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얼굴

아빠와 함께 2020. 11. 18. 07:34

332강-YouTube강의(얼굴 고린도후서 4:6)20201117-이 근호 목사


제332강, 제목은 ‘얼굴’. 얼굴을 통해서 사람들은 외부와 접선을 하게 되어 있어요. 뭐 발가락가지고 하지는 않고 등짝 가지고 안하고 뒤통수 가지고 안하죠. 얼굴에 그 사람의 모든 본질이 거기 다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굴 가운데에서도 귀도 아니고 코도 아니고 입도 아니고 눈. 눈을 마음의 창이라, 이렇게 하거든요. 마태복음 6장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나와 있어요. “눈은 몸의 등불이니” 몸의 등불이니까 몸에다가 등불 켰다고 보면 됩니다, 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네 얼굴이 네 몸을 대변해준다. 몸의 속성, 본질을 얼굴이 다 말해준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까지 정리하게 되면 사람의 몸이라 하는 것은 밝으냐, 어두우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기능을 부여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나는 혼자 산다. 외롭다. 라고 하지 마시고 혼자 살든 둘이 살든 관계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낼 수가 있어요. 혼자 살더라도 눈이 밝으면 되잖아요. 눈이 밝으면 되거든요. 얼굴이 밝으면 된다 이 말이죠.

그 다음 문제는 여러분들 이제 아시겠죠. 얼굴이 밝아지려면 또는 달리 이야기하면 눈이 밝아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밝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제대로 세상에 펼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 세 사람 모여야 주의 일이 되는 게 아니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주의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친한 친구 없다고 너무 좌절하거나 낙담하거나 세상 끝낼 생각하지 마라. 이 말이죠. 아무도 나를 찾아온 사람 없기 때문에 나는 그냥 죽을래. 하지 마라 이 말이죠. 네 눈만 밝으면 되고 얼굴만 밝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얼굴의 원조가 있어요. 이 땅에서 이런 경우가 밝은 얼굴이고 이런 경우가 하나님 아버지가 인정한 얼굴이라 하는 기본 모델이 있거든요. 그 모델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입니다. 우선 4장 4절에는 세상 신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악마죠. 악마가 인간에게 어떤 작용을 한단 말이죠. 악마가 인간에게 작용을 하게 되면 이것은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나마나 그 눈과 그 얼굴은 밝겠습니까, 어둡겠습니까? 당연히 어둡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 때 눈 또는 얼굴을 하나의 가로등으로 생각하자 이 말이죠. 그러면 빛이 전기가 들어와서 거리를 밝히는 그 가로등과 이거 뭐 정전이 되었는지 가로등은 있는데 깜깜한 가로등,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신은 인간 자체를, 인간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인간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눈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얼굴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갱년기 되어서 기미 끼고 시커멓고 그런 걸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망하는 자들이 바로 어두운 자. 그 어두운 자를 4장 4절에서는 마음을 혼탁케 한다. 마음을 혼미케 한다 또는 혼탁케 한다. 이렇게 보면 돼요.

아까 마태복음 6장에서 눈이 밝아야 마음도 밝다고 했잖아요. 마음은 인간 몸의 내부니까. 그런데 여기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도 세상 신이 마음을 혼미케 한다, 어둡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 신이, 악마가 어둡게 하는 이유가, 의도가 있어요. 4장 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기능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성도는 왜 있는가. 딱 해답 다 나왔죠. 예수님이 밝히 알려준 완성된 복음을 하나의 가로등으로서 빛을 내비치는, 빛을 주는 자 또는 발광체, 보이지 않는 주님의 발광체로서 성도가 있고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악마의 어두운 기운을 발광하는 발광체가 되겠죠.

이렇게 보면 혼자 사니 외로워요. 뭐 어떻고 저떻고 하는 그런 궁시렁거리는 것은 다 주제파악이 안됐고 자기 분수를 몰라서 그래요. 이런 엄중한 임무와 사명이 주어졌잖아요. 우리 존재의 이유가. 자기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빨리 조만간 결혼하겠다. 그게 존재의 이유가 아니고 존재의 이유는 바로 광채를 비추는데 그 광채는 세상에 없는 광채고 예수님에게서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 여기 5절 건너뛰고 6절 봅시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나와 있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얼굴이라는 것은 뒤통수로 알려지는 게 아니죠. 발꿈치로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얼굴은 관계해야 될 쪽을 향하게 되어 있는 게 얼굴입니다. 참 얼굴이 양쪽에 있었다면 헷갈릴 뻔했죠. 얼굴이 사방에 다 있는 그런 피조물도 있어요, 천사. 에스겔에 나오는 천사는 사방으로 해야 될 일이 있기 때문에 소의 얼굴, 독수리 얼굴, 사자의 얼굴, 인간의 얼굴 다 기능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택한 백성 쪽으로만 비추면 돼요.

그러면 비추게 되면 택한 백성, 성도만이 그 빛이 오는 쪽으로 가만있지 않고 자기 얼굴을 어디로 돌리겠어요? 주님 쪽으로 바라보겠죠. 자 여기서 중요합니다. 주님과 그 성도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볼 때 인플레이션이 어떠니 북한 핵문제라든지 트럼프가 버티고 안 나오고 있다든지 독도가 뭐 일본 땅이냐 우리 땅이냐 하는 그런 문제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코로나 19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코로나 19문제가 들어왔다는 말은 이미 자기 얼굴을, 용도가 한 쪽에만 그리스도 광채가 비추는 쪽으로만 쓰려고 한 얼굴의 용도인데, 갑자기 본인이 본인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코로나 19에 얼굴 돌리는 순간 그 얼굴은 빛이 한 모퉁이 날라가 버렸죠. 조명발이 안 되는 거예요. 경사도가 떨어져가지고 조명발이 귀 있는데 여기 한 부분만 비추고 나머지 80%는 시커멓게 되는 겁니다.

주님 바라보면서 살아야 될 사람이 가게 개업을 했다. 가게 개업을 해도 괜찮아요. 개업을 해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개업하면 되는데, 개업하는 데에 그만 신경이 다 쓰여 가지고 본래 성도의 용도에 합당한, 주님 얼굴하고 서로 교제하라고 쓰는 얼굴을 간판 어떻게 하면 되고 메뉴판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기에 신경 써버리면 얼굴이 퍼렇게 되겠죠.

그러니까 메뉴판 신경 쓰고 손님 대접하더라도 얼굴은 항상 십자가 복음 쪽에 얼굴을 쓰는 게, 가게 열라고 하는 용도가 아니고 ‘손님 어서 오십시오’ 하는 데 쓰는 용도가 아니고 주님 빛을 비춰서 손님이 오든 누가 오든 그 빛을 되비치게 하는 것이 성도의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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