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2장1(단절)14051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2장을 봅시다. 요한복음 2장에서 사흘 째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서 제자들이 혼인에 청함을 받아서 갔다. 시작이 그렇게 되거든요. 그리고 그 끝부분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에서 무슨 표적을 일으킬 것인지 예상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전혀 예상을 못했죠?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갈 때 예수님 하실 일에 대해서 예상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안 됐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제 이야기가 예수님은 결혼식 갈 때마다 또 같이 일으키는 일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죠.
예수님이 하는 것을 사람이 짐작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을 제가 묻는 겁니다. 짐작 할 수 있습니까? 없죠. 한 달 전에 하나님께서 나한테 은혜를 주셨으면 한 달 후에는 그와 똑같은 은혜가 생깁니까?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 기대 하는 바지, 살아계신 주님께서는 똑같은 일을 같이 일으키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고정적인 것을 주님 앞에 용납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고정하려 하거든요. ‘하나님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에 주신 은혜도 지금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 요거는 누가 뭐래도 이거는 의로운 것이고 경건한 것이고 이거는 완벽한 것입니다.’라고 우상 숭배 할 가능성이 인간에겐 늘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겼다 하면 부숴버리고 생겼다 하면 부숴버리고.
지금 오늘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는 결국 부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니까 도와주실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을 부숴버리는 거예요. 여기의 대상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초청받았던 예수님과 그리고 마리아였습니다. 초청을 받아 갔는데 3절에 예수님 어머니가 예수께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이제부터 어렵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시작이 뭐냐 하면 포도주 이야기였습니다. “포도주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니까 뭘 기대했느냐, 포도주가 없으니 있음으로 됐으면 좋겠다는 거죠. 요건 어디까지나 포도주 이야기죠. 포도주 이야기지 사람하고 관련된 사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사람하고 관련된 사항이 없죠.
그럼 예수님께서는 포도주 만들러 왔습니까? 예수님은 누굴 관여해요? 사람과 상관하죠. 내가 온 것은 죄 씻으러 오잖아요. 어디 강아지 죄요? 들 고양이 죄? 아니에요. 사람의 죄를 씻으러 온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몸소 지닌 몸이 사람의 몸이지 코끼리 몸이 아니다 이 말이죠. 사람의 몸을 지니고 아버지께 저주받아서 버림받았다는 이 말은 그 몸이 사람의 몸이잖아요. 죄 있는 육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은 포도주하고 상대할 게 아니고, 없는 포도주를 있게 하는 게 아니고, 지금 포도주가 없는데 있잖아요. 어쨌든 마리아가 제시한 것은 없는데 있게 해내라 이런 뜻 아닙니까? 주님이 생각하는 있음에는 포도주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뭐가 들어가요? 죄가 용서받은 사람이 들어가겠다는 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이죠.
‘포도주 없네.’ 거기 호응하는 게 아니고 ‘알았어. 포도주 만들게.’ 이게 아니고 ‘사랑하던 사람이 없네. 하나님 천국 갈 사람이 없네.’ 그걸 내가 있게 하겠다는 목적 때문에 오신 겁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중풍병자가 친구 네 명하고 지붕 뚫고 와서 고침 받았죠?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그들은 죄용서 받으러 왔어요? 아니면 중풍 병 낫기 위해서 왔습니까? 낫기 위해서 왔죠? 똑같은 원칙 이예요. 중풍 병이 걸렸다. 그런데 주님 찾아왔다. 내 중풍 병이 없기를 바라죠.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는 “병이 나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뭡니까? “네 죄를 사했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보세요. 지금 병 고치러 온 사람이 원하고 노리는 것을 주님께서는 호응했어요? 호응 안 했어요? 전혀 호응 안 해줬어요. 맨 주님 하시는 일이 늘 이런 식 이예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안 해준다니까요. 떡은 많이 먹었으니까 만두도 많이 먹고 이제는 피자? 피자 줄지 안 줄지… 다음번에는 모르죠.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일체 거부하는 겁니다. 왜냐, 우리가 원하는 그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죄를 지은 우리가 원하는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하는 것을 원하게 해놓고 그걸 발그레하게 올라온 죄로 보는 거예요. 그 죄를 사해주는 것과 관련됐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사항을 듣기는 듣되 그들에게 호응해주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가 예수님의 모든 행위에 다 그와 같은 행위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 예를 들까요?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오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은 눈먼 자를 눈뜨게 한다는 것을 이미 전에 알았어요. 예수님이 눈먼 자를 눈뜨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다 말이죠. 예수님을 믿게 하거든요. 그래서 제자들이 벌써 눈먼 자를 눈떴다. 눈먼 자는 시력이 없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시력이 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은 그냥 놔두시고 불쌍한 저 사람이나 상대해서 눈뜨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쪽으로 나온 거예요. ‘저 사람은 조상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나왔지, 우리 제자들 죄 때문에 라는 말을 안 집어넣다 말이죠.
우리는 괜찮고, 왜, 눈을 뜨고 있으니까 건강하니까. 우리는 그만한 죄를 안 졌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눈 봉사됐으니까 저주받았는데 자기 부모 죄냐? 자기 죄냐? 그들로서는 큰 고민거리에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누가 어디 아프면 ‘부모가 임신했을 때 담배 많이 피워서 저렇게 됐는가? 아니면 걔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런가?’ 자꾸 이 말을 한다는 것은 나는 괜찮다는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은 단계를 지었어요. 첫째는 눈을 뜨게는 합니다. 뜨게 해놓고 그 다음에 자기가 눈 떴다는 사실만 알지, 눈뜨게 하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는 봉사됐다가 눈뜨고 지옥 가는 사람 돼 버려요.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눈만 뜨게 하려고 온 게 아니다. 그게 아니고 눈뜨게 한 것은 너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난 뒤에 나를 믿어라.” 할 때 그때 믿으니까 바로 그것이 병을 낫게 하는 목적이 아니고 죄를 사해주는 거예요.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죄가 나와야 되고 죄 나오게 해서 그 다음에 그 죄를 용서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에 다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저와 여러분들하고 지금도 상관하고 관여하고 인생에 대해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매일같이 우리는 죄 끄집어냄을 당하면서 그 죄가 이미, 우리한테 물어보지 않고 회개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용서해서 용서가 먼저 있고 그 용서가 얼마나 대단한 용서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 짓는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거예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그걸 발견 했잖아요. 평소에 성전에 왔다 갔다 하고 평소에 선지자로서 활동하다가 막상 성전에서 누굴 만납니까? 하나님을 딱 만나고 하는 말이 이건 말이 필요 없죠. 단박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어떻게 내가 더러운 주제에, 죄인인 주제에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다니.’ ‘하나님이여 제가 이런 죄를 지었어요.’ 어디서 그런 자기 죄 지은 것을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있음 그 자체가 죄인으로 있음인데. 꼭 하나님 안 만나 본 인간들이, 서울 안 가본 인간이 서울 잘 안다고.
하나님 만나 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성화되면 어떻고, 회개하면 어떻고, 회개고 자시고 그냥 악! 소리밖에 안 나오는데 무슨 소리 하리요? 영화배우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나면 아무 소리도 안 나온다 하잖아요. 직접 만나면 너무 허무하다 보니까 아무 소리도 안 나온다는 거예요.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오래 사귀어보면 대하는 거지만 막상 딱 만나보면 말을 못하듯이.
지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낮아졌거든요. 죄인의 모습으로 왔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마리아하고 서로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충분히 낮아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됐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자기 영광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래요. 여전히 하나님 이예요.
제가 부산 강의에서 했잖아요. 예수님은 하나님 + 인간이 아니고, 인자로서 오신 거예요. 사람의 아들! 우리는 오늘 표적이란 말이 이제 말씀 들으니까 대충 감이 오죠? 혼인잔치에 갔다. 다른 사람들은 ‘야, 예수님께서 결혼식에 축하하러 왔구나. 축하하러 온 게 아니고 자기 일하러 왔죠. 그 일이 뭔데? 죄를 끄집어내서 죄 사해주러 오신 거예요. 예수님은 그 외 다른 일 할 필요 없어요. 여기서 목수나 하고 땡볕에 고추나 심어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게 아니거든요. 그냥 내가 온 것은 죄를 끄집어내서 그 죄를 사해주려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는 한 맺힌 걸 우리가 응답을 ‘주여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거 응답해줄 주님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기도가 나오도록 유도를 하죠. 왜, 그게 죄니까. 다시 할게요. 우리는 있다, 없다를 자기의 있음으로써 그러잖아요. 나는 일단 있고, 있는데 뭘 모르느냐 하면 포도주가 없어서 내 있음이 신경 쓰인다 이거거든요. 포도주가 많으면 내 있음이 기분 좋은데 포도주가 없는 상태에서 내가 있으려하니까 내가 좀 섭섭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주여 내게 만족하게 해 달라.’라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있음의 가치를 유지하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직접 마리아를 쳐버리죠. 결국 혼인식에 들어가서 지금 모자간에 싸울 판 이예요.
마리아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워낙 유명하고 제자들까지 데리고 있으니까 마리아가 친척들이야 많았겠습니까? 그렇게 잘난 아들 두었다니까 우리 혜택 좀 보자. 소문 파다하게 났으니까.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못하는 게 없다하니까 전능하다니까 그 전능한 솜씨를 기대했고 마리아도 은근히 자식자랑하고 싶겠죠. ‘우리 아들 이렇다. 포도주 없지? 내 아들한테 이야기해줄게. 다 돼, 다 돼. 다 돼.’ 그렇게 하고 싶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머니한테 직접 공격하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와 상관없는 요구를 지금 했습니다. 이 말은 “여자여,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내가 뭣 때문에 왔는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해서 왔는지를 전혀 모르고 그냥 일을 시키려고 이용해보려는 그런 생각으로 한 거죠. 그리고 말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했어요.
그럼 여기서 한번 분석해 봅시다. 남들보기에는 마리아와 예수님이 나란히 서 있다 이 말이죠. 이 자리에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공간에 두 사람이 서 있다고 보잖아요. 예수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내 때, 내가 속해 있는 내 때, 그리고 여자가 속해 있는 여자의 때, 이게 같다는 말입니까? 다르다는 말입니까?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때가 어떤 일정한 때가 아니고 그게 하나의 영역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리아는 마리아에 속한 영역을 이야기했고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부여받은 새로운 지금 적용시킬 예수님의 그러한 세상, 그러한 영역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관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마리아에 속해 있는 이 세상을 도와주려고 오신 게 아니고 예수님의 일방적으로 자기 세계만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마리아가 먼저 선수를 쳐서 예수님을 자기 세계에다 포섭을 하려고 요구했죠. 마리아가 있는 이 동네가 포도주가 없다는 거예요. 당신이 전능하다니까 이걸 메워달라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이만한 능력이 있다고 요구한다는 것은 이것은 마리아가 생각하는 세계에서의 전능하심에 예수님도 포함이 된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함이 된다? 안 된다? 전혀 상관없다는 말은 지금 엉뚱한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바구니가 두 개 있는데 여기는 공책, 필통, 연필, 볼펜으로 바구니가 한 집단을 이룬다고 봅시다. 여기는 바나나, 사과, 땅콩, 딸기가 한 집단을 이룬다 합시다. ‘예수여, 연필이 떨어졌는데 당신 것을 가져오라.’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지금 무슨 관계냐, 여기는 딸기, 바나나, 과일종류고, 여기와 집합이 다른데 어떻게 이게 연결이 돼요? 포도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야기를 이쯤 하고 결국은 예수님이 뭘 줬습니까? 이쪽에서 지금 포도주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준 게 포도주입니까? 뭘 준 거예요? 지금 세상 사람들 보세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때가 보여요? 안 보여요? 예수님이 때는 안 보이고 자기들에게 속한 공간과 같은 공간이라고 같은 한 바구니, 한 통속이라고 본 겁니다. 마리아도 그렇게 오해했었고, 아들이니까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지 않겠느냐, ‘포도주 대라.‘ 그런 이야기겠죠.
그런데 주님 보기에는 이게 붙어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떨어져 있는 거예요. 떨어졌을 뿐더러 이 떨어져 있는 것을 이을 수 있는 방법이 인간 쪽에서는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전혀 나오질 못하는 거예요. 계속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만 할 뿐 이예요. 오해한다고 이어지지는 않거든요.
결국 가나안 표적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건 뭘 이야기하느냐, 단절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세계와 예수님 세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상상하는 것은 그 상상하는 재료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주님에게서 온 게 아니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 좋은 거, 명품이라든지 착한 거, 진선미 이런 걸 가지고 ‘아마 주님이 선한 분일걸.’ 부자청년처럼 그렇게 오해를 해서 주님보고 ‘우리가 요거 필요한데 도와주세요.’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뭘 선언하느냐? 단절을 선언합니다. 끝!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일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뭐 줄 수 없다 해놓고 줘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뭐냐 하면 줄 수 없다고 시작했는데 결국에는 주었잖아. 줄 수 없다고 해놓고 줬다 이 말이죠. 줄 수 없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고 예수님이 주셨다 이 말이죠. 그럼 다른 사람 보기에 줄 수 없다 해놓고 주었다고 할 때는 그 사람들 마리아가 원하고 지금 혼인잔치 주최 측이 원하는 걸 줬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그들이 원하는 걸 준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주님이 주신 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죄인이며 너희들은 나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에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준 겁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준 것이 예상 밖의 포도주거든요. 그들은 포도주를 원했지만 그 포도주는 자기들이 먹던 익숙한 포도주를 원했지만 나중에 준 포도주는 어떻습니까? ‘도대체 이 포도주는 어디서 온 포도주지?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다 있어?’ 이러잖아요.
이것은 그들이 예상 못했는데 갑자기 예상 밖의 질이 좋은 포도주가 왔을 때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자기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외부에서 그냥 덮쳐져 온 거죠. 외부에서 덮쳐 오게 되면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내용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단절로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단절을 유지했다. 이렇게 제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혼인잔치의 표적은 처음도 단절이었고 마지막도 포도주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게 어디서 나왔지?’ 어디서 온 걸 모른다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그건 예수님에게서 왔다는 말을 해도 그 사람들은 소용없어요. 그 사람들이 듣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 진짜 질 좋은 포도주를 자기만 알아서 거기에 전화하든지 전달해서 ‘아이쿠, 그것도 포도주라고, 베드로야, 가룟 유다한테 돈 계산해라 해서 내가 우연히 들른 그 포도주 있는데 거기 가서 가져오라 해.’ 그래서 택배로 와서 한 줄로 아는 거예요. 예수님이 줬다는 말은 그들은 이해를 못한다니까요. 지금도 이해를 못하죠. 예수님이 어디서 가져왔겠지, 이건 되는 거예요. 왜냐, 그 방식이 우리 인간들 사는 이 세계에서 통하는 방식이거든요.
예수님 본 집에 포도주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럼 예수님은 뭘 줬는가? 포도주를 달라는 그들에게 준 것은 뭐냐 하면 에이, 물 먹어라, 물이었습니다. 물을 준 겁니다. 물은 전혀 포도주 속성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물은 H₂O기 때문에, 그냥 물은 냄새든 뭐든 포도주의 낌새가 전혀 없어요. 그들이 여섯 항아리에서 담아서 왔을 때 그들은 분명히 물을 받은 겁니다. 끝, 물 받은 걸로 끝났어요.
그렇다면 포도주 받은 그들은 포도주가 왔을 때 포도주를 받은 게 아니고 포도주를 주는 그 세계 속에 그들이 혜택을 입은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볼펜이 있잖아요. ‘볼펜이 없는데 볼펜 주세요.‘ 할 때 주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볼펜을 주면 되는데 ’볼펜을 원했지?‘ ’볼펜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매직을 주는 거예요. ’에이, 볼펜인데 매직을 주다니 이거 가지고 어떻게 책에 쓰느냐‘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야, 요 매직이란 걸 쓰니까 볼펜보다 글씨가 더 가늘게 나오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내가 이런 소리 하면 옆의 있는 사람이 보면 이건 미친 인간이죠.
결국은 예수님의 기적을 받았던 사람은 졸지에 그 순간만큼은 미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만큼은 자기가 있던 세계에서 맛보던, 경험하던 그 경험에서 벗어나서 주님이 갖고 있던, 주님만이 알고 있던 그 경험을 받는 동시에 그들은 정상인이 아닌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한테 뭘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정상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을 하면 그들이 발작을 일으키고 ‘미쳤나?’ 할 정도가 돼야 돼요. 그게 정상 이예요.
가나안 혼인잔치의 비유는 결국 표적이었습니다. 다시 할게요.(어느 분이 오셔서) 다시 한다는 것은 다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보충해서 나옵니다. 요한복음 2장 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마리아가 포도주 떨어졌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선언한 것은 단절이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와 상관없다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뭐냐 하면 결국은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주님 나라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걸 원하는 거예요. 그 의사표시가 뭐냐 하면 포도주 달라는 자에게 뭘 줬습니까? 물을 줘버린 거예요. “에이, 물 먹어라.” 물이 온 거예요. 저 같으면 그렇게 안 합니다. 물을 뜨고 기도해서 포도주로 바꾸어놓고 그 포도주를 가지고 그쪽에서 줄 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좋은 호감을 가질 수 있겠죠. ‘주님께서 빼기는, 처음에는 안 준다고 빼놓고 주기는.’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분명히 하인들이 봤어요.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했어요. 다 물을 채운 줄 알았죠.
그런데 떠서 갖다 주니까 뭐가 되죠? 이건 포도주에요. 이건 뭐냐 고발입니다. 이건 심판 이예요. “아나 먹어라.‘ 이런 식 이예요. 포도주를 갖다 주고 ’아나 먹어라.‘ 가 아니고 물 갖다 주고 퍼서 주니까 포도주가 된 거예요.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깨닫지 못한다. 진정 우리가 뭘 필요로 한지, 포도주가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뭐가 필요하냐 하면 예수님의 세계가 필요해요. 그게 영생이니까. 포도주 먹고 지옥 가면 안 되잖아요. 진짜 영생인데 그 영생을 표현할 때 뭐로 표현하느냐? 주님께서는 포도주 떨어진 거 가지고 영생을 표현하는 겁니다. 어떻게? 물인데 그들이 포도주를 원할 때 ”너희들에게 줄 것은 포도주라는 것은 너희들에게 줄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에라 물이나 먹어라.“ 하고 줘놓고 떠서 주니까 그게 포도주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와중에서 그들은 뭘 알아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잘못 생각하고 잘못 이용하려 들었구나. 그렇다면 그 이용한 증거가 뭐냐, 바로 우리가 맛도 못 본 너무나 뛰어난 포도주를 우리가 먹는다는 것은 ‘아! 맛있다.’가 아니라 ‘주여,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럴 때 제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포도주 만들려고 오신 게 아니고 죄인 죄 드러내서 그 죄를 용서하시는, 죄를 사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딴 거 아무것도 안 해요.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시고, 오직 죄 드러내시고 죄를 까발려 놓고 그 다음에 그걸 용서하셔요.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 졌을 때는 우리 포도주 하는 식이 아니라 십자가 죽고 부활함으로써 물이 왜 포도주가 됐는지,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물이 포도주 된 거예요. 그래서 결론 내리면 물 같은 인간도 주님 십자가 믿으면 놀라운 포도주 같은 인간으로 변해서 천국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엄마 마리아 말을 멋들어지게 이용했죠.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 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버린 거예요. 쓰잘데기 없는 질문을 한 여인으로 이용당한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지금의 생활의 반복입니다. 우리는 늘 쓰잘데기 없는 것에 한 맺혀서 기도하잖아요. 주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그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 적절하게 우리의 쓰잘데기 없는 기도를 충분히 활용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의 죄도 버릴 게 없어요. 다 주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충분합니다. 괜히 잘난 체 하지 마세요. 잘난 체 하는 게 더 미워요.
그러니까 그 때가 어디냐? 여기 내 때라 하는 것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상을, 예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왜냐 하면 마리아 때가 따로 있으니까, 내 때는 당신의 때와 다릅니다. 이거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소속돼 있는 세계관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여기서 이렇게 한번 정리해 봅시다.
먼저 질문해 볼게요. 배가 있는데 A라는 배가 있고 B라는 배가 있는데, 분명히 앞에는 A, 뒤에는 B라 정해져 있습니다. A라는 배의 부속품을 B로 옮기고 B라는 부속품을 다 빼서 A로 옮겨 버리면 두 배는 그대로 A고 그냥 B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됩니까? 부속품 다 바뀌면. A가 B되고 B가 A되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제가 왜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죄를 용서할 때 용서한다는 의미가 뭐냐, 그걸 따져보자는 겁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잖아요? 그런데 처음에 마리아가 원했던 것은 물을 원한 게 아니잖아요. 뭘 달라? 포도주.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 말이죠. 예수님이 주신 것도 포도주고 마리아가 처음에 원했던 것도 포도주고, 같은 포도주인데 이게 같은 포도주 맞느냐 이 말입니다. 다르죠.
그렇다면 이 다르다는 말을 우리는 이렇게 하겠어요. 포도주를 원했을 때 우리는 물로 매실주를 만들어 주면 어떻겠어요? 이건 다른 게 확실하죠. 그런데 같은 포도주로 하면서 ‘이 맛 좋은 포도주가 어디서 났지? 어디서 준비했지?’라고 외쳤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에게 ‘현재 나는 나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본성 자체가 바뀌어서 온다는 겁니다. 안에 부속품이 다 바뀌어서 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처럼 그래도 나는 나지만 내가 살아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그래도 나라는 거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이다‘라고 말을 못하고 그래도 ’나다‘ 이 말입니다. 자칫하면 우리가 예수님 돼 버려요. 왜냐 하면 부속이 다 예수님으로 다 바뀌었으면 예수님이 돼야 되는데 예수님이 너무 많아.
나는 난데, 나는 늘 죽어가면서 나고, 그것을 살려내는 주님은 또 내 안에 따로 계시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의 효과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가 되면 그렇게 바뀌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사시라는 거예요. 괜히 내가 알아서 부속 바꾸지 말라 말이죠. 착하게 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돼요. 착하게 해봐야 그 포도주가 그 포도주에요. ‘아휴’ 이 맛있는 포도주가 안 돼요. 좀 설탕을 덜 탄 포도주? 꿀 탄 포도주? 더 삭힌 포도주가 될 뿐이지, 진짜 없는 포도주가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나는 있지만 없는 내가 돼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모든 공로와 모든 은혜를 누구한테 돌려야 됩니까? ‘어,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주님의 솜씨구나.’ 하고 우리는 몸둥아리 전체가, 나라는 전체가 그전에는 나를 위한 나였지만 이제부터는 바치기 위한 나,. 로마서 15장에 보면 이방인을 제물로 바친다는 말이 나와요. 로마서 12장에도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놨습니다. 라는 식으로 바쳐지는 그런 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포도주와 관계한 게 아니고 맨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결국 인간하고 상대합니다. 예수님 오신 것은 코끼리하고 강아지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하고? 사람하고 상대하기 위해서, 왜, 자신의 몸이 사람의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거기서 하나 더 해봅시다. 다음에 할 이야기 성전 이야기와 연관되기 때문에 어려운 거 미리 해봅시다. 그러면 사람이 부속이 바뀌었다. 그래서 새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다. 왜, A는 A고 B는 B니까. 그러면 여기서 ①번, 옛 자기와 새 자기와 비교되는 겁니까? 아니면 ②번, 사람 대 사람으로 비교합니까? 아니면 ③번, 하나님과 사람과 비교되는 겁니까? 주께서 만들어 놓은 새로운 피조물은 ① ② ③번 중에서 어느 쪽입니까? ③번 쪽 이예요.
왜냐 하면 반드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과 우리하고 비교시킵니다. ‘저 사람보다 예수 믿는 사람보다 저 사람이 나아요.’ 저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하고 비교해. 나 옛날 과거에는 이렇게 살았는데 새 사람 되었어요. 너의 과거와 비교하면 안 돼요. 그건 자기 자신을 우상 숭배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려면 구원파 가세요. 구원 파는 그러거든요. 몇 월 며칠부터 나 구원받고 그건 구원 안 받고, 이건 구원 파에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아도취에 빠진 겁니다. 얼마나 자아도취에 빠졌으면 돈을 거기다 바칠까,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자기가 불리하면 씻는다고 돈을 자기를 이렇게 만든 교회에 내는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 대 사람이 비교되면 돈을 내도 받을 사람이 없어요. 돈을 낼 곳이 없어요. 그리고 주님은 돈을 안 받아요. 주님은 16년 동안 해도 돈을 안 받아요. 십일조가 없는 이유가 십일조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제사장이 없는데 누가 받아요? 본인이 제사장이면 본인한테 내면 되지. 받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테 내요? 십일조라고 공중에 던지면 주위 사람들이나 좋아하겠지만. 만 원짜리 막 던지니까.
무슨 하나님이 돈을 받아요? 사도행전 17장에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거든요. 시편 50편 8절 한번 봅시다. “내가 너의 재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가 나한테 바치다니 뭘 바쳐? 바친다고 네 것이냐, 네 것이 있어야 나한테 바치지. 네 것이 없는데 무슨 네 것을 바치느냐. 네가 안 바쳐도 산 속의 사슴 뛰놀아도 다 내 것이고, 네가 양 안 바쳐도 그 있는 자리에서 다 내 것인데, 뭘 거기서 따로 브랜드 바꿔서 내 겁니다. 누굴 속이려고? 네 것이 어디 있는데 네 것을 바쳐요? 네 것이 없는데 뭘 바쳐요?
바친다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장차 말씀대로 오실 사람이 있을 건데 그 메시아를 나한테 바쳐라. 하나님이 받을 것은 따로 준비했어요. 그 준비된 맏물을 가지고 십일조라 합니다. 그분이 예수님 이예요. 예수님이 십일조에요.
항상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자꾸 자기의 과거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이거는 칸트의 이성의 법칙에서 반성하는 주체거든요. 반성하게 되면 반성하는 자아가 그 다음 되면 또 반성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아 자체가 이미 신격화 돼 있는 상태에서 그냥 내부만 자기가 알아서 바꾸는 거예요. 그리고 바뀐 적도 없는데 다만 자기 행동한 가운데서 선한 것만 골라 뽑아서 부케를 만들었어요. 꽃 중에서 예쁜 것만 뽑아서 만들어서 따로 묶어서 만든 꽃다발.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한 것을 잘 뽑았죠. 옛날에는 술 먹는 거 뽑았다가 이제는 술 먹는 것은 안 뽑고 거지한테 동냥한 그거만 뽑아서 ‘난 성화됐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을 비교하고. 이건 신명기 9장에 보면 나옵니다. “네가 구원받은 것은 네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대로 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이다. 너는 사실은 목이 곧은 인간이야. 옛날에도 목이 뻣뻣했고 지금도 목이 뻣뻣한데 하나님께서는 너를 보는 게 아니고 언약을 보는 거예요.”
수요 예배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수요 예배 때 하나님의 선택이 되면 그 개인의 속성이나 개인의 조건 안 따진다 했죠? 기생 라합이 됐든 간수치가 높든지 관계없고 선택하는 그 자체로 보고 그냥 직업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으로 세운다 했잖아요. 어제 설교 제목이 파수꾼이었습니다. 파수꾼이라 해서 섹스폰 15년 불고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실 일, 장래 할 일을 미리 담아있으면 파수꾼 되는 거예요. 어떤 조건, 신장이나 체중 그런 걸 보지 않습니다. 특히 여자들 인물 안 봅니다. 남자들 돈 안 보고. 남자는 돈이고 여자는 인물인데 그런 거 일체 보지를 안 해요.
사람하고 비교할 때는 꼭 뭐냐 하면 자신이 세상에서 장점 있는 것과 타인의 장점 과 비교해요. 비교하는 그 순간부터 본인은 스트레스 받습니다. 심지어 꿈속에 나타나서 때려죽이려 하고 쫓아가고 이럽니다. 저 인간 때문에 못 살겠다. 이런 식으로. 자꾸 동서 간에 시누이라든지, 일은 안 하면서 와서 봉투 내밀면서 ‘어머니 받으세요.’ 하면서 일을 시키는 맏며느리는 기분 다 나쁘고. ‘역시 있는 게 제일 잘한다.’
우리가 항상 해야 하는 것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겁니다. 하나님 딱 만나는 순간 뭐 할 말이 있습니까? 이거 나쁜 짓, 저거 나쁜 짓, 나오지도 안 해요. 그냥 죄인 이예요. ”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망하는 조치를 취해도 저는 제가 알아서 박수치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주여, 주께서 저를 저주한다 할지라도 주께서 하신 거면 박수치겠습니다.” 이게 이사야가 봤던 거고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하던 고백 이예요. “저주한다 할지라도 주님하신다면 하시옵소서.“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물이 포도주 됐다고 해서 자랑 질하지 마세요. ‘난 포도주 됐다.’ 하지 마세요. 우리는 계속 물이예요. 맛도 없는 물이예요. 그러니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걸 포도주로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뭐 주님께서 물 갖다 주고 몰래 포도주 엑기스 넣어줍니까? 세미원에서 와서 농축액 넣는 줄 알아요? 없어요. 인간 내가 만든다는 겁니다. 너희가 알아서 만들지만 너희 종교생활 하지 말고 너희들은 기껏 이거만 하면 돼요. ‘예수님, 포도주 없어요.’ 그 이야기만 하라는 거예요. 그 철닥서니 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라는 겁니다. 계속 해서 그것이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에 죄짓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지를 본인이 느낄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매일같이 반복해서 쏟아지게 하는 것,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첫 번째 표적이라. 이걸 보고 사람들은 또 주님께서 혼인잔치에 축복을 하셨다 해서 주례할 때 하는데, 자기가 축복이라 하려면 갑자기 우리는 봉투에다 넣지 말고 빈 봉투로 와서 냈는데 나중에 계산해 보니까 세상에 수표가 가득해야 그게 축복 아닙니까? 집에 있는 돈 갖고 와서 돈 내는 그게 무슨 축복 이예요? 빈 봉투 가져와서 ‘우리 혼인잔치 축복하신단다.’ 하면 빈 봉투 가져와야 돼요. 물을 담든지 ….
그 다음 12절 봅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그 다음 14절부터 22절까지 그 말씀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을 그 당시에 이해를 하지를 못했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2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라고 돼 있죠.
그러면 우리고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진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정말 성령이 우리한테 온 사람이라면 지금 여기 해석에 대해서 동의가 돼야 되겠고, 만약에 성령이 우리한테 안 왔다면 제자들이 오해한 오해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돼요. 제 논리가 맞죠? 제자들이 뭐라 했느냐 하면 “아이쿠,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 만에 짓습니까?”란 그 오해에 머무르게 되면 그 사람은 전혀 지금 이 본문 아니고 모든 다른 본문도, 구약 창세기고 뭐고 아무것도 이해 안 되는 성령 안 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지옥 갈사람 맞죠.
그러면 이 본문하면서 제일 먼저 분석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걸 보면 되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주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했어요. 지금 제자들 잘못인지 예수님 잘못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예수님이 뭐라 했어요? “이 성전을 헐라” 했죠. “그러면 헐고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돼 있잖아요. 이 본문만 딱 보세요. 본문만 보게 된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습니까?“라는 말이 이게 잘못된 말 이예요? 당연한 말 이예요? 당연한 말이죠. 예수님이 하시는 차원이 뭐냐 하면 건축업자들 하는 차원과 같은 차원으로 이야기했다니까요. 허는 것도 돈 들어요. 다이나마이트 터뜨려야 되니까. ”사십 육년 동안 지은 것을 사흘 만에 짓는다고 헐어 버리라”고 한 명령, “헐어버려라” 헐면 “사흘 만에 지어주겠다.“ 그런 뜻으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삼일 만에 부수겠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삼일 만에 짓겠다는 건 이해가 안 되겠는데요.‘ 라고 한 그것이 바로 잘못이었다는 거예요. 아니 제자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결국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잘못을 유도한 셈이 돼 버렸죠.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 닦달 내는 게 아니고 지금 내게 속한 세계와 영역과 네가 속한 영역이 이렇게 차이난다는 것을 말씀해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속한 세상은 내가 속한 세상과 단절이 돼서 연결이 안 된다. 아까 포도주하고 똑같아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연결이 되지 않는 걸 분명히 하면서 연결이 되지 않는 걸 분명히 해줘야 그게 연결이 됐을 때 ‘아! 주님의 공로구나.’ 하고 오직 주님만 영광 돌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도 힘 좀 꽤 썼습니다.’ 라든지 ‘아 그쪽으로는 나도 아는데.’ 이런 게 전혀 나오지 않도록.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은 뭐냐 하면 ‘이상하다. 내가 그런 예수를 믿다니, 십자가 죽고 부활해서 죄를 그의 피로 용서받다니. 그걸 내가 다 믿느냐?’ 이것이 매일같이 새삼스럽게 소스라치게 놀랄 일로 다가와야 돼요. 놀랄 일로! ‘내가 그거 아는데.’ 안다는 말 하면 안 돼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 이게 말이 안 되지. 남이 믿는 것은 미쳐서 믿는다 하지, 미치지도 않은 내가 왜 믿지? 이거는 주님의 계획이구나. 미치겠네. 정말. 이제는 내 맘대로 못 살고 조져놨어. 어떻게 내 인생인데 주님이 왜 개입하지? 나를 어떻게 만들려고? 주여 왜 찾아오십니까?’ ‘너 지금 방금 무슨 소리야?’ ‘나 혼자 한 소리야.’ 하는 그런 울부짖음이 계속 나와야 된다 말이죠.
왜 그렇게 나와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매일같이 그런 장난질을 치셔요. 매일같이 제자들에게 장난을 치듯이 오늘도 우리 삶 속에 계속 장난질 치십니다. 막상 일이 벌어져서 답답해서 해결책이 없어 머리 싸매고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나 이제 약 먹고 자살할 거야.’ 주님이 “재밌지? 흥미로워. 내가 사흘 만에 일으켜줘?” ‘일으켜 주옵소서.’ “그러니까 내 말을 오해한 거야. 네 아들 성적 떨어졌어?“ ‘떨어졌어요.’ “사흘 만에 일으켜줘?“ ‘일으켜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네가 속한 세상은 내가 속한 세상과 다르다.“라는 말을 내가 느낌이 온다는 그것이 이게 웬 기적이냐 이 말입니다.
내가 속한 세상과 주님이 속한 세상이 전혀 다르다는 그것이 왜 다른 사람은 못 느끼는데 난 매일같이 그게 느껴지냐 이 말이죠. 제자들이 고민하거나 걱정할 틈이 없어요. 매일같이 제자들을 조지고 또 살려주니까. 고린도후서 4장 이야깁니다. 주의 성령이 오기 전에는 난 매일같이 죽어있는 것이고 매일같이 주님은 나를 다시 생명을 주고, 그러니까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이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나를 떠나시질 않네. 늘 관여하시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자들은 아까 이야기했죠.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한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사람과 사람하고 비교한 것도 아니고 제자와 성도의 삶은 맨날 누구와 비교한다? 주님과 자기를 매일같이 비교 당하는 그 삶을 주님 앞에 지금 당하고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가락-요한복음 2장1(단절)140515b-이 근호 목사
자, 계속해 봅시다. 지금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참 미묘한 이야긴데요.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십 육년 동안 지은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짓겠다.” 할 때에 제자들이 “어떻게 사십 육년 동안 지은 것을 사흘 만에 짓겠습니까?”라고 한 거예요. 그 말은 제자들이 속해 있는 단어, 언어, 개념,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들끼리 살아있는 세계에 소통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자기들끼리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죽어 있는 건데 자기들은 뭘 해도 살아있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인간이 성전을 사십 육년 동안 지었고, 살아있는 인간이 그게 무너지면 사흘 만에 못 짓는다고 보이고, 그런데 살아있는 인간들끼리는 전부 다 자기들이 정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정상이지? 미치지 않았지? 우리는 옳은 거야.’ 자기들은 정상인 거죠.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걸 통째로 비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2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죽은 자부터 출발하는 지점이 지금 죽은 자 되기 위해서 죽음의 세계 안에서 죽은 자가 되거든요. 그러면 왜 죽어야 되는가. 그걸 알리기 위해서 같이 죽은 자의 세계들을 전부 다 끌어당기는 거예요. 끌어당기는 중에 하나가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라는 그 단어 사용.
46년 지어도 사흘 만에 짓겠다. 할 때 자칭 살아있다는 자들에게는 그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46년 지었는데 어떻게 사흘 만에 하는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 속에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자기의 업무를 여기 성전 건물에다 이걸 대입을 시키는 겁니다. 본인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을 집어넣지 않고 생각하는 성전은 애초부터 성전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 어렵죠? 우리의 성전 같으면 건물만 있으면, 예배당, 대지 있고 건물 있고 시간 맞춰 제사 드리면 성전인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그게 바로 죽은 자들, 저주받을 자들이 기껏 생각하는 성전의 한계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문자로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다 치수재서 그대로 헤롯 성전, 솔로몬 성전 지어놓고 ‘이것이 하나님이 지시한 바로 그대로의 성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죽어야 마땅한 성전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묘사한 겁니다.
제자들은 자기 죽음의 영역에서 탈출할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세상에 있는 교회 다녀서 구원받는 방법은 일체 없어요. 다른 요소가 개입이 돼야 되는데 그것은 뭐냐 현재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이 죽은 자에다 우리 말고 따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분이 우리 죽은 몸에 개입하시면 우리가 성전의 일부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2장의 성전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 믿고 그 다음에 선지자 있고 이렇게 자꾸 자꾸 있으면 마치 존재개념으로 생각하잖아요. 머릿돌 있고 주위에 벽돌 갖다 붙이듯이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모시고 예배당 시작해서 목사, 장로 벽돌 붙이고 그리고 돈 많이 내는 장립집사 이름 써서 예배당 지면 그게 예배당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런 존재적인 개념이 아니고 그 머릿돌 자체가 바로 그런 식의 예배당, 그런 식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죽은 인간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성전개념이라는 것을 지적당할 때 그것이 바로 이미 하나님의 성전에 합류된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하신 말씀을 이해 못하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예수님의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성전 대목만 믿고 나머지는 또 몰랐다가 아니라 어떻든 성전 대목뿐만 아니고 나머지 주의 말씀까지 휑하고 다 통하듯이 다 뚫어버렸더라. 라고 했으니까 이 성전개념은 보통 개념이 아니죠.
‘아! 성전개념 살펴보면 예수님 하신 모든 말씀, 더 나아가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 그 어렵다는 요한계시록 말씀까지 요 안에 그 해답을 알 수 있는 열쇠가 포함돼 있구나.‘ 하는 것을 감안할 수가 있죠. 그러니 우리가 요걸 놓치면 안 돼요!! 성경 전체를 다 풀 수 있는 비법이 요 안에 들어있은데, 제자들이 그랬거든요. 성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요거 알았더니만 이 말씀뿐만 아니고 나머지 모든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 설교, 산상설교 전부 다 통으로 알아버렸다 말이죠.
그 비법을 우리도 웬지 궁금해지네요. 궁금한 만큼 이걸 풀어내는데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해요. 얼마나 난해한지 난해한 그것을 논리로 설명하기 전에 우선 어려울 때는 제가 결론부터 먼저 적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 비유를 하시면서 ‘그러면 성전이 뭡니까?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누굴 말합니까? 성전은 어떻게 만듭니까?’ 이러한 질문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라 하는 것을 보여주죠. 옛날 우리가 죽은 인간들 집단끼리 생각했던 그 성전, 그 성전개념하고 다른 겁니다.
해답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네가 해답이다. 네 자신이 해답이다. 물론 예수님이 합류된 우리죠. 성전을 보고 난 뒤에 여기 14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했잖아요? 요 대목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기존 성전을 일단 성전으로 인정하시고 그걸 시장터로 만든 것에 대해서 장사 터로 만든 것만 거기서 떼 내면 다시 정상적인 성전으로 ‘내가 봐줄 수 있다.’ 라는 것처럼 여겨지잖아요. 진짜 이 성전만큼은 바른 성전 맞는데 다만 장사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들어있으니까 나가세요. 나간 후에는 역시 성전은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하시는 것처럼 행동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런 행동하신 그 말이 맞다면 17절의 말씀이 연결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대목이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그럼 이 대목은 무슨 대목이냐, 시편 69편 8절~10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내게 미쳤나이다 네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라고 돼 있죠.
뭔가 시편 69편의 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뭔가 일이 순탄하게 잘 진행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죠? 주님이 일을 뭔가 하려고 할 때 자꾸 그것이 주위에서 오해하고 있다는 그 대목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69편의 대목과 요한복음 2장의 대목이 연결이 너무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그 난해한 것을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성경구절 하나 먼저 요거 설명 드리고 그 다음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게 굉장히 난해해요.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보면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리라” 이 대목. 이 대목을 푸는데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리라” 이 말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이 뭘 떼 내냐 하면 앞에 “세례 요한 때부터”를 떼 내고, 뒤의 말에 신경을 바짝 써요. 뒤의 말이 뭐죠?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리라” 거기서 지금 3가지잖아요? 3토막 내면, 세례 요한 때부터 ①,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②,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리라 ③, 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성경 볼 때 왜 봅니까? 천국 가려고 보잖아요. 천국 가는 방법만 눈에 확 들어오면 그걸로 끝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 보니까 “침노를 빼앗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하잖아요. 여기 침노하는 자가 빼앗죠. 그러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침노해서 빼앗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천국을 공격하는 것은 지옥 아닙니까? 마귀가 공격하는 것 아닙니까? 천국에 누가 살고 있어요? 천국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고 있죠. 그럼 하나님 나라를 공격한다는 게 누굽니까? 마귀가 하는 짓이죠. 그럼 마귀가 되어야 마귀 편이 되어서 천국을 공격하게 되면 천국을 접수한다? 우리가 빼앗는다? 우리가 조폭입니까? 동성 로 파, 명동 파, 조폭 이예요? ‘야, 우리 나이트클럽 접수하러 가자.’ ‘왜?’ 침노하는 자가 가지니까. 빼앗아 가지니까.
결국 예수님이 이 말씀 듣기 전에 취지가 뭐냐 하면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천국에 못가고 강제로 빼앗는 자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천국은 있는데 이게 누가 주인인지 유보된 상태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놈이건 빼앗는 놈이 임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죠?
이 대목과 요한복음 2장 대목과 방금 읽었던 시편 69편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이런 관계가 있습니다. 이건 아까부터 설명했지만 다시 해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속한 영역과 사람의 영역이 분명히 다르죠? 다른데 예수님께서 ‘너희 세계에서 알아서 나와라.’ 하면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꽁꽁 묶여서 못 나오는 거예요. 나올 수 없어요.
그러면 사람이 자기 영역을 나올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 온갖 구약성경 율법, 모세로부터 말씀을 잔뜩 들어 놓으면 그 말씀은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서 그 말씀을 듣게 되면 그 말씀은 결국은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기껏해야 도배지로 사용될 뿐이죠. 예를 들면 바깥에서 우리보고 ‘야, 나와.’ 하는데 옆에 만약에 대장이 못 나가게 지키면 어떻게 합니까? ‘너 나오기만 하면 죽여 버린다.’ 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오라, 오늘도 나오라. 3번, 다음 날에는 ‘빨리 안 나오고 뭐해. 빨리 나와.’ 하면 오늘도 주님께서 나오라고 7번 이야기했다. 이걸 온 천장에 도배하겠죠.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천국 이예요. 이게 바로 뭐냐, 성전이다 말이죠.
주님께서 딱 와 보니까 유대 세계, 이스라엘 세계가 뭐냐 하면 완전히 자체적으로 뭘 만들어 놨어요? 완전히 천국도 만들고, 성전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하나님과 도킹하는 장소에요. 천국과 지상이 유일하게 도킹하는 장소에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구약 내내 성전의 개념의 변천을 잠시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회막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탠트였죠.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서 ‘내가 사람의 대표자와 만나겠다.’ 했습니다. 그 회막에 나타난 분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 이름 이예요. 하나님의 이름 이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만나려면 준비 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의반복이 돼요, 양이 죽어야 피가 있어야. 피가 없이는 만나지 않습니다. 흠 없는 제사를 드려서 피로 하게 되면 주께서 만나줘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네가 약속을 잊지 않았구나.’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 안에서만, 자살하면 안 되고요. 주께서 유발한 죽음 안에서 합류되지 아니하면 주께서 만나지 않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의 자기 떡과 자기 살을 자기가 먹지 제자들에게 주긴 왜 주느냐 말이죠. 그렇잖아요. 자기 떡은 자기가 알아서 먹고 너희 떡은 알아서 먹으면 되지 떡을 왜 줍니까? 다른 떡은 자기가 알아서 챙긴 떡이지만 주님의 떡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아서 죽임을 당한 그 떡이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 떡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예수님 떡은 언약의 완성이 들어있는 떡 이예요. 용서가 들어있는 떡이라 말이죠.
그 떡은 어떻게 생겨요? 예수님의 떡과 살은 어떻게 생깁니까? 아버지가 죽이는 죽음 안이 돼야 예수님은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지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죽음에 제자들이 참여되지 아니하면 주님은 천국이고 처소까지는 어림도 없습니다. 죽지 않고서는, 자기가 알아서 죽으면 안 돼요. 자살하면 안 돼요. 순교한다고, 유 병언 앞에 순교한다고 나서면 안 되고 그렇게 죽으면 안 되고, 예수님에 의해서 죽어가는 죽음 속에 합류할 때만 아버지와 하나가 돼요.
“내 떡을 먹어라” 떡 먹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그 죽음을 떡이라고 줬잖아요. 그 떡 따라 주님의 성령이 따라오게 돼 있어요. 너희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너희로 하여금 내가 준 떡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고야 말리라. 그래서 구원받을 때 네가 행했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끈질긴 찾아오심의 공로인 줄 알아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갔잖아요. 그게 뭡니까? 바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거예요. 주시는 게 뭡니까? 내가 아버지께 받았던 그 죽음에 자기를 합류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6장 8절에 나와 함께 죽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거예요. 죽음 없이 사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회막에서 여호와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신약에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그거부터 이미 상징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사건이 주어져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알랭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이라는 글도 있습니다만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셈해서 정리해서 분류해서 만들어내지 못해요. 그걸 찢어버리고 찾아 와야 사건입니다. ‘내가 이 이삭을 바쳐서 내 믿음을 보여야 구원을 받겠지?’ 라는 생각을 아브라함은 도저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찢어진 거예요. ‘네 아들을 바쳐라.’ 정말 하필이면 저에게,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리브가가 시집갈 때 ‘그저 시아버지 잘 모시고 잘 살아라.’ 이게 아니고 ‘네가 천만 인의 어미가 된다.’ 이건 사건으로 찢어 들어온 거예요. 그냥 우리가 세상 살고 떡이나 먹고 살면 되는데 ‘너는 예수의 피를 믿어야 되는 인간이야.’ 이거는 사건으로 찢어 들어온 거예요. ‘그 피가 너를 구원하지, 교회가 너를 구원하는 게 아니야.‘ 그게 찢어 들어와야 돼요. 구원 파는 아직 못 찢어 들어왔어요. 이건 물에 빠져도 안 ,돼. 십자가의 능력으로 찢어 들어와야 돼요. 언약의 완성체가 뾰족하게 찢어 들어오는 거예요.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 다 만족한 상태에서 그냥 우리에게 찢어서 적용시켜 버리는 겁니다. 고렇게 한 장소가 뭐다? 그게 성전 되는 거예요.
회막이 있는데 그 회막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언약궤가 들어 있습니다. 그 언약궤는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하늘로 안치가 돼 버려요. 언약궤 있는 곳은 천국이고 언약궤 없는 곳은 지옥이고. 주 기철 목사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언약궤입니다. 주 기철 목사 언약 아무 상관없습니다. 언약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니까 예수님 계신 곳이 천국 이예요.
내가 살기 좋은 곳이 천국이 아니고 언약궤가 있어야 돼요. 언약을 모르면 천국도 없어요. 언약이 없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성경대로 해도 사람들이 불만이 많아요. ‘나는 어디 갑니까?’ 가긴 어딜 가요? 그냥 갇혀 있지, 마귀가 지키고 있는데 가긴 어딜 가요? 마귀가 지키고 있으니까 못 나오지. 그냥 성경책으로 도배를 다해요. 그 인생 전체가 완전히 도배를 했어요. 기도 46만 5천 번, 성경 읽기 1440번, 도배를 해도 그건 안 돼요. 16년 동안 해도 구원 안 생겨요. 십일조 바치고 헌금 바쳐도 구원 안 생기고 누구만 좋은 일시키지, 뭐 되지 안 해요.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을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거든요. 항상 언약을 나타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가지고 오실 때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은 죽음의 반복! 어린양의 반복! 그거 제사를 반복하라고 언약궤를 주었고 언약궤에 뭘 바른다? 피를 발라야 돼요. 언약궤에 언약의 피를 바름으로써 언약궤로부터 자비가 흘러갑니다. 용서가 흘러가서 1년 치 모든 죄가 한꺼번에 다 탕감이 돼요. 참 감사하죠. 우리는 1년 치가 아니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죄를 젤콤! 종근당에서 나온 젤콤, 한 번에 기생충이고 편충이고 다 날라 가 버려요. 한 번에 단 한 개를 먹었는데 당뇨처럼 계속 약을 먹는 게 아니고, 고혈압처럼 매일 먹는 게 아니고, 한 번인데 다 날라 가 버렸어요. 그게 언약입니다.
고 효과를 인정할 때만 그게 하나님과 만나 주시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이뻐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뻐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이뻐요. “내 기뻐하는 자요.” 아들 보고 자기 기뻐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택한 자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남겨 준 그 자들, 그러면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언약궤가 있는 곳 이예요. 아직도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제한된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대가 아직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언약궤가 상자로 돼 있으니까. 그럼 만약에 언약궤 없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이상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이 필요치 않아요. 이 언약궤가 상자였던 시절은 끝났으니까. 요만큼의 상자로 있던 1미터, 1미터의 정사각형의 상자의 시절은 불타버리거든요. 언약궤는 바벨론에 의해서 불탔어요.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 자신의 상자를 불태워 버린 거예요.
그러면 언약궤를 대체할 뭐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언약궤는 옛날 언약에 속한 것이고, 새 언약에는 새로운 걸로 대체해야 되잖아요. 새로운 걸로 대체할 때 보면 스가랴에 보면 성전은 뭐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세워지지 않고, 오직 뭐로 세워진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세워진다 했어요.
그러면 성령으로 세우면 되지 않겠느냐? 성령으로 세워질 때 치수재서 세워진 그 성전의 구조가 에스겔 45장부터 죽 나오잖아요. 뭐 종료나무 문양을 만들고 치수재고 방 30개가 어떻고 에스겔 읽는 사람들 얼마나 지루하다고요. 전부 다 넘어가요. 봐도 뭔지 모르고. 천사들이 와서 치수를 재는데, 그것은 뭐냐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전이거든요.
사람에 의해서 만들려면 벽돌 구워서 하면 되는데 이게 사람 손이 아니고 성령이 만든다면 성령으로 만들어도 성령께서 갑자기 팔이 나와서 돌 깨고 나무 운반하고 그렇게 합니까? 천사들이 머리에 수건 두르고 천사들이 척량해서 하다가 또 기초공사 잘못해서 삐딱하게 넘어지고 천사들이 건물을 그렇게 짓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지상에 있던 시간과 공간의 특정지점에 특정 장소에 특정 모양새에 모든 성전은 다 실패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게 왜 실패냐? 그들이 성전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성전만 있으면 우리가 산다. 그걸 줄여버리면 우리가 산다. 줄이면 우리는 살아야 되겠다. 더 줄이면 살고 보자. 그게 잘못이었던 거예요.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멸망하기로 돼 있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알아요. “내가 율법을 준 것은 너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어디 아래 있게 함이라? 저주 아래, 성전 법, 성전 치수 법, 모든 것이 ‘성전 짓다가 저주 받아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걸 생각을 못 했어요. ‘어린양 잡다가 저주 받아라.’ 그런 말씀인줄 상상도 못한 겁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죄인 줄 몰랐다가 오시고 난 뒤에는 비로소 죄로 들통 나는 것처럼 인간이 하는 짓은 인간이 뭘 생각 못하느냐 하면 영적인 마귀라는 것을 생각 못하고 마귀 빼놓고 우리끼리 주의 말씀 원고 삼아서 그걸 설계도 삼아서 그대로 만들어내자고 시도한 거예요. 그 방식이 바로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하게 한 그러한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 아까 마태복음 11장 다시 해봅시다. 마태복음 11장에서 뭐를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세례요한 때부터” 이걸 놓치면 안 돼요. “세례요한 때부터”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전의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했겠어요? 생각 안 했겠어요? 생각했죠. 생각을 왜 안 해요? 사람이 사는 목적이 천당 가는 건데. 천당 간다는 말은 어폐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천당 간다 하지 않고 이 땅에 하늘나라 세워진다는 그런 천국 개념으로, 메시아 나라, 다윗 나라가 오니까. 이 땅에 현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진짜 이상적인 다윗의 나라가 곧 천국이라고 본 겁니다. 왜, 하나님이 거기 임하니까. 하나님 계신 곳이 천국이니까. 우리가 제사장 나라 되고 다른 민족을 통치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꿈꾸던 세상, 그것이 바로 세상의 마지막 모습 이예요. 현재도 지금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그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까지? 세례요한 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게 진짜 천국이라고 확답을 한 거예요. 이제는 뭐냐, 성전 있지, 성전에 누구만 오면 됩니까? 메시아만 오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만만의 플랜카드 준비하고 다 준비하면 되는 거예요.
메시아가 올 때 원하는 것, 전에 보니까 구제를 안 해서 메시아가 삐쳤다 하니까 이제는 안식일에 구제를 하고 그러는 거예요. 왜냐 예레미야 때도 안식일에 너희가 오락을 하고 어려운 사람을 학대 했다. 하니까 예레미야에 나오니까 그들은 하지 말라 하면 안 하면 되니까 안식일 날 오락을 금하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면서 구제하면서 보란 듯이 우리는 두 번 실수하지 않습니다. 안전점검 다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물에 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미 사건을 한번 일으켰기 때문에 그걸 교훈 삼아서 역사는 교훈을 주거든요. 우리는 교훈 삼아서 정신 차려서 제대로 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해서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한 겁니다. 언제까지? 세례요한이 올 때까지.
그런데 세례요한이 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세례요한의 것은 간단해요. 그래야 마태복음 11장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 = 심판의 나라, 심판의 날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개하라고 외치죠. 심판의 때가 온 거예요. 그들은 지금 심판의 때를 기다린 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거예요. 복 주기만 기다린 거예요. 왜, 이 세상에 어느 나라만 율법 갖고 있다? 자기 나라만 갖고 있는 거예요. 특히 이사야 53장에 고난 받는 종이 나오죠. 고난 받는 종이 누구냐 하면 본인들 이예요. “우리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고” 그게 자기 본인들의 집단을 단순화 시키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사람과 사람하고 비교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과 자기를 비교해서 설마 이방인들을 구원하겠나? 약속은 그게 아니다. 누구만 구원한다? 우리 택한 아브라함의 자손 우리만 구원한다고 한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대화할 때 바리새인이 뭐라 했습니까? 시비 걸지 마라.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할례를 했고 저들에게는 할례가 없다. 할례행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서 끊어진다 했습니다. 그들은 끊어진 자들이고 우리는 할례 행했으니까 우리만 구원받는다 했죠.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마음의 할례 해야지, 육체에 하는 할례는 소용없다 했거든요. 진작 그래야지, 이제 와서, 마음에 무슨 수로 할례 합니까? 여기는 돈 주고 하면 되지만 마음에 어느 부분에 합니까? 될 이야기를 해야지, 사도바울은 될 수도 없는 이야기를 해요.
세례요한 봅시다. 세례요한은 뭐냐 하면 그날이 유대나라,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날이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그래서 세례요한이 순교당한 거예요. 일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나라, 짐승의 나라로 간주했어요. 세례요한이 뭘 믿고 이렇게 한 겁니까? 오실 분이 바로 이런 취지로 오시기 때문에 자기도 소리로서, 하나의 스피커로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기다리는 건 하늘나라지만 실제로 온 것은 너희들에게는 멸망만 주어진다. 이런 취지와 동일하게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지금 세례요한 때부터 침노를 당한다. 무너져야 된다. 하지만 무너져야 된다는 사람만이 천국을 들어갈 사람이다.
이 말은 뭐냐, 예수님 본인이 세례요한 뜻을 따라서 자기 뜻에 따라서 천국을 왕창 무너뜨리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아무리 그럴싸하게 종교적인 흉내를 내도 앞에 마귀가 입구에 지키고 있는 이상은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다 도배지로밖에 안 되는 거예요. 성전 짓고 하는 것도 장난감이다. 이러한 짓거리는 바로 출애굽기 32장에 모세가 산 위로 올라가고 난 뒤에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땅 위에서 무슨 짓 했습니까? 가락지 빼고 돈 빼고 해서 뭐했습니까?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여호와 하나님이다.’ 용어는 잘도 갖다 붙여요. 예수님은 우리 교주다. 잘도 갖다 붙이는데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죠. 언약이 있으려면 피가 있어야 되잖아요. 피가 없는 거예요. 피가 만약에 있다면 자기는 늘 회개만 할뿐이죠.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 안 할 수가 없거든요. 죄 없이 맘대로 살자. 이런 것은 회개 안 된 상태에요.
그게 32장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 모세에게 하나님이 명하기를 너희들이 백날 여호와, 여호와 해봐야 그게 전부 다 너 자신을 위한 여호와였으니까 그건 결국 우상숭배에 지날 수밖에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이걸 하나님이 직접 와서 지시를 했다면 우리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뭘 깨달으란 말 이예요? 헌금하고 기도하고 뭘 해도 앞에 뭘 두지 말라는 겁니까? “자기를 위하서” 하지 말라 말이죠.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마귀가 이미 그런 자기를 위한 인간들을 집단해서 모아놔서 이미 통제를 했기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 자기를 위하지 않을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안중근 의사, 강감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를 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 살지 않는 것은 제자들도 몰라요. 주님이 지금 무슨 소린지 모르고 주께서 왜 그렇게 장사하는 사람을 내쫓는지도 몰라요. 그게 하늘나라를 붕괴시키는 무슨 작업인지 몰랐어요. 성전을 부수는 작업인지 몰랐어요. 그 사람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줄 알았죠.
그게 청소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성전을 성전이라 여기는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보고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는 사람들 이예요. 이제 이해가 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봅시다. 시편 69편 8절에 “내가 내 형제들에게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뭔가 왕따 당했죠? 따돌림 당했죠? 분명히 그들은 누가 봐도 형제고 누가 봐도 가족이고 한 이스라엘이라 생각하고 친구인데 어떻게 나를 따돌리는 거예요.
자, 그러면 물어봅시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돌렸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따돌림 받도록 의도적으로 행동을 유발시켰습니까? 유발시킨 거예요. 왜, 시편 69편을 이뤄야 되니까. 야~! 예수님 교묘하게, 예수님은 아예 적들마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충분하게 활용해 주시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쓸데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마귀라 할지라도. 이단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다 필요한 재료가 되는 거예요. 꼭 공예 하는 예술가 같아요. 뭐 하나라도 재활용해서 작품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이게 뭐냐 하면 오늘 수원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이걸 ‘터’라 해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란 뜻에서 이 터에서 뱀도 필요하고 아담도 필요하고, 그런데 인간은 터는 생각하지 않고 ‘나를 왜 힘들게 합니까?’ 나 중심으로 생각해 버리면 마귀는 괜히 있고 선악과는 괜히 심어놓고 우리는 괜히 쫓겨났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행위로 어떻게 하는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게 돼 버려요. 그런데 터를 생각해서 우리가 거기 배치돼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모든 것은 날 위해서가 아니고 누굴 위해서? 애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걸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걸 말씀을 위하여. 창세기 1장에는 말씀이 없어요. 요한복음은 말씀을 위하여, 마지막 때 등장시켜요.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에 의해서 모든 것이 천지 창조된 겁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배치된 배치물이고 모든 게 짝을 이루어서.
시편 69편 봅시다.
9. for zeal for your house consumes me, and the insults of those who insult you fall on me.(NIV)
9. For the zeal of thine house hath eaten me up; and the reproaches of them that reproached thee are fallen upon me.(KJV)
9. For zeal for Thy house has consumed me, And the reproaches of those who reproach Thee have fallen on me.
9. 당신 집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당신 향한 욕설이 이 몸 위에 쏟아져,(공동번역)
9. 주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욕하던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떨어집니다. (표준새번역)
9. 주의 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키고 주를 모욕하는 사람들의 욕설이 내게 쏟아집니다.(우리말 성경)
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개역개정)
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개역한글)
9. あなたの家を思う熱心がわたしを食いつくし、あなたをそしる者のそしりが/わたしに及んだからです。(구어역)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내 형제들과 부모들도 나를 비난하더라. 비난하는 이유가 뭐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으로 인하여 내가 비난 받았다. 그러면 여기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주의 전이 진짜 전인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주의 전이 진짜 전인지 한번 비교해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비교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세상 사람들이 마귀가 지키고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인간들끼리 협의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성경을 참고로 해서 충실하게 따라서 만들어 낼 거잖아요? 만들어 냈으면 주님 쪽에서 어느 게 옳으냐. 그르냐 하려면, 저쪽에서 성전을 만들었으면 주님 쪽에서도 성전을 어떻게 해야 돼요? ‘그게 성전이 아니고 이게 성전이야.’ 하고 따로 만들어야 되잖아요. 주님 것이 없다니까요. 주님 것이 없어요. 이게 묘~하죠. 사람이 어느 게 옳고 어느 게 그른가 비교하려면, 네 차가 좋은가. 내 차가 좋은가. 하려면 둘 다 차가 있어야 되잖아요. ‘네 차는 내가 보니 완전히 똥차네.’ 그러면 저쪽은 뭐라 합니까? ‘네 차는?’ 하면 ‘내 차는 없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이건 반칙 이예요. 지금 주님께서 반칙을 쓰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우리 성전 비난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성전은 뭔데? 내놔봐라.‘ 하면 주님은 안 내놔요. 왜냐 하면 인간들의 성전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성전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은 따로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를 물고 늘어져요. 이걸 무슨 작전이라 하느냐, 물귀신 작전이라 해요. 주님은 우리가 죄인인데도 외면하지 않고 자꾸 닦달내시는 이유가 우리는 죄인으로 닦달내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낚싯대로 건지는 게 아니고 우리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몸이 네 몸이지?‘ 하고 자신의 몸이 저주받는 자신의 몸, 피 흘린 몸을 가지고 이게 우리 몸이래요. 이게 바로 성전을 좋아하다가 결국 주님 앞에 저주 받아야 될 마지막 우리의 진짜 모습이 이 모습이래. ’네가 성전 좋아했지?‘ 그게 저주받을 모습이라는 것을 주님이 십자가 자신의 몸으로 우리 몸을 대신해서 보여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약을 위반한 게 아니고 위반한 그것이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활용되죠. 그것이 필요했던 겁니다. 우리가 엉터리로 사는 그게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죄 짓고 사는 게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내 자신 따로 있고 바깥에 좋은 것을 가져다가 내 것을 마저 채우면 우리는 괜찮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후벼 파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건전한 껍데기는 다 깨지고 우리 안에 마귀의 속성이 다 노출될 때까지 우리를 드릴로 드르륵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주여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걸 사울에게 일부러 한 게 아니고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는 율법에 완전한 사람이고 예수 잡아 죽이는 것이 자기가 하나님께 영광인 줄 알고 그렇게 했던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바로 그렇게 했던 것이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 같은 놈도 구원받는데 너 같은 놈도 구원받는다고 외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겁니다.
따라서 성전이 있어야 되고 성전이 있는 성전은 문제점을 드러내야 되고, 그 성전이 어떤 문제점이 있느냐 바로 ‘어디 감히 거룩한 성전을 손 대? 그런 네가 죽어라.’ 하고 성전을 사모하는 자들의 집단에 의해서 예수님이 성전 건드렸다는 죄목으로, 예수님 죽었던 죄목이 그거에요. 성전 시비 걸은 것 때문에 죽었어요. 이 대목 가지고 죽었다니까요. 고소할 때 고소 주 내용이 성전을 헐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로 죽은 거예요. 맘껏 우리 죄가 쏟아져야 돼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그때 성전 사수하려고 한 했는데요.’ 우리가 성전 사수하려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마귀가 지키고 있는 이상, 다시 말해서 성령이 마귀를 이기고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바리새인이 성전을 찬양하면 우리도 거기다 헌금하게 돼 있고 박수치게 돼 있고 야! 참 잘 졌다.‘ 외치게 돼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두 세 사람으로 함께 있는 것이 교회라 하지만 막상 길에 가다가 한 250억 짜리 300억 짜리 건물을 보게 되면 파이프 오르간 소리 들리면 은혜가 절로 되고 성가대 가운 입고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천사가 내려와서 부르는 것 같고 명동 성당 가서 보이지 않는 뒤에서 합창단 들어오게 되면 이거 천국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앞에서 조롱 흔들고 있지, 그거 보면 야! 한 달 일주일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세상에 돈 벌러 가고 와서 풀고 할 만한 생각이 들 거예요. 우리는 박수 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46년의 공로에 대해서 우리가 함부로 흠할 수 없어요. 너무너무 잘 지었고 너보고 지으라 하면 우리도 그렇게 못 지을 정도로 기발한 천재들의 작품이 집대성 된 게 성전입니다. 온갖 예술적인, 과학적인 기술은 거기 다 모아져 있어요. 우리보고 거기 하라 하면 ‘나 무시해서 못하겠다.’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뭡니까? 제자들도 감탄하고 있었어요. ‘와~ 주님 성전 보세요. 잘 지었죠?’ 주님은 뭐랍니까? ‘46년 동안 지었대?’ ‘예’ ‘헐어라.’ ‘저걸 헐어요?’ 내가 삼일 만에 짓겠다.‘ 제자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역시 주님은 짱이다.‘ 왜,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단지 사흘 만에 지으니까. 아마 제자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미장 담당 천사가 2600, 그 다음에 콘크리트 담당 천사 6500, 아미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기껏 생각해봐야 공간적 시간적으로 멋있어 보이는 우리가 납득이 되는 성전, 그 성전에 꽂혀서 헤어나지 못할 게 뻔해요. 못 헤어납니다. 그게 전부에요. 왜 우리가 아는 지혜로 통하니까. 그 정도 교회 다녀줘야 아! 이게 믿음이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은혜 받으니까.
그럼 그걸 헐란 말은 뭡니까? 결국은 네가 나하고 같이 저주받아 아버지로부터 죽자는 이야깁니다. 결국은. “나만 따라와. 너 나 따라와야 내가 지은 성전에 참여할 수 있어.” 어떻게 따라갑니까? 성전 좋아하고 그 성전 섬겨가면서 네 꼬라지 다 노출돼야 되고, 주님 생각보다 나는 이게 더 좋습니다. 하는 돈으로 치장한 그 성전이 더 좋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몽땅 그것이 뭐로? ‘나는 화인 맞을 놈이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 맞습니다.’ 고백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왜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헐어야 되느냐, 무너져야 되는가. 이유를 알 때 성전만 이해되겠습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부 다 무너져야 될 마귀 안에서 마귀 통치 안의 세상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납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좋다고요? 사람은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한다는 그것도 나를 위해서 붙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는 허약한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를 언급하든, 기도를 언급하든, 십일조를 언급하든, 성경구절 율법을 언급하든 앞에 항상 붙는 게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오니까 주님 곁에 있으니까 같은 주님 같은 친척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날 위해서 하지 않으면 ‘당신 동의 안 해? 주님 다시 꺼져.’ 꺼지니까 시편 69편 9절이 돼 버린 거예요. 옛날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가 위하는 내가 따로 생각하는 어떤 이상적인 게 있는데 그 이상적인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본색이 드러나죠.
지금 제자들이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보고 부러워했죠? ‘보세요. 너무 좋지 않습니까?’ 부러워한 걸 알고 약 올리기 위해서 ‘다 헐어버려라’ 했다고요. ‘헐어버려라’ 할 때 제자들의 느낌이 뭐냐 하면 분명히 우리 선생님은 헐어라 할 때는 자신감, 어떤 자신감? 이것보다 더 잘 지을 수 있는, 우리 예수님은 유 병언이라. 지금 구원 파는 대한민국보다 유 병언이가 더 좋은 거라.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제자들과 누가 한 통속 이예요? 결국 바리새인과 같은 한 통속인 거예요. 똑같아요. 누굴 위하여? 우리가 기대했던 나를 위해서.
그게 바뀌겠습니까? 안 바뀝니다. 다만 우리가 바뀔 필요는 없어요. 그런 내가 그걸 유지하면서 그랬기 때문에 ‘나는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같이 죽고 주님은 죽이는 그 주님에 의해서 매일같이 살아난다는 그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 세워진다는 말은 성령 이전에 반드시 메시아가 먼저 와야 돼요. 메시아 오지 않는 성령은 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우리 했죠?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간다 하고 난 다음에 성령 세례주시는 분으로 등장하잖아요. 이처럼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 완성을 해야 성령이 와요.
그러면 스가랴에 있어서 또 에스겔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짓지 않고 성령으로 진다는 말은 다른 말로 메시아가 짓는다는 말 이예요. 그런데 그 메시아가 짓는다는 말은 그 재료가 뭐냐, 죽어 마땅한 우리를 재료로 삼아 성전을 짓기 때문에 그 성전 안에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주여 이렇게 구원받은 것은 다 주님의 은혜요, 공로입니다. 천하에 무식한 게 우리 말고 또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껏 뭘 봐도 다 ‘나를 위하여’ 우상 숭배자 같은 나를 위하여, 남 욕할 거 없어요. 바리새인이 좋으면 우리도 다 좋아요. 그걸 헐라 할 때 주님께서 우리 빼놓고 저쪽 보고 하라는 줄 알았지. 우리도 포함해서 헐라고 한 걸 모르고 우리는 나를 위해서 하려면 난 안 헐어져야 내가 유지되잖아요. 그 나를 위해서 유지되는 그것이 바로 그게 가짜 성전이라는 거예요.
이제 널 위해서 살 필요가 없어요. 왜, 주님을 위해서만 주님께 필요하지, 날 위해서는 천국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게 될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주께로부터 성령이 와버리면 나를 위해서 한 그것이 주를 위해서 필요한 재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휴, 어려워라. 내가 말해도 어렵네. 날 위해서 한 그것이 죄로 드러나는 점에서 꼭 필요한 거예요. 평생 동안 날 위해서 삽시다. 그리고 마땅히 죽읍시다. 자살하지 마시고 주께서 매일같이 죽이시는 것, 예를 들면 바나나 먹이고 죽이고, 피자 먹이고 죽이고, 하여튼 맘껏 먹이면서 죽이고 편히 쉬게 하고 골프 치고 죽이는 방법, 이게 다 죽이는 방법 이예요. 왜, 그 안에서 날 위해, 날 위해, 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그냥 사세요. 사시면서 그게 나를 위한 우상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주님만 높이는 성전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나안 혼인잔치나 성전이나 죄를 용서하는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또 다시 알려주고 그걸 보여주는 하나님의 기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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