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실상과 가상

아빠와 함께 2021. 2. 3. 08:22

338강-YouTube강의(실상과 가상 갈라디아서 3:3)20210202-이 근호 목사


제338강, 제목은 ‘실상과 가상’ 또는 ‘실상과 허상’. 사람들은 실상과 가상을 나름대로 늘 구분하고 있습니다. 구분을 짓는 자기 자신은 무조건 실상이에요. 꿈속에서 자기가 뭘 했든 간에 그게 꿈이라 할지라도 꿈을 꾼 사람은 나니까 일단은 나는 무조건 이유도 없이 실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허상일 리도 없고 가상일 이유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실상이니까 이 나의 실상 됨을 인정해주고 증명해주면 그건 실상이 되고 나의 실상임을 훼손시킨다든지 그것을 부정케 하면 그것은 가상 또는 허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잘 모르겠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볼펜이 여기 없는데 내가 볼펜을 가지고 이 볼펜을 여기 테이블에 놓았으면 이것은 실상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볼펜이 없는 자리에 나라는 실상이 볼펜을 들고 볼펜을 이렇게 놓았으니까 볼펜이 있다는 것은 실상이 되는 겁니다. 주인공인 내가 했기 때문에. 내가 원인이 되고 그 원인에 대해서 내가 한 결과가 있으면 그건 이유도 없이 실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볼펜을 내가 놓지도 않았는데 내 볼펜이 여기 있게 되면 이것은 원인하고 결과하고 끊어졌어요. 분명히 내 볼펜인데 놓아도 내가 놓는데 남이 내 볼펜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놓지도 않은 볼펜이 거기 있다면 우리는 일단 그것을 허깨비 또는 허상, 가상으로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원인이 안 되었는데 왜 이게 여기 있느냐는 말이에요.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어야 그게 실상인데 내가 하지도 않는데 뭐가 나타나면 그건 허상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할 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에 보이는 정도가 아니고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했어요.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그걸 듣고 십자가 찾아다니는 거예요. 어? 십자가가 어디 있지? 이거 뭐 밝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십자가가 안보이잖아요. 십자가는 몇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고 지금 여기는 십자가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했다. 그래서 왜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할까. 사도바울은 그 뒤에 이야기하기를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했어요.

여기 있던 내 볼펜을 이렇게 테이블에 놓아버리면 이것은 내 육체로 한 거예요. 내가 볼펜 들고 놓았으니까 내 육체로 한 거다 이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실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육체가 원인이 되어서 내 육체가 내가 행해야 어떤 결과가 나오죠.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내게 필요한 결과가 주어질 리 없는 겁니다. 그것은 가상이고 허상이죠. 이것은 내게 도움된다는 그 점이 증명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말은 성령이 뭐 보여야죠. 성령이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실상의 출발점으로 보느냐 하면 성령이 하는 것을 실상의 출발점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죠?

우리는 내가 실상이기 때문에 실상이냐 허상이냐는 판단을 누구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내가 판단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판단하기에 내가 이해가 되면 그것은 실상이라고 규정짓고 싶고 내 눈에 안 보인다든지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이라든지 뭐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했겠죠, 어째든 간에 나도 신체를 갖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신체를 갖고 있다면 육을 갖고 있다면 육이 뭘 해줘야 일어나는 일, 그것만을 실상이라고 하고 싶어요.

그러면 성령이 하는 일은 내 몸이 그걸 실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그건 허상이 되는 거예요. 내가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할 수 있는 것만 실상이에요. 어쩌다 하는 것은 한 번 했을 뿐이지 믿을 수가 없어요. 다음에 하면 그대로 안 되니까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는 것을 네 신체, 육신의 행함으로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성령의 일하심으로 십자가가 믿어지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상은 뭐냐 하면 내가 두 손 모아서 기도해서 내 뜻대로 뭔가 이뤄지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실상이라고 봅니다. 내 기도 응답했다. 그 기도한 원인을 시작으로 해서 응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면 우리는 실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돈을 가지고 예배당에 딱 헌금을 했더니만 그 다음 주일날 누구누구 십일조하셨습니다. 딱 나올 때 그걸 우리는 실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 붙들고 열심히 성경말씀해가지고 “다음 주 교회 나오겠습니까?”, 교회 나온다 했을 때 우리는 전도했다는 실상을 의미하는 거예요. 뭐든 실상이라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올랐다. 이것도 실상입니다. 내가 어느 집에 가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퇴근시간에 보니까 일당을 주더라. 이것도 실상이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실상 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성경이 말하기를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눈에 안 보이느냐?” 이렇게 나오거든요. 십자가 너 봤냐? 나 안 보이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봤다고 하던데. 우리의 안목, 내 신체의 안목으로 또는 이 시각으로 지금 못보고 있는 거예요.

못보고 있으면 실상이냐 허상이냐 했을 때 어느 쪽으로 무게가 실리냐 하면 허상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허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귀신을 믿어라.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만약 귀신을 믿게 되면 항상 귀신은 옆에 따라다니는 것 같아. 밤에 잘 때도 잠을 못 자요. 귀신이 와서 나 자는 것을 딱 보는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 살겠습니까. 귀신이 없다 해야 아 여기 베개 있고 이불 있고 잠자는 사람 나밖에 없고 이 방에는 나만 잔다. 이래야 우리가 숨을 쉬고 살 수가 있어요, 이 세상은. 그런데 그게 뭐냐. 사도바울은 이게 네 육신의 한계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믿음은 네 육신의 한계 그 너머에 있다는 겁니다. 헌금해도 안돼요. 전도해도 안돼요. 기도해도 안돼요. 예배 참석해도 안돼요. 친히 벽돌로 쌓아서 예배당 지어도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실상과 연결이 안 됩니다. 연결이 안 되면 끊어진 상태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출발점을 나의 실상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요 성령의 선물이 되는 거예요.

소망, 사랑, 성경 말씀, 예수님의 재림,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이 모든 것이 믿어지는 것은 내 솜씨나 내 능력이 아니고 성령께서 나를 갖고 노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려주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셔서 이만큼 오늘날까지 살게 만드신 거예요. 이게 실상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내 중심으로 하는 것은 뭐냐. 없어질 허상이 되는 겁니다. 허상이 그동안 실상을 가로막아 온 거예요. 허상 때문에 울고 허상 때문에 웃고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TV에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이, 뉴스가 실상은 이야기안하고 전부다 허상만 이야기하면서 겁박주고 협박주면서 그게 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다 이 말이죠.

성령부터 시작하는 것. 나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 주님부터 시작하는 것. 이게 믿어지는 게 바로 실상과 가상, 이게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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