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311B슥5장2절(환타지)-이 근호 목사
스가랴 해석이 환상해석이 참 어려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 쪽에 서있으면 하나도 안 어려운데, 하나님이여 이 말씀 알아서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벌써 성경 보는 태도 자체가 이거 알아서 나한테 보움 되는 게 뭡니까. 라는 그 본성이 안 죽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생생히 살아있으니까 이걸 해석할 때 다 바꿔야 되거든요.
또 중요한 것은 이 스가랴의 해석을 이렇게 해석 안하면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하나도 되지를 않아요. 요한계시록이. 전부 다 환상이다 말이죠. 환타지다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뭐냐 하면 사람들이 그냥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죽으려고 해석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 받을까 해석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뱀 새끼가 천국 들어가는 셈이 돼요. 뱀 새끼가. 독사의 자식들이 천국을 점령한 바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천국에서는 뭐를 검증하겠어요. 이게 뱀 새끼인지 진짜 주의 것인지 그걸 갈음하는 검증이 있겠지요. 그 검증의 기준은 어디서 정합니까? 우리가 정합니까? 구원받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지요. 바로 두 감람나무가 정하는 거예요. 두 감람나무가. 두 감람나무는 고정성. 이게 원형이고 그 다음에 두루마리는 유동성. 모든 것이 고정적이 아니다. 그럼 날아다니면서 뭐를 해체하느냐, 모든 고정된 것을 전부 다 해체로 만들어버려요. 다 흩어지게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요. 다 찢어놓게 만들지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말씀입니다. 그래서 두루마리는 곧 말씀이다.
말씀이 모든 고정된 곳에 삽입하는 게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래서 사도요한이 그 단초를 못 풀어서 막 울어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해석을 해야 될 텐데 해석의 단초를 딱 떼면 되는데 떼면 다 풀리는데 그 펴는 걸 몰라가지고 이 세상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일거에 해석할 수 있는 그걸 달라고 그걸 몰라 막 울지요.
그런데 천사가 와서 뭐라고 합니까?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이것을 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녀가셨잖아요. 다녀갔기 때문에 알아요. 이게 하늘을 쳐다본다고 아는 게 아니고 다녀 가셔가지고 다녀가신 예수님의 몸에 뭐가 붙어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그 환상들이 붙어있겠지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은 아까 신명기28장에 율법을 어겼을 경우에는 뭐가 온다? 저주가 주어지지요. 자기 몸에 붙어있던 환상을 떼어내면서 숨겨진 심판과 저주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예수님이 다녀갔으니까. 예수님의 몸에 묻었다 말이죠. 그 예수님의 몸에 묻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땅의 최후는 뭐였습니까? 처참한 십자가 죽음이잖아요.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
스가랴 하다가 요한계시록 해석이 나와 버렸는데.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된 고정된 이 말을 여러분이 나중에 이걸 올려놓으면 여러 번 들어보셔야 돼요. 빨리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확정된 거예요. 이미 진리는 확정 났습니다. 확정된 진리가 두 감람나무 인물이지요. 인물이 되어가지고 이 땅에 파견돼요. 파견되면서 무엇이 묻겠습니까? 이 인물이 오기 전까지는 확정된 쪽에서 오기 전까지는 진리가 오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나름대로의 악마가 하늘나라를 모방해서 폐쇄된 거예요. 아까 폐쇄됐다 했지요. 뚜껑이 닫혔으니까. 폐쇄된 그 자체 내에서 뭐냐 자신의 절대성을 증명하는 식으로 세상을 돌아가게 만들었어요. 폐쇄해 놓고.
그러면 자체적으로 죄라는 것, 의라는 것이 이건 전부 다 환타지가 되는 겁니다. 아까 성도가 제일 처음에 할 때 이런 이야기했지요. 성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된다. 또 하나는 성도는 경계할 필요가 없다. 성도는 무엇이든지 해도 상관없다. 그 다음에 또 성도는 더 이상 이 땅에서 경계할 뭐를 주시하거나 경계할 필요가 없다, 했어요.
왜냐하면 성도 안에는 나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 들어왔느냐 주의 것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주의 것은 고정된 것이고 확정적이고 결정 난 거예요. 이미 과거완료에요. 이미 다 된 거예요. 새삼스럽게 뭘 더 내가 추가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냥 미꾸라지처럼 설치기만 하면 돼요. 어떤 것도 구애받지 말고. 왜냐하면 내 안에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확정된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계시록12장에 보면 성도가 세상을 이겼으니 그 다음의 말이 뭐냐 하면 자기의 죽기까지 겁내지 않았다. 이 땅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은 이건 환상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에서 나오는 모든 개념들이 환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말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는 죽었다가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됩니까? 부활되지요. 둘째사망 부활되잖아요.
요한계시록11장에도 두 감람나무 나오지요. 그 설명을 전에도 했기 때문에 오늘 설명을 잘 안하려고 하는데 두 감람나무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들이 분명히 죽었는데 세상이 붙잡아서 죽였는데 그 다음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나흘만에 살아났지요. 하늘로 올라갔지요. 하늘로 올라오라 하니까 그들이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죽은 자가 올라갔지요. 사흘 반 동안 이 지상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그 사흘 반이 한 때 두 때 반 때고 42달이고 1260일이고. 자, 이것만 기억합시다. 이 세상은 누가 규정한다? 하늘에서 내린 숫자가 규정하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적으로 자체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습니다. 내가 나를 나라고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걸 지키기 위한 수작에 불과해요. 내 의를 지키는 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규정할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다시 7절에 봅시다. 에바 가운데 한 여인이 앉아있지요. 그 여인의 특징은 갇힌 상태에요. 둥근 납조각이 들리더라. 가로되 이는 그 다음에 이는 악이다. 이는 악. 나쁜 거다 이 말이죠. 이는 악이다. 악이 갇혀있는 거예요.
요걸 뭐냐 하면 확정된 환상. 우리는 환상이지만 실제는 현실이지요. 하늘나라 성전에서 고정된 성전에서 봤을 때는 성전에서 봤을 때는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이유는 이미 성전이 완공됐기 때문에 더 이상 지상에 있는 것들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파괴나 제거의 대상이라 했지요. 분명히 이야기했는데요. 그렇지요.
이미 확정된 게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변화되고 하는 것은 해체되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해체되면서 체포령을 내린 거예요. 천사가.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을 전부 다 멸망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주인이 이사 가고 난 뒤에 청소 용역이 와가지고 옛날 살던 집 어떻게 됩니까? 깨끗하게 청소하는 거예요. 심판하는 거예요. 그 심판이 신명기28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이야기 해드렸지요. 그리고 엄한 부모와 자식이야기 해주었지요. 한 손에는 호빵 들고, 한 손에는 채찍 들고 할 때, 애가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 했지요. 호빵주세요. 하면 안 된다 했지요. 내가 원하는 걸 달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종속됐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 세상은 확정된 성전을 위한 종속된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만약에 저는 호빵 먹고 싶어요. 채찍은 싫어요. 한다면 아버지는 가만두지 않는 겁니다. 그 권리를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모방하고흉내 냈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원천이 두 개가 될 수 없어요. 아버지만 원천되면 되지, 하늘이 원천된다면 땅에서는 가짜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환타지에요. 이 세상 자체가 환타지입니다. 그리고 곧 죽어야 돼요. 벌써 우리의 있는 자체도 죽음이고 죽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죽을 땐 죽더라도 이유가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 이유는 한 자로 ‘악’ 악! 그냥 악으로 죽는 겁니다. 성도가 이걸 알아요. 나란 자아와 내 신체가 악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미 알기 때문에 그 기준. 그 기준은 누구한테 들었느냐 하면 이미 확정된 기준에서 들었기 때문에 그 관계가 믿음이고 그게 성도의 구원이지요. 구원이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미 확정됐잖아요. 뭐로, 악으로. 그리고 뭐로? 하나의 환상으로. 그렇게 확정됐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왜? 자체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완전히 없으니까. 개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를 개선하거나 내 질을 좋게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 것이 없기 때문에 내 것을 지킬 이유도 없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사도바울의 편지로 공식을 세운다면 죄를 아는 자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자기 죄를 아는 자는 이건 하고, 이건 안 하고 이런 거 없어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에요. 그걸 더 나아가면 모든 일에 뭐한다? 모든 일에 감사한다. 죄를 아는 자는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해요.
어제 수요일에 했던 “나는 속도위반했다.” 좋다고. 속도위반했다고. 왜? 값을 치뤘으니까. 또 할 거야. 시속100키로 달릴 거야. 아무 상관없어요. 죽은 자가 죽기 전에 죽은 자를 해봐야지요. 자칫하면 이거 이상한 말 되지만. 후회스럽다. 죽어가면서 죽을 짓도 못해보고 되게 찝찝하다. 죽어가면서 죽을 짓을 해보고 살아야지 왜 살 짓만 하고 살았어요. 그래. 얼마나 주눅 들면서 발발 떨면서 살았습니까.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쉬운 거고요. 어느 대목을 우리가 봐야 되느냐 하면요. 5장4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자, 두루마리가 파닥거리면서 요동친다 했지요. 이 두루마리는 그냥 정지된 두루마리가 아니고 날아다니지요. 두루마리 면적이 나와 있어요. 두루마리 면적이 장이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 10.5m, 5.2m쯤 돼요.
요 면적은 어디 나온 면적이냐 하면 솔로몬 성전에 앞에 현관 면적과 동일한 면적입니다. 솔로몬 면적이. 그러니까 지금 스가랴가 짓고자 하는 성전의 모델이 솔로몬성전 모델이에요.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 오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내 아들만이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같이 기거하는 공간이에요. 성전은. 처음에는 그걸 성막이라 했습니다. 성막이 점차 발전해서 나중에 성전이 되거든요. 그러면 성막에서 자기 백성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요. 그냥 못 만납니다. 만나는 조건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자, 하나님의 이름은 뭐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는 이름이라는 것은 이것은 피조성을 지을 때 하는 거예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만들은 자가 만들어진 자에게 붙이는 게 이름이에요. 주님이 피조 됐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무슨 사람이냐 하면 이 세상에 합류된 자기 때문에 이름이 하나님이지만 이름이 붙어요. 하나님이지만 이름이 붙습니다.
그 이름이 뭐냐, 이름은 구약 때는 없어요. 그냥 이름이에요. 이름의 내막이 없는 이름이 왜 이름이냐, 이게 뭐냐 function. 기능. 기능이에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보통 활동한다, 움직인다,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인간에게 해당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는 뭐처럼 활동한다? 인간들처럼 활동하는 거예요. 화내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찬양받으시고. 인간의 어떤 특정인물이 거기에 상주하는 듯한 그러한 인상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기능이 펑션이 뭐냐 하면 일방적으로 뭐냐, 심판하기에요. 심판하기. 심판하는 이유는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현실은 따로 있기 때문에 현실의 가짜, 구라, 이게 뭐냐 하면 환타지지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자기 이름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유리한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유일한 현실로 보는 거예요. 유일한 현실로.
실제감, 현실감은 누가 현실이냐 하면 현실의 센터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내가 있다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나는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의심한다는 그 생각한다는 그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왜 그런 소리를 했느냐 하면 신 따로 인간 따로 놀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주체의식의 시작이라 본 겁니다. 데카르트가 주체의식. 신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내 판단에 따로 하겠다는 거죠.
내 판단. 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말은 그저 존재 한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내 존재함을 위하여 나는 모든 일을 할 거야. 모든 일을 내 존재함을 위해서 할 거야. 그게 바로 인간 자아중심이었습니다. 그게 이방민족 중심이고. 그래서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은 파내는 하나님이거든요. 계속 중심자리를 비워두는 하나님인데 이방 종교는 뭐냐 하면 그 신을 자꾸 자기 안에 채우는 거예요. 이야기해도 너무 모호하기 짝이 없으니까 더 모호하게 짝이 없이 합시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의 바깥을 현실이라 하잖아요. 바깥의 현실. 사실은 자기까지 포함해서 현실인데. 인간은 눈이 있거든요. 눈이 있어서 바깥을 보면서 바깥을 현실이라 한다 말이죠. 현실에 일어나는 현실은 어떻게 구성이 되고 조립이 되느냐 하면 이게 내 안에 나한테 유리할 때 현실로 조성이 된다는 겁니다. 나한테 유리할 때.
그러니까 이 바깥에 있는 모든 구조는 내 안에 마음의 구조로 그대로 들어올까요? 안 들어올까요? 그대로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참새도 다루시고 코스모스도 다루시지만 주의 이름은 집중적으로 어디를 겨냥하느냐, 율법은 어디를 겨냥합니까? 내 백성의 마음을 겨냥하는 거예요. 니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처음부터 마음의 할례를 하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고추 자르라고 해놓고 나중에 가서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고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추궁해 들어가는 거예요. 추궁을.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바깥의 현실을 내가 재해석해서 자꾸 여기다가 내 것으로 만들어 집어넣는 어떤 창고 같은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마음은. 이걸 오늘날 보통 하는 단어는 뭐냐 하면 기억이라 하는데. 내 안에는 내가 필요하고 나한테 소중하고 내가 원했던 것. 내가 사모했던 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모든 가득 차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고 다닐 때 모든 친구 다 기억합니까. 다 안하지요.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잊을 수가 없어요. 은별이 같은 애는. 보라한테는 은별이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괴롭혔으니까. 펜트하우스 드라마에 나오지요. 자기를 괴롭혔으니까 잊을 수가 없어요. 자기에게 잘해준 아이는 있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보기에 집안이 너무 어려운 집안 애들. 특정 애들만 기억하고 있어요. 다른 동창생들은 지나가도 몰라요. 왜? 세월이 벌써 30, 40년 흘러가지고 전부 다 뚱뚱보 다되어가지고 못 알아보는데. 못 보거든요. 싸우다 보면 동창생이 나타나고 그래요.
기억할 것만 기억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들어옴으로서 지금의 내가 된 거예요. 지금의 나는 계속 수출입이 돼요. 인풋 아웃풋 계속 들락날락 돼요. 그걸 누가 조정하느냐, 자아가 조정하는 거예요. 자아가.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율법을 잊지 말라 했잖아요. 아~ 하나님도 고집 세지요.
좀 인간이 인간답게 자기 필요한대로 살면 되는데 호빵 줄까, 회초리 줄까, 이걸 계속 이야기해요. 이걸 안 지키면 채찍 맞고, 지키면 호빵 줄게. 이걸 계속 이야기한다고요. 끝까지. 눈치코치도 없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그게 신명기27장에 나옵니다. 한 번 봅시다.
이 신명기27장은 지나간 일이 아니에요. 이걸 읽어보시면서 옛날 과거 지나간 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이게 유명한 그리심산과 에발산 이야기에요. 기회 있으면 그 산에 가봤으면 좋겠네. 그 산에. 저는 일단 한 번 가봤고요. 그 사이에 서서 에발산에 가가지고 그 사이에 서서 맹세를 합니다. 정실부인 출신들은 축복산에 그리고 종의 출신들은 저주산에 딱 세워놓고 상대방을 향하여 그래요. 자기를 향하여 하는 게 아니고 저주 쪽은 축복 쪽을 향하여 저주를 하고 축복 산에 있는 자는 저주 쪽을 향하여 축복을 하고. “인물이 우선이 아니고 율법이 우선이다. 인간들아!”
이 세상은 너가 점령해야 될 그 약속의 땅의 토착민들은 인간이 우선이 되지만, 그걸 접수해야 될 우리 이스라엘은 율법이 우선이다. 율법이 우선이다. 축복과 저주가 우선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존재는요, 아브라함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를 축복한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한 자에게 저주를 받는다. 축복과 저주가 우선이에요.
성도가 성도의 본인의 인생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도를 통해서 축복과 저주가 이 땅에서 증거 된다는 게 중요하지요. 자기 게 아니고 주님의 것이 들어있으니까. 그래서 여기 세워놓고 여기 27장 14절에 보면 중간에 레위사람을 놓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거기에 대하여 뭐한다? 아멘 한다. 그러면 말씀이 그들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그들 속에 자아 속에 본인들은 없어요. 이제. 본인 속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스라엘은 뭡니까? 그 당시에 날아다니는 두루마리가 아니고 이제는 진격하는 두루마리, 걸어가는 두루마리 광야를 통과하는 말씀의 집단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집단.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이 세상은 환상이지만 유일한 현실은 이스라엘 백성 마음 안에 들어있어야 된다. 말씀이 곧 유일한 현실이에요. 앞으로 이 말씀이 현실이 될 겁니다. 구약이니까. 신약 아니니까. 말씀이 현실로 전환될 거예요. 그들은 그것에 의한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맹세에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봅시다. 스가랴5장에 4절 끝에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강의하면서 일단 기초는 됐다고 치고요, 내 맘대로지만. 기초는 됐다고 치고. 이제는 어떻게 저주할 것인가, 어떻게 축복할 것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아까 분명히 두 인물이라 했지요. 그러면 첫 번째 인물은 여호수아에요. 두 번째는 멜기세댁인데. 여호수아, 멜기세덱도 이것도 하나의 환상이라 보시고 아까 그냥 기능이라 했지요. 기능. 하나는 대제사장기능, 하나는 왕의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두 감람나무가 이 세상에 두루마리 말씀을 남길 때 그 원천이 두 감람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주어져요. 왜냐, 성전은 이미 완공되어서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고정된 등대 옆에 있는 두 감람나무도 고정된 거예요.
그러면 뭐와 관련되어있는가, 제사장 기능이 고정되어있고, 왕 기능이 이미 확정되어 고정되어있는 겁니다. 고정되었기 때문에 무엇이 가능하냐 하면 심판이 본격화될 수 있는 근거는 이미 마련되어있어요. 유일한 심판의 기준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에 누가 있느냐가 길이 되는 겁니다. 누가 있느냐, 왕과 제사장 기능이 하나로 결합된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는 저주받아요. 이 세상은 저주받습니다.
모든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는 성전을 유리해서 모든 말씀이 있는데 그 성전에서 이미 완공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왕 기능과 제사장 기능이 이 지상에 두루마리를 통해서 나타나겠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이든 마태복음이든 로마서든 그 모든 성경이 창세기도 마찬가지고 소급해서 마찬가지고 모든 성경해석은 어떤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제사장 기능과 왕기능이 나오면 성경해석은 되는 겁니다.
자, 제사장 기능은 희생이기 때문에 십자가. 왕 기능은 이미 왕 기능은 승리했기 때문에 이건 부활.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것은 뭡니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 이게 다 이루어진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은 좀 더 상세히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뭐냐 하면 죽음이죠. 십자가는 죽음을 말하지요. 죽음인데 이게 두 종류가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현실에서의 죽음과 두 번째 환타지 속에서의 죽음. 이렇게 두 종류가 있는 겁니다. 환타지 속에서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자기의 죽음이라든지 남 타인의 죽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식의 죽음. 이런 죽음은 환타지 죽음이에요. 이건 그냥 헤어짐이지요. 그냥 아이고~ 아이고~ 형식과 격식을 갖추어서 그냥 헤어짐이에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냥 헤어지는 거고. 숨 끊어지는 거예요. 이 죽음은.
그러나 현실에서의 죽음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이 제사장직의 완성과 플러스 왕직의 완성을 모르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자에요.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걸 더 나아가서 제사장직과 왕직을 통해서 성전이 고정되어있으니까, 성전이 고정된 것을 이걸 말씀의 완성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말씀이 완성되어서 제사장과 왕이 되었다면 뭐가 악이고 뭐가 죄냐, 바로 이 사실에 갇혀있는 사람. 납 안에 갇혀있는 여인처럼 갇혀있는 사람 또는 그 현실이 우리 마음까지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복음에 닫혀있는 사람. 복음이 안 들리는 사람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죄가 되는 거예요. 복음이 안 들리는 거예요.
복음은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 + 왕. 왕이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그 사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면 그 왕이 되신 분이 죽기는 왜 죽느냐 큰소리지지요. 왜 죽느냐? 이 세상 자체가 이미 환타지이기 때문에, 환타지 속에서 인간들은 그걸 현실로 오해해가지고 이 세상에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도 봐! 살잖아. 되잖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전부 다 허망한 착각에 불과한 겁니다.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죽어도 사는 길이 있는데 왜 코앞에 죽는 것이 두려워가지고 벌벌 떨고 있느냐, 그건 마귀한테 속아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근거는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건 사냥개가 마귀한테 단단히 훈련 받았어.
악마의 자기의 본성을 인간에게 그대로 거기에 심어놓은 거예요. 인간이 누구의 마음이냐, 마귀의 마음이에요. 나는 절대자다. 나도 신이다. 나는 누구한테 끌리지 않는다. 나도 신 좀 해보자. 왜? 니만 신하나? 나도 신 해보자. 이 마음이 인간에게 그대로 Ctrl+V 복사되어 그대로 들어온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근거해서 현실이냐, 아니냐를 또는 선이냐, 악을 그리고 지가 스스로 측정했고요. 그렇게 판정을 내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대책은, 자기 백성도 마찬가지지요. 자기 백성을 뽑는 대책이 뭐냐, 대책이 나옵니다. 대책 없으면 큰일 나지요. 여기 또 여자 둘 등장합니다. 총 합해서 여자가 세 명 등장해요. 한 여자는 되 말속에 갇혀있는 여자. 또 두 여인은 바람 따라 나타난 여자에요. 9절 봅시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눈을 들어본 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뭐가 있습니까? 바람이 있지요. 자, 자유롭다 이 말이거든요. 이 여인은. 날개 있고 자유롭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에 갇혀있는 여인은 꼼짝 마라, 지요. 그래서 우리가 참 감사할게요, 세상이란 이 현실이 환타지인데, 환타지가 이렇게 막혀있는 환타지라는 거예요. 갇혀있는 거예요. 쭈그려 앉아있다고 보면 돼요. 여기 되 말하지만, 우리 식으로 하면 우리 토속 식으로 하면 가마솥 밑에 무거운 가마솥 뚜껑 안에 딱 백숙되려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모양새를 보세요. 그 안의 세계에요. 그 안의 세계에서는 그게 현실의 전부에요. 모든 현실의 전부는 그 안에 딱 갇혀있는 겁니다. 뚜껑이 납이 되어가지고 내 힘으로 들을 수가 없어요. 바깥을 몰라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뚜껑 덮힌 우물. 바깥으로 튀어나올 수가 없어요. 닫아놨어요.
요걸 저는 일종의 관이라고 봐요. 관. 죽은 사자를 오동나무 관으로 해가지고 운구할 때, 운구를 누가 하느냐 날개달린 여자 천사가, 여자 천사가 말이 안 되지만, 중성이기 때문에. 하여튼 두 여인이 날개의 바람을 타고 그걸 바짝 듭니다. 들어서 어디 가느냐 하면 장소가 있어요. 에바를 어디로 옮겨가느냐 물으니까 그들이 시날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함이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두루마리의 면적이 세로 10.4m, 5.2m해서 이건 성전의 현관, 그걸 낭실이라 하는데 성전의 낭실은 이게 열왕기상6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성전 낭실에 있는 그 두루마리 성전 입구에 있는 그 면적을 그대로 달랑 들고 갑니다. 두루마리가. 두루마리가 날아 가가지고 이게 뭘 하느냐 하면 불에 사른다 했지요. 4절 끝에 보면 그 집과 나무와 돌을 사르지요. 저주를 하는 거예요. 저주를 하겠지요. 요거는 일단은 요기 대비돼 있습니다. 딱 준비해 놓고.
그 다음에 다른 천사가 와서 해가지고 뭐를 들고 갑니까? 납의 뚜껑에 여인 하나가 꼬부리고 앉아서 있는 거예요. 눈은 못됐으니까 쫙 쬐지고. 여자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으악! 으악새 아닙니다. 여자 둘이 와서 달랑 이걸 운구하지요. 운구. 운구해서 어디로 가느냐, 시날땅으로 갑니다. 시날 땅으로 옮겨집니다. 시날땅은 뭐냐, 이건 바벨론제국이에요. 바벨론 제국에. 바벨론 제국에 가서 두 여자가 악을 옮기는 요 내용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하면 여기 바로 두루마리 안에 내용에 실현을 위한 겁니다. 말씀을 현실로 옮기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봐야할 것은 이러한 해석 납, 에바, 두 천사, 우리는 이걸 우리 인간 쪽에서 보면 이게 뭐냐 하면 환상 같지요. 이게 현실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내가 이 안에 들어있는 이 악 이게 현실 같지요? 제가 이렇게 묻는 것은 해석할 때에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좋은 조치를 해주실 겁니까?” 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그렇게 되면 묻는 자체가 내가 마치 환상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현실인양 우기는 셈이 돼요. 그 가짜인 고집을 안 버리고 가짜 고집을 계속 우기고 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진짜 실체는 하늘에 있고요, 우리는 모형이다 말이지요. 이건 악마가 베낀 거예요. 현실을 베껴서 환상으로 만들어 놨다 이 말이죠. 지금은 이제 악마의 지배에서 환상이 현실 노릇도 하고 있는 거예요. 매 뉴스 보세요. YTN 뉴스, 케이블 뉴스에 나오는 거 보면 전부 다 환상이야기에요. 그게. 현실은 하나도 없어요. 전혀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라니까요. 그러면 환상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 아니죠. 환타지가 있어줘야 거기서 현실을 뽑아내니까. 이 말씀을 뽑아내야 되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이 이 땅에 환상세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과 아픔과 곡해와 오해와 핍박과 버림을 당하는지를 이스라엘 이름으로 그들은 바벨론까지 끌려가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바벨론 제국에서 멸망당하는 그것이 현실을 현실 되기 위해서 마땅히 거쳐야 될 프로세스 과정입니다. 하나의 과정이에요. 필히 걸쳐야 될 절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그래요. “아이고~ 목사님, 제 소원은 그냥 죽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죽는 게 소원되어가지고 그런지 유행이던지. 그냥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몸이 아픈 사람들 있잖아요. 목사님, 죽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데려가요. 안 아프고 데려가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고통을 빨리 면제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식이지요. 그리되어버리면 본인 자체가 환상이 아니고 본인 자체가 마치 현실인양 행세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현실인양.
아까 욥 이야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은 지금 해명이 안 되는 고통을 받아요. 그래서 자기는 분명히 현실인데 고통이 또 하나의 현실이 오니까 두 개의 현실 중에 어느 게 현실인지 자기가 지금 감당이 안 되어서 헷갈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안달이 났던지 죽고 난 뒤에 한 번 따져보겠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내게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주님은 알겁니다. 내가 얼마나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었는지 이런 식으로 막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런 식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기도했겠어요.
바로 그 욥의 과정을 우리가 겪어야 됩니다. 겪어야 돼요. 이 자아라는 것은요, 자아라는 이 환상은 내가 내 힘으로 벗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벗길 수가 없어요. 나는 죄인이며 아까 간음한 여인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없나이다. 이 여인이 없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누가 이야기를 물어줘서 그래요.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주님이 이야기하니까 없나이다. 라고 답한 거예요. 자기는 없나이다. 존재에요. 없나이다, 존재. 없음이란 존재가 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해서 우리가 노력해서 성공해서 그게 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 그 정도의 낭패를 이 땅에서 막다른 그것을 계속 그런 사태가 일어나야 돼요. 성도로서 공통적으로 겪는 고민거리가 뭐냐 하면 복음도 얼추 알고 이제 십자가도 알고 누가 봐도 내가 성도인 거 같은데, 왜 일상에 일어나는 매일 매일의 사태가 나의 눈에 가시 같은 사태만 일어나느냐 이 말입니다. 이제는 꽃길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 놈의 꽃길에 가시가 얼마나 많은지. 이렇게 아스팔트길에 가면서 그냥 큰소리 찬송가 부르면서 주님은 나의 소망이요, 하면 좋겠는데 이게 맨날 자빠져. 아스팔트에 뭔가 자꾸 돌출되는 요소가 있어요. 가다가 자빠지고 코 깨지고 맨날 깨지고, 화내고 싸우고 또 난리 났어요. 이제는 하루 하루 사는 게 겁이 나. 또 무슨 일이 터질까봐서. 사단 날까봐.
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아는데 성도 맞는데 왜 내가 안 겪으면 좋을 사태들이 자꾸 돌기처럼 앞에 돋아나느냐 말입니다. 우리의 환상성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 환상성이 내 소원대로 그렇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겪어야 돼요. 그 겪는 작업이 뭐냐 하면 바로 확인 작업인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1번, 나는 구원 받았음을 확인 아닙니다. 2번, 내 안에 스가랴 말씀 들었음을 이거 확인하는 거예요. 말씀 확인이에요. 내 구원 확인이 아니고 내 말씀 확인이에요. 왜냐하면 내 구원이 되면 나는 여기1번에는 살아 있잖아요. 2번에는 말씀이 주인공이에요. 말씀을 위한 시다바리가 나다 이 말이지요. 나는 이미 엄한 아버지한테 종속되었어요. 찐빵을 줄지, 호빵을 줄지, 회초리를 줄지 그건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에요.
“아빠, 나는 호빵 먹고 싶어.” 이러면 이 자체가 현실이 되어버린다고요. 환상이 아니고. 현실은 아버지가 현실이에요. 나는 현실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통해서 스가랴5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계속해서 무한 반복시키는 게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시키는 겁니다. 이 땅이 바벨론 땅이에요. 바벨론 땅.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전력이 바로 악에 갇혀가지고 더 노골적으로 하면 악에 받쳤다 하지요. 악에 받쳐가지고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내 것만 챙기는 그러면서도 그런 현실이고 싶어 하는 나의 소원, 나의 소망, 이게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이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나야 돼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담의 이름을 버리지 말라고요. 주님의 이름은 없다고요. 내 이름 버리지 말고. 그게 다 쓸모 있어요. 내 이름 있는 곳에 주님 있는 거지. 내 이름 버리면 주님 이름도 날아가 버려요. 내가 나를 못 버려요. 버리면 안돼요. 내가 버리면 주의 말씀이 날아가 버려요. 주님께서 나를 꼭 쥐고 있습니다. 나를 꼭 쥐고 내 안에 바깥에 있는 현실이 내 마음에 현실이 되어있음을 우리로부터 계속 들추어주는 그런 작업을 계속하는 겁니다.
말씀을 한 번 보고 일독하고 다 떼었다. 이러면 안돼요. 끊임없이 내가 아는 말씀 지식이 얼마나 현실에 작용하는 말씀과 괴리적이고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잘못된 착각인지를 실제 일어난 사태와 마주치면서 계속해서 이게 내안에서 수정작업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그 기준. 그러니까 왕 대신 주님께서 제사장 되심을 그것을 계속해서 고정된 것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봅시다. 얼마 안 남았지만, 요거는 꼭 추가하고 싶어요. 요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야 해요. 안 그러면 안 됩니다. 나가 있다 했지요. 나는 반드시 누구를 여기 빈자리에 누구를 호출하느냐 하면 너를 호출하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너를 호출하게 되어있어요. 나와 너가 있다는 이게 뭐냐 하면 환상세계에 환타지 세계에 구조입니다. 격가지 다 떼 내어 보세요. 나머지기 나는 뭐 어느 학교 나오고 다 떼고, 나는 재산이 얼마고 다 떼고, 아파트 다 떼고, 달랑 남아있다면 세상에 남아있는 경우는 없어요. 반드시 나 앞에 너가 있어요. 너와 나에요. 너와 나.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 성전에서 감람나무가 몇 개였습니까? 둘이지요. 그걸 그대로 악마가 여기서 복사를 했으니까 이 세상에는 딱 두 사람 나와요. 나와 그리고 너. 또 만약에 나와 너에요. 이걸 너희들이라 해도 너에요. 다 압축해보면 너가 된다고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의 해석에 잘못된 예가 뭐냐 하면 그겁니다. 요한계시록 보면서 하나님을 불러요. 예수님을 불러요. 주 예수님을. 그러면 주는 뭐가 됩니까? 너가 되겠지요. 누가 부릅니까? 내가 부르지요. 이 자체가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나 자리에 주님이 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주님을 상대방 저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주님께서 진짜 자기 백성한테는 나에다가 무슨 이름을 집어넣느냐 하면 생명책에 자기 이름을 여기다가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럼 이름은 아까 제가 구약 이름은 기능했지요. 그러면 내 이름이 있으면 내 구원 받은 게 있다는 고집스러운 내 기능이 나오겠지만 이게 내 이름에 주님의 이름이 들어와 버리면 내가 이 시대에 두 감람나무처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
나와 너가 이렇게 되게 되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말씀과 주님과 악마와 싸우고 모든 것이 그렇게 해석해버리면 이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나가 뭐가 되느냐 하면 현실이 되어버려요. 그럼 나만 현실이 아니고 내가 지목한 너도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환상은 없어요.
그럼 누구부터 먼저 환상이 되어야 돼요? 나가 환상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럼 여기 나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주님이 오시게 되면 주님만이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해석이 왜 어려우냐 하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의 오시는 주님의 현실이 전부 다 무슨 용어냐 하면 환타지 환상 용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게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익숙한 것은 뭐냐 내 중심의 세계에서 통하는 그 단어가 주님한테 사용하니까 현재 내 중심으로 해석했던 그 해석이 주님 해석에는 이건 먹히지를 않아요. 먹혀들어가지를 않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체 내가 환타지로 오히려 지적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내 해석 내 자체가 지적받는 거예요.
그럼 요한계시록 해석은 어떻게 합니까. 아까 성도 어떻게 살라 했습니까? 그냥 아무 상관없이 구애받지 않고 살게 되면 뭐가 나온다 했어요? 계속해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이에요. 나는 피하고 싶다. 피하고 싶다 하면 안돼요. 그냥 일어나요. 마치 내가 행동하는 것이 주의 일이듯이. 나한테 일어나는 일도 주의 일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내게 일어난 일을 나의 일로 간주해버리면 내 앞에 일어난 일은 너가 되어버립니다. “주여, 저기 저 사람이 나를 왜 괴롭힙니까?” 갑자기 환타지가 현실로 바뀐다고요. 그러면 안돼요.
나도 우연히 여기에 태어났고, 하루, 하루를 우연히 살아가는 걸로 여기시고 나를 우연으로 하나의 환타지로 봐야 이 땅에 보이지 않는 분이 요한계시록대로 실제로 작용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비로소 우리는 증거 할 수 있는 겁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구태여 관여할 필요 없습니다. 이런 마음.
“주여, 주의 기능만 그냥 내 속에서 작용만 하게 해주옵소서.” 주께서 실제로 우리를 장악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호빵 원하지 마시고, 채찍질 원하는 사람 없고, 그냥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그냥 우리 안에서 실현되게 해달라는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곳이 바벨론이요, 저주받을 멸망할 도성인 것을 우리는 이제 알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완성된 십자가의 다 이루심과 부활의 이루심이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