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의 용도
2021년 10월 3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5-8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2: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들 보기에 특이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귀한 그 목숨을 함부로(?) 남에게 그냥 허비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결코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한 인생이 아닌 겁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영의 사람’, 혹은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은 종말이 되어서야 오는 영이십니다.
즉 더 이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이제 이 세상은 망하기만 하면 된다가 적용되는 그런 시점이 될 때 비로소 등장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이룰 수 없음이 분명해졌을 때, 더 이상 인간에게 기대걸게 아무 것도 없음이 분명해질 때에 나타나는 주님의 조치입니다.
주님의 조치는, 주님 자신이 남긴 언약에 대해서 인간들이 거들 수 없는 상황에서 언약을 다 완성하고자 하시면서 개입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그 언약의 성과과 효과를 그대로 값없이 창세 전부터 택한 자에게만 제공시켜서 천국 백성 만드시는 방식입니다.
이 천국 백성에 대해서 17:8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 대목에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이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즉 인간의 애씀이 아니라 인간이 아에 만들어지기 전부터 준비되어 있는 그 인물들은 미리 생명책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 쳐주시는 겁니다. (계 9:4) 따라서 사도가 성령받은 것도 사도 본인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지뢰는 밟는 것이 아니라 ‘밟히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나 믿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눈에 보이는 형식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그런 겁니다.
눈에 보이는 ‘있음’과 ‘있음’으로 이어집니다. 분석하고 탐구하고 현상을 정리하고 그래서 그들이 물질의 본질을 찾고자 하고 자연에서 일정한 원칙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이슬람이 수니파와 시아파가 나위어서 전쟁하는 것도 형식에서 진리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인 수나 위세나 제도에 신경쓰는 것도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스러움으로 획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어디까지나 평소에 자신이 자기를 파악하고 보존하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밥을 먹는다는 것도 고체인 음식물을 고체인 자신의 신체 보존을 위해 영양분을 공급하는 겁니다.
하지만 레위기 17:10-11에 보면, 하나님의 생명은 고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액체에 있습니다. “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즉 고체인 나를 위하여 ‘피’라는 액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피’라는 액체가 제물의 내용이라면 그 피의 효과 또한 자신을 고체로 여기지 않고 이미 죽어 피흘려야 될 액체로 여기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모든 이성과 판단력과 이해와 인식이 이미 형식화되어 있기에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추구하는 것을 피해 가시는 겁니다.
믿음에 대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요구를 했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체인 인간이 믿음을 가질 재간은 없습니다. ‘최소한의 믿음 있음’의 표현이 누가복음 17:5-6에서는 ‘겨자 씨’로 표현됩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믿음이란 엄두도 나지 않는 겁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걸쳐 사도 요한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우선 요한일서 4:8에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랑을 소지하고 싶어하는데 문제는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받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들은 자기 사랑에 미쳐 있기에 질투로 가득 찬 채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의 남은 목숨은 무죄한 분의 피를 흘리는데 합세하고 같이 젖시는데 소모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요일 4:9) 즉 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예수님은 자기들과 같이 형식으로 보이지만 싫은 하나님의 내용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콘택렌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는 것처럼 성도로 같이 보게 되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이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남은 목숨을 줘버리는 식으로 인생을 삽니다. 왜냐하면 내용적으로 성도의 목숨은 실은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죽은 자로서 세상에 잠시 나들이 한 것 뿐입니다. 산다는 것은 허상이요 실상은 이미 죽은 고인입니다.
성도에게 더 이상 웃사스럽다든지 망신살이란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성과내는 것도 관심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자체가 주님의 성과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한 사도의 고백(행 9:35)은 본인이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을 소지하고 데리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교회란 종말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재현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인생이 왜 그리 힘드냐’고 하소연할 것이 아니라 “금 무엇을 할까요?”라고 동생하시는 주님께 물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형식이 주는 사망의 공포에서 벗어나 내용의 자유함을 만끽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데살로니가전서 2장 5-8절(목숨의 용도)2110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5-8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8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도대체 사도바울이 뭐하는 사람인지,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자기 목숨을 남 못줘서 환장한 사람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져가라 내 목숨, 이거거든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거예요. “데살로니가 성도들아. 내 목숨 가져가라. 내 목숨 너희에게 줄게. 이게 내 쪽에서 줄 수 있는 나의 사랑이다. 나는 목숨 버리고 너는 내 목숨 가져갈 때 그 때 우리 둘 사이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의 부모나 일가친척이나 들었으면 사도바울에게 심하게 꾸중하고 다그칠 겁니다. “너 인생 왜 그렇게 사는 거야? 네 인생 없어? 너라는 인생 있잖아. 너라는 인생, 평생 동안 잘되려고 했던 네 인생 있잖아. 그 네 인생을 갖다 못 버려서 환장하는 것 같이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아마 가까운 친척 같으면 굉장히 심하게 닦달했을 겁니다.
사도바울은 결혼도 안했으니 천만 다행입니다. 결혼했으면 처갓집 식구 다 달려들어서 뭐라 했을 거예요. 사도바울이 사는 인생이 일반적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사는 인생하고 달라도 너무 달라요. 너무 다릅니다.
사람이 뭔가 남이 나하고 너무 다를 때는요, 이런 태도가 보통이지요. “두고 봅시다 관찰 좀 해보고요. 한번 지켜보고 내가 당신 사귈지 말지 그 때 결정하겠습니다.” 그러면 상대가 “왜 그런데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좀 위험한 것 같아. 좀 위험한 것 같다고. 당신한테 같이 말리다가는 나까지 망할 것 같아.”
이게 인간으로서는 마땅한 거잖아요. 이게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데 교회 오게 되면 엉터리라고 말할 정도로, 아니 따로 이것은 엉터리라고 말할 그 정도도 아니지, 다들 엉터리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사도바울을 좋아해요.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 그러고 있다고요.
예수님이 누군데? 예수님에 대해서 당신이 알아? 우리하고 사는 게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것을 당신은 사전에 지금 캐치하고 이이야기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남들 믿는 대로 그저 우르르 같이 믿으면 천당 가는 줄로 알고 그렇게 믿는 거야? 제대로 좀 알고 믿어.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인데 ‘사도바울 좋아요’ 사도바울이 좋아하는 사람의 대상이 됩니까? 당신도 사도바울처럼 한번 살아볼래요? 그렇게 좋으면. 예수님이 그렇게 좋으면, 예수님 사랑해요, 사랑하면 예수님 한번 따라가 볼래요? 그 좁은 길을.
거짓말을 그렇게……, 거짓말을 진짜처럼 왜 그렇게 쉽게쉽게 술술 거짓말 하는지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사기 치는 것만 배웠는지 마귀로부터 입만 떼면 사기 치는 것으로 그렇게 느껴지는데. 사도바울은 이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장 9절에 보면 교회라는 게 생기거든요. 좀 설명하면 교회란 세상이 끝났다는 징후로서, “세상은 더 이상 볼 것 없다. 기대하지 마. 끝났어, 끝났어.” 그 끝난 징후로서 오시는게 성령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끝났음을, 모든 것이 끝이고, 끝이고, 끝났다. 끝, 이라는 그 이야기를 전파하라고 성령이 오신 거예요. 성령이 왔을 때, 사도행전 2장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왔을 때 생겨난 것이 뭐냐 하면, 교회라는 겁니다. 간판 걸고, 홀 하나 얻고, 완전히 이거하고 다르지요.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의 그룹을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그들은 만나면 뭐부터 하느냐? 19장 9절에 보면 너 성령 받았나, 라는 것을 인사처럼 해요. “성령 받았어요?” 성령 받았어요. 교회 등록하셨어요, 교회 등록 말고, 학습세례 받은 그런 것 말고, 성만찬 말고, 집사직분 받은 것 말고, 장로 목사 설교하는 그런 것 말고, “성령 받았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장 2절에서 사도바울이 묻습니다.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성령 받아야지.” 세례줄 때 성령께서 사도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운반체기 때문에, 전달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도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예수님의 사도라고요.
사도기 때문에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성령 받았냐고 할 사람과 안할 사람을 사도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정해서 사도로서 이야기하게 하신 거예요. “너는 성령 받았나?” 이 말은, ‘너는 성령 받아야 될 사람이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령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개돼지한테, 아무한테나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구원될 사람에게 “성령 받았습니까?” 하는 거예요. 우리 성령으로 시작합시다, 그 말이에요. 성령으로 시작하자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지금까지 당신은 육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부모에서 태어났는데 그걸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육으로 태어난 그것은 종말에 있어서 천국에 갈 사람이 되지를 못하지요. 성령 받았습니까, 말을 건네는 자체가 그 사람은 성령 받을 후보감으로 주께서 점찍어 놨다,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책 제일 마지막에 보면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절 후딱 제가 세 구절을 말씀드릴게요. 요한계시록 9장 4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인간을 둘로 나눠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중에서 악마의 권세가 누구한테 이기느냐.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악마가 권세를 충분하게 작용하면서 사로잡고 있다는 뜻이지요.
요한계시록 17장 8절에 보면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무슨 책이냐? 생명책인데 그 생명책에 명단 없는 사람들만 짐승과 더불어서 유황불, 지옥 불에 들어간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계획이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이라고 다 천당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표정들이 왜 그래요? 기뻐야 될 텐데 지금 ‘고민이네’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딱 나보고 하는 이야기네.’ 이렇게 되어야지요.
성령 받았습니까, 묻는 것은 백신 맞았습니까, 하고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백신이야 트럼프 추종해서 안 맞는 수도 있어요. 그러나 성령은 묻는 것 자체가 너한테 주려고 묻는 거예요. “나는 성령 관심 없고 나는 평생 나에게 관심 있었는데요?” 그런 소리 나오겠지요. “성령 받았습니까?” 하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평생 동안 나한테 관심 있었는데 아, 나한테 관심 뚝 끊어야 되겠네, 이제부터.’
나에게서 관심을 뚝 끊어야 되겠네. 왜냐하면 내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한 이슈가 되지를 못해요. 내 관심사가,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너 똑바로 살아서, 착하게 살아서 평생 남에게 해코지 않고, 파출소 안가고 제대로 살아서 부모 효도하고, 그걸 묻는 것이 아니에요.
그딴 것은 됐고! 그런 것은 완전히 개무시 하고 “성령 받았어요? 성령 받았어요?”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았느냐고 이야기할 때 성령은 종말의 영이거든요. 아, 세상을 볼 때 종말로 보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눈에 있던 콘택트렌즈가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렌즈로 부착이 된 거예요.
주님이 세상을 종말로 보는 그 안목을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부착이 된 겁니다. 렌즈가 같은 렌즈를 쓰는 거예요. 성령이라는 같은 렌즈. 세상을 속속들이 다 아는 렌즈에요. 그렇게 렌즈로 보니까 뭐가 보이느냐 하면요, 세상에 있던 모든 것이 실제 내용에는 침투, 들어가지 못하고 전부다 형식과 형식을 바꾸기에 급급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제가 방금 형식과 내용을 구분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에 과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유(有)에서 유(有)로 연구하는 게 과학이에요. 과학은 무를 다루는 게 아니에요. 유(有),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어떻게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거기서 어떤 원칙과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게 과학입니다.
과학자의 자부심은 뭐냐 하면, 화학실험실에서 두 원소를 결합시킬 때 거기서 나오는 여러 가지 불꽃반응이나 모든 반응을 보고 거기서 있음 안에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자연의 원칙과 원리를 뽑아낼 때 그때 과학자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방정식을 세우고요. “이거였어! 내가 돈 벌려고 과학자 한 거야.” 이거 알아내려고 원리원칙을 알아내는 거예요. 그 희열을 느끼는 겁니다. 세상에, 약품 하나 원리하나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2만 번, 2만 2천 번, 페니실린 실험하는 것 수천 번씩 실험한 거예요. 그렇게 2만 번씩 실험해서 하나 건질 때 그건 행운입니다. 2만 번 3만 번 실험해도 안 되어서 폐기처분된 원리원칙이요, 방정식으로 되어진 것보다 수천 배가 더 많아요.
벤젠화학식 그 구조를 발견한 과학자는요, 하도 안 풀리니까, 아이디어가 안 나오니까요 고민 끝에 잠을 자는데 꿈에 두 마리 뱀이 서로 꼬리를 물고 원환을 이룬 것을 보고 벤젠 구조식을 찾아낸 겁니다. 6각형구조식을. 그 때 꿈 안 꿨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벤젠구조식 발견 못했습니다.
과학은 모든 것이 형식이에요. 형식에서 어떤 형식으로 인간의 힘을 가동해서 바꾸면 우리에게 실용적인 형식을 낳을 수 있는가? 이것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 시아파와 순니파가 있는데요. 시아파는 마오메트 핏줄 주장하는 거거요. 수니파는 선지자들 계통으로 가자, 해서 시아파는 이란쪽이고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 쪽이에요.
그들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거든요. 그 치열한 전쟁이 뭐냐? 형식전쟁이에요. 종교라는 것은 형식에서 형식을 가지고 거기서 거룩과 구원의 능력을 따내려 하는 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숫자 불리는 것은 형식이지요. 그래서 교회가 엉터리지요. 모든 것이 형식이에요.
인간은 내용에 침투까지 못하니까 형식만 줄창 붙들고 있으니까 어떤 형식으로 하게 되면 은혜가 되고, 어떤 형식으로 하면 나한테 감동이 되고, 이런 식으로 전부다 형식만 찾고 있어요, 형식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고체로 되어 있거든요. 인간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잖아요.
레위기 17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피를 먹지 말라 했어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고체인 내가 고체덩어리인 그 음식물 생산물을 내가 먹음으로서 고체인 내가 어제보다 더 건강하게 오늘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 그게 인간이 ‘음식 먹음’이에요. 음식 먹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피는 뭐냐? 액체에요. 고체 너를 위해서 액체의 피를 먹지 말라는 그 말이거든요. 네가 같이 액체 되어야 될 존재기 때문에, 다시 쉽게 말해서 죽어야 될 존재기 때문에 멀쩡히 살아 있는 고체를 위해서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 피는 고체가, 짐승이든 누구든 고체가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게 피 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피가 안 나오니까요.
예수님은 피로써 우리에게 다가왔어요. 이것은 뭐냐? 형식이 아니고 뭐다? 내용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예수님의 피까지 뭘 로 보느냐? 내용으로 보지 않고 형식으로 보는 거예요. RH +(플러스) -(마이너스) A형인가, B형일까, 뭘까, 본인이 형식이기 때문에 본인이 살아온 것이 형식에서 어떤 진리를 뽑아내겠다는 이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가지고 성경의 모든 것도 형식으로 찾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았다는 것이 고고학의 증거가 있겠지. 파내봐라. 뭐가 있겠지. 예수님이 벗어놓은 옷이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던데 그걸 단층촬영해보든지 방사선동위원소로 연대를 측정해서 우리 눈에 우리 이성에 판단력에 납득이 되도록 해 봐라, 납득이 되도록. 그러면 믿어줄게.’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콘택트렌즈가 육의 콘택트렌즈에요. 하나님의 콘택트렌즈가 아닙니다. 보는 것에서 구원의 능력을 파헤치려고 애쓰는 거예요. 신학도 마찬가지고 종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사람에게 여기 누가복음 17장 5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냥 저만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저희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했거든요.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믿음 주옵소서.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따지지 않고 단박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할 때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6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이 있다, 믿음이 없다, 의 경계선에서 형식만 추구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큰 믿음 말고, 큰 믿음도 좋지만 믿음 중에서, 믿음이라는 세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는 가운데서 제일 작은 믿음 그걸 형식으로 예수님께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한 거예요.
왜? 인간들이 형식만,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프레임, 그들의 사고영역에서 주님께서 이야기하려면 겨자씨만한 믿음, 작은 믿음이에요, 그 ‘작다’ 바로 옆에는 ‘없다’가 되니까 믿음은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의 경계선상에서 ‘작은 믿음은 이정도 될 때 작은 믿음이다. 작은 믿음이라도 믿음의 영역에 들어왔다 할 수 있다’라고 예수님이 하시면서 산에 있는 뽕나무 뽑혀서 바다에 빠지우라, 할 때 “뽕나무가 지대공 미사일 슝 날라 가듯이 해서 바다에 꽂혔으리라. 요게 극히 작은 믿음의 레벨 수준이다. 됐냐? 됐냐?” 그래놓고 “이제 믿음 한번 내놔 봐.”
허 경영씨가 공중부양 하는 데, 그거 믿겠다고 거기에 수십억씩 헌금하는데 그러면 허 경영씨가 뽕나뿌 뽑히게 해서 바다에 빠트릴 수 있습니까? 그것 못하면 극히 작은 믿음도 없는 사람이에요. 믿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성령은 마지막 때 오는 영이에요. 주님의 콘택트렌즈고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셔야 돼요. 흔히 전방에서 사고 날 때 지뢰를 밟았다 하잖아요. 지뢰는 밟는 게 아닙니다. 지뢰는 밟히라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라고 있는 게 아니고 믿음에 밟히고, 사랑을 가지는 게 아니고 사랑에 밟히는 거예요. 터져버리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사랑을 밟아버리고 나도 모르게 믿음을 밟은 거예요. 이게 뭐냐? 성령이 오신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작은 믿음 소유할 필요가 없어요. 소유는 형식에서 나온 것이고요, 내용은 은혜로 주는 겁니다. 누가 복음 17장 34, 3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24장 40절은 여기에 하나 추가한 게 있어요.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아까 이야기했고요. 여기서 밭에 있다는 것, 밭에 있을 때 한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41절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 맷돌을 제가 어디서 봤느냐? 이스라엘 갈릴리 호숫가에서 봤어요. 맷돌은 여자 혼자서는 못 갈아요. 혼자 가는 맷돌 말고요. 꽤 커요. 두 사람이 해야 돼요. 맷돌 갈다 한 사람이 데려감을 당하면 그 맷돌에서 녹두는 다 갈았습니다. 못갑니다 두 사람이 한조가 되어야 되니까요. 잠을 잘 때, 밭을 갈 때, 맷돌 갈 때 자, 이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나머지 한 사람 남겨둘 때 두 사람을 나눌 수 있는 기준제시가 인간들의 모든 납득하는 이해도를 능가해요.
두 사람이 맷돌 갈고, 두 사람이 밭에 있고, 두 사람이 잠을 자는데 왜 한사람은 버려두고 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왜 두 사람 다 데려가지 않는지 그 기준은 인간에게서 동원된 어떤 기준도 그 기준에 미흡합니다. 기준을 제시할 수가 없어요.
아마 이런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이야기할 겁니다. “주님, 왜 굳이 그래야 됩니까? 왜 그래야 됩니까?” “그래야 눈치 못 채지.” 그러거든요. “왜 인간이 눈치 못 채야 됩니까?” “인간은 너만 바라보기 때문에 눈치를 채면 안 되지.” 인간은 자기 자신은 고체 되는, 덩치가 있는 자기한테 형체 있는, 형식만 있는 이것만 쳐다보고 평생을 살아가거든요. 내가 나를 어떻게 지켜내고 생존해 낼 것인가? 정신이 온통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살아 있는 것 더 살아보자. 그게 전부라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 사람을 데려가고 한 사람을 버려둘 때에 ‘깜놀!’ 이지요. 깜짝 놀랐지요. 이 사람 어디 갔나, 이 사람 어디 갔나, 하는 그 사람이 낭패입니다. 주께서 안 데려가셨어요. 큰 일 난 거예요. 끝났어요. 이미 게임 오버. 끝났어요. 여전히 나한테 질문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게 그게 버림받은 거예요.
오늘 주보에 그 내용이 나와 있잖아요. 하나님보고 ‘날 건져봐라’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버림받은 사람이라고요. 【“날 건져봐라”라는 식으로는 이웃관계나 친구관계나 형제관계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날 건져봐라”라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비림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날 건져보세요. 날 구원해보세요.” 그 사람이 버림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런 소리 안 합니다.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그렇게 나오지요. 이 세상은 형식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전부다 성과를 원합니다. 실적을 원해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실적 원하고 성과 원하지 마라. 너 자체가 주님의 성과야.” 너 자체가 맨 날 자기만 쳐다보니까 그렇지요. 주님 보고 날 보면 주님이 열매가 나예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그런 짓 하면 우세스럽다.” 하거든요. “너 우세스럽대이.” 여러분, 성도한테는 사도바울한테는, 이 사도바울 진짜 미친 사람이지요, 자기 목숨을 못 버려서 환장한 사람, 사도바울에게는 우세스럽다, 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남에게 망신당하고, 우세스럽고, 검찰청에 불려나가고, 카메라 모자이크 처리 당한대이!” “그래서 그게 뭔데? 그게 왜 공포가 되지? 내 인생에서 우세스럽다는 것이 나한테 고민거리나 걱정거리가 굳이 되어야 될 이유 그 근거가 뭐지? 그냥 주께서 데려가면 되잖아.”
우세스러운 것하고 상관없이 데려가잖아요. 창피스러운 것 상관없이 주께서 데려가잖아요. 왜? 지뢰 밟혔으니까, 빵 터져버렸으니까요. 사랑이라는 지뢰를 밟아버렸으니까, 믿음의 지뢰를 밟아버렸으니까. 사랑의 휩쓸리고 믿음에 휩쓸린 거예요.
뭐가 창피스럽습니까? 뭐가 우세스러워요? 마귀가 주는 공포지요. 두려움이지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요,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성령은 마지막 때 오는 영이에요. 따라서 인간이 하는 짓거리는 마지막에 저주받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충분히 증명을 해놓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성령을 선물로 줘가지고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을 만들어 버리는겁니다. 성경적으로.
그러면 지난 이스라엘이 했던 것들, 그것은 인간의 이성, 판단력, 인간의 노력, 지혜, 형식과 형식,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 거기서 어떤 신의 비밀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웃기는 짓이고 그것을 성령께서는 깨트려 버립니다.
그런데 주눅 들지 말고, 그런데 말려들지 말라고. 오늘 본문에서 사랑이 나오는데요. 사랑을 압축해서 설명해 드릴게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인간들로 하여금 싸움을 붙입니다. 사랑은 짝이 있어야 되니까, 싸움을 붙여서 사랑은 자기가 아는 사람과 신나게 싸우지요. 모르는 사람과는 아예 싸움도 안하니까요.
아는 사람과 신나게 싸워서 우리가 이토록 심하게 싸워서 이 싸움 투쟁이 극한까지 밀어붙이게 만들어요. 그렇게 밀어 붙여도, 그렇게 죽어라고 싸워도 그 투쟁이 나의 운명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그 극한의 지점에서 나타나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의 반대말은 싸움이거든요. 네가 한번 싸워봐라. 죽을 때까지 싸워보라는 거예요. 원래 부부라는 것은 싸우려고 있는 것이니까, 만만한 게 부부니까. 실컷 싸우는 거예요. 백날 싸우고, 웃음거리 되고, 백날 망신살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를 데려간다. 그게 뭐냐? 사랑이라. 인간은 원래 싸우게 되어 있어요. 누굴 위해서? 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별로 안 싸우는 것 같은데?’ 안 싸우는 것은 애써 참아서 그래요. ‘인간성 좋은 내가 참을게. 내가 양보할게.’ 참아서 그래요. 참고,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그렇지요. 스페인의 섬에 화산 터지는 것 봤지요. 부글부글 끓어요. 우리는 그냥 참는 거예요. 참아도 한도가 있지 주께서 계속 건드리며 못 참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하나님 믿었습니까?’
인간과 싸우다가 그 싸움을 주께서 인간싸움에서 멈추지 않게 해요. 하나님하고 직접 싸우게 만들어요. 그러면 인간이 갖고 있던 이 인생에서의 목숨, 우리의 목숨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억울한 죽음, 그 피에 다 같이 적시기 위해서, 묻히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든 누구든 내 인생 흠집 내면 가만두지 않겠다, 나는 싸울 거야,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울 거야.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해라. 그것을 멈추지 말고. Don't stop!” 갑자기 영어, 방언이 막 나오는데 “멈추지 말고 해. 그게 네 본성이야. 해! 실컷 싸워. 죽어라고 싸워. 아무리 싸우고 싸워도 너를 구원하는 그 사랑은 여전해.”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이해 되셨지요? 싸우지 않으면, 나를 지키고 나만 생각해서 남들을 전부 다 적으로 간주해서 싸우지 아니하면 아직까지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은 주는 거예요. 사랑을 주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는 나서서 사랑을 쟁취할 방법은 없습니다.
참……, 이 말은 뭐냐?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형식만 추구하기 때문에 내용에 근접하지 못해요. 거기 들어갈 수 없어요. 사랑은 짝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어떻게 사랑하는가? 그 사랑에 대해서는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13절이 꽤 긴데요. 굉장히 긴데 그 긴 것을 제가 설명을 해야 되겠어요. 이거 빠트리면 안 됩니다. 사랑을 설명하면서 무엇이 동원되는지를 여러분이 한번 들어보세요. 이게 동원돼요. 4장 8절에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는 지옥 간다. 이걸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 슬슬 걱정이 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그 뿐만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천국 못갑니다, 라고 운을 떼는 거예요. 사도가! 사도는 뭐 주님의 뜻이지요.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람들은 “어디? 어디?” 여기 있다니 갑자기 반갑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다시 말해서, “나는 때려죽여도 하나님 사랑하지 못하는 자만 여기 모여라. 여기 모여!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금식, 헌금, 기도, 전도, 교회충성, 목사가 되고, 신학공부를 해도, 그 어떤 것도 거기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예 안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 다 모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노력을 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그런 사람만 나와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거예요.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오직 하나님이” 그 다음에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할 때 그 형식이 뭐냐 하면, 사랑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자, 형식은 ‘내가 어떻게 하면 사랑하느냐’라는 형식, 내가 어떻게 하면 사랑하느냐의 형식은 이제는 주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받지를 않고 형식은 따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이게 형식이 아니고 이걸 내용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것이 우리보기에 형식으로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내용입니다. 그래서 왜 주님을 못 알아보는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알아야 돼요. ‘우리는 그동안 형식만 추구했었다. 나라는 형식이 어떻게 고스란히 천당 가느냐, 그것만 생각했지 예수님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투입입니다. 십자가의 투입이에요.
마태복음 20장 20절에 보면 거기에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세베대의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이지요.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게 뭡니까? 질투지요.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아들은 내 자식인데 열 두 명 가운데서 특별히, 제가 경상도라서 ‘특별히’ 이 발음을 정확하게 못하는데요, 특별히 두 아들 내 아들만큼은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넣어주세요. 치맛바람을 쓴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형식에서 형식으로 나갈 때 특별히 나를 지키기 위한 질투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평생 하는 짓이 이 짓이에요. 나는 여자를 착하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여기 보면 안 착한 것 같아요. 그 질투의 형식적인 결과가 뭐냐? 소유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 자기 목숨을 자기가 소유하지 않고 못줘서 환장했어요. 그냥 줘버려요 그냥 줘버린다고요.
그게 사도행전 20장 31-35절에 나와 있어요. 기니까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35절만 보면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 말씀을 35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평생 동안 나는 너희들(에베소교인들)에게 주기만 했다.” 다시 말해서 “내 목숨은 소모용이다.” 여성들 갖고 다니는 립스틱 있지요. 그 립스틱은 빨갛고 예뻐요. 하지만 그것은 소모용입니다. 입술 짙게 바르라고 준 거예요. 어디 치장하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의 목숨은 립스틱같이 매일같이 소모하는데 너한테 소모하지 말고 그냥 갖다 버려. 줘버려. 형식이니까 형식을 위한 질 낮은 엉터리 목숨이니 줘버려. 생명 얻었는데 가짜 생명 줘도 괜찮잖아. 그런 뜻이에요.
인간은 질투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못가지면 너도 못 가져야 돼요. 아, 참, 참, 이런 것이 정치판에 나옵니다. 굳이 정치 이야기를 안 하려고 이야기합니다. 이 낙연 안되거든 이 재명도 하지 마라, 그런 식이지요. 인간은 본능이기 때문에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내가 못 먹는 것 너도 먹지 말라 예요. 내가 천국 못가는 것 너도 가지 마라 그 말입니다.
두 아들을 밀어붙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20장 22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네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는 그 형식만 찾고 있는데 나의 마시는잔을 네가 마실 수 있느냐”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이 그거예요.
예수님의 액체 피는 그 찢겨진 살은요 고체인 살을 찢어서 조각이 나는 것은 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아나. 이것이 사랑이다.” 요한일서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사랑 못합니다. 나 때려죽여도 주님 사랑한 것 없다.’ 그렇게 사랑 못한 사람들 다 나와. 다 와.” 사랑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있어 가지고 주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이 형식적인 나에게, 질투심으로 무장된 나에게 신경 뚝, 내가 우세를 하든지 망신을 사든지 신경 뚝! 이제는 오신 주님의 사랑만 쳐다보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랑을 주시는 게 아니고! 사랑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주시는 게 아니고 사랑을 드러내신 거예요.
그들이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한테 참여된 겁니다. 구약 여러분이 많이 보셨잖아요. 이스라엘이 뭐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동행의 의미가 있어요. 동행은 한 사람이 아니고 둘이 가는 거예요. 동행할 때 ‘아, 나 왜 이렇게 힘드냐?’ 힘들다 하는 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자기만 쳐다보고 힘든 거예요.
동행은 어떻게 되느냐? 힘들다고 하지 않고 “주여, 꼭 굳이 제가 이 일을 해야 됩니까?” 이게 동행이에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너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냐?” “나 동행하는 분에게 이야기 한다.” “아무도 없는데 너 누구보고 헛소리 하고 있어?”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방나라는 자기만 살아요. 동행은 같이 있어요. 그 동행 속에 주님께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하나님 자기의 콘택트렌즈, 자기의 관점을 계속 침투시킵니다. 침투시킬 때 이스라엘은 거기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바로 교회의 변화요, 그 이스라엘의 재현이 마지막 때 교회의 등장입니다.
아, 구약 때 동행하던 것을 이제는 동행 안하고 지금은 교회와 더불어 동행하는구나. 성령 받은 사람과 함께 동행하시는 거예요. 동행하니까 뽕나무가 뽑히는 그것도 내일이 아니지요. 그냥 뽕나무 쥐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지만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것도 내일이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믿음의 영역에 이미 와 버렸어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내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할 줄 모릅니다. 우리는 질투심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나만 사랑하는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더 중요한 것은 동행이 되는데 그 동행의 시발점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성령께서 십자가 영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갑자기 졸지에 내가 허상이 되어버리고 내가 죽어 있다는 것이 실상이에요. 그러면 우리 인생의 삶은 뭐냐? 죽은 자가 잠시 나들이한 겁니다. 이 세상에.
그러면 제가 너무 심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사람은 자기가 살았다, 여기고 산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라고 자꾸 목사한테 묻고 주님한테 묻는데 미국 대규모 농장의 병충해를 막기 위해서 비행기 자체로 박멸합니까?
그 다음 선택지를 이야기 안하고 제가 묻는 겁니다. 비행기로 농약 뿌릴 때 비행기 자체가 박멸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는 농약이 박멸하겠지요. 아이고, 뻔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비행기 떴다고 해충이 죽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모습은 형식이에요. 그러나 그 피는 농약입니다. 우리는 독을 마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선악과라는 독을 마셨기 때문에.
성령 받으면 우리의 이 몸, 몸뚱이, 눈에, 거울에 비추이는 이 몸은 비행기에요. 그냥 형식이에요. 형식인데 거기서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적 없이 구원되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은 적도 없이 구원되었습니다. 이게 내용으로 나와야 돼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다른 교회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성경책에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막 그런 구절 인용하는데 너는 왜 반대로 이야기하느냐?” “나는 죽었거든.” 말씀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나는 죽은 자거든요. 그러면 “너는 안에 내용으로 살아 있잖아.”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천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천 번을! 내가 천 번을 이야기했어요. 여전히 못 알아들어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방금 목사님이 이야기한 그 일을 내가 믿어야 됩니까?” 또 이렇게 한다고요. 갑자기 또 형식으로 나가버려요.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적 없어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룬다,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4장 12, 3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제가 아까 여러분에게 본의 아니게 숙제를 드렸어요.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13절까지 읽을 때에 몇 가지가 나온다했지요.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그 이야기요. 세 가지를 이야기할게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아무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도 자격도 없고 그럴 재주도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세 번째 뭐냐? 성령 나와요.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절에서 묻는 거예요. 성령 받았나, 묻는 취지를 이제 아시겠지요. 너 말고 네 안에,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소식을 네가 들었나, 그걸 묻는 거예요. 성령 받았나를 묻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이 이걸 알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을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18절에 보니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인간의 두려움은 왜 생기는가? 망실살 때문이에요, 망신살. “사진 찍지 마라” 그런 것 있잖아요. 검찰청 앞에서 하는 그것. “50억 나만 먹었나?” 해가면서 마스크 쓰고요.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잘됐다. 마스크 쓰고 “나만 먹었나?” 얼굴 가려가면서 이런 식으로. “내 아들만 50억 받았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신문이나 방송 볼 때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사람들 등장할 때 얼마나 스스로 자기에게 쾌감을 느끼는지 몰라요. 게임에서 이긴 것 같아. ‘저런 인간 죽여 버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살아야 돼. 이 말이거든요. 지금 본인이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살려고 하는 거예요. 형식적인 나를 살리려고 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저런 인간은 죽여야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야구나 축구 응원할 때 보세요. 죽여! 죽여! 하잖아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남이 휴대폰 만지는 것은 휴대폰 형식을 만지는 거예요. 그런데 남이 나의 휴대폰 안의 메시지를 보는 것은 내용을 보는 겁니다. 이제 딱 됐지요.
주님의 역사는 어떻고, 그런 것 몰라도 돼요. ‘주님이 죽었다. 나 안다.’ 그것은 이순신이 죽은 것하고 똑같아요. 그게 뭐예요? ‘늙어 죽었거나 아파서 죽었겠지.’ 그게 뭔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다.” 그게 흘러 나와야 되지요. 왜냐? 네가 형식을 갖췄나. 그 형식은 하나님 보시기에 도저히 눈뜨고 못 봐줄 형식이에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오지요. 솔로몬의 옷도 들의 풀보다 못하다 하는 거예요.
울산강의에서 유다와 다윗을 언급했어요. 유다라 하는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그 유다에요. 그 유다가 자기 며느리가 창녀가 되어서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는 말이, “우리 집안 망신시킨 저 며느리 죽이되 그냥 죽이지 말고 불에 태워서 죽여라” 했어요. 왜? 우리가정은 정의가 살아 있으니까.
“창녀가 다 뭐냐.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위반되니 죽여 버려라.” 했는데 나중에 다말을 만나고 난 뒤에 네가 옳도다, 했어요. 죽을 자는 네가 죽을 자가 아니고 유다 내가 죽을 자에요. “나는 형식만 붙들고 있었지 너는 진짜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 네가 창기로 변장할 정도로 그 우세스러움을 극복하는 그 모습으로 나한테 나타나서 기어이 나를 살리려고 했던 내용을 이야기했던 네가 옳다. 네가 의인이다. 네가 성녀다” 그렇게 했어요.
다윗이 밧세바를 만났잖아요. 그럴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어떤 사람이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다윗이 화가 나서 “우리나라에 그런 나쁜 놈이 있어? 자기 양을 잡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남의 양을 빼앗는 일이 있어? 그건 당장 죽여 버려야 돼. 그것은 율법에서 네 배 갚고 뭐고 필요 없어. 그냥 죽여야 돼.”
나단선지자가 하는 말이 “네가!” 미안합니다. 집사님 보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고요, “네가 바로 그 사람이야. 네가 바로 그 사람이야! 그 우리아 장군을 네가 죽였어. 네가! 네가 하는 짓이 남 죽이는 것 밖에 없어.” 네가 평생 하는 짓이 하나님의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거기에 같이 손 넣는 그것 하는 데에 네 목숨을 다 소모하는 일로 다 보냈다 그 말이지요.
사람은 게임을 좋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편이 이기기를 좋아하고요. 굉장히 일상의 평범한 삶이거든요. “잘한다, 황희찬! 두골 넣었다. 잘한다, 손흥민이.” 이게 우리나라니까 그렇지 일본 같으면 그런 소리 안합니다. 같은 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80넘은 두 할머니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TV 보고 10분 20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임 영웅이 좋으냐, 장민호가 좋으냐, 그 이야기했어요. 한 할머니가 “장 민호는 잘생겼잖아.” “그러면 잘생긴 것 너 해라.” 나이 80먹은 할머니가.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질투심이에요. 인간은 내 사랑에 내가 박혀 있어요. 못 빠져 나와요. 눈을 떠도 내 사랑, 눈을 감아도 내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앞을 봐도 내 사랑, 나밖에 몰라요. 이거 못 고칩니다. 고칠 생각 하지 마세요. 원래 생겨먹은 게 그래요. 이 주일처럼 원래 생겨먹은 게 이래요, 그냥.
무슨 종교를 가지고, 기독교를 가지고, 뭘 착하게 살고. 착하다 하는 그게 버림받은 자에요. 끝났는데 뭐. 종말인데 뭐요. 종말은 착한 사람 구원받는 게 아니고 착한 사람 다 지옥 갑니다. 주님의 거저주심을 자기가 가로막고 있잖아요.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요?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우리의 이 자아 못난 자아를 왜 자꾸 주께서는 살려줍니까? 그것은 자아와 약속의 만남 때문에. 다 이루었다, 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백날 해도 다 이루지 못하는 못나고 못난 우리를 주께서 늘 만나게 해주시는 거예요.
인간은 이 자연을 보면서 자연을 다 설명을 못하고 빠진 부분을 놔두고 얼추 괜찮다 싶으면 골라요. 그게 결여(缺如)라 해요. 모자란다, 어려운 말로 결여라 해요. 인간은 자연을 볼 때 결여된 자연으로 보면서 자기 욕망을 다듬고 있어요. 세상을 완전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뭔가 빠진 부분이 많아요. 인생 살아봐야 몇 년 산다고요.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자신의 재현, 이스라엘의 재현, 동행하고 있는 이게 진짜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로 하여금 뜰채를 가지고 뜰채 안에 넣어요. 인을 찍는다는 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뜰채 안에 우리를 성도를 담아요. 물 밖에서는 이것이 보이지만 물속 깊이 들어가면 뜰채가 안보이잖아요.
마지막에 두 사람이 잠을 자고, 두 사람이 밭을 갈고, 두 사람이 맷돌을 갈 때에 뜰채만 딱 올리니까 한쪽은 뜰채 안에서 건짐 받은 사람, 한쪽은 뜰채 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은 사람, 그래서 이 뜰채가 뭐냐? 성령 안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 안이고 십자가 안이에요.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사도가 왜 오늘 데살로니가에 그냥 주는 이게 사랑이냐? 주님이 바로 내 안에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이 너희에게 나를 보내서 사도바울의 남아 있는 목숨을 너희들 복음전하라고 허비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바로 사랑이다. 너희는 사랑의 대상이고,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나는 사랑을 전해야 될 매개체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설교 처음에 한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도대체 사도바울 당신 뭐요? 당신은 왜 남들처럼 살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는 죽었으니까.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은 그냥 남아 있는 목숨 남 줘버리라고 살아 있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2장 14-1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거기서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똑같은 사도바울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쪽은 악취로 코 막고 “아, 그 소리 그만해라. 듣기 싫다.” 이렇게 악취로 느껴지고 한사람은 뭐냐, 망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게 향수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속에 갖고 있는 향수 좀 그 냄새 썩히지 말고 터트리세요. “가져가라. 내 목숨.” 그런 식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 이유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소유하라고 사는 것, 생존하라고 사는 것, 성과 얻으려고 사는 것, 남에게 우세 당하지 않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을 남 줘버리리라고 살아간다는 이 사실을 사랑 안에서 감사함으로 진행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