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5장 36절 (연속성과 불연속성) 210316b-이근호 목사
계속해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설명하는데요. 신랑이 빼앗겼다는 말은 같이 살기 싫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인간하고 같이 살기 싫다. 어떻게 안 맞는데 사고가 안 맞는데 어떻게 같이 살아요. 그럼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사람이에요? 뜻이 같이 맞아야 살 수 있어요. 그 뜻은 어디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고 말씀 안에 세상 전부가 다 들어 있어요. 이 말씀 안에.
그런데 이 말씀 안에 세상 전부가 들어 있듯이 그 인간의 아이디어, 사실은 악마적 아이디어 지만 인간의 아이디어 이 학문, 수학 이런 것, 수를 통해서 또 수학을 통해서 그 안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이 가능해져버립니다. 이게 아까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한 정의역 그 다음에 공역, 치역 이걸로 설명했지요.
했는데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집합론에서 함수를 설명할 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럼 집합론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집합론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둘을 따져보겠습니다. 집합론에서 함수를 설명할 때.
여기 한국, 일본, 중국이 이렇게 x집합이 있고 집합 모음에 여기는 뭐냐 하면은 도쿄, 서울, 베이징, 방콕 이렇게 y집합이 있다면 화살을 쏘는 거에요. 자, 한국이라는 것은 수도가 서울이 되겠지요. 일본은 뭐가 됩니까? 도쿄가 되겠지요. 중국은 베이징이 되겠지요. 그럼 남는 게 있지요. 방콕이 남지요. 이것 전체를 가지고 공역이라고 하는 겁니다. 음식 전체 메뉴를 공역이고 이렇게 딱 찜을 당한 것을 가지고 이걸 통치 당했다. 치역이라고 치역. 당했다. 이게 치역이고.
자, 그 각 나라의 수도는 뭡니까? 이거는 정의를 내리는 거에요. ‘정의’. 정의를 내리는 거에요. ‘定義域’. 정의는 필드 영역을 챙기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집합론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ctrl V 라고 보면 돼요. 하나님의 뜻을 악마가 그냥 복사했다고 보면 되거든요.
집합이라고 하는 것은 각 나라의 수도는? 라는 질문을 제가 던져놨잖아요. 일종의 함수를 던져놨잖아요. 이 질문을 왜 하느냐 하는 겁니다. 무슨 의도로 이 질문을 하느냐? 무슨 의도로. 네가 무슨 의도로 이 질문을 하느냐에 대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그걸 의문시하겠어요? 의문시 안하겠어요? 의문시 안하지요.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하겠다는데 네가 왜? 내가 하겠다는데 네가 뭔데? 내가 이게 궁금하다는데 각 나라 수도끼리 연결하겠다. 알아보겠다는데 내가 궁금해서 내가 하겠다는데 네가 뭔데 왜 하느냐고 네가 왜 개입하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이것은 바로 인간들이 집합을 할 때 집합은 분류거든요. 분류. 어디 모여 있으면 숫자가 1,2,3,4 있더라도 2의 배수 모여 하면 2,4,6,8 이렇게 되거든요. 3의 배수모여 하면 3,6,9 이렇게 되잖아요. 숫자가 무작위로 5,1,2,3,4 흩어지더라도 묻는 자에 따라서 여기 여기 모여라. 3사람 모여 4사람 모여 이런 게임 있잖아요. 따로 이렇게 분류가 된다고요.
이 세상은 이걸 허용하는 세상이거든요. 이걸 용납하는 세상이라고요 이걸. 누가 지시하고 누가 분류지시를 내립니까? 내가 내립니다. 내가. 그래서 성경에서 왜 주님께서 십자가로 구원 받는데 왜 인간들은 십자가를 거부하느냐 라고 했을 때 그 중간에 그 원인을 필히 찾아보면 그 중간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누가 들어있어요? 자아, ‘나’가 들어 있잖아요. ‘나’가 들어 있다고요. 십자가를 언급할려면 필히 인간들은 ‘나’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구나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고 있구나 그걸 아셔야 돼요.
여러분들이 초등학교 때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생쯤 됐을 때에 세상 살맛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어요. 우리가 젊었을 때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목사님도 마찬가지고 세상 살맛나는 어떤 사람을 여러분들은 반드시 있었어요. 지금 애들 같으면 손흥민이라든지 류현진이라든지 그런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분만 있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행복은 놓치지 않을 거야 하는 그런 사람 있어요. 그런 사람 있다고요. 1970년도에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살았느냐 하면은 존, 폴, 링고, 조지 때문에 살았어요. 존 레논, 폴 매카트니, 드럼치는 링고스타 그리고 조지 해리슨. 비틀즈 때문에. 비틀즈 때문에 살았어요.
왜? 주님이고 교회고 다 때려치우고 비틀즈만 있으면 되는 거에요. 지금 방탄소년단 있듯이. 그때는 복음이고 뭐고 들어올 틈이 없어요. 행복에 도달해버렸는데 뭘. 자기만족에 도달했잖아요. 자기만족에. 그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교회 안 나가도 복음 없어도 누구만 있다면 나는 참 행복했었어 하는 그때가 있었을 거에요.
저 같은 경우는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김추자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거짓말이야” 그 노래 있으면 세상에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더는 부러울 것 없어라. 그게 복음인데. 여기서 인간 사는 것은 그렇게 쉬웠어요. 요즘 아이들처럼. 참 쉬워요. 자기가 좋아하는 누구의 팬이 되게 되면 그걸로 그게 복음이에요. 끝이에요.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면 그것이 큰 좌절로 이어집니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나 내가 궁금했던 내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요. 내 자신에게 아주 실망스러운 그런 일이 있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 외국 노래 가사 하나 들고 왔어요. 제목은 뭐냐 하면은 나그네 읆조림. 제목 참 이상하지요. ‘나그네 읆조림’.
가사를 읽어 보면 번역된 가사. “엄마 방금 사람 죽였어요. 인생이 이제 시작될려고 하다가 나의 전부를 던져버렸습니다. 엄마 울게 해서 미안해요. 나는 내일 이 시간까지 오지 못 할 거에요. 그러더라도 계속 사세요.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너무 늦었어요. 이제 내 차례 되었어요. 등골이 오싹하고 온 몸이 욱신거리고 다들 안녕. 모든 걸 뒤로하고 나는 진실과 마주해야 됩니다. 모든 걸 뒤로하고 나는 진실과 마주해야 됩니다.”
제가 이 노래 가사를 하는 이유는 이거에요. 모든 걸 뒤로하고 진실과 마주해야 된다는 것. ‘진실’. 진실과. 진실과 마주하게 된 계기가 뭐냐 하면은 자기는 이제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자, 그래서 중간에 보면 나는 죽기 싫어요. 가끔은 내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에요. 이것도 가룟 유다가 주님한테 책망받는 그 모습 같애요.
그 영어 가사를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Bohemian Rhapsody’. ‘나그네의 읆조림’. 노래는 Queen. “Mama just killed a man. 나는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권총가지고 그의 머리에다가 쏴 버렸습니다. 당겨 버렸습니다. Mama life had just begun But now I`ve gone and thrown it all away . 마마 방금 내 인생 쫑 났습니다. 나는 내 인생 다 뒤로 던져 버렸습니다. Mama wooo Didn`t mean to make you cry. 저 때문에 그렇게 울지 마세요.”
“Carry on carry on as if nothing really matters. 그냥 사세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Too late. 너무 늦었어요. 이제는 경찰이 와서 나를 잡아갈 시간이 왔습니다. 덕분에 오싹하고 온몸이 욱신거리고. Goodbye everybody I`ve got to go Gotta leave you all behind and face the truth. 모든 걸 뒤로 던지고 나는 진실과 마주해야 됩니다. Mama wooo I don`t want to die. 마마 나 죽기 싫어요.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차라리 가끔은 안 태어났으면 좋을 뻔했다.”
결국 이건 뭐냐? 내가 김추자를 좋아하든 방탄 소년단을 좋아하든 무엇을 문제 삼습니까? 내가 나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 거에요. 나는 나 밖에 모른 거에요. 이 세상 전부를 주관하는 그분을 못 만났고 나는 나 즐기는 것만 즐기면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 생각하는 겁니다. 충분하다고. 그 퀸이라는 사람이 불렀던 또 노래가 있어요.
우리는 모두가 챔피언. ‘챔피언’. 거기 가사에 보면 패배자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싸울 거에요. 그리고 이길 겁니다. 우리는 챔피언입니다 친구여. 온 인류의 삶은 도전이다. 도전.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 가사에 사람들이 매료되는 거에요. 우리나라에 이 비슷한 사람 있습니다. 임재범 ‘비상’ 같은 것. 이제는 세상에 나가서 내 날개를 펼치고 싶다고.
그 모든 원인은 나에 대한 주도권을 절대로 남에게 넘겨주지 않아야 된다고 자꾸 나한테 독촉하는 요물이 있어요. 괴물이 있다고요. 그 괴물이 심지어 교회와도 사라지지 않아요. 성경을 100독을 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네가 말씀 지켜서 네가 천당 가라는 거에요. 옛 부대 가지고 자꾸 주물럭거려요. 옛 부대. 옛 부대 가지고.
주님께서 떠나야 될 이유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가 옛 부대인줄을 모르는 거에요. 신랑의 부재, 신랑이 없는 그것이 옛 부대인지 모르는 거에요. 신랑 없애버리고 우리끼리 일반화시킨 그게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교회 가서 복음 전해보세요. 전부 다 욕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뭡니까? 교회를 어떻게 지탱하느냐죠. 복음 아니에요. 그놈의 교회를 어떻게 더 키울 것이냐 이게 전부에요. 교회 목적은 교회입니다. 마치 나의 목적은 누구라고요? ‘나’라고요. 똑같애요.
그러면 교회의 모든 계획은 뭐냐? 바로 정의역, 목사가 내립니다. 올해 목표는 이겁니다. 정의역 내리지요. 시도를 갖가지 시도를 하게 되면 공역되지요. 그중에서 딱 해내는 것이 뭐가 됩니까? 통치했으니까 치역. 이걸 교회라고 하지 말고 이걸 가정이라고 합시다. 가정.
가정의 주부가 초반에 정의역 생깁니다. 우리 가정을 올해 목표 이거다. 선택과 결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립니다. 우리 가정이니까. 그럼 가정과 교회 국가를 떠나서 내가 나의 일년 스케줄을 한번 짜보세요. 그 정의역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려요 내가. 여러가지 시도해보지요. 공역이죠. 그중에서 뭐 해냈으면 그건 뭡니까? 해낸 것에 대해서 완벽한 나의 통치력이 작용하는 거에요. 치역입니다. 이건 남한테 빼앗기면 안돼. 왜? 내 공로가 내 수고가 거기 다 들어있기 때문에.
가정주부의 대표적인 치역은 바로 자식들이에요. 자식들. 내 자식. 내가 그 자식한테는 나의 치역이기 때문에 내 목숨과도 바꿀만해.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내 치역이기 때문에. 내 통치가 작용을 해야 돼. 모든 나의 존재의 의미가 거기 다 쏠려져있어요. 이런 버릇이 하나님 믿는 데까지 이게 확산된다고요. 거짓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나 그 분류라는 게 이 집합론에 의하면 일방적으로 내가 내 만족을 위해서 내가 임의로 분류하고 정해놓은 거죠. 그게 바로 집합론의 특징이거든요. 집합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무수한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저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찾고 싶은 것만 따로 테두리쳐버리면 이게 내가 원하는 그 집합론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숫자로 하니까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개수, 사과, 귤 어떤 이런 개수를 집합할 때 그런 편하게 집합론을 설명할 때 편하게 하지요.
그런데 이게 사람들이 영악스러워서 사물 집합에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사물 집합에서 뭐까지 나가느냐 하면은 사건 집합까지 이미 인간은 이걸 확대시켜왔습니다. 뒤에 배후 악마가 그걸 확대시켜 왔어요. 사물 집합이 아니고 사건 집합까지 하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성경의 예를 들기 전에 우리 일상적인 예를 여러분들이 집합론 배웠으니까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맞춰보세요.
어떤 사람이 촌에서 올라와가지고 서울에서 돈 벌어보겠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 은행에 빚도 좀 내서 1억 6천 주고 가계를 덜렁 계약하고 장사를 했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가게 전세에 들어갔는데 전세 이 사람이 전문적인 사기꾼이 되가지고 전세금 돌려받을 수가 없어요. 왜? 비슷한 건물 여러 중첩으로 전세를 놔가지고. 그거 뭐 등기 떼 봐도 안 나오는 그런 식으로 교묘한 방법으로 해가지고 1억 6천만원 그 촌사람 돈 다 날리게 되었어요.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은 이건 사물 집합이 아니지요. 사건 집합이죠. 그럼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시겠습니까? 물으면 3초도 안 걸려서 제가 답변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 일이 아닌데 내가 뭐? 이게 정답이에요. 뉴스에 나왔거든요. 1억 6천 돈 떼었는데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물으면 이게 누구 일이냐 하면은 답변을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내 일도 아닌데 내가 왜 신경 쓰냐. 내 일도 아닌데 왜 내가 신경 쓰냐. 이러고 싶었지요. 이러고 싶지요. 억지로 생각으로 목사님 어떻게 있겠지만 마음적으로 어떤 마음이냐 하면은 해봐야 내 일도 아닌데 하잖아요. 그럼 문제를 집합론 분류에서 어떻게 되느냐? 이 여자분 돈 떼인 것은 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여자분이 내 막내 여동생이다 하면 어떻게 할라고요. 뉴스 볼 때는 몰랐는데 연락 와서 보니까 뉴스에 나온 이 여자분이 자기 막내 여동생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막내 여동생이란 말이죠. 촌에서 어렵다고 농사지어서 육남매 키웠는데 엄마, 아빠가 첫째부터 억지로 공부시켜가지고 전부 다 대학 보내가지고 갔고 막내는 돈이 없어가지고 너는 딸이니까 대충 중학교나 나와가지고 나와 같이 농사 짓자.
이래가지고 했는데 처음에 순진해가지고 엄마, 아빠 좋아요 했는데 가만 보니까 서울에 간 오빠들은 전부다 돈 벌어가지고 골프치고 해외여행 다니니까 이게 성질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자기는 연로한 엄마 아빠를 봉사하는데. 언니 오빠들은 잘나가고 있는 거에요. 동생한테 다 맡기고. 그러니까 동생이 열 받아서 나도 서울 가서 돈 번다고 해가지고 나도 어떤 남자 만나가지고 같이 돈 벌어가지고 서울 간다 했을 때에 그래 너도 돈 벌어라 했는데 1억 6천 날라갔다.
그때 언니하고 오빠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여튼 너 결혼할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어디서 그런 남자 주워 와가지고. 내가 그 꼴 날줄 알았어. 좀 알아보지. 이러고 말거란 말이죠. 그래놓고 마음이 편합니까? 안 편합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은 형제라는 것이 이미 나의 의사와 관련 없이 이미 어떻게 돼요? 이미 정의역 되었지요. 이미 형제, 자매가 정의역 갖춰졌잖아요. 짜증나는 일이에요 이게.
같은 형제라도 돈보다 형제가 낫지만 돈 없는 형제는 때려죽일 수도 없고 말썽부리고 도와줘봐야 밑 빠진 그릇에 물 붓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렇다고 이걸 내 동생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지금 와서 교육, 공부시켜서 될 문제도 아니고.
주님의 뜻은 모든 인간을 자기의 정의역에다가 관련을 맺어 버립니다. 일방적으로.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 율법대로 살면 축복. 이게 구약 때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요. 요한계시록에서는 모든 자들에게 다 주님의 정의역으로 온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마지막 심판이 주의 이름으로 심판하십니다. 누가 한번 찾아봅시다. 사도행전 17장 30절부터 31절까지 누가 한번 크게 읽어 보세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죽은 데서 살리신 증거를 줬다는 말은 그럴 필요가 있어야 됐다.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나야 이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연속성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었다가 살 필요가 있음을 같이 그 주님의 정의역에 같이 우리가 동감하지 아니한 자는 결국 주님의 이름으로 지옥 갑니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해요. 이건 우리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거든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너는 나한테 필히 저주받고 죽어야 돼 라는 것을 주님의 뜻에 공감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아요. 왜? 죽었다가 살아난 조치가 우리에게 덮여져야 되니까. 그럴려면 나의 정의역, 나의 치역, 나의 공역은 어떻게 돼요? 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야하죠. 날라가버려야죠.
나만 행복하면 되고 김추자만 있으면 좋았어요. 나는 방탄소년단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어요. 나는 교회 안 나가도 돼요. 방탄소년단만 있으면 나는 행복해요라는 전 세계 청소년들. 청소년 아니고 소녀들. 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예수님 너무 좋아요. 우리 방탄소년단 오빠들 좋아요 이런다고요.
자기의 정의역을 포기를 안 해요. 자기 치역을 포기를 안 합니다. 교회 가서 새벽기도하는 사람들 보세요.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나로 하여금 밥 먹고 살게 해서. 자기의 소원을 끝까지 포기를 안 해요.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 많거든요. 전하면 네가 하는 소리 도무지 모르겠다 이렇게 합니다. 네가 하는 소리를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네가 믿는 하나님 나 믿고 네가 믿는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 거에요. 집합론을 몰라요. 집합론을. 집합론만 모르겠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집합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자기가 설정하고 결정하고 정해놓은 것이 집합론이에요. 나의 선택입니다. 집합론이 뭐냐? ‘나의 선택’.
따라서 인간은 항상 쉬지 않고 뭐한다? 선택한다. 인간은 쉬지 않고 매일같이 선택하는 거에요. 나의 정의역을 만들어 내는 거에요. 그리고 가능성은 공역. 그중에서 확실하게 붙잡은 것은 내 통치가 하는 치역. 그것이 ‘나’라는 이름의 함수. 함수의 제목은 내가 나답게. 이거에요. 자아답게. 자아를 통해서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연속성을 시도하지요. 연속성.
신과 통하는 연속성, 신과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을 자아가 건재하고 버티고 있으면서 성사시키자는 것이 오늘날 성경에 대한 오늘날 일반적인 교회의 해석이에요. 일반적 교회의 해석입니다. 주님이여 저로 하여금 무릎 꿇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여 저로 하여금 경건케 하는 사람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은 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인간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신랑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신을 향한 신과 자기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기선택이에요. 자기 결정이에요. 신을 믿는 나를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그건 ctrl V 에요. 이거는 유사품입니다. 악마가 그렇게 배후에서 가르쳤어요.
정신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의 기존의 대세를 이루는 그러한 정신의학적인 방법은 약물치료입니다. 약물치료. 인간의 뇌세포에 있는 단백질에 영향을 줘가지고 그 증상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 약물치료입니다. 약물치료는 치료된 게 아니고 증상을 완화시키는 거에요. 치료된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병원에 가면 꼭 의사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뭡니까? 약 꼭 챙겨 드셔야 됩니다. 그런 이야기하지요. 약 꼭 챙겨 드셔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정의역이 강한 사람은 약 잘 안 먹어요. 대충 낫겠지 이러거든요. 또 하나의 방법은 뭐냐? 정신분석적 해석. 그건 뭐냐 하면은 환경을 바꾸어서 근원적인 치료를 하겠다는 환경을 바꿔서.
자, 환경을 바꾼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퀸처럼 방금 사람 죽였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환경이고요.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의 두뇌가 있다면 두뇌의 질병을 결정하는 단백질의 기능은 이게 단백질이 자체적으로 외부와의 자극과의 교환을 통해서 자율적으로 바뀌거든요.
따라서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대화. 대화는 뭘 주고받는 걸 대화라고 합니까. 언어지요 ‘언어’. ‘말’. 말의 주고받음으로 자체적으로 이러한 질병이 해소될려는 상담을 통한 치료 방법입니다. 이게 정신분석적 방법입니다.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것이 시간이 적게 걸리고 돈이 적게 들겠습니까? 약물치료가 왔따지요. 정신분석 상담으로 하게 되면 너무 오래 걸려요.
왜냐하면 환경이 병원 마치고 가게 되면 환경이 맨날 그 환경이거든요. 아버지가 술 먹으면 때린다. 그러면 교도소에서 판사가 하는 방법 중에서 반드시 교육을 시키는 게 있어요. 교육. 몇 주간 교육. 성폭력이라는 교육 있잖아요. 그리고 약물에 대한 교육. 교육시키는 것은 교육 시킨다는 말은 그 기간만큼은 새로운 대화와 새로운 환경에 접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통계내지요. 데이터 통계내는 해가지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느냐? 약물치료가 효과가 있느냐 그걸 통계내가지고 효과가 있으면 그걸 인정해주는 겁니다. 치료효과 있다고 인정해 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지금 우리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옛 술과 옛 부대를 새 술과 새 부대. 또는 옛 옷과 새 옷이 찢어지지 않고 새 옷이 찢어지지 않는 옷이 되느냐 그것이 중요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이미 구약에서 주님께서 이미 구약을 통해서 이미 실시를 해왔었습니다.
어떤 방법이냐 하면은 방금 제가 언급한 정신분석적 방법. 약물치료가 아니고 환경을 달리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환경을 달리해서 치료하는 방법.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출애굽기 15장 26절 하나님은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뭐하는 하나님이다? 치료하는 하나님이죠. ‘치료하는 하나님’.
치료하는 하나님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말라기 마지막에도 나와요. 광선을 보내서 치료하는, 그게 주님 오셔서 치료한다는 뜻인데 이게 뭐냐 하면은 지금 치료의 목적이 뭡니까? 지금 자아가 자아를 지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치료 방법은 뭐냐? 예수님의 뜻과 같이 할려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할려면 부활에 참여할려면 우리 자아는 어떻게 돼야 돼요? 예수님을 죽게 한 그 환경에 의해서 우리도 같이 죽어야 어디에 참여합니까? 부활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환경 조성을 구약 때부터 주께서 실시합니다. 그 실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바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에요.
자,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했는데 이왕 출애굽기 나왔으니까 한번 보겠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했는데 출애굽기 15장 22절에 보니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나지 않고 인도하는 그 결과가 물이 있었습니까? 물이 없었습니까?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지요.
“Mama just killed a man. 방금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이 남자가 사람을 죽였잖아요. 자, 사람을 죽였는데 죽은 사람은 말없이 죽었지요. 무엇이 그렇게 요란스럽습니까? 죽인 사람이 요란스럽지요. 환경이 바뀌었잖아요. 이 사람을 안 죽였으면 자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경찰관이 와도 사형당할 이유가 없지요. 엄마를 울릴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자기 결정과 선택에 의해서 욱하는 성격이든 뭐든 관계 없어 술김에 그랬데도 마찬가지고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였잖아요. 사람이 죽이는 이유가 뭐냐? 자아가 있기 때문에 죽인 게 돼요. 자아가 없으면 안 죽이죠. 물론 이런 건 있어요. 바보가 IQ 50도 안 되는 바보가 도끼 들고 장난치다가 휙 던져가지고 세바퀴 반 돌아 죽일 수도 있어요.
그런 것은 의도 없고 의도가 있다는 말은 술김이든 더러운 변명하지 말고 나의 나 다움을 위해서 죽이는 거에요. 범죄라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우리의 일반성한테 죽었잖아요. 우리 자아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을 죽일 수 있는 성향을 가진 그런 요물이 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환경이 주님의 치료입니다. 그게 광야 생활의 시작이에요. 스타트에요. start up을 이렇게 해야 해. start up을. 회사 차리지 말고.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거에요. 어려울 때 한푼 두푼 교회 올 때 오천원 천원 이렇게 하다가 돈 만원밖에 못 받는데 천원 십일조도 대단하죠. 그런데 갑자기 한 10억을 벌었다. 1억을 헌금하겠어요? 10억 벌은 것이 뭐냐 하면은 자아를 죽이는 거에요. “just killed a man.” 주님을 죽이는 순간입니다.
쉽게 말씀드릴게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 자아의 연속성을 철저하게 실패로 만드는 환경으로 데려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성령의 역사’. 그걸 예상 못했다는. 내 자아가 예상 못한 쪽으로 데려가요. 뭐 아이 있는 사람은 대표적으로 애가 말 듣던가요? 안 듣지요. 애 말 안 듣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정의역이 있어요. 내 정의역만 있는 게 아니에요. 더 이상 아이는 나의 치역의 대상이 안 됩니다. 독자적이에요. 아주 요물이에요 요물. 사자머리 교사한테 가도 소용없어요 그거.
나로 하여금 근원적으로 범죄하고 싶어가 아니라 범죄가 안 일어나면 안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집어넣습니다. 그게 물 없다고 원망했고 고기 없다고 원망했고 양식 없다고 원망한 그 기간을 주께서는 이스라엘로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홍해 건너 온 사람 다 죽여버렸습니다. 뭐 갈렙 여호수아 빼놓고 죽였다는데 갈렙 여호수아 숫자 두 명 밖에 안 되는데 그냥 다 죽였다고. 다 죽인 거에요. 다 죽인 거에요.
주님도 장차 오실 주님도 이 땅에서 죽잖아요. 아버지가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지금 이스라엘을 먼저 선제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는 거에요. 원망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세워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하나님 믿고 싶어도 믿을 환경을 조성해놓고 믿어야지. 사람을 어떻게 죽이던지 내가 교도소 가가지고 주여 마지막에는 교도소 갔지만 이제는 이 목사님과 이 경찰관이 이제 마지막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부탁하니까 네가 오늘 죽으면 너의 그 유골은 너의 고향에 묻어줄게 하는 ‘GREEN GREEN GRASS OF HOME’ 이라고 하는 팝송 가사 내용이 그거에요. 탐 존스가 부른 거 있잖아요. 조영남이 개사해서 부른거. ‘GREEN GREEN GRASS OF HOME’.
꿈을 꾸는데 꿈속에 내가 죽고 난 후에 고향 모습이 보였다. 그 노래 듣는 사람들 눈물 흘리고 그래요. 마지막 목사님이 네가 오늘 밤 죽으면 네 흙은 고향에 묻어줄게. 그 노래가 그 노래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김추자만 좋아하는데 김추자가 죽었어.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안 죽었는데 죽었다고 칩시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교수하고 결혼하기 이전에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칩시다.
그럴 때 갑자기 뭐라고 합니까? 하늘이 노래지면서 입맛이 없어지겠지요. 내 인생의 전부였고 행복이었는데. 그때는 안 먹던 술을 먹고 안 피우던 담배도 피우잖아요. 그게 우리의 잠재적으로 있었던 거에요. 잠재적인 나의 공역이었던 겁니다. 자아 안에는 얼마든지 오실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는 반격하고 저항하고 대들고 그런 가능성으로 꽉 차 있는 것이 나의 진짜 내 자아의 모습인 것을 이걸 들추어내어주시니 세상에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겠어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김추자 죽여주시고. 안 죽었어요. 안 죽었지만 방탄소년단 차 사고 나가지고 7명 다 죽었다. 안 죽었지만 나의 희망을 좌절시키고 꺾음으로써 바로 누구를 희망하는 게 아니고 나는 누구만 희망했다? 나는 나만 희망하도록 그렇게 조직화, 기계화된 거에요. 그렇게 괴물이 된 거에요. 괴물이. 내가. 악마가 그렇게 나를 괴물로 만든 거에요. 나는 나한테 미치도록. 나한테 미치도록. 그게 이스라엘 멸망한 이유입니다. 율법 줘서 멸망한 거에요. 율법 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왜 하나님이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쓰게 하느냐 하면은 우리 안에 주님과 같이 살기 싫은 마음이 있어요. 그걸 드러내야 돼요. 나는 내가 목표한 신적인 나와 살고 싶지 그 외에 어느 누구도 살고 싶지 않아요.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더라. 하나의 왕관을 두 왕이 쓸 수 없다는 말을 했어요. 하나의 왕관을 두 왕이 쓸 수 없어요.
그러면 최후의 왕관은 누가 써야 돼요? 당연히 누가 써야 돼요? 내가 써야 돼죠. 심지어 10살 먹은 아이도 그 주장할 걸. 우리 집에서 누가 제일 예뻐? 내가 제일 예뻐. 이것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내가 좋아. 제 3의 객관식 항목을 자기가 만들어낸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바로 어릴 때 우리 모습이거든요.
그러면 자, 다 죽여놔버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다 죽여버리면 살 사람 없잖아요. 뭔가 죽었기 때문에 살아나는 안 죽었으면 안 살아나는 죽었기 때문에 살아나는 그 연속성을 불연속성을 분명히 해놓은 가운데서 기가 막히게 연속성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사사기 4장 18절 한번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전쟁사에 나옵니다. 사사기 4장 18절에 보게 되면 누가 한번 읽어보시죠. 4장 18절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여기에 4장 다 읽진 않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니까 4장에 보면 여자 사사 드보라 나오지요. 여자 사사 드보라만 나오면 되는데 거기 누가 나오느냐 바락이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여기서 바락은 남자임을 강조하고 드보라는 여자임을 강조해요.
그런데 여기 4장 8절에 보면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그러니까 바락이 남자고 전쟁에 책임자이면서도 이걸 누구한테 이걸 합니까? 자기가 자신이 없거든요. 상대방이 너무 막강해가지고. 그러니까 지금 이 본문 보면서 집합론 생각해보세요. 정의역과 공역과 치역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공역은 어려우니까 빼고 정의역과 치역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지금 뭔가 목적이 있어요. 찾아온 적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적들을 물리치는데 바락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나이지만 나는 용기 없고 믿음 없어서 못하고 드보라 당신은 사사니까 여자라도 사사니까 반드시 이길 줄로 믿습니다라고 정의역을 세웠지요.
그런데 사사기 4장 18절 보면 최후의 왕의 목을 따는 것은 누가 따느냐 하면은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21절에 보면 “시스라라는 사람이 물을 좀 달래서 물을 줬고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어버렸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죽음 위기 속에서 엉뚱한 구원자가 등장하는 거에요. 야엘이라는 여자가 육군사관학교 나왔습니까? 여군출신이에요?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적의 장수가 목말라 들어왔어요. 그리고 평소에 야엘이 장수 죽일려고 팔 근육 운동 안했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예상 못하는 우연, 우연을 통해서 불연속이라는 인간의 일반화, 법칙의 일반화, 수학의 일반화, 원칙과 원칙대로 사는 일반화에서 우연이라는 모습으로 빼내가는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새 술과 새 부대를 만드는 거에요.
그럼 새 부대가 뭐냐 하면은 자기가 예상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뺏어가버리는 게 새 부대에요. 새 부대 안에는 이 자아가 기대하고 목표로 했던 게 다 싸그리 남아있지 않는 게 새 부대입니다. 깨끗해요. 나는 손도 못 대요. 그 새 부대에.
내 피가 아니고 주님의 피. 내 살이 아니고 주님의 살. 그게 십자가잖아요. 자기 십자가 지고 자기 자랑을 어떻게 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라. 뭐 자기 고생시켜라 그런 뜻이 아니에요. 고생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거에요. 내가 할 수 없는 식으로 나는 구원받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어떻게 구원받을까 하지 말고 감사하면 된다고요. 고마워하면 돼요. 인간도 아닌 가치도 없는 할 줄도 모르니까 가치 없는 거 맞잖아요. 가치도 없는 “just killed a man.” 방금 사람을 죽인 나를. 죽인 나를 구원했다면 내가 사람 죽인 것은 주님이 조성한 우연한 환경이 되는 거에요. 야 이거 무서운 이야기죠.
1억 6천만원 날라갔잖아요. 그 환경 누가 조성했습니까? 서울에 사기꾼 많긴 많지만 하필이면 걸려가지고 1억 6천 날렸단 이 말이죠. 그리면 오빠가 돼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께서 하셨다. 끝. 입 쓱 닦고. 그거 네 인생인데 뭐. 1억 6천 날리고 천당이나 가라. 교회 안다니는 여동생이 오빠를 얼마나 더 싫어하겠어요. 그게 고난입니다. 그게 고난이지 뭐.
자, 옛 부대는 뭡니까? 내 안에 법을 받는 것. 내안에 지킬 역량을 내가 어느 정도 신앙적으로 살 수 있는가를 증명해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악마적로서 만들어 낸 법칙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부대, 그게 옛 부대에요. 거기는 신랑이 없습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나의 정의역이에요. 그러나 새 부대는 하나도 없어요.
끝으로 한 구절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끝으로 여러분들이 마음 편하게 오늘 강의를 끝내시라고 제가 준비했습니다. 주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바로 별 따라 온 동방박사. 자, 동방박사가 평소에 예루살렘에 가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에요. 그들은 어딜 바라보느냐 하면은 수평을 바라본 게 아니고 하늘을 바라봤지요.
거기에 예상 밖의 별이 떴습니다. 예상 밖의. 기대한 게 아니에요. 그 별이 뭐냐? 움직이는 별. moving star. 그 움직이는 별을 보고 따라왔지요. 별 따라가는 거에요. 미리 지도보고 뭐 네비게이션 없습니다. 그냥 별 따라가는 거에요. 별 따라. 마치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아요. 동방박사 죽을 뻔 했어요. 죽을 뻔 했다고요.
간곳이 사자굴이야. 쳐 죽일라고 준비된 곳에 갔어요. 그래서 동방박사는 죽을 뻔했다 하지 말고 죽었다가 살아났다 해야지 정답이죠. 죽었다가 살아났다. 누구 때문에? 아기 예수 때문에. 아기 예수를 증명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말하기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위인들 그들이 바로 오늘날의 성도라고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내 인생 이렇게 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기에 이러한 판은 이러한 게임 판 이러한 영역을 필드는 이거는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이스라엘의 영역입니다. 우리 자신의 주도권은 바로 우리 자아가 아니고 주님께 넘겨간 것을 감사하고 어떤 것도 나대지 말고 보태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있는 그대로 최적화된 모습인줄 알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옛 부대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 부대 속에 이미 자아가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날마다 알려주는 새로운 부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