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노래

아빠와 함께 2020. 11. 4. 08:51

331강-YouTube강의(노래 시편 150:1-3)20201103-이 근호 목사


제331강, 제목은 ‘노래’. 노래라는 것이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말 따로 있고 노래 따로 있어요. 그런데 래퍼가 랩 하면 그게 노래일까요, 말일까요, 하나의 대사일까요? 점점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노래든 말이든 공통점이 있다면 내 속에 들어있는 한(恨) 또는 표출하고 싶은 응어리진 내 감정 덩어리, 이런 것들을 입술을 통해서 소리라는 그러한 형식을 통해서 내뱉을 때, 패턴이 있으면 노래고 패턴이 없으면 그것은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노래나 말이나 그 본질은 모두다 인간의 응어리진 것, 속에 가만히 담아두기 힘든 것, 혼자서 꾹 삼킬 수 없는 것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올 때 노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말이라 해도 되는데 노래가 왜 특별하냐.

노래는 말이 발달된 것인데 사람들의 말에다가 인간의 감정 변화를 거기다 실어버렸어요. 감정변화를 실어버리면 그 말을 전달해서 사람들을 하나의 밴드, 하나로 묶는 것보다도 감정을 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강강술래 같은 옛날 전래 노래가 그렇게 되죠. 그런 노래들이 ‘강강수월래’ 그냥 말하는 것보다도 가락을 타는 거예요. 가락을 타고 리듬을 타게 되면 인간 감정이라는 그 에너지가 같이 동조현상이라 하는데, 누군가 이야기하게 되면 메아리치듯이 온 천지에 갑자기 다 파급되는 것처럼 새로운 감흥에 잠기는 분위기를 유발하는 데에는 딱딱한 말, 연설보다도 노래가 아주 직효죠. 거기다가 기타 쳐대고 드럼까지 쳐버리면 새로운 감흥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사람들은 소리예술이라 하는데 소리예술의 특징은 없는 기쁨과 또는 슬픔, 없는 감정을 그 현장에서 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그런 편리함 때문에 음악에 대해서 사람들은 즐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음악을 사람에게서 시작했다는 점을 유념해주시고 그 목적도 사람의 기분을 맞춘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150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 보면 인간이 소리를 낼 수 있고, 그 소리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심, 감정을 담아서, 소리 에너지에 담아서 퍼뜨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에 허락했다고 나와 있어요. 그러면 구약 이스라엘이 찬양하는데 있어서 그 찬양의 원조라고 할까, 그게 누구냐 하면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입니다.

천군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사야 6장에 보면 날개 6개 달린 스랍이라는 천사가 나오죠. 가사도 있죠.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리고 누가복음 2장에 봐도 들판에서 양치는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죠. 천사가 나타나서 누가복음 2장 18절에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천사의 찬양과 지상에서 인간이 하는 노래하고 그 차이점이 뭐냐. 이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죠.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인간의 억눌린 그 한, 억눌린 감정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모든 억울함, 뭐 억울한 것도 없지만, 억울함과 서러움과 삶의 아픔과 애환 이런 것들이 거기에 다 담아져 있고 녹아져 있죠, 인간의 노래 속에는.

사랑노래를 한다는 것은 사랑 없이 사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나의 힘든 것을 사랑으로 채워달라는 부탁의 하소연이죠. 그렇게 해서 사랑을 얻어놓고는 사랑 얻었다고 좋다고 또 기쁨으로 사랑노래를 부르잖아요. 없을 때는 사랑타령하고 사랑이 있으면 드디어 얻었다고 또 기쁨의 사랑노래를 부릅니다. 부르다가 또 둘이 깨어지면 이번에는 이별의 노래를 불러요, 이별의 노래를.

그러니 세상의 노래란 뭐냐 하면 자기 몸 위주이죠. 이 세상이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힘들어서 못 사니까 순간순간 나를 달콤하게 위로해주고 나로 하여금 힘든 것을 잊게 하는 그런 가락이 내 귀에 들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술을 왜 먹느냐 하면 술이라 하는 것을 먹는 순간 내가 초죽음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있어요. 죽음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든요. 죽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거잖아요. 술을 먹는다는 것은 떠나기 싫다는 거예요. 내가 이 땅을 떠나서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이 세상에서마저 내가 실패자 되는 것을 내가 못 견디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술을 먹게 되면 죽음의 공포를 잠시 잊을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당기는 힘을 내가 잊을 수가 있어요. 기분 좋죠. 여러분들은 예수 믿기 때문에 술을 전혀 먹어본 적이 없잖아요, 단 한 방울도. 단 한 방울도 먹어본 적이 없죠. 고개 끄떡끄떡하고 있는데. 술이 뭐에요? 이 정도잖아요. 아침이슬이 뭐예요. 이런 거. 요새 소주 한 병이 얼만지 난 전혀 몰라요. 이렇잖아요. 술을 먹는 사람은 자살 대용으로 먹는 거예요. 자살 대신 술 먹겠다. 술 먹을래, 자살 할래? 그런 거예요. 나랑 사귈래, 술 먹을래, 죽을래? 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찬송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어요. 어떤 계획? 떠나버려라. 이 세상 미련두지 말고 훌쩍 떠나. 그것을 바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술 취하는 것과 대비해놨어요. 5장 19절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했죠. 이 내용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한 현상은 술 취함과 반대에요. 술은 왜 먹는가. 이 땅에서 쫓겨난 이 세상 삶이 너무나 서글퍼서 먹어요. 기뻐서 먹는 것도 있지만. 기뻐서 먹는 것도 이 기쁨이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 술로써 더 연장시켜보려고 술을 먹는 거예요. 그 기쁨은 얼마 안가서 시들해질 게 뻔하기 때문에 술로써 계속 이어보는 거예요. 결국 술이라 하는 것은 살기 괴롭다는 거예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지배하고 괴롭힌다는 겁니다. 그래서 술로 자기 마음을 달래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소위 찬양, 가스펠송, 찬양 집회를 술 대용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술 먹는 대신 찬양해서 이 세상 계속 살려고 하지 말아야 돼요. 시와 찬미는 그런 게 아니에요.

시와 찬미는 모든 것이 주님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주어진 모든 일도 합력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된다고 생각해서 주신 일이기에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그대로 주어질 수 있도록 하신 것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주님 이런 은혜를 주셨네요. 진작 어제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으니까 찬미밖에 나올 게 없네요.’ 이래서 하나님께 감사, 감격해서 부르는 노래. ‘언제든지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어도 상관없어요.’ 라는 기쁨에 잠겨서 부르는 노래. 이게 피조세계, 천사에게, 성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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