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2a 부산강의 : [시편]32(20편)-존재에서 관계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0편에,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라고 돼있지요.
처음부터 언약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언약의 기본은 인간을 전적으로 배제하지요. 언약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게 구체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약상대자로 본인이 지정을 하셔요. 이 지정을 선택한다고 하지요. 인간은 빠집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언약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언약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빠지는 이유는 여기에 악마의 권세 층이 작용하기 때문에 인간은 여기의 감시망을 피해서 권세를 피해서 빠져나오지 못해요. 그러면 악마의 권세 층에는 여러분이 눈치 챘듯이 여기는 언약이 없어요. 인간은 언약이란 게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언약 없는 신, 언약 없는 하나님, 그리고 언약 없는 나가 여기 등장합니다. 언약 없는 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개체성이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개별성이다. 쉬운 말로 하면 그냥 각자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개별성, 개체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것이 주어져도 항상 자기가 마감이 돼요. 여기 나가 있는데 나로부터 시작한 모든 것이 나에게로 와요. 이게 끝이에요. 내 뒤에는 없어요. 언약 없는 이 점을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에스겔 28장 2절을 보면 평소에 세상에 나가서 여러분들이 듣고 있던 이야기가 많이 들려올 겁니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두로는 해변에 있는 도시기 때문에 무역을 해서 최고로 잘 살던, 그러니까 뉴욕의 맨해튼 지역으로 보시면 돼요. 그 당시엔 제일 잘 살았던 지역이에요.
비교해보니까 자기보다 잘 사는 게 없거든요. 자기가 최고가 되는 겁니다. 해운대 고층아파트 펜트하우스에 사는 그런 기분이라 할까요. 자기가 중앙이거든요. 왜? 다른 쪽은 자기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중앙이 되는 겁니다. 부럽지, 부럽지? 나처럼 못 돼서 약 오르지, 약 오르지, 하는 그 중앙, 이 두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교만하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이 두로에 대해서 10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평가를 내리느냐 하면, 이게 오늘 강의에서 초반부터 중요한 게 탁 튀어나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10절에 보면, “네가 외인의 손에서 죽기를”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지요?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라” 갑자기 할례가 등장하지요.
나는 신이다, 내가 최고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라고 할 때 하나님의 평가가 뭐냐 하면 너 할례 안 받았잖아, 너 할례 없잖아, 라고 이야기해요. 네가 나중에 죽는다, 망할 것이다, 네가 까불다가 엎어진다, 그런 말씀하는 게 아니고 할례가 없잖아, 할례가, 라고 하는 거예요. 할례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율법이고 그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았던 율법이 할례입니다.
율법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죠. 너는 약속이 없잖아. 하나님의 할례약속이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 다윗이 골리앗을 보는 관점이 그거에요. 골리앗이 키 크고 힘세다고 기죽지 말자. 저 민족은 뭐가 없느냐 하면, 할례 받지 못한 민족이다. 참, 이런 생각이요,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도가 됐으면 악마 층 바깥에 언약이 있고, 언약은 할례라 했습니다. 율법,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았고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그 할례. 그런데 악마 층에 있는 인간들, 악마 층도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인간들과 인간들만 눈에 보이니까 우리가 이 사회에 살고 있지요.
그럴 때 여기서 두로가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나는 신이다, 나는 최고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지적하겠는가를 제가 묻고 싶어요. 저 사람한테, “너 건방지구나. 돈 언제까지 있는지 보자.” 이런 식으로 시기, 질투로 하는데 시기, 질투 있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는 뭐가 없다 했습니까? 언약이 없고, 언약 없는 나에요. 바로 두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가 교회 가도 마찬가지에요. 그 교회 하나님은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이 교회운영방침은 성공하고 싶은 사람, 하나님의 도움 받고 싶은 사람 다 오세요. 이렇게 해서 운영이 되는 겁니다. 복 받고 싶은 사람, 나중에 천국 가고 싶은 사람 우리 교회 오세요, 이렇게 된단 말이죠. 언약이 없는 거예요.
가짜 교회 특징이 뭐냐 하면, 앞에 ‘나’가 붙어요. 이 나가 두로로 대표적으로 이야기하면, 여러분 믿지 마세요. 나는 뭐다? 나는 신이다. 신이란 말은, 나는 중심이다. 세상에 중심이라 한 거예요. 이런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걸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서 그 사람들이 교회 다닌다. 그럼 교회가 고객만족을 위해서 무슨 이야기해줘야 됩니까?
역시 당신은 하나님 복 받아서 잘 될 겁니다. 당신은 신이 되고 싶어 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고 중심이 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당신이 소원이 이뤄지도록 내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복 내리게 하겠습니다, 할 때 이게 뭐가 빠졌단 말입니까? 언약이 빠진 교회가 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의 부러워하니까.
특히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기 나는 할 때 나는 어디 있다? 언약이 빠져버리면 뭐라 했습니까? 각자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개별성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개체성. 개별성, 개체성의 특징은그 마감이 어디로 된다? 모든 의미가 나로부터 나와서 나로 스톱이 돼요. 자폐증이죠.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
그런데 처음에 제가 강의할 때 언약을 해놓고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언약의 상대자를 지정하고 그 다음에 선택했지요. 그러면 언약이 되려면 하나가 되면 안 되고 여기 관계가 성립돼야 돼요. 그래서 오늘 강의주제를 미리 말씀드리면, 존재에서 어디로? 관계로. 존재에서 관계로 바뀌는 거예요.
자, 언약이 없는 세계, 신과 인간은 전부 다 관계일까요, 존재일까요? 전부 다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의미의 마감이 중심은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마지막은 나만 달랑 남아야 되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나보다 떼어내야 나만 남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신이란 것을 인간의 본성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무슨 이익이냐, 나한테 무슨 손해냐 그것만 따지면서 교회 다닌 거예요.
그러면 나는 신이다, 나는 중심이다 이걸 또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뭐가 들어있다? 나 안에 자존심이 있다. 나 안에 자긍심이 있다. 지금 이야기 들어보니까 언약의 관계는 우리에게 낯설고 어느 것이 상식적입니까? 어느 것이 우리가 매일같이 만나는 거예요? 티비나 이웃사람 만날 때 각자를 만나지요. 개별성을 만나고 개체성을 만나는데 그 개별성, 개체성 안에 무엇이 실려 나갑니까? 내가 최종적으로 나는 신이다, 중심이라는 그 자존심을 운반하는 운반체를 매일같이 만나는 거예요.
가족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가족은 좋은 관계라고 하지만 언약이 없으면 가족이라도 각자에요. 가족이라도 개체성입니다. 부모가 나이가 많을 때 요양병원 갔을 때 자식이 찾아갑니다. 부모가 세상을 살다보니까 꼼수가 늘어났어. “너 나한테 온다고 힘들지? 안 와도 된다. 나 혼자 잘 있다. 힘들지. 내가 빨리 죽어야 되는데 안 죽어서 미안하다.”
그런 이야기를 진심어린 이야기를 들을 자식은 아무도 없어요. 그 말이 뭐로 들리느냐 하면, “좀 자주 오너라. 나 외롭다. 나 너 키우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는 나 아플 때 나 몰라라 하고 있지? 지켜볼 거야, 두고 볼 거야.” 이런 식으로. 나한테 잘해줬던 엄마, 아빠도 연세 드니까 뭐로 끝났어요? 개별성, 개체성, 두로, 나는 신이다, 내가 중심이다. 그걸로 전부 다 마감되는 거예요.
말로는 들은풍월이 있어서 무슨 관계라 하지만 이 관계는 다 헛수고에요. 진짜 존재에서 관계는 존재가 아무리 친하고 정 줘도 소용없어요. 여기 뭐가 있어야 됩니까? 언약이 있어야 돼요. 그 언약을 아까 에스겔 2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뭐로 지적해요? 할례 없잖아. 할례라는 것은 잘라내는 것, 끊어내는 것. 잘라낸다, 끊어낸다. 그렇다면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언약이란 인간에게 뭘 한다? 잘라내고 끊어지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언약이다. 언약이 없다면 잘라진 게 없고 끊어진 게 없고 요 내 자리, 신의 자리, 중심 자리가 안 잘라지고 그대로 있고 언약이 있으면 뭘 잘라냈다? 나는 나의 최종 자리가 주님에 의해서 언약의 칼에 의해서 잘라낸 거예요.
그것을 여러분들이 목 없는 미녀. 몸매는 괜찮아 보이는데 위가 없으니까 미인인지 알 수 없지요. 교회가 뭐냐? 목 없는 몸체만 있는 걸 교회라 해요. 왜? 위는 누굽니까, 교회 머리가 누구시죠? 주님이죠. 주님은 안 보이니까 뭐만 있어요? 목 없는 채 몸체만 있는 게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듯하니까 제가 기쁜데요.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 이야기를 보게 되면 언약이 없는 데서는 마지막에 나가 있지요. 그 다음에 언약이 있는 관계는 나가 아니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 관계니까 ‘나’가 ‘우리’로 바뀝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그 다음에 ‘우리 하나님’ 나가 없어요. 우리는 영원히 가는 거예요. 혼자서 천당 갈 생각마세요. 그런 천국은 안 받아줍니다. 나에서 우리로 변하지 아니하면 천국 없습니다.
이 말은 나의 존재는 작살나고 나를 작살낸 관계에 엮여서 나는 없어지고 우리가 되지 않는 한 천국에 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하여튼 성경은, 보통 교회 가면 성경 많이 외우지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한 구절 외워서 천국 간다고 자부하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 할 때 누가요? 우리가 믿는 거예요, 내가 믿는 거예요? 내가 믿으면 그건 소용없고 우리가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 안에 전에 나를 대신했던 분이 계셔서 거기서 파생된 것, 나가 확장된 것, 확산 된 것, 그 확산돼서 생긴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핵심 되는 그 나는 누구겠어요? 그게 시편 20편이 시작되는 거예요. “환란 날에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뭐라 돼있습니까? “내게 응답”하지요. 응답이 가능한 것은 언약을 보냈고 언약을 받을 만해서 받았다는 거예요.
기도응답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것은 언약만 보내고 받을 것은 언약만 받아요. 왜? 그게 언약의 하나님이니까. 그런데 몇 번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은 악마 층이 있어서 인간에겐 언약이 없지요. 그 다음에 여기 뭡니까? 언약이 없는 신, 언약이 없는 나, 언약이 없는 거예요. 언약이 없으니까 나가 그대로 있단 말이죠. 나가 있다는 건 나의 자존심 그대로 있단 말이에요.
그럼 언약이 오게 되면 뭐가 잘라간다? 언약이 오면 목 없는 미녀처럼 목까지 위에가 다 날아가요. 하필 목사님은 목 위로 이야기합니까, 하고 할 수 있는데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 만날 때 무엇과 무엇을 분리했느냐 하면, 등 쪽과 얼굴을 하나님 쪽에서 분리했어요. 너는 내 등은 봤지만 뭐는 못 봤다? 얼굴은 못 봤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소서, 라고 돼있지요. 주의 얼굴이란 주의 표정, 뜻, 주님의 대표적인 형상, 이걸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뜻을 대변해주고 있는 그것의 주의 얼굴이에요. 시편에 주의 얼굴이었는데 신약에 와서 주의 얼굴을 대표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하는 모든 모습에서 아버지의 뜻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시편에 보면 주의 얼굴을 우리 쪽으로 향하소서. 주의 얼굴을 우리 쪽으로 향하면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돼있어요.
형상은 하나님의 등은 형상이 아닌 걸 알 수 있지요. 모세와의 만남에서.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의 등과 얼굴을 분리했다는 말은 등을 보여주면서 형상을 봤다고 할 수 없어요. 그 대목에 나와요. 얼굴 보게 되면 형상 본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 얼굴이다, 하나님의 표정이다.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지 등어리 표정 안 나타나죠. 얼굴의 표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안 드러낸 게 아니고 드러내셨어요. 기분 좋은지 나쁜지 표정을 다 드러냈단 말이죠. 표정을 드러냈는데 사람들이 언약이 없으니까 악마의 권력층에 갇혀있으니까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지요. 그렇게 보시고 다시 에스겔 32장을 봅시다. 32장 다들 찾아보세요. 그걸 설명할 필요가 있어요.
에스겔 32장 18절,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애곡하고 그와 유명한 나라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 지옥 간다는 뜻이에요. 19절부터 유념해야 돼요.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누구보다 지나가는고 너는 내려가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 다 같이, “할례 받지 않은 자와 함께 뉘울찌어다” 그 다음에 21절, “용사 중에 강한 자가 그를 돕는 자와 함께 음부 가운데서 그에게 말함이여” 그 다음에 다 같이 시작, “할례 받지 않은 자 곧 칼에 살륙 당한 자들이 내려와서 가만히 누웠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나옵니다. 24절에도 나오지요. 그들은 다 할례 받지 못하여 살육 당하게 돼있지요. 25절에, “그 여러 무덤은 사면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그 다음에 26절에, “그 여러 무덤은 사면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28절, “오직 너는 할례 받지 못한 자와 일반으로 패망할 것임이여” 지금 애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애굽 나라의 파멸에 대해서. 29절에도 있어요? 할례 받지 못하고, 라고 돼있지요. 그 뒤에도 끝까지 돼있어요. 32절에,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로 더불어 할례 받지 못한 자” 이렇게 돼있지요.
성경을 보면서 한꺼번에 할례 받지 못한 걸 한 구덩이에 다 집어놨어요. 이 정도로 강조하고, 강조하고, 강조하는 겁니다. 자, 할례는 뭐냐? 언약이다. 언약 있느냐, 없느냐로 뭘 평가한다? 악마 층에 갇혀있는 세상을 평가하는 눈을 가져라. 언약적인 눈을 가져라, 에요. 그렇다면 할례는 뭐하는 것이다? 잘라내고 끊어내는 거예요.
뭘? 손가락 정도? 아니. 발가락 정도? 아니에요. 내 자존심과 자긍심, 나는 신이라는 그 자리를 할례가 언약이 와서 잘라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십자가지요. 그럼 십자가가 어딜 공격하겠습니까? 나의 나다움, 그 자리를 폭격내리겠지요. 그걸 아까 용어 하나로 했습니다. 각자에 내린다고 해도 되고 개체성 또는 개별성, 그 말이 어려우면 그냥 쉽게 각자 또는 제각기. 할례의 공격이 제각기라는 의식을 공격한다.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 이걸 그대로 응용하고 적용시켜 보세요. 하루 생활하면서 뭐하고 사십니까? 어떻게 사십니까? 성경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우리의 생활이. 응용문제 들어가 볼까요? 나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잤다. 자, 뭐가 문제지요?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나’가 붙어 있잖아요.
그게 죄라면 죄 아닌 게 뭐냐? 우리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잤다. 이게 언약이에요. 나는 분명히 거울 봐도 나 혼자 있는 줄 아는데 언약은 내가 잠자는 그 현장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음을, 그때 잠잘 때 그 현장에 나만 있지 않았음을 주님이 거기 계셨음을 뭐하려고? 나에게 때로는 잠을 주고 때로는 잠을 못 자게 만들고.
주체가 내가 아니고 누구로 바뀝니까? 주님으로 바뀌면서 주님은 주님 자체의 개별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우리를 포용하니까 나는 우리가 되면서 나의 자리를, 나를 끌어냈던 할례언약의 자리를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느냐 하면, 주님이 쥐고 있지요. 나는 누구의 똘마니냐 하면 그전에는 나의 똘마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되면 나는 나 자체로는 의미가 없어졌고, 누굴 위하여? 나를 나 되게 했던 주님을 위하여 잠을 자던 잠을 깨던 밥을 먹던 뭘 하던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 그 관계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성경 참 쉽지요. 이해하면 무지무지 쉬운 거예요. 나는 아파요, 란 자체가 뭐가 된다고 했어요? 죄가 되지요. 네가 왜 아픈데? 우리가 아프다는 말을 왜 못해요?
어제도 했지만 십자가의 강도 예수님과 달릴 때 구원받은 강도는 천국을 나의 자리로 여기지 않고 무슨 자리로 여기느냐 하면, 우리의 자리로 여겼어요. 예수님, 주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달라. 세상에 살인강도, 그렇게 나쁜 짓 많이 했지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는지 어떻게 그 천국이 주제넘게 지 하는 행세를 보세요. 어딜 감히 넘봅니까.
내 자존심과 자긍심을 유지하고서는 주님의 나라에 합세할 생각을 못하지요. 겸손 아닌 겸손을 떨면서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저도 지옥 가도 마땅하다 하지만 그 강도는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어요. 주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달라. 우리 하나잖아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되잖아요, 라고 하는 것 이 강도는 강도란 직업을 넘었어요. 내 하는 일을 이겨낸다고요. 인간이 하는 일은 전부 다 자존심과 자긍심이 관련됐는데 그걸 이겨낸단 말이죠.
자, 그러면 언약에 있어서 잘라내고 끊어지는 게 할례지요.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이 할례는 무슨 할례라고 하느냐 하면, 마음의 할례, 이게 바로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마음의 할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마음에다 십자가를 꽂아서 아예 빵꾸를 내버리는, 싱크홀이라 하지요. 길에 구멍난 것, 나라는 거기다 구멍을 내버려요. 구멍을 내면 텅 비어있지요. 그 텅 빈 자리를 운반하는 운반체가 성도입니다. 전에 나의 있던 자리가 빵꾸나서 완전히 박살났음을 기쁘게 수용하는 자가 성도에요. 내가 안 아파요. 우리가 아프지요. 내가 안 기쁘고 우리가 기쁘지요.
그러면 이 시편 20편 내용은 뭐냐? 너는 그냥 빈자리를 만들고, 이건 신약의 마음의 할례가 왔을 때 그렇고요, 그리고 그 빈자리에 채워지는 게 뭐냐? 나를 대신하는 누군가 있어요.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따져보면 어렵지 않아요. 존재에서 뭐로 바뀐다 했습니까? 관계로 바뀌지요.
그러면 존재의 자리는 누가 차지하느냐 하면 언약의 상대자,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가 누구냐 하면 지정하고 선택한다 했지요. 그분이 오늘 시편 20편에서는 너라고 하는 거예요. 너라고 하는 분이 내 존재를 대신해버려요. 그럼 우리 성도는 주님과의 관계성 속에 합류되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시편을 어떻게 지키려는 생각은 하지마세요. 빠지세요.
빠지고 내가 여기 있다면 전에는 나의 존재를 쳐다봤지만 이젠 존재가 빵꾸났으니까 뭘 보냐? 관계를 보는 거예요.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구세요,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이 누구세요? 그럼 하나님께서 좋다는 말이야, 나쁘다는 말이야? 좋다는 말이지요. 누가 나를 나 위주로 내가 최종 마감되는 의미로 살지 않게 하셨습니까? 누가 나만 위해 살지 않도록 하셨습니까? 기쁨으로 그렇게 고백하지요.
“어제 잠을 못 잤는데 전에는 내가 못 잤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주께서 못 자게 했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주신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돼요. 나가 아니고 우리니까요. 안에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시편 20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가 하지 못한 것 내가 다 이룬 거예요. 우리가 왜 못할까요?
우리는 악마 층에 갇혀서 애초부터 뭐가 없다? 언약이 없는 거예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쉽게 생명나무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 영생의 나무가 하나님 쪽에서 끊었어요. 우리는 그걸 원했는데 오지 말라 하니까 문제에요. 네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경우라고 생명이 없다는 요소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도 생명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백날해도 그 안에 뭐가 없어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선악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무슨 소용 있어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이미 죽은 자인데. 그래서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에요. 왜? 생명이 없이는 마찬가지거든요. 생명이 없으면 죽은 자, 죽은 자로 살다가 백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 그거 뭐가 이상해요? 그거는 당연한 거지요. 안 죽는 게 이상하지.
생명 없으면 죽는다. 그걸로 끝입니까? 나중에 죽음보다 더 센 저주가 기다리는데요. 이건 이방민족은 모르고 이스라엘에게만 알 수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믿어야 알 수 있지만 어쨌든 간에.
그래서 오늘 시편 20편 봅니다. 보기 전에 하나 더 봅시다. 이사야 14장 12~14절은 참 유명한 구절이죠.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이건 바벨론 제국에 대해서 한 겁니다. 바벨론 제국이란 하나만 외우면 돼요. 모든 민족의 통합체, 통합기구, 중앙기구.
우리 개인적으로 내가 중앙에 있다 했지요. 아까 두로 있지요. 나는 신이다, 나는 중심이라고 했지요. 그 중심의 중심, 그건 국가형태로 등장하지요. 마지막 최후에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지만. 그 나라가 무슨 나라에요? 바벨론. 지금의 모든 나라는 바벨론의 아류들, 바벨론의 후예들. 바벨론은 금신상처럼 영원토록 계속 가요. 천국 올 때까지 계속 가는 게 바벨론이에요.
그 바벨론이 뭐냐? 계명성아, 그 바벨론이 찍혔다. 제가 읽고자 하는 것은 13절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기지요. 하나님, 그 정도였어? 나는 당신보다 더 높게 하나님처럼, 당신만 하나님이야? 나도 하나님이야, 라고 여기 뭇별, 보좌에 올라 북극 집회, 집회니까 집결체, 집단체, 통합체, 좌정하리라. 그 통합체 중에서 중심의 중심이 바벨론.
모든 민족과 나라는 어디로 질주하고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백날 해봐야 하나님 뜻에서 전부 다 바벨론에 모이게 돼있어요. 모이면 하나님이 바벨론만 쳐버리면 모든 민족 다 쳐버린 거예요. 바벨론만 심판하면 모든 민족은 깔끔하게 다 심판한 거예요. 그래서 15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지옥이죠. “곧 (지옥)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이유는 결국 천국은 천국대로 만들고, 그 다음에 지옥은 기어이 지옥답게 만드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선 멈추질 않습니다.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해요.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천국대로 만들고 지옥은 지옥대로 만들고. 지옥 만들기도 하나님이 게으르지 않는다는 사실.
이쯤 알았으니까 여러분한테 물어봐도 되겠지요. 지옥은 뭐가 없는 곳이다? 언약이 없는 곳이에요. 언약이 있으면 뭐하냐? 모가지를 칠 수 있거든요. 언약이 있으면 모가지를 치는데 언약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믿던 예수님을 믿던 삼위일체를 믿던 전부 다 최종 의미 가치는 어디로 쏠립니까? 내가 멀쩡하니까 나에게 쏠리는 거예요.
다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다녔고 나 높이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자존심 남한테 밀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전도했고 헌금했고 교회 다녔고 성경 공부했고. 망나니 와서 칼로 쳐야 되는데 쳐줄 사람이 없네. 언약이 없는 것처럼 실패한 인생이 없어요. 불쌍한 인생이 없다고요. 누가 목을 쳐줘야 되는데 이 목이 그대로 있어요.
목이 그대로 있으니까 아까 목적은 내가 최고 되는 거죠. 두로 이야기 잊지 말라 했지요. 내가 신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성경 공부 참석하는 것이 신이 신답게 되는데 도움 될까, 도움 되지 않을까? 계산하겠지요. 바치는 게 아깝다. 성경 공부하는데 시간을 바치는 게 아깝다. 그 시간에 돈 벌면 안 되겠느냐? 자, 돈 벌었을 때 돈 버는 것이 나를 치게 만듭니까, 아니면 나를 더 신답게 높이게 만들어요? 높이게 만들지요. 간단하지요, 논리가. 사람 사는 논리가 간단해요.
결국 마지막엔 뭐냐? 우리라는 게 나타나지 않고 뭐로 나타나요? 끝까지 나. 티비 프로그램에 <나야나> 있어요. 남진 노래에 있어요. 나야나야 나. 제목 보세요. 멋지지 않습니까. 나=나, 다른 건 끼어들지 말란 말이죠. 내가 곧 나다. 나 이것 양보 못한다. 지금까지는 무척 쉬운 거예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존재를 뭐로 바꾼다? 존재를 관계로 바꾼다. 관계의 시작은 나가 아니고 나는 날아갔으니까 제로가 됐으니까, 관계의 시작은 다른 미지의 존재에서 파생된다, 이게 확장된다고 보면 돼요. 미지의 나가 시편 20편 보시면 됩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응답되는 것은 언약의 경우만 응답되고 하나님 언약이 아닌 것은 절대로 응답해주지 않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딱 나오네요. 야곱에게 뭘 줬습니까? 언약을 줬잖아요. 이제 이해가 팍 되지요. 하나님께선 일방적으로 무조건 시작도 언약이고 끝도 언약이구나.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이미 계약한 것을 그 언약을 어디다 심는다? 이 악마 층 안에 있는 이 지상에다 심으려고 하시는구나. 그 언약만이 응답되고 언약을 심기 위해서 이 땅에 구약 때 오신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고 그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라 했으니까 몸통은 있고 얼굴은 안 보이겠지요. 몸통이 뭐냐? 몸통이 아브라함이고 몸통이 이삭이고 몸통이 야곱이고 몸통이 이스라엘이고. 얼굴은 머리는 누굽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차지하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주의 이름인데 주의 이름이 몸체가 되는 것은 구약이 아니고 언제에요? 신약 때 말씀이 육신 될 때 그때 나타나는 거예요. 그걸 저는 예수님의 긴 그림자라고 해요.
어느 강의에서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예수님만이 그림자를 가져요. 우리는 그림자를 가집니까, 안 가집니까? 우리는 그림자가 없어요. 왜? 우리는 허상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지요. 안개가 무슨 그림자가 있어요. 나한테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내 영향력을 펼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남과의 관계를 요구할 권한이 없다 이 말입니다. 네가 나한테 그렇게 나오면 돼? 이런 소릴 하지 말란 말이죠. 걔는 개별자야, 너도 개별자인 것처럼. 어딜 감히 타인을 사육하고 타인의 영혼을 네 소유화시키려 하느냐.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너는 나야. 개별자에요.
애들 키울 때 보세요. 우리 아들은 아빠, 엄마 말 들어요. 아니에요. 밥 먹을 때요 발을 올려놓는다고. 이것 아버지, 엄마가 그렇게 한 적 없었거든요. 그런데 지는 다리 올리고 봐요. 저한테 사진 보내왔어요. 폭군의 식사시간. 왜? 나야나야 나. 나는 나거든. 여러분 인간을 살펴보세요. 이게 전부에요. 나야 나에요. 너 나한테 뭐 줄 건데?
그런데 그걸 사육하고 내 사람 만들려고, 그건 북한 김정은이나 하는 거예요. 김정은 부하들의 김정은 뭐 좋아하겠어요. 김정은 얼굴 홍잠언처럼 생겨서 뭐 하겠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에게 알랑방귀 끼고 출세하려고 나이 많아도 안 자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자면 총살이니까. 전부 다 나야 나에요. 오늘 제목을 <나야 나>라 할까? 관계없음, 나는 나로 마감됨, 모든 의미는 나 좋으면 끝.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야곱에게 찾아왔단 말이죠. 그러면 야곱은 어떤 과정으로 보느냐 하면 야곱이 하나님께 훌륭했다, 이러면 안 돼요. 야곱은 철저하게 야곱이에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남을 속이더라도 이익을 위해서 양보 없음, 이게 야곱입니다. 야곱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은 관계개념이에요. 야곱이 스스로 자기 환도뼈 쳐서 쩔둑쩔둑 걸었습니까? 아니지요. 누가 때렸잖아요. 때렸으면 삐져야 되는데 맞는 것이 복음이에요. 어제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 얻어맞는 것이 복음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내 존재가 박살나는 게 복음이에요.
목사는 목회하다가 교회 완전히 폭파돼버리는 게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부도나는 것이 기쁜 소식이고. 술 먹고 벤츠 차 몰다가 사람 치고, 해운대만 오면 생각나. 그게 본인에겐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에요. 좋은 기회 준 거예요, 지금. 주제 파악하라고.
이 세상은 언약의 세계지 네가 중심된 세계가 아니다. 중심은 따로 있다. 그게 뭐냐 하면 관계의 세계, 한쪽은 천국 보내고 한쪽은 지옥 보내는 그 작업장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이 일을 지금도 쉬지 않습니다. 그래 가라. 벤츠 타로 지옥 가라. 보내버렸어. 하나는 지옥 가고 하나는 천국 가고. 이 분리작업은 멈추질 않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부활한 게 아니잖아요. 활동하려고 부활했지 놀려고 부활하시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잠자는 것, 식사하는 것, 모든 것이 부활하신 하나님이 우리라는 개념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중입니다. 혼자 나가 아니고 우리입니다. 어떻게 나가 우리로 바뀌는지 보자 이 말이죠.
존재가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바뀔 때 야곱은 죄를 드러내게 돼있습니다. 왜? 누구와 싸웠습니까? 하나님과 싸웠지요. 그때 그 관계를 무슨 관계냐 하면 우리와 하나님 관계는, 서울강의에서 대립관계 다른 말로 하면 경쟁관계,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대립관계, 경쟁관계에요. 자, 아까 여러분 안 잊었으면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두꺼운 악마 층에 갇혀있는 교회 다니는 신을 믿을 때 그 신과 나 사이는 대립관계, 경쟁관계입니까, 아니면 좋은 관계입니까? 좋은 관계지요. 얼마나 기특합니까. 다른 사람은 교회 안 나오는데 나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으니까. 얼마나 좋은 관계에요. 뭐가 없을 때? 이 교회는 언약이 없으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좋은 관계에요. 좋게, 좋게 지내는 관계에요. 대립관계, 경쟁관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교회에다 갑자기 언약, 십자가를 꽂아버려요. 십자가로 하게 되면 십자가를 증거하지요. 십자가는 걸림돌이죠. 자빠지는 거예요. 자빠질 때 무릎만 깨지는 게 아닙니다. 내 자존심도 깨지는 거예요. 신을 믿었던 신에게 충성하고 평생을 신에게 직분자로 다 바친 그 자체가 이것이 가짜였음을 드러내는 십자가, 그 십자가입니다.
그럼 기존 교회에서는 십자가를 사용하되 어디 꽂아놨는가? 주일 낮 설교했지만 나 자존심 박살내도록 꽂아야 되는데 어디 꽂았느냐 하면 주변에 변두리에 꽂아요. 그냥 구색 맞추기 위해서. 우리 교회는 십자가도 압니다, 엉뚱한 데 했어요. 당회장 목사한테 꽂아야 되는데 다른 사람에 꽂아놨어요.
사람이 나가 있으면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뭐냐? 망했는가, 잘 됐는가를 고민하게 돼요. 판정하고 측정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나가 없으면 내가 망했다는 것이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내가 없는데 무슨 망할 주체가 없는데 무슨 망함이 있고 성공 주체가 없는데 성공했다가 됩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세리나 강도 같은 사람은 주님께 감사 안 할 수가 없어요. 남들은 버젓하게 인간답게 사는데 자기는 강도 아닙니까. 강도가 망해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요. 그게 얼마나 속 시원하겠어요. 비로소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가는 게 아니란 것을 딱 보니 알게 된 거예요. 내 존재가 믿은 거예요. 아니면 관계였습니까? 관계가 믿음이었던 겁니다. 나를 박살내도 상관없게 만든 그걸 만들어내신 어떤 분, 그분과의 관계, 언약관계가 바로 믿음이란 겁니다. 여기서 죄가 나오는 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때 여기 2절 봅시다. 성소에서, 성소는 죄를 씻어주는 기능, 장치가 있는 곳이에요.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그 다음에 3절,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자, 여기 너란 누구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 결국 신약에 가면 누구십니까? 나 아니고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내 존재를 대체하시는 존재, 그런 관계에서 신약에 로마서에서 뭐냐? 대신.
대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들 많지요. 대신 죽으심, 대신 기도하심, 대신 전도하심, 많잖아요. 대신한다는 것, 대체한다는 것, 대체하는 분이 시편 20편에서 아버지의 상대자로서 너라고 한 거예요. 마치 하나님에게 야곱을 상대하듯이, 아브라함을 상대하듯이, 이삭을 상대하듯이 너라고 이야기하신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뭐가 어렵냐 하면 소제와 번제에요. 소제와 번제할 때 사람들은 레위기 나오는 말씀처럼 또는 출애굽기나 민수기나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자기의 소산물을 갖다 바치면 불에 태우면 번제, 식물 빻아서 드리는 건 소제거든요. 이렇게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이 소제와 번제 안에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이게 있어야 돼요. 박해받음이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소제와 번제의 특징은 무엇의 흔적? 상처받은 흔적을 지녀야 한다. 그 원형이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산 제물 되죠. 히브리서에 나오지요. 그런데 악마 층에 있는 언약 없는 인간들은 박해 좋아합니까, 안 좋아합니까? 안 좋아하지요. 사람이 자존심이 있고 없고를 뭐로 아느냐 하면 억울함을 느끼면 자존심 있는 거고 억울함 못 느끼면 자존심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치고 자존심 없는 사람 없고 따라서 인간치고 억울함을 못 느끼는 사람 없지요. 물론 특수한 경우가 있어요. 아이큐가 30된다든지 이런 사람들은 남이 조소하는지 욕하는지 전혀 분간 못할 때는 그 사람에게 뭐가 안 생깁니까? 억울함이 없지요. 억울함 생기면 온 몸이 다 뭘 하느냐 하면 강력하게 저항을 해요. 거기서 네 자로 스트레스가 생겨요.
인간이 사는데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은 행여나 나를 해코지할까 싶어서 자체적인 방어체제가 긴장을 더하니까 내 면역체계가 나를 때리는 거예요. 내 면역체계가 나를 해코지하는 상황에 대해서 내 자존심이나 자긍심을 건드릴 상황을 예상해서 강력하게 더욱 더 이렇게 바짝 자기 수위 강도를 더하는 거예요. 그럼 누구 폭발해요? 결국 내가 폭발하면 남는 것은 자살이에요. 폭발하다, 폭발하다 완전히 폭발되면 자살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 억울하게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내가 억울한 게 아니고 우리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우리라고 집어넣은 테두리 안에 들어가신 분이 누구죠? 하나님 아버지가 되지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것마저 누구 뜻이다? 아버지 뜻입니다. 이게 관계잖아요. 이게 나를 벗어난 관계, 이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우리가 형성된 거예요.
나중엔 성령까지 오게 되면 성령까지 합쳐서 우리가 돼요. 우리의 처소를 같이 하리라. 베드로야 너 처소 없지만 우리가 처소 갖추면 같이 넣어줄게. 이렇게 된다고. 나 아니에요. 우리에요. 구원은. 우리가 구원돼요. 우리 안에 함께 모여 살면 그게 구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누가 대신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대신하셔서 번제가 되고 소제가 되신 겁니다.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20201012b 부산강의 : [시편]32(20편)-존재에서 관계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제물의 소제가 갖고 있는 폭력성과 박해성에 의해서 예수님의 공로가 우리를 형성하기 위한 자기 백성에게 들어오는 통로가 돼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그게 돼요? 인간은 개체성이라 했잖아요. 니는 니고 나는 나에요. 그런데 남이 하는 일이 어떻게 내 것이 돼요? 이건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이것 모르고 대충 그냥 믿습니다, 뭘 믿는데? 따져보자. 뭘 믿는데?
주님의 피가 나의 죄를 씻음을 믿습니다. 어떻게? 몰라요. 예수님 피라면 남인데 남의 피가 어떻게 내 죄를 사해줄 수 있어요. 말도 안 되지요. 그거는 성령이 와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성령이 무슨 일을 하는데, 성령이 어떻게 되는데? 그냥 주의 공로로 주십니다. 어떻게, 어떻게 주시는데?
자꾸 신약성경만 들여다보고 구약은 있으나마나 돼버려요. 구약의 제사제도를 보세요. 그리고 그 제사에 대해서 인격화, 제사제물이 인격화될 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을 언약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두 번째 시간은 그 점에 대해서 그 경로에 대해서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하신 일이 우리 것에 들어올 수 있는가?
첫 번째 예는 우리 몸엔 60조 개, 100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 현미경 만들어지기 전에는 세포가 있는지 몰랐어요. 보니까 세포들이 있단 말이죠. 세포는 핵이 있고 여기 막이 있어요. 세포막이 있고 세포질, 여러 가지 세포 운영에 필요한 것들 물질이 있어요. 중간에 막이 있다고요. 막이 다 닫혀버리면 세포는 죽어요. 그렇다고 해서 세포막이 있으나마나 한 것처럼 누구나 다 들어오게 되면 역시 세포는 해로운 바이러스 들어와서 이 세포는 죽어요.
그래서 여기서 세포막은 뭐냐? 선별적으로 들어올 것만 들어오고 막을 건 막는단 말이죠. 이걸 생물학에서 수송메커니즘이라 해요. 물질 수송메커니즘, 운반하는 메커니즘이 되는 겁니다. 들어올 때 여기에 복잡한 방법이 있는데 필요한 것만 말씀드릴게요. 확산이 있고 삼투가 있고 그런 게 있는데 이 세포막에서 세포가 통과하도록 벌려주고 막는 막 단백질이란 게 있어요.
세포 자체가 단백질로 만드는데 출입 수위역할, 출입을 관할하는 게 있어요. 인지질 층도 있는데, 첫 번째 농도에 따라서 넣어주고, 두 번째는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넣어주는 게 있어요. 칼슘이나 나트륨 이온들을 보고 넣어주고 막고 한단 말이죠. 하여튼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필요한 것 넣어주고 빼고 하거든요. 세포가 움직일 때 이건 전부 다 에너지 적이에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세포가 어떤 박테리아가 들어오면 잡아먹어요. 불리한 것은 풍선처럼 부풀려서 내보낸다고요. 들어오고 하는 것은 생물학에서 전부 다 에너지 적이죠. 에너지 적이란 말을 제가 여기서 강조하느냐 하면 세포가 전부 다 뭘 관찰하느냐 하면 개체적이고 개별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이게 바로 에너지 적이에요.
사람은 돈을 왜 버느냐? 돈을 벌어서 내 마음대로 쓰고 싶다. 쓰고 싶고 양식을 사는데 돈이 있어야 산다. 그럴 때 그런 표현들, 말 있잖아요. 생각들 다 뭡니까? 개체적이고 개별적이죠. 에너지는 힘이죠. 나한테 힘이 되면 받아들이고 힘을 빼앗아가는 것은 내쫓는 거예요. 이게 개체적이고 개별적이란 말이죠. 이게 생물학의 전부에요. 과학은 이게 전부란 말이죠. 인간도 마찬가지지요. 인간도 개체가 되면 세포와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인간과 보통 생물체의 움직임이 있는데 인간들의 현재 무엇을 믿느냐 하면 본인이 개체적이고 개별자이다 보니까 나는 개체적이다 하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니까 안에 있는 세포의 활동과 큰 덩어리 나의 활동이 차이점이 없네요.
제가 티비 보니까 이런 이야기 나왔어요. “창룡아, 돌을 쌓아라.” 어떤 프로그램에 남자가 나와서 이런 말 들었다는 겁니다. 죽은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돌을 쌓으라 해서 그 남자는 자기 집에다 십삼 년 동안 돌탑을 쌓는 일을 했어요. 이게 얼마나 개체적이고 에너지 적입니까? 그리고 요새 여러분들이 코로나를 막는 방법으로 마스크 쓰지요. 이게 얼마나 개체적이고 개별적이고 에너지 적입니까?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바이러스, 생물학적이죠. 바이러스가 침범하게 되면 비말, 날아다니는 침 튐을 막으면 된다. 막으면 그 인간은 병 안 걸리고 살지요. 그런데 우리가 언약적으로 볼 때 그게 사는 게 사는 겁니까? 첫째 시간에 여러분 무슨 이야기 들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뭐가 없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생명이 없으면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kbs, mbc 티비에 안 나와요. 매일같이 아침부터 퍼붓는 게 뭐냐 하면 마스크 써라, 에요. 그럼 우리는 자동적으로 따라갑니까, 안 따라갑니까? 따라간 거예요. 그러니까 코로나 나온 후에 교회 나오지도 않고. 혹시 옮길까 싶어서. 왜? 개체적이고 개별적이고 에너지 적이니까.
이 과학이 종교를 대신해버렸어요. 종교를 대신했다고 해서 종교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종교보다도 뭘 믿는다? 나는 종교보다도 과학을 믿겠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과학을 믿겠다고 이미 개체와 개별이 그런 식으로 무장돼있는 겁니다.
그럼 개체와 개별이 세 식구가 모였다. 그 가정은 개체에요, 개별이에요? 그 가정도 개체고 개별이고 그 가정도 뭐가 없어요? 언약이 없는 겁니다. 내 가정이에요. 앞에 나가 붙는다고요. 나가 붙으면 언약에 의해서 나는 아니라 했지요. 나는 떨어져야 되지요. 나가 아니고 우리가 되려면 우리를 유발하고 생산하는 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나는 일단 아니에요.
이 가정에 주인이 나는 아니란 말이죠. 우리 집안 식구도 아니에요. 그냥 몸통에 불과하고 머리 부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에요. 그런 식으로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느냐를 시편 20편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에너지 적이다. ATP(adenosine triphosphate아데노신 3인산)라 해서 에너지 저장기능이 있는 에너지를 뽑아서 이 세포막이 열리면 세포막을 통해서 자기에게 이익 되는 물질만 통과시키고 나머지는 문 닫는 그런 수송메커니즘이 생물학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그럼 인간은, 제가 방금 생물학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까 그거는 생물학이고 우린 안 그렇지요, 하는데 지금 생물학의 세포 이야기하는 것이 곧 우리 이야기에요. 우리도 하나의 세포처럼 그렇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합해요. 우리 입장에서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한테 이익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손해가 되는 것은 밀어낸다. 그 결정을 누가 합니까? 세포가 스스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포가 지옥 갈 만한 하지요. 언약이 없으니까.
그럼 인간은 뭐냐? 첫째는 자연세계에서는 무슨 적이다? 아까 적었지요. 에너지죠. 에너지란 쉽게 하면 힘입니다. 나한테 힘이 되는 것과 힘을 빼는 것을 구분해서 빼려하면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두 번째 인간은 뭐냐? 주체에요. 주체란 것은 존재가 아니에요. 이건(에너지) 존재거든요.
주체는 뭐냐 하면 관계가 있을 때 주체가 되는 겁니다. 주고받고, 주고받고. 다시 말해서 누가 나에게 영원히 너라고 하는 누군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주체가 돼요. 그럼 예.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나서야 돼요. 그게 주체관계에요.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나를 위해서 누가 갈꼬, 했지요.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찾아왔잖아요. 사울에게 찾아왔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했지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누굴 찾아왔습니까? 아담이죠.
하나님이 찾아올 때 비로소 사람은 관계가 돼요. 누구하고 맺어짐이 돼요. 그 맺어진 관계의 한 점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주체라는 거예요. 에너지 적이 되면 개별자는 자아가 되지만 이건 주체가 된다고요. 다 같이 표현하기를 난데 이쪽의 나는 나로 마감되는 나고, 주체가 될 때는 나를 나라고 상대해주시고 자기가 설정한 관계에 넣어주셨기 때문에 새롭게 각인되는 새롭게 인식되는 나에요.
나를 나라고 불러주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가 절대로 나라고 할 수 없고 나라고 달리 불러주는 그분 때문에 내가 될 때 그분과 나 사이는 관계, 언약적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적 관계, 이게 바로 관계성이에요.
교회 안 나온다 할 때 누가 안 나오게 하셨습니까? 물을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안 나오게 했습니다. 그건 에너지 적이에요. 개체성이에요. 개별성이에요. 오늘 아침에 빵을 먹었는데 누가 먹게 했습니까? 할 때 내가 먹었습니다, 하면 의미가 어디로 마감돼요? 나로 마감되지요. 그러나 주께서 나로 빵 먹고 싶어 했습니다, 할 때는 주체가 여기서 내가 아니고 관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말하는 주체적 관계에요.
그러면 아까 두 번째 시간 이야기했던 것 시작해봅시다. 주님이 당했던 박해 또는 억울함 또는 폭력성, 폭력성이 어떻게 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어떻게 내 속에 들어올 수 있느냐 말이죠. 아까 세포는 어떻게 들어온다 했습니까? 세포막 스스로 판단해서 유해한 것, 무해한 것 판단해서 들어온다 했지요. 자기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그리 한다 했지요.
그러나 성도는 그런 세포 같은 개체성은 없습니다. 없으면 주님이 아버지 앞에 언약을 이룬 주체가 돼요. 주체가 되니까 주(체), 주님이 언약을 이룬 주님이 되셔요, 주님이 주인공이 돼요. 주인공이 되는데 이걸 주체라 해요. 주님의 언약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모든 일임했다고 요한복음 5장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아버지가 예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있을 때 예수님이 이스라엘이고 야곱이라고 그렇거든요. 여기에 들러리로 동원된 게 있어요. 들러리가 누구냐 하면 누가 해야 돼요? 어떤 역할을 맡은 자에요? 억울하게 하고 박해하고 폭력을 행하는 들러리들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악마 층에 있는 악마 및 인간들이 바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줘야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번제가 되실 때 예수님 혼자서 자해해선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혼자서 자기가 칼로 찔러서 아버지 내 몸 받아주옵소서, 이래서는 하나님께 안 돼요. 세상, 온 우주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흠향할 제물 되기 위해서 온 세상이 여기서 동원돼야 돼요.
요한계시록 8장 3절에 보게 되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성도의 기도가 담긴 향로를 도로 땅에다 붓지요. 올라간 것을 도로 땅에 부으니까 땅이 뭐가 됐어요?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타났지요.
요한계시록 12장 봅시다. 그 성도 어떻게 성도냐 하면 12장 11절에 보게 되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성도를 이렇게 괴롭히는 그들의 있어요, 없어요, 이 세상에? 필히 있어야 돼요.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면,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러니까 세상 전체가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으샤으샤 다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택된 자를 핍박하고 예수님이 당했던 박해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답습하도록 세상이 들고 나서야 돼요. 성경에 의하면 언약에 의하면 그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잖아요.
세상이 밀어붙인다고요.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에는 예수를 믿었거든요. 그런데 성도가 세상이 밀어붙이니까 예수만 믿어요. 누굴 뺍니까? 나를 빼는 거예요. 나를 겨냥해서 박해하니까 예수만 믿어요. 집사도 예수만 믿고 장로도 예수만 믿고 목사도 예수만 믿고. 예수만 믿어요. 자꾸 뭐는 빼는 거예요? 나는 절대로 안 믿어요. 왜? 나를 믿으면 세상이나 나나 똑같으니까. 이게 복수할 줄 모르나, 지가 나서서 복수해버려요. 제가 복수하면 안 돼요. 그러면 나가 되지 우리가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억울함을 당하고 박해 당했잖아요. 박해 당할 때 누굴 여기다 초청했다고? 그 당시 세상의 모든 권세 있잖아요. 본디오 빌라도부터 해서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뭘 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억울함을 당하는 그 일에 참여를 시켜놨어요. 끌어당긴 거예요. 모든 중심은 예수님 십자가 죽도록 그렇게 일이 착착 진행되도록 모든 세상 권세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다 집어넣은 거예요.
주님이 아버지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달릴 때 이들이 이미 다 거기에 개입된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어떻게 돼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지요. 그렇잖아요. 그 이룸 안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바로 성도가 들어 있잖아요. 베드로 도망간 것 아시죠. 베드로 도망가서 지옥 갔습니까? 베드로가 배신해서 지옥 갔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 배신하는 것도 뭐냐? 예수님께서 박해를 당하고 제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억울함 당하는 그 일에 베드로도 한 몫 한 거죠. 열두 제자도.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다 이루었다에 새삼스럽게 주님께서 들어올 필요도 없이 이미 그 마당에 다 들어온 거예요. 그 작품에 하나님의 이벤트에 하나밖에 없는 이벤트에 전부 다 합세돼있는 거예요. 뺄 게 없어요, 뺄 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개체성? 예수님만 개체성이에요. 우리는 개체성 없었어요. 전부 다 본의 아니게 주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예수님 죽으신 사건 아래 다 몰아넣었단 말이죠.
몰아넣었으니까 모든 인간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기 때문에 천국 보내주세요, 나 지옥 가기 싫어요,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없어요. 그 다음부터 모든 권한은 예수님이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갖고 있던 언약을 예수님이 이루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언약 안에 언약을 위해서 상대자, 상대역 관계를 이룰 사람을 임의로 본인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택이 가능한 거예요.
본인이 선택이 가능하니까 이미 뽑고 안 뽑고는 누가 정한다? 주님의 임으로 정하는 거예요. 뽑고 안 뽑고는. 구원해달라고 손들어도 소용없어요. 임의로 정해버려요. 결정해버린다고. 그 결정할 때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면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를 반복해서 적용시켜버립니다. 자, 어떻게 했는지 다시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버렸습니다. 아까 그 원리가 뭐라 했습니까? 모든 제물과 소제 안에는 뭐가 담겨있어야 된다고 했습니까? 상처가 있어야 박해받아야 돼요. 박해를 당한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릴 이유가 아들에게 뭐가 있었느냐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죄가 있었던 거예요. 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하고 처벌을 하고 저주를 하고 심판하신 거예요. 그러면 아까 배웠던 것 복습해봅시다.
인간이 있다면 인간의 뭐가 날아간다 했습니까? 인간에 얼굴이 있는 부분 몸통 빼놓고 자존심과 자긍심이 몰려있는 이 부분을 잘라버리지요. 모든 사람들은 그걸 자의로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선 뭐라 했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것을 채워주옵소서. 이렇게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만이 언약관계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언약관계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건 뭡니까? 아까 할례언약이죠. 복습해봅시다. 할례언약은 무슨 뜻이다? 자르다, 잘라낸다. 겉으로 보면 혈육을 잘라내지만 결국은 우리의 자존심과 우리의 모든 걸 잘라내는 거예요. 우리의 머리 부분을 잘라요. 잘라내는 이것이 뭐냐? 우리가 잘라냄을 당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잘라내시고 기거다 뭘 바꿔치기하냐 하면 예수님 자신의 존재를 여기다 박아버려요. 존재에 따라서 뭐가 따라옵니까? 아버지 앞에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게 따라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몸은 가는데 머리 부분은 뭡니까? 다 이루었다가 여기 붙어서 접합되어서 일상 살아가고 있는 거죠.
그 작업을 우리 힘으로선 못해요. 믿습니다, 해도 안 되거든요. 그런데 누가 도와주느냐 하면 세상이 도와줘요. 그게 바로 시편 20편에 1절에 봅시다. 환난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응답하시죠. 그럼 환난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환난은 필수적입니다. 환난이 오는 겁니다. 환난이 오게 되면 5절에 보면 우리의 기도를 이뤄지게 하시고 여기 6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할 때 여러분 기름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라고 이야기해요. 아버지께서 메시아를 의도적으로 환난 속에 집어넣어야 언약이 있고 언약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과 언약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의 구분이 일어나거든요. 표정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존재로 있는지 존재가 주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 속에서 존재가 관계로 바뀌지요. 나에서 뭐로 바뀐다? 우리로 바뀌는 거예요. 그걸 설명해드리겠는 데 나는 홀로가 돼요. 우리는 더불어가 된다고요. 주님께서는 홀로 있는 나를 더불어로 바꾼다고. 홀로에서 더불어로 바꾼단 말이죠. 더불어로 바꾼다는 것은 나+누가 있어야 돼요. 어떤 분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룬 분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냥 곱게 친하게 지낸다고 더불어 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나 자리가 잘려야 된단 말이죠. 할례언약에서 잘려야 돼요. 언약대로 돼야 된다. 언약이 뭐냐? 할례언약이 있고 할례언약은 나를 자른단 말은 나를 죽인다고 보시면 돼요. 나를 없애버린다. 나를 없애버리면 여기서 빈자리가 생기죠. 빈자리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주님의 주체가, 주님이 다 이루신 주체가 채워지는 겁니다.
교회 머리 부분은 주님이고 우린 뭐가 되느냐 하면 몸통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몸통이 되어 하나로 움직이는 거예요. 개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아까 예 다시 물어봅니다. 나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잤다. 이게 죄에요, 죄 아니에요? 죄지요. 왜 나가 들어가요. 나가 없는데. 그럼 뭐냐? 우리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잤던 거예요. 왜? 그 현장에 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 계셨거든요. 주님이 잠을 못 자게 하신 거예요. 왜? 안 자도 되기 때문에. 꼭 잘 이유가 없기 때문에. 왜? 그건 주의 뜻이죠.
왜 제가 생물학의 세포가 물질을 받아들이는 수송메커니즘을 이야기했는지 아시겠지요. 이게 아무리 언약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개체성이 있어버리면 저 십자가가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계속 따진다는 자체가 결과적으로 우리라 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결과를 낳는 게 아니고 결국 나에서 그대로 나로 머물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는 거예요.
뭔가 바꿔야 된다. 바꾸려면 내 자리가 이게 잘려야 됩니다. 그런데 나는 절대로 나를 포기 못하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세상의 주변의 환경이 악한 세상이 나로 하여금 주님 쪽으로 밀어 넣게 만들어요. 그래서 전에는 예수를 믿었지만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예수만 믿어요. 누굴 안 믿는다? 나 자신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제 오후예배에서 그 나를 무슨 나로 봤냐 하면 희미한 나, 갈수록 퇴색한 나, 다른 말로 하면 모호한 나.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군지 이제부터 나는 관심 끊었다. 왜? 이게 할례언약이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앞으로 다음 달에 일주일 뒤에 내가 어떤 인간이 될지 1년 뒤에 나는 어디 있는지 내가 죽어서 어디 가는지 이제 관계를 끊어버렸어요.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생각 안 하기로 나의 희망, 기대, 목적 다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니까.
그럼 우린 여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사람이 그래도 희망과 목적이 있어야지 그렇게 살면 되겠습니까, 라고 하면 주님은 이렇게 물어요. “네가 누구냐? 네가 누군지 나한테 설명해봐. 나는 어떠어떠한 조건을 갖춘 나라고 나한테 설명해봐. 네가 누구야?” 언약이 없이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이 내가 누구냐를 하나님께서 인정해주겠어요, 인정 안 하겠어요? 인정 해주질 않습니다.
네가 너를 알아? 미친 것 아니야. 네가 뭔데 너를 알아. 악마가 심어준 너에요. 내 자존심이 유지된 너라고. 악마가 그렇게 했다고요. 악마는 악마 층 안에서만 놀아라. 딴 거 생각하지 말고 개별자면 개별자로 마감하라는 거예요. 모든 것이 너 잘 되면 잘 된 거고 못 되면 못 되고 그걸로 끝.
네 목적과 희망과 기대 전부 다 마지막 모습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이에요? 잘 되도 누가 잘 돼? 내가 잘 되는 거고, 성공해도 내가 성공하는 거고. 반드시 나를 집어넣는 목적과 희망과 기대 그것만 생각하고 딴 거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의 목적은 뭐냐? 주께서 오시는 거예요. 내 목적, 내 희망, 내 기대 다 작살내고 주님이 내 주체를 대신하기 때문에 주께서 하신 일이 나의 기쁨이고 보람이고 희망이고 찬미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그 요한계시록 8장에 봤지요. 그 성도들의 억울한 기도를 올리잖아요. 그걸 누가 갚아줍니까? 본인이 갚아요? 본인은 목 베여 죽었는데. 안 되지요. 주님이 갚아주잖아요. 그럼 제가 이야기하면 어떤 분이, “목사님 그 말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건 인정하겠는 데 나한테 그런 믿음이 없어요.” 이러거든요. 니 믿음이 왜 필요하나. 그렇게 하겠다는데 니 믿음이 왜 필요하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해운대 바다축제가 있다고 할 때 목사님 그게 안 믿어져요? 니 믿음 필요 없어. 축제는 포스터 걸리면 축제 하는 거예요. 내 믿음이 왜 끼어듭니까. 그게 왜 내 목적이 돼요?
오늘 본문 7절을 봅시다. 그래야 7절이 이해가 돼요.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모가지 위에 날아갔어. 모가지 위가 주의 이름으로 교체가 됐거든요. 교체가 됐다는 말,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내가 아무리 보아도 이해 안 되다는 눈인데.
제 질문이 이거였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피 흘렸는데 그게 왜 우리한테 죄 용서가 되느냐? 그 질문을 제가 했잖아요. 그 질문을 하면서 내가 여기 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 피를 흘렸단 말이죠. 이 피로 어떻게 나의 죄가 없어집니까? 이게 질문이잖아요. 우리의 기대와 목적이 뭐냐? 내 죄가 없어지게 되면 나는 뭐가 돼요? 나는 의인 되겠지요. 이런 인간을 천국에서 안 받아준단 말이죠. 내가 의인 되면.
왜냐하면 이건 존재에서 존재로 바뀐 거예요. 존재에서 그대로 간 거예요. 존재에서 뭐로 바뀐다 했습니까? 관계로 바뀌어야 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마지막 마감의 의미는 최종 의미는 역시 나 천당 갔어, 이걸로 끝나잖아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단 말이죠. 그럴 때 제가 뭐라 합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그럼 질문을 바르게 하면 어떻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미 보여줬잖아요. 뭐가 날아갔어요? 내 뜻이 날아갔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받았어요. 그럼 우린 어떻게 됩니까? “주여, 저 저주받게 하옵소서.” 이렇게 돼야지요.
그런데 그 기도조차 응답이 안 되는 게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전부 다 편승해서 모든 인간은 다 거기에 개입돼있어요. 이미 사는 게 저주에요. 굳이 저주 안 받아도 예수님 십자가 자체가 우리한테 그냥 저주에요. 그러면 존재는 더 이상 찾지 마세요. 내 죄는 어떻게 사해지나 그런 노림수 갖지 마세요. 끝났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건 존재가 아니고 관계에요. 예수님만이 나를 대신하는 존재가 되고 그 관계가 뭐냐? 죄의 관계가 아니고 주님이 다 이뤘기 때문에 의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의의 관계에 의해서 주님을 높일 때 바로 이것을 가지고 뭐냐? 죄 사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갑니다. 예수님 피 흘렸는데 어떻게 내가 용서받습니까, 할 때 앞에 끼어들지 말아야 될 게 끼어들었어요.
그게 뭡니까? 내가 어떻게 죄 용서를 받느냐? 주의 일에 가면 되는데 나는 따로 내 것 챙길 것은 챙기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버린 거예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에요. 잘못된 질문을 했을 경우에 7절 다시 봅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전쟁할 때에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겁니다.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보통 전쟁할 때 요새 같으면 칼과 창, 무력, 무기, 진보된 무기가 있어야 든든하잖아요. 이쪽에는 과학적으로 병기를 들고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뭘 들고 나오는가? 주의 이름을 들고 나오잖아요.이게 잘못된 사고방식이란 말이죠. 우리에게는 발달된 무기가 있다. 우리에게는 주의 이름이 있다, 라고 그렇게 전쟁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저쪽은 발달된 무기가 있잖아요. 우리는 내가 없어요. 전쟁을 내가 요청했습니까? 내가 전쟁하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이건 누구 전쟁이냐 하면 주의 이름의 전쟁이에요. 이게 내 일이 아니라고. 주의 일이라고. 우리가 어젯밤에 자고 일어났다. 밥 먹었다. 누구 일입니까? 그 현장에 누가 있어요. 주의 일이죠.
그럼 이건 몽땅 다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닌 거예요. 무슨 내 죄 사함이 있습니까. 내 일이 아닌데 주의 일인데요. 우린 주의 일에 그냥 의인으로 참여했을 뿐이에요. 주의 일이잖아요. 모든 주의 일이에요. 내가 오줌 누는 것, 내가 목욕하는 것 다 주의 일입니다. 그 현장에 누가 계셔요. 나가 있은 게 아니고 우리가 있지요.
목사님 예수님 계시고 내가 있어야 우리가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우리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있고 예수님 있을 때 우리에요. 그 우리 속에 뭘 집어넣는다? 그냥 집어넣지 않고 나를 죽이고 집어넣는다고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에 이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과 자기와 같이 가니까 우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따라오지 마.” “제 목숨 바칠게요.” “니 목숨 바쳐도 안 돼. 네 목숨 언제 받는다고 했나.” “왜 제 목숨 안 됩니까?”
아까 배웠잖아요. 우리 목숨은 왜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목숨에 뭐가 없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받는 상처가 없어요. 박해받음이 없다고요. 박해받음이 없으면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버리고 취함이 없다고요. 그냥 취하는 게 아니고. 아이고, 네가 나한테 잘해주는구나. 구원할게. 이건 주의 뜻이 아니거든요. 버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만 아들이 부활돼야 돼요. 선택돼야 된다고. 그 선택작용이 반복이 될 경우에만 우리가 하늘나라에 선택되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해석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반복이라고 이해해야 되지 내가 주제넘게 끼어들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어요? 우리를 배제한다 했잖아요. 배제한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무슨 층에 있기 때문에? 두꺼운 악마 층에 있기 때문에. 악마 층에 있으면 우리에게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있으면 있는 게 뭐가 있다 했습니까? 자존심, 자긍심. 아까 두로 이야기했잖아요. 악마의 품성이잖아요.
악마의 품성을 품고 언약이 없어요. 그럼 언약이 없다는 말은 잘라낼 게 없어요. 자르질 않아요. 지키려 하지 자르질 않아요. 그런데 할례언약이 와서 하나님께서 지적할 때 뭐라고 지적했어요? 뭘 반복했습니까? 저쪽은 할례가 없잖아. 할례 없다면 아까 에스겔 32장에서 다 보셨지요. 할례 없는 게 어디서 까불어. 할례 없이 어떻게 하늘나라 들어와. 이 말이란 말이죠.
결국 이렇게 여러분들이 강의 들어보니까 맨날 십자가 구원받았다고 우겨도 전혀 감사와 고마움이 없는 이유는 성이 안 차는 이유는 결국 뭐였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보다도 나를 더 의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바로 병거요 그게 활이요 그게 창이요 그게 바로 세상 무기고 에너지고 힘입니다. 그래도 자기는 병거 다 챙겨놓고 힘 되는 것 다 챙겨놓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뭘 도와주는 데? 많은 힘을 채워주시고, 이렇게 나오지요.
8절 봅시다. 7절 다시,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성경말씀이 참 재미있는 것이 우리와 불신자를 비교할 때 저들을 뭐냐? 흔히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호하는 힘과 무기, 힘이 되는 것들을 대조시킨다는 것, 이게 바로 대립관계에요. 그걸 미리 보여주죠. 우린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안 된다? 나에게 힘이 아니고 내 힘을 빼는 분이죠. 없애버리죠.
8절 봅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전쟁 중이란 뜻이에요. 그 다음에 9절 봅시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여기서 시편 20편의 모든 내용을 담아서 진정한 이스라엘 만들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왕으로 누군가 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20편은 예언에 관한 문제에요. 왕과 제물을 연결지어봅시다. 왕과 제물, 제가 일방적으로 쭉 이야기할 테니까 아느냐고 안 묻습니다. 일단 왕은 없습니다. 제물 바쳐서 하나님의 관계,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이 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체제였습니다. 여기에 누가 관여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관여하지요. 제사장이 하는 일들은 백성들이 바친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다음에 뭐합니까? 소멸시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현상만 생각하세요. 자꾸 의미 생각하지 마시고. 그 당시 백성들은 어린양이나 소 제물 태워서 없애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준다고 된 거예요. 그러니까 구체적인 것은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 하면 제물이 불에 태워서 연기로 없어지는 것까지 봐요. 그러면 제물이 소멸되게 되면, 우리가 오늘 공부할 것 다시 복습합시다.
소멸되면 누가 죄 용서받아요? 내가 죄 용서받지요. 누가 이익이에요? 내가 이익이죠. 이게 다윗 오기까지에 시스템이에요. 구원의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그들이 반복을 했거든요. 나라꼴이 어떻게 됐습니까? 사람들은 이것이 만족스럽지 않아요. 이방나라들의 잘 산단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에 이스라엘이 내가 있으니까 이런 방식 말고, 이 방식이 여호와 방식이에요. 여호와 방식은 소멸, 없애버리는 거예요. 없애려면 여기에 피가 개입되고 ‘피=죽음’이죠. 죽을 때 받겠다는 건 여호와고, 다른 이방민족은 죽는 게 아니고 갖다 바치는 거예요. 우리의 정성을 갖다 바치는 거예요. 우리의 노력을 바치는 거예요. 왜? 바칠 때 자아의 가치는 점점 더 유지되니까. 소멸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거든요.
맹렬한 불로써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주님의 은혜가, 없어지고 주어지는 이걸 경계선, 경계라 합니다. 제물 자체가 한쪽은 죽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께서는 죽었다는 조건 하에 생명을 주는 그 경계선, 생명과 죽음을 양쪽 다 겸비하는 것이 제물이고, 이 제물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으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왜 마뜩치 아니하냐 하면 왜 좋아하지 않냐 하면 이렇게 되면 겨우겨우 먹고 살아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질 않아요. 겨우 먹고 살아요. 왜 겨우 먹고 사느냐? 하나님의 관심은 죄 용서에 있지 네가 부자 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네가 사유재산, 나 스스로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도록 그런 조건을 만드는 게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내가 의지하는 재물이 늘어나면 필히 시험 듭니다. 돈이 많아 보세요. 돈이 없으니까 전부 다 하나님 믿는다고 척하고 있지만 돈이 많으면 하나님은 뒷전이고 시시하게 여겨집니다. 살만하면 그렇게 되거든요. 상처가 없고 박해받는 게 없으면 사람이 자기만 의지하려고 해요. 박해받고 어려우면 하나님께 빌지만. 그게 사사기의 반복입니다. 잘 먹고 잘 살 때는 하나님 안 찾다가 어려우니까 찾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기에 왕이 없음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더라. 그럼 왕을 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어려운 단어 쓰겠습니다. 할 수 없어요. 왕=공시성. 왕이 개인, 개별자가 되면 통시성. 굉장히 어려운 단어인데 뭐냐 하면 인간은 개별자가 되면 시간을 볼 때 과거-현재-미래 이 노선에 있어요.
옛날에 어려웠지만 지금 잘 하면 미래에 보상을 받는다, 라는 희망의 노선을 레일을 유지하는 걸 통시성, 시간을 통한다, 통시성이라 합니다. 개별자가 있으면. 그런데 만약에 왕이 등장한다면 이제는 왕 하나가 갖고 있는 왕에 있는 그 능력으로 우리의 미래, 현재, 과거부터 한꺼번에 전부 다 일관적으로 공시성이니까 시간의 질이 한 결 같아요. 시간의 변천에 굳이 희망과 목적을 가질 필요 없어요. 지금 왕만 섬기면 10년이 지나고 20년 지나도 그 왕이 책임지고 보장하니까.
시간이 흐르지 않는 시간, 그러니까 흐르지 않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게 왕의 지위에요. 그걸 왕의 시간과 왕의 공간성이라 합니다. 오늘 시편 20편에 보면 하나님의 성소란 말 나옵니까? 2절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성소, 공간이죠. 성소가 안정이 되면 시간도 고정이 돼버려요. 내가 굳이 개인이 나서서 내가 헌금하면 복 받겠습니까, 이럴 필요 없어. 왕이 내 미래까지 보장하고 내 모든 운명까지 팔자까지 다 끝내버렸어요. 다 이뤄버렸어요. 그게 바로 다윗에게 주신 다윗언약이란 겁니다. 다윗 약속이에요.
할례언약은 나를 잘라내는 것, 다윗 약속은 그 빈자리에 누가 온다? 영원히 완성자로 왕이 여기 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개별자에서 공시성, 완전히 다 이룸을 할 수 없잖아요. 우리를 옭아매는 적들이 있기 때문에. 그럼 왕이 나는 왕이다, 해선 안 되고 친히 전쟁을 일으켜서 전쟁에 승리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돼요.
그 증거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제물로 인도하신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소 제사, 염소 제사, 양 제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게 왜 없지요? 왜 오늘날은 제사가 없습니까? 제사절기도 없고. 시공간이 왜 없지요? 시공간을 성도가 초월해버린 거예요. 머리 부분이 초월하니까 성도의 몸통도 초월한 거예요.
내가 죽었다 하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겁니다. 왜? 새로운 시공간을 적용시키자 이 말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 개별자가 되면 성공, 실패가 있지만 이게 누구한테 선택받게 되면 주님이 성공하면 성공이고 주님은 실패가 없으니까 무조건 예수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성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찬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고 여기 5절에 나오듯이 누구의 승리냐?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죠. 이제 그 우리가 예수님 합해서 우리가 된 거예요. 나의 승리가 아니고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겁니다. 뭐 창룡이처럼 돌탑 쌓을 필요 없어요. 내가 꼼수 부리면서 주의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그냥 밥을 먹든지 뭘 해도 주의 일이 되니까 새삼스럽게 유난떨면서 주의 일하지 마세요. 이 이야기하고 싶었네, 정말. 나를 위한 시공간은 주께서 허접해서 안 받습니다. 내 시공간은 안 받으니까 주의 시공간만 적용이 되니까 그것이 존재가 아니고 관계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니까 새삼스럽게 주의 일이 없이 늘 주의 일이 살아 있는 한 매일같이 우리에게 밀려듭니다.
용쓰지 마시고 유난떨지 마시고 주어진 형편, 내가 계획한 것 아닙니다. 내가 목적한 것 아니고 그냥 덮쳐오는 거예요. 뭐가? 주님이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덮친 상황 속에 오늘도 우리가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서 애쓰고 조심스럽게 살아왔고 자기관리 철저했고 그게 먹히는 줄 알았습니다. 그 자체가 죄인 줄 이게 알았사오니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