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강-YouTube강의(자유자 고린도전서 9:1)20201020-이 근호 목사
제329강, 제목은 ‘자유’. 아까 328강에서 ‘속죄’라고 했죠. 속죄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속에 우리가 합류되면 우리가 이미 저주받은 사람이 되버리죠. 저주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약의 법에 의해서 속죄제사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제사에 제물이 들어갈 거잖아요. 제물이 들어간다면 그 제물하고 구약에 있는 자기 이스라엘 백성,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속시킵니다. 하나로 만들어요. 이 말은 제사를 하나님께서 응답해버리면 그 효과가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그 효과가.
구약에서 나타난 그 효과란 뭐냐 하면 아주 단적으로 눈에 확 띄게 말한다면 바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이지만, 더 본격적으로 점점 발전되게 되면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리고 약속의 땅에 있는 각 좋은 지역마다 기존의 본토박이들이 있죠. 그들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별로 한 게 없어요. 그냥 다 끝나고 난 뒤에 전리품 챙기듯이 그냥 챙겼을 뿐입니다. 이게 효과에요. 또 이런 효과가 있죠.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 다윗 덕분에 사울에 속한 이스라엘 군사들이 승리를 얻었잖아요, 다윗 덕분에. 자기들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 그냥 싸움 구경했죠.
그렇게 보게 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다윗이고 예수님이 희생제물이라면 우리가 예수님 보고서도 다른 데, 더 좋은 것에 눈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내가 살아있는 혜택, 교통사고 나서 그 순간 내 목숨이 없어져도 되는데 아직 목숨이 유지되는 것 보니까 어떤 혜택을 입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입니까.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 할 때 사람들은 그 혜택을 입었다는 생각을 못하거든요. 그러나 성도는 누구 덕분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혜택을 입었는지 안다는 것. 안다는 게 뭐냐 하면 주님과 관련성, 관계성을 지으면서 아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9장 1절에 보면,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라고 했어요, 사도가. 자기보고 자유자라고 이야기해요, 자유자. 이 자유라는 말을 그 당시 사회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이것은 왕이 아니고서야 사용을 할 수 없어요. 세상 법에 저촉 받죠, 종교적으로 율법에 저촉 받죠.
자유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어떤 것에도 저촉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유라는 뜻이. 나를 질책할 게 이제는 없다는 거예요. 나보고 뭐시기 뭐시기 할 수 있는, 나무랄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나에게 도착하지 못한다. 네 행동 봐. 하고 우리 행동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는 거예요. 이게 자유입니다.
로마서 8장 같은 데에 아주 강조되고 있어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아 진짜 이거 배짱, 대단한 배짱 아닙니까. 누가 함부로 나를 정죄해. 나를 위해서 대신 처리하신 분이 주님이신데.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그걸 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마음으로 자유롭지를 못해요. 교인 누구 나갔다. 뭐 이런 거. 자유롭지를 못해요. 왜 자유롭지 못한가. 본인이 본인을 정죄해버리거든요. 내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돼. 내가 나를 나무래. 이 정도 되어야 되는데 얼마나 모든 게 어설프면 이렇게 떨어져 나가는가.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책망을 한다고요. 내가 나를 발목 잡아요. 가정이 있는데 돈도 못 벌고 어딜 돌아다니느냐.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굉장히 꾸짖어.
그런데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본인을 본인이 뭐라고 합니까? 자유다. 나 구애받지 않는다.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일을 해요. 그러니까 여기 9장 3절에 보면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나는 누구로부터 “다오, 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정도로 나는 자유롭다. 아무나 해서 집에 들어가 “먹을 것 내놓으세요” 하는 것처럼 그러한 자유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 보면 곡식을 밟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어요 (고린도전서 9장 9절, 신명기 25장 4절). 그러니 사도바울 자기는 복음을 전하는 소인데 소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소의 권리이다. 소의 권리인데 나는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그런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사용하지 않는 자유.
그래서 이것은 이렇게 보시면 제일 쉽습니다. 이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얻어진 자유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주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이 자유를 누리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사람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사람의 평가에. 나를 평가하고 나를 지켜보시는 것은 나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줬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는 말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이고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게 뭐냐 할 때 “자유입니다”해도 되고요. “예수님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었다.” 이게 더 밀도 있는, 더 본질에 가까운 고백이라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자유를 우리한테 주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힘이 없어 십자가 달린 게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달리라 하니까 달린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남한테 생활비를 얻어도 되는데, 아버지의 뜻이 ‘생활비를 얻지 않는 것으로 네가 주님께 받은 그 자유를 보여라’ 하는 그 지시에 따른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자유라 하는 것은 철저하게 주님 말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주님 말도 안 듣고 자유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 말도 안 듣고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속죄해주신 주님의 말을, 듣지 말래도 나는 듣고 싶어요. 속죄를 해줬으니까.
내가 가야될 지옥을 누가 다녀갔어요? 주님이 다녀갔으니까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혼자 살기 싫어. 누구 말 듣고 살고 싶어. 주님 지금은 뭐할까요? 다음에는 뭐할까요? 이거 뭐할까요? 여기서는 뭐할까요? 2시간 뒤에는 뭐할까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늘 주님의 지시받는다면, 너는 자비량 해. 네, 자비량하겠습니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자유를 내 몸을 통해서 내 삶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아버지의 지시대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