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사람의 자리(마13;38)이근호130627

아빠와 함께 2013. 7. 13. 16:02

 

대전20130627b-마13장38절(사람의 자리)41강-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3장37절, 예수님께서 계속 비유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여러 번 비유이야기해도 자꾸 설명을 해도 점점 쉬워지는 게 아니고 자꾸 난해해지는 이유가 모든 원인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야기할 때, 없는 대상을 향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다고 치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라고 들리기 때문에 죽이 안 맞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없어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자체가 없습니다. 성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만 구원받거든요. 신약에 있는 교회를 새 이스라엘 하잖아요. 이스라엘 하는 것은 없어요. 없고 주님께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시민대학 개설을 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시민인 줄 알고 ‘아, 나보고 하는 이야기구나!’ “너는 아니거든.” 아니다, 라는 말을 하시면서 새롭게 개설하는 두 가지의 목적을 한꺼번에 비유 속에 다 들어있어요.

 

너는 아니거든. 그리고 내가 새로 만든 사람에게 적용될 이야기거든.”라는 두 가지 내용을 비유에다가 다 담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들을 때는 그리 안 듣지요. “역시 주님 만나길 참 잘했어. 봐라! 우리보고 이야기하잖아.” 그렇게 이해한다고요. 대표적인 오해들 소지가 마태복음 13장10절에 보면,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할 때 저희와 너희가 나와요. 너희는 바로 제자들이고, 저희는 너 말고 다른 사람, 이렇게 하니까 제자들이 신이 난 거예요. “그렇지, 그렇지, 우리는 특별 혜택을 받아야 마땅하지.” 그게 뭔 소용 있습니까? 다 도망갔는데.

 

그래서 처음부터 어렵게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니고 인간의 자리에요. 이 설명이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비유는 누구한테? 인간의 자리에게. 인간의 자리 만들기 하는 겁니다. 자리 먼저 만들어 놓고 인간 생겨나면 구원받는 거예요. 나를 구원해서 나를 데려가는 게 아니고 자리를 만들어요. 그런데 이 자리는 어떤 인간도 이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요한복음14장입니까? 베드로가 오겠다, 하니까 아서라, 안 된다. 아닙니다, 죽도록 따라 가겠습니다. 글쎄, 와도 소용없다니까. 하늘나라에 처소가 마련되면 니가 안 오려 해도 내가 너를 데리고 거기 집어넣을게. 자리가 먼저에요. 그 의인된 자리.

 

우리가 꾸역꾸역 만들어봐야 이것은 더러운 구정물 범벅이 해서 그 자리는 지가 봐도 더러워요. 노인들에게 카메라 들이대고 찍는 걸 싫어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포즈를 요리 취하고 저리 취하고 길거리 캐스팅해달라고 하지만, 노인들은 싫어하는 이유가 자기가 봐도 자기가 지저분하니까 안 보는 게 나요. 젊을 때 사진 보는 게 낫지, 지금 이 나이에 사진 찍어서 좋다고 보면 얼마나 격세지감이 나겠어요. 얼마나 허무를 느끼겠어요. 요번에 수련회 주제가 전도서에요. 끝. 헛되도다 할 때는 그냥 우리 자신은 헛되도다를 느끼지를 못합니다. 헛될 수 있는 그러한 조명, 구조가 따로 만들어져야 돼요. 주님께서 헛되도다 할 때는 우리가 헛된 게 아니고 어디가도 비추어볼 때 헛될 수밖에 없는 돋보기를 먼저 만들어요. 돋보기부터 먼저 놔놓고 들이대니까 안 헛된 게 없어요.

 

문제는 그 돋보기가 우리 눈에는 돋보기가 인지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헛되면서 안 헛된 것처럼 행세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경은 그 돋보기를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돋보기 안에서 헛됨을 아는 헛되지 않는 인생을 만드는 것, 이게 전도서의 준비입니다. 그걸 가지고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론은 ‘실험인간’이라고 합니다. 실험인간.

 

하나님은 우리를 가지고 뭐로 삼느냐 하면, 실험실의 하얀 쥐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걸 암을 집어넣어볼까? 아이고 이거 봐라, 괴로워하는 거 봐라, 요번에는 백신을 한 번 집어넣어볼까? 아이고, 낫다고 좋아하는 거 봐,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실험실의 하얀 쥐처럼 우리를 이리 저리 주사를 찔러보는 거예요. 그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지혜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용 쥐를 키웠어요. 우리를 다루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활용이 다 끝나면 없애버리지요. 연극이 끝나면 니 역할이 끝나면 “젊은 사람 나와, 26번 나와.” 90대는 다 가고 젊은 사람 또 연극해서 이리 인생 찔러보고 저리 잘라보고. 마약도 해봤다가 도박도 해서 수평위의 바다도 하다가 해보는 겁니다.

 

김 용만이라는 개그맨이 도박해서 걸려들었잖아요.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자기가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요것도 주께서 실험해본 거예요. 니가 어디에 바짝하고 어디에 빠지는가를 그런 요소가 이미 니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이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밝혀내겠느냐 이 말입니다. 니 하나님한테 고마운 줄 알아라. 니가 고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그러면 그동안 왜 도박을 안했느냐, 주님의 은혜로 도박을 안 한 거예요. 평소에 지기 평화롭다 할 때는 지가 잘 나서 평화로운 것이 아니고 지금 실험이 평화로울 때 니 행동 우이 나오는가 보자, 지금 평화로운 시간가지고 실험기간입니다. 그리 아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자리라 하는 것은 인간의 소유권등기가 안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자리는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주님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 자리를 알기 쉽게 동그라미를 그려보겠습니다. 여기에 손잡이를 그려보겠습니다. 인간은 뭐라고 오해하는가 하면, 이 자리가 원래부터 내 자리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자리를 싹 잡아당겨보면, 콱 넘어져서 떨어지겠지요. “아이고, 이 자리가 내 자리 아니구나!” 내가 마냥 국회의원하고 만날 대통령하고 만날 나는 우수한 사람 아니구나, 이 자리를 확 당기니까 나는 만날 행복한 가정주부가 아니구나, 이 가정이 내 가정 아니고 내 남편이 내 남편 아니고 항상 자식이 내 소유가 아니구나, 이 직업이 내 직업이 아니구나, 나는 만날 이것이 내 소유인 줄 알았는데 자리를 당겨버리면 우당탕탕 넘어지지요.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비유 안에 다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자리를 오늘 본문에서는 밭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리에다가 제가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여기다가 두께를 한 번 넣어봅시다. 두께를 넣어보면, 두께에 어떤 층이 깔려있다고요. 층인데 두 가지 층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비의 층도 있고 하나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에요. 거룩하지 않은 것은 다 지옥 보내는 무서운 심판이 같이 자리에 있다면 여기에 두 속성을 모락, 모락 피어내게 되면 인간의 자리에는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운명으로 가야 될 딱 두 종류밖에 인간이 분류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자비를 받아야 될 쪽과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필히 받아야 될 쪽과 두 가지 쪽이 있는 거예요. 요 두 가지인데 이 바탕을 가지고 뭐냐 하면, 이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은 밭이다, 라고 했고 여기에 알곡이 나오고 같은 밭인데 가라지가 나오고 알곡이 가라지 손대지 마세요. 왜? 니도 같은 결과물이기 때문에 니가 손대서 밭을 개선하거나 밭을 밭답게 정비 작업할 수 있는 권리나 입장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제가 전에 그런 설교를 해서 여러 쪽에서 욕을 얻어먹고 있는데요. 여러분들이 다시 태어나도 여러분의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소리를 해서. “아이고,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이런 선택안하지.”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밭의 의미를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런 거예요. 왜냐 하면, 나는 안 변하는데 남편은 변하더라가 없어요. 남편과 아내는 같이 변하게 돼 있어요. 춤을 출 때 따로 따로 추는 고고 춤이 아니고 같이 붙어서 추기 때문에 그 춤 출 때 마다 튕겨져 나오는 그 모양새들이 그 부부가 합체되기 때문에 나오는 열매들이 가정에 구석구석 쫙 있어요. 같이 만났기에 벌어지는 사태들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돌다보면 튕겨져 튀어나온 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자식이지요. 혼자서는 애를 못 낳거든요. 낳는 데만 DNA반반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애를 키우는 모든 작업에 있어서 애의 두뇌에는 부부의 싸우는 것까지 모든 것이 입력이 되는 거예요.

 

애는 처음에는 빈칸인데, 커가면서 내가 엄마 편에 서는 게 유리 하냐, 아빠 편에 서는 게 유리 하냐, 그걸 애들이 계산에 넣으면서 자기의 캐릭터, 성격이 구축이 되어 버려요. 이건 하나의 상식인데요. 애들은 1인칭보다 3인칭을 먼저 익힙니다. 아저씨, 아빠, 엄마, 먼저 익히지 ‘나’라는 것은 처음에는 나라는 것은 몰라요. 아빠가 나의 대체물이기 때문에 아빠가 웃으면 같이 웃고, 울면 같이 울어버려요. 엄마가 울면 같이 울잖아요. 이유도 모르고 같이 울잖아요. 자기는 이 안에 복속, 포함돼 버렸어요.

 

그런데 애가 드디어 똥오줌 가리고 프로이드의 항문기를 지나버리면 애가 스스로 몸을 추스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엄마 따로, 나는 따로 라고 할 때 그 다음부터는 안 해 또는 안 돼!라는 말을 해요. 또는 싫어! “이거 먹어라“ ”싫어“ 벌써 자아의식이 발달 되지요. 삼인칭을 거쳐서 1인칭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3인칭은 헛 날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인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잖아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3인칭을 이용하려들지요. 이용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신체라 하는 것은 신학자, 철학자 리 봉트?라 하는 프랑스 말인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신체는 힘의 장이다.’ 힘의 필드가 신체라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신체는 키가 몇 센티 이거잖아요.

 

신체는 그런 게 아니고 외부와 내부의 힘을 교류하는 교류변압기 같은 역할, 특징이 뭐냐 하면,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구분해요. 몸이. 힘 있는 자는 기어 붙고 힘없는 자는 밟아버려요. 이것은 애들도 마찬가지고 사자나 개도 마찬가지고. 좀 힘세면, 깨갱깽 아부 떨다가 힘이 좀 없다하면 무시하고요. 왕따 당하는 게 왜 있는데요? 약하기 때문에 그렇고 약함이 어디에 드러나느냐, 표정과 얼굴에 드러나요. 얼굴은 이쁨만이 아니고 전체를 대표해서 나옵니다. 얼굴만 떡보면 저건 패도되겠다, 하는 얼굴이 있고, 저걸 패면 내가 손해나는 얼굴이 나와요. 얼굴은 인격이 표정화되기 때문에 그 표정은 가정에서 배우거든요. 가정과 성장과정에서 배우기 때문에 이미 사는 가정에서 산 사람은 왜 그렇게 기가 센지, 누구한테 당당해도 너무 당당해 사는 집에서. 그런데 찌질이 못난 놈은 좀 돈 가지고도 벌벌벌 떨어서 이거는 내 돈 다 가져가, 그래서 필드의 장이 되거든요.

 

인간이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에 이미 죄 속에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합니다. 죄 속에 갇혀있을 때에, 내가 누구한테 갇혀있다, 내가 그물에 갇혀있다. 우리는 충분히 이해가 돼요. 왜? 그물에 갇혀있으니까 못 빠져나오지. 그리고 살려 주세요도 안되고. 내가 누구한테 갇혀있다, 이 말은 아까 힘의 장이니까 “아이고, 우리 아버지는 너무 무서워서 밤 10시 이후에는 못 들어가.” “니가 정신적으로 갇혀있구나!” “그래, 정신적으로 갇혀있어.” “무조건 아버지 말은 꼼짝도 못해.” 그런데 죄에 갇혀있다는 것은 체험되지 못합니다. 아~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너희들은 죄에 갇혀있다, 돼있거든요. 3장 22절 볼까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성경이니까 율법 또는 복음 되는데, 율법 봅시다.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 하는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이 옴으로서 우리는 드디어 갇히게 됐습니다. 어디 안에? 죄 아래 갇혔어요. 율법 줬는데, 나는 의롭게 할 수 있다. 이건 말이 안돼요. 율법 안에, 죄 안에 갇혀있다는 말도 어려운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죄가 죄를 드러낼 때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자유를 주기 때문에 문제가 풀리지 않고 어려운 거예요.

 

사람은 나는 죄지을 자유도 있고 안 질 자유도 있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마치 누구한테 안 갇혀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하도록 죄가 그렇게 가두어 둔 거예요. 아담은 선택할 필요가 없는데 아담이 “나도 선택해야 되겠어.” 저거 따 먹을 것이냐, 말거냐, 선택해야 되겠어, 하는 것부터 이미 말려든 거예요. 죄 안에 말려든 겁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죄 아래 갇힌 거예요. 신학자들도 이런 논리를 몰라요. 어떻게 죄가 있는데, 처음부터 우리는 죄인이니까 우리는 자유가 있는데 이렇게 하고. 자유가 있다는 그것이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자유가 없어야 맞아요. 자유가 생겼다는 말은 악마가 자유를 용납을 해준 거예요. 왜? 악마가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러니 이제 니 맘대로 해. 니 맘대로 하는데 아무도 너를 간섭할 필요가 없어.”라는 말이 그게 간섭이에요. 하나님이 원래 만들었던 그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 말은.

 

원래 만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지 말아야 되는 화문석굴레 앞에 존재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은 자유가 없어요. 왜? 십자가 쳐다봐야 되기 때문에. 천국가도 면류관을 주님 보좌 앞에 던져야 하기 때문에 자유라는 게 없어요. 던질까 말까? 던질까 말까? 이런 것은 지옥 갑니다. 그런 거 없어요. 지옥 가니까 부자가 뭐라 합니까? “저 거지보고요, 거지 나사로보고 나한테 손가락에 물 찍어서 나한테 보내주세요.” 세상에서 하는 행세 그대로 하잖아요. 지옥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거예요. 시키고 명령하고. 환경은 좀 곤란해요. 뜨거워서. 그게 뜨거워서 문제인 거예요.

 

이 지상에서 나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 것도 내가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는다하는 그 자체가 그냥 지옥에 살고 있는 줄 아시면 됩니다. 우리 보기에. ‘아, 당신도 지옥에서 많이 살아라.’ 지옥가기 전부터 이미 지옥에 살고 있는 거예요. 왜? 나는 내 자유 의미를 두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믿으면 믿고, 아니면 안 믿는 거지, 내가 안 믿으면 안 믿는 거지 뭐 말이 많아. 이리 되는 겁니다. 강요하지 마! 니가 벌써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발언자체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는 이미 죄에 갇혀있는 형국이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어떤 건물에 갇혀 있다는 것은 납득이 되고, 사람에게 주눅 들었다, 납득이 되는데, 죄에 갇혀 있다가 체험이 안 되는 거예요. 죄에 갇혀있다는 것이.

 

성경은 죄에 갇혀있다고 했고, 성경에 있는 것을 내가 체험이 되어야 그 때 비로소 내가 안다. 영어로 know, 안다가 되는데 결국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사람은 알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모르고 있으면서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싶은 거예요. 모르면서 구원받은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알게 되면 안다가 뭐가 되느냐 하면, 원인이 돼버리지요. 원인이 되면 원인 값을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그냥 우리는 원인을 따로 두자, 말이지요. 죄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죄에서 풀려났습니다. 다만 우리가 수용되는 것은 죄에 갇혔었는데 이제는 예수님과 더불어서 죄에 풀려났다는 그런 결과만 주어졌을 뿐이지 그걸 하루, 하루 느끼고 그걸 체험한다는 것은 앞으로 남아있는 절차에 불과하지만 그걸 한꺼번에 몽땅 다 안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에요. 주님이 아셔서 구원하면 되지 내가 꼭 다 알아야 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게 믿음이에요. 만약에 내가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안다고 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행함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아는 수준 내에서 행함으로 내가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그런 오류에 빠지게 돼 있어요.

 

성경공부 하세요. 기도하세요. 몇 시간 기도할까요? 두 시간 하시면 됩니다. 그럼 2시간 하면 2시간 반 한사람보다 모자라는데. 성경공부 3시간하면, 4시간 한 것보다 지식이 부족한데. 부족한 만큼 우리는 무지가 되는데. 안다가 아니라 우리는 무지함이 되는데요. 그 사람에 비해서. 그럼 언제 따라 붙입니까? 언제? 어느 세월에 기도3시간하고 성경공부4시간 어느 세월에 합니까? 돈도 안 벌고 매일 집에서 그것만 하고 있어요? 말도 안돼요.

 

아까 했잖아요. 강도가 삼위일체 교육 받았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그날 밤에 천국 간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 입장이라니까요. 나중에 치매 걸리면 아는 것도 다 잊어버려요. 오늘 의료보험공단에서 와서 조사했어요. 우리 어머니 앉혀놓고 모자, 자동차, 책 이 세 가지 따라 해보세요. 모자, 자동차, 책, “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연세 얼마나 되셨죠?” “몰라, 난 몰라, 70됐는가?” “70됐어요. 그럼 다시 묻습니다.” “아까 외웠던 거 다시 한 번 해보세요.” “모자.....,아이고, 모르겠는데.” “알았습니다.” 단기기억 하나도 안돼요.

 

그러면 치매 걸려서 모르게 되면 그럼 구원 언제 받아야 되느냐 하면, 주께서 치매 걸리기 전에 오시던지 아니면 본인이 자살하던지, 나중에 한 경진 목사도 치매 걸려서 예수 누구고? 한 소리했는데,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씀을 믿어야지 자기 체험을 믿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 말씀하니까 자꾸 지가 체험하려하니까 결국 제자들은 체험 화함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따로 만들어낸 이스라엘 놔두고 본인이 마치 당연히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를 하니까 이것은 말씀을 믿은 게 아니고, 주께서 나오는 말씀 있잖아요. 개미핥기처럼 혀가 죽 가서 호루라기처럼 말리잖아요. 주께서는 입에서 나온 말씀을 스스로 감아서 스스로 천국과 교류를 이루는데, 이건 되지도 않는 제자들이 지가 그걸 받아가지고 지가 따로 천국과 교류를 이루어 놓고 “주님, 그러시면 안 되거든요.” 베드로가 또 이런 소리해가지고 사단아, 물러 가라해서 꾸중 듣고 하잖아요. 그러니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이 말씀 보면서 “됐어, 이 정도 가지고는 구원받는 거야." 꼭 지가 따로 살림을 차려요.

 

그러니까 천지일보가 질문한 건데 뭐냐 하면, 마태복음25장 비유가운데 등이 무엇이며, 기름이 무엇이며, 예복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그거에요. 답변이 뭐냐 하면, 알아서 뭐하는데? 이걸 알게 되면 자기가 지식에다가 집어넣으면 자기가 곱게 지킬 모양이에요. 왜? 자기는 자유가 있으니까. 지킬 수도 있고, 안 지킬 자유도 있으니까. 주께서 주신 모든 말씀은 이것은 니가 해당되지도 않는데 마치 나한테 해당된다고 여기는 죄 안에 놓여 있는 특징을 니가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는 취지에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니는 내가 어떤 소리를 해도 니 나오는 것은 죄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7장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준 것은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죄 짓는 게 아니고 죄 짓기 위해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까발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율법과 말씀을 준 겁니다.

 

십자가 같은 경우도 대표적이잖아요. 어떤 잘난 인간도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내가 이 정도로 악한 인간입니까?” “피투성이 되어야 될 정도로 나는 그토록 모자란 인간이며, 또 더 나아가서 그 정도로 제가 귀한 존재입니까?” 그것이 같이 튀어나와야 돼요. 주님께서 그 정도로 생각해 준 자기 생명을 아낄 정도로 제가 그렇게 주님 보시기에 이쁘고 귀하고 사랑 받아야 될 존재입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제가 포함된 겁니까? 하고 고마워하지요.

 

돌아서면 인간은 치매기가 있어서 다 잊어버리지만, 성령께서 만나게 해주게 되면 바로 성경말씀 그대로 주어지는 거예요. 좀 더 갈라디아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죄 안에 가두었다. 그 다음에 주께서 몽학선생 보냈다. 몽학선생을 요즘 말로 하면, 바로 가정교사라 했지요. 이 가정교사는 율법이거든요. 율법을 준 것은, 가정교사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선행학습이라 해요. 요새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수학 가르친답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건 못 따라오는 학생은 학원에서 배워오라는 거 아닙니까? 한 학기 더 선행 학습하는 것은 다들 하니까 이해되는데 고등학교를 왜 가르쳐요. 천재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경쟁이 과다 하다보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유치원 다니면서 이름쓰기 구구셈외우는 거 우리 때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했어요. 요새는 유치원 때 구수셈 한다고요. 그렇게 하게 되면 막상 주님 만나게 되면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선행학습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에게 몽학선생 그런 식으로 해석을 했어요.

 

왜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먼저 가정교사 만나고 그 다음에 초등학교 가서 1학년 1반해서 담임선생님 만나고 순서가 그렇게 되는데, 그 시간 순서를 주님께서는 오셔서 반대로 바꿔버려요. 바꾸는 이유가 율법이 옴으로서 우리는 그것이 가정교사인지를 알아보지를 못하는 존재입니다. 왜? 죄안에 가두었기 때문에. 반대로 나와요. 그 율법만 지키면 나는 율법과 일체가 된다. 따라서 일체가 되면 나는 의인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율법 지켜서 구원 받으면 되지, 그걸로 구원의 완성은 끝나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죄 안에 가둔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하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도 옛날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완전히 예수님을 엿 먹이는 일이었다. 못 박는 일이었다. 말씀이 온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해서 우리가 얼마나 율법에 본정신을 훼손하는가를 니 육체가 마음껏 발휘해라. 그게 바로 가정교사를 제대로 만난 사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게 되면, 피가 오게 되면 아! 나는 결합될 수도 못하면서 마치 거룩한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오해한 그 죄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 피를 흘리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정리가 돼요. 주님께서 오기 전에 먼저 구원되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먼저 율법을 보내는 거예요. 택한 백성은 몽학선생으로 이해할 것이고, 택하지 않은 사람은 율법 지키면 나도 의인된다고 여길 것이고, 따라서 선행적으로 먼저 몽학선생을, 가정교사를 파견한 그 뒤 쪽에 뭐가 있는가 하면, 주님께서 그 자리에 손잡이를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 자리는 무슨 자리입니까? 우리 자리는 율법이 있는 자리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안에 있는 우리를 더욱 더 죄인 되게 만드는 그 자리가 먼저 선행해서 주어졌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항상 자리가지고 논하지 우리보고 논하지 않아요. 우리는 물 건너갔어요. 우리보고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바보 같아. 이 자리가지고 자리바꿔치기 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자리가. 나중에 이 자리에 뭐가 묻습니까? 피가 묻어버리면 그 피로 인하여 그 자리에 들어온 사람은 전부 다 예수 피안에서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6장 같은 경우에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지 자랑한다는 말이 아니고 요 밑에 지를 바치고 있는, 나는 피 위에 내 두 발이 지금 서있다. 엘리아나 모세나 모든 선지자나 신약의 성도들이 그야말로 이 피의 자리만 증거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물어볼 거예요. “목사님, 피의 자리가 뭔데요? 내가 안 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거예요. 제가 계시는 곧 뭐라 했습니까? 계시는 행동으로 결과를 남기게 되어 있어요. 피만 달랑 흘려서 피가 반복적으로 오고가는 세대에 피의 능력이 자기 택한 백성만 딱 골라서 덮치게 되어 있습니다. 덮칠 때, 내가 피를 선택했다고 하지 마시고 피가 덮쳤다고, 언약이 덮쳤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은 결국 우리의 자유의지를 꾸중하는 식이죠. 책망하는 식입니다. 엄마가 돈 버느냐고 늦게 오니까 딸이 걱정이 돼서 자기가 꽃꽂이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놓고 빨래 감도 개놨는데 늦게 와서 엄마가 보니까 기가 차요. 손 두 번 대야 돼요. 그릇에 세제 다 묻어있고 밥풀 묻어있고 빨래도 양말 따로 흰옷, 검은 옷 따로 해야 되는데 뒤죽박죽 넣어가지고 해놨지, 바쁜 아침에 출근해야 되는데 어디에 놨는지 바쁜 중에 더 신경 쓰게 만들지, “하지 마! 하지 마! 그냥 준 은혜만 감사해, 니는 하지 마!”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잖아요.

 

우리 육신은 흙이기 때문에 흙 값을 해요. 죽을 값을 해대요. 우리는 곱게 안 죽습니다. 꼭 죽을 값을 일을 저질러 놓고 죽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지 자존심과 명예, 이러면 칭찬 받겠지 해서 하나님께 칭찬 받을 짓을 교회 와서 재롱잔치를 하네. 테너, 베이스해가면서. 주여, 보시옵소서. 지금 제가 성가대 하니까 요번 주 중요한 계약 건 있는데 성사되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요번 주 또 애가 중간고사 보는데 잘 치게 하옵소서 해서 정성껏 헌금해가면서 반드시 지가 원인돼서 결과를 또 기대하잖아요. 무당 섬기는 육신의 버릇이 어디 갑니까? 비나이다, 비나이다, 본성 어디 안가요. 성경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건 하나 알잖아요. 그냥 정성껏 빌면 복 온다는 것. 그런 것들이 다 죄가 되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되면 이미 죄에서 바깥으로 벗어났기 때문에 죄가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성령 받은 사람이 그걸 지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13장 37, 38절 해봅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그럼 이것이 결국 제자들에게 해당이 될까요? 안 될까요? 결국은 제자들이 해당이 되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직접 나한테 이야기한 걸로 오해했는데, 주님께서는 뭐냐, 이 말씀은 주님이 본인이 해야 될 일을 본인한테 한 이야기에요.

 

예수님한테 본인이 할 과업과 숙제를 본인이 터트린 거예요. 터트려 놓고 그것을 본인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놓고 성령을 통해서 요 대목을 그대로 스푼에 담아서 그대로 입에다 넣어주니까 이게 바로 밭은 세상이고, 제자들의 입에 속 안으로 막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오니까 제자들의 구석구석이 밭은 세상이요, 가라지요, 알곡이요, 비로소 눈이 열려가지고 이 말씀을 제대로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세례 받고 아볼로도 이걸 증거 하게 되고, 오늘날 여러분들도 이걸 증거 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의 몫이지 우리가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몫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이 열매를 고스란히 같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알곡이에요. 요 내용을 답변에 적어놨어요. 16가지 답변을 보내줬어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방금 한 것처럼 이 모든 말씀이 일단 어디로 갑니까? 일단 예수님에게로 가야 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무엇을 보고 이야기한다? 오늘 잊지 마세요. 우리 인간의 자리, 자리는 언약과 연결돼 있어서 예수님이 자리를 이루는 거예요.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한 모든 필요한 계시와 말씀은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니고 자리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도로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그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뭐냐 하면, 이 말씀을 자리를 이루는 것을 모르고 인간에게 직접 호소하는 거예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믿음이 없습니까? 이렇게 목 터지도록 외치는데 이 말씀을 안 믿습니까?” “쉐마, 쉐마, 들으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듣고, 듣는 자는 믿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또 말이 안돼서 그것도 확인 작업에 들어가요. “믿으십니까?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 동네에서는 아멘 하는데, 왜 여자 쪽에서는 아멘 안 합니까?” 아멘하고. “됐습니다. 오늘 남자, 여자 다 아멘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이런 식으로 가르치게 되면 알곡은 누구냐 하면, 본인들이 알곡이에요. 이것은 한 술 먹고 들어가요. 무조건 알곡이냐, 가라지냐 그 기준점에 대해서는 무조건 자기는 먹고 들어가요.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 마태복음13장의 이 말씀은 무조건 나는 가라지였다는 것을 먹고 들어가는데, 이 기존의 한국교회는 무조건 우리는 알곡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구원받는 방법은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고 정신 똑바로 차리면 돼요. 말씀 설교할 때, 정신 바짝 차리고 똑바로 들어야 돼요. 똑바로 들으면 뭐해요. 70, 80되면 치매 걸리는 걸. 치매 걸려서 “방금 무슨 설교 들었습니까?” “몰라요.” 나중에 “예수님 누구십니까?” “몰라요.” 인간이 치매 걸리면 기껏 아는 것은 자기가 남한테 행했던 행함만, 육신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원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인이었다는 그것, 그 아집, 그 집착은 죽을 때까지 육신과 함께 같이 갑니다.

 

매일하는 소리가 내가 시집와서 시동생 8명을 내 손으로 다 키웠다. 만날 그 이야기에요. 만날 내가 원인되었던 그 일들만 이야기해요. 한두 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반복적이에요. 내가 이렇게 해서 다 자식 키웠는데 요새 젊은 것들은 이것은 시집도 아니고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돼! 이런 식으로. “그게 뭐가 힘들다고, 나는 됐다. 그게 뭐가 힘들어?” 만날 그렇게 훈계하고 따지려고 하고.

 

38절 봅시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되어 있잖아요. 마귀요, 악한 자의 아들이요 하니까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나를 반대하는 것은 마귀라고 여기는데, 주님은 “니가 마귀다! 니가.“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주님을 그냥 모른다고 하지 않고 저주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 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우리는 이미 죄 속에 갇혀 있어요. 사단 속에 갇혀있다고요. 예수님이 기도하지 않으면 베드로도 거기서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평소에 모든 것은 사단의 사주를 받고 그렇게 자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냐,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 하잖아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이 세상이 의미가 없어요. 다 내 생명, 내 좋아라고 하는 세상에 대해서 이것은 시계고, 저것은 선풍기고, 우리가 어떤 언어를 날리는 것도 다 나한테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있는 이상 자기를 포기 못합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백성들이 모세한테 원망을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다른 거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입을 거, 먹을 거를 제공해 줘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지금 먹을 거, 입을 거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산다는 말인가, 하나님 쪽에서 먼저 기본적인 거, 참 기본적인 생존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해서 원망한 거예요. 그런데 그 원망했다고 불 뱀 나와 죽었지요. 주님께서는 뭐냐, 나는 니 목숨, 니 생명 관심 없다. 나는 내 생명 관심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주려면 애굽에서 익히 알았던 애굽의 생활패턴 있잖아요. 그건 광야를 통과해서 그걸 접어야 되는 겁니다. 그걸 폐기처분해야 되는데 절대로 안 해요. 그러니 폐기처분해도 기대 안 되니까 40년 다니면서 아예 그 목숨자체를 폐기처분해버려요. 다 죽여 버려요. 애굽에서 그냥 나왔던 사람 다 죽었어요. 심지어 모세도 죽고. 달랑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갈렙과 여호수아는 뭐냐 하면, 내 생명은 애굽에서 출현된 것이 아니고 내가 들어가야 될 저 쪽에서 내 생명은 주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세계에 나는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의하면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잖아요. 그런데 애굽에서 가지고 온 내 목숨을 어떻게 연장시키고 키울까 하면 그 목숨은 목숨도 아니에요. 생명도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의하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추가적으로 얻는 거예요. 니 서랍비우면 얻는 겁니다. 그런데 내 서랍에 꽉 차있는데 들어올 데가 있어야지. 안 되지요. 비워라 말이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자기를 비워라 말이지요. 니 목숨은 걸레 같은 목숨이니 천국가지도 못하고 지옥 갈 목숨인데, 지옥 가서도 니 사랑할래? 미쳤어. 너를 지옥으로 이끄는 그 목숨을 니가 왜 좋아해? 바보도 아니고 말이죠. 생명으로 천국으로 이끄는 생명을 사랑해야 되는데 그 생명은 니 피가 아니고 주님의 피거든요.

 

그러니 내 살, 내 피 믿지 말고 누구 피 믿어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믿어라, 이게 새 언약이다, 이 말이지요. 제자들은 그 이야기하기를 3년 동안 죽 했어요.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줄곧 위신이 있어가지고 “잘 알아들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있으니까 우리의 능력이 있으니까 우리는 제자 맞지요?“ 양을 치니까, 목자를 치니까 양처럼 흩어져서 다 원래 지 자리, 야~~ 중요하지요. ”돌아 갓! 다시 원래 니 자리로 돌아 갓!”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 니 말 안 믿어, 돌아 갓!” 그 다음에 성령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다시 찾아올 때가 있을 것에요.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왔고, 우리는 주님의 영, 성령님이 우리에게 찾아왔고, 그래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은 찾아오신 분이 찾아왔다는 그 표시는 어떻게 하는가? 십자가의 피와 물과 성령을 바짝 세워서 우리를 찾아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이상하게 믿어지시거든 이미 주님이 함께 동거하는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비록 옥탑 방이라도.

 

주님이 피로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피 흘렸은즉 이미 있던 죄라도 니가 모르는 죄, 아는 죄 다지어도 피가 흘려졌다면 이미 용서가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용서 안하지 말고 제발 우리가 용서해 줘라 말이지요. 주께서 용서했는데 우리가 용서 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다만, 우리가 잘못을 알 때 해야지 그냥 무조건 용서하면 안 되고. 자식 용서한다고 자식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면 안 되고. 자식이 잘못을 알 때, 그 때 우리는 항상 용서할 준비가 돼야 그게 부모답다 이 말이지요. 자식이 용서 안 되거든 부모가 자식을 신고해야 돼요. 인간 안 되는 것은 신고해서 보내야 돼요. 혹시 유치장에 가서 용서될까 그래야지 물렁하게 해서는 안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어려운 것은 뭐냐, 악마라는 개념도 유보, 천사 개념도 유보, 왜? 인간은 악마와 천사를 자기 잘되게 해주면 천사고, 자기 못되게 해주면 악마인 거예요. 어떤 분이 저보고 악마 같은 목사님이라고 인터넷에 글이 올라와 있어요. 이 근호목사 처 보세요. 지금도 있다니까요. 다음에. 그 글이 좋다고 다른 사람이 그걸 또 따로 올려놓은 거예요.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아, 부럽다. 저렇게 악마 같은 소리를 나도 들었으면 싶어서 올린 거예요. 부러워서 올린 거예요.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근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말씀, 마태복음13장의 말씀은 옴팍 누가 다 가지고 간다? 예수님이 혼자서 다 가지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혼자 다 가지고 갈 거면 제자들에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왜 미리 이야기하느냐, 결국은 제자들에게 돌아올 이야기이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한 거예요. 한 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다. 단, 가룟유다 빼놓고. 너는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으로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내가 남긴 마지막 계명이다, 했잖아요. 요한복음에서.

 

미리 이야기해주고, 미리 이야기해줘야 지 딴에는 지켰다고 깝작대는 죄가 드러날 거고, 그래도 못 지키니까 나자빠질 거고, 실망할 거고, 그 때 주께서 찾아오시게 되면 결국 말씀은 변함이 없는데 말씀 성취는 내 몫이 아니고 누구 몫이다? 우리 주님 몫이니까 그야말로 주님이 우리 진짜 주님 맞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주님 없이는 나는 못 살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따로 준 적이 없습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여러 사람 모일 때, 어떤 목사나 어떤 사람을 특정인으로 내세울 이유가 없는 게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은 주 이름이 없거든요. 특정이름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을 특별히 높일 이유가 없어요. 다 주님께서 만나게 해 준 것은 서로 사랑하면 되지 우리보다는 당신이 특별납니다. 이렇게 부추길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그러니까 천사, 악마 유보 됐습니다. 유보됐다면 그러면 악마의 개념은 언제 나타납니까? 십자가에서 나타나지요. 그 전에는 나에게 잘못하면 악마고 나에게 잘하면 천사라고 하잖아요. 그것이 전부 다 바뀌지요. 대중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파괴시킬 때, 제자들은, 민중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저 인간은 살려 둘 인간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들이 갖고 있던 개념이 뭡니까? 저 인간은 예수님은 사탄이다, 이렇게 한 겁니다. 바알세블, 귀신의 오야 봉이라고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모독하니 거기에 대해서 대다수 민중들은 거기에 동의했어요. 왜? 육신자체가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마치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애굽 행세 못 버린 것처럼 자기가 납득이 되고 아는 이야기만 할 때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도 대구지방에 가보세요. 박 근혜 아니면 우리는 벌써 북한한테 먹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어요. 박 근혜 아버지 박 정희가 우리나라를 살렸다, 그것이 있어요. 그래서 누구 찍으십니까? 말하기가 어려워요. 박 근혜 찍지 누굴 찍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봉화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그거 말하나 안하나지,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이 나라가 박정희대통령 나라인데. 우리는 그 덕에 사는데. 문재인 찍은 사람은 기분 나쁘지만.

 

이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권력의 장이 교환하는 하나의 장터거든요. 그러니 7귀신이 오잖아요. 이것은 완전히 개방됐어요. 출입구도 한 두 개가 아니라. 지 맘대로 노크도 없이 막 들어왔어요. 막 들어와서 놀고 그래요. 주님의 기도가 아니면 우리는 개판입니다. 지금도 개판이지만.

 

주님이 이렇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피로 용서받은 것을 알지요. 주님은 남이잖아요. 자기 생각 않고 왜 남 생각해요. 생각해 보세요. 말이 안 되잖아요. 지는 지 생각하기도 바쁜데 어디 예수 생각을 합니까? 내 생각만 하는 게 정상인데, 틈새를 통해서 주님 생각 가끔 나도록 하신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보게 하시는 겁니다. 질질 끌고 천국가게 하시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결국은 십자가 알고 난 뒤에 여기에 추수꾼, 천사, 원수, 마귀 그 개념들이 확연히 다 드러났습니다. 요거하고 마치겠습니다. 결국은 모든 개념은 새언약적 요소가 담기게 되어있다, 이렇게 정리가 돼요. 모든 성경 개념은 해석할 때, 그냥 해석하면 안 되고 뭘 집어넣는다? 십자가 의. 새언약의 완성의 요소가 거기에 담겨서 해석하게 되면 정답입니다. 왜? 아브라함도 예수님 보기를 원했고, 엘리야도 예수님 만나기를 원했고, 그냥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별세, 죽으심, 모세도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변화산에서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새언약이 다 이루었다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모든 성경 개념에 다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사탄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게 바로 사탄입니다. 죄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존재는 새언약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리고 살이 찢겨야 그게 새언약이에요. 예수님의 있음 자체가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구원하지, 예수님이 여기 있다, 날 믿어라, 이게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작업을 해야 돼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아야 돼요. 이미 검증이 끝났으면 검증 끝난 것이 약속이 돼서 우리한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 때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알지요. 체험은 들 되더라도 무엇이 믿음의 토대인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해도 니는 들리면 안 된다. 갈라디아 3장 1절 말씀이 이제는 우리가 이해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말씀을 볼 수 있도록 엮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알아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알아도 또 내 사랑하는 것이 육신이 갖고 있는 한계이오니 주께서 익히 아시고 우리의 흙과 같은 인간을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기 위해서 부활의 영, 성령오신 것을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20130627b-마13장38절(사람의 자리)41강-이 근호 목사.hwp (70.5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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