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9a 부산강의 : [시편]33(21편)-깔때기 은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1편입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딱 나오지요. 왕. 이스라엘 왕이란 화살표가 앞에 주의 힘에 의해서 왕이 된다면 그 왕에 속한 이스라엘도 무엇으로 유지됩니까? 주의 힘으로 유지되지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가면 뭐냐 하면 크게 쓰겠어요. 천국은 또는 영생은 거저주심입니다. 천국과 영생은 거저주시는 거예요.
거저주심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출생은 우연이어야 하는 거예요. 지금 ‘우연’이란 단어 나왔지요. 처음에 무슨 단어 나왔습니까? ‘주의 힘’ 나왔지요. 그 다음에 ‘거저주심’ 나왔지요. 서로 세 가지의 단어가 연결이 되지요. 연결시키면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다. 그 다음에 우연히 태어난 것처럼 천국도 거저주심이란 것은 우리가 예상 못하고 우연한 거예요. 우리가 우연히 태어난 것처럼. 그런데 그 우연은 다 어디서 나온다는 말입니까? 주의 힘에서 나오지요.
어떤 분의 사돈이 저녁 먹다가 ( )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다 뭘 집어넣어요? 나이가 68인데 저녁 먹다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이 괄호에 뭘 집어넣습니까? (갑자기) 이 갑자기를 집어넣으면 안 돼요. 왜? 갑자기를 집어넣으려면 우리가 오늘 모임도 갑자기 된 거예요. 오늘 아침 먹은 것도 갑자기 먹은 거고. 이건 너무 번거로워요. 그럼 갑자기를 빼버립시다.
갑자기를 빼버리면 주의 힘으로 저녁을 먹었고 주의 힘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그 사람이 태어날 때 주의 힘으로 우연히 태어난 거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우연히 주어진 거저주신 성령이 없다면 성령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어디 가느냐 하면 당연히 지옥에 가지요. 왜? 거저주심이 없으니까. 지옥에 간 사람은 거저주심이 없어요. 자기가 노력한 만큼 인생을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만 있어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평소에 말하는 걸 보세요. 제가 오후 설교 기도시간에 이렇게 했어요. 인간은 중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늘 전도해요. 늘 전도하고 늘 발산하고 늘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는데 그게 뭐냐 하면 불신앙을 늘 전도하는 거예요. 사람은 툭 건드리면 전도해요. 안 건드려도 전도하거든요. 방송에서 예능이고 뭐고 노래고 그건 늘 전도하고요.
사람은 거저주심이 아니고 애쓴 만큼 주신다는 것, 그걸 이 세상에서 지옥의 도, 악마가 지옥 가기 위해서 퍼뜨린 가짜뉴스들이 계속해서 티비만 틀면 24시간 나옵니다. 홈쇼핑부터 해서 쉬지도 않고 나와요. 사람을 지옥 보내는 도, 사람들은 그걸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방송만 그럴까요? 교회도 그렇잖아요. 하나님, 예수님 다 이야기하는데 그게 지옥 보내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노력을 하고 봉사해야 됩니다. 그래야 천국 갑니다.
천국의 거저주심을 사람들은 안 받아들이는 이유가 자기가 태어난 것이 안 태어나도 되는데 우연히 태어났다는 걸 모르고 태어난 것뿐만 아니고 40, 50, 60, 70, 80 살아온 그 하루하루가 없어도 되는 날을 주께서 거저주심의 배려차원에서 계속해서 지연시킨 겁니다. 이어온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주의 힘이죠.
이 주가 신약에 오게 되면 시편 21편에선 여호와지만 주의 힘이 어떻게 됩니까? 왕에게 주의 힘이 플러스 결합이 되면 이게 누구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천국은 내가 원하는 사람 거저 간다는 것을 그냥 구름 위에서나 선지자에게만 준 게 아니고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말만 하신 게 아니고 그냥 십자가에 죽으신 거죠.
그러면 주의 힘의 목표가 있을 건데 주의 힘의 목표는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의란 무엇인가? 반대말, 죄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주의 힘이에요. 삶은 무엇인가란 노래 있지요. 의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는 어디에서 구체화되느냐 하면 지옥 불에서 구체화되고 의란 무엇인가는 천국에서 구체화되는 겁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주께서는 우리에게 힘주시는 거예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인간을 태어나게 하셔서 한쪽은 의를 담아버리고 한쪽은 죄를 담아버리는 겁니다. 일방적인 겁니다. 우리가 손쓸 틈이 없어요. 주께서 거저주시지 않는 한 교회에서 교육시켜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연은 땅에서는 계속 우연이어야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방금 제가 이 땅에서라고 했지요. 이 땅에서는 우연이어야 돼요. 이 땅에서 우연이니까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표면이라 합니다. 껍데기지요. 어떤 사람은 게 껍데기, 돼지 껍데기 좋아한다는 데 나는 별로에요. 세상은 여기에 바퀴벌레처럼 살아갑니다. 수평적 존재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이 표면 밖에 못 봐요. 뭘 못 보느냐 하면 심층을 못 본다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표면에 오셨거든요. 표면에 오셔서 무덤 속에 들어갔는데 그 표면에 있는 유대인들이 무덤을 조사해보니까 나중에 무덤에 시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시체가 없었어요. 주님은 심층을 거쳐서 심층세계에 가버렸어요. 표면을 표면 되게 하는 심층세계.
심층세계는 아까 처음 이야기에서 무슨 힘입니까? 주의 힘으로 구성된 심층세계. 심층세계가 이 위에 표면을 남기니까 인간들은 바퀴벌레처럼 이 위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드론이 없어요. 지표면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이란 것. 제가 지표면만 봤는데 이걸 위에서 봅시다. 위에서 보면 지표면의 실정이 잘 나타납니다.
위에서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전부 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쟁마당이에요. 어떤 사람은 앞서가고 어떤 사람은 뒤처지고, 전부 다 순위매기는 세계, 이게 뭐라고요? 표면. 예를 들어서 키, 그 다음에 건강상태, 아이큐, 조기에 영어 했는가, 컴퓨터 어느 정도 가능한가, 진도 어디까지 나갔는가. 회사도 마찬가지에요. 이쪽 회사, 저쪽 회사 어느 쪽이 더 매출액이 많으냐.
위에서 보면 전부 다 작대기에요. 어디까지 목표량을 채웠느냐. 이겁니다. 교회 교인 수는 몇 명이냐. 이런 거예요. 위에서 보면 이런데 옆에서 보면 전부 다 바퀴벌레 생활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이 표면에서 저녁 먹다가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표면의 세계는 알 수가 없어요. 심층의 세계를 모르니까. 심층의 세계는 주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심층의 세계를 알려면 주의 힘을 내용을 거저주시는 성령을 받아야 주의 힘의 내막을 알 수 있어요. 표면적 존재가 아닙니다. 심층적 존재에요.
제가 지금 오늘 시편 21편에서 왕 이야기 나오고 그 뒤에 보면 왕이 하는 일이 있어요. 그냥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받아먹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복면가왕의 가왕은 그냥 자리에 앉아있지요. 남 노래할 때 마스크 쓰고 앉아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의 왕은 누구보다도 부지런하시고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해서 쉬지를 않아요. 쉴 틈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가? 대적과 싸움을 하시는 일을 합니다.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주의 힘에 의해서 뭐가 됐다? 왕. 이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주의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런데 주의 힘이 신약에 오니까 천국을 어떻게 준다? 거저주시는 거예요. 주의 힘에 의해서 거저주시는 거예요. 주의 힘에 무엇이 섞이면 안 돼요? 나의 힘이 섞이면 돼요, 안 돼요? 나의 힘이 섞이면 거저주심이 파토나 버립니다.
내가 집어넣은 그 힘은 주님께서 샅샅이 살펴서 다 빼냅니다. 빼낼 때 아파요. 너무 아파요. 거저주신다고 했건만 우리의 땀과 노력을 자꾸 섞어 넣는 겁니다. 안 섞을 수가 없는 거예요. 섞으니까 족집게로 하나하나 뽑아내는데 그게 엄청 아픕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21편의 강의의 주는 뭐냐 하면 이 대적을 알아야 돼요.
누구의 대적? 주의 힘으로 왕이 되시는 거기에 대한 대적의 속성은 본질은 바로 뭐가 없겠어요? 주의 힘이 없는 그런 자생적인 표면을 이미 장악한 악마의 힘에 의해서 등장하는 대적이 되겠지요. 이 대적은 지상의 신이고 지상의 왕이에요. 지상, 표면세계, 바퀴벌레의 왕이에요. 바퀴벌레 왕이니까 대적 밑에 자기 졸개들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엄청나게 많지요.
예수님도 적은 자여 두려워 말라. 천국이 너희 것이라. 거저주시는 자가 상대적으로 너무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적은 자라 이야기했고, 마태복음 7장에서 생명의 길로 가는 사람은 많다, 적다? 적다지요. 우리 진자교회 교인 몇 명입니까? 많다고 볼 수 있어요. (적습니다) 기뻐하라, 복인 줄 알아라. 이렇게 된 거예요.
대적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갑니다. 우리 보기에 숫자가 아깝다 하지만 아깝지 않아요. 그 모든 숫자는 주님의 유일성, 예수님의 유일성 때문에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많은 다수가 만들어내는 그럴싸한 왕,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대다수의 부러움을 사는 그 왕과 절대적으로 대조를 이뤄야 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숫자가 소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소수지만 없다고 생각하니까 의외로 많은 거예요. 없다고 생각하니까 주님, 천국 가는 사람을 왜 이렇게 많게 했어요, 라고 되려 놀래버려요. 본인들이 놀래요. 왜? 없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전부 악마 손에 넘어갔잖아요. 예수님과 악마의 광야시험에서 보면 이미 세상 모든 권세와 모든 것은 전부 다 누구 손에 넘어갔다? 악마의 손에 넘어갔고 고린도후서 4장에도 이 세상의 신이라 했어요. 에베소서 2장에도 이 세상은 이미 누가 접수했느냐? 불순종한 영에 의해서 접수가 된 상태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중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요. 뭔가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뭘 만나도 전부 다 지옥 가는 그 도, 지옥 가게 하는 그 의견만 늘 하수구에 구정물 나오듯이 어디 가도 구정물 나와요. 티비에도 구정물 막 나오는 거예요. 이게 행복이다, 이게 인간사는 것이다. 드라마도 쭉 나오는 거예요. 가정이 화목한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원수가 집안 식구인데 어떻게 할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의 이삭을 죽여야 되는데요? 이스마엘은 쫓아내야 되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은 죽여야 되는데 거기에 무슨 혈육이라는 게. 혈육과 약속은 대체관계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모세가 숙소에서 하나님이 죽이려고 한 이유가 육으로 이스라엘 만들겠다고 나왔으니까 주께서 육을 죽여 버린 거예요. 모세를 죽인다는 것은 육을 죽인 거예요.
모든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의 육으로서는 육일뿐이고 하늘나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을 대적해서 육 자체의 문제성을 지적하면서 주의 힘이 왕에게 힘을 실어주는 겁니다.
이것을 이제부터 표면 이야기합니다. 표면 이야기할 때 복잡하지만 간단한 단어 몇 개로 축약할 수 있어요. 이렇게 됩니다. 반대의 증식. 시험관에 세균 증식하듯이 이 세상은 폭발하듯이 주님을 반대하는 그 힘이, 악마의 힘이죠. 그게 계속 증식합니다. 계속 만들어져요. 그래서 교인수가 적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의외로 많다고 생각하세요. 다음 주에 몇 명이 빠질지는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빠지더라도 걱정하지 말아야 될 것은 어차피 우연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오게 한 것도 우연이기 때문에.
저녁 먹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은, 여러분은 저녁 먹다 안 돌아가신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태어날 때도 내 뜻에 신경 안 쓰고 일방적으로 했다면 죽게 하는 것도 얼마든지 주께서 발휘할 수 있는 주의 조치란 말이죠. 이게 주의 힘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과 사나죽으나 주의 것(롬14:8)이란 말과 같은 말이에요.
욥 같은 경우에는 아예 가져가세요, 되는데 이미 어른 되어 한평생 죽을 둥 살 둥 그렇게 고생해서 돈 얼마나 모았으면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란 게 인력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인간 힘으로. 대적은 주장하는 것, 악마가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 힘은 결국 인간으로 돌아가게 돼있다. 장담한다. 이게 악마의 큰소리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용쓰고 애쓰고 예수 믿고 천국 가려고 백날 교회 나와 봤자 결국 어디로 귀환됩니까, 소급돼요? 아이고, 안 되겠다. 결국 안 되겠다는 것으로 돌아서버려요. 원래부터 안 돼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아무리 해보세요.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이론상으론 되는데 딱 건드려보라고요. 주여, 내 것 왜 뺐어갑니까, 이렇게 나온다고. 주의 것이 아니란 말이죠.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란 이 상태에서는 나의 것은 있다, 없다? 나의 것은 없는 거예요. 그냥 우연한 존재는 우연으로 늘 살아야 되는데 인간은 나를 위해서 우연이 아니고 필연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주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누가 오느냐 하면 주의 힘이 작용하게 되면 주의 것이 돼요.
그러면 반대증식이란 것은, 여러분이 눈치 챘겠지만 주의 힘이 갖고 있던 거저주심으로 인하여 거저 죄 사함, 거저 은혜주심, 거저주심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반대를 증식토록 하신 거예요. 악마의 세력이 커지도록 주께서 그렇게 허용을 하신 겁니다. 그래야 뭐가 돋보이느냐 하면 천국을 공짜로 온 게 돋보이잖아요.
어제도 그 비슷한 이야기했습니다만 마트에 영생을 팝니까? 마트에 가도 구할 수 없는 영생을 거저 주었잖아요. 우리는 뭘 구한다는 것은 마트 가서 사요. 얼맙니까? 그런데 마트에 없는 영생을 거저 줬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많은 값을 치러도 우리는 땡 잡은 거예요.
그런데 방금 제가 한 이 이야기를 아직 영생을 거저 안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습니까? 영생을 안 받은 사람이 이 이야기 들으면 격분하지요. 내 노력한 게 뭐가 되느냐, 당신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와락 달려들지요.
그 달려드는 힘이 뭐냐 하면 이게 반대의 힘이에요. 반대의 힘이 가만있으면 사람이 점잖아요. 그런데 건드려줘야 돼요. 주의 거저주심이 오게 되면 숨겨진 반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자기끼리 힘을 통합하고 단합해요. 이게 반대가 증식되는 겁니다. 표면에. 그러니까 심층세계 말고 표면의 세계는 되게 요란스러워요.
전에도 예를 들었지만 미꾸라지를 잠재울 때는 소금 뿌리면 되지요. 배추 숨죽일 때도 소금을 뿌리면 되지요. 주님께서 고요한 평화로운 이 땅에다 소금을 뿌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가 준 삶의 원리가 진리인 줄 알고 거기에 온통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사람한테는 본인의 본색, 악마의 종이란 사실이 발각되는 것에 격분하게 돼있어요.
이 작업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을 하나로 봐서 이스라엘과 그 외에 모든 민족에게 이스라엘에 거저주심으로 다른 민족을 붙여주는 전쟁을 벌였거든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여호수아까지. 이방민족을 약속의 땅을 접수할 때까지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의 단체가 되어 쳤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른 민족의 표면을 구성하는 심층을 발췌하는 그들이 주에 반항한다는 그 사고방식을 발췌하는 효과가 아주 탁월합니다. 이스라엘이 쳐들어오는 것을 겁냈던 여리고 성의 사람이 있었지요. 여리고 성 침범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쳐들어오는 것에 겁을 먹고 미리 나서서 항복을 한 사람, 살려주세요, 한 사람이 있었어요. 기생 라합이죠.
마지막 심판 오기 전에 십자가 동창생으로 같이 십자가 달렸다가 알아서 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 그 구원받은 강도가 얼마나 놀라운 거저주심을 받았는지는 그 상대역에 있는 아주 독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게 지옥 간 강도. 이거는 직업이 문제가 아니에요. 인품의 문제가 아니고 양심이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의도한 것이 서로 대비되는 대조가 되는 두 상대자를 통해서 감춰진 주의 뜻이 확실하게 드러났어요.
너는 뭘 해서 주의 나라를 네 나라라고 동질성으로 여기느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는 길과 예수님의 자리와 강도인 자기의 자리를 일치된 걸로 봤거든요. 왜냐하면 같은 주님이 주신 힘이 있으니까. 흘러들어온 게 같은 종류의 것이 흘러들어왔으니까요. 자기가 악마의 종 맞는데 뭔가 낯선 게 흘러들어왔어요. 이질적인 것이, 주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온 겁니다.
오늘 제목을 이걸 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냥 후보에 불과합니다. 꼭 그걸 한다는 말은 아닌데. 제목을 미리 이야기하면, 깔때기. 깔때기인데 이걸 아주 더 심도 있게 말하면, 물고문. 중앙정보부에서 물고문 시키는 것. 그런데 어떤 물고문이냐 하면 은혜의 물고문, 깔때기에다 입 벌리고 은혜를 넘치도록 해버리면 당사자는 켁켁거리며 건들 수가 없습니다.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니까 인간은 육의 본성이 있잖아요. 악마의 말이, 이 세상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까 막대기에 달리는 그게 인간의 낙이고 인간의 성공이라고 우기면서 살아왔던 그게 갑자기 입 벌리고 하늘나라 정보부에서 깔때기 꽂고 은혜를 쏟아 부으니까 감당이 안 되네. 개구리 배처럼 터질 지경이에요.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안 나가려 하고 지 잘난 것은 유지하고 싶고, 깔때기 위에서는 이래도 안 나갈래, 하고 억누르고 있고 버티다, 버티다 터져버려요. 인간의 몸이 찢어진다고. 그래도 주님의 은혜는 포기를 모릅니다.
이스라엘 속에 이미 여호수아 땅의 정복까지는 자체로 순하게 넘어갔어요. 그때는 여호수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기도하게 되면 하늘의 해도 멈추고 멋있게 승리해서 우리한테는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지요. 일단 땅을 접수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 땅에 누가 오느냐 하면 장차 왕이 오셔요. 주의 힘에 의해서 왕이 오신다고요.
왕이 오시면 왕에 부합되는 왕을 왕답게 만드는 적합한 누구만 있어야 하면 백성만 있어야 돼요. 그 백성에 그 왕이어야 된다고요. 백성의 환호성을 들을만한 왕이고 왕은 그 환호성을 들을 수 있도록 왕이 아버지 하나님께 받았던 그 왕, 주의 힘에 의해서 받았던 그 왕다움을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고 흡수가 되고 감사가 되고 찬미가 되는 백성들만 남아야 돼요. 남은 백성들만 있어야 돼요.
그런데 여호수아가 땅을 접수한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심층적 이스라엘이 아니고 반대로 뭡니까? 표층적 이스라엘이에요. 이건 뭐 애굽 사람이나 원주민과 똑같아. 그냥 똑같아요. 약속의 땅에 집 짓고 잘 먹고 배부르니까 그 다음부터 뭘 찾았습니까? 내가 잘났음을 긍정해 줄 신을 찾아요. 그게 여호와의 이름이라 하든 무슨 이름이든 관계없이 내가 잘나서 이런 복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해 줄 신을 찾는다고요.
여기서 신명기 봅시다. 신명기 9장 5절 누가 읽어보세요.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약속의 땅, 그 왕에 부합되는 백성들은 의로워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의로운 민족을 집어넣고 악한 민족을 쫓아낸 게 아니고 동질의 악한 민족에 악한 민족으로 추방함으로 말미암아 표면적으로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는 경쟁마당에서 초월해서 너, 나를 거저주심으로 일방적으로 교체하신 그 차이 속에 새롭게 등장하신 왕이 진짜 왕이에요.
양쪽 다 자기 공로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 나는 잘나서 천국 가고 너는 나보다 못나서 지옥 간다는 그걸 없애버리는 그걸 뭉개버리는 그 사이에서 선악의 구조, 인간으로 선악으로 따질 수 없는 분이 등장함으로써 선악을 따지지 않는 왕이 선악과 상관없는 백성들만 여기 남아있어라. 선과 악, 잘났다, 못났다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자만 여기 남아라, 천국 가거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공과 실패를 살면서 생각하지 않는 백성이 되어라. 이게 천국 백성의 특징이에요. 왜냐하면 성공과 실패는 경쟁에서 일어나거든요. 너는 건강한데 나는 아프다. 그래서 나는 졌다. 이렇게 된다니까요. 너는 돈 있는데 나는 돈 없다, 가난하다. 그래 난 패배했어. 이렇게 된다고 모든 게. 모든 게 비교, 경쟁이 되잖아요.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은데 표면적으로 똑같아요. 전부 다 마귀 들린 점에선 차이가 없는데 차이 없는 것 가운데서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차이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악마가 대장질을 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들어내느냐 하면 질서를 만들어낸 겁니다. 질서 앞에 이것 하나 집어넣으면 쉬워요. ‘법’질서.
법은 어디서 나온다? 세상의 힘. 세상의 힘은 악마의 힘에 의해서 힘이 있고 그 힘에 의해서 법이 만들어지고 법이 질서가 됐지요. 그러면 주님의 힘, 메시아가 올 때는 여기서 뭐가 증식되느냐 하면 무질서의 증식이지요. 주님은 세상 법에 말을 안 들어요. 왜? 세상 법은 누가 의롭고 누가 악하냐를 선악 사고방식에 의해서 이미 정리정돈을 끝낸 상태입니다.
욥의 친구 말처럼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데 그 복이 뭐냐? 부자 되고 건강하고. 이건 욥기에 보면 쭉 나오고 있는 일관성 있는 주장이에요. 욥의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하나님과 무엇과 연관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고 선하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되는데 구체적인 증거가 뭐냐? 건강하고 부자 되고.
그 잣대로 욥을 보니까 욥은 어떻습니까? 건강하지도 않고 있는 재산 다 날렸으니까 누가 봐도 이 세상에서 표면적에서는 바퀴벌레 세계에서는 죄 짓은 게 분명하다고 된 거예요. 그런데 어제 오후 설교처럼 그들의 말하는 기준에 의한 악함의 조건을, 저주받은 조건을 누가 다 뒤집어쓰고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뒤집어쓰고 온 거예요.
반길 사람 아무도 없고, 흠모할 사람 아무도 없고 배척당한 게 마땅하지요. 배척당하면서 주님께서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됐어요. 세리와 창기의 친구, 병든 자의 친구, 이게 전부 뭡니까? 저주받은 부류에 속해요. 이 땅에선 질서가 잡혔으니까 그 질서체제 제일 바닥의 질서가 뭐냐 하면 저주받은 자들이 다 분류돼있어요. 한데 모아져 있다고. 거기 있거든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게 분류가 될 때 피라미드구조에서 제일 바닥에 있는 이건 죽으면 곧 지옥 갈 사람들로 그 당시에 법질서로 분류가 돼있거든요. 여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거예요. 희년이 되게 되면. 이거는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바닥에서 복음이 전파돼야 돼요. 기쁜 소식은 위해서 전파되는 게 아니고 바닥에서 환영받고 위에서는 거절당하고. 이 바닥 중에 바닥이 뭐냐 하면 십자가 처형당하는 것, 아주 잔인하게. 죽어도 곱게 저녁 먹다가 돌아가신 게 아니고 공개적인 웃음거리, 똑똑한 척하다가 당하기는 혼자 당하는, 공개적인 웃음거리로 창피를 당하는 일을 겪을 때 죽어도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비참하게 온갖 설음과 억울함을 겪으면서 죽게 만듭니다.
이 바닥이 표면구조에서 표면층에서 버림받았으니까 이 층의 내막이 뭡니까? 심층 층이죠. 안에 심층의 구조에요. 표면에 가려진 바닥, 진짜 밀려나간 자들의 모임, 그쪽이죠. 이 세상의 법질서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지옥이라 해요. 그걸 이단이라 하고 예수님 보고 악마의 괴수라고 했어요. 오야봉.
그러니까 악마의 세계에서 뭘 논합니까? 악마를 논하고 지옥을 논하는 거예요. 천국을 논하고. 막 나가는 아침드라마 보면 이런 장면이 나와요. 착한 아버지를 내쫓고 나쁜 저희들끼리 부자와 단짝이 되어 팔지 말아야 될 땅을 팔고 지들은 땅값 받았다고 좋다고 아침상을 차려놓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화낼 때, 여자들의 화낼 때는 김치 싸대기가 동원되지만 남자들이 화낼 때는 그 상을 뒤엎어버립니다. 그러면 상이 공중에서 회전을 해버려요. 표면을 밑에 들어가고 엉망진창이 되지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경상도 말로 학 뒤비뿌리는 거예요. 상채로. 그걸 판을 뒤집는다고 해요. 주님을 판을 뒤집어버린 거예요. 옛날 50년대에 한참 못 살 때에 겨울에 스웨터 입으면 이의 서식처가 됩니다. 바깥에 보면 대충 잡았는데 안쪽은 못 잡았거든요. 학교에서 건강신체검사에서 옷 입으면 이들이 돌아다닌다고.
옷을 거꾸로 뒤집어버리면 그동안 안 잡히던 이들이 나오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악마의 뜻이 노출되는 쪽으로만 말씀을 증거해요. 왜? 상을 뒤집어버리니까. 판을 뒤집어버려요. 그러니까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이 세상의 표면적 언어, 고상한 언어, 거룩한 언어 있잖아요. 거룩한 언어가 밑에 들어가면 뭐냐? 언어의 강등, 언어가 질적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예를 들면 가스펠송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용어 자체가 성경 그대로 따오잖아요. 고상한 찬송가기 때문에 거룩한 예배할 때 노래기 때문에. 그 가사를 들으면 가사가 나한테 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대중가요는 상대적으로 저질이고 천박하기 짝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제가 아는 대중가요 보면 복음성가보다 더 좋은 내용이 많아요. 그중에 하나를 보겠습니다.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왜 이리 힘들었을까
이제 나는 알았어 내가 죽는 날까지 널 떠날 수 없다는 걸
세상에 이렇게 복음적인 게 어디 있어요. 주님께서 은혜를 물고문 하는데 그게 너무 아프지요. 주님께서 패는 거예요. 거저주심 말고 네가 공들였고 네가 믿음으로 했다는 걸 다 빼는 거예요. 패면 팰수록 성도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과 결별하는 게 아니고 힘들지만 비로소 아는 거예요. 내가 죽을 때까지 주님을 떠날 수 없다는 걸. 노랠 부르면 천박하다 하고.
패면 팰수록 너에게로 또 다시 돌아오기까지 왜 이리 힘들었을까. 얼마나 패고 얼마나 빼앗아야 돌아오느냐. 이제 때리니까 비로소 성도는 아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 품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생각해보세요. 악마 천지에요. 모든 들려오는 것이 악마의 질서 된 고상한 언어들입니다. 그 속에서 찐드기에서 쥐 뜯어내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살아온 관행이 있잖아요. 시집가서 시어미니한테 들었고 가족들한테 들은 게 있잖아요. 혈육이 있고 내 자식이 있고 거기서 너무 얽히고설킨 게 많아서 이게 도망쳐도 도망이 안 돼요. 빠져나올 수 없어요. 왜? 너는 잘났어. 경쟁에서 안 졌어. 너는 성공해서 우리 집안을 빛내야 돼. 내가 얼마나 널 키웠는데. 이러면 얼마나 부담되겠어요.
이런 끈끈한 초코파이, 정, 이런 정들이 얽혔다고요. 그들의 대언자가 돼야 되고 그들의 희망사항에 부응해야 되고 그들의 요구사항에 충족돼야 된다는 그 사명감, 그게 평생에 짐이 되어서 개미허리에 25톤짜리 쇳덩어리처럼 하루하루 살면 살수록 거기서 해방될 수 없어요. 자유? 자유란 말은 잃은 지 오래 됐습니다. 지켜보는 눈들의 너무 많아요.
제가 강남 가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악마가 계속해서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네가 그렇게 살아야 되겠어?” 압박감. 네가 신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되겠어. 뭐 거저주심도 없고 은혜도 없고. “남의 기대에 실망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라, 이놈아.” 맨날 집구석에 들어가면 듣는 소리가 그 소리에요. “네가 엄마를 실망시켜야 되겠어. 내가 얼마나 너를 키웠는데.” 이게 딴소리 아니지요. 우리들이 우리 자식에게 하는 소리 아닙니까.
뭐 거저주심도 없어요. 내 공로로 이만큼 키웠다. 내 행함으로 내가 이만큼 됐다는 거예요. 기존교회가 예수님 복음 무시해도 가만있다가 장로의 공로 무시했다간 장로가 가만두질 않아요. “너는 이 예배당 짓는데 땅 바쳐봤어?” 이렇게 나와요, 벌써. 나오기를 자기 집 팔고 전세 옮기고, 눈 동그랗게 뜨고 예배당 벽돌 값 낸 적 있냐고 나온다고요. 그놈의 예배당이 문제라. 부동산이 문제에요, 부동산이.
이 진자교회 전세 얻는데 누구 집 팔았습니까? 그저 나그네, 여기 있다가 없으면 딴 데 가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집에서 모이면 되고. 세상 배짱 편하지요. 아무리 이 땅에서 우리가 빠져나오려 해도 못 빠져나옵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악마가 알아요. 악마는 자신만만합니다. “네가 장로, 목사, 신학을 백날해도 너는 나한테 발 못 빼.” 이거는 악마의 자신감이에요.
왜? 인간을 알아도 너무 잘 아니까.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못 빠져나왔다는 이건 기본진리입니다. 못 빠져나옵니다. 못 빠져나와야 되고 우린 지옥 가는 게 당연한 거예요. 천국은 생각도 하지 마세요. 지옥 가야 돼요. 그런데 여기 물고문, 깔때기로 성령이 와버리니까 우리 본인이 놀래버려요. 우리 본인이 처음에는 거부한다니까요. 그냥 하던 대로 놔두세요, 주님. 이렇게 나온다고요.
내가 한 행함에 스스로 자위하고 격려하는 그런 식으로 살게 해달라고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욕한단 말이죠. 베드로, 열두 제자 다 그랬어요. 주님이여 내 걸 건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가룟 유다가 자살한 이유가 뭐냐? 자살을 해야 내 것이라도 건지기 때문에 그래요. 자살한 사람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장렬하게 자살함으로써 건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악마가 심어준 가장 기본원칙은 뭐냐?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다. 선택 문제였어요. 왜냐하면 악마가 하나님께 대들 때 자기 선택을 거론했거든요. 하나님이여, 그때는 악마지요. 나라는 천사는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선 악마가 그런 결정할 줄 알았지요. 왜냐하면 선악에 대해서 악마가 이미 하나님처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만 알면 그 다음부턴 독립하려고 아주 안달이 나게 돼있어요. 이 피조물 존재가. 그래서 하나님은 아시고 딴 건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만은 먹지 마라. 그러면 네가 피조물이 안 돼. 그러면 나와 결별하게 된다고 당부했건만 악마가 꾀어서 악마나 인간이나 전부 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여기에 관한 이야기만 교회에서 한다면 난 교회 다닐 요량이 있다. 하나님 믿을 요량 있다. 하지만 반대로 한다면 나는 반대소리 안 들을 거야. 이게 자기 소리겠어요, 그 사람 속의 악마 소리입니까? 악마 소리에요. 인간은 아무리 용을 써도 악마의 힘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거저주시는 힘이 오지 않는 한.
따라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주님이 주시는 조치에 의해서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주님이 내리시는 조치에 의해서. 주님의 조치는 우리가 미리 알아요, 몰라요? 미리 모르지요. 미리 모르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지시하는 게 있을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 하는데 그게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그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가라 하면 가로 오라 하면 오나이다. 가져가면 가져가시고 주시면 가져가는 것도 고맙고 주시는 것도 고맙다고 날름 받겠습니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주님의 뜻은 조치는 언어적 형식은 이미 다 내려졌어요. 목숨이 있든 없든 네 목숨 아니니까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형식이 있는데 이건 하나의 이론이고 지식이거든요. 이제 남은 것은 뭡니까? 실습이에요. 이론 할 때는 아주 희희낙락 설교 듣고 나중에 점심 먹고 피자 사먹고 좋아요.
그런데 막상 실습에 들어가면 이게 난리도 아니에요. 애들 보고 병원에 갈 때 주사 놓으면 따끔 아프다고 하면 아파봤자 죽이기까지 하겠는가, 참지. 하지만 애들은 주사 맞기 전에 병원 의사 가운만 봐도 아니 병원 간판만 봐도 발에 브레이크 걸고 난리도 아니에요. 안 들어가려고. 그 소독약 냄새, 상상을 하거든요. 상상이 문제라. 이 상상문제를 어떻게 뚫고 가느냐? 그건 10분 쉬고.
20201109b 부산강의 : [시편]33(21편)-깔때기 은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말씀 뒤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있어요. 우리는 성경말씀 볼 때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내가 하나의 가설을 들어요. “아, 이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뭐라 해도 성경말씀이 좋은 게 아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이게 희희낙락이에요.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하는데 주님께서는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날 죽이는 폭탄으로 생각하지 않고 더욱 더 날 살려내는 말씀인 줄 알고 성경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는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주님이 활성화돼버리면 주의 힘, 죽어도 상관없다는 정도의 대단한 힘이 발휘돼버리면 안 죽으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극구 말씀은 하나의 가설이야, 이론이야, 성경책은 여러 가지 신화로 조립된 편집된 책이야, 라고 온갖 악마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다 하면서 떼어내는 거예요. 제발 내가 살아 있게 끔만 해주세요. 멀찍이서 관찰할 테니까, 십자가 관찰하고 부활이야기 수용할 테니까 제발 살아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뺐지 말아달라고 밀어내지요.
그러나 그렇게 밀려서 밀릴 수 있는 주님이라면 애초부터 성도가 아닙니다. 그건 아주 고집스럽게 주님께서 네 열심보다 내 고집이 더 세다고 쳐들어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기쁨에서 생생하게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는 기쁨이 전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편 21편이 내 안에서 살아 있게 되지요.
여기 시편 21편 5절을 봅시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21편 3절에 보면,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당되고 예수님께 주신 주의 힘이 그 백성에게 고스란히 주어지게 되면 시편 1편의 복과 즐거움에 백성들도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참여할 때 여기 7절에 보면,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그 다음에 뭡니까? “높으신 자의 인자함” 다른 말로 하면 인자함, 긍휼, 사랑, 전부 다 특징이 뭐냐? 다 거저주시는 거예요. 죄 사함도 마찬가지고. 거저주신 것으로 그 다음에 뭐냐? 요동치 않지요. 고정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확정날짜입니다. 확정돼버린 거예요.
인자하심, 긍휼이 확정돼버리면 그 나머지가 아무리 흔들리고 변화 있어도 이 고정의 힘을 이 변화를 수시로 이깁니다. 늘 이겨요. 이기는데 이것이 긍휼과 인자가 오기까지, 8절에 보면, “네 손이” 여호와입니다. 왕이죠. “네 손이 네 모든” 그 다음에 뭡니까? “원수”지요. 전쟁의 결과로 온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전쟁하기 전에 여호와의 주님의 적 편에서 꼼짝 마라, 하고 볼모로 잡혔던 포로로 잡혔던 우리가 주님의 전쟁의 여파로 해서 다시 주님 품으로 오지요. 그럼 여기에 경로가 있어요. 악마에서 살다가 주님에 품에 사는 경로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경로에서 본인이 한 게 있어요, 없어요? 본인은 한 게 없지요. 본인이 한 게 없다는 식으로 이 경로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이 있어요.
성도가 기쁨과 자비와 사랑의 기쁨으로 넘쳐서 내놓는 기쁨과 인자하심과 사랑을 형성하는 그 내용에 담기는 단어들, 이런 것들을 내놓는 게 있어야 돼요. 내놓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안 했는데 우리 주님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건져냈다는 그 내용이 실려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 누구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의 거저주심이 주님께서 이런 고생을 했고 이런 희생을 했다는 그 이야기만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오늘날 성도 안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가? 한 컷, 한 컷 살아 있지요. 그리고 그걸 한 프레임이라 하는데 영화의 한 컷, 한 컷으로 살아 있어요. 그걸 쭉 이어보게 되면 동영상이 되지요. 따져보면 사진 한 컷, 한 컷이지만 쭉 이어보면 동영상이에요. 그 동영상이 우리네 성도의 인생 아닙니까. 발걸음을 세신다 했거든요. 한 컷, 한 컷 다 찍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걸으면서도 걷는 것도 누구의 힘이다? 주의 힘으로 걷고 모든 숨 쉬는 것도 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제목 후보감이 하나 등장하는데요. 제목을 아까 깔때기라 했지요. 이것도 후보감이에요. “엿 같은 인생” 욕하는 것 아닙니다. 왜 엿 같은 인생이란 그런 제목을 다느냐 하면 어릴 때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잖아요. 어린애들은 집안에 있는 쇠붙이나 병을 주게 되면 엿장수가 달콤한 엿을 주잖아요. 그 엿 먹는 기쁨이 있어요.
어떻게 바꿔치기하는 기쁨, 내 행함 부정하고 주께서 주시는 달콤한 엿 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긍휼을 받거든요. 내 노력과 주님의 자비를 바꿔칠 때 엿 같은 인생이에요. 기쁨의 걸음걸이를 걷는 거예요. 지금 그 노래가 시편 21편 노래에요. 다윗이. 다윗이 지금 얼마나 혼이 납니까. 나쁘게 말해서 다윗은 그야말로 엿 같은 인생, 사울에게 억울하게 쫓기는 인생인데 쫓기는 이 모든 프로젝트, 프로그램은 어디서 나왔단 말이에요?
주님의 힘에서 그것도 영생,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 되시는 분이 양을 인도해서 내 상이 넘치나이다. 평화로운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그 과정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주께서 은혜와 내가 행하지 않은 내가 공들이지 않은 거저주신 은혜, 우연적인 은혜, 자비가 넘치는 그것을 기뻐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주의 원수가, 이겨서 이렇게 달콤한 엿을 먹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어른의 마음이 아니고 내 자랑질하는 마음이 아니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죠. 어린아이들 특징이 참 잘 나타난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학원 같은데 다니지 않고 학교 마치면 골목에서 아스팔트로 안 돼 있잖아요. 흙이잖아요. 골목에서 그냥 소꿉놀이나 흙장난하고 여러 가지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엄마가, 옛날의 엄마는 다 치마를 입었고 앞치마를 둘렀어요. 머리는 파마하고. 요새 엄마들은 오십 되도 스트레이트 단발머리하고 젊어지려고 아주 애를 쓰는데 옛날에는 결혼만 하면 파마했어요. 엄마가 하는 말이, “밥 먹자” 하면 있는 그대로 놔버려요, 경쟁하듯이. “밥 먹자” 하면, “예” 하고 소꿉놀이가 어떤지, 프로젝트가 완성됐는지 그것도 필요 없어. 그냥 손 놓고 가버려요. 저녁 먹고 난 뒤에 그냥 죽어버려요.
그냥 가버렸어요. 왜? 어린애들은 자기가 하는 프로젝트보다 엄마의 소리가 더 기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은 모든 되어진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됨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견디지요. 로마서 5장에 보면 그걸 연단이라 해요. 불순물을 제거하는, 진짜 아픈 일이에요. 불순물을 제거하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정금같이 나오지요. 욥기에도 나오고, 정금같이. 이걸 단련시킨다, 또는 연단시킨다고 돼있어요.
로마서 5장 잠시 보겠습니다. 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게 말이 됩니까? 환란 중에 뭘 즐거워해요? 다 날아갔는데. 돈 다 날아갔는데.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뭘 이룬다? 비로소 없던 예상 없던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소망, 거저주시는 소망, 이미 거저주신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선가, 아 울산강의에서 그 이야기했잖아요. 개표에 역전은 없다고요. 왜냐? 표는 이미 끝났어. 투표함에 있는데 무슨 역전이 있어요. 이제 확인만 하면 되는데 무슨 역전이 있습니까. 새삼스럽게 트럼프 찍어서 넣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미 개봉했단 말이죠. 인생에 역전은 없어요. 역전은 역 앞이 역전인가. 인간은 이미 창세전부터 끝났어요. 게임오버에요.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조치가 뭔가를 확인 차 40, 50, 60까지 살고 있는 겁니다. 그 인생사는 동안 복음을 못 받아들인 것은 뭐가 확인됩니까? 처음부터 저주받도록, 멸망되도록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뿐이에요. 주님의 기쁨이요. 주님은 인간의 말을 안 듣습니다. 확인절차 상 피조물을 다루고 있을 뿐이에요.
종이 자기 운명을 못 바꾸잖아요. 종으로 태어났으면 할 도리를 할 뿐이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 뿐이지 뭐 내 운명을 내가 바꿔요. 인간은 바꿀 운명이 없어요. 옆자리에서 옆자리로 갈 뿐이에요. 노란색 바퀴벌레가 파란색 바퀴벌레로 바꿀 뿐이지 심층으로 내려가는 변화는 없어요. 이 차 타나 저 차 타나 네 바퀴에다 벤츠나 랜드로버 타나 전부 다 평면적 이동이지 수직은 없어요. 마귀는 수직을 싫어해요. 정말 평면이 전부라는 거예요, 인생은. 학교, 모든 공부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평면세계에 대적, 하나님의 적을 보내버립니다. 물리학에서 파동의 간섭현상이 일어나요. 여기서 파동을 보내는데 두 개의 입구, 두 개의 문을 통과해요. 통과하게 되면 파동이 나오는데 파동이 원래 이렇게 가는 게 아니고 간섭되니까 높은 골과 골이 만나면 플러스 합치면 파동이 이렇게 된다고. 파동이 불규칙하게 되잖아요.
파동의 간섭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기존에는 전부 다 안정돼있는 질서체계에요. 인간의 선악구조기 때문에 납득이 된다고요. 인간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만 이 세상에 계속해서 추려서 그 사태에 맞추어서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와 버리니까 파동이 혼선이 일어나는 겁니다. 파동의 간섭효과에 의해서 혼선이 일어나서 제자들은 무척 당황스럽게 돼요.
그러나 그 파동 중에서 세상 파동과 주님의 파동을 만약에 골라낼 수만 있다면 이것은 바로 천국의 힘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이제부터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중의 하나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이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자,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이란 뭐냐? 천국은 하늘 위에 있는 게 아니에요. 지상의 표면, 파동의 간섭효과로 이미 온 거예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천국은 이미 이 지상에 오신 거예요. 왔는데 무질서가 증식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질서 잡힌 법체계에 모세 법에 의해 체계에 인간의 합리성, 모든 이성을 다 동원해서 산뜻하게 담아놓고 체계 있는 그 구조에 간섭의 흔들림이 시작된 겁니다. 파동의 흔들림이.
그게 뭐냐 하면 천국이 오게 되면 농부가 밭을 샀다는 거예요. 그런데 농부 입장 말고 다른 사람 입장을 들어봅시다. 그 밭은 그만한 돈 주고 살 가치가 없어요. 잘못 산 거예요. 보이스피싱 당한 겁니다. 사기꾼한테 걸려든 거예요. 생돈 날린 거예요. 바보에요. 농부 외에 모든 사람은 농부의 조치에 대해서 끌끌끌, 똑똑한 사람이 왜 저래, 할 정도로 바보천치 같은 행동을 한 거예요.
그런데 농부 혼자 싱긋이 웃지요. 갑자기 제목 후보감이 멋진데? 싱긋이 웃는 거예요. “너 왜 큰 교회 안 가고 그 교회 왜 가느냐?” 그러면 이 교회 교인들은 싱긋이 웃지요. “아 점심 맛있게 먹는다고?” 그게 아니야. 그냥 싱긋이 웃지요. 설명해도 네가 몰라. 육과 영은 대화가 안 됩니다. 이게 간섭효과에요. 파동의 간섭효과. 애써서 해봐도 나중에 중도 포기합니다.
천국은 오게 되면, 빛이 어두움에 오면 어두우니까 “야 빛이다!” 이렇게 압니까? 어두움이 아주 발악을 해요. 요한복음 3장에서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싶어서 극구 빛으로 오지 아니해요. 그래서 어두움의 속성은 빛을 도망치는 성질만 나타내요. 그런데 농부는 싱긋이 웃는다니까요. 네가 게 맛을 알아? 랍스타 맛과 달라. 대게 맛은 랍스타 맛과 다르다 이 말이죠.
차이 좀 나지. 너희는 선악밖에 몰라. 착하면 천당 가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 그것밖에 모르지. 다른 파동이 있어. 다른 파동이 오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고수인 줄 알았어요. 마귀의 대장인 줄 알았습니다. 왜? 자기들의 딱 정돈돼있는 선악의 누구나 납득이 되는 그게 어딜 해도 먹히지 아니까요. 주님의 말씀이.
따라서 그 땅, 토지를 비싼 돈 주고 사는 천국의 파동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다 알아버려요. 뭐 주님의 뜻을 안다는 뜻이 아니고 반대구나, 라는 것, 우리를 지적하는구나. 따라서 우리는 주의 뜻을 다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시킨 대로 하면 되는구나.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이 하신 말씀에 보조 맞춰서 그 현장에 하라면 하고 가라 하면 가면 돼요.
어린아이 마음으로 내게 귀한 것 가지고 땅 사듯이 우리 집의 귀한 쇠붙이로 달콤한 천국의 엿 몇 쪼가리로 바꿔먹는 그것도 맛있다고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마트에 팔지 않는 것,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것, 거저주신 영생입니다. 천국은 반드시 그렇게 오게 돼있어요.
인간이 선악으로 애써서 교회에서 상품화된 것은 천국이 아니고 그것은 지옥 대용품이에요. 그거는 가짜입니다. 마네킹 주여, 하는 건 바보 아닙니까. 예수님 제삿날 섬기고 이 짓하고 있다고 교회에서. 부활절, 추수감사절 이게 뭐예요? 제사 지내는 거거든요. 산 사람은 살아서 자기 백성을 구하고 있는데 지 살고 싶어서 공들이는 거예요. 주여, 이케요, 저케요, 성만찬 맨날하면 천당 갑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맨날 기억하는 것은 내가 행한 것, 주님께서 드린 헌금, 자기가 한 행함을 이게 빠지지 않아 이걸 빼지 않고 자꾸 축적을 시켜. 연금, 적금 붓듯이. 계속 적금 붓는 거예요. 그래서 얻은 게 뭡니까? 장로 직이잖아요. 그것 건드리면 화 벌컥 내지요. 복음 때문에 화내지 않습니다. 내가 삼 대째 이 교회 섬기고 있다. 이것만 자랑질하고 있어요. 그 장로님의 부인을 뭐라 합니까? 권사님. 아주 죽이 맞아. 짝이 맞아요.
자, 그렇게 해서 마태복음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25장. 이건 볼 필요도 없어요.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태복음 25장 21절에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했지요. 착하고 충성된 종과 반대말이 뭐냐 하면 게으른 종이 나와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른 종에서 종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28절에,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1)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라고 돼있거든요.
이건 뭐냐? 네가 왕의 것을 받을 백성답지 못하다는 거예요. 내가 거저 주었으니 너에게는 거저 줌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나는 거저 준 은혜가 너한테 합당치 않다고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 30절에 보게 되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바깥. 어제 낮 설교에 바깥 이야기했지요.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게으르고 악한 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것을 나의 것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나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였어요. 나의 것이 있으니까 뭔가 주어지면 자기 소유로 삼아서 결정과판단과 선택을 누가 합니까? 본인이 하는 거예요. 이걸 내가 땅에 묻을까, 말까? 주님께서 말하기를 그렇게 결정할 테면 이자나 받지.
그러니까 나가 있는 어떤 결정도 천국에서는 받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가 천국 비유에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어떤 자를 내쫓는가를 통해서 천국이 증명된다는 거예요. 천국이 어떤 자가 들어온 자가 아니라 어떤 자가 못 들어오는가를 보여줌으로서 천국이 천국답게 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의 것이 있는 사람은 결단코 내가 지옥으로 밀어 넣겠다는 겁니다. 나의 것, 내 교회, 내 가족, 내 돈, 내 것이 있으면 무조건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우리도 못지않지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뭘 했느냐 하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것 한 거예요. 내가 일어난 일은 천국에서 밀려들어온 주의 힘의 파동이라는 겁니다. 뭐 헌금하라,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전도를 하던 뭘 하던 간에 내 하는 일은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나를 비껴가서 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주님의 파동, 천국의 파동에서 제시되는 나가 있어요. 그러면 기존에 악마에 속한 나가 있지요. 이 둘의 나가 내 일생을 통해서 파동의 간섭효과를 일으킵니다. 주께서는 거저 주었다 하고 나는 애써서 자식 이만큼 키웠다고 하는 거예요. 내 새벽제단 밝혀서 자식이 멀쩡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것조차 네가 뭘 하는 것조차 내가 거저 준 힘으로 했다 하고. 이렇게 간섭파동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이 시편 21편의 다윗의 일생입니다. 다윗 일생 자체가 간섭효과에요. 사울로부터 쫓기고 있고 고난 받는 것, 이건 본인이 원했습니까, 본인이 나쁜 짓했습니까? 골리앗 때려잡는 게 나쁜 짓이었습니까? 누가 시켰습니까? 주님이 시키는 대로 자기가 돌 던졌고 돌이 알아서 골리앗 죽였단 말이죠.
다윗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한 게 아니고 이 전쟁은 나와 골리앗의 전쟁 아니고, 자기를 빼요. 하나님이 할례 없는 저 민족을 치기 위한 하나님 본인의 나타남이라,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건만 사울 쪽이나 아무도 그 말을 이해 못하고 있는 거예요. 다윗도 섭섭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이기고 난 뒤에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열 배난 값을 쳐주니까 질투심이 동해서 죽이려고 하니까 다윗도 도망갔지요.
도망가면서 뭐라 하느냐?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 미리 한 번 봅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두 개의 ‘나’ 중에서 이쪽 나를 버리는 식으로 나가 등장해요. 동반해서. 하나의 무대에 주인공이 졸지에 둘 돼버린 거예요. 기존 주인공은 마귀한테 속한 주인공이고 새로 등장한 주인공은 주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주인공이고.
그러니까 두 주인공이 한 무대에서 공연해줘야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차이 남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여분 또는 잉여. 없다고 여겼는데 불록하게 새로 생긴 것, 주께서 작용했더니만 내가 예상도 못한 볼록한 게 등장하는 여분의 것, 나의 눈과 코와 이성 이런 것 다 가로막아버리고 다시 등장한 여분의 것, 차이 남. 이 차이를 세상의 갈등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파동의 간섭효과.
이걸 보게 되면 달란트 비유 때 하나님께서 게으른 종을 배제하고 착한 종에게 주고 배제 안 한 이유를 알겠지요. 동일하게 줌으로써 다시 이야기하면, 천국은 천국 갈 사람만 하는 게 아니고 천국에 안 갈 사람과 같이 결합해서 그 차이 나는 것,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만 알면 되는 거예요, 성도는.
성도는 뭔가 업적을 이루고 나라 세우고 그 짓하지 마시고, 교회 세우고 하지 마시고 내부의 차이에요. 내부의 차이를 그걸 그대로 바깥에 드러내는 거예요. 나 이렇게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 주님 오셔서 내가 몰랐던 주님의 활동하심을 이렇게 토해놓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까지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지요. 그래서 이방민족이 난데없이 밀려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까 적들이 어딜 까불어? 하나님 너무 좋아, 예수님, 여호와 너무 좋아.” 이러고 있단 말이죠. 이제 누구 차례입니까? 이제는 약속의 땅에 걸 맞는 약속의 백성, 달리 할까요? 준비된 왕에 맞는 준비된 백성만 골라내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긍휼이라는 거저주심을 그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 땅에서 차이 나는 자기 백성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번 수련회에 사무엘상 하는데 교재는 곧 올라오겠지요. 서 목사님 검토 중이니까 올라올 겁니다. 그 사무엘상 제목이 <두 개의 구원>이에요. 차이 남이 되려면 이질적인 두 개가 다 같이 등장해야 돼요. 참고로 이번 장소는 코로나 여파로 인해서 가야산에서 할 예정입니다. 하도 지 방 달라고 해서.
사무엘상에서 다윗에게 왕 주기 전에 먼저 사울 왕을 주잖아요. 그런데 사울 왕은 어디서 밀고 온 거냐? 표면에서 표층에서 올라온 거예요. 그 교재 초반에 서론부분 내용에 이런 게 있어요. 통치자를 뽑는 이유가 아무도 통치할 권리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 통치자를 뽑는다 했어요. 아무도 통치할 권리가 없음을 백성들이 요구하기 위해서 통치자를 뽑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통치자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누가 나의 통치자입니까? 나지요. 내 소망대로 내 요구대로 해줄 수 있는 임시적 통치자를 백성들이 왕으로 요구를 한 겁니다. 그걸 아시고 하나님께서 백성들 너희 소원대로 만만하게 안 될걸. 왕이 되게 되면 너희들이 통치하고 싶은 통치자가 되레 너희들 귀한 것 다 빼앗아가 갈 텐데. 너희의 처녀, 너희의 밭, 너희의 십일조 다 받아 챙길 건데.
너희들이 요구했기에 왕 줄게. 이제 왕 주는데 그 왕은 뭐냐? 너희들 이스라엘의 반대가 증식되는 조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통치는 얼마나 센 통치인데 얼마나 힘이 셌으면 통치자를 원했던 백성들이 통치자한테 억압을 받고 구박을 받는 사태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못 빠져나와요.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통치자는 내 속에 있었던 악마의 가현체가 돼요. 내 속에 이미 누가 들었다? 악마가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악마가 왕이 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우리의 소망이 뭐냐? 그 왕이 고분고분 내 말을 잘 듣는 왕이기를 원해서 대통령 뽑아놨는데 김정은 뽑아놨는데 이제 김정은이가 내 모든 걸 홀라당 가져가지요. 이걸 한 프레임 내에 한 컷, 한 컷 적나라하게 짧은 시기에 다 보여준 그러한 단체가 교-회-라는 겁니다. 교인과 당회장 목사에요. 여러분들은 그런 교회를 거쳐 왔습니다.
교인 말 잘 듣는 만만한 목사, 복음만 전해서 우리 교회는 복음적 교회, 몽땅 등록한 사람 천당 간다고 좋아들 했지요. 나중에 보니까 복음 전하니까 내 말 들으라. 복음 전하니까 돈 내놔라. 막 학개 동원시키고. 학개 뭡니까? 자기는 좋은 집 살면서 교회는, 아까 바퀴벌레 이야기했어요.
이래서 되겠느냐, 받아놓고 헌신도 안 하고 인간들, 못된 것. 목사의 나중 노후대책 내놓고, 생활여건 해운대에 맞도록 해달라고. 온갖 요구 다 나와요. 안 그러면 넌 지옥 간다. 내 말 안 들었으니까. 이게 모든 한국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부교역자는 어떤 생각할까요? 난 언제 부교역자 신세 면해서 당회장의 절대권력, 절대자리.
그걸 가지고 영화제목에 나오지요. <반지의 제왕>이죠. 세상의 모든 힘, 최고의 힘을 갖고 있는 게 당회장 목사에요. 특히 개척교회부터 한 당회장 목사는 중간에 날아온 돌 말고 개척교회 한 목사는 절대 황제입니다. 신천지 욕할 것도 없어요. 모든 교회가 신천지 교회에요. 반지의 제왕이에요.
이 반지의 제왕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오신, 모든 백성들은 반지의 제왕에 꼼짝 못하고 있을 때 그 반대자리에 오셨잖아요. 세리와 창기와. 너는 이 교회에 충성 안했으니까 지옥 가라. 그 지옥 가라를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왕, 예수님이죠. 메시아인 거예요. 왜? 다윗의 일대기가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복사돼있기 때문에 그래요. 억울하게 이상하게 쫓겨 다니는 거예요. 예상 못하게. 간섭파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지의 제왕이 살고 있는 표면에 주님께서는 어떤 무기를 동원하는가? 신명기 4장 24절 보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됐습니다. 같은 구절이 히브리서 12장 29절에 나오는데요. 신명기 4장 24절, 자 하나님은 실체입니까, 인물입니까, 불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구약의 하나님은 뭐로 나타나나? 과정으로 나타나요. 과정인데 어떤 작업을 하는 과정입니까? 소멸하는데 뭐로 소멸해요? 불로써 소멸하는 거예요. 다 태워버리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무기가 뭐냐? 불로써 나타나는 그 불은 앞장세우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 2장에 나오지요. 인간의 양심? 그건 내 안에 있는 나를 소멸시키는 불이에요. 두 개의 나가 있잖아요. 이쪽 나가 와서 소멸시키는 거예요. 구약에.
소멸시키면 사람들은 악마의 본성이 나타나요. 소멸하시는 무서운 진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무슨 해석에 나서느냐 하면 율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수정된 해석으로 백성들에게 유포를 시킵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존재가, 그건 잠시 주께서 겁주기니까, 거기에다 가짜 도금을 입혀버려요. 안에는 불이 있는데 불이 안 오도록 사랑의 하나님으로 포장을 해버린다고요. 주께서는 봐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에게 어떤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진짜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그냥 십자가에다 하나의 엑스레이 사진으로 걸어놔 버렸어요. 뭡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는 처참하게 사형당한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누구 모습이에요? 바로 죄 있는 우리의 모습을 죄 없는 예수님이 자기 것으로 담당시킨 거예요.
담당했다는 말은 원래 그런 처우를 안 받아도 되는데 자기 백성들에 터치, 그러니까 내가 몰랐던 나의 진짜 모습을 자기 백성에게만 성령이 와서 알려주는 거예요. 터치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경로가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저주받아야 되는데 저주 안 받는 게 이상해요. 지옥 불, 불이거든요. 불은 소멸하는. 지옥에 가야 되는데 안 가게 된 것이 이상해서 보니까 뭔가 다녀갔어. 주님이 지옥까지 다녀가서 건질 자를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그 과정, 그 과정만 우리가 토해내고 고백하면 되지요. 그게 성도의 남은 인생입니다. 소멸하시는 불이요.
이사야 4장 4절 보겠습니다.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는지 나옵니다. 예언돼있습니다. 귀찮겠지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아멘, 됐습니다. 시온의 딸, 다윗언약에 해당되는 백성을 씻어주는데 뭐로 씻어주느냐 하면 여기에 심판하는 영과, 성령이죠. 소멸하는 영.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십자가를 다녀가면 성령이고, 십자가 안 다녀가면 성신이라 했지요. 이미 완성의 맛을 보면 성령이고 아직 미완성의 모습이 있으면 성신이고. 성신은 성령이 되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지요. 십자가 터치하고 난 뒤에는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 돼버립니다. 성령이 돼버리면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함이 돼버려요. 그럼 죽어 마땅한 성도 안의 나는 뭐냐? 주님의 나가 그대로 거기에 꽂히게 되는 겁니다.
다시 표면층에서 사람들은 나를 나라고 이야기하고, 두 개의 나가 아니고 하나의 나입니다. 나 말고를 너라고 이야기해요. 표면층에서 나, 너. 그런데 주님께서 나로 오셔요. 나는 하나님이다. 나로 와버리면 기존의 나는 뭐로 변하느냐 하면 전부 다 it, 그것으로 변해요. 하나의 사물이죠. 노골적으로 말해서 기계가 돼요. 모든 인간은 기계와 기계의 만남이에요. 욕망과 욕망의 만남이에요. 그 기계가 무슨 기계냐? 욕망하는 기계에요.
엿장수한테 팔아먹어야 될 고물이에요. 하나님이 갖다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생명나무에서 “나가, 인간아” 해서 고물로 나가버린 거예요. 고물로 나가떨어져 놓고 저희들끼리 너라고 나라고 이야기하면 저희끼리 하나님 만들고 우리를 만들어서 기계의 문명을 이뤄요. 어떤 기계? 욕망하는 기계.
욕망하는 기계니까 기계 자체는 아무 힘이 없어요. 기계보다 무슨 힘이 셉니까? 욕망의 힘이 더 세요. 이 욕망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자본입니다. 돈입니다. 인간은 돈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내가 돈을 욕망하는 게 아니고 돈이 자본이 나를 욕망해요. 역전된 겁니다. 이 주의를 자본주의라 해요.
명목자본과 실질자본으로 경제학에서 구분하거든요. 자본이나 소득에도 물가인상률과 같이 반영이 되고 동반이 되는 그러한 펀드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국채 같은 펀드는 물가인상률이 반영이 안 돼요. 그래서 물가상승보다 이자율이 낮아서 가만 앉아서 점점 까먹는 셈이 돼버리죠. 물가상승률과 연동이 되는 펀드를 뮤추얼펀드라는 겁니다.
어제 설교시간에 이야기한 뮤추얼펀드, 개방형회사채투자신탁. 은행에 넣어봐야 이자 0.8% 나오거든요. 신한은행. 물가상승보다 떨어지는 거예요. 은행에 넣으면 넣을수록 손해가 돼버려요. 밑지니까. 그럼 어떻게 되느냐? 뮤추얼펀드에 넣어서 물가상승과 연동해서 그만큼 이자가 많으면 되지요. 문제는 그 회사 망하면 다 날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회사의 과장이나 차장이나 부장이나 할 일 안 하고 수시로 어딜 들여다보느냐 하면 내가 투자한 뮤추얼펀드에서 삼성주식에 투자한다는데 지금 삼성주가가 얼마인지 그것 쳐다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루하루의 일과가 본인이 뮤추얼펀드에요. 본인이 자본이에요. 본인이 자본이란 돈의 욕망 따라하는 그냥 기계에 불과합니다. 인생이란 게. 그리고 주일에 교회 나와요. 기가 찰 일이죠. 그야말로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이죠.
교회에서는 장로가 그걸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된다고. 왜? 기도해야 이자율이 남아야 십일조를 내야 내가 세운 교회가 운영이 되니까요. 펀드 대박난 사람은 새 집사로 오라, 이런 식으로. 그래야 물가반영이 책정된 일종의 공직이라 할 수 있는 목사 월급을 주니까. 주의 종을 소홀히 하면 본인의 펀드 수익이 안 나는 수가 있어. 저주받아서.
전부 다 모든 생각을 욕망이라는 그러한 기준으로 평가하다보니까 욕망의 구체화가 뭡니까? 돈이죠. 얼마짜리냐, 얼마짜리 목사냐, 얼마짜리 집사냐, 전부 이걸로 되니까 내 자식은 얼마짜리 자식이냐? 도대체 장학생이냐, 장학생 아니냐, 얼마짜리냐? 그걸로 세상은 그런 세상이에요. 이 표면층이 그래요. 그래놓고 기도의 내용은 뭐예요? 우리의 소원대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성령 주시옵소서. 그 성령이 무슨 성령이라 했습니까? 지옥을 앞당겨 우리에게 덮쳐지는 영, 나와 나 사이에 기존의 고물 나를 없애버리고 그 고물 나를 엿과 바꿔먹는 엿 같은 인생, 천국의 달콤한 엿으로 바꿔먹게 하시는 성령이에요. 날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어제 오후에 제가 인생은 농담이라 했거든요. 전혀 진담 아닙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농담이에요.
그 진지한 심각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 인생을 박살내는 그것이 진지함이고 심각함이고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는 것은 자기 것 지키는 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 아니고 시킨 대로 돈 날린 게 충성된 종이에요. 그래 내 시킨 대로 날렸구나. 아이고, 잘했다. 이 엿 같은 인생아, 너 참 잘했다.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우리는 입자에요. 기계니까 실체가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흐름으로 오십니다. 이 실체를 강력한 바람으로 흔들어버리죠. 성령의 바람으로. 흔들어버리면 실체라는 자체가 내가 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내가 붙잡고 있는 나는 전부 다 망상이고 허상이에요. 저 사람처럼 될래, 라고 꿈꾸는 거예요. “나 저 사람처럼 안 될래. 저 사람처럼 되면 무서워. 자살할 거야.”
전부 다 나라는 것이 세상에서 참조해서 들었던 그런 제도들의 규합이에요. 인간은 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남는 건 뭐냐? 봉사지요. 성령은 봉사의 영이거든요. 우리가 감사할 것은 내가 바쳐야 될 섬겨야 될 주님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1편에서 다윗은 뭐냐? 주께서 하신 일을 봉사하는 봉사자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이 이야기가 여기는 왕이라 하는 다윗이지만 다윗 안에 장차오실 왕이 계시죠. 왕이 오시면 불이 저희를 소멸한다는 거예요. 아까 불 이야기 제가 해드렸잖아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불을 봤어요. 산 밑에서 변화하는 본인들 마음 말고 산 위에 고정된 불을 봤습니다. 시내산 불을요. 율법과 함께 있는 불. 아까 이야기했지요. 진노로 오는 불은 무엇을 앞장세운다? 율법을 통해서. 율법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는 맨날 그걸 다른 해석해서 자기도 고정화시키려고 자꾸 거짓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11절에 보면,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13절에 나오는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이것이 되려면 나 말고 쳐들어오신 주님의 나가 그 사이의 투쟁 가운데서 나는 하나에 주님의 오심을 보여주는 봉사자로서 나타날 때 이러한 찬미가 거기서 생겨나는 거예요.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 못해요.
누가 내 안에 예상치 나가 들어와서 나는 그분 앞에서 옛날식대로 그럼 내 것은요, 돈은요, 자존심은요, 나 창피하잖아요. 이런 발악이 일어나는 거예요. 발악하면서 나는 실체로 여기고 주님께서 바람 같이 흐름으로 파동이 오는 거예요. 그럼 나는 입자가 되어 반항하지요. 나중에서 그 흐름이 이겨요.
이겨버리면 그 사이에 내가 몰랐던, 옛날에는 알았다 하지요. 주님을 찬송해야 마땅하다 하고 합당하다고 하는데 그 찬송이 건성이 되는 데요. 찬송과 가스펠송 너무 많이 알아. 하지만 백날 불러 봐도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마구 불렀던 거예요.
그런데 나를 깎아버리고 나를 소멸시키고 부정해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이 등장해버리면 아까 그 놀라운 대중가요란 이름의 가스펠송, 너에게로 오는 참 힘들었다는. 나는 힘든데 주님께서는 마땅한 거고. 결국 내가 한 것은 주의 봉사가 되도록 나는 숨기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게 되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한다면,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란 사실이 성령의 바람으로 우리에게 밀려왔다가 떠나고 또 밀려오고, 떠나버리면 나 잘났다 하다가 또 밀려오면 역시나 주의 말씀은 주의 죽음이 있는 말씀이 진정 살아 있고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를 소멸해주시는 성령이 오심을 감사합니다. 거저주시는 데 태어난 것도 우연인데 우연일 것을 모르고 마치 마땅히 내가 꼭 잘나야 된다는 우김이 내 생각이 악마의 생각인 것을 늘 들추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