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배설

아빠와 함께 2021. 2. 17. 09:53

340강-YouTube강의(배설 에베소서 4:22)20210216-이 근호 목사


제340강, 제목은 ‘배설’. 모든 유기체, 생명체는 배설기관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작용을 자기 내부에서 하고 있죠. 배설기관이 살아있으면 그 유기체, 생물체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부터해서 모든 자연세계 속에서 특히 동물들은 노골적으로 배설기관이 따로 갖추어져 있죠. 원생동물도 따지고 보면 에너지를 뽑아내고 남아있는 술 찌꺼기 같은 것, 뽑아낼 것 다 뽑아내고 갖다버리는 배설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피조물하고 다른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다른 피조물은 그냥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걸로 자기 임무는 다했다라고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볼 수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형상을 주신 그 취지를 드러내는 식으로 인간은 자체적으로 배설해야 될 게 있어요.

에베소서 4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여기 ‘버리고’라는 말 나오죠, 배설하는 것. 무엇을 배설하느냐. 옛사람을 버리는 거예요. 그럼 옛사람을 왜 버리는가. 구습을 좇는 옛사람.

구습이라 하는 것은 옛것을 이야기하는데 새것과 옛것이 구분되는 어떤 기준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준이 안 들어오면, 사는 대로 그냥 살게 되면 옛것, 새것을 가르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딱 뭔가 여기서부터는 새것이고 이것은 옛것이다. 새것이 주어짐으로써 새것이 아닌 것은 옛것이라고 이렇게 구별 지어진다 이 말이죠.

여기서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해주는 하나님이다’ 하는 그러한 목적은 여기서 수립이 안 됩니다. 이런 것은 거기서 받아들여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 구원하려고 일을 벌이신 것이 아니고 옛것과 새것을 가르는 그 기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만드신 겁니다.

인간을 통해서 배설할 것을 주목해보라는 말이죠. 무엇이 들어왔기에 무엇이 나가느냐를 네가 살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4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새사람의 모델, 원형, 바탕, 근거,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냐 하면 바로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해서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말씀을 다시 할게요.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하면 의와 진리와 거룩인데 의와 진리와 거룩이라고 되어버리면 이것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오해하기 쉬우냐 하면 옛사람은 그대로 있고 옛사람에다가 그동안 모자랐던 의와 진리를 거룩함으로 여기에 더해서 뒤집어씌우면 이것이 새사람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옛사람 자체는 폐기처분해야 되고 새로운 것인데 그게 아니고 옛사람은 아까워서 그대로 갖고 거기에다가 추가해서 의와 진리, 거룩함이라는 윤리도덕으로 그냥 덮어씌우면 그것이 새사람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의라는 분, 진리라는 분, 거룩함이라는 분이 오시는 거예요.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이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어떤 공정, 어떤 절차가 필요했느냐 하면 구습을 좇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 자신을 미워하고 버리고 진짜 예수님 자체를 배설해버리는 그런 사건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이 기준점이 되는 거예요.

더 쉽게 갑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아요.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 영접하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해버립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죠. 문을 두드리면 문 열고. 두드리면 문 열면 그만이지.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디를? 구습을 좇는 옛사람에다가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그렇게 되면 무엇이 빠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모든 인간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처단하고 밀어낸 그 결정적 사건이 거기서 누락이 되어버려요. “길 가는 과객이니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라고 하면 양반집에서는 자기가 양반인 티를 내느라고 “누추하지만 사랑방에 주무세요.” 이렇게 될 경우에 뭐가 빠져버립니까. 한 쪽은 우리 집에 들어오려는 의사가 있었고 나는 충분히 그 의사를 존중해서 따뜻하게 환대, 배려해줬다는 거예요.

특히 환대 같은 경우에는 현대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기독교를 있게 하는 새로운 윤리는 뭐냐. 아주 망가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어떤 이웃을 환대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뭐 이런 식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친다고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결정적인 복음, 십자가 사건, 서로 배척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누락이 되고 빠져버려요.

예수님도 하시는 말씀이 옛 술은 옛 부대에 담는다. 이 말을 왜 했었겠어요? 새로운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옛 부대에 담을 만한, 감당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도리어 배척하게 만드는 그러한 예상 못할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갖고 오는 의와 진리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께 배설물로 버려져야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어느 인간도 그것을 인정하는 인간이 없어요. 자진해서 알아서 “예, 지옥 가겠습니다.” 이래야 마땅해요, 우리의 현재 형편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어떤 형편이 되느냐 하면 “예, 제가 죄 지었으니까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한 거죠. 가겠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 대상밖에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면 반대로 “제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더욱더 지옥 갈 만한 존재인 겁니다, 우리가. 우리가 예상했던 의와 진리와 거룩을 우리가 포기해야 돼요. 그것은 가짜고 나의 구습인 옛사람을 지키려는 얄팍한 마귀의 술책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그리고 말이 옛사람이지 사실 지금 우리, 그냥 우리에요. 우리의 본성, 아담의 본성, 태어난 그 성격, 성질, 그 성질로써는 수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들어오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아예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새사람 모습이에요. 이것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죽고’에 해당되는 나는 뭐냐. 그게 바로 주님 들어오기 전에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허접함과 나의 근원적인 죄악성이죠. 성도가 되었으면 바로 이 두 가지가, 주님으로 십자가로 인하여 무엇이 새사람이고 무엇이 옛사람인지를 이제는 기쁨으로 둘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입니다.

'유튜브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342강-불러내심과 불러주심  (0) 2021.03.03
빛과 어두움  (0) 2021.02.17
소리  (0) 2021.02.03
실상과 가상  (0) 2021.02.03
확산과 소멸  (0) 2020.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