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강-YouTube강의(소리 시편 19:4)20210202-이 근호 목사
제339강, 제목은 ‘소리’. 소리라는 것을 물리학에서는 파동으로 봅니다. 이 파동에는 매질이라는 것이 필요해요. 공기가 없는 곳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어떤 에너지가 발생되고 에너지는 공중에 퍼지는데 공기가 있어주면 저쪽 공기가 그 옆의 인접한 공기를 밀고 그 공기가 또 밀고 밀고 밀고 하게 되면 공기의 주름살이 밀려서 우리 귓속에 있는 음파를 탐지하는 고리관하고 귀청을 지나게 되면 뇌에서 판단해서 소리라는 것이 ‘누가 나를 부르는구나’ 우리가 안다는 겁니다.
그 말이 맞는 이야기라면 그 다음 질문이 나와야 돼요. 이 세상의 소리는 그럼 누가 만들었는가. 사람들은 알 수 없죠. 소리가 들리는 건 아는데 누가 처음 소리를 냈는지는, 듣는 거는 아는데 누가 냈는지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소리를 듣고 판단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판단하느냐 하면 저 소리가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를 판단하는 것으로 멈춰버립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를 때는 판단을 해요. ‘저 목소리, 저 음파의 목소리. 아 내가 좋아하고 내가 반기는 친구 목소리구나.’ 라고 해서 대번 문을 열어주는데 바깥에 소리를 들어보니까 두 번 다시 꼴 보기 싫은 친구가 와서 그리할 때는 마치 없는 것처럼 해서 “아, 내 친구 없네. 집에 가야겠네.” 하고 가기를 기다리겠죠.
그러니까 모든 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소리는 나한테 이익이 되는 소리일까, 손실이 되는 소리일까를 판단하면서 자연의 소리를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나한테 이익이 되냐 손해가 되느냐 그것 말고 그 소리, 손해가 되든 이익이 되든 어째든 간에 그 소리는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맹탕이에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이 소리에 대해서 편리한대로 이익대로 쓰고 이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했다가 나중에 소리 주인한테 걸려서 심판받을 때는 어쩌려고요. 남의 것 썼잖아요, 남의 것. 내 것 아니잖아요. 소리를 내가 만들었습니까? 들려오잖아요. 우리는 내게 필요한 소리만 낸 거예요.
만약에 환풍기가 있는데 환풍기 소리가 지금처럼 조용한 게 아니고 대포소리만큼 크다면 저 환풍기 팔아넘길 거예요. 안 쓸 겁니다. 왜? 나한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귀가 먼 사람들의 모임이라든지 애들이랑 있으면 일반사람들은 그 자리에 가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왜냐하면 이야기하는 것이 시끄러워요. 자기들은 소리가 안 되기 때문에 크게 이야기한다든지 손짓발짓해서 산만해지거든요. 그러면 그것이 평소에 익숙치 않은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피해버리죠.
그렇다면 시편 19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분명히 이 자연세계는 우리가 이용하기 이전부터 소리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에 보면. 그런데 그 소리가 어떤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뭐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우리 보기에는 지금 하늘 소리가 들립니까? 안 들리죠. 안 들리는데 안에 내용이 있다는 거예요. 그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땅도 마찬가지고.
성경 창세기 4장을 보면서 흠칫하고 우리가 잠시 주춤하면서 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죠. 죽이고 난 뒤에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 대목보고 움찟하지 않습니까? 내가 땅에 아무 소리 안했는데 그냥 동생을 죽였을 뿐이에요.
그런데 목격자가 있다는 거예요. 어디 cctv를 깔아놨어요? 땅 자체가 목격자라는 겁니다. 목격자인데 이 목격자가 고자질을 잘해요. 하늘의 하나님한테 땅이 “내가 억울한 피를 받았습니다.” 하고 고자질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한테 고자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고 무서워서 어디 살겠습니까. 조용히 하는 어떤 짓도 땅이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 시편 19편 2절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라 하는 것은 지식을 전하는 매개, 용도에요. 지식을 전하고 말을 하고. 날은 날에게 뭘 한다고 되어 있어요? 말하죠, 말. 소리 아닙니까. 말. 분명히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절에 보면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만 왕따 당한 거예요, 결국 인간만. 하나님 앞에 범죄 해서 왕따 당한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보고 선악과 따먹으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뱀이 이야기하죠. 그런데 지금은 뱀이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분명히 여자는 뱀한테 소리를 들었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한 사람에게 인간이 쓰는 언어처럼 들리게 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이 쓰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사무엘상에서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누구 목소리로 사무엘을 부르는 줄 알아요? 엘리 제사장 목소리로 사무엘을 불러요.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과 동거하며 한 집에 살죠. 잠자고 있다가 “사무엘아 사무엘아” 할 때 누구 음성으로 분명하게 들렸습니까? 엘리 제사장 음성으로 분명히 들은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이 낮아지고 낮아져서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그 당시 쓰는 아람말로 해서 제자들과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해줬어요. 물론 못 알아들어요. 물론 못 알아듣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사도바울은 헬라어로 또는 히브리어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분명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28장 끝에 보면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제는 소리가 없어서 못 듣는 게 아니고 소리가 있어서 시끄럽게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완악하게 되면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마음속에 악령이 들어있으면 이 복음의 소리가 안 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주는 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마음 문을 열어 주는 것. 마음 문을 열어서, 사람들 지껄이는 것 말고, 뉴스 아나운서 이야기 말고요, 정치꾼들 이야기 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말.
그것은 오늘날 성경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 문이 열렸으니까 성령께서 친히 쓰신 이 성경 내용을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계시니까 성령이 이야기하는 것을 성령의 말로서 우리에게 들려지게 하는 거예요. 이 말씀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 없이 믿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게 바로 옛날 우리가 몰랐던 하늘의 소리이고 땅의 소리였습니다. 침묵의 소리. The Sound of Silence라는 거 있죠. 침묵의 소리. 우리는 이제 거기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비록 세상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도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끼리 천국의 같은 가족이고 백성입니다. 죽고 난 뒤에 천국까지 살아야 가족이지 뭐 같은 식구라도 못 알아들으면 무슨 가족이겠어요. 죽으면 헤어질 사람은 가족이 아니고 영원한 가족,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