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언어와 기호

아빠와 함께 2021. 10. 17. 21:28

언어와 기호 

2021년 10월 17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13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성경 자체가 ‘말’과 ‘말씀’을 구분짓습니다. 이는 말의 세계 따로 형성되고 말씀의 세계가 따로 형성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구분은, 인간들이 잊어버린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하나님께서 계속 지켜나가겠다는 겁니다. 그 일이 바로 인간들이 악마와 더불어 낙원에서 추방된 일입니다.

이 추방된 인간 세계 안에는 ‘생명나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은근히 생명나무 과실에 대해서 탐을 냅니다. 이러한 탐심은 ‘하나님의 추방’이라는 징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 겁니다. 즉 인간들이 평소에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속에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을 고려하지 않고서 내뱉습니다.

그것은 말을 할 때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도란 이런 겁니다. 나의 세계, 나의 육신을 를 건들지말라고 경고성 발언인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말씀 자체가 완성된 것이 육신의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주님은 인간의 말 자체가 스스로를 감추는 한계가 있음을 노출시키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려는 징벌의 대상인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 인간들이 극구 변호하고 지키려는 식으로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 세계에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적합한 의미를 찾아 돌아다니게 됩니다.

자신의 이상향을 외부 모델을 모아놓고 그 모델들의 장단점을 따라서 가장 완벽해보이는 새로운 모델잡기에 나서는 식으로 말을 하고 글로 남깁니다. 즉 자신이 구상해낸 모델이 곧 그 모델을 구상한 자신이고 싶다는 겁니다. 이러니 인간들의 일평생은 늘 새롭게 올라오는 욕망에 적합한 이상향 찾는 세월이 됩니다.

여기에 그 어떤 신의 심판이나 징벌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신 하에 인간들은 성경 속에서 이상적인 자아 다듬기에 나서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시도는 인간의 세상 경험에서 비롯된 겁니다. 경험이란 기억을 남깁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아는 기억은 실제 과거에 일어난 사실과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실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꾸준히 견지하십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님 살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사건을 전, 후로 하여 그 사건을 절대적 말씀 완성의 내용을 하기 위해 일을 만들어 오시고 계속 단서를 던져주시면서 일하신 겁니다.

결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면 요한일서 2:14-16에 보면,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이 세상에 대해서 인간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는 분명 복과 저주를 바꾸어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을 저주라고 여기고, 저주를 복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주님과 그 복음으로 인해 핍박받고 애통하고 고난받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마 5:11) 즉 주님 스스로 말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므로서 복 자체가 되시고 생명 자체가 되신 겁니다. 인간들이 내뱉는 모든 말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을 감추는 용도라면 예수님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징벌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는 기호로 사용하십니다.

이처럼 언어와 기호는 별개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늘 새롭게 채워줄 의미를 찾고 있지만 정작 주님께서 원하시는 언어의 주인공이 아니라 기호가 되는 겁니다. 기호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정당함으로 기호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언어는 기껏 해서 폐쇄된 세계 안에서 맴돌지마는 기호란 자연세계까지 관여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38장에 보면, 히스기야는 말년에 병 들었을 때에, 더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소원을 들어주되 그가 무엇을 건드렸는지도 아울러 징조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사 38:7-8)

이게 바로 언어의 세계가 아니라 기호의 세계입니다. 이 기호의 세계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은 의미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적 기호로 오신 증거가 죽음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2-4에서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간 이가 극구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인간들이 이 땅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기껏 언어의 세계 안에서 발악하는 겁니다. 감히 언어의 세계에 속한 자가 기호, 즉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오겠다는 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하는 짓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 24:14-14)

언어의 세계를 장악한 악마는 인간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유일한 하나님의 약점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서 십자가 죽는 그 나약한 하나님의 품성을 하나님의 취약점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은 악마와 영원한 불심판을 받기 위해 지옥에 들어가야 하는 근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하나님을 공격할 의도가 있었음을 하나님의 나약함으로 비친 그 사실로 인하여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기호의 세계를 쉬지 않고 언어의 세계에서 만들 의미를 지워나갑니다. 성도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시험들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호이기에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자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8강-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언어에서 기호로)21101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말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구분한다는 것은 별개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따로 있고, 사람 말 따로 있고. 이것이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짜인 세계 따로 있고, 인간의 말로 만들어진 세계 따로 있고, 그런 뜻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낙원에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되었을 때 인간이 미처 따먹지 못하고 남겨둔 채 떠나게 되었는데 그 낙원에, 하나님 있는 곳에 함께 있는 나무가 있어요.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천사와 함께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쫓겨난 인간세계에는 생명 나무도 없고 거기에 천사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따로예요. 사는 동네가 다릅니다. 선악과 탐을 내서 선악과 따먹던 인간들이 감히 이제는 생명 나무 그게 탐이 나서 그걸 따먹으려고 그 행세 못 버리고 또 달려듭니다. 이 세상에 마귀가 허용했던 그 에덴동산, 마귀도 이제 못 들어가지요, 마귀도 못 들어가고 인간도 못 들어가고, 그런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생명 나무, 영생의 나무가 있는 곳에는 인간이 갈 수가 없어요.

그걸 아주 강조하기 위해서 그 가는 길을 불 칼을 가진 천사가 두루 돌면서 방비를 합니다. ‘네 세계 말고 내 세계 따로 있는데 그냥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못 들어온 상태에서 따로 있다. 들어갈 수 없는 상태에서 따로 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말과 말씀을 적용시켜 보게 되면, ‘인간의 말이 통용되는 세계에서는 어떤 말을 동원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쓰는 그 말은 인간에게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인간에게서 나온 말의 특징, 내가 쓰는 말의 한계가 뭐냐? 그것은 스스로 본인이 몰라요. 어디서 아느냐 하면, 인간과 괴리된, 인간과 따로 놀겠다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의 세계에서 보게 되면 인간의 말의 부실점과 허점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말속에는, 내가 징벌받아 마땅한 내용이 거기 들어가 있지 않아요. 어떤 말을 해도 이 말 속에는 내가 맴매, 해야 되고 매 맞아야 된다는 요소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들어 있는데 인간이 자기 말을 할 때는 ‘이런 말을 하는데 내가 왜 맞아야 되고 왜 징벌 받아야 되고 왜 벌 받아야 됩니까?’ 전혀 자기 말속에서 그걸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수학 시간에 선생님으로 들어왔다 해봅시다. 강의를 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애 하나가 “선생님, 저 진리 알아요. ‘3 곱하기 7은 21’입니다. 이것은 진짜입니다. 3 곱하기 7은 20도 아니고, 19도 아니고, 22도 아니고, 21 맞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 하겠습니까? “아이고, 세상에! 네가 그걸 다 아냐! 참 기특하구나. 네가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잘 하는구나.”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손목시계를 풉니다. “오늘 네가 좀 맞아야 되겠다. 좀 맞아야 되겠어. ‘3 곱하기 7은 21’이라고 한 그 속에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함을 거기서 네가 끄집어낼 수 있느냐?” 그렇게 물어요.

나는 분명히 옳은 소리 했는데, 바른 소리 했는데, 3 곱하기 7은 17도 아니고, 27도 아니고, 21, 분명히 바른 이야기에요. 3을 일곱 번 더하면 21이 되는 것 맞거든요. 분명히 자기는 자기한테 하자가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주님께서 성경공부 시간에 들어갔다 합시다. 그런데 어떤 되바라진 학생이 “샘요! 저 알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 좀 나온나! 너 오늘 맞고 시작하자. 네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웠는데 그게 성경에 있는데 성경에 있는 말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너는 이 성경 말씀을 아는 내가 왜 지옥 가야 되는지를 네가 한번 밝혀내봐라. 성경 말씀 그대로 이야기했는데 왜 지옥 가야 되는지를. 너 그거 모르지? 맞고 시작하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의 말이 세계입니다. 인간의 말의 생각은요, 자신에게 부합되고 딱 맞춤, 맞는 세계, 현실을 본인이 구성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좀 어려워서 내가 걱정되는데요.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하겠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볼 때 되어지는 그 환경이 내게 딱 맞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 맞춰서 세상을 탐색해요.

‘하나님이여, 일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 집안에 아픈 사람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돈은 한 달에 공돈 한 2백만 원 들어오고, 주식 던져놨더니 주식값이 막 오르고, 모든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딱 생각하면서 자 그런 경우를 찾아요.

어떤 사람이 땅을 샀는데 땅값이 올랐다. 어느 땅인데, 어느 땅인데, 그런 식으로 찾아요. 이 세상에는 자신의 모델, 자신이 되고 싶은 그 모델을 인간은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찾습니다.찾는데 어떻게 찾느냐? 내가 되고 싶은 것과 내가 되기 싫어하는 것을 계속 분리해 나가는데 그 찾는 것 가운데서 딱 맞춰서 나에게 만족스러운 경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얼추 비슷한 경우는 있어요. 가정이 너무 행복하고, 돈도 많고, 해외여행 갈 준비도 다 해놓고, 온갖 것이 다 갖춰지고 딱 맞는데 그래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모아놓고 그 차이를 봐요.

그 차이에서 이 사람에게 내가 마음에 다 드는데, 90퍼센트는 맞는데 뭔가 1퍼센트 모자라는 것을 찾고, 이쪽도 98퍼센트는 맞는데 2퍼센트 모자라는 것을 찾고, 그 세상에 있는 것을 모델로 삼아서 모자라는 것을 내 쪽에서 내가 채우면 딱 내 이상형이 맞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찾을 때 찾는 방법이 뭐냐? 그게 바로 차이가 되고요. 그 차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의미라고 하는 겁니다. 의미. 차이가 의미에요. 화장실에 신사복 입은 그림 있고 숙녀복 입고 있는 그림이 있어서 그걸 구분해 놨을 때에 딱 보면 아, 신사복은 남자 화장실, 숙녀복은 여자 화장실이에요.

그래서 이곳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남녀의 차이를 통해서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다. 길을 걸을 때 파란불 있고 빨간불 있는 것, 그냥 전등이 파란 불, 빨간 불,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빨간불은 건너지 마세요, 파란불은 건너세요. 이 차이가 그게 의미입니다.

인간은 계속 차이와 차이를 찾는 이유가, 그 차이가 나에게 새로움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교는 이겁니다. 생로병사, 태어나서 아프고 고생하고 병들고 힘들고, 이렇지요. 그렇다면 불교신자 입장에서 그러면 내가 원하는, 나에게 딱 맞는 것은 뭐냐? 아픈 것도 없고, 고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슬픔이 없는 곳, 그 차이를 생각해서 만들어낸 것이 뭐냐 하면, 천당, 극락, 천국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주님께서 시계 풀고 주님한테 좀 맞고 들어가야 돼요. 좀 맞아야 돼요. 인간은 보다 미래에, 지금보다 더 나은, 차이 나는, 딱 나에게, 남에게 맞으면 안 되고 나한테 딱 맞는, 그래서 내가 존재할 행복을 느끼고 보람을 느낄만한 차이를 계속해서 바꿔가면서 찾는 거예요. 그게 말의 세계입니다. 말의 세계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그러한 세계에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바꿔 나가는 거예요.

알알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동글동글하게 매듭지어져 있는데 그게 죽 연결되어 있잖아요. 새로운 단어,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개념을 계속 새로 찾아 나가는 거예요. 찾아 나갈 때 그 근거는 뭐냐? 자신의 과거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거예요. 체험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네가 아는 기억과 과거가 다르다는 거예요.

네가 아는 기억은, 네가 말 속에서 통용되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내게 좋아 보이는 것들만 수집한 과거의 기억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치면 안 되니까. 쉽게 말해서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더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미리 외부에 경고 때리는 것이 인간이 말하는 거예요. 내가 말을 한다는 것은, 제발 내가 내 원하는 인생 살고자 이렇게 노력하는데 좀 건드리지 마, 좀 나 다치게 하지 마, 먼저 그렇게 방어체제로 나가는 것이 말이에요.

말에는 항상 나는 징벌 받아서는 안 되고, 나는 벌 받으면 안 되고, 나는 다치면 안 되고, 나는 아프면 안 되는 거예요. 남한테 보통 잘못했을 때 사과를 하잖아요. 인간은 남한테 사과할 줄 모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한테 사과할 줄 몰라요. 남에게 사과 안 합니다.

인간이 사과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사과하는 거예요. ‘앞으로 너 조심해라. 앞으로 행동해서 남에게 욕 얻어먹으면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나의 완전함에 손해 되잖아. 앞으로 너 조심해야 돼. 내가 나한테 미안해. 내가 나한테 앞으로 조심할게.’

인간이 남에게는 사과 안 합니다. 오직 자기에게 충성할 뿐이에요, 인간은. 고마운 것도 자기한테 고마운 거예요, ‘살아줘서 고맙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가, 내가 잘되는 것이 의미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모든 잘되는 것이. 꽃을 보고 꽃이라 하는 것은 비로소 그 꽃이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내가 꽃이라 부를 때 꽃은 비로소 나에게 와서 의미가 된 거예요. 김춘수의 시처럼.

아무리 부부가 싸우고 해도요. 거리에 나갔을 때 다른 사람이 내 남편 건드리면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왜? 내가 고른 남편이기 때문에. 그 남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 남편을 내 남편이라고 여기는 나의 의미가 남편에게 고스란히 있기 때문에 ‘누가 내 남편을 건드려?’ 이것은 나를 건드린 거예요.

말이라는 것은 그런 거예요. 말에서 인간은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꾸준히 그 안에서, 평생동안 말에서, 그 안에서 돌아요. 사람들이 말을 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주님께서 인간이 쓰는 말과 같은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혼란이 벌어진 겁니다.

인간의 말이 인간 자기 위주로 의미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의미체계를 말살하고, 다 징벌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다른 과거, 거기에 근거를 두고 일하십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기억하다 보니까 자기가 기억하는 그것과 실제 과거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내가 기억 못 한다고 과거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놓쳐버린, 인간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 과거를 그대로 가지고 인간의 말을 들고 사용하고 인간에게 계속 이야기한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살해사건과 관련된 단서를 우리에게 계속 조금씩 조금씩 주신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냐, 에서 나오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는 그 살인사건과 관련된 의미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말을 사용하면서도 의미가 인간에게서 나온 의미가 아니고 다른 데서 나온 의미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호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기호, 성경적 용어로 그걸 가지고 표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님의 말은 말이 아니고 표적에요. 사인이고 표적입니다. 주님의 기호라는 것은 그 안에 징벌이 담겨 있어요. 생명나무 쪽에서 오신,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투입이 되어버리면 이 세상은 애초부터 인간의 과거사에 인간은 이미 하나님 계신 곳과 단절되어 있어요. 끊어져 있습니다. 끊어져 있고, 하나님 계시지 않고 누가 함께 있느냐? 악마가 계시다, 하면 안 되지만 하여튼 인간에게는 악마가 신이니까, 악마가 계신 곳에 인간이 함께 있어요.

그러면 악마를 향한 그 저주와 징벌이 하나님에게서 쏟아지는데 인간은 그 사실도 모르고 악마와 더불어 같이 여기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겁니다. 이 인간세계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게요, 이 자체가 징벌이에요. 인간 세상은 복을 저주라고 이야기하고요, 저주를 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교독문 42번 보셨잖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게 지금 예수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의 의미, 예수님 살인사건과 관련된 의미에서 나온 단서들입니다. 너 잘되기 위해서, 너 행복하기 위한 의미를 다 뒤바꿔 버려라, 그 말입니다. 다 바꿔 버려라, 그 말이에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게 말이 돼요?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거예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겁니다. 그게 복이에요. 가난한 게 복이고요. 심령이 가난한 그게 복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그런 현상이 있어요. 누가복음 23장 27-29절에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게 상상도 못 하지요. 아기 없고, 아기 낳았더라도 그 배를 채우지 못하고 젖을 먹이지 못한 자가 도리어 복이 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일찍 끊은 자가 복이 있나니.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런 뜻이에요.

이것이 요한일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즉 ‘주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이 세상을 사랑하느냐?’ 그게 징벌이에요. 그게 벌이에요. 그게 저주고 심판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사는 게 지금 벌 받고 있는 거예요. 나쁜 짓 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벌입니다.

“때리지 마세요” 하지 말고요, 때리는 데서 벗어나고 뛰쳐 나갈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있다는 존재 자체가 벌이에요. 왜? 육신의 안목과 정욕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거리, 이것은 아버지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은요,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은,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는 이야기에요, 결국은. “너희들이 뭘 좋아하고 있느냐? 지금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몰라.” 뭔가 바뀌었다는 것, 복을 저주로 착각하고 저주를 복으로 착각하는 그 요인이 네 안에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는 말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주께서 우리에게 말해주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 친절하게. 주님은 말 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인(sign)을 주시는 거예요. 단서를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요. 징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육신 자체가 그게 징조고 그게 기호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기호라는 말을 쓸게요. 말과 기호라는 것을 구분할게요. 하나님의 말씀은 기호요, 인간의 말은 그냥 말로 용어를 바꾸겠습니다. 기호의 세계는 예수님이 최초입니다. 인간은 말에서 와서 말로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해서 계속 찾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자기 자신을 사인으로, 기호 그냥 시그니처(signature), 기호로 바꾼다고요. 자기 자신을 기호로 바꿔요. 그게 요한복음 6장 53, 5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너희들이 나를 보고도 안 믿고 떠나가는 이유가, 자기 자신을 안 다치기 위해서 뭔가 차이 나는 새로운 것 좋은 것 그것을 얻고자 ‘야~,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분이야. 왜? 예수님이 기도해서 떡과 고기를 주시니까 이것은 우리가 예전에 몰랐던, 내 기억 속에서는 몰랐던 새로운 것’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들이 찾는 새로운 것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안 다친 상태에서, 자기를 만족시킨 상태에서 자기 욕망을 더 충족시키기 위해서 찾아 나가는 그런 것들이에요. 말에서 말, 나에게 관련되어 있으니까 의미에서 더 좋은 의미, 새로운 의미, 계속 의미를 찾는 겁니다

지금 내가 옛날에는 교회 안 다녔지만 지금은 교회 다닌다. 이것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 싶어서 교회 다니는 거예요. 이것은 말의 세계에요. 그래서 인간의 말에는 항상 차이를, 여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말은, 이걸 어려운 말로 ‘빗대서 이야기한다’ 해요. 은유와 환유라 하는데 그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할 필요 없고요.

예를 들어서 상대가 맘에 든다. I want to see you. 나는 당신 보기를 원합니다. 이게 영어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I miss you. 당신을 사랑합니다. I love you.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될 것을 “오늘따라 달이 참 청명하지요?” 애꿎은 달은 왜 들고 와서 빙빙 돌려서 이야기합니까? 난 당신이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하면 될 문제를. 빗대서 이야기하는 것.

제가 그 예를 말하는 이유가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요” 이러면 되는데 애꿎은 예수님을 동원 시킵니다. “나는 예수님 십자가를 믿습니다.” 이런 거요. 그게 말씀의 세계가 아니고 말의 세계입니다. 실컷 사랑, 사랑, 사랑이 그립다, 해놓고는 나중에 사랑을 해보니까

“사랑이 왜 이리 고된가요 이게 맞는가요 나만 이런가요……사랑이 왜 이리 아픈가요 이게 맞는가요 나만 이런가요~” 사랑이 왜 이렇게 고된 작업이냐 하는 겁니다. “사랑이 왜 이리 고된 가요~” <상사화>라 하는 노래의 가사거든요. 사랑은 뭔가 기대를 하고 사랑을 했는데 사랑을 해보니까 힘든 겁니다.

힘든 이유가, 처음 기대했던 그 말에 시간 요소가 담기게 되거든요. 이 어려운 것을 여러분이 참아 내셔야 돼요. 말에는 시간 요소가 담기게 되면 말을 한번 뱉어버리면 그 안에 자기의 과거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과거 경험이 들어 있으면 인간은 거기서 몇 시간, 몇 개월 안 가서 그게 식상해요.

따라서 사랑이라는 말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기서 차이 나는 새로움이 계속 추가적으로 와야 되는데 어느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날마다 재롱잔치를 벌일 수 있겠어요? 안되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예상했던 사랑하는 때의 그 기쁨을 기대했었는데, 자기의 기억에 의해서 그랬는데 그게 계속 유지가 안 되니까 사랑이 이렇게 고된 건가요, 이게 지금 사랑하는 것이 맞는 건가요, 다들 그렇게 사랑하는 그것이 이런 건가요, 이렇게 탄식하는 거예요.

사랑이 이렇게 아픈 건가요. 괴로움, 인간은 말을 하고 말을 사용하는 그것이 새로운 괴로움을 계속 전달시키는 겁니다. ‘네가 경험했던 새로운 기쁨이 아니고 네가 맛보지 못한 새로운 징계와 저주를 네가 평생 맛보게 될 것이다. 너는 말만 해라. 끊임없이 말만 해라. 그 말이 너로 하여금 아무것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괴로움과 괴로움이 추가될 것이다.’

“복음이 그런 건가요?” “그래. 복음이 그렇다.” 네가 지금 복음을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 선악과 먹는 그 탐심을 가지고 이제는 복음까지 집어삼키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언어의 세계는 인간들이 과거에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해서 이뤄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세계는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인간의 경험밖에 있는 세계입니다.

인간들이 사는 세계는 악마와 더불어 함께 추방된 세계에요. 이것은 그 안에 갇혀 있는 세계라서 폐쇄구조입니다. 폐쇄구조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 안에서 뭘 경험해도 그 안에서만 경험하고, 말을 해도 그 안에서만 말하는 것들이고, 말하는 것들로 자기의미가 계속 기억의 창고에 쌓이고 그 기억의 창고를 근거로 해서 ‘뭐 새로운 것 없어요?’ 새로운 것 없느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끊임없이 단서를 줬습니다. 징벌의 요소가 담긴 요소를 계속 줬어요. 제가 세 가지 정도 성경 본문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에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시장해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 먹으려고 했는데 무화과나무가 아직 때가 안 돼서 열매가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 목마르다는 그 타이밍 맞춰서 음료수 겸 무화과 나무 열매가 제공 되어야 되는데 그 나무가 그걸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제부터 너를 영원히 저주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시그니처(signature)에요. 기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억 속에서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어떤 말을 해도요, 그 말은 사람 붙들고 애곡하고 간청하고 하나님 붙들고 간청하면 되지만 자연세계와 같이 맞물려서 세상이 같이 돌아간다는 그것은 언어 세계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기호세계에만 그것이 허락되어 있어요.

주님의 말은, 말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매 무화과 나무는 곧장 말라버렸어요. 예수님만이 자연세계를 움직일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그렇게 이미 자연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으로부터 탈락됐어요. 끊어져 있어요. 자기 마음만 그저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고 이사야 38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몸이 아파서 죽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죽어가는데 좀 살 수 없겠습니까?” 라고 도저히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기도를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죽는데 안 죽고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15년을 더 연장시켰습니다. 히스기야가 눈치채야 돼요. 네가 사는데까지 살라, 라고 하지 않고 15년이라는 딱 기한이 정해진 시간을 허락받습니다. 히스기야는 말의 세계에 있으면서 자기의 욕구, 욕망으로 기호의 세계를 건드린 거예요.

그래서 15년 동안의 목숨을 더해주면서 주님께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네가 지금 같은 인간세계를 건드린 것이 아니고 기호의 세계, 인간이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다는 징후를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태양이 뒤로 가요. 뒤로 가는 것은 마이클 잭슨 댄스 ‘문워크(Moonwalk)’ 외에는 없습니다. 춤출 때 막 뒤로 가잖아요.

문워크의 시초는 태양이에요. 해가 거꾸로 갑니다. 태양이 춤을 춰요. 태양의 그림자가 거꾸로 가요. back, 뒤로 간다고요. 언제까지? 바로 이게 15년이라는, 잠시 인간의 기억 속에 있는 시간을 하나님께서 끊어내 버린 거예요. 쉽게 말해서 히스기야, 너는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도해버린 거예요. 히스기야는 그 15년의 그 연장된 수명이 바로 징벌의 원천, 인간이 왜 벌을 받아야 되고, 저주 받아야 되는지의 원천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기호로 히스기야는 사용당해집니다.

‘하나님, 암에 걸렸는데 기도 잘하는 권사로 하여금 안수해서, 병원에서는 6개월 밖에 못 산다 하는데 더 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이것은 본인 주제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언어의 세계에서 놀아나야 될 인간이 감히 기호의 세계를 넘본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아야 될 그 주제에 감히 생명 나무를 따먹겠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사도바울도 기호의 세계를 건드렸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게 되면 내가 부득불 자랑한다, 하면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라고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이 자기 본인이라는 말을 안 해요. 다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그가 셋째 하늘로 올라갔다. 여기서 ‘그’라고 이야기해요. 내가 셋째 하늘로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셋째 하늘로 간 거예요. 갔는데 3절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게 오늘 성경 보면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 것이, 인간의 언어는 내 몸은 건드리지 마라, 내 몸 육체는 그대로 있고 내가 원하는 욕망을 채워달라, 라고 말을 하는데 기호는 인간의 그 몸, 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징벌의 핵심요소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죽어 마땅한 거예요. 인간은. 이게 기호의 세계에서 비로소 나는 숯덩어리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기호의 세계에서. 그게 성도의 시그니처, 하나님의 살인사건과 단서로서 본인이 단서를 얻는 게 아니고 본인 자체, 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살인사건의 단서가 되는 겁니다. 아주 알기 쉽게 말해서요, 내가 불신자 된 것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 그게 단서에요. 내가 불신자로 파악된 것을 굉장히 즐거워하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언어의 세계에서 이 기호의 세계로 오다니.

역할은 있어요. 역할은 불신자 역할이에요. 역할은 불신자 역할인데 불신자 역할일 뿐이고요, 구원받은 것은 기호의 세계에 들어왔잖아요. 기호의 세계에! 이게 바로 생명나무의 나라에, 천국에 들어온 거예요. 이게 합격 된 거예요, 합격! 역할은 불신자 역할이지요. ‘아,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살았구나. 세상에, 이제야 알다니. 내가 세상을 사랑했구나. 하나님이 사랑하지도 않는 세상을 내가 사랑했구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처럼.’

여러분, 교회는 사랑하지 마세요. 교회 은밀한 곳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이것은 뭐 특별히 이 자리에 있는, 방송 듣는 사람들도 몰라요,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만 압니다. 교회 은밀한 곳에 뭐가 있느냐? 회계장부 있습니다. 신천지 은밀한 곳에 회계장부 있어요. 다 돈 보고 하는 거예요.

뭐 거기 생명이, 교회에 무슨 생명이 있습니까?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 얼마 모았고 이걸로 유지되겠느냐, 그것만 있어요. 대차대조표 있고, 자본, 재산, 부동산 가격 얼마 올랐는가, 그것만 있어요. 우리 가정에, 여러분 가정에 제일 은밀한 곳에 뭐 있습니까? 소유권등기 이전서류 있어요. 그게 자식보다, 남편보다, 아내보다 더 중요해요. 이 집 누구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는가? 그게 지금 ‘엄지손가락 내밀었습니다.’ 최고입니다, 최고, 최고예요, 최고예요!

그걸 은밀한 곳에 담고 ‘주여, 믿습니다. 주여, 사랑합니다.’ 이런 말로, 안에는 ‘나 다치게 하지 마. 나 건드리지 마.’ 이렇게 해놓고 바깥에 나오는 것은 그걸 감추면서 억누르면서 그게 솔솔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말의 세계입니다.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정말!

언어의 세계와 이 기호의 세계는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말이 오는 거예요, 종말. 이게 마태복음 24장 14-16절에 나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세계 자체가, 악마와 더불어 있는 자체가 이게 종말이고 이게 징벌의 대상이에요. 징벌의 대상인데 인간들은 말의 세계기 때문에, 언어의 세계기 때문에 본인이 좋아하는 이 세상이 망하고 이 교회가, 이 가정과 사업체가, 이 자연세계가 망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이게 왜 망해? 평생 일군 내 가정이 왜 망해?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지옥 가는데? 말도 안 돼. 이것은 아니야. 3 곱하기 7은 21로 나는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지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내가 왜 망해?’

그것은 바로 내가 살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의 의미를 내가 소유하기 위해서 멸망의 가증한 것에서 나오는 그 위세에 의해서 늘 부림을 당하고 종노릇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멸망하는 곳은요, 이게 말의 세계, 악마의 세계는 절대로 주님이 서셔야 될, 그 기호로 서셔야 될 장소와 이게 합치되지 않습니다.

성전에는 주님만이 서셔야 돼요. 그런데 감히 감히 선악과 따먹은 말의 세계가 거기에 자기가 신처럼 거기에 서려고 하니까 그게 바로 이 세상이 저주받는 이유가 십자가를 통해서만 알려집니다. 예수님 살인사건의 단서 자체, 기호 되시는 주님을 통해서 술술 우리에게 풀어준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지옥을 만드셨는가요? 그 이유가요, 악마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그 자체, 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 졌다는 자체를 하나님의 유일한 약점으로 악마는 이해했어요. 인질 잡은 겁니다. 아담을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만든 것을 자기가 인질로 잡아서 하나님 자기가 만든 인간을 자기가 지옥 보낼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삼은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악마한테는 이게 하나님의 약점으로 해석되는 겁니다. 따라서 악마가 하나님을 공격한 그 빌미를 유일한 저주의 근거로 확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옥을 만드신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지옥에서 불 심판 주려면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되고 근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악마가 인간을 공격할 때 약점 노리고 공격하잖아요. 그 약점이 십자가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그 자체를 ‘아이고, 하나님도 별수 없네. 참, 하나님도 인간한테 넘어가는구나.’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 건지기 위해서 자기까지 희생하다니. 이참에 그 약점을 내가 잡자.’ 하고 악마가 잡는 순간 악마와 더불어서 십자가를 안 믿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지옥 불에 가는 근거를 하나님 쪽에서 확보하신 거예요.

함정수사 하신 겁니다. 함정수사. ‘걸려들었어 너는 이제.’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주특기니까 나는 그 주특기 좀 이용하면 안 됩니까?’라는 자체가 지옥 가야 될 이유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계속해서 자기는 자기 건드리지 말라는 언어, 말, 말을 총 동원하거든요. 말을 총동원해서 그 말로서 천국까지 나를 집요하게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기어이.

사무엘하 17장 23절에 보면, 거기에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히도벨에 대해서 성경을 좀 본 사람도 ‘누구더라? 잘 모르겠는데?’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 사람이 누구냐? 다윗에 반대했던 압살롬, 이것은 아버지에게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거든요. 압살롬의 반란사건 그 때에 정치를 얼마 하지 못한 이 초짜 정치인 압살롬, 6개월 정도 정치한 사람에게 정치를 코치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히도벨이에요

김종인, 이렇게 보시면 확 들어오지요. 정치 6개월 한 윤석열에게 조언하는 김종인. 이렇게 보시면 확 들어오지요. 코치이기 때문에 새로운 왕이 될 사람에게 코치를 하는 겁니다. 사무엘하 17장 23절 그 대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참, 인간이라는 게, 인간들이 꼭 자살해야만 죽는 것은 아니잖아요. 결국 죽잖아요. 인간이 늙어 죽든 아파 죽든 결국 죽는데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평생토록 자기 말만 계속해 온 거예요. 자기 말만. 그런데 이 아히도벨은 그걸 압축시켜서 보여줍니다. 인간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원대로 뜻대로 안 돌아갔을 때는 인간이 결국은 자기 속이 열 불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때려치우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세상이 이처럼 내식대로 안 될 바에야 차라리 내가 칵 죽지 뭐.’ 이런 것 있잖아요. 칵 죽지 뭐.

심지어 요새 애들도 그래요. “엄마, 스마트폰 새로 사도.” “네가 뭐 잘한다고 엄마가 사 주노. 성적도 내려가고 폰 가지고 게임만 하고 아직 쓸 만 한데 뭘 바꿔?” 애가 삐져서 “밥 안 먹어.” 하고 방에 들어가서 문 잠가 버려요. “문 열어라.” “안 열란다.” “니가 그 칸다고 사줄 줄 아노. 안사준대이.” 그러면 애 하는 말이 “그럼 칵 죽어뿔지 머.”

그 애가 왜 죽으려고 했을까요? 자기 말발이 안 서니까 죽는다는 거예요. 말발이 안 서니까. 목사가 설교 말발이 안 선다고 ‘내가 사표 내버릴 거야.’ 하여튼 모든 인간들에서 나오는 것이 말과 말들 사이에 왕왕거리면서 말들의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부부가 말다툼하고 싸울 때는 그래도 부부 사이가 얼추 정이 있는, 2퍼센트라도 남아 있는 상태에요.

정말 정떨어지면 그다음부터는요, 입을 다뭅니다. 입을 다물어요. 입을 다문다는 말은, 나는 이제부터 나하고만 말동무하겠다는 뜻이에요. ‘나는 내 안에서 나하고만 살겠다. 나는 너하고 안 살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한테 어떤 새로움의 차이를 못 느끼겠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요, 인간의 정이라든지 우정 믿지 마세요. 이게 시효가 있어요. 15년 가면 많이 간 겁니다. 15년 정도도 아니고 좀 가다가 서로 전화도 안 하고 관계 끊고 말도 안 하고요. 서먹서먹해요. 우리 교회 교인들 말 안 하잖아요. 오지랖이 없다고 내가 전에 좋게 칭찬으로 했지만 여러분, 그것도 기호가 아니고 말일 수가 있어요.

할 말이 없는데요, 뭐. 내 것은 안 다치고 남에게 새로운 것 얻어낼 때는 말문부터 닫아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세요. <아가>를 보세요. <아가>에 보면 그 자체가 완전히 기호의 범벅이에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에 도달했어요. 온 다 벗고 있어도 아무 문제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자기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저쪽에 있어요. 자기야, 자기는 내 쪽에 있지 않고 저쪽에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면서 끊임없이 지금 자기 이야기를 안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런 경험을 했는데,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결국 고린도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상태는 가히 사람의 말로 할 수가 없더라.’ 사람의 말로 할 수가 없더라. 가히.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이게 고린도후서 12장 4절의 말씀이에요.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누군데? 누군데?” “그분이야” “누구야?” “그분이라니까!” “너 같은데?” “아니야. 나는, 말의 세계에서 나는 죽었어. 나는 기호의 세계에, 죽은 채로 기호의 세계에서 나 자체가 주님의 시그니처, 기호야.” 주님이 사용하시는 기호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하는 말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병 걸리라 하면 병 걸리고 나으라 하면 낫고. 15년을 왜 기도해요? 지금 죽으라 하면 죽고, 더 살려주면 사는 것이고, 그거예요.

제가 서울 의존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요한복음 11장 설명하면서.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뒤늦게 들이닥쳤거든요. 그러니까 마리아가 엉엉 울면서 화를 내는데 “제 오빠와 제가 예수님 얼마나 잘 대접했습니까? 얼마나 섬겼습니까? 그런데 우리 집안에 이런 날벼락을 주시고, 이런 저주를 주시고, 젊은 오빠 아직 죽을 나이도 아니고 창창하게 일할 나이의 오빠를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저 어떻게 살아요?” 하지요.

그럴 때 주님께서 “그러면 나는 너한테 뭐지? 이 생명 나무는 너한테 뭐가 되노?” 너는 네 오빠만 생각하는 말의 세계, 말의 세계에서 오빠가 중요하고 완전히 예수님을 빼돌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서 울었어요. 섭섭해가지고. 그렇게 잡채 해주고, 탕수육 해주고 대접은 했지만 사실은 꿍꿍이는 딴 꿍꿍이에요. ‘예수님 이용해서 같이 한번 우리 들이밀어 볼까, 올려 볼까, 한 번?’

집념, 자기 구원에 대한 집착, 발악적인 자기의미를 놓치지 않고 그래서 말의 세계에서 구성한 그 내용을 말씀의 세계 기호의 세계에까지 밀어붙이는 그 악바리, 그것뿐이었습니다. “나는 뭐고? 느그 오빠 앞에서 나는 뭔데?” 여러분, 도대체 주님은 여러분한테 뭐예요 도대체? 왜 자꾸 주님을 이용하려 합니까?

주님 앞에 자기 주제 파악하면 돼요. 이 땅에 사는 것도 우리는 지금 징계받고 있는 거예요. 그만 살아라, 하는 말을 군대 생활 그만하라는 뜻으로 알고 감사해야 됩니다. 제발 축복을 저주로 착각하지 말고, 저주를 축복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 사람 모두 지금 뒤바뀌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 살인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십자가만 들이대는 겁니다. 십자가만. “너부터 알아라, 너부터! 얼마나 지금 거꾸로 살고 있는지 너부터 알아라.” 그 말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정적 기호에요. 결정적 기호는 뭐냐? 모든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의미를 다 지워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내가 시험에 안 드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내가 저 사람 욕했는데 아, 되게 미안해.’ “미안하지 마. 미안하지 마.” ‘내가 이런 나쁜 짓을……’ “그거 기억하지 마.” 아무 의미 없어요. 잘했다는 게 아니고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이미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주님의 하나의 시그니처, 하나의 기호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전달물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다시 보게 해 주셔서 주께서 주를 위해서 만든 세계에 우리가 악한 역, 불신자 역으로 하나님 세계에 이미 포함된 것을 즐거워하게 해 주옵소서. 과거엔 날 위해서 살았던 그 의미가, 지울 수 없는 치욕스러운 나의 과거가 주님의 십자가 피로 날마다 날마다 돌아보면 지워지고 또 돌아보면 지워져 있는 이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림  (0) 2021.11.02
그만 하자  (0) 2021.11.02
왜상  (0) 2021.10.11
목숨의 용도  (0) 2021.10.04
환란에 동참  (0) 202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