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바람

아빠와 함께 2021. 4. 4. 21:43

가락-요한복음 2장23(바람)14060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2장 23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이 유월절에 두 번 올라갔는가, 세 번 올라갔는가, 따라서 예수님이 세 번 올라갔다면 3년이고 두 번 올라갔다면 2년이다. 이게 성경 자체에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2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3년이라 하는데 2년 될 경우에는 예수님 나이가 32살이고 3년이면 33세가 되는 겁니다.

여기 유월절이 앞에 있는 유월절과 같은 유월절인가? 내가 보기는 같은 유월절 같아요. 여기 유월절에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돼 있죠. 여기 유월절에 표적을 행했다 하는 게 나오는데 표적이란 말을 사용할 때 지난번에 이야기했습니다마는 기적하고 표적하고 차이 난다 했죠? 기적은 누가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고 표적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주님 쪽에서 제시하고 벌이신 일이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적의 내용은 이미 인간들이 알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표적의 내용은 예상 밖의 내용 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표적은 사람 고발용이라고 보면 되죠. ‘너희들 이런 거 원하지 않았지? 그렇지?’ 라고 추궁하듯이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두 개가 겹칠 때가 있어요. 겹칠 때가 있으면 주님의 고발 정도가 심해집니다. 오병이어, ‘배고프다, 해결해 주세요.’ 떡 줄게. 고기 줄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기적으로 이해한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맞구나.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챙겨주시니까 이런 하나님 같으면 이런 주님 같으면 왕으로 삼으면 되겠다. 하고 임금 삼으려고 쫓아갔죠. 그런데 그게 표적인 줄 몰랐고 기적 받은 걸로 생각한 거죠.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뭘 원하느냐 하면 기적을 원합니다. 헬라인은 지식을 원하는데, 유대인들이 왜 기적을 원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어디서 발견하느냐 하는 그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 자체가 중요한 기적이 전환점이 되어서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단순한 역사가 아닙니다. 어떠한 역사냐 하면 차별적 역사에요. 누구와 차별하느냐 하면 이방나라, 이방민족이 나름대로 역사가 있잖습니까? 이방나라의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는 차별됐는데 보통 역사라는 게 성립되려면 그 역사에 소속된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을 때는 역사도 함께 있는 겁니다.

지금 전두환 대통령 역사 어디 있죠? 그런 전두환 대통령 몇 년 했습니까? 7년 하고 끝났죠. 계속 그 위치에 없으면 역사가 끊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라 하는 것은 그 위치에 계속 존속 돼야 돼요. 이방민족들이 그 민족들이 그 민족이잖아요. 존속하잖아요. 이방민족이 존속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를 이방민족은 뭐라 하느냐 하면 신이 보호하사 존속한다고 보는 겁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뭡니까? 누가 보호한다고 해요? 하나님이 보호하죠. 그럼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가 어떤 역경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만큼 버티고 있었던 것은 특별히 외부에서 신적인 존재가 보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유지될 수 있다는 그런 것이 하나의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바가 추월 적 종교라는 겁니다. 이방민족에게는 다 그런 신이 있거든요. 그들이 전쟁할 때 신의 이름으로 나가서 전쟁합니다. ‘마르둑신이여, 우리 바벨론을 지켜주옵소서.’ 그리고 모든 아람, 모압 전부 다 신들이 나오는데 나온다는 것은 그 사람들도 역사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도 역사가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는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지켜주는 거예요. 그럼 이 두 민족이 전쟁을 할 때는 결국 무슨 전쟁 이예요? 신의 이름과의 전쟁이죠. 여호와는 뭐라 합니까? "내 이름을 불러라. 그럼 전쟁하겠다.“ 이방민족은 뭐합니까? 깃발 들고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전쟁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니까 결국은 목청의 싸움이네. 소리의 싸움 이예요? 누가 자기 신을 더 열심히 부르느냐 그 싸움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의 차이성은 주의 이름이 소리 높여 부른다고 주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될 특별한 시스템, 틀, 장치가 있어요. 그게 바로 언약궤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있어서 언약궤를 밀고 들어가면 승리하고 언약궤를 만약에 버리고 그냥 전쟁하면 패배하게 돼 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언약궤에 누구 이름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거든요. 그러면 다른 민족은 어떠냐 하면 신이라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살려내기 위해서 신이 필요한 민족인 반면에, 이거 잘 아셔야 돼요. 현재 살아있는 인간들 육체, 이 몸, 단체, 이걸 지켜주기 위해서 신과 협상해 나가죠. 이방인들도 항상 정기적으로 뇌물 바칩니다. 처녀를 바치든지 아기를 바치든지 마야 문명에 보면 나오거든요. BC 6세기경에 현재 멕시코. 잉카 문명은 페루라든지. 거기 보면 제단을 만들어 바쳤는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누굴 위한 하나님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분이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백성이 있어야 돼요. 다른 민족은 어떻다? 다른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 그때마다 신이 도와줘야 돼요.

특이성이 있어야 되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나라 민족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위한 우리가 아니고 우리 자신들 살리기 위한 하나님으로 바뀌게 됩니다. 망합니다.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 망한 이유가 주객이 바뀌어서 그래요. 나를 위한 하나님 때문에 망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왜 갈까요? 하나님 앞에 목숨 바치기 위해서 교회 나가십니까? 자기를 위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 항상 우상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항상 붙여요. 자기를 위한 것은 뒤에 여호와가 됐든 삼위일체가 됐든 예수가 됐든 그게 바로 우상 이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신학에서는 뭘 죽이느냐 하면 앞에 자기를 죽여 버리고,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가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항상 우리는 육신이 있는 한 누가 우선이냐 하면 내가 갑이고 내가 살아나요. 내가 살아나는 것을 주님께서 만만한 분이 아니거든요. 주님도 같이 살아 있잖아요. 부활하셨으니까. 동행하시면서 항상 이것을 부정해버려요. 이번 일은 너 좋으라고 한 게 아니고 나 좋으라고 한 일이다. 이래서 자꾸 이게 대결과 경쟁에 나섭니다. 그게 기적을 달라 할 때 주께서 주시는 것은 ‘네가 원하는 기적은 이미 네가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못 주겠다. 단지 너 자신을 표적을 보여주는데 너를 참여시켜 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표함 시켜 주는 거예요.

주도권을 주님이 쥐고 모든 스케줄과 계획, 프로젝트를 주님이 쥐고 너는 거기에 종으로서 그냥 참여하는 영광이나 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인데 비록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적인 본성은 항상 뭔가 유별나게 기도하고 싶고 뭔가 헌금하고 싶고 열심내고 싶을 때는 반드시 노림수가 있어요.

집안에 일이 있다든지 애가 고 3이라든지 벌써 일이 있어요. 갑자기 몸이 시름시름 아프다든지 고부간의 갈등이 있다든지 주식 값이 떨어졌다든지, 땅을 사놨다든지, 뭔가 있어요. 교육관을 지어야 되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가 있을 때는 꼭 갑자기 독하게 금식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해요. ‘주여, 말로만 전능하지 마시고 전능하신 티 좀 내주세요.’ 그래야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목격하게 되면 나로 인하여 증거 하게 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실제는 자기 노리는 게 따로 있으면서. 글쎄요. 하나님은 그걸 겹치게 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이 응답을 해줄 수도 있어요. 몸이 아픈데 기도하니까 갑자기 몸이 깨끗이 나을 수가 있어요. 병원에 가서 찍어보니까 암 세포가 나았다 그럴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신났죠. 왜, 병원비용 계산하게 되죠. 병 낫고 헌금한 비용보다 그동안 병원에 다닌 비용이 훨씬 많으니까, 항상 문제는 돈이 문제니까. 돈이 헐하게 치면서 원래 노리던 효과 얻으면 이 세상에 그처럼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아프면 또 해야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표적이 되려면, 방금 예로 암 걸린 이야기를 했잖아요. 요한복음 2장 초반에 보면 거기 무슨 표적이 나옵니까? 가나안 혼인잔치 나오죠. 분명히 마리아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포도주 떨어졌으니까 포도주 채워달라고 주님한테 요구했죠. 자기 아들이 보통 사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이쿠, 어머니께서 저를 알아주시니 얼른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습니까? 뭐라 했어요? “여자여, 그 일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여자여, 어머니여 당신은 나와 상관없는 것을 나한테 제안했습니다.” 상관없는 걸 제안했어요.

그럼 상관없는 걸 제안했으면 안 들어줘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야 앞 뒤 일관성이 있잖아요. 안 들어준다 해놓고 도대체 마리아가 무슨 눈치를 봤는지 하인들에게 “이분이 시키는 대로 해라” 해서 물을 떠다 주니까 포도주가 됐다.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표적이었다. 라는 겁니다. 내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곡해해서 요구한 그 기적, 하지만 그 기적을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기적을 주면서도 그것이 마리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결국은 자신이 누군가를 드러낼 그때, 예수님의 자신의 때를 미리 앞당겨서 예고편 조로 미리 가나안 혼인잔치에 주님이 어떤 분이란 걸 드러내셨다. 그게 표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표적은 미래에서 온 그림자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기억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예상은 과거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과거에 누진된 것이 미래를 낳게 만듭니다. 누진된 가운데 미흡한 것이 있으면 남겨놨다가 기도를 통해서 미래에 달성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되게 하는 것은 미래에서 오는 거예요. 집사님이 지금 머리가 허옇고 안경 끼고 있지만 미래에서 온 코난입니다. 남이 보기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돼야 미래의 확정된 집사님의 구원이 앞당겨서 이 모습으로 드러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미련을 두지 않게 되죠. 히브리서 11장에 우리가 진짜 말로만 나그네가 아니고 진짜 나그네 꼴로 살도록 그렇게 강제로 조치를 그렇게 굽이굽이마다 이끌어내신다는 것을 우리가 온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데 실수 하세요! 항상 실수해야 됩니다. 그러면 실수를 어떻게 하느냐? 그냥 막 사시면 실수하는 거예요. 이 막 사는 것 때문에 삐진 사람이 아마 수천 명 될 거예요. 제 말을 못 알아듣고, 막 사시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요. 막 사시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자기 의를 못 놓겠다는 표현으로 난 받아들여요. 자기 의를 때려 죽여도 내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과 의는 못 놓겠다. 그래서 막 사세요, 에 대해서 발칵 발작합니다. 내가 성령 받아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 됐는데 ‘막 사세요.’ 하면 어떡하라고. 성경 보세요. 사도바울이 막 살라고 했습니까? 안 했잖아. 그런데 이 근호 당신은 막 살라 하느냐? 성경대로 해야지. 그러면 내가 이야기하죠. 성경대로 하는 게 막 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게 수요설교 한 내용인데요, 성경대로 지켰다고 해버리면 분명히 주님 보시기에 막 살아놓고 자기는 ‘성경대로 지켰습니다.’라고 우기는 바가 되는데 그 우기는 심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일말의 자기 의를 이렇게 불꽃을 피우듯이 키우고 싶은 본성대로 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내 이 행동은 주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 의와 만족이 될 경우뿐입니다. 하고 사진 찍을 때 그럴 때 ‘맞아. 내가 요 말씀대로 지켰으니까  나는 신도 맞아.’ 하고 스스로 자기 행위를 통해서 확인받고 싶을 때 이런 말(막 살라)에 대해서 아주 반발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신자라고요?’ 귀신이나 나라도 알겠다. 신자 아닌지.

왜 저는 ‘그냥 막 사세요.’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실수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실수하거든요. 매일같이 실수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분노하거든요. 우리는 하루도 분노 안 하는 날이 없어요. 아까 김 중우 집사님이 쉬는 시간이 이야기했는데 ‘내가 투표한 사람 다 떨어졌다.’는 거예요. 교육감도 떨어지고 시장도 떨어지고 다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 말을 한 내용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화난다. 그런 뜻 이예요.

매일같이 분노하는 이유가 왜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뭐든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은 아이큐가 낮은 바보가 아닌 이상은 힘들면 복수가 나오게 돼 있어요. 반드시 반발이 나오게 돼 있고 이건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우리가 천사도 아니고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잖아요. 그러면 이 말이 맞다면 결국 우리는 매일 실수 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실수를 줄이겠다는 거예요. 줄이겠다는 그 의도가 뭐냐, 줄어든다. 줄어든다. 줄이면 그 줄인 폭만큼 뭐가 남겠어요? 뭐가 생산되겠습니까? 자기 의가 생산될 게 아닙니까? 결국은 자기 의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눈 돌렸어요. 십자가에서 눈 돌리니까 타인이 보이고 네가 잘했나, 내가 잘했나, 결국 타인과의 경쟁의식, 비교의식, 그 이외는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바라보게 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예수니라.’ 사도바울이 봤던 그 음성이 들려올 경우에는 뭐가 됩니까? 실수해도 구원받으니 나오는 건 뭐밖에 없어요? Thank You! 감사밖에 안 나오죠. 모든 게 범사에 감사만 나오는 거예요. 실수하시고 감사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제 말을 오해해서 내 완벽한 그것으로 감사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잘남으로 감사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내가 그러죠. 그건 타고난 본성은 이해하겠는데 그건 주의 뜻이 아닌 겁니다. 그건 믿음의 태도가 아닌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표적과 기적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나 유대인들은 기적, 표적을 원한다. 그 기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디서 발견되느냐 하는 겁니다. 유대인은 망했잖아요. 망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운 우리나라, 요새 말로 우리교회, 내 교회 잘 되게 해주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미쳤어요. 그러다 그 교회서 미움 받아 쫓겨나 보세요. 대번 그 교회 복수하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교회 복주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럼 그 교회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안에 누가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들어있는 거예요. 결국은 신은 누굴 위해 존재한다? 달랑 나만, 달랑 나만 위해 존재하니까 그래야 나는 하나님 믿는 보람과 희망을 갖겠다는 거예요.

이 구약 성경을 보면 그게 바로 우상이거든요. 자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위하여, 문제는 내 이름이라. 항상 내 이름으로 구원 못 받는데 자꾸 우리는 내 이름을 포기를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대책 없네요. 이럴 때 표적이 주어져요. 대책이 없는데 표적이 주어지는데 그 표적은 우리가 그렇게 까불고 나밖에 모르는 그 인간, 그걸 표적의 재료로 집어넣어주는 고마움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잘나서 주의 일에 참여되는 게 아니고 못나도 너~무 못났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이 못난이, 나는 못난이~♬ 항상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못난이를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돋보이는데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거는 참 큰 축복을 받은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주여, 제 기적 듣지 마시고 꺾어주시고(우리는 계속 기적을 원하니까) 주의 표적에 소속되게 하옵소서. 벌써 기적과 표적을 나누는 사람 맞죠. 기적은 그 내용물이 나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고, 표적은 내가 알 수 없는 주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룬 그쪽에서, 미래에서 현재로 미리 덮쳐진 것이고 그게 표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표적을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백날 언급해봐야 사람들은 그걸 뭐로 이해합니까? 기적으로 이해하죠. 환장할 일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병이어를 분명히 주님은 표적인데 그들은 기적으로 이해해서 결국 주님을 따라가니까 한편이라고 따라가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왜 따라왔느냐?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예, 예, 맞네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늘나라 관계없는 사람이야. 진짜 하나님의 일은 내 말을 들으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다 가버렸어요.

서울시민이 표 찍어서 박 원순 시장이 재선 됐잖아요. 그래서 시민 대표가 와서 ‘아이구, 시장님 축하합니다.’ 하면 박 원순 시장이 ‘왜 저를 축하하죠? 뭐 때문에 축하하죠? 아파트 값 오를까 봐요? 뭐 때문에 축하하죠? 내 살과 내 피를 뜯어먹으세요. 그래야 잘 삽니다.’ 이러면 ‘아이쿠, 우리가 사람 잘못 골랐구나.’ 하잖아요. ‘우리한테 무용지물인 사람을 우리가 뽑았구나.’ 하고 하나, 둘 다 가버리죠. 다 가고 난 뒤에 박 원순 시장께서 자기 수행원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도 가지, 왜 끝났는데 가지?’ 하면 그중에 하나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어디로 가오리까. 저 잘했죠? 잘했죠?’ 하는 식으로. 그러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문제는 박 원순 아버지가 중요한 분이예요.

예수님은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예수님의 모든 일은 아버지와 둘만의 창세전에 하신 프로젝트를 그냥 실천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말이 24절부터 말이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그 다음에 보세요.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게 상당히 난해한 말 이예요.

이 말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집어넣었어요? 차라리 이 말, 2절 말이 없었으면 ‘예수님 우리 협상합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타협합시다.’ 분명히 이렇게 나올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이죠. ‘주께서 하늘나라 확장하려고 오셨죠? 제가 보탬 되겠습니다. 제가 하청업자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 취지와 동일하니까 주님께서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 도와주시면 제가 하는 일도 좋고 주님도 잘 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괜찮죠?‘ 이렇게 될 터인데 25절은 그걸 거부해요. 뭡니까? ’내가 너희들이 눈치 채는 그런 증거는 나한테 해당되지 않는다고 알아라.’ 그 말 이예요.

더 쉽게 말해서 너희 능력으로 나를 믿을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럼 열 두 제자는 믿었잖아? 열 두 제자 믿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주님이 사랑해서 그렇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배신하고 모른다고 부정하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더 돋보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게 되면 실수하세요. 매일같이 실수하세요. 어떤 실수 말입니까? 주님이든 하나님이든 날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 생각하는 그 실수, ‘내가 이렇게 힘든데 주님이 안 도와줄 거예요?‘라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실수. ’내가 저렇게 싫어하는 인간이 잘 되고 나는 못 되는데 주님 저 인간 당장 죽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짜증내는 그 실수를 하란 말이죠. 내가 표 찍었는데 왜 엉뚱한 사람이 당선될 때 한 사흘 동안 하다 엎어져라.‘ 이렇게 약간의 복수심이 발동하게 되는 그 실수.

그럼 이 실수는 우리가 교정이 가능합니까? 불가합니까? 우리가 교정 불가한, 우리가 다스릴 수 없는 실수. 인간이기에 육신을 가졌기에 계속 폭발하는 실수,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가 꼭 죄져야 상한 심령이 아니고 매일같이 돌이켜 보면 우리가 참 썩어빠진, 상한 심령이라는 게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음식 오래된 것을 말하죠. 음식이 시어버린. 바로 내가 시어버린, 정말 내가 봐도 가치 없는 존재가 난데, 그런 인간을 주님이 주님 자체를 증거 하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이 사실을 내가 이 정도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자체가 이미 거기에 합류된 겁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어떤 증거도 받지 않습니다.

제가 아까 유튜브 강의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난해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는 믿음을 발생시키는데 우리는 내가 믿는 자 되기를 원해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 자 되려면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되겠죠? 그럼 이 믿음은 뭐가 돼요? 행함이 되는 거예요. 사람은 이걸 자꾸 믿음이라 하는데 성경에 보면 믿음에서 믿음이 나오지, 내가 여기에 들어가지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의의 출발점은 내 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시작되고 예수님 쪽에서 회수해 나가거든요. 우리는 그냥 경유 당하는 거예요. 주님의 의가 왔을 때 우리는 거기에 믿음이 발생되고 그 믿음이 발생된 결과물이 믿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라 하면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예수를 새롭게 믿으려 하니까 그 믿음은 예수 믿는다는 그 자체가 예수 믿는 행함이 돼 버려요. 행함이 되니까 치매 걸리면 조져놔 버리는 거예요. 치매-요한복음 2장23(바람)14060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2장 23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이 유월절에 두 번 올라갔는가, 세 번 올라갔는가, 따라서 예수님이 세 번 올라갔다면 3년이고 두 번 올라갔다면 2년이다. 이게 성경 자체에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2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3년이라 하는데 2년 될 경우에는 예수님 나이가 32살이고 3년이면 33세가 되는 겁니다.

 

여기 유월절이 앞에 있는 유월절과 같은 유월절인가? 내가 보기는 같은 유월절 같아요. 여기 유월절에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돼 있죠. 여기 유월절에 표적을 행했다 하는 게 나오는데 표적이란 말을 사용할 때 지난번에 이야기했습니다마는 기적하고 표적하고 차이 난다 했죠? 기적은 누가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고 표적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주님 쪽에서 제시하고 벌이신 일이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적의 내용은 이미 인간들이 알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표적의 내용은 예상 밖의 내용 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표적은 사람 고발용이라고 보면 되죠. ‘너희들 이런 거 원하지 않았지? 그렇지?’ 라고 추궁하듯이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두 개가 겹칠 때가 있어요. 겹칠 때가 있으면 주님의 고발 정도가 심해집니다. 오병이어, ‘배고프다, 해결해 주세요.’ 떡 줄게. 고기 줄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기적으로 이해한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맞구나.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챙겨주시니까 이런 하나님 같으면 이런 주님 같으면 왕으로 삼으면 되겠다. 하고 임금 삼으려고 쫓아갔죠. 그런데 그게 표적인 줄 몰랐고 기적 받은 걸로 생각한 거죠.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뭘 원하느냐 하면 기적을 원합니다. 헬라인은 지식을 원하는데, 유대인들이 왜 기적을 원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어디서 발견하느냐 하는 그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 자체가 중요한 기적이 전환점이 되어서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단순한 역사가 아닙니다. 어떠한 역사냐 하면 차별적 역사에요. 누구와 차별하느냐 하면 이방나라, 이방민족이 나름대로 역사가 있잖습니까? 이방나라의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는 차별됐는데 보통 역사라는 게 성립되려면 그 역사에 소속된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을 때는 역사도 함께 있는 겁니다.

 

지금 전두환 대통령 역사 어디 있죠? 그런 전두환 대통령 몇 년 했습니까? 7년 하고 끝났죠. 계속 그 위치에 없으면 역사가 끊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라 하는 것은 그 위치에 계속 존속 돼야 돼요. 이방민족들이 그 민족들이 그 민족이잖아요. 존속하잖아요. 이방민족이 존속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를 이방민족은 뭐라 하느냐 하면 신이 보호하사 존속한다고 보는 겁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뭡니까? 누가 보호한다고 해요? 하나님이 보호하죠. 그럼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가 어떤 역경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만큼 버티고 있었던 것은 특별히 외부에서 신적인 존재가 보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유지될 수 있다는 그런 것이 하나의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바가 추월 적 종교라는 겁니다. 이방민족에게는 다 그런 신이 있거든요. 그들이 전쟁할 때 신의 이름으로 나가서 전쟁합니다. ‘마르둑신이여, 우리 바벨론을 지켜주옵소서.’ 그리고 모든 아람, 모압 전부 다 신들이 나오는데 나온다는 것은 그 사람들도 역사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도 역사가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는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지켜주는 거예요. 그럼 이 두 민족이 전쟁을 할 때는 결국 무슨 전쟁 이예요? 신의 이름과의 전쟁이죠. 여호와는 뭐라 합니까? "내 이름을 불러라. 그럼 전쟁하겠다.“ 이방민족은 뭐합니까? 깃발 들고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전쟁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니까 결국은 목청의 싸움이네. 소리의 싸움 이예요? 누가 자기 신을 더 열심히 부르느냐 그 싸움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의 차이성은 주의 이름이 소리 높여 부른다고 주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될 특별한 시스템, 틀, 장치가 있어요. 그게 바로 언약궤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있어서 언약궤를 밀고 들어가면 승리하고 언약궤를 만약에 버리고 그냥 전쟁하면 패배하게 돼 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언약궤에 누구 이름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거든요. 그러면 다른 민족은 어떠냐 하면 신이라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살려내기 위해서 신이 필요한 민족인 반면에, 이거 잘 아셔야 돼요. 현재 살아있는 인간들 육체, 이 몸, 단체, 이걸 지켜주기 위해서 신과 협상해 나가죠. 이방인들도 항상 정기적으로 뇌물 바칩니다. 처녀를 바치든지 아기를 바치든지 마야 문명에 보면 나오거든요. BC 6세기경에 현재 멕시코. 잉카 문명은 페루라든지. 거기 보면 제단을 만들어 바쳤는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누굴 위한 하나님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분이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백성이 있어야 돼요. 다른 민족은 어떻다? 다른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 그때마다 신이 도와줘야 돼요.

 

특이성이 있어야 되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나라 민족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위한 우리가 아니고 우리 자신들 살리기 위한 하나님으로 바뀌게 됩니다. 망합니다.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 망한 이유가 주객이 바뀌어서 그래요. 나를 위한 하나님 때문에 망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왜 갈까요? 하나님 앞에 목숨 바치기 위해서 교회 나가십니까? 자기를 위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 항상 우상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항상 붙여요. 자기를 위한 것은 뒤에 여호와가 됐든 삼위일체가 됐든 예수가 됐든 그게 바로 우상 이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신학에서는 뭘 죽이느냐 하면 앞에 자기를 죽여 버리고,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가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항상 우리는 육신이 있는 한 누가 우선이냐 하면 내가 갑이고 내가 살아나요. 내가 살아나는 것을 주님께서 만만한 분이 아니거든요. 주님도 같이 살아 있잖아요. 부활하셨으니까. 동행하시면서 항상 이것을 부정해버려요. 이번 일은 너 좋으라고 한 게 아니고 나 좋으라고 한 일이다. 이래서 자꾸 이게 대결과 경쟁에 나섭니다. 그게 기적을 달라 할 때 주께서 주시는 것은 ‘네가 원하는 기적은 이미 네가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못 주겠다. 단지 너 자신을 표적을 보여주는데 너를 참여시켜 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표함 시켜 주는 거예요.

 

주도권을 주님이 쥐고 모든 스케줄과 계획, 프로젝트를 주님이 쥐고 너는 거기에 종으로서 그냥 참여하는 영광이나 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인데 비록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적인 본성은 항상 뭔가 유별나게 기도하고 싶고 뭔가 헌금하고 싶고 열심내고 싶을 때는 반드시 노림수가 있어요.

 

집안에 일이 있다든지 애가 고 3이라든지 벌써 일이 있어요. 갑자기 몸이 시름시름 아프다든지 고부간의 갈등이 있다든지 주식 값이 떨어졌다든지, 땅을 사놨다든지, 뭔가 있어요. 교육관을 지어야 되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가 있을 때는 꼭 갑자기 독하게 금식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해요. ‘주여, 말로만 전능하지 마시고 전능하신 티 좀 내주세요.’ 그래야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목격하게 되면 나로 인하여 증거 하게 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실제는 자기 노리는 게 따로 있으면서. 글쎄요. 하나님은 그걸 겹치게 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이 응답을 해줄 수도 있어요. 몸이 아픈데 기도하니까 갑자기 몸이 깨끗이 나을 수가 있어요. 병원에 가서 찍어보니까 암 세포가 나았다 그럴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신났죠. 왜, 병원비용 계산하게 되죠. 병 낫고 헌금한 비용보다 그동안 병원에 다닌 비용이 훨씬 많으니까, 항상 문제는 돈이 문제니까. 돈이 헐하게 치면서 원래 노리던 효과 얻으면 이 세상에 그처럼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아프면 또 해야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표적이 되려면, 방금 예로 암 걸린 이야기를 했잖아요. 요한복음 2장 초반에 보면 거기 무슨 표적이 나옵니까? 가나안 혼인잔치 나오죠. 분명히 마리아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포도주 떨어졌으니까 포도주 채워달라고 주님한테 요구했죠. 자기 아들이 보통 사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이쿠, 어머니께서 저를 알아주시니 얼른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습니까? 뭐라 했어요? “여자여, 그 일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여자여, 어머니여 당신은 나와 상관없는 것을 나한테 제안했습니다.” 상관없는 걸 제안했어요.

 

그럼 상관없는 걸 제안했으면 안 들어줘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야 앞 뒤 일관성이 있잖아요. 안 들어준다 해놓고 도대체 마리아가 무슨 눈치를 봤는지 하인들에게 “이분이 시키는 대로 해라” 해서 물을 떠다 주니까 포도주가 됐다.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표적이었다. 라는 겁니다. 내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곡해해서 요구한 그 기적, 하지만 그 기적을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기적을 주면서도 그것이 마리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결국은 자신이 누군가를 드러낼 그때, 예수님의 자신의 때를 미리 앞당겨서 예고편 조로 미리 가나안 혼인잔치에 주님이 어떤 분이란 걸 드러내셨다. 그게 표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표적은 미래에서 온 그림자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기억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예상은 과거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과거에 누진된 것이 미래를 낳게 만듭니다. 누진된 가운데 미흡한 것이 있으면 남겨놨다가 기도를 통해서 미래에 달성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되게 하는 것은 미래에서 오는 거예요. 집사님이 지금 머리가 허옇고 안경 끼고 있지만 미래에서 온 코난입니다. 남이 보기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돼야 미래의 확정된 집사님의 구원이 앞당겨서 이 모습으로 드러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미련을 두지 않게 되죠. 히브리서 11장에 우리가 진짜 말로만 나그네가 아니고 진짜 나그네 꼴로 살도록 그렇게 강제로 조치를 그렇게 굽이굽이마다 이끌어내신다는 것을 우리가 온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데 실수 하세요! 항상 실수해야 됩니다. 그러면 실수를 어떻게 하느냐? 그냥 막 사시면 실수하는 거예요. 이 막 사는 것 때문에 삐진 사람이 아마 수천 명 될 거예요. 제 말을 못 알아듣고, 막 사시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요. 막 사시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자기 의를 못 놓겠다는 표현으로 난 받아들여요. 자기 의를 때려 죽여도 내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과 의는 못 놓겠다. 그래서 막 사세요, 에 대해서 발칵 발작합니다. 내가 성령 받아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 됐는데 ‘막 사세요.’ 하면 어떡하라고. 성경 보세요. 사도바울이 막 살라고 했습니까? 안 했잖아. 그런데 이 근호 당신은 막 살라 하느냐? 성경대로 해야지. 그러면 내가 이야기하죠. 성경대로 하는 게 막 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게 수요설교 한 내용인데요, 성경대로 지켰다고 해버리면 분명히 주님 보시기에 막 살아놓고 자기는 ‘성경대로 지켰습니다.’라고 우기는 바가 되는데 그 우기는 심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일말의 자기 의를 이렇게 불꽃을 피우듯이 키우고 싶은 본성대로 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내 이 행동은 주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 의와 만족이 될 경우뿐입니다. 하고 사진 찍을 때 그럴 때 ‘맞아. 내가 요 말씀대로 지켰으니까 나는 신도 맞아.’ 하고 스스로 자기 행위를 통해서 확인받고 싶을 때 이런 말(막 살라)에 대해서 아주 반발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신자라고요?’ 귀신이나 나라도 알겠다. 신자 아닌지.

 

왜 저는 ‘그냥 막 사세요.’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실수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실수하거든요. 매일같이 실수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분노하거든요. 우리는 하루도 분노 안 하는 날이 없어요. 아까 김 중우 집사님이 쉬는 시간이 이야기했는데 ‘내가 투표한 사람 다 떨어졌다.’는 거예요. 교육감도 떨어지고 시장도 떨어지고 다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 말을 한 내용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화난다. 그런 뜻 이예요.

 

매일같이 분노하는 이유가 왜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뭐든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은 아이큐가 낮은 바보가 아닌 이상은 힘들면 복수가 나오게 돼 있어요. 반드시 반발이 나오게 돼 있고 이건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우리가 천사도 아니고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잖아요. 그러면 이 말이 맞다면 결국 우리는 매일 실수 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실수를 줄이겠다는 거예요. 줄이겠다는 그 의도가 뭐냐, 줄어든다. 줄어든다. 줄이면 그 줄인 폭만큼 뭐가 남겠어요? 뭐가 생산되겠습니까? 자기 의가 생산될 게 아닙니까? 결국은 자기 의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눈 돌렸어요. 십자가에서 눈 돌리니까 타인이 보이고 네가 잘했나, 내가 잘했나, 결국 타인과의 경쟁의식, 비교의식, 그 이외는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바라보게 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예수니라.’ 사도바울이 봤던 그 음성이 들려올 경우에는 뭐가 됩니까? 실수해도 구원받으니 나오는 건 뭐밖에 없어요? Thank You! 감사밖에 안 나오죠. 모든 게 범사에 감사만 나오는 거예요. 실수하시고 감사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제 말을 오해해서 내 완벽한 그것으로 감사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잘남으로 감사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내가 그러죠. 그건 타고난 본성은 이해하겠는데 그건 주의 뜻이 아닌 겁니다. 그건 믿음의 태도가 아닌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표적과 기적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나 유대인들은 기적, 표적을 원한다. 그 기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디서 발견되느냐 하는 겁니다. 유대인은 망했잖아요. 망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운 우리나라, 요새 말로 우리교회, 내 교회 잘 되게 해주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미쳤어요. 그러다 그 교회서 미움 받아 쫓겨나 보세요. 대번 그 교회 복수하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교회 복주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럼 그 교회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안에 누가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들어있는 거예요. 결국은 신은 누굴 위해 존재한다? 달랑 나만, 달랑 나만 위해 존재하니까 그래야 나는 하나님 믿는 보람과 희망을 갖겠다는 거예요.

 

이 구약 성경을 보면 그게 바로 우상이거든요. 자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위하여, 문제는 내 이름이라. 항상 내 이름으로 구원 못 받는데 자꾸 우리는 내 이름을 포기를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대책 없네요. 이럴 때 표적이 주어져요. 대책이 없는데 표적이 주어지는데 그 표적은 우리가 그렇게 까불고 나밖에 모르는 그 인간, 그걸 표적의 재료로 집어넣어주는 고마움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잘나서 주의 일에 참여되는 게 아니고 못나도 너~무 못났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이 못난이, 나는 못난이~♬ 항상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못난이를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돋보이는데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거는 참 큰 축복을 받은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주여, 제 기적 듣지 마시고 꺾어주시고(우리는 계속 기적을 원하니까) 주의 표적에 소속되게 하옵소서. 벌써 기적과 표적을 나누는 사람 맞죠. 기적은 그 내용물이 나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고, 표적은 내가 알 수 없는 주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룬 그쪽에서, 미래에서 현재로 미리 덮쳐진 것이고 그게 표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표적을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백날 언급해봐야 사람들은 그걸 뭐로 이해합니까? 기적으로 이해하죠. 환장할 일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병이어를 분명히 주님은 표적인데 그들은 기적으로 이해해서 결국 주님을 따라가니까 한편이라고 따라가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왜 따라왔느냐?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예, 예, 맞네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늘나라 관계없는 사람이야. 진짜 하나님의 일은 내 말을 들으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다 가버렸어요.

 

서울시민이 표 찍어서 박 원순 시장이 재선 됐잖아요. 그래서 시민 대표가 와서 ‘아이구, 시장님 축하합니다.’ 하면 박 원순 시장이 ‘왜 저를 축하하죠? 뭐 때문에 축하하죠? 아파트 값 오를까 봐요? 뭐 때문에 축하하죠? 내 살과 내 피를 뜯어먹으세요. 그래야 잘 삽니다.’ 이러면 ‘아이쿠, 우리가 사람 잘못 골랐구나.’ 하잖아요. ‘우리한테 무용지물인 사람을 우리가 뽑았구나.’ 하고 하나, 둘 다 가버리죠. 다 가고 난 뒤에 박 원순 시장께서 자기 수행원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도 가지, 왜 끝났는데 가지?’ 하면 그중에 하나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어디로 가오리까. 저 잘했죠? 잘했죠?’ 하는 식으로. 그러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문제는 박 원순 아버지가 중요한 분이예요.

 

예수님은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예수님의 모든 일은 아버지와 둘만의 창세전에 하신 프로젝트를 그냥 실천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말이 24절부터 말이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그 다음에 보세요.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게 상당히 난해한 말 이예요.

 

이 말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집어넣었어요? 차라리 이 말, 2절 말이 없었으면 ‘예수님 우리 협상합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타협합시다.’ 분명히 이렇게 나올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이죠. ‘주께서 하늘나라 확장하려고 오셨죠? 제가 보탬 되겠습니다. 제가 하청업자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 취지와 동일하니까 주님께서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 도와주시면 제가 하는 일도 좋고 주님도 잘 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괜찮죠?‘ 이렇게 될 터인데 25절은 그걸 거부해요. 뭡니까? ’내가 너희들이 눈치 채는 그런 증거는 나한테 해당되지 않는다고 알아라.’ 그 말 이예요.

 

더 쉽게 말해서 너희 능력으로 나를 믿을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럼 열 두 제자는 믿었잖아? 열 두 제자 믿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주님이 사랑해서 그렇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배신하고 모른다고 부정하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더 돋보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게 되면 실수하세요. 매일같이 실수하세요. 어떤 실수 말입니까? 주님이든 하나님이든 날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 생각하는 그 실수, ‘내가 이렇게 힘든데 주님이 안 도와줄 거예요?‘라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실수. ’내가 저렇게 싫어하는 인간이 잘 되고 나는 못 되는데 주님 저 인간 당장 죽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짜증내는 그 실수를 하란 말이죠. 내가 표 찍었는데 왜 엉뚱한 사람이 당선될 때 한 사흘 동안 하다 엎어져라.‘ 이렇게 약간의 복수심이 발동하게 되는 그 실수.

 

그럼 이 실수는 우리가 교정이 가능합니까? 불가합니까? 우리가 교정 불가한, 우리가 다스릴 수 없는 실수. 인간이기에 육신을 가졌기에 계속 폭발하는 실수,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가 꼭 죄져야 상한 심령이 아니고 매일같이 돌이켜 보면 우리가 참 썩어빠진, 상한 심령이라는 게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음식 오래된 것을 말하죠. 음식이 시어버린. 바로 내가 시어버린, 정말 내가 봐도 가치 없는 존재가 난데, 그런 인간을 주님이 주님 자체를 증거 하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이 사실을 내가 이 정도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자체가 이미 거기에 합류된 겁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어떤 증거도 받지 않습니다.

 

제가 아까 유튜브 강의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난해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는 믿음을 발생시키는데 우리는 내가 믿는 자 되기를 원해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 자 되려면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되겠죠? 그럼 이 믿음은 뭐가 돼요? 행함이 되는 거예요. 사람은 이걸 자꾸 믿음이라 하는데 성경에 보면 믿음에서 믿음이 나오지, 내가 여기에 들어가지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의의 출발점은 내 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시작되고 예수님 쪽에서 회수해 나가거든요. 우리는 그냥 경유 당하는 거예요. 주님의 의가 왔을 때 우리는 거기에 믿음이 발생되고 그 믿음이 발생된 결과물이 믿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라 하면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예수를 새롭게 믿으려 하니까 그 믿음은 예수 믿는다는 그 자체가 예수 믿는 행함이 돼 버려요. 행함이 되니까 치매 걸리면 조져놔 버리는 거예요. 치매 걸리니까 ‘예수가 누구지?’ 이러면 이건 큰일 날 문제라 말이죠. 오후 2시에 믿었는데 오후 4시에 삐져서 안 믿게 되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 거예요. 운전 잘하다가 졸음운전 2초 만에 사람이 죽을 수가 있는데 믿는 운전자가 졸음 운전해서 그 순간 주님 재림하면 어떻게 해요? 보통 문제가 아니죠.

사람들이 결국은 자기가 성경을 참고로 해서 조작해서 만들어 낸 그걸 가지고 자기가 주물럭거리는 거예요. 자기가 자아도취에 빠지는 거예요. 그건 믿음도 아닙니다. 정말 믿음 같으면 자기 존재를 부인할 수 있어야 돼요. “자기를 부인하고“ 하는 것처럼. 그 자기 부인은 성령이 와야 가능하지, 성령 오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 나오죠. 바리새인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성령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것도 참 의미 있어요. 우리가 보통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계시고 그 다음에 내가 있잖아요. 그러면 신에게 잘 보이면 죽고 난 뒤에 신이 계신 곳에 합류가 돼요. 그것을 구원, 또는 천국 가기, 영생,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어떻든 합류되는 거니까 내가 지금 신에게 얼마나 잘해주느냐에 따라서 예쁨 받으면 구원받고 내가 주님에 대해서 아주 딱딱하게 나오고 사납게 나오면 밉상 받아서 지옥 간다. 이게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늘 그 본성을 유지하면서 교회 출석을 해요. 오늘도 왔죠? 이쁘죠? 이쁘죠? 예쁜이, 1+1= 귀요미, 이건 완전히 교회 와서 재롱을 부리고 있다 말이죠. 애교를 부리고 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제 3자를 투입해요. 왜 투입이 됩니까? 하나님 존재하고 내 존재하고 둘이 구원의 문제를 알아서 할 문제지, 왜 3자가 중간에 개입합니까? 개입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개입했잖아요. 예수님 돌아가실 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환영받고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십자가에 밉상 받아 돌아가셨다고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사람들에게는 예수는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쫓아낼 존재에요.

부자 청년이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이 있잖아요. 영생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잖아요. 왔는데 예수님께서 “착하게 사세요.” 이러면 될 문제를 예수님께서 뭐라고 시비를 거느냐 하면 “모든 걸 팔고 나를 따르라.” 하니까 갑자기 부자 청년이 근심하다가 결국은 뒤로 돌아갔죠. 예수님께서 그냥 “착하구나.“ 하면 될 문제를 왜 그런 말 하셨을까요? 지금 주자 청년이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 영역 속에 누가 있습니까? 자기가 있던 겁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어려운 말이지만 사람의 존재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소유를 말하거든요. 사람이 소유가 있는 그것을 되새겨서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 이정도 있어.’ 이러거든요. 소유가 없으면 ‘차라리 죽어버려.‘ 이러잖아요. 남편 떠나고 자식 떠나면 ’에이, 사니 뭐해, 죽는다.‘ 그러면 그 전에는 뭔 뜻입니까? 난 남편 소유하고 자식 소유, 그 소유한 자로서의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존재란 자체는 껍데기에 불과해요. 이름에 불과하고 눈깔사탕의 포장지에 불과하고, 진짜 안쪽에는 눈깔사탕이 들어있어야 되지, 껍데기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껍데기 까고 눈깔 집어넣고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니 정작 나라는 것은 나는 껍데기에 부합될 정도로 뭐가 있어야 돼요? 나라면 이정도 받쳐 줘야, 이정도 수입이 돼야, 이정도 자식이고 가족이고 이정도로 내 소유가 돼야 이래야 소유를 포장하는 그 포장지가 나라는 이름의 나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큰 교회 가고 싶은 거예요. 왜, 큰 교회는 등록만 해도 그 수천 교회가 다 누구 것이다? 내 소유가 되는 겁니다. 한 서른 명 모이면 ‘에이구’ 서른 명 돼 봐야 소유가 너무 적어요. 큰 교회 가면 파이프 오르간까지 모든 성가대까지 등록한 순간 다 내 것이 되니까. 거기서 잘 보여서 장로까지 되면 큰 교회 장로 되면 은행 신용도가 달라지는데. 특히 결혼 안 한 총각 처녀들은 그만큼 만날 확률이 높아져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만날 교인들끼리 맘에 드는 사람 없다 해요. 보니까 맘에 드는 사람들 저희끼리 다 빠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뿐이라고. 아무리 큰 교회 가도.

이런 소유, 이런 존재에 대해서 나 같은 존재가 결국 이 땅에서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남아있는 희망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란 그 엄청난 하늘나라를 전부 다 누구 소유로? 내 소유로 만드는, 등기 이전하는 이것만이 신앙으로 삼고 교회 다니러 오는 겁니다. 천국이 내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 세상에서는 버림 받았지만 천국은 내 것이다.’ 라는 희망을 걸고 살겠다는 겁니다. 주님이 어디 바보입니까? 이런 인간 넣어주게?

제 3자를 집어넣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왜 찾아왔겠습니까? 니고데모든 누구든 간에 어떤 기적을 이야기하게 되면 유대인은 하나님을 어디서 발견합니까? 기적을 통해서 발견해요. 엘리야의 불이 내리는 제단, 모세가 홍해, 요단강, 유대인들은 기적을 가지고 후손들에게 계속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우리 민족은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기적을 주고 독대했다. 율법이 있다. 앞으로 이 율법대로 올 것이라고 늘 이야기 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 기적을 중심으로 절기를 즐기고 그 절기 동안에는 다른 민족이 없는 특별함을 자손들에게 교육을 그렇게 시킨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 있던 니고데모란 사람이 왜 왔는지 몰랐는데 성경에 보니까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 그 뒤에 힌트로 나와 있어요. 예수님 입에서 발설됐으니까. 네가 찾아온 이유는 나하고 좋은 관계 유지해서 어디 가겠다? 하나님 나라 가겠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저분이 메시아 일수도 있다.’라는 거거든요.

그러면 니고데모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니고데모 입장의 생각이 오늘날 많은 대학교 강사들이나 젊은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이나 교인들을 생각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이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시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온다고 이미 아모스, 학개, 스가랴, 이런 예언 가운데 나와 있거든요. 감람산에 오게 돼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전에도 메시아란 인간이 많았는데 다 부도수표 났고,  이분이 혹시나 메시아가 아닐까? 왜냐,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걷고 기적을 행하니까. 어디서? 갈릴리에서. 지금 이 이야기는 갈릴리 이전이거든요. 갈릴리에서 이미 한바탕 소문내고 들어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메시아 일수도 있다 말이죠.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제는 중보자로서 메시아를 보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누구만 상대하면 돼요? 예수님만 상대해서 좋은 관계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오늘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와 유사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다 제 3자를 보낸다는 거죠. 제 3자가 누굽니까? 성령을 언급해버려요. 성령을 언급했다는 말은 결국은 니고데모와 사적인 관계는 이어진다? 안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아요. 심지어 이거는 니고데모만 이렇게 편파적으로 한 게 아니고 12제자 모두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은 전부에 대해서.

베드로가 주님 따라서 어디에 가려했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하면서 ‘주님이 죽는 자리가 천국이라면 저도 같이 따라 죽겠습니다.’ 야! 장렬하잖아요. 진짜 한 의리 하죠. 그런데 주님 하시는 말씀은 뭡니까? “와도 네 자리 없다. 네 처소 없다.” 아니 진작 이야기하지, 결국은 자리가 없다는 말은 뭔 뜻이겠어요? 너희들은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오는지 모르지만 이미 주님은 뭘 알았습니까? 너희들 자리는 지금 없는 거예요. 천국에 갈 제자들 자리가 없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 관리할 입장이 못 돼요.

주님이 오신 목적은 아버지 뜻을 따라서 어떻게 하면 십자가에서 아버지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모든 율법을 이루고 죽는 자기 일이 지금 급선무에요. 자기가 제대로 말씀대로 죽어야 비로소 뭐가 발생됩니까? 하늘나라에 처소가! 베드로를 위한 처소, 요한을 위한 처소가 마련됩니다. 물론 개인처소가 아니고 집단처소지만, 그 처소가 마련돼요. 이 사실을 제자들이나 어떤 누구도, 니고데모 이 사람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죠.

그럼 여기서 물어봅시다. 성령이 오신다고 하지 마시고 성령이 와야 된다고 하지 마시고 그 이야기하기 전에 미리 성령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애한테 ‘엄마 어디 가는데?’ ‘엄마 영화관에 간다.’ ‘나도 같이 가.’ ‘머리 안 감았으니까 영화관에 못 데리고 가.’ 그러면 애가 하는 말이 ‘그럼 진작 이야기하지.’ 결국은 머리 안 감아서 영화관에 안 데려간다는 말은 엄마가 진짜 혼자 가고 싶어서 핑계를 댄 거예요. ‘쟤가 지금 뭘 안 하고 있는가? 머리를 안 감았구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결국은 성령이 오고 예수님 십자가 지고 하는 이 모든 문제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과 협의할 사항이냐, 아니냐를 묻는 겁니다. 협의할 사항입니까? 아닙니까? 협의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다리라는 겁니다. 내가 올 테니까. 보혜사 보낼 테니까. 그러나 협의할 사항은 아니에요. 협의할 사항은 아니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고 싶습니다.’ 한다고 해서 구원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구원은 누구한테 주어지는가?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와요. 그거는 아버지와 아들이 택한 자에게만, 원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하는 이 모든 기도는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남겨준 원한 자를 위함입니다.” 거기서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 했잖아요. 그렇죠?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사? “세상을 사랑하사” 그 세상이 그 세상 아니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세상은 마치 우리 보기에는 세상 전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그게 구체화 된 것은 요한복음 17장 9절 기도에서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중에 아버지가 원하는 자가 따로 있던 거예요. 진작 하지, 진작. 그걸 꼭 요한복음 17장에서 한다고요. 요한복음 3장에서는 사람 기분 업 되게 만들어놓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진짜 대중 사람도 전체 다 구원되는 줄, 세상을 사랑한다 하면서. 절에 가도 사랑하고 유 병언도 사랑하고 구원파도 사랑하고 이단이고 삼단이고 다 사랑하는 줄 알았죠.

조금씩 어프로치 하면서 조금 더 실체에 가까이 가면서 세상이 사람들이 오해하는 그 세상, 그 세상이 아닌 겁니다. 이걸 시간만 있으면 내가 집합론으로 이야기하겠는데 그건 수학의 골치 아픈 이야기고, 하여튼 전체 집합이 아니고 일부, 부분집합, 따로 세운 겁니다.

그러면 물어봅니다. 따로 세운 그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우리가 곡해하게 되고 오해한 우리를 주님이 알아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뭐가 떨어져나가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내가 잘나서 내 행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것이 같이 떨어져 나가죠.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물으면 ‘주님이 시작한 일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 이예요. 자기 면류관도 반납하고 버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진작 그런 이야기하지, 왜 요한복음 3장 이야기하는가? 하나하나 주님께서 이 세상의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있으면 그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가 어떤 게 있습니까? 심지어 그들이 요구하는 중에서
제자들도 어떤 식으로 나에 대해서 곡해했는지를 하나하나 다 보여줘서 이 땅에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복음서란 이름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그런 관점에서 적어놓은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자, 그럼 3장을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여기 3장 2절에 보면 니고데모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니고데모가 ‘메시아가 당신입니다.’ 고 인정했죠. 우리 같으면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좋게 보시지 않고 제 3자를 개입시키는데 제 3자가 누굽니까? 성령을 집어넣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한다. 요거 설명하고 첫째 시간 쉬겠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장소를 의미하거든요. 같은 장소에서 백날 거듭나봐야 소용없는 거예요. 장소가 다른 장소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어떻게 이야기했습니까? 다른 장소가 아니고 같은 장소에서 또 태어나야 한다고 이렇게 한 거예요. 니고데모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니고데모에 있어서 태어남이라 하는 것은 현재 태어나 있는 자기의 육신을 도로 원상태로 쑤셔 넣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이것은 내가 말은 어렵게 했지만 이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태어날까요? 말까요?’ 지금 이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이미 태어난 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태어난 나보고 어떤 아저씨가 뭐라 했습니까? 아저씨가 와서 ‘다시 태어나야겠네요.’ 이미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태어나려면 우리보고 결국 그 말은 뭐냐,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다시 원상태로 갔다가 twice, 두 번 다시 태어나란 그 말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거든요. 그걸 그대로 니고데모가 이야기한 거예요. 왜냐 니고데모가 무식해서가 아니라 이건 니고데모가 들었던 그대로 한 거예요. 아주 순결하고 순진하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이야기한 이게 아니라면 나는 어떡하라고? 아는 게 이거밖에 없는데. 결국은 성령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결국 네가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성령으로 태어나란 말은 네가 죽었다 깨나도 네가 모르는데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아휴, 그럼 성령으로 태어나지.’ 네가 성령에 대해서 알아? ‘몰라’ 모르면서 왜 자꾸 들은 풍월로 내가 쓴 용어를 네가 쓰느냐 말이죠. 주님이 쓰시는 용어하고 우리가 쓰는 용어와 달라요. 우리는 무식해서 제 맘대로 갖다 붙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 된다 하니까 유대인들이 자기의 문신 새기듯이 할례를 행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부터 나온 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육신에는 할례를 행했지만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그 이야기가 창세기 17장에는 그 이야기 없어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네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고 누구든지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거룩한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돼 있잖아요.

누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했어요. 이야기해놓고 왜 이제 와서 딴 소리합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마음의 할례를 어떻게 해요? 무슨 수로 마음을?? 끄집어내시고 당황하지 말고 마음을 끄집어내서 마음을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보다가 탁 끝, 이게 돼요? 마음이 어떻게 라면 끓일 때 수증기에요? 뭐에요? 기체입니까? 고체입니까? 액체에요?

마음을 끄집어내면 그러면 지금 텅 빈 마음인데 텅 빈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바라봐요? 어떻게 수정체 바라보듯이 바라볼 수 있는 주체가 없는데. 마음 안에 봄이 있는데. 자기는 눈이 달렸지만. 마음은 여기 끄집어내져 있는데.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마음의 할례를 행한다? 마음의 할례를 어디 정지 칼로 할까요? 부엌칼로 할까요? 식칼로 할까요? 어떻게 할례를 해요? 어떻게? 말 되는 이야기를...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거니까 이웃을 사랑하라. 그거만 사랑하지 실제 중요한 것은 다 빼놓고 그냥 ‘지켰습니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참 이 성령이 무슨 뜻인지 10분 쉬고 해봅시다.

 

가락-요한복음 2장23(바람)140605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첫 번째 시간에서 같은 장소에서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같은 장소 외 다른 장소는 다른 생각을 못한다. 왜 그러느냐, 이미 인간은 그 장소에서 못 벗어나는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할 때 ‘내가’ 하는 나는 이미 이 장소가 만들어 낸 결과물로의 ‘나’기 때문에 이 장소에서 익히고 배운 총집합체가 나에요. 과거에 누적된 지식이 현재의 나의 주체를 만들기 때문에 니고데모로서는 당연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잘못된 말이 왜 기록됐는가? 바로 오늘날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가 니고데모하고 똑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늘나라에 갑니까?’ 관심사가.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는 말은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면 이해가 되는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라 할 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어떤 늬앙스를 줬느냐 하면 세례요한 아시잖아요? 왜냐,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 나와 있으니까 1장부터 세례요한이 같이 등장하는데 세례요한은 어떤 의미로 등장하느냐 하면 율법의 최종 대변자로 등장합니다.

율법은 어디까지다? 세례요한까지. 그럼 율법이 세례요한까지란 말은 구약의 모든 흐름은 구약을 대표하는 사람은 누구다? 세례요한이다. 그럼 구약을 대표하는 것이 율법이고 그 율법에 의해서 구약의 마지막 막장으로 등장하는 것이 세례요한이라면 그 세례요한이 한 일이 있죠? 뭘 했습니까? 물! 그러면 구약 전체가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물이라는 모형을 통해서 보여주는 절차가 구약이었다는 논조에 도달되는 겁니다.

구약 전체가 요구하는 게 뭐냐, 물에 빠져죽어라. 그 다음에 누굴 건지고 안 건지고는 빠져죽는 사람의 노림수는 못 된다. 빠져죽어라. 빠져죽고 그 다음에 건지고 안 건지고는 빠져죽은 사람이 손들고 ‘저 건져 달라.’ 하는 것은 덜 빠져죽은 거예요. 그건 아주 책략을 쓰는 거고 그건 누구 속이는 짓밖에 안 되는 거거든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물에 빠져죽는데 그냥 빠져죽으면 안 되고 율법에 의해서 율법에 합당하지 못한 자는 결국은 물에 빠져죽어야 되겠죠. 물에 빠진다는 이 말은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왔다. 받아들이자.’가 아니라 성령 오는 순간 우리는 죽은 존재라는 것을 보다 더 깊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자,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죽음은 1. 숨 끊어지는 것. 2. 영원한 저주. 어느 게 최종적 죽음입니까? 숨 끊어지는 게 최종적 죽음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저주가 죽음의 마지막 최종 의미에요? 영원한 저주죠. 구약은 여기(1번)까지만 해주는 거예요. 멸망, 그래서 구약의 말씀의 배경이 뭐냐 하면 지리적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이죠. 지리적으로 가나안 땅이라는 몇 킬로미터, 현재 이스라엘, 그리고 시리아 밑까지, 그냥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합쳐서 그 지리적으로 국한돼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대’라 할 수 있습니다. 무대! 말씀이 실현되는 무대로 마련한 곳이 필리핀이 아니고 알래스카도 아니고 가나안 땅이라는 특정 지역에다 한 거예요. 그래서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보세요. 항상 일어나는 일의 예언의 내용이 뭡니까? 요 가나안 땅 중심으로 일어나죠. 지금은 비록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들어도 그때 메시아가 오는 날에는 이 땅에 뭐가 온다? 촉촉하게 비가 와서 너희들의 농사가 잘될 것이다. 그걸 문자적으로 봐버리면 오늘날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그 감람산에 실제로 메시아의 두발이 선다고 하는 그런 교파가 미국이나 한국에 굉장히 많이 있어요. 특히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이스라엘하고 이라크가 한바탕 붙는 그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면 핵폭탄이 일어나는데 그러면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 그 대배 책은 뭡니까? 건빵, 그리고 생수, 비상식량, 그리고 벙커, 벙커에 기관단총도 필요해요. 왜냐 벙커 해놓고 나중에 핵폭탄 터지고 난 뒤에 자기들한테 비상식량 떨어지면 훔치러 온 사람들 철조망해서 총 쏴야 되니까 총도 필요해요. 그 교파가 안 상홍 교파입니다. 아, 이건 영적도 필요 없어요. 문자대로 요한계시록 믿으면 되는 거예요. 실제적으로 뭐만 준비하면 됩니까? 그저 남편 재산 다 끌어 모으고 집안 거 다 끌어 모아서 지하 벙커 만들고 비상식량 만들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안 되면 망명가면 되고, 프랑스 대사한테 말해서 망명가면 되고.

사람들이 요한계시록 가지고 그렇게 풀어서 곧이듣는 것이 여러분 참 이상하게 느껴지십니까? 아니에요. 모든 출발점이 내 몸 동아리 하나 어떻게 편하게 살까, 그것도 이 땅에서 고생 덜하고. 벌써 출발이 마귀 적이라. 출발이 마귀 적이니까 마귀가 마중을 나오는 겁니다. welcome 환영!, 해서 이거는 걸려든 거예요. 보이스 피싱에 걸려든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그런 건 들리지도 않아요. 요렇게 하시면 마지막 핵폭탄 일어나도 살아남습니다. 아마겟돈 전쟁 이후에 핵폭탄 일어나도 당신만 살아남습니다. 그때 주께서 휴거오실 겁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준비해서 하얀 한복까지 준비하고.

아! 참 워낙 아마츄어니까. 성경을 통째로 관통하는 걸 모르니까. 이미 구약부터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리스도가 구약부터 일했다는 사실을 성경에 나오는 대로 그걸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으니까. 세상 교회는 뭘 해도 교회 돈 내라. 교회 건물, 교회 중심. 교회 없이는 구원 없다. 성만찬 없으면 지옥 간다. 세례 안 받으면 지옥 간다. 성만찬 행하시는 것은 목사만 행하고, 목사 말 안 들으면 저주 받는다. 꼭 항상 교회 개혁중심. 하나님은 무질서한 분이 아니고 질서 있는 분이다. 그러니까 교회 질서는 맞다. 항상 이런 멘트를 날리고. 돈은 왜 내느냐? 하늘나라 확장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니까 하늘나라 돈 안 내는 사람은 마귀에 속해서 하늘나라 확장을 훼방하는 쪽이니까, 돈 내면 확장되고 돈 안 내면 마귀 자식 되니까 돈 다 내죠.

그럼 교육관은 왜 짓는가? 교육관 짓는 것은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여서 교회 … 말고 교회 바쳐서 자식들로 하여금 신앙생활 잘하도록 교회 돈 냄으로써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모범을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을 위한다 하면 엎어져서 다 돈 내고 말은 안 하지만 다 그렇게 하죠. 다 눈에 보이는 거예요. 다 육신적이고. 니고데모도 그런 식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합니다. 물세례의 의미를 아느냐? 세례요한이 구약인데 구약 전체가 와락! 달려들어서 인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회개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말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 아! 이건 유대인에겐 충격적입니다. 왜냐 하면 유대인에겐 하늘나라가 구원의 나라 이예요. 심판은 누구한테 행한다? 절대로 이스라엘은 오지 않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택한 백성이고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절대로 오지 않고 심판이 온다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그리고 이방나라 심판하는 그 논리 외에는 구약에서 다른 논리가 나올 수 없다고 이거는 이구동성으로 다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들 유대인이 바보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사두개인들이 글자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구약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워놓고 교육받았어요. 시편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유치원 애들 노래 가르치듯이 전부 다 가르쳐줘요. 시편을 노래로 만들어서 전부 다 달달 외웁니다. 백날 외우면 뭐합니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말씀이 주어진 것은 우리는 처음부터 율법으로 의롭다 할 의인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잖아요. 율법으로 의라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는 지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십자가 졌다는 말은 율법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율법 지킨다는 말을 하려면 예수 십자가를 모독하던지, 진짜 이 십자가를 믿으면 ‘여기서 얻을 수 없는 의가 여기서는 나오는구나.‘ 율법 외의 다른 의, 그 의가 바로 우리로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예요.

참 사도바울도 진짜 사람이 바뀌어도 완전히 그렇게 바뀝니까?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그렇게 자랑했는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그런데 그것을 세상에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그걸 버렸으니까 내가 유대인이라도 때려죽여버리겠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사도바울이 자기를 미워하는 자의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한다는 거예요. 왜, 자기가 그전에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저 인간 죽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의 확신은 믿을 게 못 돼요. 어느 순간치고 확신이 아닌 순간이 어디 있습니까? 매일, 매일이 확신인데. 그러면 확신을 확신합니까?

나이 60 넘은 사람들 자기가 아직도 30대라고 마음속으로 늘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사진만 찍어버리면 그 사진에 있는 자기를 부정해요. 내가 이렇게 노인네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거울 보니까 생생한데 사진 찍어 놓으니까 사진은 카메라가 문제라 사진이 문제라는 겁니다.

성서가 아니고 성경이라고 성경을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성서는 그냥 글자잖아요. 성경은 거울 경(鏡)자거든요. 거울입니다. 한번 봐라 말이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봐야 됩니다. 모든 성경은 다 나에 대해서 증거 한 것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처럼 그걸 제자들도 알아낼 수 없었어요. 성령이 와서 주님의 안목으로 볼 때 비로소 성경 전체가 창세기부터 전부가 예수님 이야기라는 사실을 그제서 알게 된 겁니다.

어쨌든 니고데모의 물과 성령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보시면 돼요. 쉽게 말씀드리면 세례요한과 그 다음에 성령은 니고데모 네 노선이 아니고 예수님 자기 노선이라는 겁니다. 철로가 니고데모를 거치지 않고 철로가 니고데모를 비껴가서 따로 철로가 놓인 거예요. 니고데모가 비껴가는 게 아니고 사실 12제자 다 비껴갔고 모든 사람도 비껴갔고 세례요한에서 바로 예수님과 연결시켰죠.

요한일서 한번 찾아봅시다. 요한일서는 참 어려워요. 여기 요한일서 5장 6절에 보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래서 사람 전도하겠어요? 사도요한이 왜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합니까? 사도는 다인가? 왜 이렇게 어렵게 해서 전도를 하겠어요? 이 그대로 읽어보세요. 길 가는 사람보고 그대로 읽어보세요. 참 말 하나, 하나, 어느 대목 하나, 하나 쉬운 대목이 하나도 없어요. “물과 피와 성령” 이 모든 것은 이 대목은 이런 뜻입니다. 육체가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사항이 물과 피와 성령 이예요. 따라서 요한일서는 뭐냐 하면 메시아는 실제로 육체로 오셨다는 거예요. 육체로 오신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건 적그리스도가 돼요.

최종적으로 마귀가 장난질하다가, 장난질하다가  마지막 최종적으로 마귀가 내민 장난이 뭐냐 하면 ‘그래, 예수가 메시아다. 하지만 육체는 오시지 않았어.’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왜, 요 이야기가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주장을 미리 이야기 담았습니다. 육체로 온 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는 성령 받은 사람이다.

그럼 육체로 온 것을 시인하면 될 게 아니냐? 그 뜻이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 육체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느냐를 알라는 겁니다. 그 육체 가지고 뭘 했습니까? 세례 받았죠. 물이잖아요. 그 다음에 십자가에서 피 흘렸잖아요. 성령 보내주셨잖아요. 육체로 하셨다는 말이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유일하게 홀로 다 이뤄냈다. 그 분입니다. 누구는 아니다? 우리는 아니다.

내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분이 그냥 귀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뭔가 하셨다는 거예요. 피를 흘렸다는 거예요.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 받는 것은 죄인에 합류하는 것이고, 죄도 없으신 분이 물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이 말렸잖아요. “주님은 이럴 필요 없습니다.“ “아니야, 네가 나에게 세례 줘. 그래야 우리의 의가 이뤄지는 거야.“ 합류하시고 죄 속에서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 취급받아서 아버지한테 저주 받지 않습니까? 이 말은 사실 누가 저주받는다? 우리의 신체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십자가로 보여줬고 그것으로 인하여 ”다 이루었다.”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율법 안에 뭐가 있습니까? “네 형제를 사랑하라” 이뤘잖아요. 사랑이 나오잖아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잖아요. 사랑을 몸으로 다 보여줬잖아요. 이 말은 결국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말입니까? 안 했다는 말입니까? 우리 쪽에서 할 수 없어요. 왜, 우리 육체는 죄 안에 갇혀 있는 육체기 때문에 물과 피, 이 노선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그냥 마귀한테 육신에 갇혀 있는 육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해봐야 그거 사랑 아닙니다. 주님이 하셨던 모든 우리의 죄를 다 까발리시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어떤 것을 행해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완전히 노출시키시면서 사랑을 베풀어주신 그분만이 우리의 구세주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결국 병행해서 뭐를 증거 한다? 우리에게는 결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거나 따라잡을 수 없음을 우리가 자인하고 자백해야 돼요. 그럼 주님 말씀대로 못한다는 말은 결국 뭡니까? 우리가 사도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란 말입니다. 괴수인데 우리가 왜 천국 가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이예요. 사도바울 하는 말이. 주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더욱 넘친다 했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에 핀란드 바이킹 족한테 맞아죽은 것도 아니고 알라스카 에스키모 족한테 맞아죽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몸이 죽었을 때 죽 둘러싸서 ‘죽어라’ 하고 예수님을 죽이게 한 자들이 누구죠? 유대인이잖아요. 왜 유대인으로 했을까요? 유대인이 뭘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받은 민족이고 율법이 결국 인간에게 유일하게 도달했던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율법과 인간의 만남의 대표자가 누구라고요? 이스라엘이죠. 그 이스라엘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다 이 말이죠.

그러면 만약에 우리에게 율법이 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죽일 거다 이 말이죠. 유대인에게는 율법이지만 이방인한테는 뭐가 율법이다? 양심이 율법으로 한다고 로마서 7장에 나와 있죠. 결국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서는 누구나 다 동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 죽을 그 당시에 없었다고 핑계대지 맙시다. 바라바를 살려줄까, 예수님을 살려줄까, 할 때 사람들은 누굴 원했습니까? 강도 바라바를 원했습니다. 그건 그 점에 있어서 누가 놀랬습니까? 빌라도가 놀랬어요. 빌라도는 자기 마누라가 벌써 ‘당신 주의해라. 손 빼라, 꿈자리 사납다. 꿈에 누가 나타났다. 그분이 나타나서 힘들었다.’라고 이야기가 벌써 있었는데 무서운 게 없는 빌라도 말은 겁나는지 손 씻고 난리 났어요. ‘빠질 수가 없을까?’ 하다가 자기 딴아 아이디어 끄집어낸 것이 명절날 죄수 하나 풀어줄 때 강도한 한 사람과 간음한 여인 하나 붙일 수 있는 문제를 의도적으로 제일 사람 많이 죽인 강도하고 예수님을 붙여준 거예요.

신학자들이 이것도 모르고 그 강도는 강도가 아니고 사실은 애국투사였다. 민족운동 하던 사람이다. 이러는데 그럴 것 같으면 예수님하고 경쟁이 안 되잖아요. 그들 보기에 가장 악하다고 생각했던 강도를 붙인 거예요. 빌라도가 정치적 의도 때문에 이차에 ‘죽이자, 살려주자.’ 그렇게 말하는데, 소위 안다는 인간들이 유식이 무식의 화가 됐어요.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이 말은 네가 따라올 수 없는 노선으로 독자적으로 가도 있다는 뜻입니다. “기다려라. 성령 올 테니까.” 그거는 너희들이 협조한 적도 없어요. 그냥 주님 홀로 설움 받고 미움 받다가 갔는데 그 가는 길이 성령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그 길로 가신 거예요.

그러면 지금 니고데모 붙들고 이런 이야기하는 자체가 니고데모에겐 먹힙니까? 안 먹힙니까? 먹힐 리가 없죠. 왜, 니고데모는 육에서 태어나서 다시 육으로 돌아가는 이런 우리가 아는 평범한 자기 육밖에 모르는, 자기 육이 어떻게 천국 갈까, 그거만 생각하는 그쪽 노선이기 때문에 말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하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왜 이야기하느냐? 그것이 바로 니고데모를 살리는 이유를 안다니까요. 이게 요한복음 2장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46년 동안 지은 성전에 대해서 뭐라 했습니까? “이 성전을 헐라” 했죠. 지난번에 했는데 한 달 지났기 때문에 다시 합니다마는 “이 성전을 헐라”할 때 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제자들은 무슨 뜻이라 했습니까? “이 성전“ 몇 년 동안 지은 성전? “46년 동안 지은 이 성전을 헐라“ 그 다음에 며칠 만에 짓겠다? 사흘 만에 짓겠다. 이거는 누가 들어도 이 성전 헐고 요 성전만큼 사흘 만에 짓겠다. 그런 뜻 이예요. 천사가 144000 와야 되지 싶어요. 일할 천사 노무자들이.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내 몸이 성전이다.” 지금 그런 이야기하신 게 아니라니까요. 제 말 취지를 잘 알아들으셔야 돼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이 성전 말고 눈에 안 보이는 게 있어” 그런 이야기하신 게 아니고, “이 성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하니까 제자들은 당연히 이 성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고 들었죠. 그런데 이 제자들 보세요.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아하, 그 성전 아니고 그 성전이 주님 몸을 두고 이야기했구나.‘라고 그 이야기를 해석한 그 제자들이 이상해. 생각해 보세요. 그 제자들이 이상하다고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특별하죠. 우리가 ‘제자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긴데 왜 엉뚱하게 해석합니까?’ ‘너는 몰라도 돼.’ 이런 뜻이다 말이죠.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 결국 내린 결론은 뭐냐,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의 어떤 모든 말씀도 주님의 자신의 십자가 지신 부활하신 그 육체를 경유해서 세상을 해석한다는 것. 달리 이야기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실은 예수님 십자가 부활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일어나야 될 사건들이었다는 겁니다. 그게 결론 이예요.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럼 여기 바나나가 왜 있느냐? 주님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럼 해석할 때 바나나를 들여다보고 해석하느냐?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제부터 스무 고개 하는 거예요. 바나나 먹고 싶다. 왜 먹고 싶지? 먹어야 배부르지. 먹으면 왜 좋지? 먹으면 오래 사니까. 왜 오래 살고 싶지? 죄인이니까. 그럼 이 죄는 어떻게 구원받지? 십자가로. 십자가가 나오네요.

방금 바나나 이야기했잖아요. 딸이 고 3이다. 고 3되면 수학공부 해야지. 왜 수학공부하지? 좋은 대학 가기 위해서. 왜 좋은 대학 가지? 돈 벌기 위해서. 돈 벌면 왜 좋지? 오래 사니까. 오래 살면 왜 좋지? 이게 죄네. 세상에 실수 안 하고 산다고요? 다 막 살아요. 다 자기 육신에 매여서 살아요.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 붙들고 이야기한 것은 결국은 니고데모가 나중에 돌이켜서 보게 되면 ‘아! 주께서 먼저 나를 아시고 나를 구원하려고 말도 안 되는 나를 붙들고 말 상대를 해주셨구나.’ 그런 사람 또 나와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누가 나옵니까? 여인 하나 나와요. 그 여인이 남자 몇 명 사귀고 몇 명 째 사귀는 겁니까? 5명 사귀고 여섯 번째 남자 사귀고 있고 있죠. 한번 만나고 싶어. 얼마나 미인이었으면. 도대체 어느 성형외과에 가서 어떻게 수술 받았으면 그 미모가 유지가 될까요? 아! 이런 여인, 완전히 이거는 그 당시 엘리자베스테일러입니다. 왜냐, 그분이 일곱 번, 그것도 한참 연하남자하고 사귀고, 일곱 번 결혼하고 일곱 번 이혼했지만.

그래서 그 사마리아 여인의 결론이 뭐였습니까? ‘나 여덟 번 결혼했다.’ 그게 결론이었습니까? 결론이 뭐죠? 나 누구 만났다. 나 메시아 만났다. 그게 결론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괜히 남자 일곱 명 사귑시다. 이러지 마세요. 결론은 뭡니까? 메시아 만나면, 당황하지 말고 여섯 명 사귀지 말고 어떻게든 끝 이예요. 이래 살아서 천국 가나 강도로 살다가 천국 가나 세리나 창기로 살다 가나 결국은 만나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결국 만나게 되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던, 과거에 어떻게 살았던 묻지를 마세요~♬ 그건 서울 탱고고, 묻지를 마세요. 더 이상.

그렇게 살도록 미리 주께서 그길로 이끄신 거예요.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소경이 돼야만 구원받아야 됐고, 이 여인은 남자 여섯 명 사귀어야, 내가 보기는 여섯 명 사귄 게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더 사귀었어. 이런 미모를 가만 둘 리가 없어. 요새 이런 여자를 얼마나 부러워하겠습니까? 남자 여섯 명 사귀고.

니고데모 붙들고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니고데모는 하나의 무대의 조연급으로, 이스라엘의 무대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이것이 역사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이 역사가 묵시가 돼 버리면 모든 문제는 전 세계가 동시무대가 됩니다. 시간의 흐름은 의미 없어요. 주님이 오늘 올지, 내일 올지 도적같이 오기 때문에 의미 없습니다. 날짜 계산 하지 마세요. 오늘 밤에 올 수도 있고 어떻든 간에 언제 오더라도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해요.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어야 되지, 다시 말해서 주 안에 있어야지, 이 땅에 우리 생명은 이미 죽은 자인 것을 생각해야 되거든요. 그거는 성령이 왔을 때 이야기고 지금은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기 때문에 니고데모에게 왜 그렇게 인간의 모든 것은 거부될 수밖에 없고 주님께서 독단적으로 아버지와 의논하는가, 그 이유를 니고데모와 대화하면서 ‘아! 인간은 낄 자리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보면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말이 꼭 자칫 들으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거같이 들리는데 이 말이 맞잖아요. 육이 육이잖아요. 수학의 공식으로 하면 3 =1+2 다, 맞죠?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이건 현대수학에 나오는데 바나나 = 집이다. 이게 성립이 됩니까? 성립이 안 됩니까? 옛날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주인 = 종, 이건 말이 안 돼요. 로마 그리스시대는. 바나나 = 집이 안 되잖아요. 근대 수학에서는 요걸(바나나) 1로 쳐버리면 집도 1로 치면 1 = 1 이 돼버려요. 현재 물리학에서도 이걸 질점이라 해서 어떤 형태든 관계없이 하나의 점으로 같은 물건으로 다루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현대 과학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람이 키가 170이고 이쪽 키는 165다. 이런 건 동일한 게 아니지만 월급이 동일하면 같은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딸이 남자 친구 사귀잖아요. 제일 먼저 묻는 게 뭡니까? 한 달 월급 얼마 받느냐? 모든 것은 월급이 말해주는 거예요. 인물이 딸린다. 월급이 높아지면 보충이 되고, 돈은 없는데 월급은 괜찮다. 그럼 많이 용서가 되고, 이걸 마르크스가 발견한 거예요. 돈으로 모든 게 측정이 되는 시대, 그러니까 이 말은 마르크스는 돈은 돈이다, 그 말처럼 육은 뭡니까? 육이다. 육에서 못 벗어난다. 육에서 나온 것은 절대로 육에서 못 벗어난다. 그런데 니고데모 너만은 내가 거듭난다는 말을 네가 몰랐다. 왜, 백날 육을 가지고 아무리 육을 가지고, 고구마 심어봐야 고구마 나오고, 박 심어봐야 박 나오듯이 육 심어봐야 육만 나오지, 육에서 영이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없다는 말은 결국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본다는 말은 결국 다 합쳐버리면 너는 하늘나라 본다? 못 본다?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걱정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걱정이 늘어졌잖아요. 그러니까  니고데모 하는 말이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죠?”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성령이 확 다가오죠?” 항상 니고데모는 찾아올 때부터 지금 관심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동안은 율법을 지켰는데 율법 지킨 자기 의는 이만큼 쌓여있다 말이죠. 남은 요만큼 쌓여있으니까 나는 더 많이 쌓여있으니까 구원은 기본이고, 상급까지 더 받는다. 상급 론처럼. 구원은 기본이고. 유대인들도 생각했거든요. 유대인들도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큰 상 받는다 했거든요. 유대신학을 알아야 돼요. 그래야 한국교회가 유대 신학, 예수님 십자가 못 박아 죽인 신학하고 똑같다는 것을 그들이 몰라서 그런 거예요. 동일해요. 그냥 구원받으면 교회 헌금 안 하잖아요. 그러니 교회 봉사 헌금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부끄러운 구원 안 받으려면 교회 봉사하세요.’ 이래서 빼낸다니까요. 선교비도 내야 되고.

선교는 주님이 하는데 선교는 다음 주일 날 낮 설교에 할 거예요. 선교는 주님이 하는데 자기가 왜 하는데?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선교에요. 멀리 갈 것도 없어요. 팔레스타인 갈 필요 없어요. 여기 있는 게 선교라니까요. 왜냐 하면 선교는 누가 하느냐, 주님이 하기 때문에 필요해서 선교사를 보내는 거예요. 이 자리에, 선풍기 2대 있는 이 자리에 지금 보낸 거예요. 아니 그렇게 쉬운 걸 말이죠. 괜히 공짜로 해외여행 가고 싶어서, 해외 구경하고 싶으면서 단기 선교 핑계 대지 말고.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그 다음에 나오는 8절 보세요. “어떻게 하면 내가 성령을 받습니까?” 당연한 질문이죠.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주님의 노선은 관심도 없어요. 자기가 사는 게 관심 있어요. 하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바람이 임의로 불매” 참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1974년 노래. 바람이 임의로 부는 거예요. 그러면 바람이 임의로 부니까 그러면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바람 불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안 기다려요? 기다려야 되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 하면 지금 그 바람 같은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잖아요. 바람이 지금 왔잖아요. 지금 주님이 왔잖아요. 자기는 회개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육입니다.’ 이러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저는 육입니다.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이러면 될 문제를 가지고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행할 수 있는 행함이 무엇입니까? 뭘 행하면 되죠? 아직까지 자기 의,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고 여전히 기대를 걸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두 번 태어납니까? 바람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주님께서 참 답답해하시면서 ‘지금 네 눈앞에 누가 보이느냐?’를 갑자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갑자기 성령 이야기하다가 누구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 본인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지금 땅에서 지금 누굴 만나고 있지?” 누구 만나고 있어요? 주님 만나고 있잖아요. 네가 땅에서 지금 만나고 있는 땅의 일도 모르면서 네가 뭐? 나를 제치고 하늘의 일을 생각한다고? 지금 누구 만나고 있는가? 인자, 나 만나고 있지. 봐라, 내가 모세가 놋 뱀 든 것처럼 들릴 것이다. 니고데모는 백날 해봐야 지금 주님이 앞 스케줄 이야기해버리니까 노선도 주님 노선 아니지, 그 지금 일어난 노선도 미리 주님께서 차곡차곡 해야 될 노선을 미리 해버리니까 니고데모는 지금 황당한 거예요. ‘저분이 지금 이상한 소리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철모르는 그 사람 붙들고 주님이 이런 발언을 하신다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 발언대로 지금 착착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알려주는 것이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보고 한심스럽다 이거에요. “내가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뭐요? ‘그건 네가 차차 알게 돼. 뭘 이루었는지 차차 알게 돼. 하지만 이건 알아라.’ 이미 다 이루었다는 사실.

그러면 ‘저 구원 말입니까?’ ‘아니’ ‘뭐 말입니까?’ ‘구원’ 야, 이거 참 어렵네요. 차이가 뭡니까? ‘제 구원 말입니까? 제 구원 완성됐죠?’ ‘아니’ 그냥 구원. 그러면 그냥 구원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예수님 구원에 다른 사람을 참여시켜서 참여시키면 뭐가 떨어져 나오느냐 하면 ‘제 구원’이라는 ‘제’가 떨어져 나가게 돼 있어요.

또 이런 예까지 들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난자가 있는데 정자가 1 억 마리 달려들어서 ..속도로 달려옵니다. 여기까지 도달된 약 200~500마리가 온다는 거예요. 와서 하나만 들어가서 난자와 결합되죠. 들어올 때 뭐가 떨어져 나갑니까? 올챙이 꼬리가 떨어지죠. 이런 예까지 들 필요가 없는데. ‘제 구원’ ‘나’라는 꼬리표가 떨어져서 처음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창세전부터 주께서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소유였습니다.

제가 첫째 강의했죠. 소유가 있는 곳에만 뭐가 있다 했습니까? 존재가 있죠. 그럼 내 존재는 내 존재가 아니고 누구 존재였습니까? 주님의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존재가 없습니다. 없는 존재 신경 써서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받아도 주님이 받지, 내가 왜 받아요? 내 존재도 아닌데.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사나 죽으나, 로마서 14장에 주님의 것인데 왜 내가 걱정합니까? 우리는 분명히 내가 따로 내 영역 챙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무익한 종이니 그냥 할 바를 할 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할 때 예수님께서 개 같은 인간에게는 은혜줄 거 없다. 개 같은 이방인에게는 줄 거 없다 했죠. 그 여자 하는 말이 ‘멍, 멍, 주님의 개잖아요.’ 주님의 개잖아요. 어떤 개? 아들이 본 주인을 부인하면 떡이 개까지 떨어지는 그 떨어지는 그 개, 그 개가 나에요. 이만한 믿음 처음 봤다. 주님의 내 말을 이해하는 이만한 믿음 처음 봤다는 겁니다. 주님 노선 앞에서 우리는 개라고 좋으니까 구원만 받으면 돼요.

이것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와 같은 노선입니다. 정말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가본 척 하듯이 정말 서울 가본 사람은 서울 이야기 제대로 하듯이, 진짜 주님 만난 사람은 헉! 악! 억! 그냥 그 앞에서 내 딸은 어떻게 되고 우리 아들은 장가가야 되고 이 소리 안 나와요. 내 암 병은 어떻게 합니까? 그 소리 안 나와요. 그냥 와! 아! 망하게 되었구나. 또는 사도바울처럼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 누구야?’ ‘너는 몰라도 돼. 천둥 울었어. 너희들한테는 천둥소리지만 나는 주님의 음성이야.’

이걸 보고 어떤 신학자들은 그동안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여서 마음의 양심이 가책을 받아서 갑자기 천둥치는 걸 모르고 놀라서 자기가 죽인 주님이 나타나서 회개했다고 신학자들이 그런 소리를 해요. 그런 사람이 대학교수하고 신학교수하고 있어요. 일반 아마추어들은 상상도 못해요. 신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치는 걸. 그럼 신학교에서 뭘 가르쳐 줍니까? 목회자 너희들 나가서 사람들 뭐 좋아하는 줄 아느냐? 무조건 저한테 관심 주고 사랑받길 원하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고 하면 돈 들어오게 돼 있어. 그거만 이야기해줘요. ‘무조건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 편이십니다. 하면 잘 된다.‘라고 축복해주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받은 축복만큼 대가로 십일조 들어오게 돼 있기 때문에 너는 평생 먹고 산다. 이걸로 가는 거예요. 그냥 가는 거예요. 골치 아픈 성경 왜 보는데? 삼위일체 그런 거 알 필요 없어요. 돈 있는 사람이 중요하지 삼위일체가 왜 중요해요?

성경 자체는 항상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뤄놓고 성령 받아야 될, 구원받아야 될 사람에게만 찾아와서 의미를 줍니다. ‘내가 너에게 이런 성경책을 쓴 의미는 이미 네가 구원된 사람이고 나와 관계가 성사가 됐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게 되고 너는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 성경책 자체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설교할 때 성경에 관심 없으면 신자 아니라는 거예요. 말씀에 관심 없으면. 사람이 말씀에 관심 없으면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 교회 아니면 자기 가정입니다. 가정과 교회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 돈을 투자했다는 사실, 자식을 위해서, 자식 하나에 3억 5천 들잖아요. 자식에게 투자했고 내 교회 잘 되기 위해서 교회 부흥하면 주님이 살아있는 걸 그런 식으로 발견케 했기 때문에 교회 막대한 자금을 대었고 십일조 내었고 그거 복리로 계산해 보세요. 그거 돈이 얼마입니까? 돈 많이 내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발 못 빼게 하기 위한 전략 이예요. 왜 집사에서 장립집사, 장로에게 돈을 내게 하느냐? 돈 내놓으면 그 돈이 아까워서 어지간하면 발 못 빼게 돼 있다니까요.

이 구원파가 왜 자꾸 숨겨주는데요? 이게 종교가 아니고 사업자에요. 전부 다 투자한 거예요. 유 병언이 잘 돼야 저희는 이익금이 나와요. 그래서 10만 성도 다 잡아가라잖아요.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다단계라니까요. 저임금 다단계에요. 이거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다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교회 부탁한 게 제발 목돈내지 말라는 거예요. 제발 교회 돈 봉투 내지 마라. 푼돈은 괜찮은데, 푼돈은 내야 전기도 형광등도 갈고, 목돈 내면 당신 돈 낸 그거 사랑하지 주님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가만히 생각하니 화가 나네요.

지금 예수님 이야기는 딴 게 아니고 예수님 내가 홀로 이뤄가는 것을 무식한 너희는 지키지 마라, 나중에 성령 와서 되돌아보게 되면 ‘아! 모든 시작과 끝을 다 주님 홀로 하셨구나.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그냥 주께로 돌아가셨구나.’ 그걸 고백하는 사람만이 천국 가서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그냥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이 합류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천국 이예요. 나 잘 되는 것이 천국이 아니고 그건 지옥입니다. 자기 잘 되는 것은 지옥이죠. 왜 자기 미운 사람 오게 되면 천국 가서 싸우게 될 테니까. ‘주님이여 섬깁니다.’ 해놓고 ‘너 잠간 보자.’ 해서 패고 할 텐데. 그게 무슨 천국 이예요. 천사가 경찰 동원해서 잡아가면 천국 가서 감옥살이하면 됩니까? 말이 안 되지.

지금 사람들이 천국 가서 살 사람도 아니면서 자꾸 천국을 가려고 하는데 천국 가려면 이 땅에서 천국 가는 삶을 보여줘야 돼요. 그 삶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힘든 것은 마땅한 것이고, 죄 진 인간이 힘들어야죠. 늙어죽는 건 마땅하고 보톡스 맞아봐야 나중에 늙으면 빠지고 내려앉고 그러니 소용없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런 못난 자를 주께서 주님만 증거 하기 위해서 다룬다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렇죠. 세리도 강도도 그렇죠. 내가 훌륭하다는 게 아니고 훌륭하지도 않은데 사랑은 위대하더라 이 말이죠. 훌륭하지도 않은 인간을 사랑하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걸 십자가 공로 위해서 그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게 주의 증인이란 말이죠.

따지고 보면 전혀 어렵지 않은데 나중에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또 이런 말을 해요. 방금 이런 말을 했잖아요. ‘그럼 그걸 아는 나는 구원받은 거 맞죠?’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제 구원’이 아니고 그냥 ‘구원’ 이예요. 나의 이름 끄집어내려고 하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탈바꿈 되어서 가는 겁니다. 우리 이름은 바뀌어져요. 그리스도의 것으로 바꿔지고 내 이름은 다 탈락 이예요. 이름 개명해도 소용없어요. 우리 이름은 없어지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바꿔집니다. 그게 그리스도 인 맞아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날 이야기했잖아요. 주 기철 손 양원 그쪽은 필요치 않다고. 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죄인을 존경해서 되겠어요?

여기 보면 바람 같은 내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네가 자꾸 날 보면서도 지금 무슨 사태인 줄을 모르는 거예요. 나중에 성령 받고 나면 알죠. 그때는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내가 미쳤어, 미쳤어. 눈이 감겼어. 정말, 내가 바보라 몰랐더니만.’

니고데모가 예수님 잡히는데 자기가 나서서 ‘이런 분 아니다.’라고 말렸습니까? 끽 소리 안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어디 경찰이 하는 일을 감히 나섭니까? 아무도, 12제자도 다 도망가 버렸어요. 믿음 좋은 여자들도 나중에 시체나 잘 치우려고 왔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유관순 누나 같은 사람은 없어요. 나타나 봐야 소용없습니다만.

다음에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지금 니고데모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잖아요.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하늘을 보는 건 좋은데 거기서 내려온 자가 나야.” 그럼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하늘이 내려왔다고 보면 돼요. 따로 ‘주님 비키세요.’ 하고 하늘 본다 하지 말고 예수님이 하늘 이예요. 죽죽 엿가락처럼 늘어졌어요. 예수님 뒤로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안에 하늘나라 다 있어요. 그럼 예수님 치워버리면 엉터리 하늘나라가 돼 버려요. 예수님 계신 곳에 아버지 하나님 있지, 예수님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아버지가 하나님 이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했죠. 아무도 없는데 독생자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된 하나님을 최초로 접하게 된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등만 봤고 다른 선지자들도 기적만 봤지, 흙먼지만 봤지, 모세는 불 가운데서 음성은 들었지만 하나님을 본 적은 없잖아요. 뭐 지팡이 들고 선지자로 기적을 베풀었지만 언약궤 봤지만 하나님 이름 본 적은 없잖아요.

그분이 나타났다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신학교 때 주님,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됐다는 소식 듣고 놀래버렸어요. 이야기 끝났어요. 이 세상은! 이건 프로야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월드컵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람 속에 섞여왔다는 거예요. 이제 그분 모르면 끝났어! 판사, 검사, 의사, 소용없어요. 이 땅에 섞인 하나님 모르면 그야말로 저주받아도 그건 할 말 없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임무를 맡았어요. 이거는 중요한 임무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으세요.’ 그런 짓 하지 말고요. 그냥 주께서 붙여준 사람이라도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 아니었다. 죽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그분 안에서 숨진 하나님은 계시다. 그래서 사람이 한평생 어떻게 산다 하는 것은 의미 없고 결국 최종 모든 걸 맡길 사람이 있느냐. 맡길 분이 중요하다. 우리는 주님한테 모든 인생을 맡기셔야 됩니다. 노란 옷 입을까, 파란 옷 입을까, 본인이 걱정하지 마시고 ‘주여 믿습니다.’ 하고 파란 옷 입으면 파란 옷 입게 돼 있고 빨강 옷 입으면 입게 돼 있고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다 주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우리한테, 우리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라 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께서 먼저 그 중심 되는 일이 있는데 인자가 들려야 된다는 것. ‘들려야 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올라갔다 들린다. 그럼 괜히 오셨네. 올라갈 걸 오시기는 왜, 심심해서 그냥 감찰하러 오셨습니까?  감찰부에서 오셨어요?

올라갔다 왜 들려야 하는가? 이 들린다는 말은 그냥 말이 아니고 내려올 때는 혼자 내려왔지만 들릴 때는 자기 사람을 빼내서 올리신다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내가 들릴 때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끌어올린다.” 그러니까 주님이 들린다는 말은 뭐냐, 들리는 그 지점이 죄인이 최종 도달할 그 지점을 의미하는 거죠. 모세가 애굽에 갔잖아요. 갈 때는 혼자 갔지만 나올 때 어떻게 나왔습니까? 데리고 나오죠.

그럼 모세의 놋 뱀이라는 것은 무슨 차원으로 합니까? 제대로 된 사람만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 필수 코스로 놋 뱀이 들려야 되듯이 예수님도 십자가 죽고 들려야 되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가 놋 뱀이고 그리고 십자가만이 자기 백성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최종적인 판정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있는데 그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성령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뿐임을 비로소 고백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니고데모 만남에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내 구원만 고집하다가 결국 엉터리 신앙생활 하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으로 구원에 합류된다는 사실, 주님께 쓰여 진다는 사실, 사명도 아울러 저희들에게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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