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왜상

아빠와 함께 2021. 10. 11. 10:29

왜상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마음은 그 어떤 타인이 와서 꿈쩍도 하지를 않습니다. 지극정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마음이 바뀌어 새 사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도 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데 있어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평소에 관게맺는 사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악마는 인간을 채찍질하여 멸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인간의 표면의 껍질을 찢듯이 뜯어보면 그 내부는 난리도 아닙니다. 이것이 현재 인간들의 형상(DNA유전정보)를 받은 인간들의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형국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모든 인간들을 무덤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든 아니든, 복음을 알든 모르든 모든 자들을 세상에서 제거하고 무덤만 남기려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이 지상에서 형성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님의 형상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의논했고, 이 작업을 위해 인간들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즉 인간의 창조마저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기 위한 사전 절차였던 겁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위함’으로 설계된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 옛 사람을 사라지게 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간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그 모델로 예수님 자신이 나서신 겁니다. 새 사람의 모델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서 그 원형을 제시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죽이시는 것을 섭섭해하시면 아니됩니다. 당연한 절차에 따른 조치입니다. 이런 작업에 대해서 인간들은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소위 ‘반항하는 인간상’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신에게 벌을 받더라도 묵묵히 수행하면서 벌을 내리시는 신을 비웃을 권한은 인간에게 여전히 살아 있음을 강조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욕망하는 인간’입니다. ‘욕망하는 인간’은 자꾸만 뭐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들여놓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랑거리가 메마르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로 인하여 자랑거리가 생겨나기를 원합니다. 이는 곧 홀로 사는 방식에 더욱 철저히 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온갖 좋아 보이는 것들은 다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십자가 피, 언약, 하나님 주권사상, 거룩하게 살기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홀로 살기’에 해당됨을 그들은 모릅니다. 이미 홀로 살기란 예수님께서 독점해 놓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예수님의 홀로 살기로 인해 파생된 형편에 있습니다. 성도는 일종에 예수님으로 인한 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 배열과 조합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마치 무지개와 같습니다. 액체인 물의 막에 부딪혀서 되반사되는 빛과 막을 통과한 빛 사이에 보강 간섭 현성이 일어나서 각자 파장이 다른 것들끼리 나란히 배열해 있는 것이 바로 무지개로 나타난 색깔들입니다. 인간에게는 표면과 내부 사이에 막이 형성되어 있었던 겁니다.

표면은 욕망으로 작렬하고 내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힘들어합니다. 여기에 각각 빛이 튀고 또 반사하게 되면, 매일같이 주님을 원망하면서도 내부로 침투하는 성령의 빛에 의해서 성도는 자신이 이미 무덤 안에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안에 주님의 거처가 있음’을 깨닫고 주님께 감사합니다.여기서 기쁨이 생겨나는데, 이 기쁨이란, 주님께서 자신의 주되심에서 느끼는 그 기쁨의 수준에서 퍼진 기쁨입니다. 즉 자기 안에서 여전히 주님이 주되심의 작업이 일어나고 있다는 그 기쁨이요 이미 모든 것이 완료된 기쁨입니다. 천국은 이처럼 주님이 주신 것들로 인해 형성되는 겁니다.

이를 통해 성도는 자신이 평생 노고를 다한 그 노동력이 주님에 의해서 깡그리 무시당하는 점을 도리어 기뻐하게 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데서 일어나라!”라는 말씀(엡 5:14)이 매일같이 새롭게 경험되기 위해 성도는 하루하루 목숨을 제공받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늙어 죽어가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벌리시는 주의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강-데살로니가전서 2장 9-12절(왜상) 211010 - 이 근호 목사

인간은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델이 되는 겁니다. 창세 전에 예수님이 하나님하고 의논한 내용이 뭐냐 하면, 인간을 만들어놓고 기존의 그 인간을 전부 다 취소시키고 새로운 인간을 만들자, 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게 되면 거기에는 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배열, 조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형성되지 않고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지고 난 뒤에 악마로 인하여 유혹받아서 인간이 죽게 되고, 죽고 다시 살게 될 때 여기서 과정이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죽었는데 생겨났다. 죽어 없어졌는데 생겼다.

그 과정이 무슨 형상이 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의 형상도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형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죽고 부활한 것을, 그것을 하나님은 순번상 제일 뒤쪽에 위치해놓고요, 앞쪽에서는 장차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오셔서 어떤 식으로 죽고 어떤 식으로 부활 되느냐, 그걸 통해서 예수님이 주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앞 순번에 인간을 배치해놓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태어나게 해서, 죽는 이유까지 다 설명해서 거기서 어떻게 그들이 영생을 얻는가, 그 과정을 뒤에 오시는 메시아에서 뻗어 나가는, 하나의 유튜브 동영상처럼 미리 앞당겨서 펼쳐놓은 거예요. 모든 것은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이 원대한 파노라마를 위하여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만들어놓고 악마로 하여금 유혹되게 하신 거예요. 인간에게 있어서의 악마의 관계는 뭐냐? 주님께서 보여준 것은 악마와 돼지 관계입니다. 귀신들린 청년이 왔을 때 악마가 청년 대신 이야기를 해요.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왜 일찍 왔습니까, 우리가 멸망한 것은 당연한 데 일찍 오신 이유가 뭡니까,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귀신보고 돼지 속에 들어가라 했어요.

돼지 속에 들어가니까 돼지들이 집단자살을 하는데 들에서 놀던 돼지가 바다에 뭐 찾을 것 있다고 우르르 떼쓰리로 바다에 달려들어 다 몰살했습니다. 이것은 돼지의 안쪽에, 돼지의 그 혼 부분에 또는 마음 부분에 뭔가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에너지가 생긴 거예요.

악마에 들린 인간상은 바다로 내리달아 몰살당하는 그 돼지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이 딱 맞아요. 악마를 뒤집어쓴 인간의 운명은 인간 내부에 지금도 죽음으로 질주하는 에너지의 함성이 있습니다. 악마가 채찍질하고요.

참 세상 산다는 것이 절로, 한숨 소리가 절로 나요. “아, 죽겠다, 죽겠어.” 예 맞습니다. 죽으러 갑니다. 그러니 인간 내부는요, 난리도 아니에요. 악마와 인간이 결탁했습니다. 아담과 뱀이 결탁을 했어요. 결탁을 하게끔 그렇게 하나님께서 유도하신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의 형상인 이 사도 일행과 이 데살로니가의 인간의 형상, 인간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어떤 내용의 결과를 내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가?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을 한 겁니다. 복음을 알든 모르든 인간은 죽어갑니다. 인간을 죽게 만드는 이유는 모든 것을 다 지워 버리고 삭제하고 오직 무덤만 남게 하는 거예요.무덤은 뭐냐? 모든 인간의 형상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이미 인간의 형상은 고장 난 형상이거든요. 죽을 수밖에 없는 형상입니다.  
무덤에 가게 하고 그다음에 무덤에 있는 자 중에서 성령을 통해서 거기서 부활 될 자를 따로 부활시키는 겁니다. 내 형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요, 이제는 하루하루 사는 게 주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주님 가신 그 코스로 데려가기 위해서 주께서 절대로 내 뜻대로 이 인간의 형상,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죽어야 될 인간이 곱게 고분고분 죽으면 될 일을 뭘 악바리로 기도해서 내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뭐 자식이 어떻게, 남편이 어떻게, 아내가 어떻게, 사업이 어떻고, 교회가 부흥되게 하옵소서, 왜 쓰잘때기 없는 그런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과 예수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네 그 질문조차 다 벗길 거야. 질문조차 벗길 거야.” 하나님이, 예수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것조차 벗겨버려요. 그걸 마음의 할례라고 하는 겁니다. 껍데기를 벗겨야 안의 내용물이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숨어 있는 내용물이요.

인간의 표면이라 하는 것은 겉모습은 아담을 닮았기 때문에 이게 하나의 인간의 형상, 아담의 형상을 그대로 우리는 DNA로 분배받은 겁니다. 전달, 전달받은 거예요. 창세기 9장에 무지개가 나오는데 무지개가 굉장히 아름답지요. 굉장히 아름다운데 사람들은 그것을 아름답게 보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무지개라 하는 것은 빛이 수증기 막에 도달해요. 막에 도달해서 막에서 먼저 반사되는 빛이 있어요. 그다음에 막을 투과해서 투과한 그 상태에서 그 안에 있는 빛이 있어요. 반사된, 튕겨 나오는 그 빛과 막을 통과해서 그 안에 있는 빛과의 보강간섭이 색들의 파장으로 조합을 이뤄요. 배열을 이루는데 파장마다 배열을 이루니까 빨주노초파남보 아름다운 색이 된 겁니다.

무지개는 이 세상에 막이 있다는 것을 빛으로 증명한 거예요. 주님이 빛으로 오게 되면 무지개처럼 오는 겁니다. 와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믿으면 되고 만나서 같이 식사하면 그것으로 구원된 것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면 천당 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막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게 돼요.

막이 있어 버리면 이것은 간섭작용이 있어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인간의 형상으로 보고자 하는 그 형상이 나타나지 않고 얼룩덜룩한 간섭효과가 나타나거든요. 간섭효과. 물위에 뜬 기름을 보게 되면 색깔이 이상하게 무지개 색깔 같은데 얼룩덜룩해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늘 요동치고 있잖아요.

그처럼 우리 인생은 주님이 와서 간섭하니까 내 내부에 있는 아담의 형상과 내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예수님의 형상 사이에 간섭 효과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인간 내부의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악마의 입장에서 볼 때, 돼지 같은 처지에서 세상을 볼 때에 예수님은 내 소원이나 들어주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왜상이라 하는데요. ‘오’에 ‘ㅏ’ 에다 ‘ㅣ’를 붙여서 왜상(anamorposis, 歪像) 어떤 지점에 도달해서 정상적인 그림으로 보이는 것 이걸 왜상이라 하는 거예요. 어떤 지점에 도달해야. 십자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저 십자가 피가 내 죄에 묻으면 내 죄는 씻겨서 나는 의인이 된다’라고 누가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의 형상으로 무장된 돼지 같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그렇게 이용하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왜상입니다. anamorposis에요. 왜상이에요. 잘못 본 거예요. 이것은 종교적 욕망이에요. 아까 기도하신 분도 그런 내용으로 기도했습니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언어라는 것이 그냥 우리는 순수라고 생각하고 그 언어가 순수하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언어를 내가 해석하면 순수한 결론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내 마음이 순수하지 않습니다. 돼지예요, 이것은.

순수하지 않은 마음이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얼씨구나 좋다고 “피로 구원받습니다” 하고 “구원받을 사람 손들고 나오세요.” 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집에 다시 돌아가. 뭘 손들고 나와. 인간의 겉, 아담의 형상인 겉은 어떤 인간이냐? 욕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욕망한다는 것.

아담의 형상이 악마의 마음과 결탁되었기 때문에,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니 당신 간섭하지 마, 성경 들고 밀어붙이지 마, 교회 가더라도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욕망하는 인간, 욕망하는 인간이 평소에 세상과 만나면 뭘 하느냐 하면, 반항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이 반항하는 인간을 신화적으로 아주 잘 묘사했어요. 시지프스라고 했는데. 그 시지프스 이야기가 뭐냐? 신에게 벌을 받았어요. 벌을 받는데 신이 어떤 벌을 줬느냐? 바위를 낑낑거리면서 굴려서 높은 산에 올라가요. 올라가서 ‘이제는 신이 내린 벌을 다 받았지’라고 할 때 어어어어, 저쪽 편으로 바위가 굴러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면 신이 “다시 처음부터 올려야지” 그러면 다시 낑낑대면서 올라가요. 여기서 인간이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신이 나에게 어떤 벌을 주어도 나는 묵묵히 감수하면서 나는 신을 비웃을 거야.’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래. 나한테 벌줘, 벌줘. 지옥 보내, 지옥 보내. 지옥 보내도 당신은 날 지옥 보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나한테 벌 내리는 신을 비웃을 수 있는 그런 자유는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이걸 반항하는 인간이라 해요. 이걸 주체적 인간이라 합니다.

교회 와서 성경 배우니까 성경을 달달 외워요. 신학까지 공부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지금 반항하는 중입니다. 반항하는 중이에요. 신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거예요.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하고, 다 하는 거예요. 선교하라면 선교하고. “됐냐 씨!” 뒤에 ‘씨’가 붙어요. 비타민 c 있잖아요. “됐냐!”

주님께서는 마음의 할례를 하라는 말은 표피를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낸다는 말이 적당해요. 이게 안 벗겨져요. 이걸 뜯어내는 거예요.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인간 자기를 뜯어내는 것이. 뜯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 욕망하는 나, 악마로부터 욕망하는 나는 결국은 뭐냐? 나 혼자 살고 나 혼자이고 싶은 거예요. 악마가 하나님께 대들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제발 나는 신처럼 나 혼자 독자적으로 살고 싶다. 그게 오늘날 현대인뿐만 아니고 옛날에도 인간의 기본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냥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혼자. 신이고 예수고 그냥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뭔가 인간에게 잘해준다면 오케이 받아줄게. 받아주지만 내가 혼자 살고 싶은 여기에 대해서는 신의 이름으로 이걸 건들지 마세요. 나 끝까지 혼자 살고 싶을 테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접근했고 너희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말은 사람은 조합을 이뤄야 되고 배열을 이루는 것이지 그렇게 혼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혼자서 버티는 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했어요. 하나님께서 의논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 때 그 모델로 나선 분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예수님 본인이 “내가 나설게요.” 예수님이 이 땅 지상에 오셔서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인간,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새로운 모델의 아담으로서 예수님이 이미 확정 났어요. 그분은 이 땅에서 죽었다가 부활됨으로서 새로운 인간도 죽었다 부활 된 인간만이 새로운 인간이라고 확정 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외에 사도바울이나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교인들은 뭐냐? 거기서 파생된, 즉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난, 생산된 자들의 배열이 되어야 되고 조합이 되어야 돼요. 예수님은 단수지만, 하나지만 인간들은 다수여야 됩니다. 성도는 절대로 나 홀로 산다는 것은 여기서 삭제되고 제거되어야 돼요.

왜? 그동안 인간이 무덤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나는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나 홀로 살겠다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가 무덤으로 몰리게 했거든요. 그래서 현재 무덤에 안 가도 우리는 이미 무덤에 있어요. 어차피 무덤에 갈 거니까. 물론 무덤치고는 약 한 35평 내지는 40평, 50평짜리 무덤이지만 어쨌든 무덤이에요.

그걸 물리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좀 어렵게 말씀드릴게요. 보통 물리학에서 수의 개념과 양의 개념을 나누는데 수의 개념은 뭐냐 하면, 카운트가 돼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렇게 카운트가 되는 것은 수의 개념이고, 공간은 수의 개념이 아니고 양의 개념이라는 겁니다. 카운트가 되지 않아요. 시간도 마찬가지고요.

공간, 시간은 하나, 둘, 이런 식으로 내 것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속해 있는 것, 어떤 양에 속해 있는 거예요. 필드거든요. 어떤 장(場) 속해 있는 것은 수가 아닌 거예요. 양의 개념이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이 우주 공간에서 태어났고 시간은 흐르는 시간 중의 일부, 어떤 순간에 태어났으니까요. 이것은 우리 맘대로 잡을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이미 시공간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욕망하는 인간은 계속 반항하는데 욕망하는 인간의 특징은 뭐냐? 계속, 계속해서 뭔가 자꾸 들여놔요. 들여놓는다고. 치매 걸린 할머니가 맨날 쓰레기통 뒤지고 스티로폼 들여놓는 것처럼 자꾸 들여놔요.

욕망의 특징은 그런 겁니다. 세탁기 들여놨습니까, 냉장고 들여놨습니까, 자꾸 집안에, 보디프랜드 안마기 들여놨습니까, 계속해서 믹서기, 에어프라이, 그래서 집안에 둘이 사는데 점점 비좁아요. 너무 뭘 들여놔서. 욕망하는 것을 끌어모으는 거예요. 왜 욕망은 끌어모으냐 하면, 내 자아는 끊어지지 않고 연속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연속적인 것과 불연속성인데 연속적이라 해서 계속 끊어지지 않는 것, 끊어지지 않는 것, 현재에 미래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 그걸 하나의 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연속적이라 해요. 그런데 불연속적이라 하는 것은 가다가 절벽이 나오는 것, 가다가 구멍이 나와서 구멍에 빠지는 것.

그러면, 구멍에 빠지면 그 순간 내 인생은 거기서 끊어지지요.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다 불연속을 집어넣었습니다. 연속이 아니고 불연속. “중간에 푹 꺼져버려라. 싱크홀처럼 꺼져버려라.” 이걸 가지고 마음의 할례라고 이야기합니다. 할례라는 것은 표면을, 껍데기를 벗겨버려야 날 것, 속의 날것이 나오는 것을 할례라고 이야기합니다.

네가 너답게 되려고 표면에 그려놓은 너의 인생. 전에 했잖아요. 유 미리가 불렀던 그 노래 “내 젊음에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하는 그 노래. 그 채운다는 그것, 일기장, 나의 일기장. 어떤 노인네 나이 80이 넘었는데 아직도 일기 쓰는 80 노인 봤어요. 그거 왜 쓰는지 모르겠어요. 무덤에 갈 것인데. 마지막 일기는 “난 곧 무덤에 간다.” 마지막 일기장이 그거예요.

그 껍질을 벗겨버리는 거예요. 왜? 그 껍질에 내 자랑거리, ‘힘들지만 이만큼 산 것도 얼마나 멋진 인생이냐, 얼마나 멋진 인생이냐’ 인간이 사는 것은 자랑거리 끌어모으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술 먹고 싶어서, 핑계 삼아서 자꾸 친구 끌어모으는 이유는 친구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서. 자기 집에 마누라한테는 씨도 안 먹히니까 친구 만나서 자랑하려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벌교에서 주먹 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이게 뭐냐? 일제시대 때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 여수항에 많은 돈이 풀렸거든요. 요새는 벌교의 꼬막자랑 해야돼요. 사람은 자랑거리 없으면 곧 우울증 내지는 자살 준비합니다. 자랑거리 없을 때 하나, 둘, 요이 땅! 완전히 크레용 팝 노래하듯이. 사람이 사는 보람은 자랑거리 없으면 풀이 죽어 있어요.

매일같이 하나님한테 신세 지잖아요. 햇빛과 공기, 매일같이 남으로부터 신세는 옴팍 다 지고 있으면서 매일 사는 것이 인상은 인상대로 다 그리고 있어요. 이게 무슨……, 가관입니다, 가관. 혜택은 받으면서, 은혜는 받으면서 인상은 그리고, 뭐, 뭐하자는 이야기입니까? 반항하고 싶은 거예요? 왜 내 뜻대로 안 되느냐고 지금 하소연하는 겁니까?

카운트를 항상 나를 1번으로 쳐서 카운트해서 문제에요. 천국은, 이 카운트 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카운트를 해야 천국을 만나는가? 제일 순번을 제일 뒤쪽으로 해야 만난다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천국은……” 이라고 시작해요. 20장 1절에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천국을 설명하는데 천국은 살기 좋다, 아름답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천국 가려는 너로 말미암아 지금 왜상, 완전히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왜곡된 것을 풀어야 돼요. 이 표면의 껍데기를 벗겨야 돼요. 무덤에서 봐야 천국이 보여요. 무덤에서.

자기 자랑거리, 주먹 자랑, 인물 자랑, 돈 자랑, 그래서는 천국이 안 보입니다. 완전히 덮었던 그 껍데기를 벗겨내야 돼요. 그래야 천국이 보입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해놓고 포도원의 네 명의 일꾼들을 소개합니다. 아침 10시에 온 사람들,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마지막 퇴근 시간 한 시간 앞두고 온 오후 5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하고 먼저 주님께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루 품삯을 그 일꾼에게 줘요. 요새 남자 같으면 하루 10만 원쯤 되겠지요. 하루 품삯을 준다고요. 제일 끝에 온 사람에게 품삯을 먼저 줬어요. 순번이 제일 끝 사람, 제일 마지막에 포도원에 일하러 온 사람. 마지막에 온 사람이 돈 십만 원 받고요, 막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요.

“주인님, 왜 이러십니까? 주인님께서 지금 내 노동력을 완전히 개무시합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좋은지요!” 이런 식으로. 한 시간 밖에 일 안 했는데 하루 품삯을 주니까 이 개무시당하는 이 기쁨, 이 기쁨이 성도가 하루하루 살아야 될 레벨의 기쁨이에요. 성도가 왜 사느냐? 천국의 원리를 지금 나한테 현실화시키는 데서 오는 기쁨으로 살아야 돼요.

천국이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고 천국이 이미 나를 참여시켜서 나를 통해서 천국의 무지개빛이 비취듯이 천국의 그 모습을 보이는 그 기쁨으로 살아야 돼요. ‘내가 무지개색을 보일 정도로 그렇게 깔끔 떠는 그런 유리알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나를 통해서 천국이 이렇게 오색빛깔 아름답게 비취게 하십니까?’ 그 기쁨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한 성도의 기쁨이어야 돼요.

지난 시간에 했듯이 사도는 이것 때문에 자기 목숨을 다 줘버리는 거예요. ‘내 목숨이 달아나도 천국의 빛이 나온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 온 사람에게 품삯을 줄 때 첫 번째 온 그 직원은 오만 인상을 다 그리고 있어요. “왜 저에게 하루 품삯 밖에 안 줍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면 너 며칠 일했는데? 이틀 했나? 사흘 했나?” “하루입니다.” “하루 했는데 하루 품삯 줬잖아.” 그러니까 첫 번째 온 사람이 “그러면 저 사람은요?” 주님께서 “내 포도원이다. 내 포도원에서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왜? 나는 너하고 약속했잖아. 하루 품삯 준다고. 저 사람에게 뭘 주든 이 포도원은 내 포도원인데, 내 포도원이라 내가 알아서 주는데 네가 왜?”

그러면 첫 번째 왔던 그 노동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내 노동력을 개무시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 끝에 온 사람하고 똑같이 이야기하네. 그런데 저쪽은 굉장히 그 개무시당함을 기뻐하고 너는 인상 그리고 있고. 그래서 이게 바로 천국이야. 천국은 지옥이 없으면 설명될 수 없는 게 천국이다.”

천국은 천국 가는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지옥 갈 사람이 누구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반항하는 인간이에요. 반항하는 인간입니다. 대드는 인간입니다. 왜 내 자랑거리를 싸그리 말살하느냐고. “내가 인생을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내 자랑질하려고 살았는데 왜 그걸 짓밟습니까? 나는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고 이렇게 가정을 잘 일으켰는데 도대체 왜 하나님 당신은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이런 식으로 대드는 것, 그게 바로 포도원 비유입니다.

제가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만 마태복음 20장 14-16절에 보면,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이 막으로 이미 돼지처럼 마귀에게 채찍질 당하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막 밑의 어두움 속의 세상이면서도 성경을 백 독을 하고 천 독 하면서 이 땅에 고생은 하지만 그래도 죽어서는 천국이 있으니까 위로 삼자, 라는 식으로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인간, 반항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것을 노출 시키지 않고 사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노출하지 않는 사람을 충분히 이용해서 얼룩덜룩한,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왜곡되고 왜상된 성경 말씀인데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 뭔가 의미가 풀리지 않는 의미로서 다가와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평소에 자기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이 덥석 문 겁니다.

십자가 물고, 예수님 물고, 계속 자기 집에 들여놓는 거예요. 우리 집에 십자가 있다, 내 안에 하나님 있다, 이렇게 계속 들여놓는 거예요. 자기 집에 무조건 들여놔서 나는 이런 것도 안다. 예수도 알고, 십자가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교회도 다닌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겁니다. 자기는 손도 안 대고요.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바로 악마의 삶입니다. 왜? 결국은 남는 것은 뭐냐? 하나님을 믿는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자기 마음을 믿지요. 자기 마음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예수를 믿는 내 마음을 믿는 거예요. 결국 자기 마음 하나로 카운트 되는 겁니다.

기타를 칠 때 처음에 초짜들은 앞부분에서 놀거든요. 손가락 가지고 키 잡는데 마디가 넓은 곳이 손가락이 덜 아프니까 주로 앞부분 마디에서 노는데 좀 치는 사람은 뒷부분에서 앞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치거든요. 그게 가능한 것은 기타 줄이 여섯 줄입니다. 여섯 줄인데 제일 낮은 소리 나는 줄이 여섯 번째 줄이고 제일 높은 소리 나는 것이 첫 번째 줄입니다.

낮은 소리 줄의 음계하고 높은 소리 나는 줄의 음계가 똑같아요. 파부터 솔라시도……, 이렇게 파부터 시작하거든요. 도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에요. 기타는 파부터 시작해요. 첫 번째 줄과 여섯 번째 줄이. 그러면 그 중간에 있는 네 번째 줄은 뭐냐? 그 파부터 시작한 음계가 두마디 지나서부터 또 파부터 시작 된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기타 기판을 외울 때에 혼자 이것은 파, 솔, 이렇게 외우는 것이 아니고 같이 연계해서, 조합을 이뤄서, 연계해서 배열을 이뤄서 기타를 배워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자재로 기타를 칠 수가 있는 겁니다. 연계를 해줘야 돼요.

사도바울이 나 구원받았다, 나 천당 간다, 나 너 몰라, 가 아니라 계속 같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모집하고 찾아가고 만나야 될 이유가 기타에서 손가락으로 하나의 현만 집는 것이 아니고 여러 현을 집어야 화음이 나오고 그 화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혼자 도 닦는다고 십자가 복음 나오는 게 아니에요. 연계하고 조합을 이뤄야 돼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는 그 파장들이 조합을 이루잖아요. 연결시킨다고요. 이렇게 설명해도 잘 이해가 안 되세요?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을 설명할 때 “오후 다섯 시에 한 시간만 근무하고 품삯 줄게” 이러면 천국이 설명이 안 돼요.

주님은 나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천국을 설명하고자 여러 사람들을 조합되라고 불러 모은 것이고 그 다수, 여럿, 일종의 장이지요, 1, 2, 3, 4가 아니라 하나의 장, 공간처럼, 시간처럼 하나의 새로운 장을 형성하는 것,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신약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있어요. 아담의 형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구약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로는 뭐냐? 하나님은 인간을 바라볼 때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일단 전부 다 죽이겠다는, 심판하겠다는 전제를 깔고, 그런 시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인간들을 보고 계셨다는 겁니다. 일단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 올라갈 때에 밑에서 아론의 지도 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잖아요. 우상 섬긴 그것을 뒤늦게 와서 닦달 내시면서, 책임 추궁하면서 거기서 무려 3 천명 죽였습니다. 죽일 때 하나님이 벼락 내려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했어요. 형제가 형제를 죽이게 했다고요. “어? 네가 형제인데 나를 죽이느냐?” 이렇게 섭섭해 하면 안 돼요.

인간은 원래 태어난 것 자체가 왜 죽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니까요. 너무 마음 섭섭하게 갖지 마세요. 인간을 죽인다고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악마는 자극받아서 자기의 본체를 드러냅니다. 평소에 인간은 악마의 단말기, 모니터예요. 악마가 어떻게 활동하고 인간을 어떻게 변조시키느냐 하는 것은 인간은 단말기니까, 그 모니터를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남은 죽어도 나는 절대로 죽지 않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죽일 때 참 인간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악마의 마음을 품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어떤 일도요, 인간의 입장에서는 참 답답하고 억울한 일들만 주어지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출애굽기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3 천명 죽일 때 그 3 천명 죽이겠다는 그 기준은요, 인간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으로 보인 그 이스라엘의 백만이 넘는 그 사람들 속에는 어떤 기준도 본인이 죽어야 될 기준은 찾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사람들 모였을 때, 예를 들어 동창회 모였을 때 또는 친구 계 모임 때 거기에 규칙이 있잖아요. 이 모임은 경북여고 모임으로 한다. 32회 동창회로 한다. 해놓고 그다음에 나오는 그 법들, 회장과 부회장과 총무를 임원으로 한다. 이런 자체적인 규칙을 만들잖아요. 그렇게 해놓고 “따라서 이 모임에서 이런 것을 하면 우리는 죽인다.” 이런 것이 있습니까? 동창회가 뭔데 사람을 죽여요? 요새는 사람 죽여도 사형도 안 당하는데, 사형 선고 해 놓고도 감옥에서 사형 안 시키고 내버려 두잖아요.

인간은 인간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남을 해치면 언젠가는 나에게 돌이 날아오기 때문에 남 생각하지 않고 나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는 겁니다. 전쟁을 하든지 그런 경우 외에는요. 인간의 규칙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율법은요, 그냥 죽여요. 특히 신명기 21장에 보면, 어떤 집에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든 자식이든 딸이든 부모 말 안 듣거든 부모가 그 고을의 연로하신 장로님들에 내놓으면 장로님들이 알아서 딸이든 아들이든 알아서 죽여줄게. 그 법이 나와 있어요.

신명기 21장 18절에서 21절까지요.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그냥 죽이지 말고 돌로 쳐 죽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나는 도대체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 저는 성경대로 살아요.” 하는데 저분이 지금 성경을 모르니까 저런 소리 하는 것이지 성경대로 산다는데 그러면 신명기 21장의 이것은, 이게 가당키나 한 겁니까? 말을 너무 함부로 해요. 성경은, 네가 어떤 노력을 해도 성경 못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성경은 인간들의 집합에서, 모임에서 만든 규칙이 아니기 때문에, 동창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늘나라 동창회, 예수님과 함께 동창회지 이 지상의 동창회에서 만든 규칙이 아니에요. 주님의 하늘나라에서는, 우리의 모델 되시는 주님은 이 땅에서 죽어서 주가 되신 분이에요. 그게 규칙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죽인다 할 때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걸 ‘내 노동력을 무시하고 내가 얼마나 자식 키운다고 애썼는데……’, 아, 그걸……, 제일 먼저 온 첫 번째 일꾼처럼 하지 마시고 ‘아이고, 저에게 이런 것을 주시다니 그동안 살게 해주신 것이 은혜인데……’ 이렇게 의아해해야 돼요.

‘주여, 제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꼬집어보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제가 왜 살아 있어요? 왜? 내 친구는 벌써 간암 걸려서 죽었다는데, 내가 40이 넘었는데 왜 살아 있어요?’ 자기에게 반문해야 돼요. 왜 살아 있는지를. 주님께서 우리를 볼 때 죽이겠다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안 죽고 있잖아요. 안 죽고 있으니까 제가 지금 설교하고 있잖아요. 뭔가 지금 일이 잘못되었어요. 이것은 분명히!

뭔가 내가 예상한 다른 방식으로 주께서 저와 여러분 인생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진즉 죽어야 되는데 안 죽이는 이유가 있어요. 네 인생이 아니고 그게 주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 참새를 키우듯이 들풀을 키우듯이 키운 거예요. 이제부터 그 나라 그 의를 바라보라고 지금까지 계속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질질 끌고.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성도는 미완료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채 살아가요. 완료가 되었어요. 완료된 입장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우리하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코로나 2단계, 5단계, 10단계 되어도 상관없어요. 완료된 채 가기 때문에 이 미완료된 인생에서, 미완료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 완료가 보여주는 새로움을 하루하루 치만 계속해서 내놔라, 그 말입니다. 하루 치만!

오늘도 새롭고, 내일 되면 내일도 새롭고, 모레도 새롭고. 약국에서 약 지어줄 때 한꺼번에 먹지 마세요, 하잖아요. 일주일 치 약을 한꺼번에 먹는다는 것은 죽겠다는 뜻이지요. 식사 후 30분 뒤에 먹을 치만 봉지에 담아놨잖아요. 아침, 점심, 저녁, 써놨잖아요. 그때 그것 먹으면 돼요. 하루 치만 우리가 톡 털어 넣으면 돼요. 그냥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주시는 거예요.

그 새로움, 이미 천국에 있기 때문에 나오는 새로움, 내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나오는 새로움, 늘 반항하는 나를 개무시해 주시는 그 기쁨, 내 뜻대로 안 해주시는 쪽으로 살아 계시는 주님의 활동을 내가 죽은 무덤 속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내가 심판받을 자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보이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내 뜻대로 살려면 갈수록 우리의 사는 것이 참담합니다. 증가 되는 참담함, 자꾸 참담함이 증가 돼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죽인 3 천명이 인간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형제가 형제를 죽일 어떤 기준도 땅 밑에서는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그 3 천명은 왜 죽는가? 모세가 40일 뒤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제시한 조건에 준해서 우상 섬겼다는 그러한 새로운 항목이 들어가니까 그들은 죽어 마땅한 거예요. 매일같이 우리는 새로운 일상에서의 항목을 부여받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14절에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이게 어제 용도, 어제 아침 점심 저녁 먹은 것 말고 오늘 아침 점심 저녁때 먹어야 될 새로움이에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사람이 혼자 살면요, 사람이 대낮이라도 두려워요. 그리고 주님의 일로서 살아 있으면 어두움 속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네 안에 나 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매일같이 하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게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 거예요. ‘내가 너 사랑한다.’ ‘어제도 알았는데요.’ ‘그것은 어제 분이고 오늘 내가 너 사랑한다.’ 내일 되면 ‘내가 너 사랑한다. 왜? 너는 무덤에 있기 때문에.’ 늘 무덤에 있어야 되고 무덤에 있는 자를 주께서 또 살려주시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너는 늘 표면은 반항하고, 대들고, 자기 자랑하고, 그것을 또 오늘도 오늘치 마음의 할례를, 그 껍데기를 벗겨버리는 거예요.

벗겨버리면 그 안에 뭐 요란스럽지요. 혼자 살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어서 오이소!” 손님 대접하면서도 속으로는 욕하고. 이게 살아보려고 이게 함성이에요. ‘어쨌든 살아야 돼.’ 복음이고 예수고 다 때려치우고 ‘어쨌든 밥 먹고 살아야지 우야겠노. 라면 먹고 살아야지. 이 어려운데.’ 이게 아주 요란스러워요.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고 감사가 나옵니까?

그걸 처음에는 몰랐는데 주께서 껍질을 벗겨 보니까 온갖 더러운 흙탕물이, 분탕질이 다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그 기쁨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에요. ‘아, 이런 인간을 이미 완료시켜 놨구나. 이미 천국 백성 되었구나.’ 하루 열 시간 일 안 했는데, 한 시간 밖에 일 안 했는데 일 잘했다고 하루 치 임금을 주시는 그 은혜를 매일같이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우리는 참담해야 돼요. 매일같이 우리는 왜곡되고, 매일같이 왜곡된 것을 십자가가 보이는 지점으로 주께서 데려가게 되면 다시 십자가 안다고 여겼는데, 어제까지 알았는데 오늘 되게 되면 오늘 어떤 사건이 터져서 난리도 아니었는데 저녁때 되니까 다시 한번 십자가가 보이는 지점으로 데려갈 때 ‘아, 참, 주님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지.’ 왜 내 일처럼 벌벌 떨고 공포에 휩싸여서 내 탓을 남 탓으로 돌리면서 공포를 잠재우려고 그렇게 내부적으로 발악을 떨었느냐 그 말이지요.

다 남편 탓이고, 아내 탓이고, 자식 탓이고. 이게 무섭다는 거거든요. 남한테 욕하고. 욕하는 이유는 내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뜻이에요. 한 것도 없이 구원받았으면 감사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다음에 민수기 5장에 들어가면요, 거기서는 무려 2만 4 천명을 죽입니다. 2만 4 천명을 죽여요. 아주 작심했어요. 죽어라, 인간아. 우상 섬겼다고 2만 4 천명 죽입니다.

사무엘하 끝에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한다고 7 만명 죽입니다. 우리나라 코로나 걸려서 몇 명 죽었습니까? 코로나가 죽인 것인지 늙어서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나는 그것 안 믿습니다. 통계를 안 믿어요. 코로나 아니라도 다 늙어서 그만큼 죽어요. 코로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에요. 때가 되매 죽은 겁니다. 하루에도 자살을 50명이 하는 나라인데요.

무려 7만 명을 죽입니다. 7만 명 죽여놓고 뭐 하나 건지느냐 하면, 다윗보고 “네가 제사하면 나머지는 살려줄 게” 이게 무슨 뜻이에요? 결국 이게 뭐냐 하면, 다 죽일 수도 있었어요. 사흘 만에 7만 명이나 죽였거든요. 나흘째 되면, 한 달째 갔으면 작살 나서 다 죽을 뻔 했어요.

중간에 그 연속성을 불연속성으로, 십자가, 제사, 그 모리아 산의 제사 드리는 다윗으로 말미암아 스톱이 된 거예요. 그 스톱, 발음을 제대로 stop! 주님의 저주의 stop! 그게 바로 지금 우리 안에 꽂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도를 십자가 증인으로서 성령을 통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무덤 안에 있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고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비로소 그 안에 들어올 때 예수님과 하나님과 동창생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비로소 아버지, 예수님 자리에 앉아야 부를 수 있는 그 아버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어 부활해야 부를 수 있는 그 아버지를 감히 하나님의 양자인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도 무덤 안에서 “아버지께서 저를 살도록 했습니다. 천국 백성 만들었습니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 주께서 계속해서 필요에 따라서 살게 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 본성과 습성이 죽을 때까지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더 강화되는 것도 저희들이 수용하게 해 주셔서 어떤 경우라도 주께서 십자가 증거 하는데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그 은혜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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