것이 자기가 누구를 등쳐 먹은 적도 없어요. 오히려 욥은 고아와 과부를 많이 돌보았잖아요. 욥의 생각은 돌보았으니까 나한테 뭐가 와서는 안 된다? 그게 반대 급부로서 고난과 환란이 오는 법은 일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왜? 착한 일한 만큼 어떤 선으로 오는 것이지 착한 일을 했는데 악으로 돌아온다면 이것은 하나님 자체가 정의로운 하나님, 착한 하나님, 올바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게 욥의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욥은 처음에 몰랐어요. 그래서 욥은 자기를 무로 돌립니다. 무로 돌린다는 것은 차라리 제가 엄마 뱃속에서 잉태했을 때 밖의 해를 보지 않고 차라리 사산되었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하고 자기를 무로 돌리는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네가 멀쩡하게 성인, 어른이 되도 내가 보기에는 너는 무다. 네가 스스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를 뒤집어쓰고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착한 일하고 안하고 부자 되고 이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거기다가 의미를 둔거예요.

 

내가 착한 일 하니까 부자 됐고 나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같은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친구도 마찬가지에요 둘다 교환 경제 속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인간이고 저 인간이고 똑같은 거예요. 나이 한 50넘어서 동창생들 모여 보세요. 친구야 반갑다! 친구 반가워서 모인 게 아닙니다. 술 먹는 핑계 대려고 모인 겁니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도 핑계 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연세 많은 노인네들이 그렇습니다. ‘어머니, 밥 있는데 왜 또 밥 했습니까?’ ‘야야 너희 먹으라고 했다’ 한마디도 안 져요. 왜 전기 코드채 다 뽑아 놨습니까? 스위치만 끄면 되는데 왜 다 끄셨습니까? 야 전기 아끼려고 했다. 음식 쓰레기는 분리해야 되는데 왜 그냥 버립니까? 쓰레기통도 말끔하게 해야 되거든! 이 말은 뭐냐 하면 제가 지어낸 각본인데 백설 공주에서 계모가 백설공주한테 독을 주려다가 직전에 경찰한테 걸렸어요. 왜 당신은 사과에 독을 발라서 죽이려했습니까? 라고 물으면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조금만 발라 혼내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발랐나? 이렇게 합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거기다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고 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 네가 멀쩡하게 어른이 돼도 그것이 내가 보기에는 다 컸으면서도 무가 되는 방법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직접 주인공으로 이 세상에 주인으로 찾아오시면 제가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죄를 뒤집어쓰게 만듭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이여!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이 말을 이렇게 옮기지 마세요. ‘주여, 아무 것도 아닌 내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이렇게 하지 마세요. 그것은 종교입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왜 내가 이미 피 흘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서 모든 것이 끝, 게임 오버! 모든 구원 문제에서 이미 종결된 것을 왜 속시원하게 이렇게 알려주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 오래 가라!

 

그 마음 오래 안갑니다. 갑자기 가계부 쓰다가 마이너스 되면 또 화가 확 올라옵니다. 우리는 오래 갈 위인이 안돼요. 그러니까 매일같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일부러 다른 사건을 일으켜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구원된다는 기쁨을 끌어내시는 겁니다.

 

지금 제일 어려운 부분에서 머뭇거리는 이유는 바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간다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과 언약을 성취해야 될 그런 사명감을 띠고 이 땅에 나타난 그 분이 주의 이름이에요. 그러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이유도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땅에 온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주의 무엇을 구분하라? 주의 이름을 구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존재라면 주의 이름은 이 땅에서 사람들의 인식론에 오해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론적 하나님, 숨어 있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유일신 그 유일신이 둘로 갈라지죠. 갈라지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따로 있고 저기 계신 분이 따로 있어요. 왜 따로 있느냐 그것은 우리 인식론, 우리한테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오류가 있는데 그 오류가 나타나는 것이 뭐냐?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쳐 죽일 때 그때 오류는 극단으로 치닫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고 우리를 그동안 장악했던 악마의 힘이었다는 겁니다. 우리 배후에 또 따로 있어요. 우리 배후에는 우리가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지만 우리 배후에 또 따로 있어요. 그것은 악마가 우리를 사주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이 오셔서 무엇을 하느냐? 우리에게 핍박받고 그냥 돌아가시느냐? 아닙니다. 주의 이름이 하시는 것에서 없는 것에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없는 것에서 있게 한다는 것은 처음 이스라엘 같으면 이방인, 애굽밖에 없었는데 애굽에서 무엇을 만들어 냈죠?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서 이스라엘을 만들어 냈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있고 이방나라 있고 이렇게 되지요.

 

이스라엘이 있고 주변에 이방 나라 있죠. 그러면 없는 것은 뭐가 없습니까?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전부 있는 것 밖에 없지요? 무에서 유가 돼야 될 텐데 있는 것 밖에 없잖아요. 그러면의 어쩔 수 없이 무로 끄집어 내려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에도 언약이 주어져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여기서 핍박 받는 사람이 등장하겠죠. 모세 같은 경우 모세 중심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속에 진짜 이스라엘이 또 만들어 지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다윗이 이방 나라에 쫓겨간게 아니고 사울 왕에게 쫓기지요? 그러면 사울 왕은 어느 나라에 속합니까? 다윗은 어느 나라 왕입니까? 이스라엘 왕이죠. 이스라엘 나라가 두 개가 되었네! 이스라엘 나라가 둘이 되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라 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얻고 자 해서 생긴 왕이고 다윗 왕은 하나님이 원해서 심어놓은 파견자의 다윗왕입니다. 그 당시 선지자가 많았는데 열왕기 상하에 보면 선지자가 많았는데 선지자가 많이 있을 때가 아합왕 때인데 무려 400명입니다.

 

400명인데 그 중에서 천상 회의에 참석하는 선지자는 몇 명입니까? 딱 한명 이름이 미가야 입니다. 하늘나라에 천상회의가 있다합시다. 컨벤션센타에서 4월 16일에 오전 11시에 있다고 합시다. 그 많은 선지자중에서 한 사람만 초청장을 보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마음 대로죠. 400명중에서 250명이 천상회의에 참석했더라면 승리는 누가 승리입니까? 참된 선지자의 승리이죠. 왜? 250대 150이니까 투표하면 누가 이깁니까? 참 선지자가 이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몇 명만 초청하셨어요? 달랑 하나만 초청했지요. 그러면 몇 대 몇 입니까? 400대 1이잖아요. 그러면 숫적으로 누가 이깁니까? 400명이 이기지요. 그러니까 가짜 이스라엘이 현재 있는 이스라엘이 누구를 이긴다? 하나님이 새로 만든 이스라엘을 이기죠. 누가 집니까? 진짜 이스라엘이 지지요. 그게 뭐냐?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핍박받고 죽게 되는 상황을 앞당겨서 미리 보여 주는 겁니다.

 

400명은 이겼다고 좋다고 했는데 이기는 것이 지는 거예요. 미가야에게 이렇게 하죠. 400대 1이야 너 달랑 한 명이야! 그냥 사전에 정치적으로 정해 졌어. 같이 따라서가! 흔히 하는 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뭐가 깨집니까? 계란이 깨지죠. 여러분, 계란이 깨져야 병아리 나옵니다. 계란이 안 깨지면 생명이 안 나와요.

 

우리가 안 깨어지는 게 문제에요 안 깨지려는 심보가 주님이 안 계신, 그냥 추상적인 신이 계신 엉터리 세상 속에 일원이 되어 버려요. 하나님은 자기 택한 백성을 지게 만들어요. 지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얼레리꼴렐레 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려요.

 

너희 교회 교인이 몇 명이야? 목사에게 묻는 가장 실례되는 질문이 큰 교회 같으면 자랑스럽게 말하겠는데 복음을 아는 교회에서는 굉장히 답변하기가 곤란해요. 그때는 있는 교인도 반으로 줄이세요. 세 명입니다. 너무 많나요? 두 명?

 

왜 하나님에서 이렇게 하시느냐 하면 예수님 때에 신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 십자가 모르고 다 도망치고 말았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항상 구원되는 목회에 대해서 누가 시키는 그 문제에 대해서 제발 네가 손을 좀 놔라 이 말이에요. 이 세상에 내가 있는데 왜 네가 걱정하느냐? 주인이 걱정 안 하는데 종이 걱정해 버리면 이 종이 주인행세한다는 것이 들통나잖아요.

 

주님이여! 이래가지고는 몇 명 안 모입니다. 봉투에 돈을 넣어 이 동네에 돌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가 해라! 네가 천국 보내라! 네가 주야? 있는 교회는 왜 세웁니까? 있는 교회가 문제에요. 항상 주님께서는 없다고 있어야 돼요. 없다고 있는 것이 사람마다 그런 게 다 있어요. 여러분, 오늘 12시 넘어 잠을 주무시잖아요.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여러분 잠을 잘 때 보면 누구나 천사에요. 왜? 그게 죽음이니까 제가 우리 어머니 주무시는 것 보니까 천사는 아니에요. 자는 게 아니에요. 시체에요. 시체 같아요. 나이 많은 사람이 잠들면 시체요. 죽은 사람 같고 아들같이 볼에 살이 붙은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보면 천사 같아요. 잠도 차별하네요. 그래서 결혼 처음 할 때는 천사가 옆에 자고 좀 살았다 싶으면 시체가 옆에 자는 거예요.

 

어쨌든 잠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간은 죽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잠잘 때는 아무리 까불어도 그냥 잠만 잘 뿐이에요. 프로포폴 맞아서 수면 내시경 해 보세요. 연약한 간호사가 다가와도 그냥 멍청하게 입을 다 벌리고 있어요. 천하에 누구라도 프로포폴 맞으면 전부 다 뻗어 있어요. 모든 인간은 결국은 그렇게 됩니다.

 

아무리 찧고 까불고 잘난 체해도 인간은 잠들 때는 이미 죽은 자이고 아침 되면 주께서 새롭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겁니다. 이처럼 매일같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거예요. 언제 우리가 마른 풀처럼 사라질지는 장담 못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주님이 살아 계시고 주님이 매일같이 우리를 키우신다면 그게 바로 깨어 있는 것이고 그때 주님이 재림하시면 하등 놀라울 일도 아니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죠. 왜? 처음부터 주님은 영광스러워야 될 그 자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똑같은 그만그만한 인간만 쳐다보면서 사는데 이러한 우리를 날마다 죽이시고 날마다 살려주시고 지옥갈 우리를 날마다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살아 계시는 주님의 그 일하심을 통해서 지금 주님 강림 하시더라도 반갑게 맞이 할 수 있는 저희들의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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