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으로 얻은 자유
2021년 9월 19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1:9-10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는 세상 전체를 봅니다. 이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에 비로소 모든 인간은 그 자체가 우상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우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욕망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그 자체로서 계속 변신을 시도합니다.
욕망은 그 자체로서 모자람이 없습니다. 모자람이 없는 욕망이니 욕망은 인간을 향하여 닥닥달합니다. 그러다보니 인간들의 신체는 욕망의 요구에 항상 미흡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속에 들끓는 욕망의 요구조건을 다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충족의 실패담이 인생입니다.
욕망의 생산에는 멈춤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속의 욕망에 평생에 걸쳐 놀아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형님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이 자기의 압제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기에 눌려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외부에서 용서를 해주어도 본인이 그 용서를 용납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개인적으로 분화(갈라짐)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이로서 우상이란 욕망이 형태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 안에 욕망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런 욕망의 가현체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간격을 마련하시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발생된 겁니다.
이 간격은 인간들이 건너 뛸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욕망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관장하고 있는 악마는 인간들을 ‘욕망의 가현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악마는 예수님마저 그렇게 해버리기 위해 시험했습니다. 마태복음 4:4-5에 보면,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즉 악마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너의 욕망에 충실하라”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욕망의 가현체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물과 피로 땅에 쏟아버리신 일입니다. 마치 캡슐막에 온갖 거룩과 신성한 것을 채워넣어서 그런 자신을 구성하고 천국까지 올려놓으려는 인간들의 시도와는 대조적입니다. 캡슐막을 찢어버리고 이 세상에 허비하셨습니다.
이것은 악마 품 속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하는 일입니다. 인간들이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보여준 태도는 홀로 사는 법이었습니다. 창세기 3:9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하셨을 때, 인간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즉 인간들은 숨고 감추는 식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사수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저리 나가세요”라는 식입니다.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욕망은 인간 개인에게 개성을 부여해서 그들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무리 자기 내부에 말씀과 성경 용어나 개념으로 가득채워도 여전히 우상인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듯 인간들은 자기로서는 그 우상의 틀을 깰 수가 없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우상을 깨고 참되고 살아계신 주님에게 돌아온 겁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바로 구원작업이 이처럼 ‘우상의 자리’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구약에도 나옵니다. 구약 사사기 6:25-26에 보면,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 드려라고 합니다. 이는 곧 기드온 자체를 찍어야 됨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은 아세라 우상을 찍을 때, 두려워서 밤에 몰래 찍었기 때문입니다. 즉 기드온은 우상과 적대적 관계에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일에 기드온은 강제로 참여한 바가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기드온의 이름은 ‘여룹바알’로 바뀝니다.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삿 6:32) 그래놓고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하여금 우상을 섬기는 민족인 미디안과 전쟁에 나설 것을 지시합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기드온은 32,000명이란 우상적인 군대를 모집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의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기는 이들이 바로 ‘우상의 찌꺼기’요 ‘기드온의 찌꺼기입니다. 즉 하나님깨서는 기드온의 요소를 거의 다 제거해버리고 전쟁에 나서게 하십니다.
마치 참된 성도라면 자신의 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삭제하고 그 남아 있는 바를 보게 하시는 원칙에 관심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우상으로 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임을 알게 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에게 놀라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돌아선 자만이 자신이 출발한 곳이 우상으로 살아온 곳임을 아는 겁니다. 즉 주님은 본인이 우상임을 알게 된 자와 일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인생 사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자신을 좋게 꾸미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우상성을 그대로 내어보이는 겁니다.
구약 아가서에 나왔듯이 사랑하는 자들 사이에는 아무 것도 감추거나 숨기지 않는 겁니다. 우상의 근원은 곧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절대로 죽지 않고 활개칩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죽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확실한 구분법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도달하는 곳에는 우상적인 존재는 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서 처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처소는 모든 성도의 도착지점입니다. 이 도착지점이 성령으로 인해 미리 이 지상 생활에서 출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나’라는 우상을 주님의 십자가로 쪼개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우상으로 얻은 자유)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10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곁들이냐 하면, 바로 우상을 너희들이 섬겼다. 그걸 필히 곁들이고 있습니다. 너 문제 있다는 것, 너 잘못됐다는 겁니다. 잘못된 네가 어떻게, 너 자체가 우상인데 어떻게 우상을 버리는 그 희한한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바로 택하신 자에게만 성령의 능력이 임해서 그렇고, 성령이 임해서만 네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거예요. 돌아오고 나니까 내가 있던 그 자리가 바로 우상의 자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걸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이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어떤 간격이 있는데 그 간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아니하면 발생 되지 않는 간격이에요. 인간들은 주위에서 오는 정보를 다 수집하고 수납합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성경에 괜찮은 여러 가지 용어들이 나오니까 예수, 영생, 재림, 십자가, 언약, 뭐 온갖 것, 하나님의 평강, 은혜, 그런 모든 용어가 나오니까 그 용어들을 수집해서 자기한테 다 끌어모으는 거예요.
끌어모으니 뭐합니까? 본인이 우상인데요. 본인 자체가 우상인데 한껏 끌어모은다고 하나님께서 구원시킬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 기도할 때 성경 용어를 범벅으로 집어넣어서 기도하는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열심 내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해서 이제 본인이 우상인 것을 알았어요? 본인이 교회 다니고 살아보니까 본인이 우상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던가요?
지금 사도바울은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가장 베이스로 깔고 있는 인식이 뭐냐 하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취지입니다. 들을 수 없는 이야기, 들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것 알면 괜찮다, 싶어서 전부 다 그걸 다 끄집어내서 이것 전했잖아요, 이렇게 내놓는 거예요.
그 내놓는 그 섞임 사이, 여러 가지 정보나 지식 사이에 ‘나는 우상이었다’가 그게 포함이 되어 있느냐를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네가 괜찮게 살고 사람으로 살다가 이제 하나님 만났구나.”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우상을 섬겼어. 아니 너 자체가 너한테 우상이었어. 그런데 본인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어떻게, 무슨 큰 은혜를 받아서 그것을 깨닫게 되었지? 아이고, 놀라워라!”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간격이 있잖아요, 간격이.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고, 그 간격은 인간이 만든 간격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의도해서 만들어낸 간격이에요. 예수님 오시지 않으면, 오늘 본문대로 하면 ‘참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갭은 인간 힘으로 건너뛸 수가 없어요.
오랜만에 동창생 만났을 때 “잘 있었나? 네가 고등학교 때도 공부 잘하더니 지금도 잘됐지.” 보통 이렇게 좋게 칭찬으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만나자마자 “아이고, 반갑다, 친구야! 인간 같지도 않은 게 어떻게 인간이 되었냐?”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잖아요.
“이거 사람 다 됐네. 신수 훤~하네. 너 원래 고등학교 때 쓰레기였잖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들도 다 알고 있어. ‘저거 인간 되겠나. 저거 인간 안 된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신수가 지금은 훤하네.” 이게 지금 칭찬하는 겁니까, 숨기고 싶은 근원을 다시 파내는 거예요? 어떤 겁니까?
제가 이번 주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창세기 3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 아담과 하와가 제대로 된 인간 같으면 “제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돼요.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10절에 “제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고요.
하나님이 방문했는데 반갑다고 뛰어가서 발가벗고 수치스런 몸이든 관계없이 그냥 반겨야 되지 않습니까? 왜 숨깁니까? 왜 감춥니까? 이게 인간의 우상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재벌가에서 골프 치고 있는데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찾아오시겠습니까마는 어쨌든 찾아오셔서 “재벌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면 재벌이 “지금 골프 치느라 바쁘니까 훠~이, 훠~이, 가세요. 저리 가세요. 우리끼리 놀 테니 저리 가세요. 빠지세요.” 하고 보내는 거예요.
“김 집사야, 어디 있느냐?” “지금 추석 전 굽는데 바쁩니다. 뜨거운 불판에서 전 굽는데 훠~이, 가라니까요.” 인간은 자동적으로 우상이 되어가지고요, 자기 자신을 숨기는데 급급합니다. 숨길 때 그냥 숨기는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 전체를 다 가지고 숨겨요. 그러면 우상 아니라고 말해줄까 싶어서.
사도가 유대인이잖아요. 사도가 구약성경 다 압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계시받았기 때문에, 신약성경도 자기가 썼기 때문에 다 알아요. 사도가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멈추지 않는 그 일, 성령이지요, 그 일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인간이었다, 라는 것부터 해서 구원이 시작되는 거예요.
너는 우상이었어, 네가 우상이었어, 라는 그것을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우상이었구나, 라는 그것을 지적해줄 때, 그걸 규정해줄 때 그것이 내가 원하는 구원이 아닐찌라도 주께서 원하는 작업의 개시입니다. “너는 우상이었어.” 네가 아무리 종교 생활하고, 네가 아무리 신앙생활 해도 그것은 우상에다 그냥 껍데기 하나 붙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인정 안 해줘.”
인정 안 해준다고요. 쉽게 말해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봐라. 그래도 남은 것이 있거든 그게 주의 일이라는 거지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보라는 말이지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자기를 감추는 것 외에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주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회야! 네가 어떻게,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전체를 다 나타내느냐, 드러내느냐?” 이 이야기에요. “어떻게 세상 진리를 한꺼번에 다 드러내는가? 나는 분명히 너희들 못 알아들으라고 이야기했어. 나는 분명히 너희들 인간이라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만 했다고.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것을 알아듣느냐?” 그 말이에요.
내가 놀랐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어떻게, 라는 말이 여기 나오잖아요. 9절 중간에.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어떻게, 우상을 섬겼던 너희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네 능력 아니야. 네 능력으로는 그럴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상의 특징은요,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곱게 숨기고 감추는 데 급급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나 우상입니다”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말 잘 해야 돼요. 내가 헷갈리면 안 된다. 성령 받지 않은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우상이기 때문에, 자기를 감추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나는 우상일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모든 인간은 다 해낸다는 그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기껏 그것밖에 안 해요. 자기가 전부에요. 내가 전부에요. 나한테는 내가 전부라니까요. 사람에게 큰 형님이 누군지 알아요? 큰 형님은 내가 큰 형님이에요. 내가 압제자예요. 내가 나를 압제하는 압제자라고요. 인간은 자기의 기에 눌려 삽니다. 누가 나를 용서해주잖아요. 싫어요. 내가 나에게 용납이 안 되면 그것은 나에게 용서가 실현이 안 된 겁니다. 이 정도로 우리는 고집이 센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장담하는 이유, 네가, 인간이 아무리 해도 주님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했다고 작심하고 장담하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여러 가지 많은 기적과 말씀을 했지만 결국은 남긴 것은 간격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이름의 간격이에요. 제자들마저 도망칠 수밖에 없고 예수님에 대해서 질겁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은 몸을 갖고 있기에,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신체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씁니다. 필라테스, 맨날 진찰, 검사, 인간은 오직 자기 몸 아프니 건강하니 그 몸에 대해서가 전부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놓는 것은 뭐냐 하면, 살과 피입니다. 인간은 육신이에요. 예수님은 육신의 깨트려짐이에요. 인간은 자아라는 캡슐 속에 자기를 곱게 담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몸인 캡슐을 찢어버리고 거기 내용물이 온 땅에 쏟아져 버린 거예요. 어떻게? 물과 피로써 쏟아진 거예요.
자기 자신이 천당 가려고, 교회 가서 구원받으려고 한 자기 캡슐을 꽉 쥐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캡슐 쏟아진 그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나 저처럼 될래.” 이것은 언어도단이지요.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아침에 눈만 뜨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나 하나 지키기였잖아요 나 하나 지키기. 나 하나 쏟아내기가 아니잖아요. 나 찢어지기가 아니잖아요, 나 찢어지기가.
그래서, 참, 거짓말 좀 그만 하세요. 아, 진짜 거짓말, 정말 지겨워. 지겨워요.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의 소망 충족의 실패담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소망하고 기대하고, 또 희망하고,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해도 인간은 또 희망하고, 거기서 일어나서 또 기대하고. 이게 인간사에요. 진짜 하나님하고 한바탕 붙어보자는 식이지요.
그래서 우상에서 돌아선다고 할 때, 초창기 한국교회가 우상을 설명할 때 아주 크게 착오를 일으킨 해석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부처가 우상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부처, 조상숭배, 그것을 우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도대체 그 사람들은 성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성경인데 왜 같은 성경을 두고 골로새서 3장 5절을 의도적으로 빼먹었는지, 이게 안 보였는지? 왜 그런지 우상을 설명할 때 부처, 돌부처, 그걸 우상이라고 설명했어요.
신약 골로새서 3장 5절에……, 물론 구약도 모르지요. 구약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지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나와 있잖아요. 탐심이 우상숭배, 욕망이 우상숭배에요. 우상의 특징이 뭐냐? 참되지 않고 엉터리 인간이 조작해낸 신의 특징이 뭐냐? 그것은 욕망이 화신한 거예요. 욕망이 물체화된 그것이 우상이에요.
인간의 그 욕망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다들 세상 살기 바쁘기 때문에 그런데요, 제대로 공부하려면 불교의 미륵보살에 대해서 공부하면 그것이 바로 욕망이에요. 미륵보살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무소부재한 신입니다. 불교는 신을 안 믿는다 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거예요. 불교에 신이 있어요.
화신(化身), 법신(法身), 보신(報身), 그런 식으로 있어요. 부처가 셋으로 불교에도 삼위일체가 있다니까요. 삼위일체 아이디어가 인간에서 나온 거예요. 육신으로 된 부처 있거든요. 석가모니. 그런데 석가모니의 정신이 있다고요. 그다음에 석가모니가 신이 된 그것이 미륵보살이에요.
갑자기 불교 강좌를 굳이 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의 특징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무소부재해요. 인간의 욕망에는 모자람이 없어요. 결핍이 없습니다. 결핍이 없기 때문에 욕망은 뭘 낳는가? 계속해서 인간에게 결핍을 낳아요. 모자람을 낳는다고요.
왜? 욕망은 정신이고 인간의 육신, 이것은 물체니까 욕망이 갈구는 거예요. 이 육체를. 나의 욕망에 네가 왜 부합되지 못하느냐, 하고 자꾸 갈구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에게 큰 형님은 나라고. 나의 욕망이 나에게 형님이에요. 계속 잔소리 해대고. ‘아이고, 인간아! 그것도 사는 거냐? 이 정도 해야지.’ 계속 갈구는 겁니다. 끝까지.
‘이번에 공부 좀 했습니다.’ ‘더해야지. 더 해야지.’ ‘나도 뭐 많은 사람들 도와주고 착한 일 했습니다.’ ‘더 착해야지.’ ‘기도 좀 했습니다.’ ‘더 해야지.’ 욕망은 끝이 없어요. 모자람이 없어요. 욕망은 신과 같은 거예요. 평생 욕망에 시달려 가는 겁니다. ‘아이고, 뭐 나이 이 정도 됐는데 낚시나 좀 해볼까?’ 낚시터에 가 보세요. 낚시터에 고수들, 달인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도시에서도 어부가 있어요.
그 사람한테 가게 되면요, 이건 내가 잡은 고기는 고기도 아니라. 어떤 사람은 고기를 잡아서 어깨에 메고 온다고요. ‘도대체 내가 어느 정도 달인이 되어야 저 정도 낚시를 할 수가 있는가?’ 취미 생활한다고 동양화 그린다고 하거든요. 웬만한 미술전에서 입선도 하고 그림 좀 그린다 하는데 동양화 고수들한테 가면요 “아이고, 그거 찢어버리세요. 공부 좀 하시지 이게 뭡니까? 만화도 아니고. 차라리 만화나 그리세요. 이것은 예술이 아닙니다.”
왜 모든 분야에 도사들이 왜 그리 많은지. 바둑이면 바둑 도사, 정치하면 정치 9단들, 노조에 노조 도사들, 인간은 그 욕망에 의해서 시달리면서, 후달리면서도 자기가 그동안 어릴 때부터 듣고 배운 것이 욕망의 요구에 충족하라, 그것만 이 육신이 습관적으로 추종하고 순종했거든요.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내 욕망에 충실해야 된다.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 배웠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이 욕망에 굉장히 친근함을 갖고 있어요. 욕망을 이야기하면 전부 다 아멘, 하고 있어요. 아멘! 하시던 사업 잘되시고 애 공부 잘하고……. 아멘, 아멘, 이에요. “코로나 걸리시고 일찍 죽으세요” 그러면 노멘! 인간은 필연적으로 욕망과 친화적입니다. 그것은, 욕망은 인간이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객체적 대상이 아니라 아예 욕망 안에 인간이 살고 있어요. 인간은 욕망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부족함이 있고 그 나름대로의 부족함이 소망,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삶의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에 미달하게 되면 좌절하고, 좀 된다 싶으면 까불락거리고 교만하고 그런 거지요. 그래서 제자들의 예수님과의 간격은 계속 벌어졌던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기대하는 성도는 뭐냐? 이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고 주님의 욕망입니다.주님의 욕망은 미흡함이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게 자유입니다. 자유인데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 3절에 나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 처소라는 말이 나오지요. 처소라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의 도착점인 동시에, 주님의 욕망의 도착점인 동시에 성도의 도착점. 그래서 성도가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미 도착한 도착지점과 더불어 처소에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지금 살아생전에 내가 도착해야 될 그 도착의 지점에 이미 도달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욕망은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이라 할 수 있는데 욕망은 이 자유를 늘 시기하고 이걸 늘 흠집으로 여기고 공격합니다. 이미 도착했는데, 마라톤 도착해서 팬티 바람으로 지금 숨 고르고 있는데 또 뛰래. 하~, 이거 미치는 거예요. 왜 또 뛰어야 되는데요? 또 뛰라는 거예요. 아직 갈길이 멀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이렇게 속입니까?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한 말씀, 네가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다니, 라는 말을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 간격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하나님 믿는 욕망이 건전한 욕망이고 이 하나님 믿는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아가서 열심히 헤매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노력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서 건져준다는 그런 이론이 신학이 있었어요.
유대 신학이 그래요. 말이 유대 신학이지 오늘날 개혁주의하고 똑같은 거지요.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여기에는 모자라는 우리가 있으니까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천로역정 알지요, 계단 올라가고, 계단 올라가고, 계단 올라가게 되면, 하여튼 그 계단을 부숴버리든지 해야 돼요, 그 계단 올라가게 되면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거예요.
백날 가까이 가도 한방에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방에. 장모 재판 하나에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해도 단 한방에 쌓고 쌓아놓았던 그 모든 것이 항상 바닥을 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구원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욕망이 끝도 없고 시작도 없고 진짜 하나님같이 무소불위하면서 자꾸 연약한 인간을 가지고 갈구고 나처럼 되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욕망이 흐르고 넘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욕망이 분화, 각각 개인으로 개성을 찾는 식으로 갈라지는 그걸 분화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갈라지는 그 이유가 뭐냐?
거기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욕망이 전체라면 우상은 각각 개인으로 따로 분화가 돼요. 갈라져서 개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점이 어려운데요. 욕망은 전체 힘이고 인간은 그 힘에 시달리면서도 나름대로 이것은 내 거야, 라는 그 내 것이 왜 발생 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는 것과 호응되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참, 말을 해놓고도 어렵지요. 그러면 성경 보면 되겠지요. 마태복음 4장 6절 보게 되면 마귀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욕망을 부추겨서 우상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자, 우상은 뭐냐? 욕망이 하나의 개별적인 형태화하는 것이 우상이에요. 욕망은 전체라면 그 개별적으로 나타나 눈에 보이는 식으로 형태화하는 것, 형식화시키는 것이 우상입니다.
마태복음 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마귀한테 시험받을 때 그 전에 첫 번째 시험에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하니까 마귀가 그것을 딱 받아서 “오케이, 시편 91편을 내가 언급할게.” 하면서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한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누가 인용하느냐? 악마가 인용한 거예요.
악마가 그걸 들고 예수님께 들이대면서 “말씀대로 산다며? 그래 말씀대로 사니까 높은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려라. 뛰어내렸는데 네가 안 다치면 너는 자체로서 완벽한 말씀의 형태화가 된다.” 이게 지금 악마가 예수님한테 유혹하는 거예요.
말씀대로 된 인간, 여러분, 이것이 악마의 유혹이라고 생각됩니까? 이것이 합당한 성도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안 들어요? 마귀가 하는 짓거리를 오늘날 교회가 그대로 다 하고 있어요. 사업 잘되라고 기도를 한다고요. 그러면 광야에서 돌이 떡 되게 하는 것이 뭐예요? 그거나 사업 잘되게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그걸 사람들이 구분을 못 해요? 악마는 우리를 우상 못 만들어서아주 환장을 했어요. 아까 한 말씀 다시 하겠습니다. 자꾸 우리는 인간을 조작하고 꾸미려고 해요. ‘이 정도 하면 성도 되겠지. 이 정도 하면 성도답지’ 자꾸 캡슐화시키는데 주께서는 캡슐을 깨는 거예요. 자기 캡슐 깨버리고 살과 피로 쏟아져버린 겁니다. 주섬주섬 건질 것도 없어요. 액체가 되어서 쏟아져 버렸는데 뭘 따로 건집니까?
그냥 세상에다 허비한다고 보시면 돼요.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허비해 버리는 거예요. 그냥 쏟아내서 내 것은 아예 없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방식이었어요. 우상 안되는 방식입니다. 자기 것을 챙기니까 “목사님, 이 말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그것 맞은들, 맞으면 이제 내 것 하려고? 내 것 하게 되면 캡슐 안에 또 들어오는데요.
인간의 악마가 준 욕망은요, 또 잊어버렸지요. 욕망은 뭐냐? 주님이 찾아오니까 ‘나는 내 식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자기 감출 때 욕망이 나오는 거예요. 욕망은 멈추지 않고 계속 욕망은 욕망을 생산해요. 이것은 인간이 감당이 안 됩니다. 수십억을 가져도 역시 히딩크하고 똑같아요.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계속 욕망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와야만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나를 결핍시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보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왜 했겠어요. 욕망은 생산하고, 그 욕망생산에 놀아나고, 욕망생산의 종으로서 평생을 농락당하는 것은 우리 육신이고. 곧 늙어 죽을 80이 되어서도 아직도 나 20대에 몸짱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17대 1로 이겼다, 오토바이 손 놓고 탔다는 이런 것. 오토바이 손 놓고 타면 천당 갑니까? 구원받습니까?
오토바이 손 놓고 탔다는 그것이 나이 한 50대에서는 새벽기도 두 시간 했다, 같은 말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시라니까요. 그래도 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진짜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세요. 왜 악마가 이렇게 예수님한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인간적인 욕망을 계속해서 내가 곱게 포장해줄 게, 악마가 자꾸 유혹하고 제안하는 겁니다. 너 괜찮은 존재야, 내가 괜찮은 존재로 티 나게 해줄 게,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악마가 인간에게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을 이 우주의 하나의 엘러먼트( elemen) 근원적인 원소로서, 요소로서 스스로 박히게 만드는 거예요. 모든 중심과 출발은 너로부터, 끝까지 너, 너 중심으로. 그러나 그렇게 했던 베드로는 예수님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있는 마지막 도착지점에 너와 함께 있는 그거에요. 거기는 예수님 중심이지 베드로 중심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름에다 여러분 자신을 집어넣어 보세요. 예수님 중심이지 내 중심 아니에요. 그 내 중심 아닌 것, 성령 받고 난 뒤에 지금 죽기 전부터 그렇게 살면 안 되겠습니까? 내 중심 아닌 것으로 좀 사시면 안 되겠어요? 참 그게 어렵기는 하지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원소라는 이것이 뭐냐 하면요. 여러분 공부했던 과학이라는 것이 원소 찾기에요. 인간의 눈으로 할 수 있는 근원을 찾아보겠다는 겁니다. 노래 가사 오늘도 안 나오나 싶은데 이제 나오지요. 가사를 통해서 원소가 뭔지를 알려드릴게요.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빛들이 이들을 찾아오면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너는 알고 있나
바람, 공기거든요. 비, 물입니다. 공기, 물, 흙, 불, 이걸 옛날에 4대 원소라고 했어요. “바람아 너는 알겠지?” 그 안다는 것, 가장 안다는 것, 인간이 자연을 보면서 자연의 모든 이치를, 가장 처음 그 시작점 그 아는 것을 4대 원소로 찾아보겠다고 모든 인간은 나섰는데 그 나선 이유가 그 원소를 찾게 되면, 알게 되면 그 안, 내가 궁극적인 원소가 되기 때문에 엘러먼트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4대 요소에 하나를 더 보탠 요소가 제5 원소에요. 뤽베송 감독의 영화 <제5 원소>에요. 그 제5 원소가 뭐냐? 그 영화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여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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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숲속에서 이들을 데려갈까
그다음에 나오는 가사가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너는 알고 있나~” 양희은이 불렀던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노래에요.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고요만이 남아 있네
때가 되면 이들이 사라져 고요함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너는 알고 있나
이게 뭐냐 하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이 만납니까? 그걸 왜 알려고 하는지를 알고 싶어요. 혼자 숨고 싶어서 그래요. 혼자 숨고 싶어서. 따로 나의 고체로서 살고 싶어서. 단단히 나의 세계를 내가 유지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진리가 무엇이냐? 성경 백 독하고 거기 나오는 용어 다 끌어모아서, ‘알았다.’ 뭘 알아? 네가 우상인데.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은 우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이미 우리는 욕망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욕망에서 못 벗어납니다.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왔는가?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해? 바로 그 원리가 성경 구약부터 나옵니다.
사사기 6장 25절에 보면, 그때는 사사되기 전인데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나지요. 25절에 보면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여기 바알과 아세라, 인간의 욕망의 구체화, 욕망이 형태로 집결된 것, 욕망의 그 흐름이 하나의 집중되는 것, 강도가 뭉쳐진 것, 그게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알과 아세라다 그 말이지요. 26절에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다음이 중요해요.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이게 바로 우상에서 참된 하나님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작업방식입니다. 너 자신을 도끼로 이마 까라, 그 말입니다.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 하는 너를 그냥 도끼로 찍어버려라. 왜? 네가 우상이니까. 신앙 좋은 너를 찍어버려라. 우상을 찍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인 거예요.
신약에서는 그걸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를 도끼로 찍어버렸어요. 십자가에서 찍어버렸다고. 아버지가 아들을 찍어버렸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듯이. 그 방법 외에는 욕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쁘지도 않은 데 예쁜 척하거든요. 가장 예쁜 것은 자기 성깔대로 하는 게 가장 예뻐요. 꾸미고 뭐 성형외과에서 만지고 하는 것 못 봐줍니다. 인기 좀 얻으려고 째고 붙이고, 내릴 것은 내리고 올릴 것은 올리고 줄일 것은 줄이고, 양악수술이지요.
왜 인간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쪼개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산산조각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자꾸 규합하려 합니다. “예쁜 것들 다 나와. 나 예쁘지롱~!” 이렇고 있다고요. 도끼로 쪼개버려요. 쪼개진 그 모습모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최고로 아름답습니다.
구약성경 아가에 보면 벌거벗은 채로 아무것도 안 감추고 있어요.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그래야 돼요.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왜 성질대로 사는 게 자신감이 없습니까? 저는 햄버거 볼 때 뭘 보냐 하면, 햄버거 안의 패티를 보는 것이 아니고 깨소금을 봐요. ‘참 좋겠다. 얹혀 가니까.’ 맛있거든요. 얹혀 가잖아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시킨 것이 뭐냐? 사사기 6장 32절에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이게 뭐냐? 바알을 파괴했다. 기드온이 바알 파괴자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바알파괴자라는 이름을 얻는데 이게 기드온이 한 게 아니에요. 기드온은 벌벌 떨면서 한 거예요.
기드온이 바알을 깬 것은 밤에 깼거든요. 벌벌 떨면서 자신의 욕망을, 예를 들어 누에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그래서 만들어진 누에고치 같은 것이 있잖아요. 자기 생의 영역, 공간, 나와바리, 그걸 자기 스스로 깨는 것과 같아요. 우상을 깨는 것은 곧 자기 틀, 생존 생계의 틀을 깨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저 뒤에 들어올 때 체온 재는 기계 있지요. 저거 5만 원 주고 샀는데 저걸 깨는 거예요. 이놈의 국가야, 하면서. 네가 뭔데 또 내 생존의 욕망을 자극하느냐, 하고 깨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동안 나를 보호했던 것을 내가 스스로 깨버리는 겁니다. 그때는 기드온이 벌벌벌벌, 떨면서 밤중에 몰래 했어요. 그런데 소문이 다 났습니다.
이 때 누가 누굴 죽이는가?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누가 바알과 아세라상을 깼는지를 찾아냈어요. CCTV 뒤져서 다 찾아냈다고요. “네가 죽였지? 우리 아세라와 바알을 깼기 때문에 이제는 네가 죽어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숨어 있는 욕망, 악마의 마음이지요. 악마의 마음은 못 죽이고 악마의 하수인들이, 악마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광경이 신약만 아니라 구약부터 이렇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이 여룹바알이에요. 바알과 싸우다, 쟁론한다. 여기 사사기 6장 32절에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은즉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 함이었더라” 기드온의 운명 자체가 옛날 나의 보금자리를 깨버린 유일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우상에서 벗어난 채로 우상과 대결하고 있는 거예요.
저쪽은 바알과 아세라가 우상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기드온은 내가 우상이야, 라고 이야기하고. 자기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본인이 우상인 것을 이제 알았어요, 이제! 그 간격을 넘어섰기 때문에. 악마하고 있을 때는 악마에게 매인 줄도 몰랐는데 그 간격을, 우상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께 돌아와 보니까 내가 산 게 우상이었어요. 내가 나에게 우상이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간격을, 기드온 자기 안에 만들어요. 그걸 쟁론한다, 다툰다, 파괴한다, 싸운다, 라는 말로 이름 자체가 “너는 우상과 싸워야 돼.” 그러나 우상이라는 것은 기드온 입장에서 우상이지 저쪽에서는 그게 신이에요. 하나님이라니까요. 어떻게 싸우느냐? 기드온이 미디인과 사울 때 3만 2천명이 왔잖아요. 3만 2천의 군대 자체가 이게 전부 다 우상이었고 3만 2천 명을 다 내보냅니다. 차츰차츰 다 보냅니다.
처음에 2만 2천 보내서 만 명이 남고, 만 명도 다 보내고 남은 것은 3백 명. 그 3백 명은 뭐냐? 우상찌꺼기에요. 3백명이 기드온의 용사가 아니라 우상찌꺼기. 기드온의 남아 있는 우상 자투리에요. 기드온 자체가 우상인 것을 알았으니까. 주님은 우상을 우상되게 하고 그 우상을 사용해서 우상 된 자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처소에 함께 한다는 그 사실이 이미 구약 때부터 나옵니다.
우상인데 우상이 우상 짓 하는 것 그게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예쁩니까? “네가 우상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께 왔기 때문에 네가 우상인 것을 이제야 알겠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제는 네 욕망한테 그만 농락당하고 그만 시달려라, 네가 너한테 그만 시달려라, 그 말이지요.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성도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구약 열왕기하 1장을 보게 되면 참 기이한 일이 일어나요. 엘리야 하나 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 하의 내용이니까 벌써 엘리야가 나이도 많아요. 그 노인네 하나 잡는데 경찰 50명 동원하는 이게 말이 돼요? 건장한 형사 둘만 와도 되는데 노인네 하나 잡는데 50명이 갔다고요. 갔는데 열왕기하 1장 10절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그 50명이 오십부장과 함께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다른 오십부장과 함께 50명을 또 보냈어요. 또 보냈는데 12절 보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50명 또 다 불 질렀습니다. 다 죽여 버렸어요. 세 번째로 오십부장과 50인을 보냈어요. 그런데 이 세 번째 중대장(오십부장)이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엘리야가 그냥 노인네니까 남들 눈에는 노인네 하나로 보이지요. 주와 함께 처소를 같이 하는 것, 다시 정리하면 처소를 같이 한다는 것은 주님의 마지막 그 영역을 함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놀이기구가 있지요. 기념물 같은 것, 유리알로 된 구체, 오르골이라 하지요, 그 안에 비나 눈이 막 내리는 것 있잖아요. 눈이 막 내려요. 그런 구체 안에 지금 엘리야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앞에 투명한 유리는 안 보이고 그 노인네 하나 있는 줄로 알고 있어요. 앞에 잡으러 왔던 102명이 다 죽었어요. 세 번째 갔던 사람은 어떻게 갔느냐? 처음부터 기고 들어갑니다. 가기는 가요. 왕이 가라 했으니 월급 받고 살아야 되니까 가기는 가는데 “살려만 주이소!” 그렇게 오는 거예요.
열왕기하 1장 13, 14절에 “왕이 세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세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 오십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그래서 세 번째 갔던 사람은 안 죽었어요. 15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저를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그래서 “안 죽일 게. 같이 가줄 게.” 엘리야가 함께 내려오게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우상에서 참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교회 안 다니다 교회 나왔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엘리야같은 위치에 바로 성도가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있다는 말은, 도착지점, 마지막 우리의 처소 그 지점이 미리 앞당겨서 성령 안에서, 아까 말한 구체처럼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그 안에서 모든 완료,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태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숨기거나, 내 욕망에 내가 후달리거나, 주눅들거나, 내 소망 희망에 농락당할 이유는 없지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다시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 재림 이야기가 나와요. 10절에 보면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장래에 노하냐 안 하냐는 가봐야 알지, 가 아니라 이미 십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갭을 통해서 이미 자신은,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날 때부터 우상이며 우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것을 미리 아는 사람한테는 그 강림이, 그 오르골 안에서, 투명한 유리알 안에서는 함께, 그냥 즐겁게 주의 그다음 작업을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내 일은 아니지만 함께 있는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일이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이 번개라면 성도는 피뢰침이에요. 성도가 그렇게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 그만 살아도 되는데 왜 살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번개를 맞으면 다 죽어요. 피뢰침도 죽어요. 죽는데 피뢰침의 특징은 강렬한 수천 볼트의 전기가 땅으로 빠져나가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세요. 그리고 어떻게 십자가를 경과해서 그게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늘 증거 하는 피뢰침으로 이 땅에 살아 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굉장히 위험해요. 어느 정도로 위험하냐 하면, 내가 뭔가 착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위험합니다. 착했다, 또는 악하다, 그게 번개맞을 때 또다시 느껴지는 우리의 육적인 겁니다. ‘악해? 그러면 착하면 되겠네. 착해? 그러면 계속 착함을 유지하면 되겠네.’ 이게 선악과를 내려치시는 생명나무의 번개거든요.
주님을 안다 할지라도 번개를 딱 치니까 갑자기 잠자고 있는 선악과가 여기서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아, 착해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빛과 소금 되어야지, 이런 생각이 또 드는 거예요. 그냥 흘려보내세요. 이게 바로 내 잠자는 욕망을 주께서 또 깨우는 거예요. 잠자는 욕망을. 내 우상이라는 것을 자각시키는 겁니다. 자각시킬 때마다 내가 우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돼요. 이게 희한한 일이라니까요.
네가 우상인데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섰느냐, 그때 그 사람에게 뭐냐? 우상이라는 개념을, 전에는 내 바깥에 있는 것을 내 우상이라고 봤는데 이제는 그때부터 우상이라는 것을 나까지 포함해서 우상이라는 개념으로 즐겁게 가볍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상에서 내놓을 수 있는 욕망, 그것은 아무것도 가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우상의 특징은, 이 땅에서 욕망이 살아 있기 때문에 욕망은, 욕망과 우상은 둘 다 같은 말이에요, 둘 다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죽었어요. 그게 참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너도 죽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상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우상이 되어서 우상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세상 사는 중심으로 보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하는 질문 자체가 찾아오신 주님을 내쫓는 마귀 짓인 것을 깨닫게 되었사오니 이제는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주님의 용서와 사랑에 다 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