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거들내기
2021년 9월 12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1:6-8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인간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도중에 흙과 흙이 만나 흙을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흙으로 환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흙이 된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죽을 때는 죽는 이유가 가득 품고서 죽습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인간은 기계로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기계처럼 행동하므로서 어느새 자아가 생기고 그 자아로 인하여 수동이 능력으로 잠시 행세하다가 강하고 우연적인 능동적 생산에 밀려 다시 수동적으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은 습관대로 움직입니다.
대체로 순조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조로움이 기억하게 되어 있고, 그 기억을 안고 죽습니다. 뭔가 단조롭기는 하지만 순조로운 인생을 보내었는데 여지없이 죽습니다. 왜 죽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살인 사건’과 연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1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는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겁니다. 그 원인이 고린도전서 2:8-11에 나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도저히 알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이 세상에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평생 자신을 정상적인 존재로 여기면서 살다가 이유도, 원인도 모르면서 죽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은 선악체제 때문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선악체제란 선과 악을 자기 앞에 두고서, 그것을 판정하는 판정자의 위치를 선과 악 바깥에 두는 체제를 말합니다.
따라서 선이란, 선과 악을 판정내리는 자아에게 이익이 되고, 그리고 그 자아는 끝까지 옳고 선하고 바르고 훌륭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그 판정을 두고 말합니다. 예수님 살인사건에는 사람들은 유감없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게 됩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자들과 잠시 떨어지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렇게 됩니다. “나는 나를 믿고 근심하지 말자. 내가 나를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도 예수를 믿자”가 됩니다. 즉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을 뽑아낼 여지가 없는 겁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하나님의 조치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1:4에 나오는 선택입니다. 일방적 선택입니다. 즉 선과 악을 판정하는 그 인간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거부해버리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르니까요. 아는 것이라는 것은 없으니까요. 알아봤자 예수님 살해사건을 유발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가인에게 악마는 덮쳤습니다. 즉 악마의 노리는 바가 가인이 노리는 바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이 아벨의 죽음의 정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 겁니다. (마 23:35) 이런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깊은 곳, 즉 성령이 오시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함은 생활기록부처럼 주님께서 아십니다. 불신자, 곧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생활기록부입니다. 이들에게 다음 두 가지 성향을 보일 뿐입니다. 한 종류는 노골적인 승부욕을 늘 나타내보이는 사람과 다른 한 종류는 음흉한 승부욕을 보이는 사람 뿐입니다. 이런 자아는 원래 없던 자아가 딱딱하게 생겨버린 겁니다. 일종이 고체자아입니다.
이런 고체자아는 늘 자체적인 욕망에 결핍을 느끼니까 보형물을 찾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환란’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 시킨대로 해서 제대로 즐거움을 찾지 못하면 꼭 자기 인생이 불행한 것이 부모 탓으로 여기고 물어내라고 억지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환란이란, 예수님의 연속적인 일에 선택당한 자들이 갖게 되는 세상 이해입니다. 이곳은 선택되지 않는 자가 들어오는 것을 주님은 기어이 막습니다. 이 주님의 환란은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의도적으로 유발케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단행하시는 심판의 정당성 때문입니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은 ‘집단 몰락’이라는 겁니다. 마치 가든 파티를 하는 가운데 다같이 지옥으로 추락 중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를까요? 그것은 모두 같은 속도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밷후 3:6-7)
즉 개인 멸망은 없습니다. 집단 멸망입니다. 구원도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선택받은 집단이 구원됩니다. 따라서 고체 자아는 망상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으로만 환란 가운데 기뻐할 뿐입니다. 생명체제 안에서 성도는 이미 뚜껑 열린 채 살아가기에 자체적인 목적이나 의미는 없습니다. 누구와 승부하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알려다가 자신을 알아버린 가룟 유다가 결국 자기를 못버린 그 모습이 사단의 모습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데살로니가전서 1장 6-8절(자아 거들내기)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6-8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6-8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사도가,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말은, 환란을 받아들인다는 그 자세가 이 시대에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사도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을 책망하거나 나무랄 것이나 보탤 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환난이라는 것이 어디서 생기느냐? 7절에 보면 마게도냐와 아가야가 나오는데 주보에 보면 “마게도냐 지역과 아가야 지역을 합쳐서 오늘날 ‘그리스’라는 나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마게도냐는 오늘날로 치면 북한, 아가야는 지금의 남한, 남북한 합해서 그리스가 된 것처럼 그 당시에는 이렇게 지역을 따로 분리해서 봤습니다. 그 지역에 사니까 이것은 땅이지요, 땅에 사는데 땅, 그 지역에 뭐가 추가되느냐 하면, 6절에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세상, 여기에 뭐가 찾아왔느냐 하면, 성령이 찾아온 거예요. 성령은 하늘의 요소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아시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면 땅에 사는 사람은 땅만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 환난이라는 개념이 낯선 개념이 되어 버려요.
살면서 고생하는 것은 환난이 아닙니다. 환난이라 하는 것은 성령의 개입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 보통 사람하고 똑같이 땅에 사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눈에 뜨이는 것이 뭐냐? 환난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한테는 환난은 없고 그 대신 세상 고생만 직사하게 하는 거지요.
고생은 있는데, 자식 키우고, 밥 먹고 살고, 전염병 일어나서 마스크 써가면서 고생은 해요. 이렇게 고생은 되는데 기쁨이 없지요. ‘아이고, 내가 왜 이런 혜택을 받아? 내가 왜 이 환난 속에 들어오는 혜택을 받아? 내가 뭔데 하나님이 저에게 환난 받는 혜택을 주십니까? 제가 황송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사도 입장에서 더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환난을 다 아는구나.’ 네가 게 맛을 아는구나, 하는 것처럼 ‘네가 환난 맛을 아는구나. 네가 성령을 안 받았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환난은 뭐냐 하면, 땅에서 벌어지는 하늘의 요소, 이게 환난입니다. 그래서 환난은 예수님께서 유발시킨 그 사건에 참여한 바 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환난에 참여 된 자가 아니라고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받았지요. 요단강에서 성령 받은 그분이 성령 받은 티를 내면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 사건이 뭐냐? 예수님 살해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살해사건이 이 세상의 핵심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환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살해사건에 참여한 자가 된 겁니다. 그 예수님 살해사건, 이질적인 사건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 못 해요. 그 살인사건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살인사건이 마무리되어야 자기 백성을 온전히 다 데려갈 수 있기때문에 그 사건을 계속 성령께서는 언급을 하는 겁니다.
전설의 고향의 유명한 멘트가 나오지요. 내 다리 내놔라. “너 하나님 어떻게 했어?”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 만나고 싶지만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었다. 왜 나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생각 못 했지?’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따로 챙기고 있으니까 쑥 쑤시고 들어온 하나님을 하나님 아닌 줄 알았지요.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줄 알았지요. 하나님이 땅을 방문한다는 것, 이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우리 교회 코로나 점검반이 들어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지요. 쑥 들어온 거지요. 상상도 못 했지요.
환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살인사건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확대시켜 나갑니다. 누가 죽였는가? 누가 죽였는가? 그 말을 더 정확히 해서 어떤 세상관이 죽였는가? 예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던 그 사상을 바로 ‘선악 체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의 체제, 그 선과 악의 체제를 간단하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나한테 유리한 것을 선이라고 여깁니다. 나한테 유리한 것이 금전적인 유리한 것도 있지만, 건강도 있지만 나는 의롭고, 나는 착하고, 나는 훌륭하고, 나는 고상하다, 라는 것, 그것을 챙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선악체제에 푹 젖어 있다고 보면 돼요.
내가 누구한테 욕을 한다는 것은요, 그만큼 내가 불안하다는 뜻이에요. 젊은 애들이 욕을 막 하잖아요. 청소년 애들이 욕을 하잖아요. 그만큼 내가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이 까발려진 겁니다. 티를 낸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데 이게 뜻대로 안 되니까 화를 내면서 욕을 한 겁니다.
그게 뭐냐? 선악 체제 안에 있기 때문에, 선악 체제에 있는 자를 두고 너는 정녕 죽으리라, 선언했기 때문에 천국에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선악 체제를 생명체제로 바꾸어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선악 체제는, 자기가 착하다고 여기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기 때문에 마지막 최후로 그걸 챙기는 것이지 그걸 빼내지를 않아요.
인간이 자기의 가장 정성스러운 순간이 언제냐 하면, 자살하는 순간이에요. 지성스럽게 가장 자기를 섬기는 순간이 자살하는 순간입니다. 천하에 하나님, 예수님, 누가 와도 나는 나를 당신에게 안 빼앗기련다는 그 고집이 결국 자살입니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자살했잖아요.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에게 있는 그 체제, 선악 체제,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 것만 곱게 순수하게 지키면 되지 않느냐는 그 목적으로 교회 나오고, 자기 몸과 자기 재산 그것도 물론 지키고요, 내 가정 내 자식 그것도 물론 지키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은, 나는 끝까지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싶다, 충성을 다하고 싶은 거예요.
요한복음 14장 1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잠시 헤어지면서 하신 말씀이거든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지금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잖아요. 주님이 헤어진다 하니까. “여기서 헤어지자. 빠이빠이 하자” 하니까 제자들이 근심했어요. 베드로도 근심했고.
주님이 하신 말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을 패러디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근심하지 말라. 나를 믿으니 그 믿음으로 예수라는 타인을 믿으라.” 패러디하면 이렇게 돼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이 근심에 쌓인 이유가, 예수님을 믿은 적이 없고요, 자기자신을 믿은 거예요.
그게 선악체제에요. 선악체제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자석에 보면 N극 S극이 있잖아요. 선과 악이 있고 선과 악을 분별하고 구별하는 제3의 위치에 내가 턱 하니 따로 자리를 잡고 있는 체제가 선악체제에요. 선과 악,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 그것을 판단하는, 제3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위치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위치는 없어요. 사람들은 하나님도 내가 판단할 수 있도록, 당신이 하나님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선의 자리에다 딱 두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판단을 내가 믿으니까요. 나는 나를 안 믿은 적이 없어요. 나를 지키는 것이니까.
가인이 하는 말 있잖아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나부터 챙겨야지 나부터 안 챙기고 아우 챙길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나부터 챙깁니다. 내가 아우나 챙길 필요 없습니다. 나 챙기는 것도 급한 불인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성령 다음에 나오는 말씀, ‘성령의 기쁨’이라는 것, 이게 왜 기쁘냐 하면요, 내가 스스로 나를 뽑아낼 수가 없어요. 내 자아를 깰 수가 없는데 살인사건을 앞장세워서 “네가 나를 죽였잖아. 네가 너를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내가 너한테 배신당했어. 이 제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차여버렸어. 까였어.”라고 들이대는, 이 십자가 사건을 앞장세우는 그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스스로 나를 뽑아낼 수 없는데 성령이 와서 뽑아내 주니 세상에 이런 홀가분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자유라고 하고 그게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생명이란 뭐냐? 나 자체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나의 의미도 없고, 나의 목적도 없고, 그냥 먹먹함 또는 노골적으로 멍청함, 내가 나에 대해서 멍청한 거예요. 사람이 멍청하지 않으면 인간은 습관적으로 행동하게 돼요. 선악체제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습관적인 것이 기억으로 남고, 그 기억이 뭘 로 가느냐? 죽음으로 끝나요.
습관적으로 가면서 느끼는 현상은 뭐냐? 되게 순조롭다는 거예요. 사는 게 그다지 큰 격랑이 일어나지 않고 평소에 하던 대로 했더니만 마스크 쓰는 그것 외에 별문제가 없어요. 아프가니스탄, 그것은 남의 문제에요. 우리나라 문제 아니거든요. 아무 문제 없는 거예요. 굉장히 순조로워요. 순조로운데 죽어요. 어제까지 순조로웠는데 오늘 숨을 헐떡헐떡 헐떡이면서 죽어요.
죽는다는 것은 죽을 이유가 가득하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그 죽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늙어죽는 줄 알았지요. 늙어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인사건과 관련되어서 죽어요. 이게 성령이 와야 알 수가 있어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동안 죽는 순간까지 살았던 모든 짓이 다 헛짓이었다는 것, 그게 다 죄였다는 사실이 죽는 순간을 통해서 십자가로 인하여 심판해버리는 주님의 활동의 증거로 작용해버립니다.
나 안 놀았다 그 말이지요. 이 땅에서 너는 인생 순조롭게 갈 때 나는 안 놀았다는 겁니다. 내가 수시로 너에게 살인사건의 흔적을 줬잖아, 하는 겁니다. 그 살인사건의 흔적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 미련하다는 말이 나와요. 19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총기)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리고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규정을 했다 그 말이지요. 예수님 살해 사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미련하다는 겁니다. 본인이 죽어가면서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제가 지난 토요일에 거제도의 거제대학 입구 쪽의 펜션을 빌려서 하는 야외결혼식에 참석하고 왔어요. 동영상도 좀 찍어보고 그랬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 볼 때 저게 전부 다 흙으로 보이거든요. 흙이 흙하고 결혼해서 흙이라는 아이를 낳는 거예요. 잔디밭에 애들 몇이 또 뛰어놀고 있었어요. 모든 것이 흙입니다. 흙이 흙한테 주눅 들고, 흙이 흙한테 공포를 느끼고, 흙이 흙한테 겁을 집어먹고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돌려보내는가? 처음부터 인간이라 하는 것은, 습관이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은 기계처럼 행동합니다. 기계처럼 행동해서 자아가 생기고, 이 자아로 인하여 수동이 능동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강하고 우연적인 능동이 생산이 되어버리면 거기에 밀려서 다시 수동적인 흙으로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자발적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하는데 수동적인 겁니다. 화학 역사에 이런 것이 나와요. 불이 타는 현상은 공기 없이는 설명이 안 되었습니다. 불이 타는데 왜 불이 타는지를 공기 빼놓고 불을 설명하려니 17세기까지는 설명이 안 된 거예요. 공기 중에 산소가 있어서 그 산소가 결합이 되어서 불이 탄다는 이것은 18세기 되어야 비로소 규정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왜 수동적이면서 능동으로 착각하고 있는가? 환경 자체가 예수님, 하나님을 죽여버리는 그런 환경 그런 공기 속에 우리는 순조롭게 살아오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지혜가 있다 하지만 참 미련해요. 총기(聰氣)가 있지만 총기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흙이 되는 이유, 흙이 흙과 결혼해서 흙을 낳는 이유, 기계가 기계와 결혼해서 기계를 낳는 이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과학이 발달해도, 그렇게 신학이 발달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살인사건, 주님 살인사건을 빼놓고 이야기해서 그래요.
처음부터 기계로 태어났습니다. 아빠 엄마가 기계기 때문에 기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욕망하는 기계입니다. 그냥 흙이에요. 여기서 인간들은 그 기계로 태어나서 나름대로 어떤 환난을 두려워합니다. 선과 악 중에서 나쁜 일 행사하면 기다렸던 환난이 나를 공격해서 내 인생이 힘들다. 그렇게 선악에 매여서 살아가는 거예요.
선악은 악마가 그렇게 인간에게 심어준 거예요. 감당도 안 되는데 인간에게 강요 한 겁니다. 인간은 그냥 악마의 대행자에요. 대변자입니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보내고 악마는 인간에게 자아를 주고, 뭐 양쪽에서 주눅 들게 만들어요.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거예요.
환난이라는 것은 흙과 결합된 요소가 예수님 살해사건을 낳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환난이에요. 성도에게 환난은 그런 겁니다. 흙인 인간이 단순히 흙이 아니라 배후에 다른 요소가 결합이 되어서 “죽여! 죽여!” 해서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을 왜 그렇게 싫어하고, 하나님은 좋아하면서도……,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하나님을 좋아한 사람들이에요.
사울도, 나중에 바울 된 사울도 그랬잖아요. 왜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하는지. 그것은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룟유다가 왜 예수님을 버리고 자살했습니까? 예수님을 알려고 하다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요. 아, 이게 상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함부로 교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그렇게 애써도 결국 나는 이 세상 마귀 쪽에 설 수밖에 없어요. 같은 흙덩어리에 주눅 들고 고개 숙이고 그쪽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에요. 인간이 이게 흙인데 악마가 선악사상을 줘버리니까 그게 결합이 되어서 악마의 자아가 인간의 자아로 그대로 인수인계 된 거예요. 그냥 쑥 들어온 거예요.
그게 창세기 4장의 가인의 마음입니다. 악마가 가인을 올라타고 가인의 마음에 악마의 마음이 그냥 들어가 버리니까 가인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동생 아벨을 그냥 죽여버린 거예요. 그 사건이 창세기 4장의 사건이고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아벨의 피와 스가랴의 피 그리고 내 피, 그 피와 피의 연쇄고리를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가인에게 악마가 덮치는 그것도 실제사건이에요. 악마 안 보인다고 자꾸 없다고 우기지 마세요. 실제 사건이에요.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으면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어요.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요.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자기 환난을 자기 쪽에서 처리하기 위해서 아주 노력을 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엄마하고 딸이 있다 합시다. 자식들은 다 엄마하고 교류하면서 크잖아요. 엄마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내가 시험준비 했다. 그동안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만족을 주는 것들을 내 인생에서 봤는데 엄마가 시험준비하고 공부해라, 하는 그 소리 때문에 내 인생의 대만족에 손상이 갔으니 그걸 물어내라’ 하는 식이에요. 그게 딸이 엄마한테 하는 소리입니다.
이걸 보형물이라 합니다. 심리적 보형물. 보형물이라 하는 것은 다리가 없는 사람에게 없는 다리 대신 끼워 넣는 대체물을 보형물이라 하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이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심리적 보형물을 갖고 있어요. 심리적 물질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전부 다 남 탓이에요. 당신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 못했으니까 당신이 물어내라는 겁니다.
그 심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물어내라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교회 와서 그렇게 기도합니까? 하나님이 부모니까 물어내라는 거예요. 내 즐거움을 앗아갔고,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고생고생했는데 그 고생한 것 하나님이 천국 가서 물어내든지 이 지상에서 복을 주든지 물어내라는 거예요. 흙인 주제에요. 기계인 주제에. 주님께서는 그 행함책에 있는 인간들 생활기록부에 다 적습니다.
모든 인간을 볼 때 악마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악마의 마음은 여자의 후손한테 이기려는 거예요. 뱀의 후손이 해야 될 일이 그거예요. 여자의 후손을 이기는 것. 그 승부욕이 작용하는 겁니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음으로 그다음부터는 가인의 마음에 승부욕이 작용한 겁니다.
승부욕이 작용하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저도 생활기록부 작성해 봤습니다만, 어떤 애는 투명하고 순수해서 자기의 승부욕이 그대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아이들이 있어요. 노골적으로 승부욕이 작용하는 사람, 순수하고 순진하고 투명하게 계속해서 말을 해서 타인에게 다가서는 사람, 그것은 노골적인 승부욕이 작동하는 거예요. 그 노골적인 승부욕이 작동해서 뭐가 되느냐? 흙이 됩니다. 기다리던 흙, 다시 본래의 수동적인 흙이 돼요.
그다음에 어떤 게 있느냐 하면, 말은 안 하고 말할 것을 딱 참다가 결정적일 때 말을 하는 음흉한 승부욕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흙이 돼요. 세상에 사람은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두 종류밖에 없어요. 제가 승부욕으로 모든 인간을 다 본다는데 뚜렷한 예중 하나가 스토커에요.
스토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스토킹 당하는 사람에게 자꾸 달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거예요. 스토킹 당하는 사람은 줄 것이 없는데 내 보형물, 내 대체물, 내가 결핍된 것을 계속 달라는 거예요. 미치는 거예요, 이거. 네가 뭔데? 계속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겁 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은 꼭 스토커 같아요. 하나님을 스토킹하는 스토커. 계속 달라. 왜 주는데? 그래야 내가 이기고 싶은 마음이,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그 마음이 내게 즐거움으로 만족이 되겠다는 겁니다. 이 보형물, 보충물, 심리적인 보형물,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자아는 악마로 인하여 딱딱한 고체가 된 거예요. 고체가 되었으니까 한쪽이 잘리면 그걸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TV 잘 안 보는데 어느 프로그램 잠깐 봤는데요. 백 종원씨가 뉴욕에 가서 길거리에서 햄버거를 먹어요. 그걸 카메라에 담는데 그 햄버거에서 육즙이 흘러넘치고 있어요. 길에서 먹기에는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육즙이 흘러넘쳤어요. 그걸 보고 알았습니다. 아, 자아는 저래야 된다. 분명히 고기는 고체인데 고체를 씹으니까 거기서 육즙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고체 자아에서 액체 자아로 변해야 되는 거예요.
flux라 하는데 이게 흐름이거든요. 흘러넘쳐야 돼요. <터미네이터 2편>에 보게 되면 T-1000이라는 액체금속이 나옵니다. 총에 맞아도 다시 원상 복구되지요. “I’ll be back” 손가락만 남고 사라지는 그것. 이게 뭐냐 하면, 액체거든요. 용광로에서 그냥 녹아버리는 액체라 그 말이지요.
악마는 우리를 고체로 만들었어요. “너 있다. 너를 믿으라. 단단한 너를 믿으라. 더욱 단단하게, 확고하게 더욱 강화시켜야 돼.” 악마는 자꾸 우리를 고체로 만들고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씹어서 우리를 액체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없다. 그런 것.” 그냥 흘러내려가서 없는 거예요. 없게 하시는 겁니다.
왜? 내 자아, 우리의 자아는 이미 주님 살인사건을 통해서, 주님에 의해서 이게 교체가 되어서 선악을 바라보는 고체적인 자아에서 생명체제가 되어버리면 주인공은 이미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특징은 그냥 주시는 겁니다. 생명을 그냥 주시는 거예요. 아무나 주지 않아요. 선택된 사람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고체자아가 되어버리면요, 여기서 경쟁이 유발됩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든 거예요. 70 넘으신 분 아시지요. 한평생 살아왔는데 그 살아온 이유가 뭔지 아시지요. 경쟁 때문에 살아요, 경쟁 때문에. 여러분, 이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느 대기업에서 입찰을 한다 합시다. 그런데 어느 집 딸 둘이 다 결혼해서 남편들이 있다.
남편들끼리는 동서사이지요. 동서들이 각각 중소기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기업에서 입찰한다 했을 때 동서들간에 입찰 경쟁을 해 보세요. 누구 편들 거예요? 동서들끼리라 하지 말고 고체자아들끼리 입찰경쟁 해보세요. 누구 편들 겁니까? 누구 편을 들 수가 없어요. 낮은 단가 써내는 사람이 당첨되는데 이게 경쟁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1장 4절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합니다. 생명체계에서는 해결이 간단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택하심을 알면 게임 끝났어요. 택했다는 것은 나의 고체자아를 하나님께서 개무시해 주신다는 겁니다. 개무시하게 되면 고체 자아는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흘러내려야 돼요. 무게감을 줄이고 없애고 흘러내려야 돼요.
주께서 선택해서 오늘 하루를 산 겁니다. 주께서 선택해서 예배시간에 누가 뒤에 온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살해사건에서 보낸 일들이에요. 오직 택한 백성 맞냐, 라고 하면서 주께서 보내신 사람들이에요. “네가 택함 받은 것 맞나? 그것도 수동적인 흙이니 그냥 끝까지 수동적 흙으로 돌아가라.” 쉽게 말해서 이 순간 이 시점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 그 말이에요.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 이 시점에서.”
그러면 저 다른 사람은요? 다른 사람은 집단 몰락이에요.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집단의 문제입니다. 제가 거제도 결혼식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그것은 집단적 가든파티에요. 몰락하는 중에요. 몰락하는데 다 같이 흙이기 때문에 아무 감각이 없어요. 등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가속의 느낌이 없어요. 그런데 저 뒤에 있는 분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들어와서 예배 참석하라고 하세요.
노아홍수가 뭐냐 하면, 집단 몰락이었습니다. 개인구원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개인구원이 되 려면 이게 고체자아가 될 때 개인구원이 성립되는 겁니다. 있지도 않은 개인구원, 그런 것 없어요. 지금 다 같이 위에서 아래로 몰락하고 있는 중이에요.
베드로후서 3장을 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불사르기 위해서. 무슨 개인이 있습니까? 사람이, 개인이 누굴 믿어 버리면요, 이것은 개인이, 절대자아가 고착이 되어버려요.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없는데 내가 왜 믿어요?
성령이 왜 오셨습니까? 주님의 믿음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해서 주님부터 해서 주님으로, 이걸 믿음으로부터 해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이에요 이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 중간에 행함은 쏙 빼라는 겁니다. 악마에 속한 고체자아 주제에 그 가짜, 수동적으로 누구한테 농락당하면서 사는 주제에 뭘 믿음이 있어요? 믿음 없어요. 믿음, 소망, 사랑 없어요. 인간이 느끼는 환난이라 하는 것은 전부 다 남 탓입니다. 아, 인간이, 고체자아가 하나님을 못 버리는 것은 아이가 부모를 못 버리는 것과 똑같아요. 기어이 탓을 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을 계속 찾는 거예요.
인간의 그 고체자아는요, 자기의 욕망, 야망을 자기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만족을 찾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에어프라이로 만든 카스테라, 가스렌지로 만든 카스테라, 전기밥솥으로 만든 카스테라, 전자렌지로 만든 카스테라가 맛이 다 다르대요. 제가 보기에는 그게 이 세상의 환난입니다. 주는 대로 먹지 왜 그런 맛을 따로 찾습니까?
아메리카노와 가장 어울리는 디저트가 뭘까? 크럼블 밑에 그 톡톡 튀는 과자에 스트로베리를 놓느냐, 블루베리를 놓느냐, 아니면 초콜릿에 바닐라를 섞어 놓느냐, 아니면 솔티드카라멜, 소금친 카라멜을 놓느냐, 어느 것이 아메리카노와 가장 잘 어울리는 디저트냐? 백종원이 뉴욕 거리를 다니면서 그거 연구하는 거예요.
얼마나 사는 게 힘들고 환난이 많았으면 그거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숨통이라도 터보고 위로를 받아보겠다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내가 뭐가 잘못됐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자기한테 충실해도 한순간에 다 와르르 들통납니다. 더이상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애착하지 마세요. 미련 두지 마세요. 한순간에 다 바닥납니다. 한순간에!
이 집단 몰락은 확정된 거예요. 그리고 이 집단몰락은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냥 몰락하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절차 따지지 말고 그냥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사는 게 습관이고, 자기 기억이 있고 그 기억으로 인하여 죽어가는 거예요. 그게 인간으로서는 굉장히 순조롭지요.
그 모든 것의 집단적인 그 원인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언급을 해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나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단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는 말은……, 좀 어렵더라도 참아주세요. 이걸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육의 힘으로 그 고체자아의 힘으로 어떤 지혜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그 말이에요. 자기의 신학적인 힘으로, 철학적인 노력으로, 어떤 과학적인 힘으로도, 고고학적 증거로도 숨겨져 있는 것 접촉이 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 살해사건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래서 지금 이 고린도교회에 이 편지를 했거든요.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도 마찬가지예요. 아가야 마케도냐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주신 계시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신 계시거든요. 지금 사도바울이요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했어요.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은 진짜 성령 받은 사도, 주님의 제자인 사도,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는 그 사도에게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없습니다. 위로한다면 환난으로 위로하는 것, 그 외에는 없어요.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된 자가 있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심지어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한 것이 뭐냐? 그게 예수님 살해사건,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알았느냐?” 대번에 반박 들어오지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갑자기 훅 들어옵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땅이에요. 땅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고 그런 살아 있는 인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인간들 중에서 인간이 왜 죽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냥 습관대로 너 사는 대로, 남들 사는 대로 습관대로 모방하면서 그냥 사는 거예요. 굉장히 모든 것이 순조로워요. 그것도 되게 순조로워요. 환난? 없어요. 그냥 인생이 사는 것이 순조롭다니까요. 일요일 되면 교회 가고, 월요일 되면 자기 직장에 가고. 얼마나 순조롭습니까?
여러분이 책을 읽을 때에 페이지만 15페이지, 16페이지, 그런 식으로 그 페이지만 읽어보세요. 책 읽는 것이 그렇게 순조로워요. 그리고 금방 끝나요. 그걸로 책 한 권 다 뗐습니까? 인생 살면서 가을, 다음에는 겨울, 다음에는 봄, 다음에는 여름, 계절만 카운트하면서 살아가면 굉장히 사는 게 순조로워요.
인생 뭐하러 왔어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계절만 헤아리면 인생 아는 겁니까? 책 읽을 때 페이지 숫자만 보면 책 다 본 겁니까? 아니지요. 책장이 왜 넘어가는지 알아야 될 것 아니에요? 책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나님께 갔는데 하나님도 그걸 몰랐어요. 그건 뭐냐? 하나님의 깊은 것, 성령께서만 그걸 알려줍니다.
목사가 되어서 설교를 하다, 하다, 이제 하나님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런 소리까지 굳이 내가 해야 되는지……. 하도 인간의 하나님이 가짜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알려 줄 거야. 간증 집회 참석하면 알게 될 거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간증집회는, 그건 하나님 아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제일 중요한 원천을 알아야지요. 제일 기본을 알아야지요, 기본을!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또 나옵니다. “아~무도!” nobody,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또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신령한 것이기에 육의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고 육의 사람의 특징이 뭐냐? 미련하다. 그러면 여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십자가는 뭘 유발한다? 환난을 유발한다. 환난 유발자는 누구냐? 십자가에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복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순조롭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환난을 유발시킵니다.
환난을 유발시키게 되면 환난을 유발시킨 그 장본인을, 그 혐의자를 뭘로 바꾸느냐? 육의 사람으로 살인사건을 일으켜서 너희가 환난을 일으켰다고 피의자를 바꿔버려요. 피의자 변경이 일어납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잖아.”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식으로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잖아.”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 KBS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이런 것 안 나오지요. 이 재명 이야기나 나오지 그런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왜냐? 그들에게 지혜가 없어서 그래요. 그들이 미련해서 그래요. 그들이 가든파티를 열고 있는데 그 파티가 지금 맹렬한 속도로,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추락하면서 같이 추락하니까 정상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 없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 가든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전부 다 단단한 고체들이에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죽여버린다.’ 그런 식이에요. 성도는 뭐냐? 이미 주께서 일방적으로 생선 통조림 뚜껑을 열어버린 게 성도에요. 뚜껑을 열었어요. 주께서 성령으로 열어젖혔기 때문에 그 내용물이 다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 안에 담겨 있어요. 그걸 부끄럽다고 내 힘으로 도로 닫아도 소용 없습니다. 바이러스 곰팡이 다 핍니다. 이미 뚜껑을 열어젖혔어요.
그러니까 성도한테는 뭐가 없느냐? 뚜껑이 없습니다. 뚜껑 열릴 일이 없어요. 이미 뚜껑이 열렸으니까. 그 안에서는 쏟아보면 다 액체에요. 주님의 십자가로 흘러가는 액체. 환난을 알아먹는 그러한 내용물입니다. 주님과 성령이 함께 있으니까 ‘야, 내가 사는 것이 환난 속에 사는구나.’라고 이걸 발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11장에서 주님께서 실습을 시켰습니다. 마태복음 10장과 11장에서 주님께서 열두 제자 뽑아놓고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이거였어요. 복음을 전해라. 복음을 전하는 게 뭐냐 하면, 제가 아까 말씀드렸어요. 순조로운 일상 가운데 환난을 유발시켜요. 가만 있는 고체 자아들을, 인간이라고 우기는 자를 주님 쪽에서 건드리게 하라는 말이지요.
자기 제자를 가지고 쉭, 쉭, 건드려, 건드려, 하는 식으로 건드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헤어질 때 자기 자존심 안 상하는 방법 중 하나가 까이기 전에 먼저 까라는 원칙이 있어요. 주님은 이 땅에서 까이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통해서 먼저 까라는 거예요. 복음으로 먼저 까라.
그러면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핍박이 일어나는 거예요. 핍박을 유도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21, 22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제자들에게는 무슨 느낌인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고체자아로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권력을 끌어모으려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하늘나라를 어떻게 한번 해볼까, 라고 생각한 거예요.
제가 어제 버스 타고 결혼식 가면서 옆에 앉은 분과 이야기를 했어요. 대구의 옛 남부 정류장 근처 큰 교회 이름 뭡니까? 동신교회, 그 교회 목사가 나이 70 되어서 나가면서 20억 달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참 교인들이 나쁘다.
이것은 교인들이 나빠요. 모든 목사가 그런 줄 왜 몰랐어요? 소유거든요. 20억이면 소유 아닙니까? 고체자아에요. 고체자아는 힘을 모으고자 하는 겁니다. 날 무시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성령이 없는 사람은요, 반드시 그 값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승부욕이거든요.
아까 설교한 것 다 잊어버렸지요.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은 겸손해야 되고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얼마나 이야기했겠습니까? 그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자기가 승리하겠다는 하나의 수완이고 방법이었던 거예요. 모든 복음이라는 그 자체가. 나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그거였다 그 말이지요.
이걸 아까 설교한 내용대로 하면 뭐냐 하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그게 아니고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라에요. “여러분 자신을 믿고 그 자신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개인적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온 거예요. 그 이야기만 알아듣고 그 사람을 당회장 목사로 세운 거예요.
내가 거기서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서 한 수 거들었지요. “그러면 목사님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니까 “저는 교인들하고 약속했습니다. 교회 예산 없는데도 목사 월급 준다고 하는 것은 내가 못 참으니까 교회 예산 돌아가는 범위 내에서 생활비 달라고 20년 전에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돈 일단 받고 교회에 그 돈 다시 내면 안 되느냐?’ 괜히 목사가 그런 데서 자기 의를 세울만한 짓은 할 필요 없잖아요. 돈 일단 받고 “교회가 어려워요? 이 돈 다시 드릴게요.”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런 쓸데없는 짓, 그런 식으로 해서 내가 이렇게 훌륭한 목사다, 하는 그 짓 할 이유까지는 없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신경 쓸 것은 없잖아요.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 은퇴하면서 20억 달라고 했다고 놀라지 마시고 이게 등속운동, 전부 똑같이 다 추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왕 추락하는 것, 이왕 성령 못 받은 것, 고체자아나 강화시키면서 남한테 개무시 안 당하고 사는 게 사는 보람이다, 뭐 그런 식으로 우리는 습관화 된 거예요. 그리고 날 이렇게 만든 것은 전부 다 남 탓인데 그 탓이 누구 탓이냐? 하나님 탓이에요.
하나님 믿는 게 화근이에요. 하나님 믿는 게 화근이라고요. 마태복음 11장 20,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여기에 소돔과 고모라가 나오는데 다시 말합니다. 집단 몰락이에요. 다 같이 몰락하는 거예요. 22, 23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기꺼이, 기어이 너희는 선택 안 되었으니까 오지 말라고 밀어내는 작업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복음만을 전해야 되는 이유가, 선택 안 된 사람들이, 넓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몸소 체험하라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신 거예요.
제자들은 이렇게 복음 전하면 자기들에게 어떤 권세가 있어서 자기들끼리의 어떤 집단을 만들 줄 알았지요. 그러나 결국은 뭡니까?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배신했잖아요. 그 뒤에 누가 오느냐? 성령이 왔다 그 말이지요. 성령이 왔다면 과거를 다시 한번, 과거에 그들이 한 행세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는지, 예수님, 예수님, 하지만 내생각, 내생각, 내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을 거덜 내는 복음인 줄 몰랐던 겁니다. 나를 거덜 내는 거예요. 나를 거덜 내는 거라고요. 왜? 내 힘으로 못 거덜 내니까. “그냥 네 식대로 살다가 그냥 액체가 되어라, 이 액체야.” 이런 식으로. “그냥 흘려 버려라. 증발되어 버려라.” 아무 목적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으니 그냥 멍청하게 사는 것, 이게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이 기쁨을 모르고 우리는 고체자아로 살게 됩니다. 흔히 우리의 그 말, 습관적인 말, 자기의 고체자아, 딱딱한 자아, 보형물을 원하는 자아, 나를 못 버렸다는 그 증거, 그 증거가 평소의 말투에 나와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제 차에서 내려 주시지요, 내 집에서 나가주세요, 이런 것들, 이런 모든 단어들이 평소에 어떤 의도와 목적에 우리가 매여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선악체제의 그 틀 안에서 의미와 목적을 끄집어내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악마로부터 훈련받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것이 결국은 나의 승부욕을 자극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면서도 허무하게 죽는 순간에 그게 다 몽땅 헛짓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그냥 어디로 가는지 끌려가고 있다는 것, 이게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 사실이 십자가를 통해서 미리 간파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의 그 환난, 세상을 향하여 환난을 유도하는 그 환난 속에 우리는 복음 전하는 자로 참여되었다는 것, 이것이 선악체제에서 이제는 생명체제로 교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 환난 속에서 기뻐함, 기쁨과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 죽음 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저희는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실 때 모든 자가 피의자가 되고, 모든 자가 아무도 주님을 못 알아본 그 결과가 살인사건으로 주어졌기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자아를 고집하지 말고 이제는 주님의 뜻 안에서 주님만 증거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