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장29(하나님의 계획)140501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장 2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예를 들면 작대기나 볼펜 같으면 인간들이 이렇게 있고 서양의 체스 판 있잖아요. 점잖은 사람들이 체스 판을 크게 해놓고 움직일 때는 작대기 같은 것으로 밀어서 움직이죠. 말을 움직이는 것이 세례요한은 주님이 세례요한을 말판(장기판)에다 움직이고 저쪽에서 누가 다가오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린양을 삼아서 다가왔을 때 모든 놓여 있는 그 위치가 이거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 위치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위치에요? 인간이 마음대로 절제할 수 있는 위치입니까? 안 되죠. 미니까. 큰 장기 판 같은 체스 판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미니까 ‘오, 안 돼.’ 이럴 수 없잖아요. 그냥 위치에 놓여 진 거죠.
그 점을 좀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 관계성이라 하는데, 관계성 할 때 혼자 있으면 아무런 관계성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1) 말고 2.누가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관계성이 성립되죠. 혼자 있을 때는 ‘나는 하나님께 지시받았다.’라고 한다면 ‘그런 소리 나도 하겠다. 이 미친 인간아.’이렇게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봐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나타나셨잖아.’ 이렇게 되면 단순히 관계 하나 추가적으로 +1이 아니라, ‘오, 그래’ 세상 죄를 지고 간다면 둘 만의 관계가 아니고 그러면 당신은 미친 자가 ’당신은 선지자가 아니야.‘라는 이쪽도 어떻게 됩니까? 이쪽도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재평가 돼야 되겠죠. 그리고 그걸 구경하고 있는 이 세상도 오실 분에 의해서 전부 다 재평가 돼야 되겠죠.
그러면 혼자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이 체제 자체가, 이 시스템 자체가 전폭적으로 전부 다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이미 암시가 돼 있고 그걸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진도 팽목 항이란 이름도 처음 알았어요. 진도 팽목 항에 해군 있어서 일하고 있다. 그러면 조용하게 자원봉사해서 일하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떴다. 이러면 새로 정비가 되잖아요. 대통령이 와서 어떤 약속을 할지, 어떻게 대처를 할지 그분의 복안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바짝 어떤 새로운 기대에 잡히겠죠.
바로 세례요한이 ‘나는 선지자다.’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 봐, 내가 말한 오실분이 저기 오잖아.’라고 할 때는 이젠 예수님과 세례요한뿐만 아니고 그동안 여기 있던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부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부 다 재편성이 돼서 분위기가 다 전환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대통령은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 대통령이죠. 조금 전까지 자기 상관한테 명령받는 것을 이제는 누구한테? 대통령한테 명령받아서 지시해야 되는 것처럼, 해군 빼고 해경만 하라든지 이렇게 지시하는 것처럼, 인양하는 것은 그만두고 어떻게 하라 하는 것처럼, ‘예수님, 어린양이 등장하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전부 다 바뀝니다.’라고 요한복음은 택한 자, 오직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전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보시고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믿으세요.’ 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신 책이 아니고 이 요한복음은 성도인 사람 같으면 이 의미를! 어린양 중심으로 세상이 전부 다 재편성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내가 아실 줄 알고 어린양 중심으로 이제부터 내가 쓰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사도요한까지 집어넣어서.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죠.
그렇다면 우리가 요한복음 보는 태도가 뭡니까? 누굴 빼야 돼요? 바로 우리 자신을 빼야 돼요. 어떻게 뺍니까? ‘나 뭐 해야 구원받을까요?’ 그걸 빼야 된다니까요. 이야기가 쉬운 말이지만 상당히 어렵죠. 예수님 중심 같으면 ‘그래, 나 예수님 용서를 인정해.’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그거 인정해서 뭐할 거요? 자기 구원받으려 하잖아요. 그 욕심을 빼란 말이죠. 내가 구원 받으나 안 받으나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린양 중심이지 내 중심, 내 구원중심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요한복음 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보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야, 어린양이 왔대, 세상 죄를 졌대. 어린양 믿으면 구원 받겠다.’ 꼭 자기중심을 턱하니 자리 잡아 놓고 그 다음에 자기가 주인공 된 장기판에다 예수님도 끌어당기고 가만있자 세례요한은 이 위치에 있겠다. 그 다음에 베드로는 여기 있고 자기가 이 말을 조정해요. 자기도 하나의 말로 움직여진다는 걸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을 움직여 버리면 도대체 요한복음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걸 읽고 있는 본인이 ‘난 여전히 주인 됨을 포기 못하겠습니다.’ 라는 고집이 있어요. 그렇게 읽게 되면 요한복음 자체가 해석이 안 됩니다. 해석 될 수가 없어요.
그럼 해석 어떻게 합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장기 판 안에 세례요한 본인도, 모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판을 만드는데 그것이 뭐냐 구원 판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구원 판을 스스로 만드는데 우리는 거기에 그냥 들러리로 본의 아니게 거기에 같이 움직임을 보여준 사람이 된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렇게 되려면 나의 구원은 없애 버리고 이 세상의 구원은 오직 주님의 구원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내 구원은 거기 끼어들지 마세요. 내 구원은 없어요. 처음부터 주님이 구원하는 주님의 구원의 장기판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너도 그만 한판 할래?’ 하고 졸로 우리는 그 구원 판에 참여된 자체 상태를 가지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구원을 소지하는 게 아니고 그건 구원파고, ‘몇 일 날 구원받았어요? 언제 성령 받았어요?’ 그건 구원파고, 구원을 소지하는 것이고, 그건 기존 교회고,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구원의 시스템에 염치없이 그냥 끼어들어서 물 떠주는 것이나 하나 역할을 하나 맡아서 그러면 이미 구원에 끼어든 상태에서 구원받은 게 된다니까요.
구원을 내가 장기판에서 내 것 갖고 오는 게 아니고 내가 거기에 끼어들었죠.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건 뭐냐, 그 관계밖에 없어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저 뭐해야 됩니까?’ 이런 관계밖에 없어요. 저는 주를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됩니까? 그런 관계만 있어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도 기도할 때 그런 기도했는데 성도는 사명감 없는 성도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사명감이 있는데 그 사명감 때문에 성도는 사는 재미를 느낀다 했어요. 내가 뭐할 거냐가 아니라 ‘주님은 이런 일 시켰다.’ 하는 그런 감이 올 때 우리는 그 하는 일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무의미하지가 않죠. ‘아이쿠, 내 주제에 감히 이런 의미 있는 구원의 일에 내가 한 파트를 맡아서 하다니, 아이쿠, 이거 고맙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끈끈한 관계망이죠.
제가 아까 수원강의 하면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아주 투박스럽게 이런 예를 들었어요. 구원이 뭐냐고 내가 설명을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껌을 좋아해서 질겅질겅 껌을 많이 씹는데 한두 개가 아니고 수천 통을 씹는 거예요. 씹어놓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장난 끼가 심해서 어떤 아주머니가 방금 머리 하고 오니까 머리에 껌을 발라 놓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꼬마한테는 엉덩이에 껌 발라놓고 어느 아저씨한테는 어깨에 껌을 발라놓는 거예요. 껌을 발라 놨는데 그 껌이 얼마나 질긴지 끊어지지 않아요. 그 껌을 줄줄 잡아당기면 구원 이예요. 주님이 씹던 껌을, 그러니까 우리가 씹던 껌이 아니고 우리가 말씀을 실천에 옮긴 게 아니고 주님이 실천했던 그 주님의 법이 껌처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달라붙으면 달라붙은 게 떨어지지 않고 이걸 잡아당기면 당겨서 집결한 그곳이 바로 천국 이예요.
주님의 장난치기, 껌 가지고 장난치기, 여자 분들에게 머리에 껌 붙으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니까 따라가서 그렇게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언약 때문에 구원받는데 그 언약은 주님이 질겅질겅 씹던 껌처럼 주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시는 그 껌이 돼요. 내가 껌 떼서 내가 씹는 게 아니고 주님의 씹던 껌이 들어오게 되면 그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제 관계 설명이 됐습니다.
관계 설명 됐으니까 그 다음 어려운 문제로 나갈 수 있겠죠. 자, 관계가 뭐냐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사이의 관계에요. 요게 껌 이예요. 이 껌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요 성부 성자 성령 있던 관계가 그대로 우리의 몸에 입혀지면 우리는 장기판에서 하나의 역할을 받게 되는 겁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셨던 그 관계가 이어져서 그것이 우리도 그 관계에 포함이 되면서 그 관계를 보여주고 증거 하는 그러한 작은 역할들을 맡은 거예요. 어떤 애는 물에 빠져 죽으면서 그 역할을 했을 것이고 물에서 기어 나오면서 그 역할을 했을 거예요. 물에서 나오면서 다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번에 176명 살았습니까? 비율이 3:1 이거든요. ‘살고 보니까 엄마 우리가 일시적으로 살았는데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어. 나는 이번에 살아나오면서 그걸 알았어.’ 그러면 그 학생의 역할은 뭡니까? 물에 빠졌다가 나오는 그런 역할을 한 거예요. 그 역할이 성부로 인하여 성자가 이미 그 역할을 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무슨 역할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를 죽였는데 옆 수풀에 있는 양 때문에 살아났죠. 이거는 장차 오실 분이 죽었다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도로 살아나는 역할을 하나의 장기판의 마나 상처럼 졸처럼, 포처럼 아브라함이 미리 당겨서 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말은 믿음의 조상도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것처럼 그 믿음의 노선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이미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는 관계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관계에 참여하도록 호출당해서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예요.
작년인가 드라마 수상한 가정부라는 일본이 원작인데 여러분 안 보셨죠? 가정부가 굉장히 수상해요. 로보트 같아요. 가정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웃지도 않아요. ‘예, 그대로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가정부가 사근사근하고 정을 주고 이러지 않고 뭔가 한이 맺혔는지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시간이 되면 ‘퇴근시간입니다. 가겠습니다.’ 이래요. 아! 그걸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이 바로 천사가 저렇게 움직인다. 그럼 천사가 저렇게 움직이는데 천사는 누구의 명을 받느냐 하면 성자의 명을 받아요. 그러면 성자의 명을 받는데 천사가 왜 기계처럼 움직이느냐 하면 인간은 천사처럼 일을 못해요. 왜 못하느냐 그놈의 정 때문에 왜 정이 많고 사정이 많고 따지는 것도 많은지. 그런데 천사는 기계 같아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대로 인정사정도 없이 그렇게 해요.
‘문설주에 피가 없으면 너는 다 죽여라.‘ ’예‘ 그냥 인정사정없이 그야말로 애굽의 애들, 애굽의 맏이들을 다 죽인 거예요. 마치 안산의 애들을 다 큰 아들 다 죽인 것처럼, 유월절처럼 아무 감정도 없이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럼 천사는 그냥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이 묵시 때, 마지막 때는 모든 일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천사가 허드렛일을 다 하고 우리는 수고하지도 않는데 참여하는 얻어 챙기고 얻어 주워 먹는 작은 역할을 우리가 맡아서 ‘다 주님의 공로입니다.’ 이거 하라고 성도한테 일을 맡겨줬어요. 여러분들이 성도기 때문에 주워 먹으라는 거예요. ‘그것도 못하냐. 이 바보야.‘ 주워 먹는 것도 못하느냐 말이죠. 감사하면서. 항상 감사함이 나올 때 그게 주의 일이고, 감사함이 안 나오면 안 주워 먹는 거예요. 늘 주워 먹어야 돼요.
남편이 바람이 났다. ‘주여, 남편이 바람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려면 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 난 너하고 안 살래.’라는 것을 주워 먹어야 해요. 왜냐,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보다 더 심한 수모를 당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사이는 하나는 고난 받고 고난주셨거든요. 그 고난주심에 우리가 참여되는데 우리보고 참여하면 구원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참여케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도 다 주워 먹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 다섯 명 사귀다 헤어지고 여섯 명 사귀는 것도 사실은 자기가 해야 될 역할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그 사람은 강도 아니면 구원 못 받을 뻔 했습니다. 강도해야 돼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부도 맞고 말아먹고 강도질 했다. 그게 뒤돌아보면 전부 다 하나의 역할 이예요. 어떤 역할? 이미 구원받은 것을 주워 먹는 역할이다 말이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잖아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였죠? 복음전파가 아니고 빨리 죽여주세요. ‘아직 멀었어, 너는 저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돼.’ 반대가 되었어요. 사도바울은 죽는 게 소원이고 사는 것은 괴롭고. 우리는 반대가 돼서 사는 것은 즐겁고 죽으면 우리는 애통을 하면서 어떻게 조치를 취하라. 횡포를 부리면서 이러고.
사실은 유족들은 나라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자기 애 죽은데 누가 그렇게 신경 써주고 온 나라가 노란리본 달고 신경 써주면 고개를 못 들고 ‘이 부족한 천한 것들을 위해서.’ 이래야 될 텐데 이건 뭐…. 그렇게 나오면 안 돼요. 그걸 보면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긴 들죠. 건드려 보니까 인간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아이쿠, 청와대에서 바쁘신데 여기까지 내려오십니까?’ 이렇게 돼야지, 대통령한테도 달려들려고 하니 눈에 뵈는 게 없어요.
내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사람이 죽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아예 아브라함보고 아버지가 멀쩡한 자기 아들을 칼 들고 죽이라고 시키는 그게 하나님이다 말이죠. ‘내 아들 왜 죽였습니까?’ 따지지 말고 진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데 죽이는 정도가 아니고 ‘네 손으로 네 아들 죽여라.‘고 지시하신 그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 이예요. 그거 순종할 수 있겠어요? 하나 죽여 보렵니까? 여러 명 되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를 어떻게 죽입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요.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킵니까? 네가 뭔데? 사람은 ’주여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말할 자격조차 인간은 없어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인간은 미리 요구할 그러한 잽이 못 된다니까요. 주제 파악이 안 돼요.
인간은 하나의 장기 알에 불과하고 바둑알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어떤 관계?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세상은 재편성 되는데 고맙게도 우리가 그 관계를 보여주는 주워 먹는 식으로 관계를 보여주는 그런 증인 된 것, 이것만 해도 우리는 ‘정말 황공무지로소이다. 전하.‘ 하고 엎드려서 ’감축 드립니다.‘ 이렇게 하면 돼요.
다시 봅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자 보라 했죠? 저쪽에서는 하나님이 장기 알을 어린양을 찾아오고 이쪽에는 하나님이 세례요한 장기 알을 위치에 놓고 그 위치와 어린양의 위치 두 지점이 만납니다. 만나면서 그동안 몰랐던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가 지금 여기 지상에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주어집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저분은 장차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라고 그 뒤에 나오죠.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오니까 도대체 이 세상이 하늘나라 세상인지 지상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누가 주도권을 쥡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 온전히 이 세상을 접수했죠. 이 사실을 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지 성령 받지 아니하면 이 사실을 몰라요. 이 세상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고 중국이 다투고 있으며 북한의 핵문제, 이런 관계가 아니고 이 세상은 성부에 의해서 성자가 오셨고 성령 주셔서 성령세례 받으면 구원받고 나머지는 어두움이라고 저주받게 된다는 그런 현실관을, 현실 정치관을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어느 나라도 선교가 돼요. 나이지리아를 가든지 알래스카를 가든지 그 정신으로 가야 돼요. 알래스카 가면 환영받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속에 있어야 돼요. 있으면 어디 가도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울릉도 가도 살 수 있고 독도 가도 살 수 있고 어디 가도 살 수 있어요. 저보고 세월 호 타라 하면 타고 갈 겁니다.
제 아내가 이런 이야기해요. 버스 탈 때 제일 앞자리에 타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어디서 소리 들었는데 고속도로 달리다가 갑자기 앞의 트럭에서 뭔가 못이 날라 와서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서 사람이 다칠 뻔했다는 거예요. 당신은 반드시 운전석 뒷자리에 앉든지 하라는 거예요. 안 죽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세례요한이고 사도요한이고 성도인 겁니다. 이 판을 내 장기판으로 삼지 마시고 내 바둑판으로 삼지 마시고 우리 식구끼리 유용한 그런 세상으로 전환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벌려 놓은 판입니다. 시장판 이예요. 그걸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은 성령 아니면 우리가 그게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29절에 보면 “보라” 그 다음에 뭐를 지고 갑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죠? 자,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졌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졌으면 그러면 지옥 갈사람 아무도 없겠네요? 답변해 보세요. 세상 죄를 다 졌다면서요? 그러면 지옥 갈사람 없네요. 주님이 몽땅 다 쓰레기처분 했으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면 앞뒤 맞춰보면 세상 죄는 세상의 죄가 아니고 세상 죄에서 있는 자기 택한 백성의 죄를 짊어졌다고 그렇게 설명이 되거든요. 이 설명은 맞기는 맞는데 너무 구원론 적이고 사적 구원론 적인 감이 강해요. 그래서 이것은 다시 설명돼야 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할 때 이렇게 설명하면 쉬워요. 뭐냐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갔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정답입니다. 지금 우리는 틈만 있으면 내 구원 받으려고 시도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잘라버리세요. 내 구원은 성령이 와야 돼요. 아까 강의 다시 할까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에서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세례 줘!’라고 할 경우에만 성령께서 움직이시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예수님과 성령 관계잖아요. 그 관계를 우리가 달라고 요구할 입장이 못 된다니까요. ‘뭐하십니까? 지금 기다리는데 몇 시간째야. 성령 안 오고.’ 이렇게 짜증내고 투정 낼 그런 입장이 못 돼요. 돈 받을 거 있어요? 왜 그렇게 나옵니까?
장기를 못 두시니까 말하기가 뭐한데 장기에서 말을 움직일 때가 있고 상을 움직일 때가 있고 졸을 움직일 때가 있어요. 저쪽에서 공격해오는데 졸 하나 이거 움직이다가는 맥없이 지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 때가 상을 움직일 때인지 안 그러면 천사를 움직일 때인지 이건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결정하고 예수님과 주님 사이에서 결정할 문제거든요. 이 장기판을 자꾸 내 구원되는 중심, 내 중심의 장기판으로 잡아당기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숟가락만 얹을 뿐이고 젓가락만 얹을 뿐이지, 백날 얹어 봐도 숟가락 젓가락 안 되면 기다려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이 우리 구원해주려고 나왔다고 너무 성급하게 마시고 이것이 바로 율법에 부합되는 이야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은 바로 구약에서 모세 율법에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한 어린양의 제사의 희생에 대한 의미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유월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애굽에서 나올 때 죽음의 천사가 오잖아요. 그러면 피를 바르지 말고 양을 한 마리 바깥에 세워놓으면 어떻겠어요? 제 아이디어인데, 물론 도망가면 안 되니까 묶어서 ‘양아 네가 알아서 죽어라.’ 하고 내놓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양은 잡고 그 가정에 있는 맏아들은 살려줄까요? 아니죠. 왜 아니냐 하면 내가 죽이나, 하나님이 죽이나, 양 죽으면 되잖아, 하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어린양만 구원하지, 문 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어린양 때문에 누가 살았습니까? 맏아들 살았죠. 맏아들 살았으면 맏아들이 여전히 그 집안의 아들이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그 맏아들이 유월절 죽음의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그 집의 맏아들 이예요? 아니면 누구의 소유로 등기됩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등기되는 거예요. 잘 기억 나시는가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따지고 보면 참 골치 아픈 이야기가 많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누구 것이다? “내 것이니라” 이게 뭐냐 12장에서 유월절 하고 난 뒤에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아들 귀하지?’ ‘귀합니다.’ ‘살려줄게.’ 이런 차원이 아니고 애굽 사람은 진짜 죽었고 히브리인들도 아들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다만 어디 안에 살아있다? 아들이 그냥 있으면 죽었는데 누구 손에 있기 때문에 살았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살은 거예요. 그러니까 맏이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다른 형제들도 같이 그 온 집안이 주님의 것이 돼 버립니다. 맏아들이니까. 맏아들이란 것은 십일조를 이야기하거든요. 맏물, 처음 것을 가져가게 되면 나머지는 덩달아 오게 돼 있어요. 신약에서 머리싸움이 몸체 싸움이 되거든요. 머리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교회 머리잖아요. 머리싸움이 그 다음에 무슨 싸움? 몸체 싸움이 지체 싸움. 머리가 승리했으면 우리는 저절로 뭐가 돼요? 이미 구원을 받은 게 돼요. 원리가 유월절 원리라니까요.
맏아들이 우리 집에 아들이 있으면 안 돼요. 구원이 안 된다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맏아들을 보내야 돼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너는 떠나거라. 이놈아.‘ 하고 보내야 맏아들이 살면 같이 사는 거예요. 맏아들을 죽여야 돼요. 천사가 죽이기 전에 먼저 그 집안에서 ’나는 이제부터 너는 내 맏아들 아니야. 너는 하나님 꺼야.‘하고 떠나보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집안 식구가 맏아들을 죽여 버려야 돼요. 그 죽이는 대신 누굴 죽인다? 같이 일 년 동안 살았던 어린양을 맏아들로 여기고 대신 죽이고 피를 바르고 ’우리 집은 벌써 맏아들 죽여 놨어요.‘ 하고 피를 바르는 거예요. ’우리 집은 우리 아들 이미 내 손으로 잡아 죽였습니다.‘ 없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할례라는 겁니다. 신약을 통해서 유월절을 우리가 다시 받아야 돼요. 할례라 하는 것은 끊는 거예요. 그리고 그 끊어지고 없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 것으로 채우는 겁니다. 그걸 아까 껌이라 했죠. 껌! 나의 전부를 죽이고 비어있는 그 공백의 자리에 주님의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증거 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날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 주님입니다.’라는 이러한 접합돼 있는 관계, 그 관계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우리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부 다 우상으로 만들어지고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요. 가는 길이 달라요. 대통령 죽이려는 범인들이 ‘대통령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경호원이 엉뚱한 데를 가르쳐주잖아요. 3 days, 그러니까 이게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으려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은 마귀가 기다리는 길이예요. 바리새인 사도개인들이 저희 애비가 마귀잖아요. 그들은 하나님 이용해서 자기구원만 챙기면 끝난다고 생각한 거예요. ‘봐라, 너희는 여호와 없지? 우리는 여호와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은 천국에서 쫓겨나고 백부장이 그 자리를 채우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을 만들되 이스라엘은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물리치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대로 만들어진 사람, 언약대로 어린양 죽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그 어린양이 지금 신약에 나타났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그때 실패한 그 이스라엘 대신 나는 이스라엘 만들고자 왔다 하는 말과 같은 이야기에요.
이걸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이스라엘 자체를 만드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저는 이렇게 합니다. 베니아판, 오랜만에 들어봤죠? 합판 종류인데 질 나쁜 목재 쓰레기로 본드 붙이면 베니아판 되잖아요. 베니아판 대면 옆의 소리 다 들리고, 전혀 방음이 안 되는 베니아판.
이 베니아판이 이렇게 오게 되면 전에 TV 예능에서 쟁반놀이 하는 것 있었죠? 틀리면 위에서 쟁반이 떨어지는 쟁반 놀이방. 이 베니아판이 ‘구원해 주세요. 옆에 얘보다 내가 착하니까 구원받습니다.’ 하다가 베니아판이 뚝 떨어지게 되면 전부 다 얻어터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베니아판에 담겨서 오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겠다고 하는데 주께서 호응하지 않습니다. 너 구원받고자 하는 자체가 죄니까. 그러면서도 주님은 언약대로 계획에 차질 없이 착착 진행돼서 덮쳐버리듯이 성부 성자고 그 뒤에 성부 성자 업적을 우리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 그게 무슨 세례? 성령 세례가 되는 겁니다.
32절에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지금 예수님의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은 뭘 보여준다?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를 보여줘야 구원이라 했죠? 이 베니아판을 보여줘야 성부 성자를 보여줘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한테 먼저 떨어졌잖아요. 성령이 오신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만 오시겠어요? 나중에 구원받을 사람에게 오게 돼 있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에게 오게 돼 있는 겁니다.
자, 여기 중요한 것을 해봅시다. 세례요한이 뭘 주느냐 하면 물세례 준다고 했잖아요. 물세례 줄 때 물세례라는 것은 이게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오고 그리고 이사야에 보면 물로 깨끗하게 씻는다는 대목이 나와요. 그리고 그 물이 성전에서 흘러온 물로 정결하게 하는 거예요. 불로 태운다는 대목도 나오고 물로 씻어준다는 대목도 이사야, 에스겔에도 죽 나오거든요.
그래서 구약 적 입장에서 보면 세례요한의 물은 이건 선지자가 마지막 때 회개하라고 주는 물이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의 물세례는 그게 아니고 성령께서 세례 주는 그것을 폼을 내기 위한 표식으로 앞당겨서 물세례를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메시야가 아니죠.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와야 됐어요. ‘메시야로 보이지?’ ‘아니거든’ 라는 관계에서 ‘~~가 아니요’라고 먼저 깔아놓기 위해서 왔듯이 물세례 주면서 ‘요걸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라고 하면서 물세례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로 세례 주는 것은 진짜를 보여주기 위한 예비동작이 그게 물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애들을 꿀밤 주면서 그냥 때리는 게 아니고 ‘공부하란 말이야’ 하면서 손 제스처로 예비동작으로 겁을 주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때리든지 말든지 하지, 그게 물세례에요. 때리는 게 성령세례고.
성령세례와 물세례 특징이 뭐냐 하면 모두다 그 본인을 없애버린다는 거예요. 자아를 없애버려요. 여기서 자아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아직까지 정신 말짱하니까 어려운 거 해야 돼요. 원래 자아라 하는 것은 없어요. 그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자아에 실체가 없다고 철학에서 이야기하는데 자아는 없어요. 그럼 뭐가 있느냐 하면 몸이 있고 육신이 있는 겁니다. 몸이고 육신이 있는데 사람들은 육신이라 할 때 나는 육신, 몸만 있다. 하지 않고 뭣이 뒤집어 씌워졌느냐 하면 정신이 뒤집어 씌었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 데려갈 때는 정신을 데려가는 게 아니고 발가벗긴 육신만 달랑 손잡고 데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육신은 뭐냐 하면 육신은 인간이 죄지었던 결과물이 육신입니다. 늙죠, 죽죠. 이마에 땀 흘리죠. 여자가 해산한다는 것은 옷을 원피스 입었느냐, 투피스 입었느냐에 관계없이 해산되잖아요. 보세요. 원피스, 투피스는 패션이라는 정신문화에 속한다 말이죠. 하지만 원피스 입었다고 애 잘 낳고 투피스 입었다고 애 못 낳고 그런 건 아니거든요. 이거는 애 낳는 육신, 몸, 육체와 관련돼 있지, 걸치고 있는 옷이라든지 문화라든지 정신과 관계없다 말이죠.
우리는 대통령이 박 근혜 대통령 때문에 애 잘 낳는다. 이런 건 아니다 말이죠. 육신은 본다고요. 몸을 보는데 이 몸이 모든 사람이 동일해요. 신장이고 혈압이고 동일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혈압이 달라도 동일한 건 같은 아담의 몸에서 DNA로 새끼 치듯이 새끼를 깠기 때문에 인간이란 생물체는 고만고만한 전부 다 똑같은 몸 이예요. 그야말로 생물학적으로 수정이 가능한 걸 같은 종, 같은 종류에 속한다. 돼지는 돼지로 인간은 인간으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몸을 어떤 몸으로 보느냐 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의 흔적을 보여주는 몸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내 몸이 왜 죽었어? 살아있지.’ 그런데 물이 덮쳐버리면 물에 빠져서 못 살아나잖아요. 11도에서는 3시간을 못산다 하니까. 물세례가 뭐냐 하면 이 몸을 죽은 몸으로 확정짓는 표식이 물세례입니다. 그런데 아까 물세례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폼 재는 거죠. 그럼 성령세례는 뭡니까? 몸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고 죽음의 개념이 확장돼요. 뭐냐 하면 저주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물세례 같으면 ‘꼬륵, 꼬륵, 숨 못 쉬겠네. 죽자.’ 이러면 죽기는 죽는데 왜 죽어야 될 이유가 밝혀지지 않잖아요?
그런데 성령세례는 죽이기는 죽이되 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그 죽음의 깊이와 그 범위가 확정적으로 완료가 된 상태에서 죽여 버리면 물세례 받으면 구원 받겠어요? 안 받겠습니까? ‘그야 죽으면 죽지.’ 이거는 아직 주제를 파악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로부터 온 성령을 세례 받으면 ‘그래, 맞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아담의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 사람만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사람만 구원받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물세례 받아서는 구원이 안 돼요. 그럼 뭘 받아야 돼요? 성령세례를 받아야 자기 주제 파악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돼요. ‘그래,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구원받아요. 왜 죽어 마땅하느냐 하면 성령세례가 십자가에서 나왔거든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는 것은 사실 예수님이 죽어야 될 자리가 아니고 누가 죽어야 될 자리에요? 우리가 죽어서 우리가 버림받아야 될 자리다 말이죠.
그 우리의 본모습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때 그 모습을 성령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될 때 ‘맞습니다. 버림받아도 내가 버림받아야 될 건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주님께 달려들고 이런 인간이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제 그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 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차질 없는 자기 프로젝트를 우리를 통해서 계속 장기 게임을 밀어붙이고 나가는 거예요. 어렵지 않잖아요. 지금 이것이 하나도 안 어려운 것은 중간에 뭘 뺏기 때문에? 나의 구원을 애초에 잘라버리고 빼니까 성경이 그렇게 쉬운데 언제 어려워지느냐 하면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해요. ‘나는 뭐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이제부터는 일곱 귀신 다 달려들어요. 뭐 구원 파, 온갖 이단들 다 달려들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는다.’ 고 무슨, 인간 구원자체가 없는데 뭘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아요? 인간 구원자체가 없는데. 인간은 아예 구원 안 되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만 구원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만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행했기 때문에. 참 내가 말하면서도 담아있는 말을 하는데, 예수님이 어린양을 졌기 때문에 구원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뜻에 순종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구원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계획했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그 자체가 구원상태에요.
그럼 우리는 아버지 뜻을 모르잖아요. 왜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럼 애초부터 구원대상도 아니고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된다니까요. 우리가 자꾸 구원을 언급하는 것은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살기가 힘들고 늙고 아프고, 죽어서는 호강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죽으면 천국 있겠지. 이거는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준 거예요. 종교란 이름인데. 종교거든요. ‘행복하십니까?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도를 아십니까?’ 이 짓이 무슨 짓인가 하면 아버지 뜻도 모르는 인간이 구원을 왜 언급해요? 진짜 못 쉬어도 좋은데 속 탑니다. 자꾸 생각을 하나님 쪽에서 생각을 해야 돼요. 하나님은 자기 뜻을 온전하게 모르면 구원 안 시킵니다. 괴롭다고 고생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는 아버지 뜻밖에 몰라요. 우리가 힘들든 말든 그건 당연한 것이고.
아버지 뜻을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뜻만 아실뿐 아니라 세상 죄를 지라는 뜻에 순종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구원이 완성이 된 거예요. 그 다음에 구원이 오고하는 것은 그건 성령이 안 오면 안 되는 거죠. 뭐. 그런데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준다면 이건 이미 완성된 구원에 우리를 하나로 참여시켜서 노력하지도 않고 수고하지도 않은 것을 거저 얻어먹는 그 역할을 하라고 우리보고 성령을 준 거예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이제는 공짜로 구원받았구나.’를 자랑하라고 한 거예요. 누구 공로다? ]예수님만이 그렇게 순종했고 우리는 구원이 뭔지도 몰랐는데 주께서는 자기공로를 우리에게 혜택을 입혀줘서 가만히 앉아서 구원받아버렸네.‘ 요거 자랑하라고. 수고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참여되었다고. 주일날 요한복음 4장에.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구원을 넣지만 않으면 굉장히 문제가 쉬운데. 그러면 그거 알면 구원받습니까? 또 이렇게 끼어들면 그 다음부터 복잡해지거든요.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도대체 피조물이! 보세요. 자식이 부모보고 ‘부모님’ ‘왜’ ‘왜 저를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그게 할 소리입니까? 그게 할 소리 아니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식이 부모한테 왜 그렇게 따지느냐 하면 부모 세례에 들어갈 생각 안 하고 자기 세례 따로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부모를 강제로 집어넣으려 하니까 이게 안 되니까 부모가 잘못해서 내 일이 안 된다 이러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뭐냐 하면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나라에요. 따라서 우리나라 따로 만들 필요 없고 만들어진 하늘나라에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먼저고 하나님이 먼저고 우리는 하늘나라 넣어주기만 하면 어떤 자리에서도 강도가 되던, 창녀가 되든 넣어주기만 하면 ‘왜 저를 창녀로 만들었습니까? 강도로 만들었습니까?’라고 할 필요 없이 ‘감사합니다.’ 하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자꾸 자기 세계를 따로 만들려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 애는 죽으면 안 되고 어떻게 공부도 잘해야 되고, 자꾸 자기 세계를 만들어버려요. 만약 만들게 되면 그런 사람 천국 못 갑니다. 왜 천국 가봐야 거기서 자기 부스 만들어서 거기서 부동산 중개할 사람 이예요. 부동산 장사할 사람 이예요.
취업 박람회 보세요. 부스 만들어서 전부다 회사마다 사람들 있죠. 꼭 그 모습 보니까 천국 가도 그럴까 걱정돼요. 천국 가면 전부 다 부스 만들어서 여기는 세미원 가게 있고 전부 다 있어요. 이게 무슨 천국입니까? 자기나라지. 여기는 대성학교 출신 있고 서울대학 출신 있고 이게 무슨 천국 이예요? UFO 믿고 온 사람도 있고, 그래 가지고 무슨 천국 이예요? 싸그리 불도저 가지고 따 싸질러서 내 나라 아예 없는데, 왜냐 하면 내 구원자체가 주님 앞에 결제 받지 못했다. 주님 구원받았는데 덩달아 구원받았지, 내가 내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는데 주께서 과연 내 구원했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내가 장담할게요. 주님의 구원에 콩고물로 묻어 들어가는 것이지, 성령이 온 것은 너 착하니까 구원받아라, 가 아니라 주님 생각해서 너 구원한 게예요. 그래서 구원받았다면 누구만 생각하라? ‘나 구원받았다.’고 잘난 체 하지 말고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수요일 날 경상도 말로 썼죠. 저도 오랜만에 썼어요. 경상도 말 잊어버렸죠? 까부는 걸 경상도 말로 뭐라 합니까? 아찌라. 내 구원을 포기하면 아무 문제없이 주님만 감사할 뿐인데 꼭 자기 구원해서, 마귀가 그런 짓해요.
요한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는 걸 보고 ‘아하, 장기 게임이 벌써 시작됐구나.’ 우리는 몰랐는데 자기는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얼마나 두근두근! 본인은 엄청난 큰 프로젝트가 하늘로서 내려앉는데 이건 꿀밤 먹어도 지금 배부른데 지금 독가스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진도에 배 빠지는 것도 문제 되지도 않아요. 위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게 있는데 진도에 애 죽는 게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니까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 받은 상태가 되면 애가 시험에 떨어져도 전액 장학생 안 되도 아무 관계없어요. 그거 문제 안 됩니다. 강아지가 아파도 큰 문제 안 됩니다. 집 나가도 별 문제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이걸 보고 뭐라 하느냐 하면 ‘나는 쇠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인 카운트’라는 스필버그의 영화에 보면 거대한 UFO가 LA인가 뉴욕 하늘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자기 일상생활을 못했어요. 왜 예상도 못한 충격적인 쇼크를 받은 거예요. 세상에, 진짜 UFO가 있을 줄 몰랐다고. UFO에서 외계인이 왔다 갔다 하면 기절초풍하죠. 드라마 V에 나오는 것처럼. 파충류 외계인이 나타나면 기절초풍하잖아요. 세례요한이 그 기분이라니까요.
역사에서 누가 이기고, 기황후가 왕후 되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기황후고 탈탈이고 대승상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위에서 온다니까요. 회사운영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위에서 UFO 던져보세요. 회사운영 아무것도 아니지, 수리하느라 귀찮긴 귀찮지만. 수리정도가 아니고 이건 마지막 때라니까요. 마지막 때!
사도요한이 바로 밧모 섬에서 요한계시록을 볼 때 그 기분이었어요. 세상 짐승나라 망하도록 해라 해. 끝났도다. 끝났도다. 세 독수리 편대가 가면서 ‘끝났어. 끝났어. 천사가 다 조져버려.’ 그리고 미리 앞당겨서 마지막 심판을 봅니다. 행위 책과 생명책에 이미 다 알아버렸어요. 사도요한은 다 알아버렸어요. 천사가 지배하고 그야말로 UFO가 그냥 공중에 머리 박치기 하듯이 내려오고 있고 자기 일상의 일은 의미 없이 돼 버려요. 일상의 일이 누구 복권 당첨되고 이거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남북통일 되고 아무 의미 없어요. 위가 통일 되는 게 중요하지 지상 통일돼서 뭐합니까?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날 때 마찬가지였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할 때 이건 완전히 외계인 만난 겁니다. ‘주여 살아계실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럼 죽은 줄 알았느냐?“ ‘이렇게 살았으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내 증인 되어라.“ 그래서 자기는 물이든 불이든 막 가려고 하잖아요. 이건 정신없이 가는 거죠. 그게 성령세례 받은 겁니다. 이제 이해되시겠죠? 아주 간단해요.
10분 쉽시다.
가락-요한복음 1장29(하나님의 계획)140501b-이 근호 목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갔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바로 연결될 수가 없다고 했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그 말을 하나님 아버지가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끼어들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관계라, 이렇게 굳혀 버리세요. 굳히고 그 다음에 성령이 와서야 그 혜택을 우리가 혜택을 받는 것이지, ‘나는 주님이 어린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거야.’ 이렇게 되면 뭐가 빠지냐 하면 성령을 보내줄 이유가 없다니까요.
오늘날 신학이 그렇잖아요.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아는데 성령 왜 받아야 됩니까? 그러니까 이 문제가 지금 제가 전체적으로 다 안 따져서 그렇지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오셨다. 만나봤다. 믿습니다. 구원받았잖아요? 오순절 성령 왜 와야 되는데?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 아는데 왜 와야 돼요? 이게 자기 구원에 너무 성급해서 그래요. ‘나 뭘 믿으면 되지? 누구? 부처? 아니야, 누구? 예수님, 믿습니다.’ 이러면 다 되는 줄 알아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영생 준다 하니까 영생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옵션 챙기는 것처럼 독생자 믿어주는 거예요. 진짜 노리는 것은 자기 영생 얻으려는 거예요. 이러한 인간의 본성 이것 자체는 오늘 이 시간에 완전히 이거는 잘못됐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합시다.
성령이 와야 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십자가 지든 어린양을 하던 아버지와 아들 문제지, ‘야, 저분이 십자가 져야 돼. 나 기다렸어.’ 자기가 기다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너는 기다릴 필요도 없어. 집에 가서 가만히 드러누워 있어. 너하고 구원은 관계없어.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 문제고 그것을 성령이 와서 확대시켜 주게 되면 우리는 주님이 벌려준 장기판에서 하나의 쫄다구로서 활동을 개시하게 되고 주님만 증거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왜 뽑았느냐? 제자 뽑지 말고 성령이 와서 일괄적으로 뽑지, 제자를 미리 뽑았느냐? 그 질문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령이 와야 구원받는다면, 제자들 뽑을 필요 없어요. 가만있다가 성령이 오시고 난 뒤에 ‘베드로 너 나와. 요한 너 구원받아.’ 이러면 될 텐데 제자들을 왜 뽑아요?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니 이 열두 제자는 결국 멸망해버린 이스라엘이 어떤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따라다니게 하는 겁니다. 그들이 따라 붙인 게 아니고 주께서 일부러 뽑아 세운 거죠.
거기서 우리 한번 요점을 따져보겠습니다. 뭘 따지느냐 하면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선 주님이 선택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모른다는 사실 이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제자들은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어떤 게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데, 자유의지가 어려우니까 의지라 하겠습니다. 판단과 결정을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보는 거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선택했을 때 내가 됐다고 생각 안 하고 예수님이 선택한 것을 내가 그 선택을 곱게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선택이 내가 예수를 모른다고 배반한 것까지 선택했다는 생각을 인간은 못해요.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 줬건만 내가 못돼서 내가 참 성질이 더러워서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후회합니다.‘라는 것까지 하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한 것을 후회하면 그걸로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제가 후회한다고 구원받는다면 누구도 구원받습니까? 가룟유다도 구원받아요. 가룟유다는 예수님 제자 아니었던가요? 제자였죠. 결국 이 제자들이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 미치는가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 붙였는데 받치는 게 뭐냐 하면 이 선택이 예수님의 선택은 집단 선택이거든요. 그런데 개인은 무슨 소리냐 하면 나만 선택하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 그런 거거든요. 남자는 여러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요. 그런데 여자는 나만 사랑해야 돼요. only you~♬ 나만 사랑해야 돼. 독점해야 돼요. 만약에 나만 사랑 안 하면 빨래고 밥이고 아무것도 안 해 줄 거예요. 해서 남 좋아하고 해서 자기 피아노 …하고 놀아나고 이러면 할 마음 없어요. 나만 사랑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에서 우리가 정말 놓치고 모르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집단선택이지, 개인선택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시험 쳐라. 실력 있는 대로 할게.’가 아니라 선택하신 분의 그 배려하심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나도 누락이 되지 않고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다 살아있도록 그 인간을 개조해가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참 요런 말이 어려운데 뭐냐 하면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고 사람마다 다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보여주는 그 결과물은 마지막 도착점은 동일해요.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착하게 교사하다가 점잖게 죽을 때는 고난 받으면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요란스럽게 강도짓하다 이렇게 오는 사람이 있는데 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되는가 하면 따지고 보면 교사하다 점잖게 살아도 그걸 통해서 자기 자랑하지 않았고 오직 주님의 공로라고 했을 것이고, 강도도 강도질하면서 ‘세상 더럽다.’ 하고 이렇게 분노하지 않아도 마지막에는 주님 공로라고 하지만 그 방법은 그때그때 달라요. 사람마다 다른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개인구원은 없었다는 거예요. 뭘 예쁘다고 우리를 구원합니까? 집단선택인데 집단선택에서 꼭 기억할 것은 바로 이스라엘 이름으로, 베니아판으로 나가요. 제가 베니아판이라 한 이유가 있어요. 베니아판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평평하잖아요. 쟁반처럼 쟁반 노래방에서 만든 똑같은 높이로 만든 것처럼, 물론 키 큰 사람은 더 맞고 작은 사람은 덜 맞겠지만 어쨌든 내리 찍는 이 베니아판은 동일한 베니아판 이예요. 동일한 예수님 이예요. 동일한 예수님이라는 말은 우리끼리는 서로 잘났다 하지 말자. 그 이야기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집사님은 노란 옷 입고 나는 빨간 옷 입었으니까 내가 착하다. 이런 거 없기. 다양성과 개성을 살려줌으로써 이런 차이는 의미 없음을 오히려 첨가하게 만드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 없어요. DNA 조합을 하면 2²⁰⁰(2의 200승) 이예요. 이게 엄청난 가지 수거든요. 인간이 갖는 게놈에 있는 그 DNA를 하나하나 조합해서 경유해서 다 하게 되면 10의 동그라미가 100개가 넘어요. 그 정도로 있어요. 많은 다양성이 있다고요. 하지만 그런 모든 다양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런 다양성은 우리가 구원받는 거하고 아무 상관없음을 다양성이 있음으로써 도리어 증거케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덧니 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덧니 안 난 사람이 있는데 그거하고 관계없다. 어떤 사람은 물에 빠져죽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거하고 구원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그걸 통해서 증거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의 선택이란 것은 베니아판은 평평해서 누구하고 봐주고 덜 봐주고 없이 동일하게 떨어지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베드로는 착하고 가룟유다는 나쁘다가 아니라 베드로가 어디 속하냐 하면 12제자, 그러니까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것 때문에 구원받아요. 사도요한이 구원받는 것도 이스라엘에 속했기 때문에 구원받고, 집단 베니아판에 찍혔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야, 그때 베니아판 나 있는 쪽으로 오면’ 이런 소리 하면 안 돼요. 베니아판은 내 쪽으로 오는 게 아니고 아예 나를 묵살하는 쪽으로 온다고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집단구원이거든요.
제가 아무리 언급해도 돌아서면 ‘나만 구원해줘’ 하는데 나만 구원하는 게 아니고 집단을 보고 집단을 겨냥해서 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 소유로 구원을 내 소유로 하지 말고 그 구원에 참여돼야지, 그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오시기 때문에 네 성령은 따끈따끈하더라, 내 성령은 차갑더라, 하는 건 없고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만이 구원받을 분이고, 우리는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지,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 없다. 라는 식으로 증거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이 판은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판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 것으로 동원시키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좀 미흡하지만 그냥 넘어가도록 합시다. 35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뽑습니다. 그래서 뽑는데 누구 쪽에서 왔죠? 예수님 쪽에서 왔죠. UFO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서 어떤 사람 저쪽 사람을 뽑아서 12제자로 삼아서 그 UFO에 집어넣으면 그 UFO 안에서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거기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겠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아미 이거는 일생일대 제일 두렵고 영광스럽고 무시무시하고 그리고 감격스러운 순간이 바로 예수님 만난 순간입니다.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앞섰다.‘라는 이런 이야기가 어디 함부로 나옵니까? 도사 만나서 나온 게 아니거든요. 진짜 창조주를 만났을 때만 나올 이야깁니다. 세례요한 목 달아나도 좋겠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했으니까 주께서 아마 우리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주실 겁니다.
그런데 41절에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우리가 뭘 만났다? “메시야를 만났다.” 이거 설명해야 돼요. 왜냐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메시아는 무슨 의미냐 하면 이스라엘을 회복하려고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방인 아니에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이방인도 이스라엘에 참여한다는 말이 분명히 있거든요. 하박국에도 있고 아모스에도 있고 그런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뭘 포기 안했어요? 원래 있는 이스라엘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은 포기한 게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의 무너진 천막을 회복한다. 그 천막이 이스라엘제 거든요. 이스라엘을 계속 지탱해줘야 이게 언약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잖아요. 원래 언약이 이스라엘이 공동체니까 그게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야곱에게 준 언약이 나라가 되면 뭐가 된다?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 자체의 그 완성은 절대로 중간에 포기되거나 멈추거나 취소되지 없습니다.
메시아가 바로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아까 말씀한 것처럼 메시아가 오게 되면 원수를 격파하고 메시아로 인하여 구원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원수가 격파된다 하는데 그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그 원수를 어떻게 발견하죠? 이스라엘 있는 곳에 이스라엘에게 달려들고 공격하는 게 원수에요. 구약 때. 이스라엘 나라 주변에 있던 게 있잖아요. 이스라엘에게 달려들면 전부 다 원수가 되는 이유가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왕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 이스라엘을 공격한다고 했는데 사실 이스라엘을 공격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계시는 여호와 이름에 대한, 여호와 업적에 대한 공격으로 그 적들이 결국 쳐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는 계속 지켜줘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 시점에서는 오히려 부추기죠. ‘앗수르야, 바벨론아, 내 나라인데 너희가 알아서 쳐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은 불타버리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 동안에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느냐 하면 이미 메시아가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오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순서를 바꾸려고 해요. 메시아가 이스라엘보다 먼저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때가 드디어 도달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메시아가 오는 방법도 있고 아예 이스라엘이 없는데 메시아가 먼저 와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방식도 있거든요.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그 방식이 실패로 끝나줘야 그래서 ‘아, 이 방법이 안 되는구나.’ 라고 끝나줘야 그 다음에 메시아가 먼저 있어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되는 겁니다.
말하는 것보다도 성경을 봅시다. 에스겔 37장 봅시다. 지금 여러분들이 피곤해 하니까 어렵게 하지 않겠습니다. 에스겔 37장 11절 12절에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라고 돼 있죠.
지금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이게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이미 뼈다귀가 됐잖아요. 이스라엘이 없죠. 이스라엘이 없을 때 메시아의, 메시아의 그 재주는 그때 극대화가 되는 겁니다. ‘거봐 너희들 죽었잖아.’ 너희들은 바짝 마른 뼈다귀가 돼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모든 역량이 다 날라 가 버린 거예요. 뭐 지킬 게 있어야 지키죠. 다 날라 가고 흩어져 버렸는데. 흩어 놓고 모으겠다는 겁니다. 그 실력 이예요.
그러면 여기 뼈다귀들이 자기 공로 자랑하겠습니까? ‘역시 우리가 도와줘서 됐어.’ 그 소리 안 하겠죠. 자기는 바짝 마른 뼈다귀란 말이죠. 그래서 “내 백성아” 너희는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죠. 그러면 이 백성들 어디 가 있어야 돼요? 무덤에 가 있어야 되죠.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야 사흘 만에 부활되잖아요. 이건 이스라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생 가운데 뭐가 복제돼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 회복이 전부 다 복제돼 있는 거예요. 이게 다니엘에서 1이레에요. 70이레 모두가 1이레에 다 포함이 돼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공생애 속에서 인류역사가 다 들어있어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들어있어요. 우리는 그 코스 따라서 구원받을 거예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받았고 같은 성령이 우리한테 왔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인생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복사를 해버려요. 우리는 복사기처럼 누워있으면 돼요. 누워있으면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지~ 훑고, 지~ 훑고 지나가는 거예요. 매일같이 죽~ 지나가면 얼굴에는 주님의 형상이 입혀지고, 또 입혀지고 또 입혀지는 거예요. 복사기에 복사하는 겁니다. 이걸 말씀의 진동이라 했어요. 말씀이 날마다 반복해서 우리를 가지고 말씀이 안에서 작렬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봅시다. 무덤을 열고 나오죠. 자, 그러면 제가 물어볼게요. 그러면 무덤을 열고 나왔으면 이미 구원이 됐으니까 볼일 다 끝났네요. 구원받았으면 됐지. 자, 성경을 볼 때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아, 이렇게 구원받는구나. 아, 구원받으면 끝났지.’ 이게 바로 개인구원의 특징 이예요. 집단 구원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 있는 게 아니고 왕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22절에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임금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임금이 좋아요? 내가 좋아요? 당연히 내가 좋지.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박 근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내가 좋지, 박 근혜가 뭐가 좋다고. 우리는 대통령을 이용할 뿐이지, 누구를 나보다 더 좋은 사람 없어요. 물론 연애할 때는 미쳐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조건부, ‘내가 사랑하는 내 사랑을 간직할 조건하에 계속 사랑하지, 내 사랑을 가지고 다른데 눈 돌려버리면 난 끝나. 이렇게 되거든요. 조건부에요.
남자들이 결혼하면 여자에 치이는 경우가 거기 있어요. 완전히 찐드기도 그런 찐드기가 없어요. 남자들이 어릴 때는 엄마한테 잔소리 듣다가 결혼하면 마누라한테 잔소리 들어요. 엄마는 낳았으니까 잔소리 할 만한데 아내는 무슨 자격으로 하느냐 말이죠. 내가 보기는 빨래하고 밥해준다고, 내가 너를 안 버리고 사랑해주잖아. 그것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사랑을 해내라는 거예요. 아휴, 이 집착, 올가미.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노골적으로 세상에 남자가 한 여자에 만족한다는 게 이게 어떻게 지옥이지 세상사는 거냐? 내가 그랬어요. 바로 그게 세상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세상은 지옥 이예요. 그 사람이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어요. 그래, 그래서 세상은 지옥 이예요. 세상은 천국 아닙니다. 고생만 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한 세상 이예요. 고생만 하라고. 강아지 키워도 소용없어요. 고생만 하지.
사람이 자전거 있다는 자체가 그게 나한테 짐이 돼요. 뭐든지 붙어있으면. 제일 좋은 것은 옷도 안 입고 혼자 사는 게 제일 좋은데 그러면 심심해서 못 살아요. 이래도 안 돼.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왕 때문에 존재하는 백성이지, 백성을 위한 왕은 없어요. 이 세상에 그런 하늘나라 없습니다. ‘왕 때문에 있었습니다.‘ 고 너 말고 너 말고 우리 왕, 이거 하라고 나라 만들었어요. 그래서 먼저 메시아가 등장해서 그들을 무덤에서 끄집어내고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도망치는 애를 다 불러서 ’이제부터는 나만 섬기라‘고 한 거예요.
이 에스겔의 요 이야기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거 여러분이 아시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한번 읽어볼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그 다음에 뭡니까?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부정적 용어가 들어가죠. ~ 하지 않고, ~하지 않고, 부정적이죠. 성경은 항상 복음을 이야기할 때 부정적이 들어가요. ~하지 않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 다시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함이라“ 이걸 안산의 유족들이 들어야 돼요. 그리고 이런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너 해봐라, 안 되지.’ 지금 말씀 앞에서 너 하나, 안 되나, 둘 다 안 하면 말씀이 무효입니까? 너도 안 되고 나도 안 되는데 말씀은 말씀 이예요. 성령께서 이미 기준을 정했습니다. ‘안 되는 건 되게 하라’가 아니라 안 되는 건 되게 만듭니다.
무덤에서 끄집어내고 그 다음에 왕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도망가지 못하고 왕만 쳐다보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 회복제입니다. 그 작업이 예수님 공생애에서 카피가 됩니다. 그 카피에 지금 우리는 초반부, 시작부분에 와 있는 겁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12지파 뽑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왜 망했느냐를 알려주시고 이스라엘 망해도 언약은 망하지 않았고 지속된다는 거예요. 누굴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드디어 마지막에 마무리 단계,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지금 롯데 빌딩 보니까 많이 올라갔어요. 내가 보기는 80층 이상 올라간 것 같은데 점점 올라가서 100층 이상 올라가면 마무리단계에 들어가죠. 그 마무리 단계에 누가 오셨느냐, 예수님이 오셔서 그전부터도 일했지만 신약에는 구체적으로 자기의 신상을 나타내면서, 몸을 다 나타내면서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12제자가 숫자가 얼마입니까? 열둘이죠. 예수님은 누굽니까? 예수님은 한 분이죠. 숫자로 얼마입니까? 1이죠. 합치면 그러면 13이 되느냐? 안 되느냐? 13이 안 됩니다. 12는 1에서 파생됐기 때문에 12가 아니고 1,1,1,1,…, 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을 셈하듯이 주님을 셈할 순 없어요. 내가 내 자신을 셈해버리면 거기서 주체가 등장하는데 그 주체는 인정받지 못한 주체에요. 이미 주체는 확정됐어요. 예수님이 한분이고 우리는 한분에게 소속된 하나면 되지, 예수님 한분, 나 있고 둘, 너 있으니까 셋, 이런 거 없어요. 천국은 왕이 하나면 백성들도 전부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 이예요. 머리되신 분이 아들 같으면 나머지는 전부 다 아들 되는 거예요.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죠.
아간이 따로 딴 살림 차리면 다른 사람들이 고생해요. 아간을 돌로 쳐 죽일 때 다시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어서 아이 성을 정복하고 여리고성을 정복하게 돼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그전에 정복했지만. 이거 특수한 거예요. 정말.
지금까지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이야기한 게 결국 뭡니까? 자꾸 뭐를 빼야 된다는 거예요? 나 하나 여기 있고, 출발점을 나 여기 있고 신은 나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걸 확! 빼야 됩니다. 나부터 누가 먼저 있고? 나 있기 전에, 나 무덤에 들어가 있고 누가 이기고? 메시아 나타나셔서 성령 주셔서 잠자는 나를 깨워서 누가 깨웠나? ‘내가’ ‘어유, 왕이시군요.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하게 하는 그런 식의 진짜 이스라엘! 그것이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사나 죽으나 내 것이라는 것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산 자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서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 식으로 이미 성령께서는 모든 게 확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까 제자들은 자기 나라 이스라엘 구원하는 줄 알았어요. 그 이스라엘은 역사를 가진 인간들 끼리 뭉친 이스라엘이거든요. 좋다 했죠. 그런데 그 뒤에 나다나엘 나타나서 졸지에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하고는 예수님은 다른 이스라엘을 생각했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여기 47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한번 물어봅시다. 나다나엘이 예수님 제자입니까? 제자 아닙니까? 12제자는 아니죠. 보세요. 왜 나다나엘이 이렇게 쓸만한 사람인데 12제자로 왜 뽑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사람을 모집하는데 ‘아후, 이렇게 훌륭한 사람 처음 봤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회사를 사랑하고 이렇게 충성하고 이렇게 젊은 사람 처음 봤습니다. 불합격입니다.’ 이게 무슨 말 이예요?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그게 불합격 될 이유에요.
제자 안 될 이유는 뭐다? 이미 그 사람은 뭐다? 이스라엘 사람이 됐기 때문에 더 이상 제자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니까요. 제자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어중이떠중이들, 너희들이 한 말을 자기가 알지 못할 사람들. 귀가 있어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 우리 가운데 누가 높겠느냐, 그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들. 어린애보다 못한 사람들. 못났기 때문에 제자다운 거예요. 자꾸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예수님을 배반하기 때문에 제자다운 거예요.
나다나엘은 이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한테 간사한 것이 없다.” 이것은 나다나엘이 간사한 게 없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보는 주님의 자기 평가를 주님이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아이고, 이렇게 이쁠 수가 있나.’ 이거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남편 자기 견해지, 그 말을 곧이듣고 진짜 자기가 이쁜 줄 알고 시장 통에 가서 ‘내가 제일 이쁘대.’라고 돌아다니면 그건 미친 사람이죠. 머리에 꽃 꽂은 미친 여자. ‘네 남편이나 그런 소리 하지.’ 남편한테 돈 좀 벌어주나‘ 남편은 여자가 돈 벌어주면 최고 좋아합니다. 아프던 말든 돈만 벌어주면 제일 좋아. 네 덕분에 내가 살자.
아브라함이 얼마나 치사한 인간인지 세상에 아내를 성상납해서 자기가 먹고 살려고 한 그게 이스라엘 이예요. 그 사람들이 거룩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자기가 잉태한 어떤 후손에 의해서 구원 받는 그걸 믿죠. 못난 자에게 세상에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못난 자를 구원하는 메시아 같은 존재가 태어날 줄이야. 메시아 태어난 그 현장이 그런 현장 이예요. 저주받고 죄 많고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한 그 현장을 주님은 자신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삼은 겁니다. 그게 주님이 통용하는 장기판 이예요. 장기 알의 원칙입니다. 세리고 창기고. 그러기에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잘 나고 똑똑하고 지혜롭고 어른인체 하는 건 다 보내고 어리석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나심을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그 사이의 관계는 우리 인간들이 상상을 못합니다. 어느 정도로 반대가 되는지를. 그야말로 반대로 그런 반대가 없어요. 완전히 반대에요. 예수님이 인물 잘났으면 인물을 보고 찾아왔을 거예요. 인물 내가 보기는 잘나지도 못한 것 같아요. 흠모할 게 없으니까. 뭘 보고 메시아냐?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일방적으로 선택한 거예요.
다시 봅시다. 선택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했을 때 ‘예수님, 가만히 계셔보세요. 예수님만 선택하지 말고 나도 주님을 선택하는 이유를 찾아봅시다.’ 이게 안 돼요. 이게 안 되고 주님이 자기 일방적인 ‘너는 간사한 것이 없다.’ 하면 그냥 간사한 게 없는 거예요. 판결과 심판은 재판이 하지 피고인이 하는 게 아니에요. ‘판사님, 저 15년 형이죠? 알았습니다.’ 이런 거 없어요. ‘가만 있어보세요. 15년인지. 여봐라. 20년이다.’ 하면 20년 받아야 돼요. 판결은 내가 내리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버릇이 우리는 자꾸 내가 나를 판정해 버리고 점검하고 측정하고 내가 나한테 위로하고 스스로 하는 버릇이 되다 보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판결한다는 것을 굉장히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제자들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주님 따라다녔으니까 우리는 높은 자리 앉을 것이라고 자기가 자기를 판정해 버린 겁니다. 나다나엘에게 간사한 게 없다는 것은 나다나엘이 먼저 ‘주님 오시면 나를 주님이 점수 좋게 보실 거야.’ 기다렸습니까? 오히려 놀란 것은 어느 쪽이 놀랐습니까? ‘저한테는 후한 점수인데’ 오히려 나다나엘이 놀란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이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나다나엘 수준까지 돼야 돼요.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라고 이 제자들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제자들은 그럴 수 없어요. 주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뇨? 나중에 다 도망가 버렸죠.
다시 원래 못난 자리로, 주님이 택하기 전에 있던 자리로 가서 그 다음에 주님이 다시 찾아와서 제자 삼아서 ‘양들을 쳐라.’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12제자 뽑은 것은 일종의 이거는 인턴제도에요. 정식 사원이 아니고 인턴제도에 말려든 거예요. 이 사람들 4대 보험 안 됩니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장례비도 안 나와요. 이 사람들은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런 역할을 한 거예요.
나다나엘은 주님이 그렇게 봤기 때문에 간사한 게 없죠. 왜냐 하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이 “네가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했죠. 남은 시간에 이거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은 개인이 아니고 뭐다? 집단이라 했습니다. 다수가 개인역할을 하는 거예요. 다수가 개인역할을 하면 다수가 백날 모여 봐야 개인 안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가 되냐 여기서 사건이 주입돼야 돼요. 다수에서 개인으로 갈 때 여기서 사건이 주어집니다.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다수가 사건에 대해서 나름대로 반응을 하겠죠. 만약에 100명이라면 이 사건 해석이 몇 가지됩니까? 100가지 해석을 내놓죠.
이건 집안 식구가 아무리 하나라 해도 어떤 사건이 터지면 집안 회의해 보면 전부다 각자 의견이 달라요. 우리가 언제 한 몸이었던가 할 정도로 우리는 조금도 한 몸 티가 안 나요. 왜냐 하면 중국집에 가면 짬봉, 자장면, 울면, 기스면, 전부 다 자기 맘대로 시키는 거예요. 제가 대전 강의 갔을 때 우리 김 종인 권사님이 점심시간에 꼭 중국집에 가는데 저는 자장면, 짬봉, 다섯 명이 다 달라요. 사건이 오게 되면 ‘뭘 주문하십니까?’ 사건이거든요. 사건이 오니까 우리는 everybody 형제라고 하다가 주문 받으니까 다 달라요.
그런데 중국집 하는 사람이 ‘에이고, 하나로 통일하죠. 뭐 오래 걸리는데.’ 하고 새로운 사건이 오니까 하나로 통일됩니다. 결국 이것은 뭘 의미합니까? 본인의 의사는 짬봉이었는데 강압적으로 ‘이러다가 오늘 점심밥은 못 먹겠네.’라 계산해서 그냥 시키는 대로 통일할 때 이것과 이것 사이가 하나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리면 그 사건 앞에서 전부 다 죄인인 하나가 돼야 될 텐데 ‘야, 이번 양은 너는 몇 마리 잡았어? 두 마리, 나는 세 마리, 내가 복 많이 받을 거야.’ 양을 잡으면서도 전부 다 각자 다수의 개성을 상실하지 않고 계속 유지가 되니까 이놈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가 아니고 완전히 조각조각이 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되는 거예요. 요거까지는 쉽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한 바구니에 학생들을 전부 다 모아놨습니다. 한 바구니에 모아놨으니까 이걸 집합이라 하고 그러니까 전부 다 한 배를 탔고 한통속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무 일 없을 때, 사건이 없을 때는 전부는 같이 노래 부르면서 즐겁게 수학여행 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건이 터져버리면 나 먼저 살려고 다 튀어버려요.
결국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사건을 계속 유발시키는 것은 너희들 생각에서는 우리는 같은 동족이고 같은 민족이고 한 하나님 믿고 한 메시아 믿는다고 우기지, 막상 어떤 자극을 줘버리면 그 자극에 의해서 뿔뿔이 다 흩어지고 남는 것은 뭐냐 “목자를 치니 양은 흩어지고” 누구만 남았어요? 목자만 남았어요. 결국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신 것은 진짜 하나는 오직 목자, 메시아 한분만 하나에 부합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모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찾아왔습니다.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를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죠. 어떻게? 편안할 때,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 또는 약간 어려운 것이 왔을 때는 ‘아, 어려운 게 왔을 때는 하나님이 일부러 어려운 일을 준 거야, 이때는 시험의 기간이니 참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해야 돼. 주여 어려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버틴다고요. 요건 언제냐 하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어려움이 왔을 때는 요 정도까지는 되는데, 더 이상 심한 파도가 밀려와 버리면 'why me! 하필이면 왜 접니까?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믿으면 갭니다.' 하고 나오잖아요. 결국은 주님과 동행했는데 주님과 하나가 아니고 나 하나, 주님 따로 하나, 완전히 따로 국밥 됐어요. 사건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기억하라고 준 게 아니고 네가 기억하나 상관없이 내가 너를 체험케 할 거예요. 어떤 체험? ‘내가 예수를 나보다 덜 사랑했습니다.’를 발각되는 사건을 우리로 하여금 그걸 매일같이 경험하게 하셔요. 주님 생각 하루에 몇 번 안 합니다. 중요한 건 내 자식, 내 아내, 내 남편 생각, 내 회사 생각에 더 몰두해요.
그러다가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나는 내 주먹 내 맘대로 흔들었다.’는 것을 자인하게 만들어서 내 식대로 주님을 붙들 수 없고 주님 쪽에서 이 못난 것을 하나로 이렇게 감싸주게 되면 비로소 주님에 의해서 하나 되지, 내 쪽에서 성의를 표한다고 주님이 덩달아 내 편이 돼서 하나로 묶어지는 게 결코 아닙니다.
부부가 싸움을 하더라도 지나가는 사람 누가 내 아내 욕하면 그 순간은 갑자기 하나가 돼요. 부부는 용감했다. 남자와 여자 애인이 싸울 때 지나가는 사람이 ‘그 여자를 왜 때립니까?’ 하면 누가 화내느냐 하면 여자 쪽에서 화내요. 고맙다 소리 안 하고 ‘우리 문제니까 가는 길로 가시죠.’ 그 순간 하나가 돼요.
그래서 주께서는 사건을 부여함으로써 한 배에 탔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어설픈 하나인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설픔을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시는 그 놀라운 솜씨를 어설픈 사람들을 데리고 지금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목표는 뭡니까? 각 개인의 구원이 아니고 목표는 구원이 아니고 이스라엘 됨, 집단 구원! 그래서 나다나엘을 먼저 제자들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다시 봅시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스라엘 임금이죠. 그러니까 이 나다나엘을 자기가 구원받은 걸 기뻐하는 거예요? 나를 하나로 만든 임금 만난 걸 기뻐하는 거예요? 보통 인간은 자기로 인하여 자기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돼 있는데 나다나엘은 지금 희한한 사람 이예요. 자기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임금님을 만났다는 자체, 내가 의지하고 내가 모실 어떤 어르신네를 만난 것에 대해서 자기는 그야말로 꿈의 소원을 이룬 거예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고 나다나엘의 소원은 내가 섬길 주님을 만나기를! 그야말로 백성이죠. 우리 임금님만 다치지 않는다면 이 몸 바치겠나이다. 이런 충성심이. 이게 그야말로 대 승상 이예요. 그야말로 충성 신하.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됨에 요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요건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은 지시와 명령만 하면 되나?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런 요건을 갖출 의향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세계가 뭐냐 하면 구원받을 자의 대신하는 세계로 가시는 겁니다.
인간은 못해요. 요한도 베드로도 못해요. 하지만 못해도 괜찮아요. 누가 대신하기 때문에? 임금이 먼저 대신해서 백성 뽑아버리면 그 백성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임금 한분이 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 임금과 하나가 되어서 천국백성이 되는 그 전략, 그 프로젝트를 주님께서 이제 실시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거대한 하나님의 프로젝트에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했고, 의논한대로 아들은 아버지 아들을 확인 했고, 아들은 이 땅에 와서 순종했는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언약대로 천국 갈 백성,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그 나라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먼저 뽑아서 전부 다 멸망시켜 버렸고, 그 멸망한 이유가 제자들 12제자 뽑으면서 그 멸망했던 사고방식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반복되게 했고, 반복되면서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이스라엘도 멸망했고 제자들도 엉터리인데 엉터리 같은 인간을 오히려 죄 없다 하시고 백성으로 삼으시는 그 대단한 노력은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희생함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도대체 그들이 지은 죄가 뭐냐가 드러나야 되잖아요. 그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드러나는 거예요. 드러나고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이유도 제자들과 동행하면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뭐냐, 예수님 12제자뿐만 아니고 그 주위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논쟁을 통해서 잃어버린 이스라엘 나라가 왜 이방나라, 악마의 나라, 짐승한테 삼키는 이유를 다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구원의 말을 끄집어 낼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구원은 아버지께서 오직 아들만 구원하는 거예요. 아들만 구원하는데 아들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베니아판, 구원이 들어있거든요. 그 베니아판이 쿵 하고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이스라엘 나라에 편입되면서 야! 천국은 완성이 된다는 그 계획을 벌써 요한복음 1장에서 죽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1장에서 남은 것은 뭐냐 그거에요. 51절 참, 골치 아픈 이야기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원래 창세기 28장 10절에 보면 야곱이 잠자고 있는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했죠. 그때 잠자고 있었으니까 꿈이죠. 꿈속에서 야곱이 어떤 꿈을 꿨죠? 자세히 봅시다. 거기가 자기가 돌베개를 하고 누웠는데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지금 땅에 누운 자가 누구죠? 야곱이라는 아저씨죠? 메시아 아니죠? 그냥 보통 아저씨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일반적인 아저씨 보려고 오르락내리락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럼 야곱이 다른 사람하고 다른 점이 있어야 돼요. 야곱이 다른 점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야곱 개인의 수완이나 능력이 위대한 게 아니고 야곱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약속관계에 있죠. 그러면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사닥다리는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곱의 성질이 아니고 야곱에게 걸쳐있던 언약의 다리죠. 왜냐 하면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 누가 시키는 대로 해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주님이 시킨 게 바로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이잖아요. 천사는 언약대로만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대로 움직이면 야곱하지 말고 그냥 지상의 사람 누워있지 말고 그냥 지상의 나무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든지, 돌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든지 해야지 왜 야곱에게 들어가느냐 말 이예요. 제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일찍 오면 되는데 예수님이 신약 때 오지 마시고 창세기 28장에 그냥 ‘나 미리 왔지롱’ 미리 올 것도 없죠. 오신 게 전부니까. ‘나 왔지롱’ 해서 자기 백성 데려가면 되는데, 왜 예수님 오시지 않고 야곱이란 인간에게 그 천사가 미리 와서 하느냐 하면 아직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언약이 언약의 다리의 끝에서 완성이 되잖아요.
그럼 시작점은 뭡니까? 야곱이죠. 야곱은 결국 뭐의 대표자입니까? 죄인의 대표자죠. 죄지은 죄인, 죄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이것은 야곱이 잘해서가 아니라 야곱과 천국과 이어지는 사닥다리가 있는 거예요. 이 사다리를 아까 뭐라 했습니까? 언약이죠. 야곱은 단지 죄인이어야 돼요. 그런데 야곱은 꿈에 나와서 죄인 값을 하죠. ‘야, 드디어 내가 복을 받는구나. 십일조 드려야지.’ 이건 아직도 야곱이 정신을 못 차린 거예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누굴 만납니까? 이건 28장이고 32장에서 얍복 강가에서 누굴 만나요? 예수님 만나죠.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야곱이 그야말로 야곱으로서는 죽었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잖아요.
그러면 이 과정을 모든 구원받는 사람은 이 야곱의 과정을 거쳐야 되겠어요? 안 거쳐야 되겠어요? 거쳐야 되는 거예요. 거치는데 요한복음 1장에서는 누구부터 거친다?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생의 길은 죄인이 가야 될 길을 주님께서는 그걸 마다하지 않으시고 본인이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의 길에 들어서서 옛날 야곱에게 일어난 그것을 반드시 되풀이해서 적용을 시켜 버립니다. 적용시킨 것을 제자들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이제는 예수님께선 왕이 되시고 백성들은 이미 적용받은 자들만 모여서 하늘나라 백성을 이루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순전히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할 것도 없고 ‘하나님 자신이 남긴 그 약속대로 그냥 실천했다는 것을 너희들이 믿어줘. 너희들이 아느냐?‘ 이걸 묻는 거예요.
괜히 이걸 봐서 ‘이상하게 나는 잠을 자도 천사가 나타나지 않고’ 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나타날 이유가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께 나타나면 예수님께 나타난 효과를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냥 받아버리면 매일같이 지금 우리는 천사가 왔다 갔다 해요. 지금 천사가 왔다 갔다 하고 지금도 물마시라 해서 마시고 지금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의 고난을 매일같이 느끼고 견디는 겁니다. 왜, 우리가 야곱이고 우리가 못난 제자이기 때문에, 맨날 돌아서면 나밖에 모르는데 다시 한 번 성령께서 그런 인간도 지금 언약이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다. 천사들이 너 때문에 지금 바빠요. 인간 만들려고.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로서의 있었던 일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작용이 한시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우리에게 되풀이 되고 반복됩니다. 주님이 너에게 복을 줬기 때문에 너는 오늘도 성도다. 이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복음 1장을 하면서 주님의 프로젝트를 보았습니다.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께 있었던 그 이야기가 우리를 그 장기 알로 사용하셔서 적용시켜 주시니 그야말로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주의 백성 된 그 기쁨을 느낍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부러워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주님 주신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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