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뭐지?

아빠와 함께 2021. 5. 25. 08:14

안양20210513A슥6장12절(뭐지?)-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6장9절을 하겠습니다. 9절부터 15절까지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우선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몰라요. 성경 자체가 그래요. 성경 자체가 한글은 읽을 수는 있잖아요. 의도가 뭔지, 왜 이 글을 굳이 인간에게 꼭 하셔야 되는지, 그 의도가 뭔지를 몰라요.

의도가 파악되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알아먹지를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미군 부대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어릴 때에 대구에 주둔 많이 했거든요. 미군부대에 철조망이 쫙 쳐져있다 말이죠. 그러니 미군 부대에 애들이 과외도 없고 학원도 없고 학교 마치면 미군부대에 근처에 이제 외국사람 구경하러 자주 놀러 가면 무엇이 그리 궁금하냐 하면 그 철조망 안에 미군부대가 굉장히 궁금해요. 그런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철조망을 쳐놨으니까.

성경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철조망을 쳐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들어올 수 없는 세계에요. 성경이라는 세계는 철조망을 쳐놨어요. 성경책은 있는데,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 알아먹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이 성경을 알아먹지 못해야 그 다음부터는 인간들이 자기 속에 있는 자기의 본심이 있잖아요. 본심. 본심을 두 자로 바꿔 써서 이야기하면 구라지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끄집어놓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 속에는 못 들어가고 성경에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걸 끄집어내서, 끄집어 낼 때 무엇이 튀어나온다? 본심이 노출되고, 본심이 노출되어서 이 노출된 본심은 인간들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의 본심과 다른 사람의 본심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이게 구라가, 거짓말이 되는 거죠. 이 거짓말로 만들어낸 게 뭐냐 하면 교회라 하는 겁니다. 교회, 종교,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신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신을 알도록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니까 인간들은 절대적인 존재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줘야 인간은 평정심을 가질 수가 있어요. 의존하고 믿고 기도하고 충성을 다할 때 그 고정된 변동이 없는 확실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거기에 대한 보상과 이익은 누가 보겠어요? 그 하나님을 믿는 내가 마음에 안정을 얻겠지요. 그 안정을 얻으면 그게 행복이지요. 행복하기 위해서 뭐를 요청하게 된다? 신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요청 하게 되어있어요.

이게 교회가 상품으로 팔아먹는 내용입니다. 그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만나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구라를 거짓말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 목사가 만약에 김씨라면 김구라. 궁극적인 존재가 존재하지 아니하면 자기의 존재가 허망해지고 허무해져요. 그러면 인간의 본심은 뭐냐 안 허무해지려고 애쓰는 게 인간의 본심입니다.

자, 인간의 본심이란 나만은 안 허무하고 싶다. “이렇게 살 수는 없는 거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이렇게 내가 망가지거나 무너질 수는 없는 거야. 나는 버텨야 돼. 나는 다시 일어서야 돼. 용기를 가져야 돼. 왜 인간은 용기를 가져야 될까요? 왜 다시 일어서야 될까요? 본인이 그러고 싶어서 일어서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지요. 실은 그게 아니고 나에게 기대를 걸고 주목하여 보는 눈들이 많아요. 내가 무너지게 되면 남들이 실망하잖아요. 나한테 기대 걸던 사람.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주시하는 사람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부부가 나이 연로한 사람이 돌아가시게 되면 한 사람도 곧장 자기를 주시할 사람이 사라졌잖아요. 그럼 자기가 살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내가 없지요. 내가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두뇌의 시스템 자체가 인간의 두뇌는 아까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 양식 먹이고 밥 먹인다고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에요.

두뇌의 활동은 외부환경과 끊임없이 주고받고, 주고받고, 이게 끊어지게 되면 이게 주저앉게 되어있어요. 이게. 무너지게 되어있다고요. 그걸 두뇌를 연구하는 그 두뇌 신경 과학사들이 실험을 많이 합니다. 대화하는 상대가 없을 때 인간이 두뇌를 명석하게 만드는 신경전달물질은 얼마나 그 활동성이 떨어지는가를 데이터로 만들어요. 대화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그 두뇌세포가 이게 함몰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함몰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남편이 일찍 죽고 난 뒤에 아내가 남편 이름을 부르지요. 그럴 때 자식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이고, 어머니. 제가 자식이 여기 있잖아요. 돌아가신 아버지 찾지 말고 우리가 잘해줄게요.” 이렇게 하는데 그거는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래요. “너무 오지 마라. 너희 힘들다. 내 혼자서 잘 산다.” 그건 그냥 안 무너지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맨날 여보! 하다가 요양병원 들어가는 거죠. 그 다음부터는 여보! 다 잊어버리고 그냥 연명. 연명시간에 돌입하지요. 연명하는 것. 연명은 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단백질, 탄수화물 공급하는 거지, 산다고 볼 수 없어요. 산다는 것은 대화 상대가 없을 때는 그게 사는 게 아니고 죽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하고 대화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난 뒤에는 진짜 대화해야 될 하나님과의 대화상대가 끊어졌잖아요. 끊어졌으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스케줄은 뭐냐, “살다 그냥 죽어.” 이리 되는 거예요. “니가 살고 싶어도 내가 죽여줄게.” 그래서 인간은 그냥 살다 죽으면 되는데,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잖아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죽는다!‘ 에요. 죽는 이유가 이미 죽어있기에 죽는 거예요. 죽어있다는 규정 하에 그 나타난 결과는 죽는다, 입니다.

어느 인간도 여기서 예외가 없어요. 공통점은. 그런데 죽을 때 그럼 그냥 죽으면 죽지. 그러잖아요. 문제는 이게 죽어야 되는데 안 죽는 게 있어요. 인간에게. 이게 악마와 만나가지고 인간에게 발생된 건데, 이건 죽여도 안 죽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나’에요. 나. 나는 심지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자살하잖아요.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자존감, 나의 명예, 이름, 그거 살리기 위해서 자살하는 거예요.

주로 서울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관악산에 많이 가요. 검찰청에 한 번 갔다 오고 그 다음날 죽고. 검찰청 사진 한 번 찍고 그 다음 한 주 내에 죽고.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억울해. 이러면 죽거든요. 억울하다고 죽거든요. 연예인들이나 이런 사람들 자살하는 사람. SNS 거기에 뭐 안 좋은 게 있으면 젊은 20대 애들이 괴로워하면서 죽는다고요.

자, 괴로워할 때 누가 옆에서 지켜가지고 찌르던가요? 바늘로 찌르던가요? 아니지요. 그 넓은 아파트에 지 혼자 사는데 뭐. 자기하고 개하고 사는데 뭘 찔러요. 아무도 안 찔러도 자진해서 자기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자살이라는 말을 흔히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 자체는 스스로 죽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자살하는 사람 물어보세요. “당신은 왜 자살을 기도했습니까?” 하면 남들이 나를 죽였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자살 안 해도 얼마나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는 남들의 기분 맞춰 사는 거예요. 남들의.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나는 ( )다. 나는 타인의 몸종이다. 타인의 몸종. 참, 이건 모든 인간이 고질병이고 정신병이에요. 지금. 나는 해놓고 이거 보세요. 말 자체를 보세요. 재미있잖아요. 나 해놓고 타인 나오지요. 나하고 타인하고 누가 우세합니까? 남이 우세한 거예요. 타인이 우세한 거예요.

그러니까 몸종이지요. 몸종.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나의 주인이. 그러니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어떤 사람이 인기 얻는 걸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100명한테 유명하면 그 사람은 100명의 몸종입니다. 1000명에게 인기 있으면 1000명의 몸종이고. 어떤 60 중반 된 아저씨가 직장에서 마음에 드는 결혼 안한 아가씨하고 장난치고 사귀자고 했다 합시다. 직장에서.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저도 중소기업 다녀봤지만 대기업은 성희롱 이런 게 있지만, 중소기업은 말하지 마세요. 이건 개판입니다. 특히 현장직에서는 개판이에요. 이건. 보상하고 그런 식으로 못 따져요. 돈이 중요하지. 무엇이 중한디. 돈이 중요하지. 직장에서 농담 듣는 건 그건요, 예사입니다. 비일비재한 거예요.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아가씨 그래가지고 “과장님, 이러지 마세요. 나는 당신 안 좋아합니다.” 이 소리 들었다 해가지고 과장이 관악산 가가지고 자살합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박원순은 왜 자살했습니까? 박원순 서울시장은 왜 자살합니까? 존재의 무게는 타인의 무게에요. 남의 시선의 무게가 자기 존재의 무게에요. 이건 망상입니다. 이건. 언제 타인이 나한테 밥 준 적 있어요? 뭐 해준 적이 있습니까? 왜 내가 돈 벌어서 밥 먹고 사는데 왜 남들 의식을 합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게 원인이 뭐냐, 나, 이게 문제거리입니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몸종이라는 말도 되지만, 나는 성경은 이렇게 봅니다. 쫓겨난 존재. 누구로부터. 하나님의 대화 상대로부터 쫓겨난 존재. 이게 바로 창세기 3장24절입니다. 나는 원래 같은 인간하고만 대화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하고 주고받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우리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지 말래. 니 내있는 곳에 들어오지 말래. 창세기3장24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자, 하나님을 알려면 그거 알면 하나님 거의 반 이상을 아신 게 돼요. 이런 거 보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알았었는지. 질문해드리겠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3장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자, 하나님께서 누구를 쫓아냈지요? 인간을 쫓아냈지요. 자,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답변은 인간을 쫓아내시는 분. 이분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 헌금 바치고 기도하고, 충성하고, 전도하면 흔쾌히 받는 하나님은 그건 교회가 만든 가짜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인간을 쫓아내시는 분이에요. 인간을 안 만나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게 성경에 있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 읽어봤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몰라요. 무슨 뜻인지 몰라요.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성경책을 줬지만, 우리는 못 알아본다는 말은 바로 그거부터 시작을 출발을 해야 돼요. ‘아! 도대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도대체 못 알아듣는구나! 그게 나구나.’ 못 알아들어요. 뭐 천당을 가던 뭐 구원을 받던 알아들어먹어야 천당을 가던 구원을 받는데 애초부터 알아듣지도 못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믿을 것도 없지요.

뭘 알아야 믿지요. 그래서 가짜 하나님을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교회에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내요. 하나님은 이런 걸 원하시고,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고, 이런 믿기를 원합니다. 믿으십니까? 아이구, 구원받았습니다. 천당 갑니다. 계속해서 교회는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해나가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옛날에 김병조라는 사람이 유명한 멘트를 한 게 있어요. 김병조개그맨. “나가 놀아라.” 하는 말 있잖아요. 그 말이 창세기3장24절 말씀과 딱 맞아요. 나가라! 이 말입니다. 나가라. 오지 마라, 이 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쫓아내십니다. 반기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헌금가지고 왔습니다. 하면 니나 맛있는 거 사먹고 니나 하라. 돈 받쳤다고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아니 근원적으로 내쫓았는데 뭘. 우리가 돌아올까 싶어서 누가 지킵니까? 창세기3장24절 누가 지킵니까? 거기에 보안요원 있지요. 보안요원. 경비원 있지요. 누굽니까? 천사지요. 두루 도는 천사가 불 칼을 들고 근처도 못 오게 만들었어요. “나가! 너희는 나가! 죽어라!” 그래서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죽습니다. 죽고 이게 곧 저주지요.

저주하는데, 이게 나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죽어버리면 괜찮은데 나라는 이런 집착, 나에 대한 숭배, 나에 대한 집념, 이걸 가지면서 죽으니까 몸은 죽어도 나는 건지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분열, 더 노골적으로 찢어짐. 나와 내가 사이에 찢어짐이 일어나요. 그래서 인생사는 게 아파요. 세상만사가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나는 여기 있는데 내 맘대로 되어야 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통 세상은 나는 누구냐 하지요. 나는 누구냐? 요 질문하지 마시고 이렇게 하면 돼요. 이것은 무엇이냐? 나는 누구냐? 하지 마시고요, 이것은 무엇이냐? 고 하세요. 나는 누구냐, 에서는 나는 살아 있잖아요. 이것이 무엇이냐, 할 때는요, 어떤 물건, 또는 사물, 어떤 현상, 이리 있을 때는 그 순간만큼은 이 질문을 한 순간만큼은 누구를 잊어버립니까? 나를 없앨 수가 있어요. 나를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이 일을 해야 돼요. 사람이 일을 할 때 나가 사라져요. 나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불만과 근심, 걱정도 같이 사라져요. 사람이 개 키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이것이 무엇이냐,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출애굽기16장15절,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이것이 무엇이냐?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하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자, 신앙은 이것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져줄 때 이건 기존의 인간세계에서는 없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예상한 것 아니에요. 인간이 예상한 것도 아니고 더 중요한 말은 인간이 가능한 게 아니에요. 인간이 공장에서 만들어낸다든지 이렇게 예상해서 설계도 만들어서 찍어낸다든지 시장에 상품화되어 나온 게 아니고 전혀 생각도 못한 것. 그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이것이 무엇이냐, 가 되지요. 갑자기 뭘 잊어버려요. 나를 잊어버리지요. 그리고 그 무엇이냐는 이름이 없는 거예요. 이름을 안 지었다는 말은 생소하다는 뜻이거든요. 기존의 인간들 속에 흔히 봤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더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들이 여러 명이 있는데 인간들이 하나의 새끼, 짚으로 만든 새끼, 새끼 꼬잖아요. 그 하나의 전부 다 새끼라면 이들이 뭉쳐버리면 뭐가 되지요? 새끼줄이 되지요. 새끼줄은 뭘 만드느냐 하면 경계선을 장식합니다. 그러니 나가 사라지고 하나의 줄. 하나의 선이 되는 것이 성도의 입지에요.

꼬아가지고 독립적으로 자존적으로 살면 힘들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걸 혼자서 살지 못하고 꼬아가지고 새끼줄을 만들어버려요. 새끼줄을 만들면 나중에 선이 되지요. 그러면 이 새끼줄이 어디에 이렇게 배배꼬여가지고 이리 있다면 이 선으로 인하여 두 영역이 발생됩니다. 한쪽은 A라는 지역, 한 쪽은 B라는 지역이 생기겠지요. 이게 성도의 역할이에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이스라엘백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로 이것이 무엇이냐에 마음을 빼앗기게 만들어가지고 이스라엘 자체가 이 세상과 하나님의 계신 곳과 분리시키는 역할과 기능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아까 봤던 창세기3장24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 있는 곳을 구분 지었지요. 오지 마라 했잖아요. 거기에 보초 선 사람이 누구지요? 천사들이지요. 그 천사의 기능을 이스라엘이 한다 말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 스가랴에서는 이스라엘 망해버려요. 망해 버리고 망한 그들에게 새로운 이스라엘을 드러내면 그들은 천사가 했던 그 역할을 누가 인수인계 받는가, 새로운 이스라엘이 인수인계 받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한 이 새끼줄. 오늘 제목을 새끼줄로 할까. 하나님과 백성들과 함께 있는 쪽에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새끼줄이기 때문에 경계선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보초기 때문에, 보초는 자리가 없잖아요. 보초는 이쪽영역을 지키고 이쪽영역을 감시하는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 영토 말고, 이 앞의 영토는 뭐냐, 경계선이 아니니까 새끼줄이 아니니까. 그냥 새끼니까. 개별자니까 그냥 나라는 그 존재의 무게에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다시 한 번 아까 강의에서 돌아보면 나는 뭘 해야 되느냐? 나는 어떻게 살아야지? 라는 질문을 하지 마시고 “이것이 무엇이냐?” 주님께서 이스라엘 광야에 새벽에 생전 처음 보는, 옛날에 어떤 성에서 드롭프스라 해요. 사탕종류. 사탕종류와 비슷한 열매가 맺히는 사탕종류가 하늘에서 우루루 떨어지는, 우박 떨어지듯이 떨어지는 거예요. 새벽에. 새벽에 하얀 가시같이 되어있는데. 그 당시에는 표현할 수가 없지요. 인간세계에 없던 거니까. 그냥 식물성이 아니에요. 동물성도 아니고. 제3의 항이라니까요. 참 이런 단어를 쓰는 게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만.

제3의 항이에요. 제3의 항. 제1도 아니고 제2도 아니고 제3의 항. 인간의 세계에서는요, 1과 2. 이게 전부에요. 디지털에서는 0과 1. 이게 전부고.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우주의 모든 구성은 0과 1로 되어있다, 했어요. 0과 1. 73%의 암흑에너지와 23%의 다크메럴, 암흑물질과 4%의 눈에 보이는 별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게 우주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안드로메다 있잖아요. 백날 다 더해봐야 4%밖에 안돼요. 나머지는 뭐냐 암흑에너지, 암흑에너지에서 나온 다크 메럴, 암흑물질. 이런 게 하나의 변수로서 수식에다가 집어넣어줘야 중력활동이 해명이 되니까 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암흑물질이란 암흑 그것은 아무 본 사람 없어요. 어두워서. 없지만 그게 요런 항목에 딱 집어넣어줘야 이 아귀가 맞는다고 해서 이런 가설을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어두우니까 존재하니까 1. 0과 1로 되어 있잖아요. 0과 1. 나 1. 그 다음에 나 아닌 것을 2. 너라든지 또는 물건이라든지 2가 되겠지요. 여기에 바로 만나. 제3항이 등장해요. 제3항이.

그래서 하는 말이 “이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 자체가 이것이 무엇인가가 압축되어서 그 드롭프스 사탕처럼 생긴 이름이 뭐냐 이것이 무엇이냐, 그래서 만나에요. 만나를 영어로 하면 What? 뭐지? 이게 뭐지?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뭐냐 이스라엘의 뭐가 되느냐 양식이 되는 거예요.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양식이 먹던 이스라엘은 기존에 알던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스라엘이 되고 그 이스라엘 속에 있는 그 백성들은 기존에 알던 나가 아니라 내가 이름 부를 수 없는 다른 제3의 나가 내 안에 침투하고 들어온 겁니다. 이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신은 계시다. 나는 인간이다.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미하자. 이거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를 나를 어떻게든 안정성 지탱하고 내가 안정성을 얻기 위해서 남들이 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볼 것이라는 자기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 이렇게 함수를 변수대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이 종교라는 것은 그런 거거든요.

알 수 없는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보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하늘이라는 것은 그냥 추상명사로서 내가 견디기 위해서 힘든 것을 견디기 위해서 설정한 가상적인 대상이란 말이죠. 그건 가짜지요. 왜? 뭐가 가짜냐. 내가 죽는 이유를 찾아낼 수 없잖아요. 내가 죽는 이유를. 그럼 가짜지요. 내가 나를 살리는 방법 중에 하나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는 것. 이건 구라지요. 그게 바로 거짓말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제3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그 기능을 제가 아까 했지요. 이게 누구의 기능이냐, 천사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스가랴6장1절부터 죽 보게 되면 거기에 지난시간에 했지만 이게 누구의 이야기에요? 말들이 나오잖아요. 이 말들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천사들이야기죠. 천사들. 내용은 천사고 표현형은 말들이고.

따라서 말이 천사라 하면 안 되고 그 기능. 그 기능은 천사가 말 같은 기능을 한다. 이 말은 앞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은 천사와 같은 기능을 맡아야 될 자들이다, 라는 거예요. 사람이 아니고 천사에요. 그러면 천사의 일이 뭡니까? 하면 보초지요. 보초. 또는 시편83편에 나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문지기로 있다는 것은 뭐냐, 경비원 보초 아닙니까. 내가 세상의 천날보다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게 좋사오니. 참새도 성전 안에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저게 나의 소망입니다. 주님.

이게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제3의항의 나. 내가 아는 나도 아니고, 남이 아는 나도 아니고, 1항도 아니고 2항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나. 내가 끄집어내지도 못할 상상도 못한 나가 새롭게 발생된 겁니다. 천사와 같이 그렇게 된 거예요. 기존의 나는 죽는 게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제3의 나는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고 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내가 나를 볼 때에 이게 뭐지? 야! 너 누구야? 물을 정도로 변해버린 내가 낯설어. 신기해요.

저는 이걸 다 지우고 방금 요것을 요 말로 표현하겠습니다. 요걸 다 지우겠습니다. 요걸로 이야기하겠습니다. 4자입니다. ‘불가능성’ 이거 뭐 기도해도 안 되고요, 헌금해도 안 되고, 교회가도 이건 안돼요. 이건. 교회 가서 천당 갈 거 같으면 안돼요. 그냥 불가능성. 진짜 하나님의 사랑 받고 있는 사람은 불가능성을 그 다음에 견지, 유지해야 돼요. 그 불가능성을 유지해야 돼요.

세상에 내가 여기 존재하다니. 전에는 내가 여기 사는 것은 지나간 기억에 의하면 너무나 익숙한 거고 당연히 살아야 될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렇게 제3의 인물이 되고 제3의 내가 되고 난 뒤에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이 왠 기적이지? 여보! 내가 왜 살아있지?” “당신은 뭐 어제 숨이 안 끊어졌으니까 살아있지.” “그거 말고.” 이게 하루, 하루 내가 살아있는 거, 숟가락 들고 음식 먹는 것도 신기하고, 앞에 있는 아내나 남편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아저씨, 누구세요?” “어디 뭐, 당신 머리 부딪혔어? 기억상실증 걸리고 교통사고 난 적 있어?” 이게 교통사고 나서 제3의 나 같으면 얼마든지 교통사고 박아서라도 천당 가겠는데. 그것도 안돼요.

교통사고 나도 구원 못 받아요. 그냥 불가능성이에요. 내가 나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달라질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예상도 못한 겁니다. 이것이 뭐냐 “나는 □이다.” “나는 What이다.” 이게 바로 만나를 먹게 하신 취지입니다. “이스라엘아! 뭔지 모르겠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먹어야 돼. 니 아는 것 자장면, 짬뽕, 탕수육, 시키지 말고 니가 애굽에서 먹던 음식 말고 이 광야에서는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을 먹어라. 그래야 니가 생전 알지도 못한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게 천국이에요.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에 가면 잔디밭에 분수 있고 그런 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 땅에 모든 것과 공통성이 하나도 없는 나라. 예상을 할 수가 없어요. 이 땅은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편하게 사느냐가 목적이잖아요. 이 땅에서는. 그러나 천국은 뭐냐 왜 저를 하나님의 아들 만들었습니까? 라는 거기에 관심 있어요. 저같이 농땡이고 저같이 나밖에 모르는 천하에 내가 돛대인 줄 알고 내가 최고인 줄 알고 우선 나부터 챙길 수밖에 없는 이기주의를 왜 이렇게 영원한 영생을 주십니까? 성경에 보니까 못 간다는데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았는데, 생명나무는 못 따먹잖아요. 못 따먹는 그 과실을 왜 따먹도록 이렇게 허용을 하셨습니까? 주님.

그럼 주님이 “싫어? 다시 보낼까?”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주님 제 말 무슨 뜻인 줄 아시잖아요? 다시 쫓겨나가라는 뜻은 아니고요, 너무 황공스러워서 하시는 말씀을. 에이~ 주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또 심불부리시기를. 아시잖아요.” 이게 너무 좋아서 하는 이야기인줄을. 그동안 천당 가려고 얼마나 교회에 돈을 갖다 댔습니까. 십일조니, 감사헌금이니, 선교헌금이니 얼마나 갖다 부었어요. 얼마나 헛짓했습니까? 다 쓸데없는 헛짓한 거예요.

가스펠송에 나오잖아요. 돈 없이도 가는 나라 무슨 나라? 노래는 그렇게 불러놓고. 봉사를 했습니까, 충성을 했습니까, 착한 일을 했습니까, 돈을 갖다 바쳤어요? 뭘 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걸. 결국 아무것도 한 것도 없다는 말은 무엇이 그 사람 안에 유지가 된다? 불가능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불가능성이.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거예요. 이 불가능성.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저를 건졌습니다. 맨날 나는 어떻게 할까요? 하는 그 질문하다가 내가 주님의 안목으로 다시 나를 보게 한 거예요. 이 덩어리는 뭐야? 이 덩어리는 뭐야?

바로 이 불가능성. 이 불가능성을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역할을 맡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존재가 아니라 경계선을 치게 해요. 하나의 새끼줄을 만들어놔요. 경계선. 새끼줄로서 활용시키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새끼줄로 만들었을 때에 여기에 그러면 오늘 본문에 의해서 그 새끼줄로 온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조치를 해가지고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증거자가 되었는가.

여기에 오늘 본문 6장10절에 보면, 10절 제일 앞에 무슨 말 나오지요? 사로잡힌 자. 사로잡혔다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었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 그들은 사로잡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들이 살 곳은 싫으나 좋으나 노예가 되든지 힘들던지 아니면 편함과 관계없이 내 나라는 이 애굽 나라밖에 없다. 내가 몸 둘 곳은 이 애굽나라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던 거예요. 그냥 견딘 겁니다. 다만, 하나님이여, 힘드니까 완화시켜 달라고 바로왕의 폭정을 좀 완화시켜가지고 우리 임금님이 좀 마음을 순하게 해가지고 나한테 너무 억한 감정 안 갖기를 그 정도로 기도했을 뿐이에요. 너무 고통이 많았으니까. 어디 나가자는 생각은 아예 없어요.

아까도 했잖아요. 인간은 예상한대로만 예상해요. 자기가 힘드니까 신을 찾은 거예요. 공식이니까 한 번 찾아봅시다. 힘드니까 교회 간 거예요. 힘드니까. 힘드니까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겁니다. 교인되고 하는 겁니다. 힘드니까. 누가 힘들어요? 나지요. 나니까 여전히 나를 놨어요? 못 놨어요? 나를 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힘드니까 하나님이여, 좀 도와달라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한 겁니다. 나를 포기하려고 하나님, 저를 포기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지를 않아요. 도와달라고 하지. help me.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기도나 그런 것은.

절에 가도 마찬가지고, 교회가도 마찬가지고 종교라 하는 것은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신할머니한테 비나이다. 새벽4시에 일어나가지고 우리 옛날 할머니 맨날 새벽4시에 일어나가지고 딸그닥 거리지요. 잠자다보면 뭔가 딸그닥 소리가 나요. 누가 존재한다는 뜻이고 활동한다는 뜻이거든요. 일어나서 보면 할머니가 종이 태우면서 빌고 있는 겁니다. 힘드니까.

히브리인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나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누가? 모세와 아론이 나가자. 이건 도발이에요. 이건. 나가긴 어딜 나갑니까? 갈 데가 있어야지요. 없잖아요. 어디로 갑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자. 이 세상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이게 말이 돼요?

어디로 갑니까?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다시 말해서 내가 친히 심판해서 작살내는 곳으로 너희들을 집어넣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심판하고 작살나는 그 민족만 나쁜 게 아니고 니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동질시해주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쫓겨난 사람은 쫓겨 가되 히브리인들도 쫓겨난 사람과 똑같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지저분한 존재에요. 그런데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이 그 땅에 가게 되면 그들은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주제를 알기 때문에 누구 공로만 돌리겠습니까? 하나님만 은혜에 감사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처음에 애굽에 있었던 히브리인들은 나오면서 비로소 그들은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내가 사로잡혔다는 의식을 최초로 갖게 됩니다. 아! 우리가 빠져나올 수가 없다면 사로잡힘도 없어요. 죽던지 살겠는데 갈수가 있다면, 만약 그런 출구가 보인다면 여기 있다는 것은 결국은 사로잡힘 바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사로잡힌 존재라는 자각을 갖게 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는 제대해야 될 곳이에요. 남자들은 압니다. 제대하는 날 그 사람들이 후배, 후임병들이 제대하는 날 선임 앞두고 그 베옷을 입고 검은 복으로 정장을 갖추어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웁니까? 제대하는 날. 선임병 보고 울어요? 이제가면 언제 오나. 아이고~ 아니고~ 웁니까? 축하한다 하지요. 왜? 사로잡혔거든요. 이게 징병제거든요. 강제로 징집했기 때문에 징집당한 그 장정은 남자는, 군에 가본 사람은 압니다만 간 그날부터 오로지 제대날짜만 바라보면서 모든 역경과 시련을 그 더러운 것을 언젠간 국방부 시간은 흘러간다. 그 하나 믿고 버티는 거예요. 해방의 그날.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구원. 이 세상을 이제는 떠나는구나! 더럽다 세상아! 아예 뒤도 보지 말아라 했어요. 그래서 뒤 돌아보는 자는 안 되잖아요. 쟁기 들고 뒤 돌아보는 자는 안 된다고요. 마태복음2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24장40절, 41절에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같은 일을 했지요. 같은 일을 했을 때, 그들은 사로잡혔다든지 여기는 남의 땅이라는 생각이 의식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오셔서 한 사람을 딱 데려가니까 남아있는 사람은 뭐가 되어버렸어요? 졸지에. 한 사람을 데려가니까 남아있는 사람은 그냥 평소처럼 살아도 ‘나는 잘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요. 나는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신자가 발생되어야 불신자가 성립돼요. 신자가 없으면 불신자가 없어요. 그냥 인간들이에요. 그냥 보통 균형 가는 보통적인 인간들인데 한 사람이 구원이 되어버리면 한 사람은 그때부터는 구원 안 된 존재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이 성경 복음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는 겁니다. 불교는 밉상을 안 받아요. 유교는 밉상을 안 받습니다. 바르게 살아서 인류에게 공헌하자. 인간은 돈만 아는 이 더러운 세상에 종교 가져가지고 개과천선해가지고 남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그런 착한 되어가지고 사회에 구석구석 봉사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천국 같은 세상이 되느냐, 종교는 참 좋은 것이야. 라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종교관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그걸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이 데려감을 당하지 못한 인간들아! 저주받아라.” 이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뭐 좋지만, 복음은 싫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 교회마다 이런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처럼 착한 사람되어가지고 남한테 봉사하고 희생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되어라. 배려할 줄 아는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라. 그거만 이야기해야 되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놔두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이 애굽이에요. 애굽. 납득이 되고 인간이 가능한 것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불가능성을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견지하라. 유지하라. 불가능성을 유지해야 돼요. 불가능성.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 이게 왜 엉터리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이건 엉터리에요.

그거 잘못된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방법은 없어요. 하여튼 방법은 없어요.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꾸 하나님, 예수 이런 거 조작 만들지 마세요. 가능한 대상으로 믿을 대상으로 조작해 내면 안돼요. 친숙한 사람으로 우리가 언제든지 마음만 결심 먹으면 마음만 낮춰서 착하게 먹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훌륭한 분. 그런 예수는 없어요. 그런 예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거고 교회가 만들어낸 거예요. 그런 예수는 없어요.

어쨌든 구원받을 가능성은 없어요. 제로에요.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시작은 내가 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시작은 내가 하지 내가 아닌 남이 나를 강제로 납치하는 경우는 우리는 상상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구원은 납치에요. 니가 어떤 행동도 안 받겠다는 거예요. 니가.

착합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겸손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 죄인도 이젠 지겨워. 그런 소리 그만해. 하지 마. 하지 마. 그냥 데려가. 그냥. 니 딱 집었어. 너, 가! 끝났어. 끝난 거예요. 쓸데없이 폼 내지 말고요, 아무것도 받지를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아요. 주께서.

다음부터 예수 믿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바르게 살지도 마. 그것도 짜증나. 바르게 산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없어요. 그냥 무엇인가, 너는 이제 너가 아니고 내가 보기에 무엇인가, 내가 너에게 다루고 너를 다른 인간으로 내가 친히 제조해 낼 거야. 만들어낼 거야. 어디? 천국에 합당한 존재로. 10분 쉽시다.

 

안양20210513B슥6장12절(뭐지?)-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 끝에 제가 그런 말씀드렸지요. “이제부터 친히 내가 너를 만들어줄게. 친히. 니가 너를 만들 생각하지 마라. 내가 친히 너를 만들어줄게. 어디에 부합되도록? 천국사람 되도록 내가 만들어줄게.” 라고 나서는 겁니다. 그 만들어주는 그 방식은 오늘 스가랴6장10절 초반에 나옵니다. 사로잡힌 자 가운데서 바벨론,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어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한 번 적어볼게요. “하나님이 만드신 또는 구상하신 생각해 놓은 현실은 이스라엘”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의 거울로 봅시다. 거울. 거울이라 본다면 요 안에 이스라엘 역사가 나오잖아요. 이스라엘 역사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어떤 역사였습니까? 나오고 싶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누가 끄집어냈습니까?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어가지고 가나안땅,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심어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을 강제로 추방시켰지요. 이게 왠일이에요?

집어넣으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다음엔 강제로 쫓겨난 것도 하나님이고, 그러면 아! 내가 하나님과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들어왔는데 막상 살아보니까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는 사람이란 걸로 드디어 탄로가 난 겁니다. ‘아! 이게 안 되는구나!’ 하나님께서 같이 해줘도 나는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참, 이런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나는 구원된다? 안 된다? 구원이 안 되는 존재에요. 천하에 하나님이 오셔도 구원이 안 될 정도로 우리는 망가졌어요. 망가졌다는 겁니다. 망가진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얼마나 그것을 자랑을 하고 자긍심을 느꼈습니까. 지금도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해가지고 미사일을 막 쏘아대잖아요. 어제 뉴스에. 하마스기지에다가. 가자지역에. 한 번 가봐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한 번 가봐야 돼요. 가자지역이 어디인지. 스완지역이 어디인지. 다윗과 솔로몬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가보면 좋은데 지금 코로나 때문에 지금 못 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 있어도 구원이 안돼요. 그 정도로 우리는 구원이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자신의 나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방법은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 나를 알아요. 나는 천국을 갈 수가 없고 지옥을 가는 게 마땅한 존재인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아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거 해야 되지요. 전적인 구원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거 뭐 교회 다녀도 안 되고, 장로, 목사 되어도 구원이 안 되고, 집사도 물론 안 되고. 목사도 안 되는데 집사가 될 리가 있습니까. 백날 교회에서 구라를 쳐도 구원이 안 됩니다. 왜? 내게 그만한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내게 그만한 문제가 있습니다.

천국에 그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에 부합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심성은 지저분하고 더러워요.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생각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 먼저 앞서기 때문에 안돼요. 이게. 하나님 앞에 모든 걸 헌신해 놓고는 그 헌신한 대가와 보상과 내 망가진 인생을 만회해 달라고 압력을 가하는 사채업자 같은 존재가 우리거든요. 받아먹었으면 우리에게도 뭐 주는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줄 거주고 받을 거 받읍시다. 하는 조폭처럼 그런 사고방식으로 마인드로 돌아가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이게 안돼요.

사실은 노동의 대가없이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예수 믿는 것도 노동인데, 노동의 대가없는데 내가 삐지기 마련이지요. 삐지면 그게 더럽고 지저분한 우리의 본성이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하면 돼요? 포기하면 되는 거예요. 이 포기된 사람이 바로 구원된 사람이에요. 이 포기된 사람이 구원돼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나 안 돼! 나 안되는 게 맞아.” 뭔가 구원 되겠다 하는 것도 예상이잖아요. 기대잖아요. 일종의 자기의 요령, 수완 그런 거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추방을 시켰어요. 그러면 이 과정을 통해서 숨겨진 것이 나타나요. 들어가고 빠져나온 과정에 숨겨진 것. 그 숨겨진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을 적절한 존재가 아님이 여기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가 구원받지 않는 이유가 나중에 신약에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은 누구만 구원하느냐 하면 예수님만 구원해요. 이 사실.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해 보세요. 이게 게임이 됩니까? 안되지요. 자,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은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연세계를 움직입니다. 우리 기도는 헛방이에요. 벌써 안 되잖아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수 있습니까? 물위를 걸을 수 있어요? 병든 자를 낫게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안되잖아요. 안되니까 협박인 거예요. 이게 원래 되어야 되는데 안 되잖아요. 이건.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줍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기도를 안 들어준다는 게 기쁘게 들립니까? 섭섭하게 들립니까? 이게 기쁘게 들려야 돼요. 내가 뭘 요청해도 하나님은 안 들어준다는 것을 굉장히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왜? 기도를 안 듣는다는 말은 시편에 보면 죄 지은 자의 기도는 안 듣는다고 했거든요. 기도를 안 듣는 걸로 봐서 나는 이미 내 죄를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인 것을 안다는 것. 이게 얼마나 기쁨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아는 게 그렇게 감사하지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도 밥 먹는 것도 감사히 여리라 말이지요. 기적이에요. 살 수도 없어요.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살려내는 것은 여분의 것이고 낯설고 생소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 사실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알고 난 뒤에 그 다음 내가 왜 살아있지? 안 살아도 되는데. 숨을 왜 쉬지? 지금쯤 코로나 한 바퀴 들어와 가지고 가슴이 심장이 숨도 못 쉬어야 되는데 내가 왜 아직까지 멀쩡하지? 왜 이러지 내가? 주여 너무 과분한 거 아니에요. 지금.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겸손하게 자장면 하나 시켰는데 그것도 사천원짜리 헌데 가서 동네 중국집 가서 사천원짜리 하나 시켰는데 뭐 팔보채에다가 유슬기 새우튀긴 것 해가지고 탕수육, 그것도 해물짬뽕해가지고 직원들이 제복입고 줄줄이 양손에 들고 와가지고 하는데 제발 그 앞에서 이거 다 얼마에요? 이런 객기부리지 마세요. 그냥 받으세요. 과분합니다. 하고 그냥 받으세요. 내가 돈 낼게. 지갑 꺼내지 마시고요. 되지도 않는 폼 내지 말고. 살려주시거든 그냥 감사히 사세요. 사는데 보답을 하겠습니다. 보답하지 마! 보답하지 마! 보답하지 마세요. 주제 넘는 자기 또 의로움입니다. 행세께나 하는 짓이에요. 그거 더러워서 안 받아요. 주께서는.

그냥 넙죽 염치 불구하고 하루, 하루 삶을 고맙다 여기면서 감사히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요. 착한 짓을 해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짓을 해도 살려주시는 것이고. 착한 짓을 한다고 더 살려주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갑자기 죽을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짓을 해도 내 살고 죽는 거하고는 무관한 겁니다. 무관한 이야기에요.

지금껏 우리는 살아온 것이 내가 한 행동과 관계없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관계있다고 오해를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현실을 유일한 거울이라 했지요. 우리는 가짜 거울을 들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교육시키는 대로 학교에서 교육받는 대로 그게 현실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진짜 현실은 진짜 하나님과 만났던 이스라엘만이 진짜 현실이에요. 그 현실에 비춰보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보여주기 위해서 집어넣었다가 빼더라 이 말입니다.

“여기 니 방이야. 여기가 니 집이야.” “아이고,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 다음 날, “방 빼!”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돼요? 방 빼라는 게. 왜요? 니는 살 자격이 없어. 그러면 처음부터 왜 넣었습니까? 니가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애굽에 나올 때 그들은 애굽에 포로 됐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약속의 땅에 나오고 난 뒤에 인간은 누구한테 포로 되었는가. ‘나는 나에게 포로 된 존재이다.’

나는 나에게 포로 되었어요. 내 가오와 내 자존심과 내 위신과 내 체면과 내 이름과 내 명예와 내 지식과 나의 과거의 이력과 내 기억의 포로가 된 거예요. 내 기억에. 과거 체험과. 주님께서 오늘 아침에 살려줬으면 지난 과거는요, 여러분, 다 잊어버리세요. 지난 과거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스가랴6장12절,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순. 본문에는 싹이라 되어있는데 순은 뭐냐 하면 새로 싹트는 걸 순이라 하지요. 새로 올라오는 거예요. 새로 올라온다. 날마다 새순이 되는 거예요. 날마다. 새순.)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래서 어느 교회에 가면 교회 이름이 새순교회 있어요. 날마다 새순이 돋아요. 새순이 돋아오는 거예요. 파릇 파릇. 날마다 봄이에요. 새순 돋아오는 거예요.

주께서는 봄이라 하는데 우리는 우중충한 겨울이라. 우리의 자아가 나를 뭉개버리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세상에서 요구하는 자아가 무거운 존재의 무게가 주께서 주신 진짜 현실. 새순같이 파릇, 파릇해야 될 나를 기존의 나의 어두운 과거가 나를 확 밟고 누루고 힘들게 한 거예요. 세상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마음고생, 육체고생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았습니까. 이제는 거기서 졸업할 때 됐잖아요. 이제는 그 헛된 망상에서 벗어날 때 됐잖아요.

뭐 안하면 벌 받고, 뭐 안하면 저주받는다 했는데 군대생활은 백날 편하게 살아도요, 군대생활 자체가 저주에요. 맞지요? 예! 군대생활 자체가 저주라. 자체가. 휴가 나올 필요 없어요. 빨리 집에만 보내 달라. 영원히 제대만 해줘. 집에 안가도 좋으니까. 고참들은 술만 먹으면 패고요. 이건 완전 미친 것도 아니에요. 술 먹었으니까 미쳤지요. 그러면 그 맞는 인간은 니 나가고 보자. 후배들 패자. 그 팰 준비하고 있어요. 이거 뭐 병영자체가 미친 자들의 집합체 같아. 누구 하나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 없어요. 내가 당한 만큼 당해라. 이런 보복의 현장이에요. 보복의 현장. 그게 무슨 살만한 곳이에요. 탈출 제대 날만 기다리죠.

시편 137편 한 번 봅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이거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1970년대에 미국의 유명한 보컬그룹이 있었어요. 바벨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흑인그룹이지요. 보니 엠의 라는 노래가 있어요. 여기서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약속의 땅에 있다가 이 남의 나라에 일제 압제에 잡힌 거예요. 일제 압제에. 36년 동안 일본의 통치기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에 잡혀와 가지고 그때가 좋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무슨 말이냐 하면 그냥 무상으로 주던 걸 선물로 살 때가 좋았다는 거예요. 내 노동으로 사는 게 아니고 내 수고로 내 자족하며 사는 게 아니라 살 가치도 없는 것에게 그냥 무상으로 무엇이냐? 만나를 주시면서 살았던 만나 같은 모든 것이 만나같이 그렇게 느껴졌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겁니다. 만나는 물론 광야를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만나는 그치지만, 먼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만나를 준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더라도 만나의 취지로 너에게 모든 농산물 생산물이 만나라는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지요. 모든 것을.

자식이 애먹인다고 불평하지 마시고요, 자식도 주님의 사람 되고 나면 자식도 만나에요. 뭐 요런 게 내 몸에서 나왔나? 요런 게 생겼어? 입에 밥 먹는 것도 그렇게 이쁘고, 귀엽고, 모든 게. 문 잠가놓고 인터넷 게임하는 것도 귀엽고. 부모가 자식을 너무 닦달 내는 것은 자식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니 잘못되면 우리 집안에 기대 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할까, 이런 압박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루를 살더라도 편하게 살 수가 없어요. 이게 뭐냐 세상에 포로된 거예요. 포로 돼서 그래요.

자, 그렇다면 시편137편에 나오는 5절에 보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기서 예루살렘 나오지요. 자, 여기서 무엇과 무엇이 비교되느냐 하면 현재 살고 있는 것은 바벨론 포로 잡힘. 잡힘이니까 노예지요. 노예. 노예로 시작해서 노예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바벨론과 여기서 뭐가 대비가 되느냐 하면, 예루살렘. 바벨론은 세상에 포로 잡힘. 잡혀 있음. 갇혀 있음. 그러니까 갇혀 있는 꼴. 예루살렘은 모든 게 선물. 그러니까 예루살렘이라 해서 지금 뭐 성지순례 그거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 있던지 간에 바벨론 생활하다가 뭐로 전환되면 돼요? 예루살렘 생활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어딘지 어떤지 서울인지, 대구인지 관계없어요. 선물로 여기면 돼요. 식구 하나, 하나가 저 화초 하나, 하나가.

이걸 어려운 말로 부분대상이라 하거든요. 부분 대상. 부분대상이 뭐냐 하면 나중에 수련회 때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분대상이라 하는 것은 내 입술, 입, 코, 손가락, 발가락, 전부 다 하나, 하나가 부분대상이에요. 다 고마운 대상, 선물이다 말이죠. 손가락하나 이거 손톱 갈라져 보세요. 아프지요. 멀쩡하게 있든 없든 관계없이 이 자아에 붙어있는 몸통. 헤드, 머리, 사지, 지체, 이 모든 것이 선물로 다가오는 거예요. 선물로. 이거 멀쩡해서 감사합니다. 이거 멀쩡해서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연세가 많이 가면 갈수록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선물의 강도가 더 좋아야 돼요. 이거 다쳤다 생각하지 말고 이거 안 다친 거 있잖아요. 발가락은 안 다쳤잖아요. 온 몸은 망가졌어도 머리는 아직 말짱하잖아요. 코는 멀쩡하잖아요. 냄새 맡을 수 있지요. 들을 수 있잖아요. 눈 보이고, 갈수록 점점 더 기계가 고장이 납니다.

부분대상이라 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기계로 보는 거예요. 기계라 하는 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고 기능적 존재로 보는 거예요. 기능적 존재. 기능적. 하나님이 일한 자기 솜씨를 보는 거예요. 작품, 작품으로 보는 거예요. 예술가가 그림 그리는 것도 예술이지만, 요새는 설치예술해가지고 꼭 기계 만드는 것처럼 작동하는 로봇처럼, 작동하는 기계도 예술작품이 되거든요. 주님께서 친히 나를 제작한 예술작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에 의해서 손가락이 부러지면 알아서 부러지게 하신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멀쩡하게 보존하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멀쩡하게 해줬기 때문에 멀쩡하지 사람이 잠시 약간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고 뭐 하나 집다보면 팔 나갑니다. 어지러워서 하다 보면. 저도 며칠 전에 가끔 자꾸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서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에 물을 내린다고 하다가 어지러워서 일어서다가 변기를 잡는데 변기에 뚜껑이 있거든요. 뚜껑. 놓쳐가지고 뚜껑이 둘로 조각이 났어요. 예상 못했습니다. 불가능성이에요.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니까 깨져야 깨지기 전에 멀쩡한 게 내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져봐야 아는 거예요.

‘야~ 이게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구나! 그런데 나는 억지를 부려서 왜 내 몸이 내 몸이라고 누가 나를 속여서 나를 이렇게 살아왔는고.’ 앞으로 조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읍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이 아니고 예루살렘으로 와요. 예루살렘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주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가가 있어요. 하나님의 본가. 하나님의 본가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2절 끝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그 다음에 뭘 건축하리라? 여호와의 전. 야~ 여기서 여러분들이 유념해야 됩니다. 나의 전 아닙니다. 나 살기 좋아라고 만든 인테리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살기 좋은 곳이 천국이에요. 내 살기 좋아라고 내 욕망과 내 의도와 내 기대로 인테리어로 스며드는 게 아닙니다.

“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곳이 천국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천국가신다면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면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정말 지긋지긋하게 여러분들을 미워한 사람이 거기서 천국에서 만난다면 여러분들은 거기서 다시 지옥 갈 겁니까? 어떻게 할 거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좋은 곳을?” 어? 보니까. 어디서 본 기억이 있어요. 웬수에요. 내 돈 2억5천만원 떼어먹고 돈 안 갚은 인간 등장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심한 거 있지요. 바람피워서 다른 여자하고 살림한 남편을 만났을 때 진작에 이혼하고 갔는데 천국에서 만났네. 저거 목 잘라버릴까. 천국에서 갑자기 살인사건이 일어나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이게 천국의 인테리어가 우리 마음에 맞도록 인테리어 된 게 아니고 주님이 맞추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 이름이 뭐냐 하면 순이에요. 순. 그 천국 주인공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로 되어있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이리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를 정리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분명해졌어요. 구원은 누가 구원되는가, 어떤 메시아가 오는데 구원자 그분이 구원되는 거예요. 그분이 아버지에 의해서 구원됐다는 증거가 뭐냐,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 딱 그 분뿐이에요. 석가모니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오직 그 분만이 죽은지 사흘만에 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야 되지만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일어난 유일한 죽음의 힘을 뚫고 일어난 유일한 존재가 그 분입니다.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활을 ‘존재의 역류’. 주님의 죽었던 생명이 물이 역류, 물이 맨홀 뚜껑이 팍! 올라오잖아요. 죽었다가 다시 산 그 힘이 맨홀 뚜껑을 재켜 버리고 뛰쳐 올라와서 튀겼지요. 물이 튀면 사방으로 흩어지겠지요. 그 부활의 능력이 물방울이 튄 사람이 바로 예상 밖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사적인 예수님의 개인의 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효과가 혜택이 엉뚱한 저와 여러분에게 혜택이 튀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 맞는다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죽어도 사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이 생명의 방정식이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돌아올 혜택이 주어질 여분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단 죽었다가 그 다음에 살아나시게 되면 구약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는 모든 말씀이 예언이 됩니다. 예언. 예언은 누군가 약속과 예언은 누군가 필히 이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 이루어질 당사자가 안 나타나서 문제였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죽어도 살수 있다는 이 능력으로 이 말씀을 적용시키는 대상자들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 바로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진짜배기 교회들이에요. 진짜 교회들이에요. 그냥 선물을 선물로 이해하는 사람. 뭘 지키는 게 아니고 그걸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법은 날아가 버리고 그냥 뭐든지 예뻐 보이고 사랑스러운 대상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자식이 갓난애일 때 갓난애보고 한 살 먹은 애보고 니 밥 먹을 때 단백질 영양분 고려해서 가려먹지 말고 다 먹어. 7개월 된 애보고 그렇게 명령할 수 있습니까.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똑바로 걸어! 똑바로! 왜 오줌을 싸!”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뭐냐 하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그러니까 맨날 챙겨주지 아니하면 못사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를 갈 수가 없어요. 이겁니다. 이거에요. 교회에 속지 마세요. 그들은 업소에요. 업소. 인간의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해서 돈을 빼먹는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교회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내겠지만, 화내는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돈 끊어보세요. 화 더 내지. 돈 끊으면 화 더 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못 삽니다. 모든 게 돈으로 환원돼요. 얼마나 착하나, 의롭냐, 전부 다 돈과 관련되어있어요. 돈 있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에요. 돈 없는 사람은 아무리 착해도 나쁜 사람이에요. 남에게 부담을 줘요. 돈 없으면 부담을 줍니다.

잠언서에 나오지요. 가난할 때는 친구도 다 떠나버린다고요. 이 말은 친구가 친구가 아니고 뭐가 친구였다? 돈이 친구였다는 뜻이에요. 이게 사회입니다. 그 남 욕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거와 한 통속이에요. 전부 다 균등해요. 고만 고만해요. 전부 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이게 왜 구원이 안 되는지를 우리는 이제는 알아요. 난 알아요. 내가 왜 구원이 안 되는지를. 내가 왜 시름 시름 앓는지. 알아요. 난.

하나님과 함께 있어보니까, 아, 구원이 욕심이라는 거. 천당 간다는 자체가 이게 어마어마한 욕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존재의 역류. 부활의 영. 성령이 부활의 영입니다. 부활하신 분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내가 누군지를 알아요. 내가 누군지를 압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너무 좋아가지고 여기에 사로잡힌 자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갔지요. 가가지고 뭘 만들었습니까? 은과 금을 받아가지고 뭘 만들었어요? 면류관을 만들어가지고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버린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여호수아 예수잖아요. 예수. 같은 이름이거든요. 장차 대제사장으로 오실 분에게 머리에 금을 씌워버리는 거예요. 금. 금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금속 중에서 가장 귀한 거거든요. 금 같은 분. 금 같은 분이 우리의 할 일을 대신, 대역을 해주시는 거예요.

왜? 나는 아니니까. 나는 기도, 헌금 백날해도 나는 아니거든요. 내가 행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거든요. 여러분 자신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어떤 희생과 봉사와 선교사 백날해도 이건 아니에요. 안 받습니다. 받을 분은 예수님이 행한 것만 받아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그 당시에 구약이기 때문에 하나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냥 숟가락 하나 걸치는 거예요. 그 분이 등장하고 난 뒤에 이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이 존재의 무게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자기가 건사한다든지 자기를 지탱한다든지 하는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는 거예요.

무엇을, 그 나라 의지요. “오늘은 주님을 위해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오늘 뭘 할까요?” “청소나 해라.” 지지직~~ “오늘 뭘 하면 됩니까?”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미 주인공이 넘어갔어요. 주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 놀지 말고 이거 해라. 그거 하면 되는 거죠. 살고 죽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에서 그 분의 이름이 나오는데 12절에 보면 순이라는 이름이 있다. 순이라는 이름이니까 순은 기능이지요.

구약 때 보면 이름 지을 때 반드시 그 사람의 앞일의 일어날 일을 전제로 해서 이름을 짓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그렇지요. 이름이 순이다 말이죠. 순이니까 여러분들이 이건 쉬울 거예요. 순이라 하는 것은 어떤 거냐,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기능. 없는 데서 새로 생기는 기능이지요. 그러면 주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 자신은 반복적으로 매일같이 순이 되는 겁니다. 새싹이 되는 겁니다.

이 새싹은 뭘 세운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지요. 여호와의 전을 건축, 여호와의 건물.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거주지라 했지요. 거주지라 하고 또는 본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거주하시는 본가가 됩니다. 본가가 되는데.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골치 아프더라도 성경구절 몇 구절을 찾아봐야 돼요.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인가를 아셔야 됩니다. 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성전 안에 뭐가 있느냐, 여러분들이 어떤 건물 안에 바깥에서 건물을 보게 되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게 저 건물 안에는 누가 살고 건물 안에는 어떤 시설이 되어 있을까. 괜히 은근히 궁금하지요.

제가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미군 부대 철조망 쳤지요. 제 어릴 때 미군부대는 미군들이 나오게 되면 초콜렛, 껌 같은 것 그냥 줬어요. 리즈크래커 있잖아요. 그냥 줬다고요.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거죠. 그 얻어먹은 맛을. 도대체 저 철조망 안에는 미군부대에는 뭐가 있기에 맛있는 게 나오느냐 말이지요. 그리고 체크무늬 남방 있잖아요. 얼마나 이쁘다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게 많은 모양이라. 그걸 입고 청바지 입고 그 남아있는 물품들이 막 시중에 PX로 해가지고 불법 납품되어 청바지 유행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 뭐로 되어있는지, 무엇으로 되어있기에 저런 풍성함이 나오는지 굉장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해요? 성전 안에 뭐가 있느냐, 도대체 성전 안에 어떤 장치가 있어서 그게 생명이 나오느냐, 죽은 나를 살릴 수 있는 그런 모든 그 장치가 어떤 장치로 되어있기에 진짜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내가 어떻게 죄도 씻어지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막 영원한 영생을 얻고 오지 말라는 그 생명나무를 함부로 따먹을 수 있는 넉넉하게 따먹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됐나, 어떤 장치가 가동되고 있나, 그게 궁금하겠지요. 그게 3가지 장치입니다.

첫 번째 장치, 두 번째 장치, 세 번째 장치 있어요. 첫 번째 장치는 출애굽기40장20절, 두 번째 장치는 민수기17장4절과 7절, 세 번째 장치는 출애굽기16장 34절, 이리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출애굽기40장부터 해봅시다. 어떤 장치가 있기에,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위에 두고” 이리 되어있지요. 속죄소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짐작했겠지요. 속죄소라 하는 것은 죄를 그냥 씻어주는 것이 아니에요. 죄를 그냥 씻는 게 아니고 죄를 값을 받고 씻어주는 곳이 속죄소에요. 값을 받고.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받을 것 다 받고 당신은 이제 나한테 빚 진 거 없습니다. 당신은 나한테 부담 느끼지 마세요. 값은 다 치뤘습니다. 하는 그게 바로 속함이 돼요. 값을 치룸이 되지요. 이자까지 다 쳤으니까. 만약에 값을 안 치루게 되면 졸지에 뭐가 돼요? 채무자가 되지요. 그 채무자를 가지고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레벨,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할 때 우리는 심적인 부담을 느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줘가지고 우리에게 심적인 부담을 가중시키는 겁니다. 이거 했나? 저거 했나? 천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이런 식으로 막 쏘아붙이니까 우리는 감당 못하지요.

사람이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음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니까 니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그냥 있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이게 얼마나 우리의 심적인 부담이 돼요.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 사는 사람인데 많은 돈을 여분의 돈을 저축해야 우리가 미래를 대비하는 심적인 안정을 얻는 게 우리의 살아온 우리의 기억이거든요. 기억이 우리의 습관을 낳고 습관이 우리의 본성이 된다 말이지요. 두달치, 세달치 그러한 양식이 없으면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입니다. 비축해 놓은 게 없으면 진짜 자살할 한강 다리 가운데 스물 몇 개 다리가운데 어느 다리가 제일 물이 따뜻한가 뭐 그거 찾아다닐 거예요. 왜? 암담하니까. 참담하니까. 소망이 없고 미래가 없으면 사람은 못 살아요. 뭔가 여유가 있어야 살 수가 있다 말이죠. 여유가 있어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 나한테 부담가질 필요 없어. 누가 값을 다 치뤘다는 거예요. 속죄소 무슨 값을 치뤘느냐, 얼마나 나를 위해서, 그럼 돈을 누구한테 그만큼 돈을 드렸습니까? 아니야. 돈은 안 받았어. 그럼 얼마나 봉사를 했습니까? 봉사 안 받았어. 얼마나 뭘 했습니까? 뭐 하지도 않았어. 그럼 뭘 받았어요? 피를 받은 거예요.

속죄소+피=죄사함. 요 장치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역류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혜택으로, 선물로 주어진 선물이 무슨 선물이냐 하면,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값을 치를 필요가 없데!” 라는 해방의 소식이에요. 이걸 기쁜 소식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뭐 더해야 될 게 있다? 없다?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왜? 벌써 니가 치루기 전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새치기 해가지고 이미 입장료를 다 치뤘어요. 주님께서 여기 144,000, 숫자로 꼭144,000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144,000 여기 모든 입장료는 다 치뤘어요. 값으로 다 치룬 거예요. 그럼 우리가 주목할 것은 뭐냐, “누구야? 누구야?” 그러니까 우리가 찾을 것은 “누구야? 누구야?”만 찾으면 돼요.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무엇이냐? 했지요. 누구냐? 를 찾을 때 나를 잊어버려요. 꿍하고 내 인생에 몰두하지 말고 누구십니까? 내 대신 모든 값을 치러서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도착하게 만든 분이 누구십니까? 찾게 만드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그 누구십니까, 가 누구지요? 여기는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순. 새싹 순으로 되어있어요. 순. 순이란 이름이 그 성전에 임한다는 거예요. 순.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신은 있다? 없다? 신은 없어요. 신은 없는데 이 땅에서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관된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안 등장하면 신은 없어요. 예수님이 등장하면 비로소 하나님은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제키고 하나님을 찾아가지 마세요. 그런 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나를 믿는 자만이 아버지가 있어요. 예수님 안 믿으면 하나님 없어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은 이건 자기 마음평정을 위해서 뭐 하나 상상해서 믿는 신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16장31절에서 간수가 어떻게 할꼬 할 때, 하나님을 믿어라 하지 않지요. 뭘 믿어라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간수가 어떤 지경에 있습니까? 옛날에는 간수가 죄수를 놓쳐버리면 지가 죽어야 될 판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인생은 끝장이에요. 끝장이니까 자기 거 끄집어낼 게 있어요? 없어요? 더는 없어요. 뭐 돈을 드리면 돈도 없어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치 세리와 창기와 같은 수준이에요. 강도와 같은 수준이에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만 크게 다가오느냐 하면 선물이 선물답게 다가오는 거예요. 선물이 선물답게.

시골에 사는 시어머니가 이름도 모르는 영어로 된 이상한 이름 촌에서 온 시어머니가 김장 한통 해가지고 아들집에 김치 준다고 떡 가져왔지요. 며느리는 직장도 없는 사람이 바쁘잖아요. 원래 직장 없는 사람이 바빠요. 과로사 한다는 말이 있는데. 굉장히 바빠요. 어머니 내가 지금은 집에 없고요, 밖에 나가있습니다. 지금 요가 한다고 바빠요. 살 뺀다고 바빠요. 놔두고 가세요. 놔두고 갔다 말이죠. 놔두고 가가지고 이제 자기 시어머니는 다시 촌으로 돌아갔지요. 한 일주일 뒤에 전화해. “야, 야, 너 김치 잘 먹고 있나?” 아들한테 전화하니까 아들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일주일 전에 김치 줬잖아. 언제요? 줬잖아. 어데요? 안 받았어요. 안 받은 거예요. 며느리가 쓰레기통에 갔다 버려서. 갔다 버렸지요. 그 노친네 자기 물건이나 하지 쓸데없이 이렇게 해가지고 나중에 쓰러지면 또 우리보고 짐 지울까. 이런 식으로 해서 버렸지요.

바로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께서 김정은이 부터해가지고 먹여 살리십니다. 다 은혜에요. 은혜인데, 은혜를 은혜답게 아는 사람은 누구겠어요? 인간은 지 노력으로 살았다 하지 공짜로 살았다는 생각은 못 갖잖아요. 그런데 어떤 경우입니까? 자기가 인간도 아니고 나는 망가져야 된다는 사람에게 비로소 은혜가 선물이 선물답게 다가오겠지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우리 죄를 위하여 모든 합당한 조치를 다 해놨어요. 갈 수 없는 그 천국, 그 생명나무 있는 곳에 아까 제가 분명히 못 간다고 했지요. 없는 곳에 주님 빽으로 갈수 있는 길을 터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곧 생명이다. 인간으로서는 무슨 말인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을 그냥 던지는 거예요. 던지고 난 뒤에 십자가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이 오니까 ‘아, 그 말이 그말이었구나!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행함도 아무것도 들고 오지 말고 그냥 와도 되는 곳이구나!’ 왜? 나는 너무나 허접스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미 구약 때부터 성전 안에 모형으로 그걸 만들어놨어요. 주께서. 친절도 하셔라. 그걸 속죄소라는 상자에다 만들어 놓고 피를 뿌리는 거예요. 그 피가 장차 메시아가 해서 마지막에 마무리 다 이루었다 할 때 나오는 그 피를 앞당겨서 모형으로 시범조로 미리 뿌려준 거예요. 그게 바로 성전 안에 언약궤가 있는 겁니다.

두 번째 민수기17장4절, 이건 뭐냐 하면 바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요. 아론의. 고라 자손이 모세한테 대들었습니다. 우리 똑같이 나올 때 민주주의로 하자. 똑같이 나올 때. 그냥 같은 자격으로 나왔잖아. 라고 대들 때 모세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하고 모세하고 차이점이 모세가 하나님과 직통으로 계시 받는 그 노선에 있거든요. 똑같은 게 아니에요. 모세가 더 높다는 뜻이 아니고 모세가 받은 계시를 분화구처럼 마그마처럼 퍼트릴 때 그 오는 출처가 고라도 아니고 아론도 아니고 뭐냐 하면 모세가정의 모세에요.

그러니 모세한테 와서 퍼지는 거예요. 이건 뭘 뜻하느냐 예수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다. 안돼요. 모든 출처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피를 안다는 조건하에 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 안에는 그리스도가 하잘 것 없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이 담긴 체 이게 설교가 되어야 되고 이게 강의가 되어야 되고 복음이 전파되어야 돼요.

교회를 키웁시다. 하는 건 복음이 아닙니다. 그건 요령이에요. 그건 다른 회사에서 다 하는 거예요. 교회는 그게 아니고 피만 있으면 한명이라도 좋고 두 명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와 피가 전파되는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있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만이 바로 모세의 가족에 지팡이 가운데,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거든요. 얼마나 기적입니까. 싹이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싹이 새순이 여기서 싹이 나는 거예요.

그게 우리로서는 불가능하고 낯설지요. 우리가 혼자 살고 개하고 살아도 되는데 주님의 존재를 느끼며 산다는 게 이게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What? 이게 뭐냐? 이거에요. 이게 뭐냐? 내가 생각도 못한 내가 된 거예요. 전에는 나 혼자 살았는데 이제는 주님을 이해하면서 주님을 알아보면서 사는 게 What? 이게 무슨 왠 기적이냐, 말이죠. 그 여분의 것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귀한지 본문에서는 금으로 만들어요. 금보다 더 귀한 보배 믿음이지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바로 여기 출애굽기16장34절, 만나입니다. 만나. 지팡이도 성전에 들어가고요, 만나도 성전에 들어가거든요. 만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 빵 달라고 자기가 먹던 빵, 옛날 알던 식량 달라고 원망했을 때, 대들었거든요. 백성들이 대들게 유도해 놓고 대들었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뭐가 우선이다? 자기 생존이 더 급하다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한 거예요.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내 밥 먹여주면 그 누가되더라도 나는 믿겠습니다. 라는 이 자기 위주로 신을 선택하고 고르겠다는 거예요. 내 행복하게 해주고, 내 잘되게 해주면 그게 어떤 신이라도 알라신이든 부처든 나 믿겠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 육신이 중요하고, 내 생존이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살았던 겁니다.

그걸 언제 알았느냐 하면 바로 모든 양식이 끊어질 때 알게 된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사실.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요. 가족이고 뭐고 나는 내가 최고다! 라는 것. 이건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아까 나라 하는 것은 이건 뭐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까지 할 정도에요. 그 정도로 고집이 센 거예요.

그런데 그런 고집을 유발시켜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뭘 줬습니까? What? 이게 뭐냐? 만나를 줬거든요. 그 만나의 요소가 하나님의 요소가 아닙니까. 그걸 하나님의 성전. 성전에서부터 나왔다고요. 이 죄 용서를 아무 대가도 없이 죄 용서를 했다는 것. 그 예수님의 피로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전이 이것이 구심점이에요. 핵심부분이 되어가지고 그 죽었던 예수님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서 빛내기 위해서 천국이 만들어진 거예요.

천국은 구석, 구석 예수님의 공로만 나타나고 우리는 그냥 공짜로 얻었다는 그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이 알 수 없는 성경의 세계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존재를 깨닫게 해주시고 지금도 그 점에 변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면서 오직 주님의 용서에 대한 고마움만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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