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0 - 십자가의 효과
20,12,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75페이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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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새삼스럽게 무슨 행위를 해야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벌을 받고 시작해서, 왜 신으로부터 애초에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인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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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인간은 새삼스럽게 무슨 행위를 해야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라고 하는데,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는 이런 소리가 굉장히 낯설게 들린다는 겁니다. 즉 "선을 추구했는데도 사람은 죽는다"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한 적절한 답변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죠. 선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죽는데, 그 죽음의 이유를 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한 평생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죽는 이유가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냐는 겁니다. 자기는 살면서 선한 일만 했는데, 그런데 왜 자기에게 벌이 오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따질 수 있다는 말이죠.
* 벌을 받아서 !!
어제 예배시간 전에 법륜스님 이야기를 누군가가 했는데, 불교에서 제일 안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죽는 이유가, 그게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하는 것,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벌을 받아서 죽는 것을 안다면, 벌을 내리신 분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심판주' 라고 하는데, 그런 심판주가 인간에게 벌을 내려서 인간은 죽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심판주가 계시고, 그 심판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성령을 받지 않아서 모르는 자들에게는, 죽는다는 것 앞에 무엇을 붙이지 못하는고 하니, '벌을 받아서' 라는 것을 도저히 붙일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벌' 이라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죽고 난 뒤에 극락과 지옥이 있다" 라고, 인간들이 그렇게 만드는데, 사실은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말이죠. 그렇게 극락과 지옥을 설정해놓고, 그 다음에는 심판주가 벌을 내려서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착하게 살게 되면 지옥이 아니라 극락에 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주가 있고, 벌을 받아서 죽는다" 라는 것을 모두 다 끊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죽는 것은 팔자인데, 즉 육신이 약해서 죽는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일단 그렇게 해서 죽게 되면, 그 다음에 극락과 지옥에 가는 것은, 이 땅에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그것에 의해서 결정이 난다는 말이죠.
* 심판주를 위해서 존재함을 모르는 것이 '죄' !!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심판주가 계시고, 그 심판주가 인간을 죽일 때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벌을 내려서 죽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벌을 받을 때는 반드시 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죄가 무엇인고 하니, "심판주를 위해서 인간이란 피조물이 존재한다" 라고 하는 그 관계, 그것을 모르는 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착하게 사는 것도 벌받을 짓이 되고, 그리고 악하게 사는 것도 벌받을 짓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태어난 것 자체가 벌인데, 즉 이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바로 벌이라는 겁니다. 특별히 죽는 것만 벌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인간은 새삼스럽게 무슨 행위를 해야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벌을 받고 시작해서, 왜 신으로부터 애초에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인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성도에게만 해당이 되는데, 불신자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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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피곤하고 수고롭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짧은 인생사의 경험으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창조보다 앞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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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 '자아'와 '깻잎 짱아치' !!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과거사를 기억하는데, 그러한 과거사를 종합한 것을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요즘 제가 설교나 강의시간에 계속해서 유난히 언급하는 게 있는데, 그 과거사가 눌려서 집약된 것이 바로 '자아' 라는 겁니다. 그것이 곧 '나' 라는 것이죠.
이 과거사를 어제 설교시간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깻잎 짱아치' 라고 했다는 말이죠.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첩첩이 쌓여있는데, 한 번에 두 장을 먹으면 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분석하고 탐색한다는 것, 즉 깻잎을 들추게 되면 거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자기 잘남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기 잘남 외에 거기에서 달리 나올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즉 "이렇게 잘난 내가 왜 고생고생을 하다가 죽어야 하고, 그리고는 왜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자기는 도저히 동의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창조보다 앞선 것 !!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것이 있는데, 여기에 교재에는 "창조보다 앞선 것이 있으니"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실 일이라는 겁니다. 즉 창세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 계획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죄로 인해서 말이죠.
그러한 계획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이미 수립이 다 되어있었는데, 이것을 에베소서 3장에서는 '감추어진 비밀' 이라고 하는데, 혹은 복음의 비밀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이게 "나에게 무엇이 이익인가? 무엇이 손실인가?" 라고 하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말이죠.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자기에게 이익이 되던 손해가 되던 간에,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라고 하는 '관계성', 바로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 유월절 그날 밤 !!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어보면, 유월절 그날 밤에 히브리인들이 사는 동네의 각 집의 대문에는 양의 피가 발려져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보름달이 하나 떴다는 말이죠. 그리고 거리는 자동적으로 통행금지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날 밤에는 어떤 약속이 있었는데, 즉 죽음의 천사가 온 동네를 덮치기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나 겁이 난다는 것이죠.
그러니 유월절 그날 밤의 신작로나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다니는 게 아니라 누가 다니는고 하니, 완전무장을 한 죽음의 천사가 다닌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각 집의 맏이만 골라서 죽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곳의 분위기가 어떨까요?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라는 겁니다.
* 무시되는 '나의 과거사' !!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어떤 이익이나 손해는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리고 자기 외모나 직업과 재산도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리고 자기가 교회에 다닌 지가 50년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신앙경력도 전혀 고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전체를 다 합치면 '나의 과거사' 라는 것이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무시가 된다는 겁니다.
* 피의 효과 !!
그렇게 자기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이 완전히 무시가 되고, 그러면 이 날에는 어디만 주목하게 됩니까? 적막함만이 감도는 그날 밤에는 오직 '피의 효과',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중요한 것은 "양의 피가 과연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곧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주식이 오르고, 또한 집 값이 오르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추미애와 윤석렬이 문제가 아니고, 성도라고 하면 주님의 피의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것만 바라본다는 말이죠.
* 그까짓 것 !!
그러면 성도의 가장 근원적인 마음 속에서 무엇이 대한 감사와 찬미가 터져 나와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 피의 효과인데, 그 피가 바닥에 깔려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은, '그까짓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뜯어먹으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어떻다는 겁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날씨가 어떻고, 통일이 어떻고, 수능이 어떻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까짓 것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애굽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문에 피를 발랐습니까? 바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양의 피가 그까짓 것이라는 말이죠. 십자가의 피를 우습게 본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아무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수능이 중요하고, 코로나 백신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 조롱할 수 없는 자리에서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애굽 사람들 앞에서 어린양의 피가 모독을 받고 조롱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게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성도가 왜 성도인고 하니, 여기에 보면 "내가 주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리에서 불러야 제대로 주님을 부르는 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렇게 심각하고 공포가 있던 자리에서, 히브리인이라고 한다면, 즉 양을 받은 자라고 하면, 그 양의 피를 두고 '그까지 것' 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거기에 자기의 목숨이 달린 정도가 아니고, 숨겨진 창조의 비밀이 나온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면서 하나님만이 아시는 창조의 비밀이 거기에 담겨진다는 말이죠. 마치 붕어빵에 앙코가 담기듯이, 그렇게 피의 효과가 담긴다는 겁니다. 거기서는 자기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익을 본다든지 혹은 손해를 보는, 그런 자기의 일상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차를 몰고 가다가 빵구가 나면 좀 귀찮기는 해도, 그것을 가지고 "나는 죽고 싶어"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나' 라는 존재가 차를 간수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피를 증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까짓 것' 이라고 하면서 무시하지만, 성도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데, 아니 절대적이라는 말이죠.
* 노선변경 !!
그렇게 성도는 예수님의 피 흘림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을 잠시 육체로 태어났다가 그 육체가 폐기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중간에 노선변경이 일어나는데, 처음에는 아담의 육체로 태어났다가 그것은 가위표가 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육체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죠.
그렇게 교체가 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자기 몸, 즉 육신의 본성은 죽어서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죄가 되는데, 그러니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죄고, 또한 악한 일을 해도 역시나 죄라는 말이죠. 이 육신의 몸이 하는 일이, 죄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죠.
법륜이 아무리 좋은 소리를 많이 하더라도 죄고, 그리고 혜민이 중의 신분에서 그렇게 돈벌이를 하는 것도 역시 죄라는 겁니다. 극락이 있고 지옥에 있다고 하는 아이디어도 역시 죄인데,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회에서 "나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라고 하는 것도 역시 죄라는 말이죠.
* 자아의 불가능성 !!
이것을 좀 더 이야기를 하면, '나' 라는 자아가 있는데 이 자아가 자기가 태어나서 일어난 일은 기억을 하지만, 그러나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겁니다. 이렇게 '모른다' 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불가능성인데, 알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완료로,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 완료가 성령으로 오게 되면, 자기가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자기 입장에서는 잘해보려고 하는데, 즉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착한 일만 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조차도 그 완성에 비해서는 미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 미완성이 즐거워 !!
그런데 성령을 받은 자는 이 미완성이 그렇게 즐거운데, 왜냐하면 성령이 와서 그 미완성과 주님의 완성을 대비시키니 이게 중첩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이 이렇게 흐르고 있으면, 여기 위에 누가 덮치는고 하니, 성령에 의해서 주님의 공로가 덮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밑에는 죄고, 위에는 죄사함이 된다는 것이죠. 즉 유월절의 취지가 계속해서 깻잎 위에 살아난다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덮치는 것을 '소스' 라고 보고 싶은데, 그러면 탕수육이 생각나지요? 돼지고기에 밀가루를 입혀서 기름에 튀긴 것을 그냥 먹으면 딱딱하고 맛이 떨어지는데, 그런데 거기에 소스를 가득히 부어서 먹으면 맛있고 부드러운 탕수육이 된다는 겁니다.
* 죄사함과 소스 !!
그렇게 주님의 죄사함이라는 소스가 부어지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노출이 되는데, 주변에서 주어지는 사태에 노출이 되어서 늘 근심과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령에 의해서 덮어지는 것이 없다고 하면,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해야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인데, 거기에 "최선을 다해서" 라는 것을 붙이는데, 즉 "최선을 다해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걱정 근심에 쌓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잘 되도 불안하고, 잘 되지 않으면 더욱 더 불안한데, 즉 "이번에 서울에 계약을 하러 가는데 코로나 때문에 불안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여기에 소스를 부어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서울을 가든 어디를 가든 그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죄를 짓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가능성이 있으면 어떻게 조심이라도 하겠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다 죄가 되는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죄가 되어야 소스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사함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너무 횡포를 부리면 곤란하고 말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죄사함이 덮치게 되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연동해서 같이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매일같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리고 자기를 괴롭힌 환경에 대해서 매우 반감을 드러내는데, 왜냐하면 죄가 자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래서 외부에서 압력이 가해지면 강한 거부감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 잔느 귀용 !!
그런데 이런 것이 멈추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약에 멈추어지게 된다고 하면 자아가 그만 위대하게 된다는 말이죠. 17세기에 프랑스에 '잔느 귀용(1648~1717)' 이란 여성이 있었는데, 무엇으로 유명했는고 하니, 그 당시 종교재판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카톨릭 세력에 대해서, 당시에는 종교가 곧 국가권력이었다는 겁니다. 체포, 구금, 사형, 그 전부를 교회에서 다 행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세유럽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의 신앙과 사상을 검사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하고 했는데, 온갖 모멸감과 고통을 다 주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게 악명 높은 종교재판인데, 이런 국가를 두고 '종교국가' 라고 한다는 것이죠. 국교(國敎) 즉, 국가에서 공인하고 지향하는 종교가 있는 국가라는 겁니다.
특히 이슬람의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등의 다수 나라들이 그러한데, 물론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유대교의 이스라엘과 불교의 부탄도 그러하고 말이죠. 또한 영국과 그리스 등도 국가종교가 있는 종교국가이지만, 이들은 자유롭다는 겁니다.
* 종교국가, 교회가 곧 국가 !!
이렇게 중세시대에는 모든 권력이 교회에 있는데, 교회가 왜 그렇게 힘이 강력했는고 하니까, 토지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교인들이 헌금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겁니다. 당시는 농경시대이기 때문에 모든 생산이 토지에서 나왔는데, 쉽게 말해서 당시에는 재벌이 교회라는 말이죠. 그러니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거기에 취직해야 돈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런 종교국가에서 권력으로 압박을 가할 때, 잔느 귀용은 어떻게 했는 하니, 그 당시에 개신교가 막 발현되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이고 독일은 개신교 국가였다는 말이죠. 잔느 귀용은 프랑스에 속했지만, 루터의 개신교를 공부하면서 카톨릭에 대해서 반박을 했다는 겁니다.
카톨릭은 단체 구원인데, 즉 교회에 등록된 사람은 구원이 되고 그것이 아니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제도에 등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이 떡은 예수님의 몸이고, 이 잔은 예수님의 피다" 라는 것을 유일하게 제도화할 수 있는 곳은 교회, 즉 성당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떡과 잔에는 누가 함께 합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같이 계시는데, 즉 예수님이 공재(共在)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사상적으로 옳다고 해도,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천주교의 입장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떡과 포도주에 예수님이 실제로 같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죄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카톨릭 성당에 등록하지 않으면 죄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옮긴다는 것은 보통 각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천주교의 화체설(化體設), 즉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란 말이죠. 이것을 그동안 천주교가 꽉 쥐고 있었는데, 이것을 성사(聖祀), 거룩한 제사라는 겁니다. 그러니 카톨릭은 완전히 우상 덩어리라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잔느 귀용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녀는 당시 성자로 불리우던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보면서, 카톨릭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수녀가 되려고 했는데,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변명' 이라는 책에 나와있는데 말이죠.
* 잔느 귀용의 '하나님과 하나되기' !!
그러면서 이 잔느 귀용이 주장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하나님과 하나되기' 라는 것인데, 이것을 '연합설'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잔느 귀용의 주장이 맞습니까? 틀렸는데, 물론 카톨릭은 두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죠. 그녀의 책이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와서 굉장히 많이 팔렸는데,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신비로운 신앙생활을 해야한다" 라는 겁니다.
이 잔느 귀용은 "나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인정하지를 못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자기에는 죄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죠. 주님이 자기를 완전히 삼켰기 때문에, 죄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참 어려운 것을 하는데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되면 자기 죄를 끄집어낼 수가 없는데, 죄가 있어야 끄집어내든지 말든지 하는데, 죄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시켜서 했는데, 그런데 그게 왜 죄가 되느냐는 말이죠. 주님과 연합이니, 신령한 기도생활을 강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잔느 귀용은 '신비주의' 인데, 반면에 카톨릭은 눈에 보이는 '제도주의' 라는 것이죠. 그런 카톨릭의 제도주의에 반대해서 신비주의를 주장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잔느 귀용은 "주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데, 그러니 지금 내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카톨릭에 핍박을 받아서 감옥에 여러 차례 갇히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몸이 쇠약해져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도 70세 가까이 살았으니 그 당시로서는 오래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여러 저서들을 남겼는데, 자기 주장이 왜 옳은지를 책들을 통해서 밝혔다는 겁니다.
* 잔느 귀용인가? 유월절 그날 밤인가?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노선을 정한다면, 이 잔느 귀용의 노선으로 가야합니까? 그게 아니면 유월절 그날 밤의 노선으로 가야합니까? 과연 어느 쪽이냐는 말이죠. 당연히 유월절의 그날 밤의 노선으로 가야하는데, 즉 십자가 노선으로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잔느 귀용과 십자가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잔느 귀용은 가능성이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연합이 되어서 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단계설을 주장하게 되는데, 즉 점점 더 수준이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 잔느 귀용은 보고 "당신은 죄인입니다. 수준은 없습니다" 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 정도는 나도 압니다" 라고 나올 것이 뻔하다는 말이죠. 즉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더욱 더 낮아져야 한다는 것, 그 정도는 나도 압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명한 신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잔느 귀용은 짜증이 나는데, 왜냐하면 이미 자기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죠. 뭔가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죠. 수준 낮은 사람이 훈계를 하면 정말 왕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데, 특히 학교에서 하는 교장 선생님의 훈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라 !!
그래서 잔느 귀용은 더욱 더 깊은 곳으로, 즉 신비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했는데, 기도를 통해서 말이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그 진리의 깊이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깊이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고통의 체험에 동참하는 것인데, 토마스 아켐퍼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주장을 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나와 붙을 자가 있으면 나와봐" 라는 것인데, 신앙의 신비체험에 대해서 한 번 붙어보자는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는 것은 잔느 귀용에게는 밑에 있는 수준인데, 이미 자기는 목숨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최고의 신부들이 달려들어서 그만 다 박살이 났다는 것이죠.
초대교회의 사도이후의 교회 지도자들을 '교부' 라고 하는데, 그런 교부들이 쓴 글을 잔느 귀용이 낱낱이 다 반박을 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신앙수준이 깊지 못해서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까불어도 상황을 보고 까불어 대라는 겁니다. 자기와 같은 신비체험이 없다고 하면 입을 다물라는 것이죠. 십자가의 엄숙함을 언급하면서 말이죠.
* 입자인가? 파동인가?
그러면 이 잔느 귀용을 어떻게 반박하면 될까요? 그녀가 주장하는 입자인데, 즉 '자아' 라는 겁니다. 이 입자가 파동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비판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부터 어떻게 입자에서 파동으로 바뀔 수가 있는지, 그것을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입자는 실체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에너지가 나온다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이 신앙의 에너지이든 무슨 에너지이든 간에 말이죠. 그런데 파동의 경우에는 실체가 아닌데,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실체는 저 멀리 있고 거기에서 힘이 나오는데, 파동, 즉 물결 자체가 나온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의 주시는 성령의 힘은 우리 자신에게로 환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로 다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힘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그 힘의 높낮이에 의해서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것이죠.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잔느 귀용이 말하기를, "그 정도는 나도 안다. 나도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기도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잔느 귀용은 자신을 하나의 입자, 즉 개체로 보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의 개체로 보는데, 그래서 같이 연합했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 예수님의 상대자는 악마 !!
하지만 예수님이 개체가 되어버리면,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데, 예수님에게는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서 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있는데, 그때 하나님의 대적자가 누구였습니까? 그것이 바로 악마였다는 말이죠.
(슥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그 악마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그때 여호수아의 옷이 더러웠는데, 여기에 대해서 악마가 시비를 걸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힌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악마를 보고 "이제 할말이 있으면 해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슥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인간이 무엇 때문에 초조합니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래서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게 남들에게 더럽다든지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란 말이죠. 인간이 악만 알면 자기가 더러워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런데 선도 알고 악도 알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해도 자기는 남들에게 선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와서 지적질을 하니, 인간은 그런 지적질을 받기 싫어서, 물론 그게 악마인지 모르지만 말이죠. 그래서 율법, 타인, 혹은 하나님에게서 지적받기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다 정숙하고 보다 순결하게 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잔느 귀용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을 주님이 받아주십니까?
* 입자를 고수하는 잔느 귀용 !!
제가 잔느 귀용의 책을 3권이나 보았는데, 그녀의 생애와 아가서와 욥기에 관한 책이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욥기의 경우에는, 정작 욥기에 대한 내용은 없고, "욥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자기가 당한 상황을 정당화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입자인데, 즉 "말씀은 '나' 라는 입자를 위해서 존재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그 당시의 문제만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닥친 문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하다는 말이죠.
잔느 귀용이 예수님을 존재로 본 것은 자기도 역시 존재라고, 그렇게 자기 출발점을 존재로 보았기 때문인데,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힘은 존재가 아닌 사건이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파동이 되려면, 우리가 왜 아담의 육신을 입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악마가 준 파동이 나온다는 말이죠.
* 의의 파동과 죄의 파동, 그리고 간섭효과 !!
그렇게 악마의 파동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의의 파동이 나와서, 그렇게 두 개의 파동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의의 파동과 죄의 파동이 같이 있어서, 이 두 개의 파동이 서로 간섭효과를 일으킨다고 했다는 것이죠.
잔느 귀용은 이것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입자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악마가 작용하는 육신을 자기가 왜 입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저 순교하고 정숙하면, 그러면 그것이 주님과의 연합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욥기에 보면, 욥이 고통을 받으면서 뭐라고 합니까?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는데, 즉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통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태어나서 힘들게 살다가 죽은 것은, 그것은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벌을 받아서 죽는다고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잔느 귀용은 그 벌이 무슨 죄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겁니다.
* 다시, '주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리' !!
교재 75페이지를 다시 보면, 거기에 "내가 주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리에서 불러야 제대로 주님을 부르는 겁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이어야 주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리가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로마군인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라고 하면, 그것은 과연 어떤 사람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라는 말이죠.
*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
다시 말해서, "'나' 라는 존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나'의 죄 값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라고 하는 자인데, 그렇게 고백하는 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겠습니까? 도저히 조롱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주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말이죠.
만약에 유월절 그날 밤에 거리에 나서서 천사들을 구경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천사들을 조롱하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날 밤에는 조용히 집에 앉아서 어린양 피의 효과만 바라보면 된다는 겁니다. 오직 피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서서 보호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인생의 키를 잡은 분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라는 말이죠.
주님은 앞에서 운전하고 우리는 뒤에 앉아있고, 그렇게 앞에 존재가 있고 뒤에 존재가 있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게 아닌데, 주님은 운전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살아있는 분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분이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 그러면 왜 죽은 분이?
그러면 왜 죽은 분이 인도하십니까? 그것은 죽은 이유를 우리에게서 찾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인데, 우리의 죄는 육신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 육신의 파동은 악마와 관련이 있는데, 그러면 악마가 하나님에게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독립선언을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악마가 인간에게도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처럼 독립하라고, 그렇게 인간을 부추겼다는 겁니다. 그 악마의 마음이 아담 내면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래서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자손들이 줄줄이 나오지만 그들이 다 죽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900년을 살아도, 결국은 죽는다는 말이죠.
(창 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6)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8)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 인간내부와 지구내부 !!
지금까지 한 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일단 인간의 마음내부로 들어가 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구의 내부로 들어가 보겠는데, 여기 중심부인 핵까지는 6,370km라고 하는데 말이죠. 땅이 있는 겉표면은 35km이고, 바다는 불과 5km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각각 대륙지각, 해양지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해양지각은 제일 깊은 곳은 11km인데, 그 11km를 빼고 5km라는 것이죠.
여기에서 대륙지각은 화산활동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일종의 구토라는 겁니다. 그렇게 지구가 토하게 되면, 내부의 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이 마그마인데, 2,980km까지 있고, 그것을 맨틀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맨들은 일년은 20cm정도 움직이는데, 즉 대륙이 이동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에는, 그게 마한, 진한, 변한의 시대인데, 그때는 중국과 제법 붙어있었는데, 황해가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언양의 반구대인데, 거기 벽에 고래그림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거기가 바다였음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게 언양에 있으니까, 울산의 바다와 제법 거리가 있다는 말이죠.
여기 맨틀에는 마그네슘, 칼륨, 철과 같은 중요한 금속들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화산활동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왔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들이 문명을 이루는 금속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석유와 같은 것은 이렇게 깊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비교적 지표면에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칼륨이라는 금속인데, 이것이 분명 지구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내부에도 보면, 그것도 인간의 뇌 속에 뉴런이란 세포 사이에 시냅스가 있고, 여기에 '칼륨+이온' 이라는 것이 돌아다닌다는 말이죠. 즉 지구에 있는 원소가 인간의 신체를 이루는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인간 신체에 있는 것이 지구 내부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 자아는 악마가 준 파동 !!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는 무엇인고 하니, 흙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 라고 하는, 즉 자아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이것은 마귀가 주었다는 말이죠. 자아는 실체가 없는데, 신체는 있지만 자아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아는 악마가 준 파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자아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버티기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잘났다. 정당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마치 악마가 하나님에게 독립선언을 했듯이,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 정신을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계속해서 물려받았다는 말이죠.
* 자아의 독립선언 !!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을 이야기해도 그까짓 것, 십자가의 피를 이야기해도 그까짓 것,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야기해도 거부하는데, "나도 어린 시절에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 가봤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결혼을 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하고, 그러니 이게 전부가 자아의 독립선언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에 끼어 들지 마세요" 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왜 자기 인생이 끼어 드느냐는 말이죠. 물론 인간은 끼어 들면 안 되는데, 그런데 끼어 들면 안 된다는 것이 인간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까지 확장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파동이 아닌 입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주신 힘으로 사는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데, 물론 말로는 "내 힘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산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주님의 힘을 사건으로, 즉 파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입자로 본다는 겁니다. 그것이 잔느 귀용이라는 말이죠.
물론 잔느 귀용은 "나는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연합된 힘으로 살아간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굉장히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입자가 아닌 파동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그런 나의 죄를 용서했다" 라고 하는, 그 자체를 위해서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 "나는 주님과 연합해서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힘을 주시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존재가 아닌, 십자가 사건 !!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것이 곧 어린양이고 보좌인데, 그것도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사건이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잔느 귀용 당시에는 카톨릭이 워낙 개판을 치던 때라서, 그 카톨릭만 반대하면 된다고 여겼을 수도 있지만 말이죠.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자마자 거기서 성령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은 어떤 사건위주인데, 즉 십자가 사건으로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거기에서 성령이 온다는 말이죠.
기존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이 요즘 유투브에 많이 나오는데, 전부가 입자라는 겁니다. 자기 구원이고 자기 교회인데, 다들 하나님을 존재로 보고 접근한다는 말이죠. "사건 앞에서 나는 입자가 아닌, 실체가 없이 잠시 나타나는 파동에 불과하다" 라고 하는, 그런 설교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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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주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리에서 불러야 제대로 주님을 부르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체가 이미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임을 통보해서, 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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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십자가 사건은 여전하다 !!
여기에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체가 이미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임을 통보해서, 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본받기 위해서 고생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고생이 파동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주님의 존재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희생이라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계신다" 라는 것을 위한 순교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은 여전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즉 "유월절 그날 밤의 공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위한 파동으로, 그 힘으로 우리가 이렇게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 요한복음 16장 8절의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말씀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예언하시기를,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을 전부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 다시 지구내부로 !!
다시 지구내부로 와서, 여기까지가 맨틀이고, 거기서 더 깊이 4,140km까지 들어가면 거기에는 외핵이 있다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이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S파와 P파를 쏘았는데, S파는 액체만 통과하지 못하고 고체만 통과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맨틀은 통과했는데, 그 다음에는 멈추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액체와 고체를 다 통과하는 P파를 쏘아서 외핵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말이죠.
외핵은 액체인데, 그래서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겁니다. 성분은 가장 무거운 철과 니켈인데, 그게 움직인다는 것은 철과 니켈에 의해서 자기장이 생기고, 그 자기장이 지구 바깥에서 태양풍을 막아주는데, 그래서 오로라 현상이 생긴다는 말이죠. 지구의 자전과 지구의 기울어짐도 바로 이 외핵에서 나오는 자기장과 전기장에 의해서 생겼다는 겁니다.
* 실체가 없는 아우라 !!
자기장과 전기장이 어려운데, 그것을 '아우라'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어렵다면 '후광' 이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천주교의 예수님 그림을 보면, 예수님 뒤에 빛이 있는데, 그것이 아우라라는 겁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인데, 석가모니나 미륵보살 그림의 뒤에 보면 그런 빛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아우라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실체는 없고 효과만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파동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즉 "파동에 있어서 그 효과가 구원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파동이고 구원이라는 것이죠.
유월절 그날 밤에 분명히 천사가 다녀갔는데, 보이지는 않지만 다녀갔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죽음의 산타인데,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의 장자들은 다 죽었다는 말이죠. 물론 대부분 애굽 사람들인데, 히브리인이라도 문에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장래가 촉망이 되던 말던 간에 말이죠.
그러면 천사가 왜 피를 바르지 않았다고 해서 죽이는 겁니까? 그것을 바로, 천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계약, 그 약속에 준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즉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것은 모두 다 죽여버린다는 것이죠. 피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
그러면 그 천사가 다녀갔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장자가 죽은 것을 보면 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양의 피를 바른 집안의 장자는 왜 죽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의 장래성을 보고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고, 피를 보고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 즉 '페사흐(넘어가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그 피의 성분을 분석하면, 거기에 니켈이 있고 철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아우라, 즉 효과라는 겁니다. 실체는 없는데 실재한다는 말이죠.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인데, 믿음의 효과가 곧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말이죠. 암에서 나았다고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들이대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병을 고친 적도 없고 부자가 된 적도 없는데,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결과로서 믿음이 생겨버렸다는 말이죠.
이것이 자기장인데, 아무 것도 없는데 태양풍이 오니 오로라가 형성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해로운 태양풍을 자기장이 수문장이 되어서 막아주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존층이 파괴가 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가더라도, 그 오존층이 뚫려버린 북극 쪽으로 가면 몸에 해롭다고 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구약을 문자로 보고, 즉 실체로 봐서 예수님에 대해서 분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분석을 하고 조사를 해도, 그렇게 조사하는 당사자가 입자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입자의 경우는 에너지가 자기 분석력이기 때문에, 판단을 하는 것도 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의인이다. 나는 죄가 없다" 라는 것을 자기가 알아서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는 것 자체가 죄다" 라는 것을 말이 통할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벌을 받아서 죽어야하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중풍병자가 몸이 너무나 아파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붕을 뚫고 내려가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보고는 뭐라고 하십니까? "몸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생각이고, 나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막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막 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우리 인간은 자기 아픈 것만을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파동이 아니고 입자라는 겁니다. 우리는 실체이고 개별자라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아우라가 있는데, 즉 "너는 구원을 받아야 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이 중풍병자는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이것이 지금 자기가 병이 낫고 하는, 그런 자기의 실리를 따질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즉 "남들은 이런 병에 걸리지도 않는데, 그런데 왜 저는 걸립니까?" 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 죄사함이 먼저 있고, 나는 죄를 짓기 위해서 태어났다 !!
달리 말해서, "죄사함이 먼저 있고, 나는 그 죄를 짓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이 말을 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한데(ㅋㅋ), 그러니 성경에는 우리가 몰라도 될 내용은 전혀 없는데, 반드시 다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내용, 듣지 않아도 되는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체라는 것은, "네가 입자다" 라고 주장하는 악마의 파동과, "내가 유일한 입자다" 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파동과의 격전지인데, 그것을 간섭효과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게 그냥 혼합은 아닌데, 그렇게 섞여버리면 안 되는데, 죄와 의는 섞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섞이지 않으면서도 같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생각하다가도 돌아서면 입자가 되어서, "이번 주에 중요한 계약이 있는데, 그러니 나쁜 짓을 하면 안 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이익과 손해를 계산한다는 말이죠. "그래도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자기 걱정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사도행전 7장을 보겠는데, 거기에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앞서 6장 15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여기 마지막에 보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 천사의 얼굴이 나온다는 말이죠. 지구가 겉표면, 즉 지각은 35km이고, 맨틀은 2,980km까지 있고, 외핵까지는 4,140km, 그리고 가장 깊은 핵까지는 6,370km라는 겁니다. 이 핵을 존재나 개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여기 핵을 통과해서 지구 반대편으로 가면 우루과이의 앞 바다가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 핵의 압력이 지각의 100만배이고, 그리고 온도는 6,000도인데, 엄청나다는 겁니다. 이게 태양의 표면온도와도 비슷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맨틀은 3,000도이고, 외핵은 4,500도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외핵을 통과해서 내핵에 이르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그러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라고 한다는 것은, 천사는 아우라처럼 실체는 없지만, 즉 보이지 않지만 실재한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계속 뿜어져 나온다는 말이죠. 마치 냄새와도 같은데, 보이지는 않지만 향기는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도 같다고 하면, 그러면 이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을 CT촬영을 하면, 과연 어느 부분에 천사가 되는 요소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 말이죠.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행전 7장에 들어가면,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하는 가운데 그 얼굴이 천사가 될 수 있는 요소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여기 55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에 충만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 그리고 나서는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것을 60절에서는 '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기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제법 길게 기록되어있는데, 이게 이스라엘의 역사인데, 그것을 설교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이 여기서 자기 존재를 이야기합니까? 지금까지의 강의내용을 참고하더라도, 집사님이 자기 개인적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우리는 같이 망했어요 !!
자기를 빼버리는데, 자기 자신을 망한 이스라엘과 같이 본다는 말이죠. 즉 "우리는 망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정결합니다. 하나님과 연합이 되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잔느 귀용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즉 "나는 기도를 열심히 해서 더 깊은 수준으로 들어갔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나만 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주신 의인을 몰라보고 엉뚱한 짓을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망해버린 이스라엘, 그리고 그 이스라엘 사람들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자기 육체나 그들의 육체나 동일하게 아담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그대로 인수인계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죄를 지어도, 나는 짓지 않는다" 라는 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모두가 같은 아담의 육체이라는 것이죠.
* 조두순이나 나나 똑같습니다 !!
그냥 깨놓고 말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욕을 하는 성폭행범인 조두순이 짓는 그 죄를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욕하는 그 사람의 육체도 아담의 육체이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육체도 역시 아담의 육체라는 말이죠. 즉 "네 파동이나 내 파동이나 질이 같다" 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그렇게 같은 육체라고 하면서도, 자기 안에 새로운 파동, 새로운 소식이 들려온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성전이 아닌 '의(義)' 라는 것인데, 누구의 의라는 겁니까? 마치 조상들이 선지자를 죽인 것처럼 우리가 잘못 판단해서 누구를 죽였는고 하니, 예수님을 죽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였다' 라는 것에서 자기 자신을 빼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관계성' 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어제 "파동은 관계성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나의 관계는 이렇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과의 관계는 의의 파동이고, 악마와의 관계는 죄의 파동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서 같이 들어있어서, 운동을 하고 있고 충돌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자아라는 허구성, 그 아우라의 실체로 인해서, 육신에게 모든 기대를 다 걸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술만 마시지를 않으면 개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 날마다 가짜 뉴스를, 그러나 !!
우리는 "내가 행동을 올바로 하면 거기서 올바른 정신이 나올 것이다" 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자기가 기대한 그 육신은 날이 갈수록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설교를 할 때 본문도 틀리고, 그리고 예를 들어도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것이죠. 가짜 뉴스를 생산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기억력이 거의 붕괴, 혹은 함몰수준인데, 즉 한 쪽이 무너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생전에 치매에 걸려있으면서, 큰아들을 오랜만에 보고 하는 말이 "아저씨는 누구세요?" 라고 했는데, 꿈에도 잊지 못하던 아들을 보고 말이죠. 며느리는 당연히 모른다는 겁니다.
그게 남의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되기 전에 죽어야지" 라고 할 필요가 없는데, 그게 입자의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함몰이 되면 편안하게 함몰이 되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몰되는 가운데서도 어린양 피의 효과는 여전하다는 말이죠. 십자가의 피는 치매에 걸리던 우울증에 걸리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 나는 파동입니다 !!
그런데 가운데 십자가 사건만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주님의 증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파동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리고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이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라고 하는 것은, 그게 자기가 잘났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육체에서 온 새로운 파동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반면에 조금 전에 이야기한 잔느 귀용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자기 육체를 신뢰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 당신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이죠. 자기 몸을 자기가 알아서 잘 관리하게 되면, 죄가 나오지 않을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담의 몸인데, 즉 주님이 이미 버린 패라는 말이죠.
아까 칼륨 이야기를 했는데, 흙에 들어있는 요소나 인간에게 들어있는 요소나 모두가 다 동일하다는 겁니다. 다같은 한 통속인데, 그러니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못난 흙, 거기에 악마의 선악체계까지 덮어쓰고 있는 흙, 그렇게 악마의 파동이 넘치고 있는 흙, 그런데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었다는 겁니까?
* 하늘에 속한 형상 !!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스스로 뛰어들어서,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부활을 시켰다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흙에 속한 형상이 있는 반면에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는데, 즉 예수님의 영광된 형상이 있다는 것이죠.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믿습니까? 우리는 믿을 수 없는데, 그런데 여기서 성령의 파동, 즉 주님의 힘이 오게 되면, 혹은 믿음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것이 믿어지는 결과가, 그런 아우라가 우리의 이 썩어지는 육체를 통해서 발현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서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게 성령을 받은, 새로운 파동이 들이닥친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이 천사가 아니라고 낙담할 필요까지는 없고 말이죠(ㅋㅋ).
* 망해야 마땅함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자기를 어디에 같이 집어넣었다고 했습니까? 자기도 이스라엘과 같이 망해야 마땅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늘 새로움을 준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잘남의 새로움이 아니고, 말씀의 새로움이라는 겁니다. 그게 평소에 알고 있던 말씀인데,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그렇게 익히 알고 있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계기가 되면,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주신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는 것도, 그것이 일상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겁니다. 심지어는 수저를 드는 것도 기적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약도 자기 손으로 뜯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함이 되고, "고맙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고맙소 !!
다시 말해서,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이 그저 주신 기적의 산물이고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불가능성에서 온 주님이 보내주신 택배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자기 입자, 즉 자아를 항상 부인하는 상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게 되면, 모든 인간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탁탁 깨우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나를 깨웠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바로 그런 자가 성도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오심으로서, 내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려고 몸부림쳤던 그 모든 일이 악마가 사주한 악마의 파동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에 참여된 것 자체가 이미 구원된 상태임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12,25 오후 4시에 마침.
비대면 크리스마스도 감사함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