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강-YouTube강의(미움 창세기 27:41)20201117-이 근호 목사
제333강, 제목은 ‘미움’. 사랑은 단독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고 미워할 자와 동반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을 만들어놓고 그 피조물 내부에 미워할 자도 따로 만들고 사랑할 자도 따로 만들었어요. 사랑하려고 전부를 만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움이 드러날 필요가 있어서 “내 미움이나 받아라, 이것들아.” 하는 그 기능 때문에 미워할 자도 따로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미워할 자를 왜 만드셨는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만든 거예요. 미워할 자와의 차별을 통해서 사랑을 더욱더 부각하기 위해서 미워할 자를 만든 겁니다. 그럼 미워할 자와 사랑할 자, 이렇게 둘을 만든 이유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이, 심판하는 기능자가 온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의 최종적인 주님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미워할 자가 있습니다.
인간보고 “너희들 중에 하나님 미워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해가지고는 자진해서 영원히 미움 받을, 저주받을 사람이라고 나설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죠. 그래서 미워할 자는 인간의 의사를 물어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찍었어요. 너는 미움의 대상이라고 찍어버린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든지, “공평치 못합니다.” 한다든지, 그것은 썩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마음에 합치되지 못한다든지 그렇게 성질 낼 자들이 필히 생겨나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그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정리해보면 강의는 쉽죠. 하나님께서는 미워할 자의 그 본질을 악마의 본질과 통하도록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꼬시도록 하여서 악마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으로 흘러가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심판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래야 미워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래서 미움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악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미움 받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악마의 마음은 뭐냐. 악마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악마자체가 독립 선언한 천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독자적으로 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다 미움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다. 그러한 성품이다, 품성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혼자 살고 싶은 사람. 독자적으로, 최종적으로.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가장 나다운 모습은 최후의 남은 일인자가 남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이 가장 나답다고 여기는 사람, 그러한 피조물들, 그러한 인간들, 그거 하나님께서 지옥 보내기 위해 작정한 사람들이에요. 말 좀 전한다고, 복음 전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미 작정을 했기 때문에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면 복음이라는 것은 그런 사람까지 돌이켜서 구원받게 하는 기능이 아니고 구분하는 기능이죠.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구분해야 될 기준이 주어지는데 그 기준이 무슨 기준이냐 하면 “나는 어떤 이는 미워하고 어떤 이는 사랑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약속 안에 담겨서 우리에게 주어져요. 언약 안에 담겨서.
창세기 27장 41절에 보면,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인하여” 그 다음에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미움 나왔죠. 축복이 없으면 에서는 자기 동생 야곱을 미워할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이 축복이라는 것이 인간 집단을 두 토막 내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 경계선 자체가 축복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동생을 전혀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미워할 이유도 없고, 사랑하고 싶어. 그런데 축복이 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동생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성경은 하시는 겁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뭐냐 하면 “형아, 너는 동생을 섬겨라.” 이겁니다. 동생을 섬겨라. 이것이 바로 29절에, “만민이 너를 섬길 것이요” 나오는 거예요.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러면 우리 같으면 동생이 되든 뭐든 하나님의 지시니까 하나님께서 섬기라니까 “그럼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악마의 마음은 뭐냐 하면 누구를 섬길 의사가 전혀 없어요. 오히려 “세상 모든 것들아, 내 앞에 꿇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직장에서 말단 사원으로 설움 받던 아버지가 집에 와서 술 한잔 정도가 아니고 그냥 말술로 먹고 가득 취해 와가지고 집안 식구들, 애들하고 불러놓고 지가 대장질 잠깐이나마 코스프레하고 나중에 코골고 자고 싶은 이유가 지가 당한 게 있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이 어린 거, 나보다 늦게 들어왔는데 자기보다 승진 빠른 사람. 존재 자체가 미워요, 존재 자체가.
또 이런 예를 들죠. 여기 만약에 빵집을 했는데 빵집이 제법 한 달에 200만원이라도 떨어지는 게 있어가지고 애 키우고, 애 학교 공부시키고 노후까지 대책하자. 이랬는데 바로 앞집에, 그것도 영업 윤리도 없이 바로 앞집에다가 거대하게 프렌차이즈 베이커리해가지고 시설 잘해놓으니까 손님들이 거기 빵 맛있다고 다 가버렸어요. 파리바게트가 빵이 맛있어요. 다른 동네가게가 못 따라간다고.
그럴 때 그 사람이 이 사람 동네 빵집을 해코지한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너는 너대로 빵집하고 나는 나대로 빵집 하는데 미울까요, 안 미울까요? 엄청나게 미운 거예요. 그렇죠? 여기 교회 있는데 저기 맞은편에 교회 하나 들어와서 교인들 다 데려갔다. 밉죠. 미우면 어떻게 하겠어요? ‘참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됩니까, 아니면 죽으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바로 그 미움을 누가 받았는가? 예수님이 받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옥 보낼 만해서 지옥 보내는 겁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서는 안받아주고 오직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받는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안했으면 괜찮은데 동네방네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너희들 아비는 악마다.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이지, 너희들 아버지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이미 가게 차려놨던, 장사했던 그 사람들로 하여금 안 죽일래야 안 죽일 수 없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악마가 이 땅에서 활동해야 했고 우리가 악마의 마음을 받는 것이 구원의 절차이어야 해요.
구원은 뭐냐. 어디서 벗어났는가. 미움 받아야 마땅한 내 마음에서, 그 악마의 발목에서 벗어난 거예요. 미움 받아야 마땅한 내 마음에, 십자가, 너는 가해자이고 나는 피해자라는 소식을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요.
사랑은 미움 받아야 되는 자에게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기심의 의미가 비로소 평생토록 계속해서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상 못할 사랑이에요. “나 같은 인간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가 사랑을 받은 사람의 확실한 징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