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환란에 동참

아빠와 함께 2021. 9. 26. 23:47

환란에 동참

2021년 9월 26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1-4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2: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제대로 된 ‘고난’의 의미는 예수님만이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이기에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지를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하나님 믿고,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올바른 고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겪었던 그 환란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이런 작업을 하시는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위해 살지 않음’이 성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받았던 그 환란을 택한 자 위에 뒤집어씌우게 되면 그로 인하여 인간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게 됩니다. 곧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면서 살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복음이란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신다는 것은 결코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내용’이라야 성립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정당해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에게 욕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욥기 2:9에 보면,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인간들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는 성향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즉 “누가 감히 나에게 간섭질이냐?”라는 투입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까지 잔소리로 간주해서 아예 열매마저 따먹어 그 지시의 벌칙까지 제거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셨을 때, 그 누구도 예수님편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형성된 개념이 바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성도에게 찾아들면, 성도는 스스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 줄거리가 빌립보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라는 곳에서 사도바울의 일행(디모데와 실라)는 이런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자마자 곧 난관에 봉착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바울이 치료하자, 주인들은 수입원을 잃게 된 것에 분노하여 급기야 두 사도를 고소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매를 맞고 투옥되고 맙니다. 사도 일행은 여전히 찬양하며 기도했는데 기적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인의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착고란 두 개의 긴 나무토막을 맞대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한 옛 형구(形具)룰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망치지 않고, 옥문이 열린 것에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하려는 간수의 생명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통해 그 가족 전체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옥문이 열렸을 때에 사도와 자기 생존 문제로 두렵고 떠는 간수만 남고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옥을 지키는 간수가 구원받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 즉 주님께서 친히 당하셨던 고난 안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옳지 못한 세상에서 옳지 않게 살아온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수상하고 잘못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들고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칼을 거두게하신 분은 오히려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망해야 되고 파탄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 자신의 격에 맞다는 사실을 자꾸만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바는, 지옥이란 예수님과 함께 할 수는 자들이 모이는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어내고 거부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지키겠다는 의도를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도 인간쪽에서 예수님을 욕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지옥이란 안 가고 싶어도 본인의 성향에 맞는 세계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노동력이 아니라 남의 노동력을 딛고 점프하여 천국에 이르게 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비유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시는데 적절한 사례를 든 경우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노동력을 주님께서는 강탈하여 자신이 그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으로 변경시켜버립니다.

열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받는 이유는, 자신의 노동력을 주님께서 빼앗가셔서 주님이 그저 은혜로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즉 충실한 직원은 자기 위주의 자의식이 없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직원은 자의식이 있기에 자기 위주를 사태를 이용합니다.

주님에게 자신이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이로서 결국 그는 ‘그저 죄사함’을 받는다는 의식이 들어 자리가 없게 되고, 그는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통곡하고 이를 갈며 후회하게 됩니다.(마 25:30) 이처럼 의미있는 환란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 고생에 대한 보상을 고대할 자격은 아예 없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에 강도 만나서 거반 죽은 자가 등장합니다. 이 강도 만난 자는 자력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즉 자신의 가치를 더 이상 챙기기 곤란한 자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같습니다.

일방적으로 외부에서 도와주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사람입니다. 즉 인간의 과거생활, 혹은 옛 사람 생활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지경입니다.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듯이 세상이 압박감이 대단합니다. 자력으로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는 모든 편의를 다 제공합니다. 되돌려 받을 생각없이 말입니다.

이런 혜택, 이런 은혜가 새로운 것이고 새사람되게 합니다. 새사람이란 자기 내부가 온통 형편없음을 자인하고 그것이 외부를 표출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오로지 나의 행복, 나만이 잘되고자 하는 짓 뿐이라는 저주받아 합당함을 자임하는 자가 곧 성도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찢어진 북처럼 자기 소리를 못내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곳이 천국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환란에 동참)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기본적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 대우 못 받는 거지요.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때문에 사람 기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라는 이러한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거 안 받아들여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이 세상이다.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세계라는 것은 이렇게 가만 따져보면요, 전부 다 이게 거래입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상거래에요. 인간세상 자체가 상거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놓을 것 없으면 인간 취급 못 받고, 내놓을 것이 있다 하면 와~, 하고 뜯어먹고, 이용할 게 있으면 다가오고, 이용할 거리가 다 떨어졌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팽개치고, 이게 바로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인간세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런 인간세계에 더 이상 정 붙이지 말고, 거기에 미련 두지 말고, 거기에 기대하지 말고, 거기에 애착을 두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좋으나 싫으나 살아온 것이 이 세상 삶인데 이것 포기하게 되면 그러면 나는 뭘 믿고 나는 뭘 해야 됩니까?”라고 나올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생각 자체가 또 여전히 상거래에요. 하나님하고 거래하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잘해준 것이 있으면 내가 하나님한테 잘해줄게요, 라는 거래하는 그 심보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드립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고 달리 말해서 하나님만 기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걸 같이 함축해버리면 ‘복음이란 내가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거예요.

평생을 인간은 자기 위해서 살아가잖아요. 복음이란 뭐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 중지하기, 그만두기,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복음이란 뜻은, 기쁜 소식이거든요. 어느 인간이 평생을 자기를 위해서 살았는데 이걸 그만둘 위인이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지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2절에 나옵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여기 능욕과 고난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고 되어 있어요. 사도만 당한 것이 아니고 데살로니가 교회도, 사도 떠나고 난 뒤에 그들도 혹독한 고난과 능욕을 똑같이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고난과 능욕을 받을 때에 내가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먼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고난과 능욕 받았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걸 놓치면 안 돼요.

왜냐하면 환난과 고난, 능욕이란 단어는요, 누구만 쓸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만 쓸 수 있지 감히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나 고생했다, 인생 능욕 받았다, 복음 때문에 힘들었다, 그런 말은 주제넘게 내가 나한테 쓸 수가 없어요. 살면서 고생했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고생 안 하고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내 인생에 위기가 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에요. 인생에 위기가 온 것이 아니고 태어난 게 위기에요, 태어난 게!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게 위기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의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모든 것이 오직 자기만 위해서, 자기만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것은 저주받을 일입니다.

심지어 한 살 먹은 애도요, 돌 지난 그 정도 애도 자기 의자가 있는데 누나 의자 빼앗아가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어요. 아, 그게 제 외손자인데 그걸 보면서 ‘쟤가 고린도후서 5장 14, 15절을 모르고 있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는 그 말씀을 걔가 모르는 거예요. 들어본 적도 없지만. 들어본다고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이 말은 말씀이 오기 전에 이미 인간에서는 너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라는 다른 힘이 모든 인간에게 태어나면서 다 주어져 있습니다.

너는 너만 위해서 살아라. 너한테 네가 전부야. 이미 그것은 어떤 둘러싼, 우리 주위를 둘러 싼 세상의 힘이 내가 그걸 요구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것으로 꽉꽉 차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이미 장악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에요.

모든 살아가는 인간들이 똑같은 이유가, 인간 세상 자체가 똑같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세뇌받고, 그걸 압박감이라 하는데요, 정신적인 압박감을 계속 부여받고 살았어요. ‘너는 오직 너만을 위해서 살아야 돼. 그게 전부야.’ 따라서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 힘으로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없고 내 힘으로 주를 위해서 살 수 없다는 점을 제가 강조하고 싶습니다.

할 수 없는데 그러면 여기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본문의 사도는, 거기서 그들은 어떻게 빠져나왔는가? ‘오직 나는 나만 위해서 산다, 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어? 그거 참 신기하네.’ 그 빠져나오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겪었던 고난과 환난이 똑같이 그들에게 주어짐으로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고난과 환난이라는 것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 위주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말씀을 다시 정리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위기였어요. 본인이 특별히 나쁘다, 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나쁜 세상이에요. 이 나쁜 세상이 나에게 계속 귓속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너만 잘되면 돼. 네가 잘되는 것이 선이고 네가 잘되는 것이 진리야. 네가 잘되는 것이 정의야. 정의라는 것은 힘이 없으면 정의가 아니야. 힘 있는 자만이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어. 그러니까 힘부터 가져. 네가 법이야. 네가 신이고 네가 전부야.’ 이것은 뭐 누구한테 가르칠 필요도 없어요. 자생적이에요.

그런데 이 땅에 누가, 하나님이 같이 섞여 들어왔지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곱게 살고 싶어도 곱게 살 수가 없어요. 주변에 날파리들 확 달려듭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 자체가 고난과 능욕의, 능욕이라 하는 것은 개무시 당하는 거지요, 고난과 능욕과 무시당함과 거부당함으로 주께서는 일관되게 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도망쳤습니다. 이상하게 예수님이 있던 공간과 다른 인간들이 있는 공간이 완전히 구별되었어요. 예수님은 홀로 남겨졌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홀로 남겨졌어요.

아무도 예수님을 이해 못 할 자로서 그들은 이 땅에서 태어나서 그동안 살아왔던 겁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 사고방식은 결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둘둘 감긴 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할 수 없으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뭘 이야기했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대로 지키면, 하나님을 섬기면 율법대로 하늘나라 간다고 그렇게 우겼던 그들이 그것마저, 하나님 섬기는 그것마저, 교회 다니는 그것마저 결국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조치인 것을 본인이 애써 그것을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 잘 섬기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바울, 사도 되기 전의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잘 섬겼는데 결과는 뭐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인간들 머릿속에 뭐냐 하면, 하나님은 최고예요. 하나님은 최고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최고라는 뜻이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최고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그걸 쪼개보면 누가 최고냐 하면, 내가 최고예요. 하나님 믿는 착한 일까지 하는 내가 최고라는 뜻이에요. 이것까지 거덜 낼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이것까지 거덜나야 되는데.

하나님이 최고라는 작자들이 한 짓이 뭐냐? 예수를 가차 없이 죽여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왜 죽이고자 했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고자 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가 나를 죽이기 전에, 심판하기 전에, 저주하기 전에 내가 예수를 죽여버리면 그만이 아니냐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선악과 심어놓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선악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다 그 말이지요. 이게 악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그 나무를 확 뽑아버려?’ 그래서 그 나무과실을 따 먹어 버렸어요. 이제 없는 거예요. 나를 지적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나를 지적할 어떤 초월적인 법이 없으면 그다음부터는 내 기분대로 살면 그만인 거지요. 내가 돛대고 내가 전부니까, 내가 신이니까. ‘누가 나를 간섭해? 누가 내 운명을 결정해? 내가 결정할 거야, 내가.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 신을 내가 선택할 거야. 내가 선택한 신을 내가 믿을 거야.’

모든 선택과 결정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본인이 하는 거예요, 본인이. 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었어요. 한 번도 거기에서 이탈한 적이 없어요. 끝까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진다는 거예요. 너도 그렇게, 나도 그렇게. 그렇지 않은 사람 나와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으니 그걸 옳은 길로 알았어요.

오늘 본문에서 편지를 쓴 사도는 내가 방금 이야기한 대로 그렇게 산 사람이에요. 그렇게 산 사람인데 그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했던 첫 번째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죽이는 공범자 중 하나다, 라는 뜻이에요. 네가 나를 핍박한다는 말은 그거에요.

“너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났다. 그걸 네가 이제는 알아야 된다.” 그 말이에요.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역사적 사명을 띄고.

욥기 2장 9절, 나는 욥기 2장 9절 보면서 여자라는 것이 이렇게 독한 존재인 것을 처음 알았어요. 욥의 아내가 이 말을 합니다. 자기 남편인 욥이 부자였다가 졸지에 가난하게 되고, 빼먹을 것이 없고, 자식 다 죽고 ‘아, 내 팔자 더러운 팔자 이런 남자를 왜 내가 잘못 선택했는가?’ 하고 자괴감 속에 있을 때에 욥기 2장 9절에서 욥의 아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니까 “그래도 당신이 하나님 믿을래?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그냥 죽어라, 가 아니고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난 전에는 여자만 이렇게 독한 줄 알았더니만 여자고 남자고 모든 인간존재가 본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 욕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그 거룩한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하나님 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유도한 거예요. 하나님한테 욕이나 하고 죽어라, 그 말이에요. “너 하나님하고 그런 관계야.” 인간과 하나님 관계는 그런 관계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 욕하는 대행자예요. 악마가 욕하는 대신 인간을 통해서 욕하고 하나님은 욕 얻어먹고, 욕 얻어먹는 하나님이 진짜고, 하나님을 욕하고 싶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은 창작물이고 가짜고 우상이고 그런 겁니다.

교회 와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요, 예수님의 환난을 끄집어내는 해석이 나와야 돼요. “네가 이런이런 욕을 했잖아. 네가 내 앞에서 잘난 체 하면서 너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이런 원망을 했잖아.” 그걸 끄집어내는 해석이어야 돼요. ‘하나님, 저 왔습니다. 복주세요.’ 이것은 하~ 진짜 이것은 마귀의 전당입니다. 악마의 전당이에요.

주님께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욕해라, 다 욕해라, 다 욕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자기를 욕을 하게 만들었어요. 욕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왜 욕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오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말이 도대체 나는 믿어지지 않아요. 자기를 죽이는 자를 믿는다니 이것은 뭐 진짜 둘 중 하나에요. 이것은 예수님을 아예 몰랐거나 안 그러면 성령을 받았거나 둘 중 하나에요. “예수님, 복주세요.” 이것은 납득이 되는데 모든 인간이 그렇거든요. 왜?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에요.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해되는데 “죽여주옵소서” 이것은 아, “주여, 저를 파탄에 이르게 하옵소서” 아, 정말 이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까지 간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고백입니다. 사람이 이런 말은 할 수 있어요. “하나님, 제가 주님께서 제게 어려움을 줘도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하나님의 뜻이 없기에 어려움을 안 주셔서 굉장히 다행스럽습니다.” 이런 말을 하거든요.

뭐야 이거! 결국 또 자기중심이잖아요. ‘어려움을 주시면 그 어려움을 구차 없이 받기는 받지만 그래도 적어도 나 정도 같으면 편안하게 인생을 행복하게 끝내고 싶습니다.’ 이런 소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파탄되는 그런 때가 오는 것이 좋아요, 가 아니라 그걸 고대해야 돼요.

자기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어쩔 수 없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겁니다, 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를 고대해야 돼요. 성경에서 환난이라는 것을……, 설교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중요한 것을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환난이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그것이 반드시 거기 들어가야 돼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환난은요, 그것은 환난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거예요. ‘그렇다. 이 고난을 이기면 나는 영웅 된다. 이 난관만 벗어나면 나는 대단한 인물 된다.’ 그것은 하나의 춘향전이고 노림수지요. 영웅전이지요. 내가 영웅 되는 기회가 왔다. 그런 식이 돼요. 그런 것은 환난 아닙니다. 고난 아닙니다. 장난치는 거예요, 그것은.

빌립보에서의 환난에 대해서 주보 뒤에 내용이 있는데 이 귀한 시간이 아까워서 빠르게 읽어보겠습니다. 녹취하는 분이야 주보 뒤에 나와 있으니 그대로 베끼면 되니까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라는 곳에서 사도바울의 일행(디모데와 실라)는 이런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자색 옷감이라는 것은 귀한 옷감입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자마자 곧 난관에 봉착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바울이 치료하자, (바울이 치료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바울을 통해서 일을 벌인 거예요. 사도바울은 치료할 수 있는 능력 없습니다. 주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귀신 나가게 한 거지요) 주인들은 수입원을 잃게 된 것에 분노하여 급기야 두 사도를 고소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매를 맞고 투옥되고 맙니다. (이것은 예상 못한 거예요. 주님이 일을 저질러 놓고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는 것은 바울과 실라입니다.) 사도 일행은 여전히 찬양하며 기도했는데 기적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인의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착고란 두 개의 긴 나무토막을 맞대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한 옛 형구(形具)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망치지 않고, 옥문이 열린 것에 책임을 통감하며(옛날에는 죄수가 탈출하면 간수가 대신 죄수의 값을 치러야 되거든요.) 자결하려는 간수의 생명을 구합니다.】

그 성경구절이 유명한 사도행전 16장 31절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대목이에요. 여러분, 버스 정류소에서 많이 봤지요. 근처 큰 교회에서 돈 주고 붙여 놓은 그거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모든 일련의 과정이요 빌립보에 복음을 전했더니만 거기서 어떤 귀신들린 여자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그것에 화가 난, 장사를 망친 그 무당집이 고소를 해서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히고, 옥에 잡혔는데 기도하고 찬양하니 천사를 통해서 옥문을 열어줬고 죄수들이 탈출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바울과 실라만 감옥에서 안 나갔어요. 나머지 죄수는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다 도망쳐 버렸어요. 남은 것은 바울과 실라와 그리고 탄식하고 있는 절망적인 그 간수만 그 도시의 감옥에 남아있었던 거예요.

그럴 때 사도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니까 그 간수가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건입니다. 이게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의 사슬의 연쇄이겠습니까? 없어요. 이게 환난이고, 이게 곤고고, 고난이고 이게 능욕받음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경험했던 고난과 능욕에 누구를 참여시키느냐 하면, 사도들로 하여금 그곳에 참여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 성령 준 자기 사도를 자신의 피부조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사지, 팔다리로, 손가락 발가락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날 위해서 산다는 것은 날아가 버리고 내게 일어난 그리고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경우도 이것은 자동적으로 다 누굴 위한 일이 되느냐 하면, 주님을 위한 일이 되어버려요. 길 가다가 노상방뇨하는 그것까지 이게 주님의 일이 되어버려요. 내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거예요.

주의 일은 뭐냐? 바로 과거를 절단시키는 거예요. 과거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사람이 힘들게 사는 이유는 과거의 자기를 위해서 살던 인생을 계속 견지하기 때문에 지금이 힘들어요. 성도에게 지금은 뭐냐? 주님의 고난과 능욕에 참여되는 세월들입니다. 그 고난과 능욕에 참여됨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은 아무리 둘러보고 찾아봐도 그게 자기 주변에 남아있지를 않아요. 누가 다 강탈해 갔어요. 다 빼앗아갔어요.

마태복음 25장에 천국 이야기 나오면서 천국이라는 게, 얼마나 이게 설명하기 어려운지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고 네 가지고 모든 비유를 통해서 천국 이야기를 하셨어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가운데서 두 번째 비유, 달란트 비유가 그렇게 어려운 해석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천국은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 하면,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어떤 공장 직원 세 명이 있어요. 주인이 먼 곳에 출장을 가면서(주인의 부재) 공장을 맡겼어요.

첫째 직원한테 다섯 달란트, 두 번째 직원에게 두 달란트, 세 번째 직원에게 한 달란트를 맡긴 거예요. 주인이 없을 때 그 노동을 누가 하느냐 하면, 그 일꾼들이 노동을 하겠지요. 천국은 뭐냐 하면, 그 일꾼들이 한 노동력을 주님이 다시 와서 그걸 갈취해 버려요. 박탈해 버린다고요. 박탈해놓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는 이유가, 이게 네 노동력의 대가가 아니고 내가 거저 주는 것이라고 바꿔서 제공하는 것, 그래놓고 착하고 충실한 종아, 라고 이야기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착하고 충실한 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어떤 노동을 내가 해도 주님이 나를 천국에 넣어준 그 값에 미치지 못함을 절감하는 자만이 천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 자체는 그냥 주님이 나 대신 치렀던 그 피 라는 대가로부터 할당된 거예요. 그 대가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너 거저 구원받았어, 라는 그 단어 안에 내가 일한 것을 도로 빼앗아서 마치 주님께서 나에게 공짜로 거저 주시는 것으로 받는 쪽이 그렇게 이해할 때 그게 바로 천국을 거저 받은 자로서 천국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의식이 있어서,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있어 가지고 ‘이것은 노동하고 안 하고 내 맘대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었어요.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것을 그대로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참혹한 처벌이 주어집니다. 29, 30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게으른 종이 주인이 준 것을 고이 간직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바깥 어두운데서, 지옥이지요, 거기서 울면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님께서는 천국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천국 속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지옥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 말은, 지옥이라는 것은 뭐냐? 천국에 살 수 없는 것을 지옥이라 해요. 천국에 살 수 없는 것. 그러면 천국은 뭐냐? 지옥에 살 수 없는 것을 천국이라 합니다. 방금 제 언급에서 ‘없다’는 부정적 의미를 집어넣었지요.

이렇게 부정적 의미가 들어가 줘야 천국이고 지옥이고 간에 나하고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의미가 살아남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나 빼놓고 천국 지옥을 이미 결정했다는 그것이 유지가 돼요. 왜? 우리는 태어난 자체가 위기니까. 태어나면서 문제성 있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환난이 싫어요. 그저 기도 많이 할 테니까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인생 끝내게 해주세요.’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지금 자기 생각하고 있지 환난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만 해석할 수 있다는 그 해석을 지금 빠트리고 있어요.

주님이 겪는 환난을 빠트려 버리면 그 사람은 천국에 살 수 없는 사람으로 티를 내는 겁니다. 천국에 못가는 사람이 지옥 가고요, 아무리 지옥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그 답답한 사람이 천국 가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 있잖아요. 회삿돈 횡령한 사람. 회삿돈 횡령했는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불의한 청지기가 천국 간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남의 돈 위에서 점프해서 천국 간다, 그 말이에요. 남의 돈 위에서 점프해서. 자기 노동력 아닙니다. 회삿돈이에요. 회삿돈 횡령하고 천당 가는 거예요.

회삿돈 횡령하고 천당 갈 수 있다는 말은 회삿돈 횡령 안 하는 자는 어떤 자다? 지옥 간다. 천국에 참여를 못 해요. 왜?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나쁜 짓 한 적 없습니다.” 이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제가 정리했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타인의 친절에 대해서 호응 안 해도 되는 사람. 이게 천국 백성입니다. 타인의 배려와 친절에 대해서 아무 호응을 안 해도 되는 사람. “하이고, 고맙십더. 뭐 나한테 이런 것을 다 했습니까?” 그런 것 필요 없는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왜? 사람 중심의 세계에 안 휘둘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친절을 받으면 대가를 다시 되돌려 줘야 돼요. 그리되면 이것은 어떤 대가, 서로서로 친절했다는 자기중심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나 잘남을 위해서 사는 게 돼요. 그런 사람은 지옥 갑니다. 저는 우리교회 여러분에게 늘 감사하고 있는데 참 다시 생각해도 여러분에게 또 감사 감사하고 싶어요. 곧 떠날 때가 됐는지 모르지만 말 좋게 해야지요.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것이 뭐냐? 하여튼 오지랖 떨 줄을 몰라요. 남이야 어쨌든 간에 아무 상관 없이 살아가는 이 모습들을 볼 때 ‘참, 천국 백성 맞다.’ 나 너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 지금 비비 꼬는 거 아닙니다. 꽈배기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볼 때 ‘바로 저분들이 제대로 성령 받은 분들 아닌가.’ 지금 놀리는 것 아니에요. 진짜예요. 오지랖 떨 줄을 모르는 거예요. 봉사할 줄 모른다 그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교회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헌금 할 줄도 모르고, ‘하여튼 건드리지 마, 나. 천국하고 나하고 상관없어.’ 이걸 유지를 해주니까요. 처음에 복음 듣고 이걸 유지할까 말까, 얼마나 조마조마했습니까? 그런데 한 10년 교회 다니니까 ‘아, 이 길이 맞다.’ 죽 밀어붙였어요.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 지켜준다고, 의리 지킨다고 예수님 잡혔을 때 칼 들고 설쳤습니다.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잖아요. 그 칼을 빼앗은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오지랖 떨지 마라. 나대지 마. 네가 스승한테 대우한다고 해서 내가 너한테 잘해줄 것 같아? 너는 너 자신이 남한테 친절 베풀고 스승한테 배신하지 않겠다는 너 자체가 너 중심이야 그것은.”

아무리 잘해도 너 중심에서 못 벗어났다는 티를 낸 거예요, 그것은. 사람이 되려면 탕자가 되어야 돼요.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잃어버려야 돼요. 잘난체하고 훌륭하다고 여기는 자기 자신을 놓아 버려야 됩니다. 놔 버려야 된다고.

이것 모르고 복음 안다, 소리 하지 마세요. 하나님 믿지 마세요. 십자가 믿으세요, 십자가! ‘하나님 앞에’ 아닙니다. ‘십자가 앞’이에요.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착해라, 훌륭해라, 그 말씀이 아니에요. 너희는 안 돼, 백날 해도 안 돼, 그것을 증명하는 예수님의 피가 흘러나오고 살이 흘러나온 거예요.

값을 이미 다 치렀다니까요, 값을. 내가 천국 가는 데 모자람이 없도록. 내가 저 영광스러운 천사가 사는 곳에 가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내가 값을 치른 것이 아니고 주님이 대신 값을 다 치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오지랖 떨면 안 돼요. 그 앞에서 선한 인간 노릇 하면 안 돼요. 착한 척, 하면 안 됩니다. 주께 뭐 봉사 많이 했다, 하면 안 돼요.

봉사 뭐 한 사람이 없으니 내가 마음껏 이야기합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요, 여러분이 살아봐서 알지만 아.나.바.고. 운동을 벌여요. 아.나.바.고. 운동이 뭐냐 하면, 아껴 쓰고, 나눠쓰고, 바꿔 쓰고, 고쳐 쓰고. 여러분 이것은 지옥 갈 사람한테만 하라 하세요. 알뜰살뜰 절약 운동. 그거 누구 좋으라고 합니까? 주님 좋으라고 절약합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자기 시집가려고 모아놨던 향수, 옛날에는 그게 재산이었거든요, 그걸 예수님의 존재 앞에 뿌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장례식에 뿌린 거예요. 예수님은 죽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다 뿌린 거예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온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때려 죽어도 안 죽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때려 죽어도 나는 안 죽고 싶은 거예요. 나는 살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이 그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겁니다. 대신 죽으시고 살고 싶은 나, 이걸 과거의 나로 규정하고 나에다 뭘 집어넣는가? 예수님이 이미 해결했음, 이미 죽었음, 죽은 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음을 우리 내부에다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는 안에 있던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깥으로, 표면으로 밀려 올라와요. 속에 있는, 나는 저주받아 마땅함, 나는 주님을 욕했음, 그런 과거, 그런 육신으로 나는 이 땅에 태어났음, 그게 나의 육이었음, 그래서 나는 거기서 못 벗어났음, 과거입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어떤 시도를 해도 나는 내 죄에서 못 벗어났음이 이게 바깥으로 나와요. 생명이 바깥으로 나온다고요.

그러면 나는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나는 그 자체를 복음으로 이해하겠음. 내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병들고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게 바로 주께서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하나의 주님의 작업으로 이해하겠음. 이게 바깥으로 나오는 거예요. 속에 들어 있는 우리의 본성이, 성령이 주신 본성이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 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속옷을 바지 위에 입은 영웅이 있어요. 수퍼-맨. 수퍼-맨은 팬티를 바지 위에 입어요. 그 깊은 의미를 이제 여러분은 아시겠지요.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나는 죽었다, 를 위해서 지금껏 주께서 계속해서 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밥 먹고 살고 있는 거예요. 나는 죽었다, 는 것을 외치기 위해서. 나는 이미 망할 대로 망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절망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망마저 의미 없어요. 나의 절망마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환난, 주님을 경유하는 환난과 능욕과 고난은 도대체 주님이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주님이 끄집어내는 그 출처를 지금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예를 드는데요.

3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해요.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가는데 강도가 와서 옷을 벗기고 때리고 거반 죽게 된 것을 방치하고 갔습니다.

그런 뒤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31-34)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야기의 시작은 뭐냐 하면, 그냥 거반 죽은 자에요. 거반 죽은자니까 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죽었다 하는 이것. 그런데 강도 만나 죽었거든요. 이걸 주님의 환난, 주님이 만드는 천국 백성의 환난과 고난의 시작으로 보는 겁니다.

이걸 확장시켜요. 이걸 전개시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오게 되면 자기 힘으로 자기의 여건과 위기를 해결하려고 시도를 해요. 그것은요, 죽은 게 아니에요. 자기의 과거의 습성에 그대로 매여서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껏 살아온 것이 뭐냐 하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힘든 인생을 겪었을 때 그 결과물로 나는 남에게 대우받아도 합당한 인간이다. 그런 존재다. 나 이렇게 잘 살았어, 라고 내세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줄곧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출발점을 자기 잘났다, 를 용납을 안 해요.

강도가 와서 그 사람을 때렸습니다. 강도가 힘이 세서 대항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 강도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내 인생을 이렇게 조져놓고 망쳐놓은 그 세력에 대해서 내가 나서서 처단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놓이게 만드는 것, 강도 만난 사람, 거의 피 흘리고 죽게 된 사람, 그 사람을 주님 환난에 동참한 자의 스타트, 출발점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볼 때에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네 탓이고, 네 탓이고, 네 탓이고, 네 탓이고……, 이렇게 되잖아요. 그것은 주님의 천국 가는 백성의 시작점하고 달라요. 이게 틀립니다.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악마한테 맞아 죽고 주먹으로 맞아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농락당하고 압박감에 억눌려서 힘들고 맞으면서도 기어이 일어나서 ‘네가 날 때렸어? 내가 성공해서 내가 복수하리라.’ 맨날 복수만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로마서 12장에 이런 말씀 나오잖아요.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말은, “나는 너희에게 부탁한다. 절대로 심판을 네가 갚지 마라. 심판하는 분에게 맡겨라.” 너는 환난과 고난에 동참하는 그것으로 됐어요.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안 돼요. 우리가 그럴 잽이 안되고 그럴 권리가 없어요. 그런 자격이 안 돼요. 하나님 욕하는 것이 주특기인데 뭘 ‘하나님, 날 지켜주옵소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옵니까?

제가 교회 오랫동안 다닌 나이 70대 중반인 어느 집에 갔었어요. 유아세례 받을 때부터 한 번도 교회 빠진 적이 없는 충실한 사람인데 방에 뭐가 있느냐 하면, 빈 노트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노트는 보통 문방구에서 파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물품 파는 곳에서 산 것 같아요. 페이지 수만 적혀 있고 줄만 그어져 있어요. 노트가 금박으로 되어있고 페이지 수가 천 페이지가 넘어요.

그 빈 노트가 한 장 한 장 구멍을 뚫어놓은 바인더 노트로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 빈 노트에 적어 놓은 것이 있어요. 이사야 922페이지 그 대목의 성경을 적어놓은 게 있었어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시겠지요. 성경책 보고 성경을 그대로 적는 거예요. 치매 예방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을 그대로 쓰는 건데 성경 쓰기 전용 노트를 팔아요. 한 페이지 써서 철하고 또 한 페이지 써서 철하고요. 그렇게 되면 성경과 페이지 수가 동일하게 되는 거예요. 그대로 쓰면 되니까.

그걸 보고 제가 제일 먼저 떠오른 노래가 있었어요. 유 미리가 불렀던 <젊음의 노트> “내 젊음에 빈 노트에~” 키가 155센티미터의 단신가수거든요. 제 2의 이선희라고 라이벌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는데요. 그 가사가 “그 젊음에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저게 바로 지옥 가는 인생이다, 저게! 나의 빈 노트에 깨끗하게 괜찮은 것으로 채우겠다는 거예요. 나의 빈 노트에! 참~, 주님은 그것이 옛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 욕을 할 수밖에 없는 동기를 부여하는 옛생활이에요. 괜찮은 것으로 내 인생을 채우겠다는 거예요.

아까 무슨 운동? 아.나.바.고. 운동. 아껴 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고쳐 쓰고. 항상 자기절제와 자기관리, 철저함, 그 무게 어떻게 하~ 그 인생의 무게를 여러분, 그 삶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남한테 오지랖의 오지랖은 다 떨고요. 태극기 흔들고요.

불의한 청지기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불의한 자금을 착복해서 천국에 골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불의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어요. 불의를 감내해야 될 이유가 나 자신이 불의하기 때문이에요. 딱 죽이 맞아요. 딱 죽이 맞다고요.

수학에 보면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뭐냐? 밧줄로, 지구라든지 모든 사물을 끈으로 상상해서 묶어보는 거예요. 밧줄로 묶어 버리면 그래서 밧줄을 잡아당기게 되면 결국 하나의 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푸앵카레라는 그 19세기 수학자의 추측은 뭐냐? 이 우주라는 것은 결국은 지구에서 밧줄을 우주 끝까지 쏴서 그물 당기듯이 다 끌어당기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그것이 우주일까, 하고 추측해 보는 거예요. 모든 세상 모형은 그게 뭐가 되었든 그 안에 담겨서 다 끌어당길 수가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예외가 있어요. 뭐냐? 안에 구멍이 있으면 밧줄이 그 구멍에 딱 걸려서 통합체가 되지 못하는 거예요. 구멍이 있다면 말이지요. 밧줄에 다 모아 걸어서 우주를 다 끌어당긴다고 푸앵카레는 추측을 했는데 만약에 구멍이 생겨버리면 그것은 실패로 끝나는 거예요.

도넛 같은 경우에는 안에 구멍이 있어서 밧줄을 걸어서 한쪽을 당겨도 다른 쪽은 못 당겨요. 당긴다는 말은 도넛을 당긴다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걸어 놓은 밧줄을 좍 조여 버리면 하나의 점이 되는 것인데 도넛 같은 경우에는 실패한다는 말이지요. 전체를 다 못 당기니까, 구멍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우주에 과연 구멍이 있을까, 없을까? 그것은 푸앵카레의 미래에 아인슈타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걸 증명한다고 애를 많이 썼어요. 그런데 우주는 빅뱅으로 되어서 전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행합니다. 찢어버려요. 구멍을 생기게 한 거예요. 내 마음이라는 것은 내가 알아서 나에게 모을 수 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이게, 성령으로 십자가 구멍을 뚫어놓은 사람한테는 이게 실패로 끝나요.

주님께서 로마서에서 그런 이야기하고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할 때 육체의 할례를 행하지 말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마음을 찢어버려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북을 칼로 찢어버리면 특징이 뭐냐? 찢겨진 북은 자기 소리가 나지를 않습니다. 주님한테 십자가로 찢어져 버린……, 저 뒤에 십자가 달렸거든요. 전부 다 한번 찢어볼까요? 저 뾰족한 것 가지고. 십자가로 우리의 마음을 찢어버리면 더이상 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내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상태를 주님께서는 나의 환난에 고난에 참여한 나의 최후의 백성이라고 규정하는 거예요.

남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타인들은 찢겨진 게 없어요. 백날 이야기 두 시간 동안 팥빙수 먹으면서 해도 결국은 자기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 이야기로 끝나요. 그냥 끝나는 것 아닙니다. 역시 나는 내 인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노라. 뭐 이런 거요.

이제 마지막 인생의 커튼을 내린다 해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온 거에 후회가 없다. 전부 다, 술집에 가도 어딜 가도요. 물론 가본 적 없습니다만, 모든 이야기가, 모든 예능프로, TV의 모든 이야기가 ‘나 잘 살았다. 제발 나 건드리지 마라.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애썼다.’ 단 그 하나에요. 안에 찢어진 것도 없고 안에 구멍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보세요. 어떻습니까? 주님이 와서 찢어놨지요. “사도바울 너 어떻게 살았나?” 하니까 사도바울이 아주 가볍게 이야기합니다. “나 죄인 중에 괴수. 아, 즐겁다” 끝났어요. 심지어 악마가 나한테 병을 준다 할지라도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됐네 이 사람아. 그게 너한테 족해. 너는 병이 들었든, 뭐가 들었든, 어떤 환난을 당했든 그것 자체가 너 복 받은 줄 알아라.”

왜냐하면 그게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천국을 만드시는 천국의 백성다운 체험이니까. 삶의 체험이거든요. 날 위해서 사는 것을 주께서 날마다 용납을 안 해주니, 날마다 찢어버리니 세상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도록 주께서 친히 이끌어준 것.

이 땅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습니다. 남의 평가 신경 쓰지 마세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습니다. 누가 나보고 돌을 던져요? 아무도 없어요. 괜히 쫄지 마세요. 주눅 들지 마세요.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욕 얻어먹어도 괜찮아요.

환난이란, 연못에, 비단잉어가 놀던 연못에 물이 다 빠진 상태가 바로 환난 상태에요.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 그것. 그래야만 비로소 주님의 환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비단잉어 연못을 이야기하는 것은 남원에 가봤거든요.

남원에 성춘향 그네 타던 곳에 가 봤어요. 성춘향은 보이지 않고 비단잉어 연못만 있었어요. 생각했습니다. 저 비단잉어가 싱싱한테 저 연못의 물이 다 빠지면 어떻게 될까? 물 빠지면 펄떡거리면서 죽는다고 하겠지요.

바로 성도는 이 땅에서 아무런 영양분을 원치 않는 것, 남들의 칭찬과 남들의 호응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마른 땅의 잉어처럼 이미 우리의 죽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때 그것이 바로 생명이, 예수님의 천국의 피와 생명이, 피와 용서하심이 그 사람에 들어앉아 있는 하나님의 천국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똑바로 보게 하옵소서. 너무 주눅 들고 살지 않게 하옵소서. 아무도, 날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진즉 몰랐습니까? 탕자되어야 마땅하고 불의한 청지기 되어야 마땅함을, 그것이 얼마나 나의 숨겨놓은 본질인지 깨닫는 그 기쁨을 저희들 주님께 감사하면서 만끽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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