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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강-불러내심과 불러주심

아빠와 함께 2021. 3. 3. 07:05

342강-YouTube강의(불러내심과 불러주심 로마서 8:29)20210302-이 근호 목사


제342강, 제목은 ‘불러주심과 불러내심’. 똑같은 이야기인데 결과적으로서는 똑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불러주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입장, 성도 입장에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강조되겠죠.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어서 내가 구원받았다. 그런데 ‘불러내심’이라고 하면 어디에 강조점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콕 찍어서 자기 사람 만들었다’에 강세점, 엑센트가 있는 단어입니다.

불러주심과 불러내심이 결과적으로는 동일한데 왜 이것을 구태여 구분해야 되느냐. ‘불러주심’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는 게 되고 그 불러주심에 대해서 ‘예’라고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아담아 어디 있느냐’, ‘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인간이 말하는 것이 구원되는 데 있어서 자칫 필수적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어요.

주께서 불러줘도 우리가 반응을 안 나타내고 주께 합당한 고백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불러줬는데도 불구하고 탈락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 거예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이런 말씀 나오죠.

자, 여기에 대해서 동일한 말씀인데요,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여기서 강조점이 문 밖에서 주님이 두드리고 문을 열어주는 주체가 누구인가. 내 쪽에서 문을 열어줘야 되고 주께서는 강제로 문을 열 수 없고. 문 밖에서 문 두드리는 것은 주님 쪽에서 하고 나머지 문을 열어드리는 것은 내 쪽에서 해서 둘이 결합이 될 때 비로소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구원의 상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셈이 되죠. '하나님이 구원해줘도 내 쪽에서 reject, 거부해버리면 구원이 안 된다' 라는 본문처럼 들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활동에 있어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우선이에요. 말하는 것은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어눌한 사람들, 청각이 가버리면 말하는 것도 안돼요. 듣는 것으로 인하여 말하는 것이 구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 활동상.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청각이 시각보다 더 우선된다는 사람도 있어요. 보는 것이 확실하냐? 아니다, 듣는 것이 더 확실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돼요. 들리는 것과 말하는 것, 그 전부를 주님이 하시는 것보다도 ‘기껏 말해주지 않으면 안 들리고 두드리지 않으면 못 느낄 정도로 인간은 자체적으로 구원될 수 없는 형편에 있다’ 이런 쪽으로 이 성경말씀을 이해해줘야 돼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인간이 얼마나 못났으면 굳이 말을 해야 되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말씀을 하셨으면 인간이 말하지 않는 것조차도 말씀에 대한 반응이 되는 겁니다. 자기의 태도 표명, 표방이 된다고요, 말하지 않는 것도.

주님께서 하시는 어떤 일도 결과를 안 남기고 그냥 흐지부지 되는 일은 없어요. 따라서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은 문을 두드릴 때 문 안 열어줄 경우를 생각해서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없어요. 문을 두드리면 필히 문 소리 듣고 문 따고 열어주고 하는 것이 연쇄고리처럼 계속 야기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문 두드림이에요. ‘문 두드렸는데 내가 문 두드려봐야 인간이 호응을 안 해주면 호응을 안 해주니까 너는 구원 못 받는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단체나 이런데서 대학생들이나 초신자들에게 설교할 때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 본문 가지고 자, 하나님 쪽에서는 할 것 다 해줬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결단의 시간. 결정의 시간은 여러분 소관이시옵나이다. 여러분한테는 지정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썩혀서 뭐할 겁니까? 썩히면 안 되죠. 활용하세요. 주께서 주시는 여러분의 자유의지, 이런 데 써먹으라고 호응을 해달라는 겁니다.

호응해주면 분위기 좋아지죠. 이 쪽에서 먼저 목사가 던집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장군멍군식이죠. 밀당이죠, 밀고 당기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느껴지십니까? 느껴집니다. 뜨겁습니까? 뜨겁습니다. 이성적으로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습니다. 할렐루야. 뭐 이렇게 끝나고. 분위기 후끈 달아오르죠, 분위기가. 사실은 그 분위기를 보고 싶은 거예요. 목회자나 소위 전도자가 그 분위기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 분위기 싸늘하면 자기 성과가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겁니다.

그러면 둘 다 인간에서부터 인간이죠. 자기들끼리의 일방적 구원이에요. 주님은 생각도 안하는데 자기들끼리 성경말씀 활용해서 ‘성경말씀대로 했으니까 구원 주시겠지’라고 억지 부리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일종의 신앙가지고 노는 놀이죠, 흥미 위주고.

그런데 성경은 로마서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불러주심보다 불러내심이 우선되는 겁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했다는 거예요. 불러내시고자하는 확정된 뜻이 있었기에 그 다음에 나온 절차, 불러주심이 있는 거예요.

주님의 자기 마음에 이미 결정 난 게 있어요. 그 시작이 곧 끝입니다. 저 존재는 내가 구원하기로 이미 정해버렸으면 그 정함을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절차에 대해서 악마가 아무리 설쳐도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불러내심이죠, 부르신 그들을 또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달라지게 하는 데에 있어서 세상 어떤 권세나 어떤 위협도 여기 있는 그 절차를 훼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이미 정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로마서 8장 27절에 보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생각이 들어온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주님 왔을 때 내가 응답해야지. 네, 문 열어 드리겠습니다’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그 전의 것을 성령이 와야 ‘아, 내가 하기 전부터 누군가 이미 결정지었구나’ 하는 사실이 성령이 와야 그것을 알 수가 있어요. 성령의 생각이 와야.

그래서 성령의 생각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확정 난 것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습니다. ‘주님이 미리 아신 것을 미리 정하신 것을 불러주시고 영화롭게 하셔서 이 모든 작업이 주께서 저를 향하여 주께서 정해놓은 그 스케줄이 적용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 적용에 대해서 제 육신의 생각으로 슬퍼하거나 교만하거나 또는 안일하거나 짜증내거나 거절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가 나오죠.

주의 뜻을 먼저 언급하고 확정된 뜻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그 거룩한 주의 일에 나의 악마적 생각과 내 모든 마음의 약함으로 인하여 영광이 훼손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끝은 시편처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듣는다 반응한다 말한다, 이것보다도 먼저 주께서 불러내심이 우선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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