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승리

아빠와 함께 2020. 12. 12. 08:09

335강-YouTube강의(승리 사사기 4:7)20201208-이 근호 목사


제335강, 제목은 ‘승리’. 이 세상 사람들이 승리를 좋아하고 성공을 좋아하는데 본인이 성공해야 될 근거는 딱히 있습니까? 그 근거가 있어요? 남은 승리하지 말고 나는 승리해야 된다는, 남과 나와의 차이에서 나만 유독 인생 성공해야 된다는 그런 정당성, 그런 근거는 어디 있습니까? 남은 아파도 되고 나는 안 아파야 되고, 남은 코로나 걸려도 상관없고 나는 안 걸려야 된다는 그런 정당성이 있습니까?

정당성이 없는 것을 ‘억지’라고 해요. 그걸 네 자로 ‘우격다짐’이라 하죠. 매일 본인이 우격다짐으로 사니까 스트레스 안 받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것 먹어도 암에 걸릴 수밖에 없어요. 매사가 우격다짐이니까, 매사가. 버스정류소에 갈 때 딱 가자마자 저쪽에서 버스가 와야 돼. 이게 우격다짐이에요. 가자마자 떠나면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이게 여러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교사 임용고시 칠 때 어떤 분이 코로나에 걸렸다고요. 그러니까 임용고시 못 친다고 나라에서 배제를 했다고요. 하니까 소송하겠다는 겁니다. 수능은 되는데 임용고시는 왜 안 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나라 뜻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대요. 그런데 그게 남의 일입니까? 아이고, 이기주의. 이렇게 하지만 막상 우리자신에게 그 일이 닥쳐버리면 우리는 거의 미친 듯이 국가를 향하여 고소하고 난리입니다.

스쿨존에 우리 애가 가는데 트럭이 와서 받쳐서 죽었어요. 그 전에 스쿨존에서 죽은 애가 한명도 없었습니까? 수백 명 수천 명 죽었어요. 그런데 그 애 이름이 김민식이거든요. 민식이법을 만들었어요. 얼마나 이기주의인지 몰라요. 그러면 그 애 아버지가 남의 애 죽었을 때 뭐를 외쳐야 됩니까, 자기 애 말고. 몇 년 전에 남의 애 죽었을 때 자기 일처럼 여겨서 국회 앞에서 성토하고 법 만들자고 이렇게 되어야 되잖아요. 가만히 있다가 딱 자기 애 죽으니까 법 만들자고 난리도 아니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죠. 뭐 그게 대단한 용기처럼 생각됩니까?

이런 걸 가지고 ‘자기주장’이라고 하거든요. 인간이 자기주장을 왜 하느냐면 인생에 실패하기 싫어서 자기주장을 하는 겁니다. 실패하기 싫다는 말은, 나는 꼭 성공하고 싶다는 겁니다, 누구하고 비교해서. 혼자서는 성공인지 실패인지 몰라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있을 때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이게 난감해요.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만약에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갔는데 혼자 있어서 하루에 고등어 한 마리 잡고 있었는데 어떤 배가 지나가다 파선해서 자기 있던 섬에 또 왔다 이 말이죠. 소설에는 없지만 예를 들면. 자기 있는 섬에 그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은 솜씨가 좋아서 옛날에 어부 좀 해가지고 한 번에 고등어 두 마리씩 잡아요. 그러면 둘 중에 누가 성공한 거예요? 그 사람이 성공했죠, 고등어 두 마리 잡으니까. 이 사람은 한 마리밖에 못 잡는데.

그러니까 성공 실패라 하는 것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죠. 상대적이라 하는 것은 세 번째 사람이 왔을 때 졸지에 자기가 또 실패할 확률이 있고 네 번째 사람이 오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래서 이 세상은 평균률로 봐요. 통계학에서 가운데가 (종모양으로) 볼록한 곡선의 제일 위에 있을 때, 그 값을 평균이라고 합니다. 평균적으로 봐서 나는 중간층이다, 너는 잘 산다 못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거 하늘나라에 통할까요? 주님이 그 통계표 인정할까요? 안하죠.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창세기 3장 22절에서 에덴동산에서 쉽게 말해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부터 절단되고 단절되어 있으면 그가 재벌이든 삼성그룹 이건희가 되든 현대그룹 총수가 되든 관계없이 그것은 실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쫓겨남으로써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우상과 소통하게 되었어요. 자기가 만든 신과 소통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뜻은 차단시켜버리고. 자기가 실패했다는 것을 지적질하기 때문에 듣기 싫은 거예요.

내가 성공한 것을 증명해줄 신을 교회에 와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찾고 있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 좋으라고가 아니라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 그게 자기 정당성이죠.

이게 이방민족인데 그럼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오셨죠. 오셔서 싸움하겠죠. 싸움할 때 누구하고 싸운다는 것은 제가 이만큼 말씀드렸으니까 여러분 아시겠죠. 진짜 하나님이 오신 뜻은 가짜 하나님, 자기 성공을 고대하는 그런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전쟁을 벌일 때 가짜 신에게서는 인간이 나 잘난 척하기 위해서 신에게 다가갈 때 내 잘난 주특기나 내 솜씨, 내가 농사해서 많은 열매 맺힌 것, 호박도 작은 것 아니고 큰 호박, 고구마도 작은 것 아니고 신의 축복으로 이만큼 큰 고구마 했습니다. 신의 축복으로 월급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걸 드리고 싶죠. 이렇게 자기 자랑질을 신 앞에 하겠죠. 이게 가인이 드린 제사입니다. 그 신에게 가는 방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인간의 솜씨로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시켜버려요. 그게 바로 사사기 3장 15절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부르짖었다는 말은 참 많이 답답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사사기 4장 3절에도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렇게 되어있죠.

오늘 본문의 결정적인 것은 사사기 4장 7절,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그 다음에 “붙이리라” 붙이리라. 네가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자석에 이끌리듯이 그들이 끌려와서 지가 알아서 박살나게 할 것이다. 그들이 이 이스라엘에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아이고, 만만한 것.”하고 쳐들어왔는데 와보니까 박살난 거예요. 그들이 끌려와서 자석에 못이 끌리듯이 끌려와서 붙이는 거예요. 박살난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솜씨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승리겠어요? 이게 하나님의 승리죠. 그러면 하나님의 승리가 승리답게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듯이 자기 솜씨를 부리는 겁니까, 자기 힘을 빼는 거예요? 무능자가 되는 거예요, 무능자. 무능자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모든 면에서 자기가 무능자가 아니고 유능한 자가 되려고 해요, 자기가 노리는 게 있어서. 뭘 노립니까? 제가 아까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남은 실패해도 나는 성공하고 싶고 남은 아파도 나는 건강하고 싶다. 남은 불행해도 우리 집안은 행복하고 싶고 남은 코로나 걸려도 나는 안 걸리고 싶다. 거기에 대해서 대비하겠죠, 마스크 써가면서. 그런데 그건 결국 누구 성공이에요? 주님 승리에요, 내 승리에요? 내 승리잖아요.

주께서는 필히 막아버립니다. 주님의 승리가 내 승리에 교묘하게 가리워지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 안했습니다. 어떻게 일하시는가. 거저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라고. 그럼 거저 주시는 거면 ‘어? 내가 한 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갖겠죠. 그럴 때 누가 승리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승리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하시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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