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4a 부산강의 : [시편]34(22편)-적절함과 정확함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2편, 하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많이 들어본 이야기고요, 이게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즈음에,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대목이지요.
십자가를 내세우시면서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뭐냐 할 때 마태복음만 채택할 게 아니고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오늘 본문 시편 22편부터 다윗의 체험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겁니다. 다윗의 체험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다윗이 있다면, 십자가가 뭐냐 하면 십자가는 불소통성이에요. 소통되지 않는 겁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일부러 끊어버린 거죠.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어버리는 것, 이걸 신약에서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의 취지고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의도적으로 끊어버리는 이유가, 우리가 보통 다윗이 무슨 죄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다윗은 죄가 없어요. 여기서 다윗은 죄가 없다. 그러나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사람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단 말이죠.
그러나 구약에서는 외부질서가 인간의 내부로 전환되거든요. 다윗이 개인적으로 마음으로 어떻게 악한지 따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질서, 외부질서가 뭐냐 하면 사울이 다윗을 압박하는 그 당시 정치적 질서, 사회적 질서가 내부적으로 전환되게 되면 다윗은 이유도 모르는 채 쫓겨 다니는 거예요.
쫓긴다는 이것을 그대로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집어넣으면 이건 이유 없이 미움 받는 걸 의미하는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사울에게 미움 받고 쫓기면서 그걸 고자질하면서 하나님이여 살려주세요, 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소통이 됩니까, 안 됩니까? 소통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에 있어서 사울에게 미움 받는지 하나님께 미움 받는지 분명히 해야 돼요. 하나님께 미움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거예요. 하나님께 버림받는 건지, 아니면 사울에게 버림받는 건지 그걸 분명히 해줘야 됩니다.
바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여기 뭘 거쳐야 되느냐 하면 바로 체험이 있어줘야 돼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관념도 아니요 이념도 아니요 여기에 체험이 뒷받침돼야 돼요. 체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십자가는 이거는 지식에 불과한 겁니다. 그냥 이론에 불과한 거예요. 누가 카더라, 하는 설에 불과한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화산, 요새 화산 중에 제일 활발한 것이 인도네시아 화산. 인도네시아 화산, 이태리 화산 그리고 페루의 화산이 요새 활발하거든요. 일본도 들썩거리고 있고. 인도네시아 화산이 있는데 분화구가 라면 물 끓듯이 끓고 있는데 여기에 화산학자 여섯, 일곱 명이 모여서 세미나를 연다 합시다. 무슨 세미나? 화산활동세미나를 화산 정상에서 연다고 봅시다. 그러면 화산 마그마가 터지면 세미나 열었다고 불덩이가 떨어질까요, 안 떨어질까요? 아무 상관없지요. 지식을 설을 풀고 이론을 해봐야 화산의 마그마는 가차 없이 그냥 퍼부어버리죠.
십자가를 논하는 신학, 십자가를 연구하는 복음적인 탐색, 설이 이론이거든요, 이론. 아무리 정교하게 이야기해도 그게 이론이거든요. 뭐가 뒷받침 안 됐습니까? 체험이 안 된 거예요. 십자가 체험이란 아까 불소통성, 전혀 하나님께서 소통하지 않는 것, 이것은 다른 말로 버림받은 것, 다른 말로 하면 쫓기는 것.
궁극적으로 제일 힘든 것은 몸이 아파서 힘들고 다리 접질려서 힘들고 이런 힘든 것보다 제일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미움 받는 거예요. 미움을 체험을 누가 다윗에게 주느냐 하면 사울 왕이 해야 될 기능이 그거에요. 사울은 다윗을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적으로 미워해요.
초반이니까 덜 피곤할 때 성경 찾아봅시다. 사무엘상 24장 8절에,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이렇게 해서 14절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다윗은 왕에 비해서 자기는 죽은 개나 벼룩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저를 그만 쫓아오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 할 때 다윗이 5절에 보면, 사울의 옷자락을 베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상 26장 9절에서 11절에 보게 되면,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계속 쫓아오는 거예요. 쫓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탁해놨으니까.
다윗은 자기 내부적으로 안정돼있는 질서에요. 하나님께선 의도적으로 안정된 질서를 혼돈으로 바꾸는 겁니다. 혼돈으로 바꿀 때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혼돈할리는 없고요. 여기에 무엇이 개입하느냐 하면 혼돈의 주인공, 누구냐 하면 사울 왕이 엉망진창인데 그 이유가 악신 들려서 그래요. 악신 들린 사울 왕으로 하여금 다윗의 내부에 안정된 질서에 투입시켜버려요.
그러면 다윗은 혼돈상태에 빠져버려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아무 이유도 없이. 뭔가 이유가 있으면 고치면 되잖아요. 미움이라는 것이 이유가 없어요. 어제 오후 설교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옥 가는 사람을 왜 지옥 보냅니까? 이유가 없어요. 그냥 지옥 불 주게 되면 지옥 가고. 그러니까 배급이죠. 북한의 배급처럼. 지옥 가면 지옥 가고 생명나무 과실을 주면 그냥 천국의 생명나무를 따먹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이미 저주받아 쫓겨난 지경이기 때문에 거기서 인간의 어떤 선택권이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그러면 인간들 입장에서 흑암의 권세에서, 악마의 입장에서는 이게 납득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따지겠지요. 근거가 뭡니까? 왜 일방적으로 누구는 지옥 보내고 누구는 미워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왜 야곱은 일방적으로 사랑합니까? 야곱은 사기꾼인데. 왜 사기꾼을 사랑하고 거짓말한 적 없는 에서는 왜 미워합니까?
야곱 입장에서 에서가 미움 받는 이유가 나중에 등장하지요. 너는 왜 구라를 안 쳤냐 이 말이죠. 너는 왜 거짓말 안 했어, 왜 사기 안 쳤어? 사기 안 친 이유는 현재 있는 상태, 이 질서가 하나님한테 인정받을 거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자신이 나를 미워해줘야 돼요.
근데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미워할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모든 인간은 지옥 같은 이 세상에 추방된 이상은 인간의 힘으로 육을 스스로 벗어나서 영의 세계로 갈 수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이 어떤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이 세상의 일반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너무나 대립되는 본인도 낯설기 짝이 없는 그러한 내부질서가 혼돈이란 이름으로 폭발해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을 따라가게 되면 안정돼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못 따라가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넓은 길로 가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자진해서 왕따 되고 자진해서 따돌림 되는 그러한 혼돈의 질서를 내부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변화가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말해주지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나이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왜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합니까? 왜 저 사람은 자꾸 나를 따라옵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주여, 라고 이야기했고 그 사람에게 나의 왕이여, 라고 했고 나는 그 사람에게 기름 부은 왕으로 최선의 대우를 배려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따라와요.
사무엘상 24장에서는 옷자락을 잘랐지만 26장에서는 물병을 가져오거든요. 18절 다시 봅시다.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다윗을 지금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옳고 정당한 질서를 갖추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하고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 강의에 나온 제일 어려운 단어를 쓰겠습니다. 다윗은 안정돼있으니까 적절한 관념, 관념은 정신이거든요. 적절한 정신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다윗은 악신 들린 게 아니니까 적절해요. 적절한 정신체제가 부적절한 관념체제로 바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묻는 거예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악을 저질렀기에 당신은 나를 미워하면서 쫓아옵니까?
이렇게 내부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자기자아분열이 발생됩니다. 나쁜 짓해서 쫓아오는 것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데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정신체제로서는 내게 일어난 이런 현상과 이런 체험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지요.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적절한 거예요. 어떤 단어 하나 있으면 그 단어가 원인과 결과가 아귀가 딱딱 맞아야 되잖아요. 치과에서 이빨 했는데 이상하게 되면 다시 뽑아야 됩니다.
내가 생각한 그것과 현실 돌아가는 것이 이렇게 적절해야 돼요. 적절해야 한다. 그게 내가 안정적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그게 뭐가 어려운가 하면 문제는 다윗이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적절한 것과 정확한 것을 구분을 못하고 있어요. 상당히 어려운 말이죠. 적절한 것과 정확한 것을 다윗은 동일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바르게 살면 뭘 안 받는다? 미움을 안 받을 때 이게 적절한 거예요. 그런데 바르게 사는데 미움 받는다? 이건 적절하지 않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정확하다는 거예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그 근거를 다윗을 그걸 찾아가는 거예요. 다윗은 당하기는 당하고 따지기는 누구한테 따지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따지는 겁니다.
오늘 시편 22편,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를 어찌 미워하십니까? 어떻게 저를 쫓아오게 조치를 합니까? 제 안정적인 마음의 질서가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아귀가 전혀 맞지 않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 체험 빠져버리면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무슨 거짓말하는 게 취미가 되고 나쁜 생각하는 그것이 어디 교양이 되겠어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악한 일하고 싶지가 않아요. 세상에서는 악하면 벌 받게 된 게 적절한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오케이, 동의했어요. 동의해서 세상의 일원으로서는 불편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구원받아야 될 사람은 갑자기 주변 자체가 오케이고 나도 거기에 대해서 동의했어요. 인간은 바르게 살아야 된다. 동의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된 삶을 살아야 된다. 우리는 오케이, 하나님의 성도라면 빛과 소금이 돼야지. 오케이, 나 동의해. 이게 뭐냐 하면 적절함이거든요. 적절함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가능한 거예요. 부부가 너무 싸우면 못 살지요. 근데 싸우는 것보다 평화롭게 사는 게 나한테 이익이잖아요. 적절한 거예요.
적절한 것을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걸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두 자로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복음은 진리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진리가 뭐꼬? 진리는 내가 생각할 때 적절한 게 진리다. 왜 나는 정당하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나는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이게 적절한 거예요.
그럼 다리는 왜 삐었나, 다리는 왜 접질렸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머리는 왜 아픈데? 나쁜 짓해서 머리 아프면 되는데 머리는 띵 하고, 별로 나쁜 짓한 것도 없는데 편두통 일어나고. 왜 그래야 되는데. 우리가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가만있지만 다윗은 대번에 이야기합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굉장히 다윗 입장에서는 난처한 겁니다.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따라오고 더욱 더 난처한 것은, 사무엘상 26장 21절 봅시다. 얼마나 이게 난해한지.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뿐만 아닙니다. 25절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네 것이다, 라고 사울 왕이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이걸 다윗이 이 말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믿으면 바보인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나는 믿습니다, 나는 복음을 압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인간이 병신이에요.
사울은 그 순간 본인이 굉장히 잘못된 걸 알아요. 그러나 사울의 특징은 자기내부적인 결심이나 각오가 전혀 세상에 나가면 먹혀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마음 나도 몰라. 내 마음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이 세상은 적절한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내 적절하면 세상도 따라줘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내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내세우는 명분 있잖아요. 그것이 어깃장난다는 생각을 세상 어떤 인간도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윗도 그걸 몰랐으니까. 내가 생각한 걸 다 비틀어버리는 세상. 욥의 친구와 욥의 차이가, 둘 다 생각은 같아요. 바르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하면 벌 받는다. 둘 다 똑같은데 어디서 차이 나느냐 하면 체험에 차이나요.
그런 가설, 그런 세미나, 그런 신학, 복음적인 설, 이론 푸는 것, 거기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은 그걸 적절하다고 쥐고 있고 욥도 그걸 쥐고 싶은데 욥에게는 내부분열이 일어난 거예요. 분명히 나는 나쁜 짓한 게 없는데 내게 주어진 모든 징벌은 이거는 극악무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조두순한테나 주어지는 그런 징벌을 다 받고
그리고 욥이 더 답답한 것은 지금 곧 자기가 죽어 가는데 얼마나 죽어 가는지 자기 육체가 그림자 같다고 했거든요. 두께가 없어요. 무게가 한 사십 킬로도 안 나가는 하여튼 바짝 그림자 같이 얇은 습자기 같은 그런 몸이 되어 곧 죽는다고 알았다고요. 죽어가기 전에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왜 이런 어떤 원리원칙으로 나한테 적용시키는지 그걸 알고 가야지요.
현재 욥과 욥의 친구 이론에 의하면 그것 모르면 나중에 주님 앞에 심판을 받기 때문에 죽기 전에 미리 정보를 빼내야 된다니까요. 마지막 늘 빌면서 기도하는 것이, “내가 모르는 바를 알려주시옵소서. 내가 죽기 전에 이건 알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케이. 죽는 것은 내가 죽겠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죽지만 영문이나 알고 죽고 싶습니다. 이게 마지막 소원입니다. 하늘에 나의 증인이 있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욥이 계속 나가거든요.
그래서 어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만 욥이 뭘 모르느냐 하면 송가인과 홍자가 싸운 걸 모른다고. 진짜 싸웠는지는 모르겠고요. 안 싸웠지요. 인간은 자기의 적합성을 위해서 정당성을 위해서 자기의 정당성에 방해되는 건 다 잘라버리는 거예요. 이건 내가 몰라도 되고 이건 내가 필요한 것, 이건 몰라도 되는 것.
미국 대선에서 부정투표는 내가 몰라도 되고 그건 알 필요 없고. 나이지리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내게 나이지리아 이야기까지 왜 필요하냐? 필요 없고. 필요한 것은 내게 정당성으로 돌아올 정도로 나의 선함과 착함이 고스란히 잘 보호가 되는 그 내부질서, 그것만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반박과 변명하고 내가 그들에게 나의 방어체제가 가동할 수 있는 그런 것들만 사드처럼 배치가 돼있거든요.
그래서 사울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둘 다 뭘 적절함으로 보느냐 하면 나는 미움 받기 싫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과 사울에게 다 같이 이야기합니다. 사울은 정신없이 움직이니까. 나는 미움 받기 싫어요, 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했습니까? 그 근거를 성경에 의해서 대봐라. 나는 절대로 미움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그 근거를 성경적으로 제시해봐라. 성경적으로 제시됩니까, 안 됩니까? 될 수 없어요. 왜? 나를 집어넣었으니까.
삼십 대에 결혼해서 팔십, 구십까지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라고 했을 때 주님의 응답은 뭡니까? 그렇게 살아야 될 근거를 너의 정당성을 성경으로 증명해봐라. 예레미야로 할래, 스가랴로 할래? 어디에 그런 게 있느냐? 그런 근거가 없어요. 그럼 근거는 어디서 온 거예요? 마귀로부터 온 거예요.
그럼 근거는 뭐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를 버림받아도 괜찮다는 게 근거에요. 그리고 그 근거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적절한 것은 마귀 생각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거죠.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저 사랑해주세요, 라고 내세울만한 근거를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나 구원해주세요, 천당 가게 해달라는 그런 근거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에요.
너무나 일방적이거든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 누군데요? 보지 마. 넌 보지 마. 다만 체험으로 너에게 주어질 거야. 생명책에 누가 기록됐는지 몰라요. 모르니까 생명책에 있다는 게 지워져버리지요.
구약적으로 다윗이, 이야기하다가 이야기할 것 잊어버렸다. 근거지요. 근거에 의하면 주님은 누구를 사랑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일단 모든 인간을 생명나무에서 추방했기 때문에 생명나무 때문에 추방했다면 주님이 사랑하는 것은 생명나무에요. 이것은 뭐 딱 봐도 나오잖아요. 선악과 따먹었느냐? 나가. 생명나무 보호할 거야. 너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를 보호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보호하고 선악과 따먹은 자는 미워한다는 것은 분명히 정해졌잖아요. 그러면 한쪽은 사랑하고 한쪽은 미워한다는 이 대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그대로 유지해줘야 돼요. 이게 십자가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여기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자아가 발생됐습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에요. 나가 발생되니까 모든 선택과 모든 성경말씀, 모든 성경구절을 나로부터 설을 푸는 겁니다. 나 성경 아니까 괜찮지요. 남은 지옥 가도 나는 천당 가야 되지요. 전부 다 설을 푸니까 이 세상의 대변자로 자아가 등장하고 나가 등장하면서 나와 누구하고? 나와 하나님 뜻하고 극단적인 대립관계가 수립되는 거예요. 부딪혀야 십자가 터질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선 성경을 통해서 장차오실 예수님 자리에다 다윗은 언약을 받았으니까(다윗언약) 예수님 오실 자리에다 배치를 해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베드로 설교에 나와요. 배치를 하고 여기 다윗을 그대로 두고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사울에게 미움 받고 이유도 없이 쫓겨 다니는 쪽으로 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몇 개에요? 여기 있는 다윗과 여기 있는 다윗, 두 개가 있지요.
그러면 다윗 입장에서 사울에게 당하는 다윗과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다윗 사이에 여기서 내부분열이 일어나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기호가 됩니다. 이 기호는 물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육화가 되지요. 이걸 신약에 오면 기호는 말씀이 되고 육화는 육신이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거예요.
다윗 자체가 그 당시에 성경이에요. 상형문자에요. 움직이고 있어요. 기호라고 기호거든요. 그러면 왜 다윗이 아니고 기호라고 할 수 있느냐? 다윗은 자꾸 사울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당신은 기름부음 받은, 이러한 요소를 내 쪽에서 보호하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악해도 난 당신을 보는 게 아니고 하나의 기호로 보는 거예요.
기름 부었다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면 다윗언약 오기 전에 무슨 언약? 바로 모세언약에 있어서 왕과 제사장은 뭘 바릅니까? 기름 바르죠. 그럼 이건 언약의 지속성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이 계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자기가 스스로 던져버린 그 언약을 따라오면서 완성시키는 역할이 하나님 이름이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올 때까지 단절이 있다, 없다? 단절은 없어요. 단절이 없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사울이 아무리 악하게 굴어도 사울을 둘러싼 기름부음, 다른 말로 메시아죠. 기름부음의 기호성, 말씀성은 유지돼야 되는 거예요. 견지돼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어릴 때 다윗 자체가 골리앗과 하기 전에 다윗이 이미 사무엘 죽기 전에 기름부음 받았잖아요. 기름부음 받음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요셉이 착하다, 안 착하다 할 것 없이 요셉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편 105편 봅시다. 17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대표자가 되는 거죠. 왜냐하면 앞서 보낸 사람의 모든 체험이 뒤에 오는 사람의 체험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그래요.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자, 여기서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 해봅시다. 착고에 상하고 몸이 매였다는 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죄수에게만 해당되잖아요.
시편 105편 17절,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요셉이 싸가지 없는 건 알지만 싸가지 없다고 해서 이런 벌을 받을 리는 없고요. 이런 일은 죄수가 받은 거잖아요. 그런데 요셉이 죄 지을만한 원인을 제공했습니까? 안했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는 원인이 없지요. 적절하지 않지요. 부적절하지요.
그런데 그 뒤에 봅시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시105:19) 그러니까 여호와 말씀이 기호화된 이 세상과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십자가 안다는 자를 대립하는 거예요. 십자가 아는 것을 설이니까. 자기 구원받으려고 십자가 믿으니까. 이것과 진짜 십자가 체험은 반대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아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고됩니까, 고생스럽습니까? 이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기호가 육신화되지요. 육신은 체험을 말하는 거예요. 그냥 이론으로 알던 십자가가 진짜 성도라면 이 땅에서 무슨 체험을 합니까? 분명히 십자가 알고 챙길 것 다 챙겼는데 이상하게 왜 모든 게 내 뜻대로 안 되지? 주께서 나를 꼭 지옥 가는 사람처럼 분명히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꾸 삶은 지옥 가는 사람처럼 다뤄지는 이유가 뭐냐?
욥처럼 분명히 믿음 자인데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했잖아요. 욥 같은 믿음 자가 없다고. 욥 같이 믿음 좋은 자가 없는데 욥은 실제 자기 삶의 상황에서는 천하에 지옥 가는 사람으로 미움 받고 살잖아요. 이 앞뒤가 안 맞는 걸 모순이라 하지요. 논리가 연결이 안 돼. 논리가 단절됐어, 끊어져버렸어요. 설득하고 납득해야 되는데 설득한다 하다가 말이 그만 스톱이 된 거예요.
논리로 하면 되는데 체험을 하게 되니까 나도 내 마음 몰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마음 나도 몰라가 뭔 뜻이냐 하면 왜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왜 주님이 나를 생명책에 의사 물어보지도 않고 기록했는지 왜 나를 천국 가라고 생명나무 과실을 주는지 도대체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지 않는 채 천국 가는 거예요. 그게 주의 증인입니다. 이게 언약의 사람 특징이거든요.
그 점을 좀 더 깊이 있게 보기 위해서 로마서 9장 16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라고 돼있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뭐로 말미암지 않고? 행위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돼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러면 성도가 구원받는데 성도가 주인공이 됩니까, 아니면 성도 안에 들어오신 분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들어오신 분이 주인공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다윗 안에서 무엇으로 확장되느냐 하면, 예수 안으로 확장되는 겁니다. 다윗 시대는 물론 예수가 아니고 하나님이죠.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 이름. 어려우니까 그냥 하나님 안이라 합시다.
다윗은 하나님과 같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 자기가 원해서 기름부음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안과 자기 안이 서로 적절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성도와 성도 바깥에 있는 예수 안은 적절한 게 아니고 대립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 대립이 유지되는 한 이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대립이 유지되면서.
어제 낮 설교한 것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절뚝발이가 있는데 절뚝발이를 예수 이름으로 낫게 했습니다. 또 소경을 낫게 했어요. 소경은 눈 뜨는 게 소원인 거예요. 남들처럼 적절하게. 남들은 멀쩡한데 자기는 절뚝발이 됐다는 사실이 납득이 안 돼요. 왜?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착하기 때문에.
나보다 못된 사람은 걸어 다니고 착한 나는 앉은뱅이 돼있고 어린아이 강간하고 성폭행해서 죽여 버린 사람은 멀쩡하게, 멀쩡하진 않지만 안산에서 살고 있고 팔굽혀펴기 천 번 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고 나는 아버지도 없는데 사고 나서 다리 두 개 못 쓰고 있을 때 소원이 뭐냐 하면 나도 적절하게 해 달라. 내 행함에 딱 맞는 딱 맞춤 해달라고 하지요. 만약에 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에서 나았다고 칩시다. 주여, 제가 앉은뱅이 그 자체였군요.
그러니까 죄인이 예수 믿고 의인되고자 했는데 기도응답 없이 그냥 진짜 의인되고 보니까 천하에 죄인이 본인이었어요. 이제야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돼야 될 이유를 이제 안 거예요. 그 죄인 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거예요. 남들이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어떤 비난을 해도 그건 나한테 마땅한 조치인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평생을 강도로 살고 평생을 창기로 살고 평생을 세리로 살아도 그까짓 게 뭐가 문제가 돼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보다 더 못해도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인공이 나였던 거예요. 이게 모든 타락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모든 인간이 어떤 상태인가? 자기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주인공 노릇하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악마의 세계라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기호화된 거예요.
다시 사무엘상 26장 21절,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범죄 했으면 다신 안 찾아와야 되잖아요.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차라리 북한 김정은의 말을 듣지 사울 왕을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다윗은 이제 간파했지요. 사울이 말을 어떻게 하든지 자기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잘못했고 너는 옳다는 게 기름부음의 요소에서 나온 거예요.
사울이 말한 게 아니고 사울과 함께 있는 기름부음 요소니까 결국은 사울을 통해서 사울 너만 기름부음이 아니잖아요. 차기 왕으로 누가 기름부음 받았어요? 나에게 주어진 기름부음, 이게 메시아니까 메시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바로 메시아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 거예요. 내 뜻의 연속성이 아니고 내 적절함의 연속성이 아니라 주님의 정확한 것, 정확한 걸 두 자로 진리라 하지요. 주님의 진리의 지속성을 위해서 나는 죄인이 돼야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의의 공로를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그 역할로 조인트 된 거예요. 결합이 된 겁니다. 성도라는 게.
사무엘상 26장 24절 봅시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이걸 화살표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질서에서 혼돈, 혼돈에서 질서로 바뀌지요. 그러면 이 질서는 주인공이 누구 질서냐 하면 나가 질서가 돼요. 나 위주의 질서가 되는데 혼돈이 되게 되면 여기 두 번째 나오는 질서2, 질서1은 나를 위한 질서인데, 질서2는 뭐냐 하면 바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여호와께서 여호와 자신에게 경로를 겪게 하고 주어진 하나님이에요.
다윗에게 질서에서 혼돈, 쫓겨 다니는 그 경로를 결국은 그 경로를 따라서 예언이니까 장차 누가 오셔요?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이 경험한 이 체험에 뛰어들어요. 그러면 장차 성도와 함께 있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 다윗처럼 질서에서 혼돈에서 질서로 이어진 그분이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질서에 성도가 여기에 가담하게 되면 이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단절 또는 불소통성, 이 지상의 어떤 인간도 천국을 안다, 모른다? 일체 모른다. 체험적으로 다가와야 돼요.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말은 악마의 사기술이죠. 악마의 사기입니다. 물론 그 악마의 사기로 교회가 있고요. 그러면 이러한 질서가 되게 되면, 질서란 관념이죠. 안정적 관념인데 이건 적절한 게 아니고 정확한 관념이에요.
진리는 우리는 모르니까.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 따먹은 적이 없어요. 생명나무 어떻게 생긴 지 모르지요. 내부적으로 그냥 적절함을 찾은 거예요. 착하면 복 받는다, 이것만 적절함을 찾는 거예요. 선악체계에 의해서. 그러나 정확한 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선 알지요.
이것은 관념이니까 관념이 오기 전에 실제로 체험을 했잖아요. 그러면 체험이라는 것은 우리 육신이 물질이 있어야 되니까 물질을 경유해서 관념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물질로 인한 체험의 경유 또는 과정은 필요하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이 비로소 풀리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이 뭐냐? 그 어떤 분이 여기 계시는 어떤 분이에요.
11장 3절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게 무슨 뜻이냐는 거예요.
도대체 이게 무슨 설이냐? 사도 바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하나의 관념이거든요. 하나님의 정확한 진리체계는 그냥 진리체계에 직접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다윗은 직접 하나님과 호소할 때 여기서 어떻게 됩니까? 불소통성이죠. 소통이 안 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응답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세상 고생 많이 해라. 이 말이거든요.
네가 나한테 정답을 알려고 하지 마라. 정답은 이미 네 움직임 자체가 정답이다. 네가 납득이 안 되고 이유도 없이 고생하는 자체가 정답인 거예요. 다리 접질리고 팔 접질리는 것도 정답이고. 네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경험하는 것이 정답이다. 왜? 앞뒤가 안 맞는, 자꾸 적절한 것만 찾았지 정확한 것은 몰랐던 거예요.
이 적절함은 나의 의로움, 결국은 나 잘났다는 걸로 끝나는 거예요. 남한테 욕 안 얻어먹고 살고 남한테 미움 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적절함이지 정확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실익이지 진리가 아닌 거예요. 실제 나한테 이익이지 진리가 아닌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악마는 영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 물질의 세계에선 관념이기 때문에 악마와 제일 먼저 접촉한 사람이 누굽니까? 여자지요. 그 다음에 여자는 누구와 접촉했지요? 남자. 그 다음에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지요. 메시아. 그 다음에 약속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 이 절차가 이 물질적 세계, 이 인간들의 세계에 체험화 돼야 되는 거예요. 단계가 올라가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일종의 벌칙 같은 게 주어지지요. 여자는 남자 밑에서 종속돼야 된다는, 이건 벌칙입니다. 여자를 향한 벌칙이에요. <인간극장>에 보면 세계챔피언 한 여자 권투선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관중들 모으고 수입이 들어와야 되는데 프로모션 하는 사람들이 여자 권투시합을 구성을 못해요. 돈이 모여야 되는데 기업에서 후원을 하든지 그런 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으니까 살 빼려고 권투하는 사람은 많은데 권투선수로 나가는 여자들은 점점 없는 거예요.
세계챔피언이지만 챔피언 되려면 계속 시합을 해줘야 랭킹이 유지가 되거든요. 안 되면 챔피언이고 뭐고 다 날아가니까. 시합할 데가 없어서 결국 뭘 했느냐 하면 남자 고등학생과 시합을 했답니다. 기술은 여자가 좋은데 시합 끝나고 난 뒤에 이 여자 챔피언이 며칠을 계속 아파요. 왜냐하면 남자 고등학생의 훅이 들어왔는데 그게 아픈 거예요.
여자선수의 주먹과 달리 남학생의 한 방이 챔피언도 아픈 거예요. 물론 기술로 점수로 이기긴 이기지만 아픈 것은 다른 체험이란 말이죠. 내가 느낀 점은 여자가 아무리 권투선수지만 남자 고등학생한테 한 방 맞고 난 뒤엔 며칠 간 아프구나. 여자의 한계를 못 벗어나지요. 못 벗어나면 여자는 약한 거지요. 약하면 10분 쉬지요.
20201214b 부산강의 : [시편]34(22편)-적절함과 정확함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 끝날 때 고린도전서 11장에 하나님과 지상의 인간세계까지 계층을 제가 설명했지요.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남자, 남자 안에 여자. 그러면 하나님보다 예수님이 낮나 할 때 예수님께서 육화되셨으니까 육신이 되셨으니까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은 하나의 계층으로 짜여있어요.
계층이 있다는 말은 통합이 안 된다는 거고, 이것은 층마다 단절성을 지켜줘야 해요. 각자의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그런 육신의 한계 체험을 무시하고 바로 이념으로 갈 수 없는 거예요. 여자가 아무리 보이시해서 남성답다 할지라도 남자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세계에서, 이건 구약에서 애굽나라거든요. 애굽나라에서는 여자라도 남자의 의복을 입으면서 남자처럼 행세하는 그런 경우를 많이 용납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육신에서 나오는 적절성은 흔히 요즘 말로 하면 본능대로. 전미라 남편 이름이 뭐예요? 윤종신이 불렀던 노래, <본능적으로> 몰라도 돼요. 나를 정립하는데 아무 관계없어요. 본능대로는 뭐냐 하면 나에게 불편함이 없이, 본능대로 사는 거예요. 본능대로를 주변에서 인정해줘 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동성애가 돼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하는 걸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나는 내 본능대로 살 거야.
이게 뭐냐 하면 구약에 보면 바로 애굽의 이방풍습이에요. 뭘 위반하고 있습니까? 남자, 여자 계층을 깨는데 뭐로 깨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란 이유 때문에 내가 주인공으로서 적절하기 위한 불편함이 없는 내 정신과 육신이 거리가 없고 괴리가 없는 적절함을 위해서 나는 이런 것은 다 깨버리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런 권한이 있다는 식으로 나오니까 하나님이 쳐놓은 계층 있잖아요. 남자, 여자란 계층이 다 깨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 옷을 입지 말라는 게 나와요.
전에 울산강의에서 했지요. 레위기 26장이었습니까? 하여튼 여자가 남자 옷을 입지 말라는 이스라엘에게 주는 율법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애굽나라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전제로 해서 절대로 애굽의 풍습을 본받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희들은 애굽나라의 풍습과 이스라엘의 풍습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유월절 어린양으로써 강제로 이별시켰거든. 강제로 떼어놓았잖아요. 떼어놓은 그걸 건졌다 또는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강제로 끄집어내면서 강제조치 그걸 거룩이라 하고 거룩의 뜻은 구별된다, 같지 않다, 같은 종족이 아니란 뜻이에요. 그러나 육체적으로 보면 똑같은 종족이잖아요. 아담의 육신이니까. 그 육신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바로 같지 않음의 요소가 개입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낯선 체험이에요. 특이한 체험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안 해도 되는 체험을 해요.
두 번째 시간 초반 들어갑니다. 초반에 정신 있을 때 어려운 것 해야지요. 죽음입니다. 둘로 나눠집니다. 첫째, 육신이 예상한 죽음. 첫째 시간에 공부한 걸 해봅시다. 육신이 예상했다는 것은 육신은 정확함이 아니고 적절함, 내 몸이 불편함이 없는 것을 끊어질 때 그걸 죽음이라고 해요. 내 육신이 불편한 걸 죽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육신을 확대시키면 혈육도 포함되잖아요. 내 자식이 유월절에 죽어 버렸잖아요. 장자가, 애굽 사람들.
이런 것도 전에 강의했는데 나라고 하는 것은 홀로 있으면 안 되고 누구와 대화 속에서 자아가 구축되는 거예요. 이것 설명하려면 몇 시간 걸리는데. 제가 그래서 어제 로사리오 이야기할 때 언니가 동생한테 뭐라고 하느냐?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대화 속에서 내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대화할 사람이 없으면 혼자 살면 혼자 누구와 계속 이야기해요? 나와 계속 이야기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나 홀로 삶의 정당성이 확보가 돼요.
그런데 내 옆에 누가 있으면 계속해서 나한테 거치적거리죠. 거치적거리면서 이게 생겨요. 자아의 경직성. 사랑이 없이 거치적거리면 자아가 경직되고요, 이러면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사랑이 넘쳐버리면 자아의 해리성, 해체성인데 해리성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게맛살을 꽂이로 한다면 게맛살 사각형 형태를 유지해야 되겠지요.
만약에 게맛살로 잡채를 한다. 그러면 약간 찢어줘야 돼요. 중국요리에 게살을 찢는, 한국식에 그런 게 있는가. 신선로 할 때 찢어주지요. 그러면 게살 자체가 또 거기서 해리가 되지요. 찢어주지요. 사랑이 있어버리면 사랑 앞에서 자기는 없어도 된다는 것이 자기 육신이 굉장히 편해요. 남편이 다 해줘버리면 그게 익숙해지고 관행이 되고 관습이 되면 여자는 남편 죽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왜? 다 해줬기 때문에.
다해줘도 문제가 돼요. 혼자 자립성이 하나도 없어. 애도 못 키우고 돈 벌 줄도 모르고 그냥 지는 쇼핑백 들고 아침에 나가서 맨날 쇼핑백 서너 개 끌고 와서 치마 펄럭이면서 집에 돌아오는 것. 신발 쇼핑에다 옷 쇼핑에다 그것 밖에 할 줄 모르다가 남편 죽어 버리면 졸지에 남편 빚이 있다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모든 죽음을 내 육신이 편한지, 불편한지로 따지는 죽음이 애굽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죽음이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이스라엘도 육신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애굽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미움 받는 것, 버림받는 게 죽음이에요. 버림받아버리면 뭐가 저주스러우냐 하면 나라는 것이 있음 자체가 저주스러워요. 차라리 내가 눈 감아버렸으면 좋겠어. 내가 없으면 저주가 쏘아댈 수 있는 표적지가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타인이든 혼자 살든 계속 자아가 경직돼있는 거예요. 너는 나한테 뭐 해줬는데, 할 때 이미 자아는 경직돼있는 거예요. 사랑이 넘칠 때는 태어나서 1개월부터 16개월까지 자아가 없을 때는 그게 없어요. 스트레스가 없어요. 애한테는 암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옆에서 다 해주니까.
그런데 자아가 생기고 또는 동생이 태어났다. 이러면 동생 배 위에 올라가게 되고 또 사자머리 교수 나와서 설명해야 돼요. 자아가 생겨버리면 전부 다 자아중심으로 돌아가고 경직돼있어요. 경직돼있으니까 무조건 나는 사랑받아야 돼. 아무리 내 동생 태어나도 나는 무조건 사랑받아야 돼요.
할아버지가 동생 돌보면 누나는 애 꼬집고 발로 차고 지가 더 사랑받기 위해서 스스로 행동을 해요. 소파에서 일부러 넘어져서 불쌍한 척하면서 넘어지고요. 개와 인간하고 똑같아요. <개는 훌륭하다>에 나오는 개 대통령을 데려다 애들 교육시켜야 돼. 똑같아. 성질대로 안 되면 막 집어던지고. 보이는데 집어던져요. 무려 14개월 된 아이가 집어던져요. 엄마는 어쩔 줄을 몰라요. 저걸 교육하게 되면 트라우마가 생길까 걱정을 하는데 자아의 경직성이거든요.
그러니까 자아가 생겨버리면 이건 구원불가가 돼요. 구원이 안 돼요. 왜? 자아는 계속 경직돼있으니까. 안 되는 걸 누가 한다? 안 되는 걸 주께서 되게 하시는 겁니다. 되는 방법은 뭐냐? 이 자아를 죽여 버리면 되죠. ➀번은 자살 밖에 안 되니까 실패고, 자아는 미움 받는 지경으로 나가야 됩니다. 그 방법이 어려워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이 어려워요.
미움 받는 방법은 사랑을 함으로써 대립된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대립돼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지요. 사랑을 하게 되면 은혜 줄 자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이 자아가 자아를 미워하게 됩니다. 왜? 인간은 자아가 하나가 둘로 갈라지게 만들어버려요. 이것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체험하는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갈라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두 번째 이스라엘은 요단강 건너간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버려요. 어느 쪽이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까? 요단강 건넌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조상의 실패, 조상의 패배 안에서만 새롭게 등장한 이스라엘이 그 패배했다는 것, 인간의 육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함을 재료로 해줘야 구원이 성립돼요. 나는 아니고 육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는 그 경과가 다 장착되고 내용이 살아 있어야 구원되는 그 내용물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저는 죄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죄인인데 의인인 체하는 나밖에 모르는 내가 나 같은 건 버려도 괜찮습니다, 라고 탕자의 요소가 체험이 있어줄 때 주님께서는 그 탕자체험을 건지는 거예요. 잃어버림을 건진다고요. 누구한테 잃어버렸다고요? 사회에서 잃어버렸다고요? 아니에요. 누구한테 잃어버렸다고요? 내가 나한테 잃어버린 거예요. 내가 미워져. 내가 너무너무 미운 거예요. 그것은 말씀 때문에 그런 겁니다.
불교신자들은 원래 엉터리니까 논할 필요도 없고요. 소위 기독교적 냄새 나는데 불교, 기독교적 냄새 나는 가짜 기독교, 천주교지요. 천주교에 예를 들어서 작은 형제들, 이름도 보세요. 형제인데 어떤 형제다? small. 여기에 외국사람도 많고 한국사람 청년들 들어가 있어요. 평생을 폐쇄공간에 따로 모여서 옛날 베네딕트수도원처럼 기도하고 노동하고 그 다음에 성경보고 기도하고 하루일과 마치는 것, 이것은 선배가 있어요.
이 선배 공동체를 무슨 공동체냐 하면 쿰란공동체, 사해 근처에 본거지가 있었어요. 우리 둘이는 가봤거든요. 쿰란공동체는 뭐냐 하면 기도하고 노동하고 말씀보고 기도하고 잠자고. 그렇게 뺑뺑이 도는 거예요. 물론 결혼 안 하고. 결혼하면 나가줘야 돼요. 이 아이디어가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첫째 시간에 공부한 정확한 게 아니고 무엇 때문에? 적절함, 나의 정당성. 나의 정당성이 있어줘야 내가 더 이상 나를 미워할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절대성이에요.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선악과부터 이미 잘못됐고 우리가 엉터리라면 본인이 죽을 때까지 그 엉터리를 발산하는 것이 그게 정답 아니에요? 그게 정답이거든요, 뭘 해도. 그런데 이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이 적절함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정확한 진리로 바꾸려고 이런 쓸데없는 시도를 다 하는 거예요. 이건 하고 이건 안 하고 하는 거예요. 한 번도 자기를 미워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혹시 미워하게 되면 사랑해줄까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사랑이 오게 되면 어디에 집어넣느냐? 성령으로 온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내 자신이 미워지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게 아까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죠. 하나는 먼저 건너온, 이 갈라짐이 40년 걸리죠. 내용들이 함축되더라도 다시 들으시면 이해되십니다.
광야가 얼마라고요? 40년. 이게 40년 체험입니다. 세상의 40년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광야의 40년은 개념화되고 이념화되는데 세상의 40년은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어요. 세상은 시간의 흐름이 전체가 아무 의미 없어요. 죽음의 세계에서 이미 저주받은 세계에서 나이가 몇 살입니까가 의미가 없어요. 천 살 되고 만 살 되도 심지어 창세기 5장에 나오는 무드셀라 같이 969세, 난 오래 살 생각 없기 때문에 나이는 별 관심 없어요. 백날 해도 죽음 안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흘렀는지 안 흘렀는지 그 자체가 차이 나지 않으면 의미 없는 겁니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서 발생되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다면 나이 먹는다는 것, 예순 아홉, 칠십, 그것 뭐. 육신이란 건 의미 없어요. 육신은 원래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죽음의 노선 이탈이 안 되게 되면 아홉 살 먹으나 열 살 먹으나 방향이 벡터라 하지요. 물리학 방향이 벡터가 죽음으로 가기 때문에 같은 노선이기 때문에 이탈 없으면 의미 없는 겁니다. 아홉 살 먹어 죽으나 구십 몇에 죽으나 송해 같이 살다 죽으나 방금 태어나 죽으나 같은 방향이면 그건 둘 다 차이 없는 겁니다.
시간이란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시간이 의미가 있으려면 언약적으로 규정된 40년 이런 기간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시간이 있으려면 뭐 달라져야 돼요. 안 달라졌는데 세월만 가면 무슨 뜻이 있어요. 조두순이 예순 여덟입니다. 예순 여덟, 일흔 여덟 되든 무슨 의미 있겠어요. 몰라 아흔 여덟 되면 남 패진 않겠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세월이 갔다든지 우리 결혼한 지 20년 됐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나? 무슨 날인데? 결혼기념일. 오늘 크리스마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사람이 달라져야지요. 맨날 시계 해주고 차 사주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40년은 있음 자체를 저주하라는 기간이에요. 네가 있냐? 복 받았다가 아닙니다. 그게 저주받았어. 저주로서 있는 거예요. 저주로서 있음을 감사하는 기간이 40년입니다. 나는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 사람들은 홍해 다 빠져 죽었잖아요. 죽은 사람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나는 상대적으로 죽었다, 안 죽었다? 살았다고 여겼는데 그게 착각이었던 겁니다.
약속의 땅에 가까이 왔지만 못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내가 몰랐던 이념적 죽음을 체험하게 된 거예요. 40년 동안 체험한 겁니다. 뺑뺑이 돌린 거예요. 40년이라는 이념이 왜 중요하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시간적으로 규정할 때 40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광야 시험 받을 때. 악마가 인간을 시험할 수 있는 모든 수능문제는 다 끄집어내. 그게 세 가지잖아요. 그게 현실이죠.
현실에서는 뭐냐? 사람은 역시 돈이 최고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 나를 규정한다는 것, 인기 있어야 돼요. 요새 자연인도 인기 있는 자연인과 인기 없는 자연인이 있어요. 이승윤이 찾아가면 인기 있고 이승윤이 안 찾아가면 인기 없어요. 여기서 이승윤이 누군지 알 필요 없어요.
홀로 있다는 것이 절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있으면서도 간음, 살인 다하는 이유가 내가 나한테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적절함을 계속 붙들고 어떤 의미에선 적절함을 붙들기 위해서 기도원에 간다든지 깊은 산골 찾아오지 말라고 가는 거예요. 물론 그전에 돈 많이 버려놨겠지요.
성경에서 40년이란 시간개념으로 이 세상을 그렇게 설명합니다. 세 번째 뭐냐? 악마로부터 노골적으로 나오지요. 모든 세상 영광, 현실이죠. 현실을 어디에 다 모이게 해줄게? 너에게. 나에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욕조 안에 물 빠지는 배수구 있지요. 물 빠질 때는 이 배수구의 존재를 못 느껴요. 물속에 있을 때는 안 보여요. 마지막 빠질 때 쑥 빠지면서 욕조에 이 세상에는 구멍이 있으면 나머지는 구멍에 빠져야 될 허상이고 망상이란 것이 드러나지요.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선 40년 이념이란 확실한 정확한 것은 어디에 쑥 빠뜨리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 다 빠트리는 거예요. 이 세상은 원래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하다. 왜? 내가 이제는 하늘의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 사람으로 대리해서 왔기 때문에 나의 죽음을 똑바로 봐라. 내 죽음의 자리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주님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마태복음 27장에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버림받은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마땅히 아들을 버려야 되는 거예요. 안 버리면 아버지가 아니에요. 왜? 세상 사람이기 때문에 죄는 없지만 육신의 죄를 졌기 때문에 육신 때문에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 버림받음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미 버림받았다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버림받았다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굉장히 버림받은 세월이 즐거운 거예요. 아까 탕자 이야기해봅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탕자를 선택하고 같이 늘 살았던 큰아들을 배척하는 이유는, 큰아들한테는 버림받은 세월이 없어요. 아버지께 버림받았다는 그 체험이 없어요. 효자 중에 효자지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버려진 자를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잃어버림의 요소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잃어버리려한 사람도 없고 잃어버린 자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서 네가 잃어버렸어, 라고 자기 백성을 새롭게 생산해냅니다. 그게 기호의 생산 작업, 생산기능.
주님의 기호는 그 기호의 본질에 맞도록 합당하도록 없는 데서 주님께서 잃어버렸다가 얻었다면 잃어버렸다가 얻었다는 그 기능을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기 때문에 심지어 제자들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도망치기 바빴잖아요. 십자가 때.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에 자긴 자아만 챙기고 도망치는 거예요. 가룟유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성령을 보내면 베드로와 성령 받은 사람들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성령 안에 살기 때문에 이제는 너끈하게 이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단어 하나 적어볼게요. “구애받지 않고” 반대말은 구애받는 것. 구애받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이 본인이 아니고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께서 뭘 통과했느냐 하면 율법의 표적지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의도적으로 율법은 예수님을 쏘아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살을 맞고 즉사했어요. 그런데 사흘 뒤에 가보니까 시체를 찾아야 되는데 시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시체가 없어요.
이 체험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누구한테 오는가? 성도한테 와버려요. 그러면 성도의 육신은 밥 먹고 살아야 되고 안에 들어온 내용은 뭡니까? 네 자신에게 구애받지 않는 그런 예수님이 주인공 되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성도 내부에 계속해서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성도 육신은 내 시간, 내 공간 강조, 주님은 니 시간, 니 공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뭐냐? 참새도 기르시고 들풀도 기르신다. 그러면 참새를 기르실 때 참새는 어떤 조건이 구비돼야 되는가? 참새이어야 돼, 이게 없어지고 들풀은 들풀이어야, 라는 요소를 주님께서 용납을 안 합니다. 내가 악착같이 참새 돼야 돼, 들풀 돼야 돼. 그렇게 되면 기르심이 없어요.
그래서 그걸 첨가하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사람의 머리카락이 한 자나 자라는 것도 네 뜻대로 안 된다고 하거든요. 그런 구절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그 참새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건 같은 대목인데 누가복음에도 나와요(12:25). 네 머리카락도 한 자나 네 뜻대로 안 된다고 되는 겁니다. 머리숱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이 병원에 케어 받아야 돼. 내 뜻대로 할 수 없어요.
여기는 뭐라 돼있습니까? 키로 언급돼있지요.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돼있지요. 왜 염려가 됩니까? 내 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 몸이 돼버리면 누가 길러준다는 의식은 없어요. 내 몸은 나의 정확함이 아니고 나의 적절함이에요. 적절해야 내가 계속해서 나를 지속할 수 있고 지속된 그것은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사랑이 오게 되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내 사랑은 나를 지키는 거지만 주님의 사랑은 나를 포기하게 나를 미워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 보게 되면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했지요. 목숨 버리고 생명 얻는 거예요. 내가 미워할 때 사랑이 이미 도달했음을 그때 우리가 느껴지는 겁니다. 내가 지금껏 키워온 게 아니구나.
그럼 나는 참새가 되고 나는 들풀이 되면 되겠다. 물론 참새, 들풀 감사하지요. 구애받지 않으니 감사하지만 참새는 짹짹이는 기능이고 들풀은 그냥 불쏘시개 되는 기능인데 우리의 기능은 그보다 더 고귀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뭐하면서? 염려하지 않으면서. 기어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도록 그렇게 조치하겠다. 그렇게 지금껏 길러냈다는 거예요. 그 나라와 의를.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5장, 6장, 7장 모든 말씀은 이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일점일획이라도 빈틈없도록 율법을 다 지키도록 오신 주께서 십자가 지신 그 영이 오게 되면 어떤 상태라도 이런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오른뺨을 쳤을 때 왼쪽 커버하고 쳤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오른뺨을 칠 때 왼뺨을 내놓은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왼뺨 안 맞으려고 상대방이 먼저 선방 때릴 때 나도 같이 때렸다는 그 내 모습이 미워지거든요. “아아, 또 성질나왔네, 또 성질. 술도 안 먹었는데 성질나왔네.” 내가 미워질 때 율법의 표적지가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미 빈 무덤이 된 주님께서 나로 율법의 표적지로 사용했다는 그 관계성이 느껴집니다. 그게 체험이에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린 항상 율법에 의해서 마태복음 5장에 의해서 우리는 죄인 됨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그러한 즐거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깔대로 사는 체험, 막 사는 체험, 이게 어디서 같이 패는 체험, 남편이 휴지 던지면 나는 티비 던지는 체험. 막 가자는 이야기지요.
네가 막을 마지막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게 마지막이야. 티비가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이 예수 믿는 여자가 이러냐. 나도 성령 안 받을 땐 너처럼 생각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래야만 이래도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뜻을 이런 여자를 기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신약에 나오는 주님과 같이 있어서 모든 게 표적지가 없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최종 목적지가 안 되게 하는 거예요. 내 자신이 적절함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나의 정확함을 진리를 위해서 주께서 쓰시다 버려도 나는 괜찮다는 겁니다. 주께서 쓰십니다. 지금도 쓰셔요. 백만 하나, 백만 둘, 백만 셋. 그동안 많이 썼잖아요. 이젠 더 이상 밧데리 다 떨어졌는데 뭐. 버리셔도 괜찮아요.
이게 바로 사도들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더 심하게 이야기해요. 나는 모든 것이 정결하며 모든 것이 깨끗하며 모든 것이 합당하며. 네가 언제 그렇게 착했어? 착한 게 아니고 그렇게 진리를 적절함에 위에다 적절함을 깨고 진리가 주어지는 거예요. 고난을 통해서 또는 버림받음을 통해서 되찾음을 얻은 거예요. 버림받음이 없으면 되찾음도 거기에 없어요. 반드시 버림받는 것, 혼돈 속에 새로운 질서가 나오지 혼돈 없는 곳에 새로운 질서가 안 나옵니다.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조용하다는 거예요. 교회 그만 합시다, 할 때 가장 교회다워요. 그동안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음을, 이게 교회임을.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계층관계, 천국까지 이어지는 계층관계, 여기는 뭐가 없어요?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이 육체적 체험이기 때문에 시간은 없고 주님의 개념만 계층으로 주어졌지요. 악마는 영적 존재기 때문에 빠지고 여자 제일 밑에, 그 다음에 남자, 그 다음에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인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고린도전서 11장을 질문할만해요. 왜냐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여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8절에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렇게 돼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여자의 자손이에요. 창세기 3장 15절 약속, 여자의 후손이라고요. 여자의 후손이면 이건 그냥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서의 남자거든요. 남자, 여자는 이 선까지 끝이에요. 그 다음에 이 선, 남자까지는 남자, 여자를 따지지만 예수님과 이 사이에서는 무엇의 후손이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 단절돼있지요.
단절을 뚫고 올라가려면 밑에 있는 여자가 아니고 없는 여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없는 여자로서 여기에 아들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 앞에 남자, 여자는 뭐가 됩니까? 천국 가면 전부 다 무효가 되겠지요. 천국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부부도 없어요. 부부로 있을 때 살아 있을 때 마음껏 즐기세요. 천국 가면 남자도 여자도 없어요. 누구 시계 사주고 그런 여자도 없어요. 결혼하는 것도 없어요. 결혼이 없다고요. 천사와 같다 했거든요.
천사와 같은 그 고리가 바로 여자의 후손과 예수님과 남자, 여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남자라고 할 의미가 없어요. 그냥 여자의 후손이라고요. 그러면 남자, 여자 이 개념은 이 땅에서 언약을 위해서 체험할 체험의 단계에서는 이게 필요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줄 때 이스라엘이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율법과 결합되면서 신약에서 율법이 쏘는 게 없을 때까지 계속 유효하게 작용되는 겁니다.
그걸 어디서 보느냐 하면 바로 레위기 12장 봅시다. 오늘 복잡한 게 많아서 오늘 오후에 올릴 테니까 다시 한 번 차분하게 하고 녹취한 것 줄 그어가면서 보시면 됩니다. 레위기 1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율법입니다. 율법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 육체에 체험을, 어떤 체험? 죄인 되게 하는 체험을 부가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죄인 아니라고 한 자에게 계속 율법을 줌으로써 이래도 네가 죄인 아니야, 이것도 다 지켰어, 라고 자꾸 몰아넣는 겁니다. 율법의 계층화,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순서, 그 사건현장을 율법 안에 고스란히 담아서 계속 십자가 올 때까지 전달, 전달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2~4절)
이게 어떤 과정을 보여주느냐 하면 거룩한 공간에서 다시 버림받는 체험을 하고 그 체험을 애 낳았다고 훅 들어오지 말고 네가 버림받는 과정에 어떤 요소가 가미되어야 거룩하지 않은 네가 거룩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룩이 거의 하나의 기호거든요. 물질화된 신체가 체험케 하는 거예요. 누구 따라서? 율법의 지시에 따라서 하는 거예요.
뭐 여자를 무시하느냐, 이러지 말고 여자가 악마 결탁했다는 그 사실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이런 체험을 함으로써 율법이 하나님의 뜻은 선악과 있던 그 사건현장은 계속 살아 있게 한다는 주의 취지에 너희들이 종으로서 따라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 사건, 여자가 악마와 접촉했다는 그 사건을 계속 살려줘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은 저는요, 하지 말고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중요해요. 제가 맡은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여자는 여자 역할하고 남자는 남자 역할하는 거예요. 남자, 여자 역할하고 그 다음에 기다려야 될 것은 여자의 후손, 그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거든요.
여러분들이 여기까지만 보게 되면 여자가 아기 낳을 때는 칠일 동안 부정하고 다시 원상복귀 할 때는 삼십삼일 동안 기간이 또는 거리두기, 자기 자택감금 비슷하게 있어야 되는구나. 바이러스 없을 때까지 하고 이러는데 뒤에 보니까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곱빼기에요. 그 다음에 나오지요.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칠일은 같은데 다시 돌아올 때는 육십육일이에요. 앞에 남자 낳을 때 삼십삼일, 곱하기 2해서 의도적의 차이를 두는 겁니다. 계층을 벌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칠일 동안 부정하고, 부정한 것을 찍어버리는 거예요. 하나에 코드화시키는 거예요. 칠일 동안 부정함을 코드로 찍어놓고 나가! 삼십삼일 동안 격리수용, 아들 낳았을 땐 삼십삼일, 여자를 낳으면 육십육일 격리수용하는 거예요. 수용할 때도 그냥 못 들어와요. 여기 뒤에 또 제사를 드려야 돼요. 제사장한테 가서 속죄하고, 요샌 애 낳는 게 대센대 애 낳았다고 이렇게 복잡합니다.
“자녀 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 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6, 7절)
산혈이 깨끗하다는 것은, 사람 몸이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관계를 통해서 살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목숨, 숨 쉬면 살아 있잖아요. 성경은 그게 아니고 율법이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게 돼요. 그러면 인간 안에 무슨 기능이 삽입되어서 그 안에 살아 있어야 되겠어요? 율법이 살아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율법의 내막은 뭐냐? 장차오실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다시 승천할 때까지 경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었다가 대신 희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다시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그 상태를 보여주거든요. 그 상태가 전에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겁니다. 이렇게 메시아가 왔다 가지 아니하면 더러움이 돼요.
그런데 메시아가 왔다 감으로 경과를 거치면 더러움에서 뭐가 됩니까? 거룩함이 되고 정결함이 되고 깨끗함이 되고 이거는 깨끗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요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뭐가 된다? 의가 되려면 인간의 힘은 안 되고 누가 왔다 가야 돼요. 왔다 가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죄를 의로 바꾸려고 형제수도원처럼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불교처럼.
그런데 왔다 갔다면 왔다 가신 분을 자랑하려면 나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스스로 나의 의를 미워해야 되지요. 의를 미워한다는 것은 나의 과거 중에서 잘난 것만 수집해놓은 나의 과거사 자체를 잘라버리는 겁니다. 나, 이렇게 잘났다는 요소를 잘라버려요.
처음에 부부가 결혼해서는 나는 당신만 있으면 좋아, 하고 자기 의를 안 내세우다가 조금만 살게 되면 너 때문에 나 망했다고 전부 다 자기 의, 자기 창고에 모아놓은 모든 주특기는 다 끄집어내서 저쪽에서 총 내놓으면 여긴 기관총 내놓고, 저쪽에서 너 올 때 이천만원 했지 나 삼천만원 해서 집 사줬잖아. 그 무기를 버리질 않았어. 그 무기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고요. 기억 속에. 기억 속에 내 잘남에 필요한 재료는 일체 버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써먹을 때가 온다는.
다녀가게 되면 나의 의를 인정하지 않지요. 나의 의가 사라지지 않으니까 나의 의를 미워하면 그만인 거예요. 전에는 죄 지은 것이 죈데 이젠 그것보다 심화되면 더 깊이 들어가면 나의 의가 바로 죄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의 하심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악마 짓이 되기 때문에 나의 의가 죄가 되는 겁니다.
다시 이 경과를 반복해서 순환해서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체험을 하게 합니다. 체험을 하게 되면 삶을 살면 지 잘난 체하고, 잘난 체하다가 성령에 의해서 또 깨지고, 깨졌다고 또 잘난 체하는 자기 의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냥 막 살면 되는 거예요. 막 살다보면 뺑뺑이 돌 수 있습니다. 원위치로 돌아온단 말이죠.
육십육일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육십육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무엇의 비용이 많이 드느냐 하면 원상태 오기가 육십육일이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겠지요. 그만큼 주님은 남자 사랑의 곱빼기나 여자를 더 사랑하는 거예요. 왜? 남자들은, “여자 놔두고 우리만 빼내서 천당 보내세요.” 하는데 주님은, “아니야 죄 지었던 악마와 결탁된 저 끝까지 마지막까지 다 건져야 돼.” “주님, 그렇게 되면 너무 수고가 많은데요?” “난 수고하려고 왔어.” 마지막 사람까지 다 건지고 가는 거예요.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주님께서 중간에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 물이 닫히도록 안 해요. 어딜 쳐다보느냐 하면 마지막 남은 어디 가도 굼벵이 같은 인간 있거든. 빨리 와, 마지막 나올 그때 지팡이로 닫아버리면 다 죽어버리잖아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할 그때를 위해서 시간은 2020년, 21년 계속 가는 거예요. 마지막 건질 자를 건지기 위해서 끝까지.
그 마지막이 심지어 강도라 할지라도 세리라 할지라도 조두순이라 할지라도 창녀라 할지라도 그런 건 묻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에 마지막 주께서 건질 때까지 이 세상 현실을 닫아두지 않습니다. 그냥 공개하는 거예요. 먼저 구원받은 사람은 구애받지 않고 살면 되니까요. 느긋하게 이미 챙길 것 다 챙겼으니까 합격통지서 받아놨는데 뭐 걱정입니까.
그렇게 해서 여자가 남자보다 밑에 뒀다고 해서 여자들이 더 신경질 내고 짜증내지 말라는 거예요. 왜?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니까. 차라리 남자들은 이렇게 하세요. 나는 곱빼기 받았다. 그래서 그 역할은 이 세상 있을 때까지만 육체로 있을 때까지만 그 연극은 드라마는 끝납니다. 드라마는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세계가 열리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냥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할 때 아무리 힘들지만 끝날 때가 있잖아요. 15회 내지 16회 끝나잖아요.
어제 교회 예배 전에 누구와 이야길 하는데 추미애와 윤석렬 열심히 봤다고 하기로 그것 드라마입니다. 추미애, 윤석렬 끝나고 나면 또 다른 드라마가 정치무대에 올려줘야 사람들이 사는 재미가 나요. 이 말은 남이 드라마 본다는 것은 본인도 그냥 곧 있다 없어질 드라마의 출연진에 지나지 않아요. 이 세상 모든 것이 꿈이에요. 드라마입니다.
무슨 드라마? 창세기 3장에 있던 범죄 한 그 드라마를 계속 반복시키는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이 우리를 활용하시는 드라마에요. 그게 남자, 여자 역할 드리고 여자의 후손 역할 예수님, 그 뒤에는 하나님 역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주님도 이 땅에 올 때 한 드라마지요. 아버지께 죄 없이 오셔서 모든 일을 하시고 새로운 율법을 주시면서 결국은 이 세상 사람으로 취급받아서 버림받고, 완전히 끊어져버리고. 그런데 창세전 약속대로 다시 건짐 받는 그 드라마, 하늘에 올라간 드라마 그 드라마 다윗이 거기에 참여해서 보여줬다면 그 다윗의 생애가 오늘날 우리의 생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을 매개로 해서 갈 때까지 가게 하시는 그 주님의 작품에 우리가 들어갔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십자가를 앎으로 이미 우리는 죽었고 주님의 생명이 살아 있기에 마음 놓고 세상살이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 역할 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