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장(빛과 그림자)140403a-이 근호 목사
지난시간까지 다니엘 했는데 오늘 다니엘을 한번 총 정리할까 생각했다가 접었어요. 다니엘을 총 정리하면 더 어려워져요. 다니엘은 정말 어려운 책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정리 안 하겠다고 하면서도 요한복음과 또 관련성이 있어요. 구태여 정리할 필요 없이 요한복음을 하다 보면 다니엘 내용이 연결이 됩니다. 왜냐 하면 다니엘은 구약이잖아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성경해석 어떻게 하느냐 할 때 여기가 구약이고 이게 신약이 될 때 그냥 바로 가지 마시고요. 크레인을 올리라 했죠. 골리앗 크레인, 울산 현대 중공업에 있는 거, 이걸 올리고 다니엘에서 죽 올려서 이쪽으로 이동시켜요. 우리는 여기 있으니까 우리가 지킨다. 못 지킨다. 어떻게 할 게 아니라 주님께서 구약을 가지고 자기 크레인에다 가버려요. 골리앗 크레인 하지 말고 다윗 크레인 합시다. 다윗 크레인에다 옮겨서 이렇게 툭! 여기다 놔버리죠.
우리 쪽에서 신약을 가게 되면 구약을 지켜서 나를 경유해서 신약을 이해하는 우리 방식이라면 이건 틀렸고, 예수님이 구약에도 계시고 다니엘과 함께 계셔서 예수님 쪽으로 이렇게 와서 이렇게 주게 되면 우리 쪽으로 가는 것과 이렇게 마주치겠죠. 마주치면서 아! 내 해석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엉터리 해석이라는 것을 아는 방식으로 주님의 해석을 우리한테 제공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 이런 해석으로 아는 것은 결국 마주침이 어떻게 마주치느냐 하면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고 이쪽에 크레인에서 예수님의 개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죠. 정체성하면 어려운 말 같으면 ‘누구냐? 당신 누구세요?’
어떤 사람이 ‘당신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우리가 답변할 내용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 누구세요?‘ 해서 답변할 내용이 없는 것이 우리는 내가 뭔가를 내가 평소에 정리해 있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누구냐고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 대해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거든요. ’그게 아닙니다. 아, 그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했지, ‘나는 키가 몇 센티며 누구며.‘ 이걸 평소에 누가 이야기하면 이걸 그대로 해야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타인의 자극이 없으면 자기를 안 돌아보게 돼 있어요. 인생사는 것이 자극이 없으면 무료해서 자살합니다. 꼭 아프든지 뭐가 일이 꼬이든지 뜻대로 안 될 때 비로소 자극이 되고 오기가 생기고 그 오기가 결국 우리로 활동을 만들게 돼요. 그 오기 활동할 동안에 우리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바로 인생을 만들어내요.
이건 시험적으로 해도 마찬가지인데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아무 냄새도 없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사람이 딱 누워 있으면 시간이 안 갑니다.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자기는 서너 시간 묻혀 있었나, 했는데 벌써 16일간 인가요? 살아있던 사람 나왔죠. 모든 생체리듬이 정지가 되니까 사흘해도 죽는 우리가 16일 있어도 안 죽었어요. 왜냐 하면 모든 것이 정지가 돼 버렸어요. 시간이 정지가 되니까 생체리듬이 정지가 되니까 놀라운 기적이잖아요. 안 죽었거든요. 평소에 16일 동안 우리는 못 살아요. 왜냐 하면 자극을 받기 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잖아요.
전혀 소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 우리는 뭐도 없느냐? 내가 없어져 버려요. 참 어려운 말 했는데 깜깜한 우주에 나 혼자 있으면 나도 없는 존재가 돼요. 내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거울이 있든지 누가 나라고 호명을 해주든지 누가 불러주든지 어! 저건 어디서 나온 소린데? 나 이외, 나 바깥에 내가 조정하지 않는 다른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비로소 ‘나‘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 나 자신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장자가 이야기했습니다. 장자가 꿈에 자기가 나비가 됐을 때 꿈 깨고 난 뒤에 내가 지금 나비면서 장자 꿈을 꿨는지, 아니면 내가 장자이면서 나비 꿈을 꿨는지 그걸 판정할 수 있는 판정이, 제 3자의 판정이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남들이 나를 뭐라고 이야기를 해줄 때 비로소 그때 나를 아는 겁니다. 꼭 ‘아무개야’ 누가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게 아니고 ‘왜 이렇게 행동이 느려.’ 이러면 그다음부터 나는 ‘맞아, 나는 느려.’
오늘 낮에 어떤 분이 그래요. ‘목사님, 참 옷을 못 입습니다.’ ‘맞아, 나는 옷을 못 입어.’ 평소에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비로소 그럴 때 옷을 못 입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자꾸 내가 누군가 알기 위해서 남을 찾게 돼 있습니다. 혼자 못 살죠. 개라도 키우든지 고양이를 키우든지 혼자 못 살아요. 누가 나를 좋아하든지 미워하든지 간에 자꾸 나는 제 3자를 경유해서 나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보기 전에 누가복음부터 봅시다. 요한복음 만만치 않습니다. 누가복음 1장 31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다음에 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보세요. 호명입니다. 찾아오죠. 이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 메시야 임신하겠다고 작심하고 기도한 그런 여인이 아니죠? 그냥 마리아가 알고 있는, 좀 어렵더라도 참아주세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사내를 알지 못하면 애기 못 낳는다는 것을 마리아가 어디서 배웠어요? 마리아 크면서 누구한테 배웠어요? 다른 주변사람들한테 배웠죠. 주변사람들 이야기가 자기라니까요. 자기 정체성 이예요.
지금 요한복음을 통해서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남들이 이야기해줄 때 그게 난 줄 알아요. 뭐냐 하면 아! 여자는 사내와 동침하지 않으면 절대로 아기를 낳을 수 없다. 이게 이미 굳어졌는데 그때 누가 찾아옵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네가 수태를 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회임을 한다 이 말이죠. 감축드릴 일이죠. 임신한다 할 때에 그 천사의 호명이 쉽게 마리아가 수긍합니까? 수궁 못합니까? 못하죠.
바로 요한복음 1장이 그래요. 예수님도 우리의 타인이잖아요. 그리고 예수님 말고 다른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주변에 있는 우리의 가족 모든 사람들이 나의 타인이고 주님 오시기 전에 다른 타인이 너는 이런 사람이야, 너는 이런 정도야, 다 이야기해서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 버려서 나는 그런 줄 알고 있는데 주님이 와서 만약에 우리에게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는 본성적으로 거부하게 되죠.
그러면 나라는 것은 뭐냐 나는 나의 대표가 나가 아니라 그동안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든 어두움의 세력의 하나의 대표자로서 또는 기호로서 또는 상징 표현으로서 아이콘으로서 나는 주님과 그 세계에 마주치는 접점 지점에 서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에요. 이게 마리아에요. 마리아가 많이 당황스럽죠. 그리고 당황에 대한 해결책은 마리아는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접점 지점이라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코미디에 보면 형사하고 범인이 있거든요. 형사가 지하 주차장에서 범인을 잡는데 도둑놈이 어디 갔는지 몰라요. 형사가 권총을 꺼내고 뒷걸음을 치는데 척 뒤를 보니까 도둑놈도 형사 피한다고 뒷걸음쳐서 피하다가 둘이 마주친 게 아니고 둘이 등을 마주 대는 그런 장면 많이 봤죠?
둘이 등을 대니까 주님은 주님 세계, 우리는 우리의 세계, 이 접점 지점! 이것이 바로 성도가 보여줄 전부입니다. ‘아이쿠, 주님 반갑습니다.’ 이럴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가 살아온 인생관하고 주님은 너무나 이건 전혀 이해 못하거든요. 이사야 54장에 보면 흠모할 게 없다 말이죠. 주님 만나는 것은 우리 세계에서는 재수 더럽게 없는 거예요. 재수 있어서 주님을 믿을 경우는 그 주님은 진짜 주님이 아니고 본인이 선택한 경우에요.
교회 가서 예수님 이야기할 때 그것을 자기가 소설을 써서 나 좋아라고, 나 이뻐하는 그런 예수님이라고 구상을 했기 때문에 그런 가짜 예수님을 믿을 때는 등을 돌리는 게 아니고 ‘아이쿠, 반갑다. 친구야.’ 하는 것처럼 주님 얼싸안고 주님 나와 함께, 하겠죠.
그러나 주님이 진짜 오게 되면 마리아가 하는 중요한 말이 뭡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이건 제가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 이렇게 들이닥치면 저 난처하죠. 저 당황스럽습니다. 저보고 어쩌라고 이러는 겁니까? 천사의 말은 어찌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접점 지점만 되면 돼요. 주님 끌어안고 얼싸안고 이러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복음도 그렇고 요한복음도 그렇고 이게 난해 불가한 정도가 아니고 이해 불가합니다. 성경은 아주 글은 한글로 이렇게 죽 예수님 이야기했는데 정말 이건 난해한 책인데 왜냐 하면 어떤 이야기도 우리의 세계관에 공통점이 전혀 없어요. 공통적으로 모인 게 아니고 그냥 접점 지점 이예요. xy좌표에서 이 곡선과 이 곡선의 접점 지점이라니까요. 그냥 스치다 우연히 만난 거예요.
그걸 호명, 호출이라 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네가 어디 있느냐” 호출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거기서 베 풀고, 베는 다른 사람이 풀어주죠. “나사로야 나오너라”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를 불러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못 갑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고 가는 게 아니고 마리아가 임신한 이유는 “어찌 이런 일이 저한테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그냥 놀래버리는 그 역할이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지, 임신 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어찌 이런 일이” 하는 말이 나오는 일은 주님이 일으킨 접점이라고 보세요. ‘내 이럴 줄 알았어.’ 이건 아닙니다. “어찌 이런 일이”라는 일이 있을 때는 주님께서 건드린 거예요. 그게 바로 호명하는 방식이 그 방식입니다.
이러한 누가복음의 이렇게 이야기 식으로 돼 있는 것이 요한복음은 어려운 이유가 누가복음은 이렇게 실제 이야기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친절한데, 요한복음은 그 말이 없어요. 뭐냐 하면 “빛이 어둠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너무나 불친절해요. “빛이 어둠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말 자체도 어려운 게 원래 우리가 아는 어두움은 빛이 오게 되면 빛이 어두움을 비취게 돼 있어요. 그리고 어두움이 빛을 알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은 빛 일줄 모르더라 이 말이죠. 도대체 그 어두움은 무슨 어두움인지 비춰도 모르는 어두움이 다 있어요? 세상에.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참 어렵다 정말.
이 세상의 어두움과 빛은 어두움이란 게 뭐냐 하면 빛의 결핍상태거든요. 빛이 빠져나가면 어두워지고 빛이 들어오면 다시 빛으로 변하는 하나의 빛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릇, 배경 역할, 빛에 종속된 이야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어두움이란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니까 어두움은 빛의 종속이 아니고 다른 데에 종속된 거예요. 어두움은 어두움에 종속된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게 뭐냐 악마죠. 악마에 종속돼 있고 빛은 하나님께 같이 묶여 있고, 이 어두움은 통째로 악마에게 묶여 있고, 그러니까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죠.
결국 이 말은 뭐냐 빛이 온 것은 어두움이 깨달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으로 하여금 더욱 더 어둡다는 것을 최종 통보해주기 위해서 빛이 오신 겁니다. 어둡다는 것은 네 개인이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종속됐다는 것. 진짜 어두움에. 예수님이 빛이라면 예수님은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인간을 묶어놓는 저 뒤에 있는 악마, 사단보고 상대하거든요. 악마보고 상대하기 때문에 네가 어두움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셔요. 어두움의 진짜 오야봉, 보스와 연계돼 있는 것을 전체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똑바로 해. 제대로 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 이거는 너도 네 맘대로 못하지.’ 이런 식이라니까요. ‘네가 묶여 있으니까 내 말 알아들을 턱이 있겠어? 그럴 턱이 없느니라.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하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 이야기를 좀 더 확장시켜 보겠습니다.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빛이라 했다 이 말이죠. 아까 인간의 정체성이라 하는 것은 아까 인간의 타인들에 의해서 주어진 정체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예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초반부에 “나는 빛이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밝아서 빛이 아니고 빛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사명과 임무와 역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빛이 빛 되려 하면 뭣이 강하게 포진돼야 돼요? 어두움이 있어야 돼요. 어두움에 있을 때 예수님은 저쪽 악마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개성 있는 개인이라는 겁니다. 개인의 정체성은 바로 이 땅에 와서 이 세상 사람과는 다른 분으로 오는 거예요. 우리도 하나의 개인이잖아요. 우리의 개인과 주님의 개인이 같다?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살다 가시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게 하나의 동결상태가 되는 거예요. 동결상태, 얼음. 여러분들이 겨울에 이렇게 제빙회사에서 얼음을 만들잖아요. 요 지점에 만약에 작대기가 하나 있다면 요 지점에 만약에 나무 잎사귀가 있다면 나무 작대기와 잎사귀는 만나겠어요? 안 만나겠어요? 이게 물 같으면 흔들어놓으면 만날 수가 있는데 이게 진짜 얼음같이 동결돼 있으면 못 만나죠.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미 동결로 봐 버려요. 너는 네 길로 가고 너는 이 길로 가고 하라 말이죠. 왜냐 하면 전체가 다 어두움이기 때문에. 어두움에서 내가 알아서 어두움에서 벗어나겠습니다. 라든지 어두움에서 내 위치가 다른 데로 가겠습니다. 하는 것은 어두움은 안 돼요. 이건 악마의 허락 없이는 안 되고 악마의 허락하면 이동하도록, 완전히 북한 이예요.
예수님은 이 자체를 전부 다 인간에게 묻는 게 아니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제대로 하란 말이야.’ 묻는 게 아니고 ‘너는 붙잡혀 있고 동결돼 있다.’는 겁니다. 동결돼 있는데 세상을 이렇게 묶어 놓게 되면 주님은 뭔데? 요한복음의 특징이 요한복음에서 제일 난해한 부분은 이미 세상을 이렇게 묶어 놨다는 말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나중에 이룬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이미 다 이뤘다고 본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님이 등장한 자체가 이미 세상은 ‘꼼짝 마라’가 됐다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분투노력하잖아요. 요한복음은 분투노력하지 않아요. 그저 요한복음에서 나온 것은 뭐냐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에요. 마치 기차가 때가 되매 역 하나 지나가는 것처럼. 기차가 지나가는데 만약 대전 역 전체가 움직여서 ‘기차야 스톱해야지.’ 대전 역사가 막 움직입니까? 대전 역사는 제 자리 지키고 있죠. 누가 다녀갑니까? 기차가 그냥 다녀갈 뿐이죠. 시찰하듯이 감시하듯이.
그래서 예수님은 감시자에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감시자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열둘이 있는데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열 두 제자는 예수님한테 어떤 노력도 안 했어요. 한 적도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택해.“ 예수님 자신이 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와 같은 차원이라 하지 말고 이미 완성된,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에서 너는 네 자리, 너는 너 자리. 예수님께서 이미 오실 때부터 거울 한 바퀴 돌은 거예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가 여기는 없습니다. 처음도 빛이고 돌아가실 때도 빛이고, 왜 그렇게 되는가. 세상은 처음도 어두움이고 끝까지 어두움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운 이야기해봅시다. 어려운 이야기도 되지만 여기 가마니 이야기해봅시다. 농협에서 수매할 때 가마니가 있는데 쌀 등급이 어떤가 알아볼 때 뾰족한 걸로 폭 쑤시죠. 때가 되매 주님께서 폭 쑤셔서 우물에 물 길러 온 남자 여섯 명 사귄 아줌마를 폭 쑤셔서 건져내고 하는 말이 ‘추수 한 건 했고.’ 추수한 거예요. 너희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은 것을 너희가 그냥 얻어 챙기는 거예요. 가마니 이쪽에 한번 푹 쑤시고, 이쪽에 한번 푹 쑤시고, 이쪽 한번 푹 쑤시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이게 요한복음 이예요. 되게 쉽죠? 되게 쉬워요. 가마니는 어두움이고 어두움에서는 못 빠져나와요. 어두움에서 무슨 수로 빠져나옵니까? 어두움이라 하는 것은 우리보고 어두움이 아니고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두움에 내속돼 있죠. 안쪽으로 이미 포함이 돼 버렸어요. ‘꼼짝 마라.“에요.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다. 주님만이 푹 쑤셔서 자기 백성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중에 다 끄집어내면 이쪽(가마니)은 뭐가 되느냐 하면 곰보가 되겠죠. 분화구가 있겠죠. 빼내고, 빼내고.
자, 그럴 때 봅시다. 요 A지점에서 주께서 이걸 빼냈다 합시다. 그러면 쌀부대를 측면에서 보게 되면 잘린 부분이 보이겠죠. 전에는 여기 있었는데 주님이 오셔서 쑥 쑤셔서 끄집어내 가잖아요. 요 과정!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이 있습니다. 푹 쑤셔서 끄집어냈죠. 요 과정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주께서 뭘 보고 싶으냐. 하면 이 사람이 얼마나 착하냐. 착실하냐가 아니라 뭘 보느냐? 어두움이 얼마나 지독하냐. 얼마나 어두움이란 것이 실체가 드러나느냐.
그래서 요한복음은 어두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이 세상에 어두움이 아닌 분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을 썼던 요한의 입장에서는 뭐냐 느긋하다 할까요? 아쉬운 것 하나도 없고 급할 거 하나도 없고 답답할 거 하나도 없는 거예요. ‘싫으면 말고.’ 이렇게 똥배짱. 주께서 자기 백성 데려가는데 그것도 때가 되매, 그것도 하루아침에 하는 게 아니고 오후 2시, 오후 4시, 때가 되매 자기 백성 끄집어내겠다는데 예수님 혼자 다 해버렸어요. 완전히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버렸어요.
그걸 간단하게 말해서 뭐냐, 어두움이 있었는데 아무도 어두움에서 못 벗어났는데 빛이 와서 어두움을 데려가더라.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도대체 못 빠져나왔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지?’ 라는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의 쑤셨던 그 쑤심의 무기가 뭐냐는 거예요. 어떤 무기이기에 우리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두움의 세계를 어떻게 성사가 되었는지, 도대체 그 무기가 뭐냐? 그건 십자가죠. 십자가 죽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그거부터 한번 시작해 봅시다. 아~! 이거 대단한 어려운 대목 이예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이제 본론 들어갑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어린양이라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세상 죄를 지고 가게 되면 문제가 뭐냐 하면 그분만 세상 죄를 졌잖아요. 어떤 사람이 청양 고추를 지게에 지고 가게 되면 우리가 맵습니까? ‘보라 청양 고추를 지고 간다.’ ‘봤다. 그래.’ ‘맵지?’ ‘아니, 절대 안 매운데.’ 인간의 논리로는 안 되잖아요.
어떤 사람이 컵에 물을 담아서 가잖아요? 그걸 봤다 말이죠. ‘보라, 시원한 물을 지고 간다.’ ‘어떻게, 네 목도 시원하지?’ ‘아니.’ 보긴 봤는데 뭘 시원해요? 그게 왜 우리가 시원한데? 이렇게 물을 마셔야 시원하죠.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깁니다. 말이 안 되는 그걸 믿는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에요. 믿거나 안 믿거나. 그게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거나 진짜 믿거나 하는 경우죠.
그럴 경우 믿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다 잊어버렸죠? 얼굴 보니 다 잊어버렸어. “어찌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거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저한테 찾아와서 임신케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감축 드립니다. 어떻게 회임을 하셨습니까?’ 하지만 마리아 본인은 미칠 지경이라. 누가 이해하겠어요. ‘잤지? 잤지?’ 뭘 자. 자지도 않았는데.
사내를 몰라요. 현빈도 모르고 원빈도 모르고 사내를 몰라요. 모르는데 임신했다 이 말이죠.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그 날벼락 이상이, 믿는 게 날벼락이라니까요. 요한복음에서! 믿거나 안 믿거나 둘 중에 하나라니까요.
믿는다는 것은 이건 날벼락 떨어진 거예요. 완전히 인생 조진 거예요. 어느 정도 조졌느냐 하면 분명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것이 세례요한은 누구라 했습니까? 어린양이라 했죠. 우리가 안 졌잖아요. 그런데 우리도 이제는 지게 돼 있어요. 주님은 원해서 졌지만 우리는 원치 않는데 세상 죄라는 것을 짊어지게 된 겁니다.
그 세상 죄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주님의 세상 죄는 택한 백성 죄를 짊어지지만 우리가 지는 세상 죄는 내가 그동안 짐이었단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다가 내가 바로 나한테 짐이 된다는 거, 내가 바로 죄악 된 짐이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성령 받은 순간 우리는 아는 게 되죠. 어제 수요일 이야기한 것처럼 앗수르가 몽둥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한테는 내가 날 때리는 몽둥이에요. 주님께서 나를 들고 나를 쳐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거는 정말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난해한 책 이예요. 주변에 성령이 오시고 하는 것은 그런 핵심을 연결시키는 여러 가지 개념들이 설정돼 있어요. 이게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너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성령이 세례로 오실 테니까 오게 되면 비로소 그분이 하나님 아들인 줄 알리라“ 이렇게 돼 있잖아요. 요한복음 1장 33절에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 하였노라.“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아들의 개념이 뭐냐 하면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이란 것도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택한 백성 우리들이란 개념을 완전히 개 무시하듯 무시해 버려요.
아들은 누구라고요? 우리가 아들이라고요? 아들 아니죠. 왜 아들이 아니냐 하면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를 모르는 자는 아들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아버지를 아시는 분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아들은 예수님밖에 안 된다니까요.
결국 아들이냐, 아들이 아니냐 하는 것은 누가 믿음이 좋으냐.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알고 있는 아버지를 내 놔야 돼요. 아버지를 내놓고 그 아버지하고 예수님 아버지하고 동일하면 아들이지만 동일하지 아니하면 그 아버지 아들이 아닌 겁니다. 가짜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내놓는 것은 아버지를 내놓는 거예요. 아버지를 내놓는데 유대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그 아버지는 완전히 금시초문,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었나, 할 정도로 정말 알 수 없는 그런 아버지를 예수님께서는 제시하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를 제시한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을 제시하거든요. 그러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건 가짜고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언급을 했다는 것은 혁명이라는 말이라고 표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혁명이고 천지개벽 같은 이야기를 한 거죠.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들로서 나타났다.” 이거는 천지개벽을 하는 이야기죠.
자, 그러면 여기서 요점을 쉽게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도 1년 뒤에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과 자연환경, 인간과 인간관계, 인간은 딱 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인간과 자연관계, 인간은 자연을 개발했어요. 여기서 생산성을 냅니다. 인간은 자연으로 노동해서 생산성이 인간을 먹여 살리죠. 이게 현실입니다.
인간 대 인간은 뭐냐 하면 칼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이라 했어요. 앞에 있는 것은 자본가, 뒤에 것은 노동자.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농사짓는 게 편합니까? 사람 만나는 게 편합니까? 사람 만나는 게 편하죠.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은 편했어요. 양반이 늘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지금 자동차 판매하는 사람이나 보험회사 아줌마들 보세요. 차라리 농사짓는 게 편하지, 전부 보험 연금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사기 쳐서 한 구찌 하려하면 힘들어요. 그래서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요.
차라리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호미로 흙을 파면서 대충 초가라고 구해서 살면서 허 물어지면 다시 짓더라고 그게 편하지, 재개발 조합에 가서 조합장하고 싸워서 건축 재개발해서 돈 몇 억 들여서 보태서 집 사게 되면 물새니 안 새니 해서 하자보수 해주면 정말 골치 아파요. 점점 더 세상사는 것이 이런 인간과 자연관계 때문이 아니고 인간과 인간관계 때문에 점점 더 힘이 든다 말이죠.
힘이 들면서 인간은 뭘 잃어버리느냐 하면 인간을 잃어버리고 이 사이에서 나오는 게 있어요. 이 사이에서 돈과 재물 자본 이것이 인간의 위에 서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원래 혈육관계잖아요.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결국 돈이 위에 존재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중에 누가 제일 예쁜 거예요? 아버지한테 용돈 잘 주고 말썽 없는 돈 잘 버는 자식이 최고 자식 이예요. 큰 아들 돈도 없고 퇴직해서 별로 들어오는 게 없으면 아버지는 ‘오지 마라.’고 합니다. 또 있는 재산도 집하나 있는 것도 어떻게 해보려 하면 오지 말라 해요. 손자도 마찬가지고. 잘 사는 애 손자가 더 예쁘지 못 사는 애 손자는 귀찮아요.
그래서 모든 게 인간관계에서 돈관계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이걸 인간은 하나의 사물이 되고 일종의 물건처럼 다루어지는 거죠. 이것은 바로 내가 누구냐를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이야기하기 전에 인간은 벌써부터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아버지 하나님을 찾았다하는 것은 이 하나님은 사실은 마귀가 인간에게 알려준 가짜 하나님 이예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돈이라는 굴레에서 인간은 벗어나질 못한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를 이야기해요. 자신을 뭐라 합니까? 아들! 아버지와 아들로 여기다 소개해 버립니다. 아버지와 아들로 소개해 버리면 이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둘 다 관심 없음, 관심 밖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을 설득하거나 자기를 인정해 달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너희들은 아버지 없는 나라고 아들이 없는 세계에 그냥 갇혀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그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진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요한복음은 사람들에게 인기 없어요. 왜, 독생하신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드러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흐음 뭐? 돈 이야기 아니네.’ 이렇게 돼 버려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요한복음을 끄집어낸 사람이 미안할 정도에요. 그 정도로 완전히 인간은 사물, 물체가 돼 있어요. 또는 사료 주면 좋다고 하는 고양이나 강아지 수준도 안 돼요. 인간은! 기껏해야 먹을 거 주면 좋다고 꼬리치는 동물 수준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요한복음이라 하는 것은 다시 언급하면 제발 어둠인데 이제 쑤셔줄 때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어, 예수님 누구시죠? 어찌 이런 일이.’ 예수님에게 관심도 없는 인간이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관심 돌릴 때 이미 그 사람의 위치는 이쪽, 어두움에서 뭐로 빠져 나온 상태에요? 이미 빛의 상태로 빠져나갔기에 주님과 동일한 관심사, 주님은 아버지께 관심 있으니까 예수님이 관심 있는 아버지에게 동일한 관심사를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한복음의 구원의 방식 이예요.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 아까 요한복음 4장에서 여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물 길으러 왔죠. 물도 사물이죠. 남자 사귄 사람도 여섯 명이다. 아무 관심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누굴 봤다?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왜 관심사가 바뀌느냐 말이죠. 바뀌었다는 말은 이미 주님에 의해서 추수, 주님이라는 탈곡기에 의해서, 주님께서 낫을 들고 그걸 추수해서 자기 품으로 옮겨버렸으니까 이제는 메시야 봤다는 것이 물 동이 갖다버렸어요. 내가 물 길으러 간다든지 내가 남자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사귀었다든지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거예요. 물론 여자는 여덟 번째 사귈 거예요. 그런데 열 명 사귀어도 괜찮아요. 그게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자기가 메시야를 봤다는 거예요. 메시야를 알게 됐다는 거예요. 이미 그 사람은 빛에 속한 사람 이예요. 그래서 제가 묻습니다. 그 사람한테 물어봅시다. ‘당신은 어두움이었죠?‘ ’어두움이었습니다.‘ ’어떻게 빛으로 옮겼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때 그 사람이 답변할 수 있는 게 뭘까요? ’내가 이렇게 해서 됐습니다.‘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없죠.
아까 이야기한 그게 뭐냐 하면 ‘호명’이라는 거예요. 호명, 불러냄, 마리아를 불러내듯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왔고 또 세례요한은 뭐라 했습니까? ‘세례요한아 외쳐라.’ 그리고 열두 명 제자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여 세웠나니” ‘너희들도 가지, 저 사람들처럼.‘ 그때 아버지가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7장에 기도드린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중에서 아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남겨준 자들이 나를 알아보니까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요한복음 17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냥 열중쉬어도 아니고 그냥 우리는 얼음! 누가 땡 해야 돼요. 땡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얼어붙어 버렸어요. 이게 요한복음 특징 이예요. 우리는 언 상태에 있어요. 언 상태에서 땡! 하니까 그때부터 활동하는데 메시야가 어떠니, 하나님 아버지가 어떠니, 라는 진짜 우리의 자본주의 관심사가 아닌 다른 관심사가 더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의 분위기고 색깔이고 그런 환경입니다. 대충 모호하지만 전체 이야기를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언급하게 되면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알지 못한다. 보통 어두움은 빛이 오게 되면 반드시 어두움이 ‘오! 빛이다.’ 하고 드러나야 된다. 왜냐 하면 어두움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빛의 결핍상태를 어두움이라 했기 때문에. 빛이 아직 오지 않은 상태를 어두움이라 했고 빛만 오면 그 어두움은 졸지에 뭐로 변한다? 빛의 세계로 바뀌게 돼 있는데 주님께서 어두움이라 하는 것은 이미 종속된, 어두움을 묶어 놓는 다른 세력이 있기 때문에 빛이 아무리 왔어도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하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없는 그런 세계니까 그 세계에 대해서 주님께서 찾아가 주시는 것이고 찾아가서 호명을 하면 그 사람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는데 나오면서 나오는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그러한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으로 돌변돼 있다는 요게 중요한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실로암 물을 길러서 낫죠. 자,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그 사람의 관심사가 뭐였습니까? 내가 눈 떴다는 것에 관심 있죠. 그건 아직도 어두움 이예요. 그런데 뭡니까? 눈 뜨고 난 뒤에 예수님을 믿게 되죠. 그때야 비로소 그 사람은 소경이 아닌 거예요. 드디어 빛을 본 거예요. 어두움에서 빛을 본다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고 마땅한 일이 아니고 이건 ‘어찌 그런 일이.’ 어떻게 어두움인데, 소경이 어떻게 보게 됩니까? 소경이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의 관심사가 주님만이 알고 있는 관심사에 동일하게 같이 공유한다는 것은 진짜 마리아가 임신한 이상으로 놀라운 기적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그러니 요한복음에서는 네 맘대로 사세요. 어떻게 살아도 괜찮아요. 주님이 갖고 있는 관심사를 공유하게 되면 그게 바로 빛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을 이렇게 보게 되면 요한복음에서 말씀의 주제가 아니고 결국 빛과 어두움이 핵심어가 된다는 걸 알겠죠. 빛과 어두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걸 언급하면서 요한복음 주석책 보면 전부 다 창조 때 말씀이 어떻고, 이렇게 하잖아요. 저는 방금 그렇게 보지 않았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이 대립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이 땅의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고발하기 위해서,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내가 하나님이다. 그저 자기가 하나님이고, 하늘나라에 계셔도 하나님인데 그거 자랑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임을 드러낸 게 아니고 어두움 앞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하느냐, 어두움 세계에서.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없는 곳에 유일하게 아버지를 나타냈는데 결국 성도를 찾아온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게 온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 이 말이 보통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영접지 아니했잖아요? 영접지 아니했으면 영접을 계속 안 해야죠. 왜 갑자기 영접이 됩니까? 영접 안 했다는 말은 영접할 능력이 있다? 없다? 없잖아요. 왜 어두움이니까. 어두움은 빛을 빛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가 뭔데?’ 이렇게 나오지 그래야 어두움 값을 하고 티를 낸다고요.
그런데 영접을 왜 해요? 영접을 안 해야 되는데 왜 하느냐 말이죠. 영접이 안 되거든요. 안 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접 되는 방법이 뭐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죠. 영접도 안 되는데 믿기는 뭘 믿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이런 거거든요. 믿을 만할 때 따져보고 검토해보고 믿을 만할 때 ‘한번 믿어볼까?’ 해서 믿는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믿는다는 말은 이건 뭔 뜻이냐 하면 결국 이건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아니고 동결된 상태, 얼어버린 상태, 모든 것이 얼음 덩어리처럼 된 상태에서 가능한 거예요. 믿음이라는 것은 이미 믿음이 발생될 때 영접이 가능하거든요. 믿음이 먼저 오고 영접은 나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 전에 믿음을 주셔야 믿음이 발생되는 거예요. 결국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서 한 이야기는 모든 것이 다 마무리되고 난 뒤에 ‘너희가 어떻게 어두움에서 빛으로 왔는지, 이제 내가 알려주마.‘ 라고 새삼스럽게 그동안 주님이 했던 조치에 대해서 믿음이란 표현을 가지고 사용하신 거예요.
너는 나를 믿는 자가 아닌데 내가 너를 믿는 자 만들었다는 이야깁니다. 네가 알아서 나를 믿은 게 아니고 믿는 자 만들어서 나를 영접하게끔 해서 비로소 영접하는 자에게는 뭐가 된다? “하나님의 권세를 주었다.”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이렇게 결과를 다 해놓고 그걸 소급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무도 이 말씀을, 내가 알아서 믿는 자가 생기지 않도록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내가 영접해야지. 주님을 믿어야지. 자녀가 되는 권세를 내가 받아야지.’ 이렇게 해서 구원이 되는 사람이 한명도 있다? 없다?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 그 이야기가 13절에 나와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했죠? 그러면 아무도 ‘ 내가 예수님 영접해서 구원 받아야지.’ 그 뜻도 아무도 해본 적 없죠? 그런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없었는데 주님이 하셨다가 아니라, 주님이 다 해놓으시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해놓으시고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을 우리보고 한 걸로 주님이 자기 것을 이렇게 공급해서 그냥 안기는 거예요. 그냥 맡기는 거예요.
시계 풀어서 ‘이거 맡겨줘. 이거 네 것이야.’ ‘맡긴 건데.’ ‘네 것이라니까. 봐, 내가 줬다고.’ 한마디로 주께서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우리보고 영접 했대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우리 보고 믿는데요. 믿은 적도 없어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
하나님께로 난 자는 그럼 출발이 어디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가락-요한복음 1장(빛과 그림자)140403b-이 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아까 첫째 시간에 예수님은 단독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오신다고 했죠. 그러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짊어진 짐 보따리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택한 백성! 하나님으로 난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으로 난 자들을 예수님이 따로 챙기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사람들은 뭐냐,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난 자가 아니에요. 이건 육신에서 나온 것이고 어두움에 속한 자에요.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난 자들, 남들 보기는 예수님 홀로 보이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어떤 하실 일이 있는데 하실 일이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택한 백성이 있어요.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택하여 보낸 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는 이것,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보기에 털렁털렁 맨 몸으로 온 거예요. 맨 몸으로 와 놓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만들어 내는데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사마리아 여인이 분명히 어두움에 속한 여자 맞죠? 그런데 나중에 추수하고 나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로서 들통 났죠. 그러면 그 사람이 맨 그 동일한 사람이죠. 동일한 사람이 아니고 주께서 바꿔치기 했다는 거예요. 이러니까 어려운 거예요.
어두움에 난 인간을 아버지께 난 자로, 준비된 인간으로 바꿔치기 한 겁니다. 우리는 바꿔치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깨닫고 주님께서 ‘믿나? 믿으라니까. 믿으면 거듭나면 되는 거야.’ 본인 맨 그 사람이 본인이 믿어서 본인이 구원받는 그 사람 되기를 원하잖아요. 이게 지금까지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이 뭐냐 하면 주께로 말씀이 오게 되면 좋은 말로 성령이 와서 믿게 되면 전에 몰랐던 내가 이제는 새 사람 되어서 믿으니까 새 사람 된 나나 전의 나나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란 말이죠. 그게 인간들 생각이라니까요.
이게 바꿔치기가 들어가는 거예요. 바꿔치기가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는 이 세상에 평범한 아줌마다.’ 하고 룰루랄라 하고 물 길러 오잖아요. 올 때 주님 보시기에는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게 허구에요. 주님 보시기에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의 행위가 가해지면 이 여인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서 이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담기느냐, 안 담기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만약에 여인이 예수님 말씀대로 깨달았다 해버리면 이 여인은 거듭남이 안 돼요. 거듭남이 뭔지 알아요? 현재 기존에 있던 몸은 죽고, 그 죽은 몸에서 다시 태어날 때를 거듭남이라 합니다. 내 말 틀렸습니까? 거듭남이 그런 거잖아요. 깨달았다는 거듭남이 아닙니다. ‘아! 알아들었습니다.’ 절대로 거듭남이 아니에요.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야 돼요. 뭐가 들어간다? 죽음이 들어가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할 때 주님이 십자가 죽을 때 이미 어둠에 속한 사마리아 여인도 같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시간상으로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 죽음은 예수님 혼자 죽는 것이고 사마리아 죽은 것은 늙어 죽는 것이고 우리 죽음은 따로 분리해 놔요. 분리 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로 합친 거예요. 너 죽고 나 죽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는 너와 함께 죽는 죽음으로 죽었다로 해주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소급해서 그걸 적용시켜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 이전부터 적용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여기 물이 있는데 주님이 나한테 ‘어이, 근호야, 이 물 가지고 있거라.’ 보니 물 이예요. 분명히 물입니다. 물인데 ‘어이, 근호야.’ ‘예’ ‘내가 준 포도주 가져오너라.’ ‘포도주 준 적 없어요. 물 줬습니다.’ ‘포도주 줬다니까.’ ‘물 주셨어요. 주님도 자꾸 억지 부리시는데 억지 부리시면 안 됩니다.’ ‘한번 봐.’ ‘봅시다. 어! 포도주네.’ 분명히 물 받았어요.
그런데 물이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뭐로 변했어요? 물이 포도주로 변했거든요.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내가 나에요.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내가 내 몸이 아니고 이미 주님 죽었을 때 같이 죽고 주님 살았을 때 산 몸으로 소급해서 평가한다니까요.
또 예를 들어봅시다. 간통하다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너를 고소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고소하지 않겠다. 너를 용서하겠다.’ ‘무슨 근거로 용서합니까?’ ‘하여튼 용서받는 거야.’ ‘용서 받았어?’ ‘용서 있습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야, 간음한 여인아.’ ‘예’ ‘너 받은 게 뭐지?’ ‘용서 받았는데요.’ ‘한번 봐’ ‘어! 피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은 자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는 거예요. 여인은 자기가 간음했다가 용서받은 것으로 끝났는데 그게 아니고 여인은 영생을 얻어버린 거예요. 왜, 그 여인은 하나님께 난 자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무나 찝쩝 대지 않습니다. 모든 소경 다 오세요. 이게 아닙니다. 주께서는 아버지께 난 자에게만 주님의 행위가 간을 봐요. 찜을 하는 거예요. 원래 뒤에다 X표를 해요. 신문 넣은 집을 싸인 하듯이. 우리도 모르게 X표를 해놓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것이라. 이 말은 우리가 예수 믿었을 때 안 잃어버리는 게 아니고 우리가 까마득히 모를 때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주께 채택되면서 소급해서 그 전에 주님께서 어떤 작업으로 모든 나의 구원을 완료시켜 놨는가를 차후에 우리는 믿고 그걸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어려운 이유가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가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할 때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한다면 내 쪽에서 내 민 손길에 주님이 닿으면 나는 주님을 믿는 게 되고 영접하는 게 되고 나는 주님의 자녀가 되는 방식, 내 쪽에서 출발하는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예수 믿는 자 되는 그 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이건 나한테 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손을 나는 산 손으로 보거든요.
주님께서는 이 손을 무슨 손으로 보느냐 하면 이미 어두움에 쌓여서 죽은 손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를 뒤로 수갑 채우는 거와 똑같아요. 수갑 채우고 내 속에서 어떤 믿음도 박탈해버리고 누구 괜찮은 사람 영접할 마음도 다 뺏어가 버려요. 그래 놓고 말합니다. 손은 묶어 놓고 아무것도 한 것 없죠. 예수 믿을 수 있는 마음 다 없애게 만들고 영접도 못하게 만들고 기껏 혈통도 끊고 뜻밖에 당하게 만들고 하는 말이 “쟤가 구원받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독생자 나타났다는 게 뭘 의미하느냐 하는 겁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뭐가 나타났습니까? 독생자 나타났죠. 독생자 나타날 때 그림을 이렇게 그리는 걸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품에 독생자, 예수님 나타날 때 스프링이 연결됐다고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 나타나면 아버지하고 관계가 탯줄 끊어지듯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잖아요. 안 끊어졌어요. 그냥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잡아당겨 보니까 그 용수철이 왜 그리 긴지, 길어도 너~~무 길어요. 2천 년 동안 계속되니까. 길어서 예수님 독생자가 나타나면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다 끊어지지 않고 연결돼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요 일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아버지께 난 자를 필히 구원한다는 일도 요 용수철 속에 정보가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볼 때 느긋하게 보셔야 됩니다. ‘아! 이 일을 이렇게 하셨구나. 아이쿠, 이렇게 하셨네. 다 하셨네. 뭐 할 것도 다 해버리셨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그야말로 누구만 사랑합니까? 요한복음 마지막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참 좋은 말 했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않는지는 주께서 아십니다.” 왜, 아버지와 연결된 용수철은 바로 주님 뒤에 연결됐기 때문에. 예수님 하는 일이 곧 누구 하는 일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일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디서 감히 그동안 하나님을 운운하고 하나님 일을 내가 언급했다는 그 자체가 ‘아이쿠, 부끄러워 미치겠네.’
예수님이 나타나야 아버지가 나타나는데 예수님도 안 나타난 상태에서 인간들끼리 승리하고 모여서 ‘야,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볼까? 모세 율법이 있는데 어떻게 지키지?’라고 쑥떡 쑥떡 거린 현장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나서 전부 다 ‘암행어사 나타나서 변 사또 잔치 상을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이게 뭐야 이게?‘ 다 뒤집은 거예요. 성전? 성전 같은 소리 하네. 다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다 뒤집어버린 거예요.
이제 요한복음 약간 감이 오십니까? 그냥 느긋하게 팔짱 끼고 보시면서 아!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 두 분 혼자 다 해버렸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버렸어요.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걸 바꿔치기 한다는데 상세히 해봅시다. 깨달으면 믿는다가 아니고 네가 깨닫게 되면 나를 알아본다는 것도 아니고 하늘나라는 깨달아서 가는 게 아니고 연구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건 제가 아까 언급했어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고 뭘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못하는 걸 예수님이 죽었다가 아버지께서 살려주는 거예요. 북 치고 장구 치고 예수님 혼자 다해버린 거예요. 아까 집사님이 인생은 연극이라 했는데 요한복음은 우리 연극이 아니고 누구 연극이냐 하면 예수님 홀로 하시는 모노드라마, 예수님 혼자 이 땅을 누비시고 다 하셨던 그 모노드라마에 우리는 구경하다 걸려든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셨잖아요. 따라서 죽었다가 사신 것을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우리도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적어볼게요. 이미 죽었다가 산 사람이 우리 성도다. 그러면 성도가 나중에 죽는 죽음 있잖아요. 이 죽음은 뭐고 이 죽음은 뭐냐? 둘 중에 하나는 가짜 죽음이고 하나는 진짜 죽음이죠. 우리가 죽은 이걸 안식이다 하는 것은 쉬운 말로 하면 쉬는 것. 이렇게 글을 쓰다가 ‘아휴, 찌뿌둥해.’ 하면서 안식. 열심히 돈 벌다가 ‘아유 찌뿌둥해. 혈당 높네.’ 이러면 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죽었다가 산 사람한테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있습니까? 예수님만 죽음이 있어요. 따라서 요한복음은 누구만 죽을 수 있느냐 하면 오직 예수님만 죽을 수 있어요.
그러면 어둠에 속한 사람은?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었으니 새삼 죽는 건 없고 요한복음에서 산 사람은 누굽니까? 오직 예수님만 살았어요. 처음부터 예수님은 살았고 최초의 산 사람도 예수님이고 최초의 죽음도 예수님이고, 최초의 부활도 예수님이고 나머지는 다 처음부터 죽어있었던 거예요. 어둠이기 때문에.
그게 이 땅의 생명의 특징은 어둠과 죽음의 배경 속에서만 생명이 생명의 값을 하고 그 본질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전에 이야기했는데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해봅시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이 진작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안 죽었다고 했죠. 분명히 입에서 죽음의 개념을 끄집어냈잖아요.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다 죽은 자가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거죠.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지금 이거 죽고, 이거 죽으니까 그게 죽음인 줄 아는 거예요. 죽은 인간이 죽은 것은 그건 새삼스러운 게 아니에요. 그건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티내는 것밖에 안 된다니까요.
장례식이 먼저라니까요. 출생이 나중이고. 아까 했잖아요. 여기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그게 거듭남이 아니고 그냥 한 바퀴 인생 이예요. 주님이 거듭남을 할 때는 그 죽음 말고 다른 죽음을 여기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내 죽음도 아니고 내 자살도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여기에 들어가 버리면 예수님의 죽음을 경유해서만이 다시 삶이 있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사는 그건 거듭남이 아니라니까요. 주님의 삶 속과 결합될 때만 거듭남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지, 내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사는 그건 소생이죠. 베드로 장모도 소생했죠. 그 다음에 죽었다 산 사람 누굽니까? 야이로의 딸도 죽었다가 살아났죠. 나사로도 마찬가지고, 나사로는 쉬다가 온 사람이고.
어쨌든 흔히 말하는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이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죽었다가 못 살아나고 그냥 죽어버리는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거예요. ‘아!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사는구나.’ 그거 아니거든요.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예수님이 사는 것에 대해서 합류를 하게 되면 이건 내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다른 걸로 교체된 상태에서 주님의 생명이 있는 상태에서 주의 몸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의 특징이라 말이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선로가 바뀌는 지점인데 모르고 이야기하다가 대전에서 이쪽은 경상도, 이쪽은 전라도인데, 이번에는 전라도 구경 좀 해보자 해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벌써 대전 지나버렸어요. 보니까 풍경이 못 보던 풍경 이예요. 뭐 이런 풍경이 다 있어? 그게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이라니까요. 내가 예상한 거듭남이 아니고 못 보던 풍경들이예요.
그건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의논한 대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일들이 나에게 지금 나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어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기대하지 못한 못 보던 풍경이, 못 보던 인생이 벌써 시작된 거예요. 내가 이렇다가 아니라 매일같이 어찌 그런 일이. 어찌 그런 일이, 매일 같이 어찌 잘리는 일이, 어찌 벚꽃이 일주일 이상 피는 일이, 매사가 어찌 머리가 희어지는 일이. 하루하루 삶이 모든 삶이 베드로처럼 원치 않는 길로, 내 뜻대로 안 되는 쪽으로 하는데, 그게 마리아 임신할 정도로 그런 인생이 일어날 때 이걸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은 뭐는 아니다? 결심도 아니고 각오도 아니고 믿음은 주께서 거듭난 사람의 삶 자체를 믿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믿는 자라 합니다. 믿는 자는 늘 주님을 영접하도록 돼 있는, 영접하게 가능한 믿음이기 때문에 영접이 안 될 래야 안 될 수가 없어요. 주님과 함께 늘 교제하는 거예요.
그 한 예를 들면 요한복음 1장 47절 한번 봅시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착해서 간사한 것이 없습니까? 양심적이어서 간사한 것이 없습니까? 나다나엘 혼자 있었습니까? 누가 같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같이 있어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같이 있었잖아요.
그 양식은 51절에 나온 것처럼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예수님을 볼 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 혼자로 보이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다? 인자와 천사들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 하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게 지금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천사들이 함께 있고 아버지도 함께 있는 거예요. 그처럼 나다나엘도 함께 있을 경우에만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은 주의 동행이 없으면 이스라엘 아닙니다. 혼자 잘해봐라. 혼자 잘 믿어봐라. 이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동행자가 없으면 이스라엘 사람 아니에요.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바르게 사나, 안사나 내가 지켜봐야지.’ 이게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누가 다 가져갔어요? 주님이 다 조정하고 관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간사할 리가 없죠. 예수님 자신이 간사하지 않은데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 특징 이예요.
실질적으로 여러분들 보면 다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는데 왜 이런 모습이 안 나타나느냐 하면 여러분들의 육신이 자꾸 억지를 부려요. 뭐냐 하면 ‘나 돈 없이는 못 살아.’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고요. ‘나는 자식 없이는 못 살아. 우리 남편 잘 돼야 되고 난 남한테 지기 싫어.’ 옛날 버릇을 일부러 추억 삼아 자꾸 만들어 내요. 그런데 해보면 어색해. 그게 그렇게 어색해요. 노래방 갈 수도 있어요. 나이트클럽 갈 수 있는데 성령 받고 노래방 가게 되면 참 어색해요. 자기가 노래 부르면서도 이상하게 점점 시시해져요. 노래방에 가서 ‘아따 참말이여’ 그런 노래 부를까요? 구자억 목사가 불렀다는 그 노래, 아주 히트 쳤어요.
세상일에 분명히 골프치고 다 해도 괜찮은데 재미가 없어진다니까요. 이상하게 실 웃음이 나고 시시해 보이고 웃기고 뻔해요. 성령 안 받으면 프로 야구 류현진에 미칩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뒤에 프로 야구, 프로 축구, 월드컵, 이제는 나이 들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나이 들어도 밤새 보는 사람 있습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삼각하지가 않아요. ‘아이쿠, 없으면 말고, 못하면 주의 뜻이지 뭐.’ 자꾸 이상하게 변해요. 이것이 인생 관리가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 여섯 명 사귀었는데 그 다음 일곱 번째부터는 별로 재미 못 느낄 거예요. 이제 메시야 봤는데 뭐. 이제는 남자도 별로 시시해. 여자 분들이 언제 남자가 시시하려면 몇 살쯤 돼야 그런지.
그러니까 요한복음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이제는 우리보고 뭘 하란 말이 아니고 내가 직접 너를 하나님께 난 사람만큼 내가 바뀌겠다. 바뀌는데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너에게 적용을 시킬 테니까 너한테 몸의 어떤 변화, 마음의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가지고 이건 주님께서 그렇게 지금 작열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취지에서 주님이 이런 이야기하죠. 내가 너희와 있는 것보다도 다 좋은 게 있는데? ‘뭡니까? 뭡니까?’ “내가 가고 난 뒤에는 보혜사가 오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너희를 관리할 테니까 그게 나한테 더 좋다는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책망하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책망해서 네가 이미 새 사람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의 십자가에서 이루었던 그것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퍼져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요한복음 1장 다시 봅시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자, 여기 할 말이 많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데. 제가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그거부터 먼저 할게요. 사람이 사는 게 고통입니다. 생, 노, 병, 사 고통인데 불교에서는 고집멸도 [苦集滅道]라는 것은 이미 고생이 있고 고생은 집착에서 오고 멸하는 것은 자아를 멸하려고 도는 팔정도를 닦게 되면 해탈된다는 거예요.
보세요. 뭡니까? 이 고통을 누구 고통을 봅니까? 나의 고통을 보죠. 십자가가 누구 고통이었어요? 예수님 고통이죠. 이건 뭡니까? 자기 고통이라. 출발부터 자기 고통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고통은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고통 이예요. 아버지께서 계획한 대로 아들이 시행했기 때문에 죽어지는 십자가의 피 흘림이라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교회에서 ‘여러분 고통스럽죠?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 믿으면 여러분들은 고통에서 면제할 수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그들은 회복,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복귀. 내가 고통스럽다는 말은 필히 고통이 없는 경우를 상정하게 돼 있어요. 내가 이가 아프잖아요. 그럼 뭘 생각하는 줄 알아요? ‘아!’ 그때 옥수수 맘대로 뜯던 그때가 그리워진다니까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인간의 따짐, 이성, 이성은 과학과 철학 기술 이예요. 문화, 문명, 즐거움, 이런 걸로 뭘 한다? 회복 이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회복을 언급하거든 기독교가 아닌 줄 아시면 됩니다. 절대로 회복을 하지 않습니다. 없애버려요.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끝나야지, 어두움이 빛이 되면 안 돼요.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끝나는 거예요. 어두움은 마지막이 어디냐 주의 십자가에서 전부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들통 났고 어두움에서 십자가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어두워야 될 이유가 어두움 값을 해야 돼요. 그게 저주고 심판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아들을 모르는 자는 영생이 없다 했어요. 없어야 돼요. ‘에이 재수 없어.’ 없는 게 아니고 필히 영생이 없고 저주가 그들 머리 위에 있다. 이 말은 주께서 이건 아버지 뜻 이예요. 예수님은 아버지 뜻 외는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아요.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어야 돼요. 이건 일가친척이고 뭐고 봐줄 수가 없어요. 분명히 있어야 돼요. 이 말은 누구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저주 없는 곳으로 나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끝났어요. 이미 끝나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끝나버렸는데 고통, 회복을 언급한다. 이것은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말씀을 지키고 어떻게 실천에 옮기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기껏 자기가 아는 어떤 회복된 상태를 그리워하고 있는 겁니다. 회복은 없습니다. 통일교도 이야기하고 다 이야기하는데 회복은 없습니다.
그럼 뭐냐, 이건 새로움 이예요. 주께서 주시는 것은 새로움 이예요. 예수님께서 어느 대목에서 그런 이야기했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 따라 갈 테니까 천국 들어가게 해달라.’고 베드로가 예수님 죽는다는 소리 듣고 자기가 목숨 내놓는다고 했죠. 그때 베드로가 목숨 내놓는데서 뭘 기대했겠습니까? ‘내 목숨 내놓으면 내가 그리던 주와 함께 있는 천사, 아버지가 계시고 야! 미치겠네. 그 나라 간다.’ 그 나라 가면 이까짓 거 목숨 하나 내놓아도 나는 남는 장사다.‘ 분명히 언급했을거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 했습니까? 뭐가 없다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뭐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처소! 그 이야기를 진작 하지. 참. 진작하면 알아듣느냐 말이죠.
처소가 없어서 베드로가 와도 있을 곳이 없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하지, 처음부터 하늘나라에는 인간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처소는 예수님이 아버지 뜻을 따라 새롭게 만들어 내기 때문에. 있는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내요.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 개념하고 완전히 다른 거예요. 천국 개념은 이미 있고 그냥 못 가서 문제기 때문에 누가 들여보내준다면 가서 턱 하니 앉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구약 설명하면서 제가 그 언급을 여러 번 했는데도 참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홍해 건너왔습니다. 여기가 약속의 땅인데, 제가 분명히 약속의 땅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무슨 땅은 있습니까? 가나안 땅은 있어요.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광야에 있어요. 땅 있다고 그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신 그곳이 약속의 땅이지, 있는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고 원주민 땅 이예요. 열 족속의 땅이라니까요.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이 있는 걸 모르겠어요? 알아요. 알지만 이들이 이 땅이 약속의 땅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내라 했잖아요. ‘너희 정탐해 봐라.’ 가보고 난 뒤에 뭐라 합니까? ‘땅은 있는데요. 들어오지 말래요.’ 왜?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들은 장대 같아서 주께서 우리 약만 올렸어요.’ 들어가지도 못할 땅, 이제는 우리가 오도 가도 못하고 그야말로 끼었다 하죠. 가운데 끼어버리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 공동묘지 삼으려고 이렇게 했느냐 불평하니까 불 뱀이 와서 물어 죽여 버리죠.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갈 데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이 간 데를 누가 정했습니까? 자기가 상상했던 갈 곳이죠. 자기가 희망하고 자기가 들은풍월에 들은 천국이었어요.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나라는 것은 누군지 모른다. 그럼 나는 뭐냐, 남한테 들었던 것을 가지고 나를 규합하죠. 그러면 내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다? 이미 기존에 있던 남의 이야기에요. 우리는 남의 이야기가 그게 진짜인 줄 알고 같은 어두움이면서 똑같은 어두움의 소식을 우리는 빛이라고 여기면서 그걸 가슴에 품고 부푼 가슴을 안고 교회 가잖아요. 백날 가야 돈만 날리지.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내 자신이 문제가 있음을 알 때 그 속에서 ‘나는 문제 있다.’ ‘문제없어.’가 아닙니다. 문제 있어요. 문제 있는데 이 문제 있는 걸 딛고 나오는 주님의 소식, 이 문제 있는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요.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라갈 사람은 오직 두 사람밖에 없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주님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 보기는 어느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주님 있는데 뭐가 문제냐?’가 극히 모범해답처럼 보이죠. 그런데 막상 우리보고 정탐해보라 하세요. 그 모범 해답 어디갔는지 다 날라 가 버리고 울고 짜고 난리 나요. 애들 사탕 안 주면 혼자서 발광하고 뒹글잖아요. 꼭 그 식이예요. 우리가. 새벽기도 하다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막 뒹굴어버리죠. 그러면 목사가 엘리 제사장도 아닌데 ‘왜 술 취했습니까?‘ 이러고. 진짜 답답하고 컬컬한 심령이 돼서 가슴 두드리면서 달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 그거 안 주십니다. 왜 안 주시느냐 하면 내가 원하기 때문에 안 줘요.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상상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타인들이 복이라고 간주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허상이기 때문에 못 줍니다. 줄 수가 없어요.
주께서 같이 따라와요. 주께서 이곳에 가게 될 때 같이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따라가는데 가나안 땅 만나기 전에 누굴 만납니까? 가나안 땅 그리워하다가 요단강에 빠지죠. 요단강에 들어갈 때 어떻게 합니까? 전처럼 물을 갈라놓고 보람찬 하고 이렇게 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갑자기 홍수가 넘쳐서 물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죽으란 이야깁니다. 제사장이 언약궤 메고 죽으러 갑니다. 빠져죽으려고 강물에 들어가니까 비로소 그때 강물이 열리네요. 우리 같으면 진작 열어줄 걸. 미리 열어줬으면 우리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는 않지, 이렇게 약 올릴 수가 있습니까?
하여튼 인생사는 자체가 철렁, 철렁 매일같이 철렁, 철렁 이예요. 일기 쓰면 오늘 맑음, 철렁, 철렁, 철렁, 오늘도 철렁거리면서 잠잤다. 다음 날 오늘도 비 옴, 철렁, 아침부터 철렁. 특히 주식 하는 사람들, 철렁.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길을 열어놓고 못 가게 합니까? 그것이 항상 이 주체가 주의 일에 건방지게 개입하기 때문에 그걸 빼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주체가 개입할 때는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는 채로 개입을 해야 되지, ‘나도 보탰습니다. 나도 도움 줬습니다. 나도 미리 알았습니다.’ 라는 식으로 하게 되면 전부 다 끄집어내버립니다. 그런 식으로는 거듭남이 아니고 이건 죽는 척 하면서 다시 살려는 그런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는 척하는 것하고 죽는 거와 달라요.
진짜 죽는 것은 언약궤와 함께 죽을 때 그때 진짜 죽는 거거든요. 제사장이 죽을 요량하고 언약궤 함께 갔을 때 비로소 강이 열리죠. 그래도 고마운 줄 몰랐을 거예요. ‘에이구, 진작 해주지.’ 짜증내면서 요단강 건너갔을 거예요. 그 다음에 여리고성도 마찬가지고, 거대한 성벽, 무슨 수로 이깁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돌라고 하니까 도니까 무너진 거예요.
매사가 약속의 땅은 바로 코앞에 있는 게 아닙니다. 진짜 그들과 함께 있는 분이 약속의 땅을 만들어내시는데 자꾸 주님께서 만들어내시는 걸 가지고 우리는 자꾸 자기가 뭘 안다고 내가 내 꿈에 맞는 천국을 내가 만들어내려고 자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게 이게 천하에 말썽꾸러기에요.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너 같은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너는 너밖에 모르고 죄인밖에 모른다. 네가 구원받은 것은 네가 잘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해서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느긋하게 보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미리 택한 백성 건져 놓고 자기는 구원할 자를 구원해야 될 근거를 아버지 뜻에 따라서 십자가에 장렬하게 돌아가시기 위해서 19장에 보면 “다 이루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요. 제자들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다 고기 잡으러 갔어요. 나중에 성령이 왔고 다시 돌이켜 보니까 세상에 어느 출생부터 어느 한 대목에도 주님의 손길이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건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고 아버지를 우리에게 나타내서 예수님의 아버지만이 아니고 바로 너희들의 아버지가 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죠. 그때는 내 아버지가 누구 아버지? 너희 아버지. 요한복음 19장에 부활되고 난 뒤에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고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요한복음 17장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서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걸 백날 그렇게 이야기해도 당체 못 알아먹어요.
나중에 부활하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그걸 알게 되는 거예요. 계속 서론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상세히 못 들어가고. 요한복음 2장 21절~22절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왜 뒤늦게, 그전에는 안 믿었던 모양이라. 이제 와서 믿은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 번 봅시다. 앞에 21절 모른다치고 19절을 예수님 하신 말씀을 우리가 현장에 있다고 칩시다.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제자들이 앉은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이 이야기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했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알아 못 듣는 이유를 그냥 모른다 하지 말고 따져봅시다. 46년이라 하는 것은 1년이 46번 지나가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흘 했잖아요. 사흘이라 하는 것은 1년보다 훨씬 짧은 숫자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흘이라는 것은 해가 세 번 뜨는 거예요. 해가 지고 해가 지고 해가 지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사흘입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수하신 게 아니에요. 46년 동안 지었다 했거든요. 같은 문장 이예요. 예수님께서 어떤 문장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이야기하노니.’ 해서 문장에서 46년이란 숫자 나오고 사흘이란 숫자가 나왔죠? 그러면 누가 들어도 46년과 사흘이라 하는 것은 같은 레벨에서 사용되는 그런 시간 개념이라고 누구나 인정하겠죠? 365일이 지나면 1년, 그것이 46번 반복되면 46년, 이거는 바보가 아닌 이상은 이거는 거기 앉아있는 제자들도 다 알아듣겠죠? 그 제자들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예수님 본인이 잘못됐죠.
46년, 사흘. 제자들이 어떻게 돼요? ‘얘들아, 너희들 착각하고 있네. 그 사흘은 그 사흘이 아니야.’하고 주님이 설명을 해줘야 되잖아요. 설명 있었습니까? 설명 없었죠. 설명을 왜 안 해주시는 겁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믿어야 비로소 알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미리 알아버리면 이건 회복이 돼 버려요. 이 고생 많은 세상에서 내가 고생 많이 했으니까 고생하기 전에 고생 없을 때를 기도하잖아요. 그걸 천국이라 생각하잖아요. 그게 뭐냐 인간이 깨달았다는 이성이 도입돼 버려요. 이성은 반드시 회복이 된다고요.
그러나 믿음은 뭐냐 하면 우리가 예상한 모든 것은 다 허상인 것을 까발리고 없애버려요.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없고 맹탕 이예요.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건 내가 기대한 천국이 아니고 단지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이 계신 나라가 뭐가 된다? 천국에 그 제자들을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는 출발부터가 아무것도 무지하다는 것을 분명히 다지고 또 다져야 되는 거예요.
사흘, 666, 144000, 전부 다 그런 숫자입니다. 믿지 않으면, 성령 안 받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받으면 해석이 뭡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 예수님 하신 일을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거에요. 그래도 144000, 666, 어쩌고, 베드로가 666 해설집을 따로 낸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46장이라고 따로 만든 게 없어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죠. 666이고 144000은 언약에 종속된다고.
아까 한 거 다시 해봅시다. 하여튼 백날 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는 게 문제라. 안돌아서면 되는데. 자, 성경 구약 있고 신약 있습니다. 성경 해석 어떻게 하라 했죠? 여기 뭐가 있다 했습니까? 크레인 돌고 오라 했죠? 방금 이거 잊어버렸죠? 주님이 하신 일을, 해석을 하면 다시 크레인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666이 뭡니까? 주께서 하신 일, 어떤 일?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를 숫자로 표현한 거, 이러면 되잖아요. 이걸 제가 천지일보에 이런 글을 썼잖아요. 666이 뭐냐?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숫자를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뭐 네로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아이쿠 네로 죽어버리면 666 죽어버렸네. 그럼. 말도 안 되는 소리.
인간의 모든 숫자나 개념은 1 대 1 대응이 됩니다. 이 컵이 있다는 말은 요렇게 컵 모양이 있고 그걸 컵으로 본 거예요. 1 대 1 대응이 되지만, 성경의 용어는 1 대 1 대응이 없어요. 이스라엘이 숫자가 많으니까 아들들이라 해야 되는데 아들로 돼 있잖아요. 이스라엘은 결국 아들이 아니라는 말 이예요. 아들은 누구다? 예수님이고,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이스라엘 이예요. 동행자가 있어야 돼요. 여행 가도 누가 있어야 돼요? 가이드가 있어야 되듯이. 우리가 어디를 갑니까? 가이드가 없이 왜 가요?
아버지께 간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는데. 아버지 하나님은 거짓말인데. 아버지는 누구만 압니까? 예수님만 알아요. 어떻게? 아버지 품속에서 나온 독생자가 뒤에 뭘 달고? 탱탱 용수철을 달고 그냥 단독으로 빈손으로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아버지가 맡긴 일을 가득 담고 왔어요. 그 아버지가 한 일 중에 뭐냐 하나님께로 난 자가 있다니까요.
하나님께 난 자라는 것은 먼저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있어요. 예정된 자와 잠깐 있을 우리 안개하고 바꿔치기 하는데 그냥 바꿔치기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집어넣어서 바꿔치기 한다니까요. 아! 그런데 어두움에 속한 자는 마귀가 우리를 묶고 있기 때문에 우리 어두움은 빛이 와도 빛인 줄 몰라요. 일반적인 어두움이 아니라니까요. 모든 어두움은 빛의 결핍으로 오기 때문에 빛이 오면 ‘아유, 이제 오십니까?’ 하고 다 반겨요. 그러나 이 어두움은 당체 무슨 어두움인지 빛이 와도 못 알아보는 어두움이라니까요. 그런데 어두움에서 우리가 자진해서 벗어나요? 못 벗어나요.
조금 하고 마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내어 간 거예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에게 네가 무엇이냐, 무어냐, 라고 물었어요. 여기 설명이 어렵지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나에게 굴복하세요. 이 뜻 이예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것은 내가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평소에 내가 정립된 그 구조 안에서 당신은 답변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뜻 이예요. 문장이 어렵죠?
예를 들어서 집사님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면 ‘저 남자인데요.’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병원에서 뭐하는 분입니까? 남자 간호사입니까? 의사입니까?’ 묻는다고요. 아니면 ‘관리하는 분입니까?’ 묻는다고요. ‘내가 궁금한 것을 당신은 답변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고 묻는 거예요. 내가 시스템 속에서 당신은 나한테 굴복, 일단 들어오셔서 내 구조 안에서 나는 이런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주셔야 됩니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세례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세례요한은 빛에 속했잖아요. 어두움이 요구하는 구조에 주눅 들거나 동조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voice, 소리라 합니다. 이게 얼마나 동문서답하는 거예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I am voice.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음파에요? 파동인가? 당신이 말하는 나는 누구라 하는 자기 정체성에는 나는 해당이 안 됩니다. 포착이 안 될 존재입니다. 왜냐 하면 나는 다른 구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벌써 빛과 어두움을 완전히 날카롭게 갈라놓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그분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정말 날 알고 싶으면 나한테 직접 묻지 말고 그분을 경유해서 나에게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는 그분의 소리라 할 때 그분이 나한테 중요하듯이 여러분한테도 그분이 더 중요할 겁니다. 나는 그분의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사야에 예언된 말씀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이 말씀, 말씀 우기지만 말씀에 속한 나를 못 알아본다는 것은 당신은 말씀 밖에 놀고 있는 마귀에 속한 자들, 어두움에 속한 자들입니다.
말씀을 백날 지키고 말씀을 순종해도 말씀 밖에서 평생토록 지내고 있는 사람들, 감히 누굴? 자기는 자기를 안다는 거예요. 우리는 제사장이고 우리는 레위 인들이고, 그거? 너희끼리나 통해, 너희들끼리만 통하지, 독생 하신 하나님 품속에서 나타난 하나님한테는 그게 전혀 먹힐 리가 없죠.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는 뭘 확인해야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은 절대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이게 막혀 있고 알 길이 없다는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빛과 어두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두움에 속한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이미 조치를 다한 수습을 다한 그 일에 의하여 빛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할 말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소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