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311A슥5장2절(환타지)-이 근호 목사
스가랴5장1절,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두루마리 펴면 면적이고, 둘둘 말아버리면 원통이고, 그런 양탄자 같은 그런 두루마리가 날아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4장11절에 보면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 이리 되어있거든요. 두 감람나무는 고정성이에요. 고정되어있는 겁니다. 그리고 5장1절에 나오는 두루마리는 고정성과 반대되는 유동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정성과 유동성관계에서 어느 것이 더 원천적이고 원형에 가까우냐 고정된 것이 유동적으로 이렇게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정된 것이 원형이다. 이 쪽이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고정된 것은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여기에 스가랴 4장에 보면 이건 성전에 있어요. 성전에.
그러면 두루마리는 어디 있느냐, 성전밖에 있는 거예요. 성전 밖이니까 이것은 바로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에서 이 고정적인 두 감람나무. 두 말뚝이라 하면 제일 쉽지요. 두 말뚝. 꽉 박아버렸다. 확정된 거예요. 두 말뚝. 그리고 이건 두루마리니까 그냥 두루마리가 아니고 어떤 두루마리냐 날아가는 두루마리. 휙~휙~ 날아가는 두루마리. 그러니까 이건 고정적이라면 이 성전 밖의 이 세상은 끊임없이 날아가니까 유동적이니까 이건 변화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어떤 변화라 할지라도 이게 변화된 게 원형이 아니고 성전에 있는 이 말뚝 같은 고정성이 원형이기 때문에 이 두루마리는 결국 이것은 이 원형에서 나왔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이 성전 고정적인 원형을 모르고서 이 땅에서 어느 것도 아무리 진리를 찾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절대로 이 원형에는 접근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어떤 변화를 해가지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스가랴도 물어요. 이 나무가 뭡니까? 물었어요.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답변이 바로 스가랴4장14절에 나옵니다.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이 나무가 뭡니까 하니까 이 나무가 인물이라는 거예요. 인물. 사람이라는 겁니다. 사람.
자, 방금 우리가 성경에 나온 대로 이렇게 한 번 펼쳐봤습니다. 성경에 나온 대로 죽 나열해 봤지요. 나열하면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나타나는 모양새를 가지고 전환하는 원칙 같은 것이 죽 나와 있는 거예요. 원칙이. 어떤 원칙이 있는가 아까 방금 봤지요. 고정인 것이 원형이고, 유동적은 나중이다. 이건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변화되는 이 세계는 그냥 세상이다. 세상인데 어떤 세상이냐 하면 세상은 곧 성전 밖이다. 그러면 성전 밖의 상황을 두루마리가 고정된 것에서 나와서 날아갔다. 이 말은 성전 밖의 세계는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건 소멸을 의미해요. 소멸. 제거. 또는 멸망. 이러한 운명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그러면 이 감람나무가 두 인물이라면 거기에 대비해서 이 두루마리가 날아가면서 덮겠지요. 덮는다. 덮어있는 모든 것은 그냥 이 세상 산과 물과 바다 이 정도 세상이 아니고 여기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물들, 인간들이 포함이 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소멸대상이냐 하면, 제거대상이냐, 멸망대상이냐, 인물들, 인간들이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럼 두루마리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쉽게 해서 말씀이라 할 수 있어요. 말씀. 5장 3절에 나와요.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저주할 때는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는 로마서3장 같은데 잘 나와 있지요. 저주할 때 근거는 율법입니다.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명기28장에 보면 이 말씀을 저주라는 것이 나타나려면 중간에 저주를 줘야 될 정당성으로 이 율법의 말씀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그리고 지키면 복을 받는다. 분명히 신명기28장에 그렇게 되어있지요.
나가나 들어가나 이 말씀을 지키면 나가나 들어가나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 신명기28장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떠한 자율권이 없습니다. 어떠한 자율권이 없어요. 아주 엄한 아버지가 한 손에는 호빵, 한 쪽에는 회초리 들고 내 말 지키면 호빵주고, 내 말 안 지키면 회초리로 얻어맞는다고 할 때 그러면 아버지와 그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녀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의사에 종속된 관계입니다.
이건 자식을 독자적인 개인적인 견해나 의견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주받는다는 게 뭘까요? 바로 아버지의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 말고 따로 내 생각 갖는 게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는 거예요. 호빵 줄까, 회초리 줄까를 아버지가 말한 게 아니고, 내 지시와 명령을 줄게.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내 지시와 명령.
그러면 그 엄한 부모의 자식은 자기 안이 텅텅 비어있어야 돼요. 내 생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도 안돼요. 나 호빵 먹을래. 안 돼요. 큰일 나요. 왜냐하면 나는 호빵 원합니다. 라는 자체가 뭐냐 자기 생각을 이미 갖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 저 천국 갈래요.” 이거 큰일 날 소리에요. 천국 갈 소리한다는 건 이건 곧 저주입니다.
어제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중간에 했는데요. 구원이라는 문제, 천국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자기 문제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초반부터 이야기합니다. 성도란 무엇인가, 성도는 어떤 모습이 성도냐 하면, 성도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이게 성도에요. 그 다음에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자.
경계라 하는 것은 두루 두루 살피면서 어디서 공격 들어오는가를 자기가 조심하고 방어하는 그러한 태도를 경계라 합니다. 적이 어디서 오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에 나서는 것. 그 경계에 나서는 목적은 내가 지킬 게 있다는 거예요. 내 안에 나만의 것. 나만의 것. 이건 아버지 것도 아니고 엄마 것도 아니고 나만의 것이 따로 있다. 라고 그런 것이 있을 때, 인간이 나만의 것. 여러 번 했는데 자꾸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반복합시다.
나만의 것이 바로 자아에요. 자아는 실체가 없으면 형성되지 않습니다. 나만의 것, 내 소유한 것. 것 그걸 동그라미 치면 그게 자아에요. 그냥 말로 나 한다고 나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나를 헤쳐 보면 나만의 것이 있어요. 보따리 안에 소복이 오직 나만의 것으로 집합되어있는 게 있어요. 모여 있는 게 있다고요. 나만의 것. 그게 자아에요. 자아.
나만의 것이 형성되어 있으면 그 다음에 뭐하겠어요? 지키기 위해서는 뭡니까? 두루 두루 살펴야겠지요. 대비해야겠지요. 그게 경계하잖아요. 성도는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자가 성도입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더냐, 할 때 그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 말씀도 설교시간에 다 설명을 못해요. 길어서.
니를 정죄한 자가 있더냐 할 때, 여자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없나이다. 하지요. 그 말씀이 오묘한 것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걸 성도한테 묻는 것이 그 물음이 주님의 것을 발언을 한다는 게 발언하는 그 도착지점이 새로운 성도의 자아가 되는 거예요.
제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으면 그 여인의 이름을 짓습니다. 여자이름은 없씨에요. 없나이다. 이름이 없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것을 고집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새로 집어넣어준 거죠. 집어넣어준 게 뭐냐 하면 말씀이다 말이죠.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이 땅에다 뭘 쓰셨잖아요. 그 쓴 말씀, 그 쓴 말씀이 그 바리새인들을 없게 만들고 이제는 그 간음한 여인을 성도로서 있게 만든 내용이에요. 그걸 함축해보면 뭐냐 성도 그 여자 안에는 없나이다. 가 있어요.
없음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내 것이란 일체 없는 그러한 대상이 된 것.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내 일이 아니니까. 나만의 것이 있으면 뭘 해도 내 것이 되는데 내 것이 없으니까 무엇을 해도 나랑 상관이 없지요. 주님께서는 주님이 집어넣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성도 주변에 계속해서 변화를 유발하고 일거리를 만들고 계속 뭔가 자꾸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성도에게 인생을 살면서 사태가 일어나는 이유는 아직도 니 안에 니 것이 들었느냐, 아니면 내 것만 들었느냐, 묻는 방법이에요. 그러면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한 답변이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아까 변화 나왔지요. 변화 말고 감람나무 뭡니까. 확정되었지요. 확정된 내용은 뭐냐, 에브리 바디 시작! “없나이다.” “내가 상관할 게 없나이다.” “일어나야 될 일만 일어났나이다.” 일어나야 될 일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됩니까? 묻지 마라. 그런 거 묻는 게 아니에요. 일어나야 하기에 적절하게 일어난 일이에요.
그것은 뭐냐, 니가 아직도 성도냐고 묻는 겁니다. 너의 것이 나는 없는 걸로 여기는데 아직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묻는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성도라 해도 어떤 일이 터져버리면 분명히 없어야 될 내 것이 생겨버립니다. 그게 뭐냐,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 이건 어디까지나 후보감이고. 내 일방적 생각이고. 10분 뒤에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제목은 환타지. 환상입니다.
아~~ 계속해서 성도는 아무것도 없어야 되는데 자꾸 내 것이 만들어져요. 생겨나요. 그런데 성도도 마찬가지고 일반인도 마찬가지이고 뭔가 생겨나게 되면 내 쪽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제목은 이렇게 환타지고 환상이라 하지만, 사람들은 내 것에서 이러한 환타지가 일어나게 되면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 리얼리티 실제 또는 현실로 봐요. 이걸 현실로 본다고요. 어렵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현실이라 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뭐냐 환타지에요. 환상인데 환상을 환상으로 보지 않고 생생한 절실한 현실 그 자체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대표적인 것이 이가 아픈 것. 이게 환상인데 이건 우리가 이가 안 아프고 싶어도 아파요. 그래서 지난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웃음은 환상에 가깝고 고통은 현실에 가깝다. 하는 원형에 가깝다. 그 이야기를 내가 요약할 때 그 이야기를 집어넣었는지 모르겠어요.
인간의 고통스러운 것은 그 고통은 다 본인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러나 욥의 고통은 본인의 행위와 그 고통을 연계할 수가 없어요. 이리 짜맞추고 저리 짜맞추고 해도 내가 하는 행동 때문에 일어난 벌이란 차원에서의 고통과는 이게 이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의 놀라운 사실은 욥은 욥의 현실은 내 행동과 결과가 일치될 때에 현실이에요. 그런데 일치되지 않으면서 아프거든요. 그렇다면 이 욥은 뭐냐 이게 꿈이냐, 아니면 환타지냐, 이게 분간하기 곤란한 거예요.
현실은 내가 행동해서 결과로 이어져서 처음부터 그 과정이 추적이 가능할 때 그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요렇게 요렇게 해서 요렇게 됐다. 배고팠다. 라면 끓여먹었다. 배부르다. 딱! 요거 현실이네. 여기 계산이 딱 나오잖아요.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그런데 딴 일하다보니 배가 안 고프네. 그럼 배고픈 건 없어졌어요. 그럼 아까 배고픈 것은 그럼 뭐였나? 내가 꿈이었는가, 환상이었는가, 환타지였는가, 이렇게 되겠지요. 이질적인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예상 범위 바깥에 있는 어떤 일이 터져버렸을 때는 우리는 뭐를 고집하게 되는가 하면 우리 본성이 자아는 타고났거든요. 이건 자기 안쪽으로 방향이 구심력이 있어가지고 모든 걸 내가 알아야 돼요. 내가. 내가 알아야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게 등장해버리면 그걸 쉽게 뭐라고 봅니까? 그걸 환상이라고 본다고요. 그래서 인간이 분석이 안 되면 무조건 UFO. 미확인물체라 하거든요. 확인되지 않는 물체. UFO 또는 외계인. 자꾸 그걸 끄집어내는 이유가 그게 전부다 SF소설이고 환상, 환타지 소설이에요. 환상소설이라고요. 환상소설.
사람들은 그 환상에 대해서 대체하는 방법은 동조를 할까요, 내거를 지킬까요. 환상의 환상이 오게 되면 비상근무에 돌입합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경계하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려 인간아! 내가 나보고. 정신 바짝 차려! 현혹되면 안 돼. 천만원 투자하시면 일년 이자를 이백만원 드리겠습니다. 어머~ 믿지 마. 믿지 마. 그거 환상이야. 그렇게 되겠지요. 저쪽은 환상 아닌 걸 납득시키기 위해서 “이건 내가 LH 토지공사 있을 때 아는 정보인데 요거 투자하시면 개발됩니다. 내가 벌써 정보 다 빼냈습니다. 변찬흠 그 사람한테 들어가지고 다 빼내고 이거 맞습니다.” 아무리 해도 내가 다룰 수 없는 대상일 때는 주춤하는 겁니다. 이거 사기꾼 아닌가, 다단계 아닌가,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긴장 상태에 있는 이유가 그게 목적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 것 지키는 거예요. 항상 두리번 살피면서 내 것만 사수하겠다는 겁니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신중하지요. 사는 게 매사가 신중해요. 뭐 남들이 덜렁 덜렁한다 해도 나름대로 신중해요. 굉장히 신중합니다. 그런데 그 신중한 것. 그 신중한 그것을 사람들은 뭘로 보느냐 하면 신중하고 따지고 따지고 묻고, 묻고, 다시 검토하고, 검토한 걸 사람들은 뭘로 보느냐 현실로 보잖아요. 이것이 성경에서는 스가랴에서 이걸 뭘로 봅니까? 환타지로 보는 거예요. 착각으로 보는 거예요. 환상으로 보는 겁니다.
왜? 그것은 억지이기 때문에. 어떤 억지냐 하면 요동치고 변화하는 세계에서 차 띠고 포 띠고 나하고 상관없는 것. 내 이익과 당신한테 해줄 테니 당신은 나한테 뭐해줄 거요? 나한테 이익으로 오지 않는 것은 다 잘라버려요. 나뭇가지 중에서 다 잘라버리고 내 이익만 딱 도려 놓고 하는 말이 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이리 주장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무수한 변화가운데서 나름 고정성을 따로이 내것이라는 이름으로 확보하는 것. 그걸 바로 성경에서는 뭐로 보느냐, 환상이다. 쉽게 말해서 거짓이다. 허풍이다. 허망하다. 허망이 적당하네요. 환타지 이건 허망함.
무엇과 연관이 안 되겠어요? 두 감람나무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말뚝처럼 박아놓은 그 성전의 등대 옆에 있는 두 감람나무처럼 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두 감람나무가 감람나무였습니까? 인물이었어요? 인물이었지요. 스가랴의 눈에 그건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나무로 보였습니까? 나무로 보였지요. 나무로 보였으니까 두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물은 거예요. 왜 저기 두 나무가 왜 서있습니까? 나무로 보는 거예요. 감람나무가 뭡니까? 하는데 그건 환상적으로 질문을 한 거고 현실적으로 정답을 대게 되면 사람이다. 인물이다. 그거거든요.
그러면 스가랴의 해석을 우리가 제대로 알았더라면 우리는 이제는 환상에서 통용되는 해석을 버리고 환상적인 이 현실에서 제대로 된 현실로 옮겨지는 그 해석을 우리 안에 담아야 되겠지요. 세상을 무슨 중심으로 본다? 인물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인물중심으로. 세상을. 사물중심이 아니고. 여기 휴지 있다. 잔이 있다. 딸기 있다. 카메라 있다. 이게 아니라 여기에 주님계시다. 이렇게 인물중심으로 봐야 되는 거예요. 주님 계시다. 더 나아가면 주님만 계시다가 되어야 돼요. 주님만 계시다.
그러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사물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 두 인물은 감람나무로 이 세상에서 통하니까요. 스가랴보기에. 예수님이 어떤 소경 눈 뜨게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보이냐, 나무가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씻어주니까 뭐가 보이느냐, 사람이 보입니다. 이리 되었지요.
성도가 단순히 눈감았던 성도가 눈 뜨는 것이 목적이 그게 다가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고 이해할 것인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나무 벌목이나 하려고 오신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쓰레기 처리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환경문제 해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너! 너는 환상이야. 환타지야! 너가 나라고 여기는 그게 환상이야. 그거 지적하려고 주께서 오신 겁니다. 허깨비에요. 안개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마냥 여기 내가 있다고 자꾸 우기는 괴물 같은 존재가 있어요. 그 사주를 받는 겁니다. 자꾸. 괴물 같은 존재를 받아요. 제가 어제 수요일날 예를 들면서 사냥개 예를 들었지요. 사냥개가 레이스를 할 때 코앞에 뭐를 던져놓는가 하면 먹잇감을 두고 죽을 판 살판 마구 달리지요. 그건 인간도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점잖고 예를 바라도 그 사람을 자극시키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본래의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딱 한 가지만 하면 돼요. 돈. 아무리 점잖은 인품으로 둘둘 감았어요. 두루마리처럼 둘둘 감고 아무리 훌륭하고 세상을 착하게 살아도 저 지리산 저런 기도원이나 지리산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아도 진짜 깊은 산골에서 도를 닦아도 그 사람이 그 사람됨을 가장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전기세 받으러 왔다. 전기세 나왔습니다. 와~ 이번 달 많이 안 썼는데. 많이 나왔습니다. 이게 자기의 모습이에요. 머리 깎고 개량한복입고 천하에 도 닦고 수염을 길러가지고 맨날 시냇가에 가서 윗통 벗고 해도 도 닦아도. “전기세 나왔습니다.” 이러면 “이렇게 많이!” 그 말에 그만 자기 본색 다 드러났어요. 자기 본색 다 드러납니다.
이 세상의 가장 나쁜 점은 변화하는데 그걸 한 점으로 고정시키는 노력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수상한 노력이에요. 아주 음흉한 노력이에요. 악마의 노력이지요. 사람은 떡으로 없이는 못산다. 아~ 참, 악마가 하여튼 바른 소리 하지 않는 악마가 없어요. 다 바른 소리해요. 한 번 적어볼게요. 자, 이 악마의 말을 듣고 여러분이 뭐가 문제인지 알아 맞춰 보세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할 때, 이 떡은 돈으로 바꿔도 되겠지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할 때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기서 이 악마의 주장인데.
우리가 이것을 이 악마가 이게 문제다. 라고 아는 사람은 더 나아가서 현실 자체가 이게 엉터리고 환상이고 환타지다. 아는 사람이어야 될 겁니다. 요게 문제가 돼요. 요 뿌리가 그대로 확장되면 현실이 되거든요. 사람은 어디가도 돈 없이는 못산다. 이게 아무리 예술이나 문학이고 정치를 논해도 기본은 이거거든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이 문장에서 문제되는 점은 뭐겠습니까? 다 문제되겠지요. 그런데 문제되는 핵심은 뭐냐 하면 ‘못 산다.’ 였어요.
사람은 살라고 태어난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살라고 태어난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악마가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을 탁 치고 들어온 거예요. 왜냐하면 살아야 된다는 말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거든요. 하나님은 죽으라고 했으니까 이미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 대해서 하나님은 죽으리라. 했다 말이죠. 하나님은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악마가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편으로 들려면 뭐해야 돼요? 안 죽는다. 가 되어야 되지요. 안 죽는다, 에서 더 나아갔지요. 악마는. 안 죽는 정도가 아니고 니가 뭐가 될 수 있다? 절대자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너가 될 수 있다. 너가 지향하는 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너는 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체하는 것도 환상이에요. 너는 너가 될 수 있다. 너가 뭔데? 물으면 곧 앞으로 차차 알아간다. 이러는 거예요. 이게 인간사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보고 커서 뭐가 될래? 하면 차츰 살아보고요. 차츰 살아보고요. 라고 답변하는 것은 나는 나 되기를 포기합니다. 라는 말은 때려죽여도 안 나와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에다가 대입시켜 봅시다. 사람에다가 여기에 신처럼 되리라. 마귀 말이니까. 마귀가 너가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 신이 죽으면 신이 아니잖아요. 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뭐냐, 힘 또는 떡. 돈. 다 같이 힘이지요. 나는 힘으로 살련다. 이게 악마가 인간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낸 공식입니다. 공식. 사람은 신이다. 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끝. 이게 인간이에요. 이게 새끼 인간이든, 노인 인간이든, 젊은 인간이든, 남자, 여자 관계없어요. 다 마찬가지에요. 똑같아요. 전부다. 모든 인간은 다 이거에요.
신은 신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오류가 없어야 돼요. 신은. 그러니까 인간은 늘 경계하면서 자기 방어, 자기변명에 일관하지요. 이러한 신이 된 대표자로서 예수님께서 상대자로 골라 본 대상자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이들은 자기 의를 챙기는 사람이라고 되어있지요. 로마서10장에. 자기 의. 이게 남의 이야기겠어요. 대표자가 자기 의를 챙기면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는 것도 자기 의입니다. 그러니 나쁜 짓해도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의롭다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거예요. 나는 의롭다는 겁니다.
참, 이것은 안 믿는 남편들 보면 잘 드러나요. 그대로 나와요. 모든 행동이나 태도. 그대로 모든 게.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입만 벌리고 말하는 것, 행동하고 모든 것은 나는 의롭다는 거예요. 나는 의롭다에다가 방울 하나 딱 달았다고 상상해서 봅시다. 그러면 화장실에 갈 때도 딸랑, 딸랑 그래요. 의롭다. 의롭다. 의롭다. 갔다 올 때도 의롭다, 의롭다, 의롭다. 밥 먹을 때도 나는 의롭다. 반찬 이게 뭐꼬. 딸랑, 딸랑. 나는 의롭다, 의롭다. 말 할 때마다 뒤에 추임새 넣으세요. 딸랑, 딸랑. 이런 말 하는 나도 딸랑, 딸랑.
이 세상에는 변화무쌍한 세상이 아니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자기를 고정화시킨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번화무쌍한 속에서 나의 고정성을 위해서 가지자르기. 그건 나와 상관없고, 그건 나는 몰라도 되고, 그건 내가 알 필요도 없고, 내가 바라는 현실은 내가 신인 것을 증명하는 그것만 필요해. 라고 했으니까 이건 결국은 인간은 자기자아한테 갇혀있는 거예요. 인간이 자아한테 갇혔다. 이걸 성경에서는 인간은 죄 안에 갇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5절을 봅시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그건 두 인물이지요. 두 인물이에요. 그렇다면 그걸 응용해 보자. 그 해석을. 나무가 사람이라 했지요. 그걸 그대로 응용해 봅시다. 그러면 여기에 에바 나와요. 요건 한 말보다 약간 작은 부피를 재는 도량형 기구 에바에요. 도량 기구. 22리터쯤 된다는데.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고요. 고 에바. 고 에바가 한 되, 두 되, 한 말, 두 말, 하는 말이거든요. 자, 그러면 사물이고 물체지요. 그러면 해석해봅시다.
아까 감람나무는 인물이었지요. 그러면 에바는 뭐가 되겠어요? 자, 나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한 되, 두 되, 한 말, 하는 이 도량형은 뭐가 되겠어요? 인물이니까 이것도 뭐가 되겠어요? 인물이 되겠지요. 인물이. 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뚜껑이 있어요. 7절 봅시다.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뚜껑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그런 인격적 존재 악마지요. 악마를 표현할 때 뭐로 표현하느냐, 바로 사물을 가지고 표현하는 거예요. 사물을 가지고.
사물을 표현하되, 사물을 봐서는 안 되고 그걸 뭐로 환원되어야 된다. 어떤 인물로 봐야 된다. 인물로. 어차피 눈에 보이는 태양이나 별, 달, 산에 있는 사슴. 이런 모든 눈에 띄는 사물들, 물체들은 이건 인물들 속에 달려있는 악세서리 같은 거예요. 방울이라든지 가락지, 반지 같은 거예요. 어떤 보이지 않는 몸체에 붙어있는 장식물 같은 거예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장식물이 뭔가 딸랑거린다. 소리를 낸다. 어디 변화가 일어난다. 하면 그 장식물을 외부에 장식물을 달게 한 보이지 않는 내부가 있는 거예요. 내부가.
우리가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스가랴5장하고 있습니다. 스가랴5장에서 거기에 감람나무 나오지요. 처음부터 하니 들어보세요. 딴 게 나오지요. 이 감람나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성전 안에 있습니다. 성전 안에. 성전 안에 감람나무가 있는데 말뚝처럼 고정되어있어요. 고정.
그렇다면 이 고정된 세계가 이것이 뭐냐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게 안 보인다는 거예요. 현실은 안 보이니까 무엇이 현실을 대신하겠어요? 환타지가 현실 노릇하는 겁니다. 환타지가 현실 노릇합니다. 그러면 이 성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이 세상에서 아는 성전은 뭐냐 하면 건축 구조물이지요. 건축 구조물인 거예요. 현실은. 사물이다 말이죠. 물체 손에 만져진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등대 안에 있는 등대도 그렇고, 거기 옆에 있는 두 감람나무가 뭐냐고 스가랴가 물었잖아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라고 물으니까 두 인물이었지요. 두 인물. 두 사람이었잖아요.
우리가 아는 현실에서는 사물체지만 하나님이 생각하는 현실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 사물체가 아니고 인물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인물? 이미 그 본질이 확정된 인물. 그 기능이 확정된 인물이에요. 확정된 인물, 고정된 인물이 아니면 나머지 인간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확정된 것이 있어야 돼요. 확정된 것.
그런데 이 환타지 특징이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의 현실을 모방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이게 놀라운 거예요. 이게 나 혼자 놀라고 있는데.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현실은 인간들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부다 하늘에 있는 그 실체를 베낀 거라 보는 거예요. ctrl+V. 이게 누가 함부로 베낀 거예요. 복사를 한 거예요. 누가 그런 짓 했겠어요? 아담에게 찾아온 악마가 그런 짓 한 거예요. 악마가 지가 창조주도 아닌 게 무슨 원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든 그 계획의 원형을 그대로 베껴가지고 유사품을 이 세상에다가 그대로 재조립을 만드는 겁니다. 만든 거예요.
만들어놓고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현실. 이게 실제. 오직 이것만이 다라고 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만이. 그 중에 등장한 게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아에요. 아까 한 거 물으면 답변해 봅시다. 자, 자아는 어떻게 구성된다 했습니까? 자아 것이라 했지요. 자아라는 것은 자아의 것이라고 했지요. 왜냐 하면 자아 것이 있어야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지킬 것이 있어야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경계. 두리번 살피면서 매일 평생이 혹시 내 것 다칠까봐 두루 두루 살피는 겁니다. 마치 새가 새둥지에 자식들 낳아놓고 매일 뱀이나 맹독 짐승 올까봐 살피는 것처럼. 내 것이 있기 때문에 살피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내 것을 어디서 가지고 왔느냐 하는 겁니다. 내 것을 어디서 가지고 왔는가. 내 것은 현실에 있는 것 중에서 나의 절대성 또는 나의 절대적인 의로움에 유리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가 가져온 거예요. 가져올 때마다 문닫아버리고 또 자아 만들고. 가져오고 문닫아버리고 자아 만들고. 중소기업 다닐 때 자아는 요만큼이지만 대기업 되고 난 뒤에 이만큼 하지요. 확장되는 거예요. 확장되는 겁니다. 대기업보다 더 큰 대기업 다니면 더 확장되고 문단속하고 내 것 지키고.
그렇게 바깥에 있는 현실과 내 안에 있는 현실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동일한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질문합니까? 이미 마귀는 모든 자아를 이런 식으로 다 만들어놨잖아요. 만들어 놨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예수님보고 너도 마찬가지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무슨 문장이 나왔습니까.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한테 한 문장. 사람이 돈 없이는 못산다. 사람은 떡으로 산다. 떡 없이는 못 사는 취지로 이야기한 거예요. 떡 되게 하라고 이렇게 한 것은. 사람은 떡 없이는 못 산다, 했지요. 자, 이 문장에서 뭐가 문제라고 했습니까?
못 산다. 이게 자기가 현실이라고 우기니까 현실은 무너지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건 뭐냐, 인간은 이미 죽은 거예요.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인간은 죽어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인간에게는 산다는 것은 아예 사는 요소는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진실로 오로지 양보 없이 필연적으로 죽으리라. 에요. 부사를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악마는 뭘 주장합니까? 반드시 니가 뭐하리라? 살리라. 싸움이 간단한 싸움이에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금 살아있는 존재냐, 아니면 죽은 존재냐, 그게 문제에요. 그 싸움이에요. 내가 지금 밥 먹고 잠자고 하는 모든 것이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냐, 아니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냐, 그걸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어떤 것도 내 죽었음을 증명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왜? 내가 그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 내가 다 치워버렸어요. 다 쫓아내버렸어요. 내 안에는 내 것이 뭐냐 하면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딱 인간이 장기기억으로 아는 것은 뭐냐, 이거 내거다. 있잖아요. 그 내 것이 뭡니까? 나를 죽이는 거예요? 살리는 거예요? 이거 없이는 누가 죽는다? 내가 죽는다는 거예요.
내가 살기위해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절대로 양보 없이 용납이 안 됩니다. 그 자아가 기억이에요. 내 것이라고 있는 정렬된 그걸 아카이브(archive) 과거에 모아놓은 모든 기억들의 저장고. 기록 보관소. 여러분들이 아케이드라는 단어를 여러분들이 아시지요. 피렌체. 세계 최초의 아케이드 시장은 피렌체에서 만들어졌어요. 중세 때. 십자가전쟁 때. 아케이드는 제가 프랑스 파리에 가니까 시장이 아케이드에요. 아케이드라 하는 것은 둥그런 지붕으로 골목을 지붕으로 위에서 막아놓고 고가의 상점들이 죽 진열돼 있어요. 아케이드하잖아요. 재래시장도 그렇게 만들어놨잖아요.
그 아케이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지나가면서 관찰하면서 필요한 것을 고르세요. 하는 거죠. 그게 뭘 닮았느냐 우리의 인생을 닮은 거예요. 내가 이 현실이라는 세상 속에 나라는 현실이 지나가면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고 팔기도 하고 구매하고 사면서 지나가는 그게 뭐다. 그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끝은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다만, 이것이 계속 유지될 거라는 기대는 갖고 있어요. 아케이드 속에서. 현실의 터널 속에서 지나가는 겁니다.
줄리 앤드류스의 유명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보게 되면 애들하고 트랩대령이 바깥에 선보러 갔을 동안에 애들 데리고 커튼가지고 옷 해서 입혀가지고 공원에 장미터널 앞에 춤추는 장면이 있을 거예요. 인간은 현실을 볼 때에 자기중심으로 둥글게 봐요. 아치형으로 둥글게 본다고요. 자기 인생을. 바깥에는 뭐가 있어도 상관없어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지키게 되면 내 것을 지키는 그 범위까지를 우리는 현실이라고 봐요. 현실. 실제로 있는 거라고 봐요. 그게 뭐냐 하면 환타지입니다.
왜 환타지냐 하면 내가 가짜고요. 살아있다는 게 가짜고. 나라는 것이 절대적 나고. 그 다음에 그 이어주기 위해서 힘, 돈 힘이지요. 권력. 힘. 떡. 이런 것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그것이 바로 갖춰줄 때 나가 있고 살아있고 그 다음에 그게 갖춰줄 떡이 있을 때 그게 바로 인간의 현실의 구성요소 아닙니까. 마귀는 뒤로 빠져요. 왜 마귀는 빠지느냐 하면 여러분, 사냥하는 사람이 사냥개를 앞에 둡니까? 뒤에 둡니까? 꿩이라든지 뭘 사냥할 때 사냥개가 주인보다 뒤에 가요? 앞에 가요? 앞에 가지요. 악마는 인간을 앞에 보내고 지는 뒤로 빠져버려요. 인간들끼리 지가 감아놓은 거짓된 환타지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몸에다가 장착하고 그런 인간의 신체라는 사물끼리 마음대로 이 세상을 휘 젖도록 지는 뒤에서 배후 조종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 환타지에서 만든 것 중에 하나가 교회고, 기독교고, 종교입니다. 환타지가 만든 거예요. 다시 아까 5장6절 봅시다. 거기에 에바 나왔다 했지요. 에바, 한 말, 두 말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무엇입니까? 물어요. 또 물어요. 이게 무엇입니까? 물을 때 이게 뭐냐 하면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항상 사물체나 하나님께서 이 현실은 사물 따로 있고 보따리, 책상, 테이블, 사물체 따로 있고 무엇과 무얼 구분합니까? 인간 따로 구분하고, 사물 따로 구분해서 인간중심으로 아케이드를 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체가 환타지고 허망한 거고요. 실제로 봐서는 거기에 있는 사물체 자체 속에 모든 인간이 거기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에바가 뭐로 나타나느냐, 인물로 나타나요. 인물이 뭐냐 하면 바로 그 안에 주인공이 들어있습니다. 그 부피니까 그 안에 공간이 비어있겠지요.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여자가 하나 앉아있어요. 그런데 여자는 갇혀있는 여자. 폐쇄된 여자입니다. 왜? 납으로 뚜껑을 해서 닫아버렸어요. 자, 그러면 오늘 첫 번째 하는 강의 정리해 봅시다. 처음에 성전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세 번째 물어본다. 고정성이지요. 고정성인데 아까 악마는 뭐를 모방한다 했어요? 하늘에 있는 것을 악마는 영적 존재로 땅에서 모방하지요. 모방하니까 이 땅의 악마들은 인간을 성경을 현실을 해석할 때 뭘 고정성으로 하겠어요? 자기 자신을 영원한 고정센터로 잡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겁니까?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걸 사물화 시키는 겁니다. 왜 이 부피냐, 뚜껑이 필요하니까. 뚜껑이 납으로 되어있어요. 납은 아무리 들려고 해도 너무 무거워서 이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 납의 이름이 죄에요. 여자는 두꺼운 죄에 의해서. 자, 죄라고 했습니다. 죄. 죄인데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는 죄가 뭐가 죄인가, 악마가 죄에요. 항상 로마서5장에도 악마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의 왕 노릇한다는 말이 죄가 인격화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12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죄에 매여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주인에게 매여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인에게 매여 있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어떤 인격을 묶어놓고 그 다음에 뭘 한다? 가재도구를 훔쳐가지고 가져간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되어있어요.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현실은 사람 따로, 사물체 그냥 생명이 없는 것. 이리 분류하잖아요.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모든 세상은 뭐냐, 이미 모방 자체가 죽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들로 마구 마구 살아있지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죄가 살아있고 악마가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노리개고.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에서 그걸 뭐로 보느냐, 그걸 그들은 현실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뭐냐 하면 환타지지요. 그러니까 스가랴에서는 계시를 할 때 뭐로 계시를 합니까? 현실로 계시합니까? 환타지로 계시합니까? 날아가는 두루마리, 두 감람나무, 이 모든 게 뭐예요? 환상입니다. 환상에서 계시하는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 그대로 해석법이 그대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