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언약과 주체)130314-15강a -이 근호 목사
제 15강a
오늘은 213페이지 언약과 주체의 발생을 하기 전에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그걸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는데 그 몸은 골로새서 1장에 보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필요로 해서 만든 몸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하여, 그 다음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돼 있죠. 쉬운 말로 우리 몸의 주인은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주인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을 뭐라 하느냐 하면 앞에 그냥 예수라 하지 않고 ‘주 예수’라 하고 고린도전서 12장3절에 보면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여기서 우리의 몸의 의미가 중요하게 나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만약에 이웃집 어떤 아저씨가 죽으면 그 아저씨 죽은 것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입니까? 아니면 지 혼자 죽은 거예요? 자기 혼자 죽은 거죠. 그러면 자기 혼자 죽으면 그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의 주가 될 수 없죠. 불교는 지가 도를 닦아야 돼요. 왜냐 하면 불교는 아무것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몸이니까 자기만 의지해야 돼요. 자기 의지를 많이 하면 자기는 빛나고 자기를 그냥 방치하면 자기를 방치한 대가로 망가지고 그런 겁니다. 절에 가서 도를 닦든 지가 관리를 해야 돼요.
그런데 복음은, 기독교란 말은 하기도 싫다. 복음은 뭐냐 하면 성령이 안 오면 복음을 모르고 성령이 오게 되면 뭐까지 아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예수님이 어떤 아저씨라면 어떤 아저씨가 죽었다. 그 아저씨 죽은 것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도 연결 안 돼요. 그런데 죽으신 그 아저씨 영이 우리 속에 임해버리면, 그분의 죽으심은 죄도 없는데 그냥 죽은 게 늙어 죽은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서, 저주 받아서, 또는 징계 받아서 돌아가신 게 돼요. 그런데 원래 징계, 벌이라 하는 것은 죄가 있어야 받는데 그분은 죄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죄 없으신 분이 죽으신 것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저주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죽은 걸로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뭐죠? 우리의 몸은 우리가 자랑하라고 있는 내 몸이 아니고, 우리 대신 죽으신 분이 자기 그 행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죄를 위해서 대신 죽었던 그 사건 때문에, 우리는 뭘 해도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어야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즐거운 거예요. 우리는 착한 일 했을 때는 착한 일 했다고 보고, 나쁜 일 했을 때는 나쁜 일이라 해서 나쁜 일보다 착한 일이 아무래도 많으면 우리는 악인이 아니고, 선인인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이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죠. 선이냐, 악이냐, 악이냐, 선이냐 할 때 우리는 분량으로 따지거든요. 악이 많으면 악인이고 선이 많으면 선인이다. 이런 상식에 대해서 누가 금할 수 없죠. 교도소 간 사람은 아무래도 선보다 악이 많은 사람이고 그리고 남한테 칭송 받는 이런 희생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그 사람이 존경받는 이유는 악보다 선이 많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은 전부 다 독자적인, 내 몸은 내 것이라는 독자적인 관점에서는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원래 독자적 관점이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서로, 서로를 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몸은 내 꺼야.’ 이 말은 뭐냐 그러니까 ‘니 몸은 니꺼’ 라고 인정해줄 테니까 제발 ‘내 몸은 내꺼’라고 인정해 다오, 이런 뜻입니다. 하여튼 인간들끼리 저희끼리 장사 다 해먹었어. 원래 주인은 따로 있는데, 예수님을 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몸을 만들어 놨는데, 악마가 독자적인 존재 양식을 가진 거예요. 악마는 뭐냐, ‘내가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가 알아서 선택하겠습니다.’하는 게 악마에요.
우리보기는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긴데 주님 보시기에는 더 이상 뭐냐, 악마가 천사거든요. 나는 누구한테 꿀리기 싫고 누구한테 매여 살기 싫다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1장에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게 뭐냐 하면 마음속에 악마 두기를 싫어하지는 않아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요. 왜냐 악마는 나한테 지시 명령은 안 하잖아요. 우리는 단짝이기 때문에 서로 좋게 지내면 되지, 잔소리하고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소리는 안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백부장은 뭐라 했습니까? 자진해서 이야기해요. “주여 저보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저도 중대장으로서 내 밑에 부하가 백 명 있는데 걔들이 내 말 한 마디면 짝, 짝, 짝 짝 움직인다고요. 제발 그런 관계로 제발 저를 사용해 주옵소서.” 그렇다면 자기 일이 있다? 없다? 자기 일이 없는 사람! 내 일이 없는 사람! 행복한 사람! 축복 받은 사람!
자기 일이 없지만 놀지는 않아요. 왜, 내 일에 내가 참여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의 일에 참여했기 때문에 노는 법은 없는데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결과에 기대하면 안 돼요. 그걸 성경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어떤 결과가 되던 그것은 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라는 그 고백. 강도를 만나든, 바다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매를 맞든, 이고니아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내쳤던 간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 나로 하여금 일을 시키기 때문에 나는 못하는 게 없습니다.” 능력 주신 자 안에서 그렇죠. 뭐든지 전지전능하다는 말이 아니고 능력주시는 것 때문에 나란 자체도 사실은 능력의 결과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저는 저 자체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여기 있으매 주님이 일 시켜서 있는 거예요. 이게 죽으신 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니까, 죽으신 분의 영이 임하니까 분명히 우리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도 살았고 주님도 살아있고 다 살아있는 걸 알잖아요.
제자들이 다 모였을 때 예수님은 살아있는 게 맞잖아요. 맞는데 세상 사람들 볼 때는 어떻게 보이느냐 하면 죽은 자의 영이 임했다 이렇게 보죠.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기 몸에 대해서 자기가 권리 행사하기 때문에 그걸 사람들은 살아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세상사람 보기에 이미 죽어버린 분이 내 몸을 장악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주님한테는 살아있지만 세상 사람한테는 어떻게 보이느냐 하면 죽은 자가 산자를 움직이는 게 돼 버려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인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는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산다 하는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성령이 있다는 증거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살아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몸은 원래 주인이 우리를 관리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주님 보시기에 그게 정상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자아, 또는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요번 수련회 때 자아와 주체를 나누었죠.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회에서 누가 호명을 해줄 때 그게 주체가 된다는 거죠. 자아라 하는 것은 이 몸만 있으면 몸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게 자아인데 ‘몸이 아프다’ 하지 않고 ‘내가 아프다’ 하잖아요. ‘니가 그런 소리 하니까 내가 마음이 아프다.’ 할 때 그 ‘나‘가 자아거든요. 하나님도 몸이 있으면 자아를 인정했어요.
그런데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환경이 나를 뭐라고 호명하고 뭐라고 불러주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그 공동체, 그 사회에서의 뭐가 되느냐 하면 주체가 되는 거예요. 환경이 뭐라고 해주는지. 그러니까 그걸 호명이라고 하죠. 예를 들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니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했죠? 그러면 ‘아브라함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아고, 호명을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할 때 그 때 예상 밖의 자기가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했는데 주님이 호명해 주니까 그때부터는 복의 근원이 되잖아요.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게 주체라는 거예요. 주체 아시겠죠? 환경 문제, 그러니까 인간의 주체는 몸이 어떤 장소에 놓여 있느냐의 환경 문제에 따라서 주체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체라 할 때는 사실 자아도 포함되지만 언약과 주체의 발생이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할 때 아브라함 언약이 어떻게 발생됩니까? 아브라함을 불러줘야 아브라함 언약이 생성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언약이 있는 곳에 뭐가 발생된다? 주체도 같이 발생되죠.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참 쉬운데 이미 이 주체를 발생할 때 아브라함은 ‘내 옛날 고향은 하란 땅이다.’ 뭐 이렇게 나름대로의 또 주체가 있어요. 자기가 생각한 역사적 공간적, 우리 집안은 어떤 집안이고 내가 어느 학교 나왔고 자식은 몇 명이고, 나름대로의 또 사회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주체가 있었다 이 말이죠.
여기서 사회와 공동체를 한번 구분해 봅시다. 사회라 하는 것은 법이 중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걸 테니스란 영국 사회학자는 이걸 게셀샤프트, 게마니 샤프트라 해석하는데 공동체라 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 관습이 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는 법만 지키면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지만, 공동체는 그동안 인정, 의리, 이런 걸 어겨버리면 공동체에서 욕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애들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잖아요. 사회에 나가서 회사에서의 행동을 자기 집안에서 하면 ‘이놈, 어디서 이런 걸 배웠나.’ 욕을 얻어먹죠. 사회는 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지만, 공동체에서는 아버지가 전수해 준 그 가정의 가풍, 분위기를 파악 못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가씨가 회사에 나가서 미니스커트를 입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상견례 하면서 시아버지 앞에서 미니스커트 입으면 ‘니가 니 집안에서 뭘 배워서 이렇게 옷 차림새가 노출이 심하냐.’ 이렇게 나올 때 ‘뭐야? 왜 내 자아에 대해서 이렇게 간섭하지?’ 아가씨가 일단은 참고 나중에 결혼하면 저희끼리 살 때 시아버지 용돈은 없다. 그렇게 되죠. 뭐 가풍이고 가문이고 돈이 중요한 거지 뭐, 늙은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정신 바짝 차려야 되죠. 싫은 소리하면 나중에 용돈도 없고 애 봐주면 용돈 얼마 준다고 그거 다 계산해 놨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줄 때는 반드시 주체가 발생됩니다. 그런데 그 주체는 기존의 우리가 이미 형성하고 있는 주체와 충돌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이 논문에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그런데 내가 성경 말씀을 봤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안다. 이건 아니죠. 그것은 내가 여기 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자아로 있고 주체로 있기 때문에 자아와 주체로 다 감춰놓고 여기 내가 있다고 눈이 있다. 눈이 성경을 본다. 성경 말씀 지킨다. 그러니까 옳지. 이거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그 정도보다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인들이 주체, 자아, 이것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내가 성경을 본다. 지키라고 주니까 지킨다. 나 문제없다. 이렇게 되면 언약이 왔을 때 충돌되죠. 아브라함 언약도 충돌 되겠지만 지금의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 앞에서 그냥 ‘틀렸구나.’가 아니라 처음부터 틀렸다. 그냥 틀린 게 아니고 처음부터 틀렸기 때문에 하는 것마다 틀렸지, 조금이라고 나올 의로움은 아예 나올 낌새도 없고 나올 가능성도 전무하구나, 이게 새로운 주체입니다. 죄인이 의인 되는 거, 여러분, 복습 한번 해봅시다. 죄인이 의인 되는 거, 어떻게 의인된다 했죠?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내 대신 누가 돌아가신 분! 여러분, 내가 말하니까 알지만 그런데 이걸 자꾸 잊어버린다니까요. 내가 행동 똑바로 해서 복을 받지,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뭘 모독해요? 이 내가 하는 일이 내 일이라고 여기고 그 결과에 대해서 내가 여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나한테 좋게 온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내가 관리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에 주님의 일로 우리한테 그냥 거기 합류된 건데, 이걸 따로 내 일이라고 간주해 버리면 주님의 대신 죽으심은 흔적도 없이 날라 가 버리잖아요. 이건 누가 좋아서 기뻐할 일입니까? 마귀가 좋아할 일이예요.
성도의 영적 싸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는데 육적 싸움이 아니고 영적 싸움 이예요. 영적 싸움은 칼 들고 총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주인을 주인으로서 인정하는데 있어요. 나는 주님의 메시지라 했죠? 내가 나의 메시지가 되면 안 돼요.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나 이만큼 괜찮은 인간이야.’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안 되고, ‘내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귀한 일을 맡겼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환자를 이렇게 치료하더라도 스켈링을 하더라도 ‘못난 나에게 주의 일을 이렇게 맡겨 주시다니.’ 이렇게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리고 월급 받으면 ‘못난 나에게 월급까지 주시다니.’ 이렇게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범사에 먹든지 마시든지 범사에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바로 앞에 보면 “너는 이미 값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 이 말이죠.
사람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전부 다 이것에 달려있어요. 내 것이 아니다. 이걸 항상 명심해야 돼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민이나 걱정을 내가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육을 위해 심는 것이 아니고 영을 위해 심는 거예요. 육에 심는 것은 백날 심어봐야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이고,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은 항상 영생을 거둘 수밖에 없는 게 출발점이 영생에서 오는 명령을 받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영생의 명령이 뭡니까? “내 것이 아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게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희한한 일이 나온다니까요.
신천지의 문제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단이라 하면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이단이 아니라고 우기니까, 내가 그 답변부터 해야 돼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이단이고 우리가 죄라 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이단이란 뜻 이예요. 이단이란 하나님을 오해해서 믿은 거잖아요. 오해해서 믿었다는 것을 발각시킨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이게 신앙입니다. 잘못 믿은 것에 대해서 발각시켜 주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잘 믿는 게 뭐냐, 잘못 믿었다는 것을 아는 게 잘 믿는 거예요. 언약이란 것이 한쪽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게 언약이 아니고 항상 우리의 잘못을 항상 같이 들고 와서 비교시키는 게 언약이거든요. 아브람을 없애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과 아브람을 항상 비교시켜서 아브라함은 약속이 있고 아브람은 약속이 없는 상태인 것을 아브라함이 살아가면서 늘 비교해요. 아브람이 낳은 자식은 이스마엘이고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이삭입니다. 니가 니 육신이 낳은 자식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너에게 입양시킨 약속의 자식을 사랑하는지 ‘죽이라’ 하거든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입양한 자식을 죽입니다. 이걸 살려 주라 하면 하나님이 주신 자식을 사랑 하느냐 할 텐데 … 하나님은 사랑하는 방법이 반대가 돼요. ‘사랑하지?’ ‘예, 사랑합니다.’ ‘죽여’ 살인하라 이 말 이예요. 주의 명령대로 살인을 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아닙니다. 이건 살인입니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지가 자식을 쥐고 있는 것이지, 약속이 자기를 쥐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 어렵다 정말.
자식이 날 살리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브라함을 살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자손을 살리는 게 아니고 남이 나를 살려요. 내 대신 죽으신 분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이쿠, 고맙다.’ 해서 살려주는 게 아니고 ‘세상에, 이렇게 내가 어려울 때 숨겨줬으니까 내가 보답해 줄게.’ 이게 아니고, 주님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주님이 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저주 받으면 우리는 도망가 버립니다. 도망 안 가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내가 저주 받겠습니다.” 한 분이 도망 안 가시고 옴팡 저주 받으신 분이 도망쳐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살리신 거예요. “이리 와, 이미 너는 살아났어.” 하고 찾아다니시는 것이 성령님 역사, 보혜사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어요. 찾아왔다니까요. 숨어있는데도. 그걸 뭐라고요? 선물!
아까 동영상 할 때 그거 했어요. 시몬이란 인간은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너는 돈 주고 사려고 했기 때문에 니는 반드시 망한다.’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설명했죠. 성령이 나타난다는 것은 너는 구원 받으려고 하는 그것만 보여주는 그것만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이 주어지는 그 현장 속에는 반드시 성령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자는 이런 식으로 반드시 망한다를 겸해서 같이 보여주는 그 현장이 성령의 역사에요. 이것도 질문하면 이렇게 답변할 거예요. 이렇게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 답변할 게 자꾸 생각나네요.
그래서 그러한 언약과 주체는 마지막 때가 되면 완전히 그 내막이 드러납니다. 이걸 ‘종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말하면 늘 생각나는 게 뭐냐 하면 드라마 서울의 달, 거기에 종말이가 나와요.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뭐가 담겨있기 때문에? 종말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독 들은 캡슐, 건드려서 터트리는 거예요. 독이 들은 캡슐을 깨버리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뭐가 된다? 죽으리라. 이게 선악과 속에 껍데기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죠. 그러나 그것을 먹는 순간 안에 들은 독약을 먹은 거예요. 프로포폴 정도가 아닙니다. 그건 피부나 좋아지고 잠이나 오지, 이건 그게 아니고 선악과가 마약 성분이 있는 모양이라. 따먹고 난 뒤에는 오로지 선과 악만 집착을 하게 돼요. 악에서 도망쳐서 부지런히 선을 향하여 가는 것.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소설과 신화와 춘향전, 심청전, 모든 전설과 그것은 바로 선악과에서 나온 겁니다. 모든 종교와 교리들.
어떻게 하면 선해질 수 있는지.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선과 영생은 통하고 그리고 악은 저주와 통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틀렸습니다. 선악과 자체가 저주와 통합니다. 니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그 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선, 악을 버리지 않는 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율법은 니가 선악에 매어 있다는 것, 못 벗어난다는 것을 끊임없이 추궁해가기 위한 것 이예요.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구원, 영생, 생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선물이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선물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묻는 것에 대해서 선물을 듬뿍 5초 내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답변한 것은 반드시 보관해서 어떤 답변을 했기에 그런 것도 나중에 십자가 마을에 올릴 겁니다. 질문과 답변으로 해서, 갑자기 일거리가 생겨요.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하는 것은 사람이 새삼스럽게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죽어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계속해서 말씀이 지속적으로 유입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송유관 아시잖아요? 파이프라인이 계속 사막이라든지 가게 되면 파이프라인이 단단해서 안 터지는데 파이프라인이 중간에 만약에 누가 기름을 빼내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테러범들이, 나이지리아 같은 경우는 송유관을 폭파시키잖아요. 자, 송유관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막의 장소에서 폭발이 됐다 합시다. 이건 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폭발했을 때는 비로소 뭘 압니까? ‘아! 땅속에 뭐가 묻혀 있었구나.’ 하는 걸 알죠. 그 폭발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 바깥은 뭐가 됩니까? 역사가 되는 거죠. 역사 속에는 역사 뿐 이예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아까 인간이 생각하는 자아와 주체가 시간에 따라서 중첩이 되면서 앞으로 진보, 전진, 또는 진화가 되는 겁니다. 진화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진화론이 퇴보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와서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가 되는 이것이 퇴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게 문제예요.
그래서 인간이 우주를 생각하는 자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덜 떨어진 가장 못난 존재, 가장 아이큐가 낮은 존재, 하나님을 아는데 가장 아둔하고 제일 무지막지한 인간들이 감히 무슨 논리를 편다? 진화론을 펴는 거예요. 그럴 입장도 못 되고 그런 주제도 못 되는데. 쓰레기가 명품을 비평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터져서 이 십자가 폭발한 사실을 전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고 그리고 사도들이고 사도 베드로였어요. 그리고 오늘날 복음을 아는 성도들이고 그런 겁니다. 요 지점에서 폭발했었다. 이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러면 고 지점은 하나의 역사 속의 한 점밖에 안 돼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걸 통해서 전 송유관 전체를 다 처음부터 다 후벼 파는 거예요. 처음부터 태초 전부터 다 빼보니까 태초 전부터 예수 안에서 예정된 자만 구원받게 돼 있어요. 뭐로? 그리스도의 피로. 그러니까 창세전부터 예수의 피는 이미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폭발하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그 한 사건이지만. 그래서 이 송유관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 없이 돼 버려요. 송유관 폭발하기 이전에 많은 선지자들도 그렇게 죽었잖아요.
여러분, 가인을 한번 보세요. 가인이 제사 드렸습니다. 가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어떤 하나님이었기에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응답을 한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도대체 누구의 발상입니까? 하나님은 제물 바치면 좋아한다. 제가 한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한데 왜냐 하면 원래 그렇잖아요? 이런 식으로 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송유관 터지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것을 안 받고 예수님만 받는다 말이죠. 기름만 받지 물은 안 받는다는 이 뜻 아닙니까? 송유관의 기름이 있으니까. 피가 다르니까. 얼마 전에 비가 왔잖아요. 비가 올 때 제가 윤 집사님이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어요. ‘목사님, 물방울이 다 핏방울로 보입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진짜 물방울이 핏방울로 보이는 거예요. 언제?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될 때. 내 뜻대로 돼 버리면 물방울이 그냥 물방울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고 힘들게 할 때 물방울이 만약 핏방울이라면, 그러면 내 몸은 또 뭡니까? 주의 피로 만든 거죠. 결국 우리한테 이렇게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것은 주의 피에 동참하라는 이야깁니다. 니 주체파악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 이예요. 똑바로 하란 말 이예요. 피로 값 주고 샀다는 말이 분명히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나오는데 왜 우리는 그걸 실감을 못 느끼는지 주의 말씀이 오게 되면 주의 말씀이 우리한테 어떤 주께서 밀어주신 상황 속이 오게 되면 그 상황 안에서는 ‘아! 내가 온통 피로 범벅이 돼 있구나. 주의 피로 말미암아 오늘도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구나. 내가 죽어도 내가 지금 사라져도 영광이구나.’ 그런 고백. 이게 영적 싸움입니다. 마귀는 그걸 제일 싫어해요.
애들한테 설날에 ‘부모가 돼서 덕담 한번 해주세요. 며느리나 애들이 설날이라 한복 입고 왔는데 덕담 한 마디 해주세요.’ ‘그래, 그저 오늘 하루 살더라도 사라지더라도 고마운 줄 알아라. 며느리와 아기들아.’ 이렇게 나온다면 덕담 들으려다가 올 한해도 저주 받으라는 이야긴데. 세상이 핏빛으로 돼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가 왜 저주 받았습니까? 뭐를 놓쳤기 때문에? 주의 희생을 놓쳤기 때문에 다 저주 받고, 한 사람만 살았죠? 누굽니까? 롯, 그럼 롯은 ‘살았다.’ 합니까? 만약에 천사가 안 왔다면 어떻게 됐습니까? 자기도 똑같이 됐죠. 평소에 착한 것 소용없어요. 천사가 왔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천사를 보냈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언약이잖아요. 결국은 롯은 언약에 의해서 호출당한 새로운 주체예요. 그 새로운 주체가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음을 맘껏 품고 살아가는 제대로 죽은 자입니다.’ 죽음을 아니까 이 땅에서 제대로 죽은 자예요. 그러니까 롯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그냥 진작 죽어야 될 인간 이예요. 진작 죽어야 될 인간이 오늘 살다가 죽어도 이의 걸면 안 되죠? 하루치 산 게 어딘데. 꽃 피는 것 봤잖아요. 어제 죽었으면 그거 못 봤을 거예요. 오늘 계 돈 탔습니까? 어제 죽었으면 그 계 돈 못 탔을 거예요. 죽으면 소용없어요. 남들 다 좋은 일시키고. 그래서 자살하면 안 돼요. 내일 무슨 복이 있을지 모르니까.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해요. 자살하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무심한 남편은 술만 처먹고 그냥 누워있는 거예요. 남편이 술 먹고 자는 걸 보고 ‘아이구, 이런 집구석 살면 뭐하나.’하고 베란다에서 막 뛰어내리려고 하니까 부시럭, 부시럭 남편이 깨서 ‘야, 니 뭐하는데.’ 하면서 오거든요. 남편이 나를 떠밀까봐 겁나서 얼른 베란다 창문 닫고 살았다 안 합니까? 말 되죠. 개그 우면 이경애가 그런 소리를 해요. 자아가 선택해서 죽어야지, 남이 죽이는 건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는 게 목적이 아니고 폼 나게 죽는 게 목적이었던 겁니다. 자기 선택이 자기 자율에 의해서, 자기가 결정한 인생, 끝까지 죽든 살든 내 몸은 내 것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그 포기하면 죽겠다는 거예요.
사실은 선지자들이 매일같이 그 일을 당했던 거예요. 선지자는 지가 죽고 싶어도 못 죽게 만들고 그 다음에 지가 살고 싶어도 더 이상 살지 말게 만들어요.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이의 걸었습니까? 처음부터 이 주체가 언약이 만들어 낸, 언약을 위하여 언약에 쓸모 있으라고 주께서 조성한 일에 주님이 주신 주체를 가지고 참여해서 내 대신 누가 돌아가셨다는 고백을, 복음을 선포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 속의 주체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한 이야기에서 호명이었죠. 呼名(호명), 214 페이지 중간에 『말씀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내면 된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 다니엘에게 주어졌다. “인자(人子)야” 라고 호명되면서 제공된다. 호명이란 호명 받은 자가 호명한 자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적 의미를 갖는 관계를 말한다. 4)』뒤에 4)는 관주니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뒤에 258페이지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4) 다니엘 드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원주민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름이 없어요. 왜 이름이 없을까요? 그러니까 남이 없죠. 그래서 이름이 필요가 없죠.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선에 밀려오다 보니까 하나가 아니고 몇 명입니까? 둘 됐죠. 그러니까 인간은 사실은 하나님이 없으면 이름이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주님이 계시고 주님으로부터 호명을 당할 때 비로소 새 이름을 부여합니다. 그게 뭐냐, 주의 이름 이예요.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주의 것으로 호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름이 뭐냐, 흰 돌에 이름을 새기죠. 주의 것!! 이름은 크리스챤,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게 야곱이 됐던 이삭이 됐던 아브라함, 베드로가 됐던 전부 다 그리스도의 것 이예요.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한테는 그 영광성에 대해서는 차등이 없습니다.
영광성이 차등이 없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석들이 나오잖아요. 보석들이 각 가지 있지만 어느 보석이 어느 보석보다 더 낫고 못하고 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보석의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보석 되게 하셨느냐 한 그 주인 되시는 분이 동일한 것 같으면 그 동일한 분에 의해서 영광 받으면 다 같이 동일한 광채를 지니게 돼 있어요. 손이 발보고 쓸데없다 하면 그러면 그 손과 발은 어느 몸체에 달려있는데 지가 지 맘대로 건방지게 쓸데없다 그래요? ‘어이, 발, 떨어져.‘ ’니는?‘ 자기가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몸체에 붙어있듯이 붙어있으면 다 똑같은 거예요. 붙어 있으면 다 귀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복음만 전해야 돼요. 누가 질문했다는 건 의미 없습니다. 복음만 전해야 돼요. 그래야 성도인지, 아닌지가 구분됩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니는 곳도 아니에요. 교회는 그냥 만들어져 있고 그냥 있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 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고 출석하는 게 아니고 전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교회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반드시 매일같이 성령께서 주관해줘야 됩니다.
호명, 원주민을 Friday,라 했는데, Friday 라는 것은 금요일을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원래 호주에 캥거루가 있잖아요. 캥거루가 왜 생겼느냐 하면 처음에 원주민하고 이야기가 안 되니까 ‘저게 뭐죠?’ 하고 영국 사람이 물었어요. 그러니까 그 원주민들이 답변을 한다는 게 뭐죠, 라는 뜻은 모르니까 ‘뭘 원하시죠?’ 하면서 물은 것이 캥거루입니다. ‘우리에게 뭘 원하십니까?’ 가 된 거예요.
그래서 질문하는 사람이 엉뚱하게 질문해 놓고 답변은 지가 지 맘대로 지 입맛에 맞게 ‘아, 캥거루구나.’ 그 다음부터 캥거루 됐답니다. 이것은 답변이라 하는 것은 이미 질문자 속에 답변이 이미 합류돼 있다는 뜻 이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질문할 때는 답변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니는 일방적으로 내가 계획한 대로 니는 만들어질 뿐이다. 이런 뜻 이예요. 성경에도 나오죠. ‘이게 뭡니까?’ 한 게 만나가 된 거죠. 주님과의 관계는 이렇게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든지 간에 그 질문도 우리 운명의 일부로서 포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더 죄 짓기 위해서 질문하는 거거든요. ‘알아서 뭐하는데?’ ‘주여 누구십니까?’ ‘알아서 뭐 할 건데?’ 주님께서 알려준다고 그 다음부터 일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주께서 계시 했잖아요. ‘실례하지만 누구십니까?’ ‘시키는 대로 해, 까불지 말고.’ 하지만 ‘누구십니까’를 포함시켜 버리는 거예요. ‘나는 주님이 누구십니까’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라는 식으로 앞으로 계속 일을 하는 거예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 금요일이라는 원주민 주체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 없지만, 그걸 호명한 로빈슨 크루소 입장에서는 이건 놓칠 수 없는 인물이 되는 겁니다. 왜, 자기가 이름을 붙여줬으니까. 아담에게 처음에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뭡니까? 이름 짓는 거죠.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 속에는 누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여자가 없어요. 그럼 여자 이름은? 남자가 짓는 게 아니고 누가 짓는 거예요? 하나님이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여호와를 옆에 두고 있는 셈이 되는 거죠. 여자의 후손이 남자를 살려내요.
여기서 좀 더 어려운 이야기 해봅시다. 아까 어떤 분이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다 이야기했죠. 그러면 여러분 질문 하나 합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을 때 예수님이 마리아를 대신해서 예수님 자신이 임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리아를 대신했다면, 지금 예수님이 모든 걸 대신했잖아요. 우리 대신, 마리아 대신, 요셉 대신. 그러면 마리아 대신 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잖아요? 그걸 잉태된 그분이 마리아 자리에서 자기가 자기를 임신할 수 있느냐? 이 질문을 하는 거예요. 대신했으면 일괄적으로 다 대신해야지, 누구는 빼놓고, 마리아는 죄 있으면 안 되잖아요. 답변하기 힘들죠. 그럴 때는 뭐냐 하면 언약대로 대신한다. 언약대로!
그러니까 내가 키가 크고 싶다. 주께서 대신 키 키워주면 좋겠다. 이렇게 만약 된다면 키 작은 내가 뭐가 돼요? 키 큰 나에게 뭐가 도입됐다? 언약이 되죠. 언약은 나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을 주신 분 위해서 언약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임신한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마리아를 대신한 셈이 돼 버려요. 마리아를 통해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기 때문에. ‘니는 나를 낳아라.’ 이 말입니다. 말씀 자체가 언약 이예요. 말씀이 임하매 마리아가 임신 했잖아요. 그 자체가 이미 마리아를 예수님이 대신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내 숙제 있는데 대신 해주세요.’ 이게 아니고 ‘예수님 내 숙제 힘들어 죽겠다. 내 대신 해주세요.’라는 되도 않은 죄를 발현하는 요것도 이미 주님께서 대신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 만들기 위한 작업을 개시한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싸가지 없는 요구만 자꾸만 해대요. 그런데 그것마저 주의 대신하심을 염두에 두고 그런 싸가지가 싸가지로 그렇게 입에서 발설이 되는 겁니다.
이건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도 나간다고 하늘의 별 따주는 것도 아니고, 졸업식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이뤘는데. 다 이룬 셈에서 보세요.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우리 이름은 안 지어줍니까? 그 당시 아브람은 아브라함 되게 하고 좋잖아요.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폼 나잖아요. 그런데 우리 이름은 왜 안 해주는데? 사무엘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름 다 지어버리고 세례요한도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벙어리가 돼서 지었는데 왜 우리는 그런 이벤트를 왜 안 해줍니까? 이게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냥 그 사람 좋으라고 붙이는 것이 아니고 언약과 동반해서 이름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이름은 그 언약의 내용물을 보여주게 돼 있어요. 그 시대의 언약의 내용물.
지금의 언약은 뭐냐 하면 십자가 아닙니까? 피! 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어떤 이름을 지어도 죽어야 될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 바꾼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죠. 안 죽는 이름은 부활하신 이름, 주님 이름밖에 없죠. 그래서 니 이름 부르지 말고 누구 이름 불러라? 주의 이름 불러라 이 말이죠. 그게 니 이름이다 말이죠. 우리는 주님 몸의 지체니까. 자꾸 자기 생각하지 말고, ‘내 몸이 어떻게 영속되느냐, 내 몸은 계속 버티느냐.’ 그런 것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이죠.
새 언약에는 새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몸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이름도 새 언약에 부합되는 이름이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나는 나의 이름을 믿지 않겠습니다. 주의 이름만 믿습니다.’ 하는 게 우리에게 합당한 우리 이름이 되는 거예요. 이름 줘 놓고 스스로 이름을 부인하게 만드는 이름, 그 이름을 왜 바꿉니까? 삼순이에서 희진이로 바꿔야 소용없어요. 희진이로 바꿔야 소용없다니까. ‘삼순아, 희진아’ 소용없어요. 희진이도 죽을 이름이고, 삼순이도 죽을 이름인데 이름 바꿔봐야 무슨 별 따는 것도 아니고 그 이름을 왜 바꿔요? 물론 사회적인 주체 때문에 이름이 삼순이란 이름은 바꿀 만해요.
그 다음에 214페이지로 돌아와서 『이는 인간들이 ‘본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 실은 ‘비 본래적 선택행위’를 그동안 발휘해 왔음을 비로소 지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호명이 일어나면 이는 곧 ‘박탈의 장’ 곧 주체의 공터를 발생시키는 사건이 되고 이 무(無)는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숨어있는 바를 배태하고 터져 나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말은 어려운데 이걸 쉽게 하면 창조라 하는 것이 반드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자신을 폭발시켜 버립니다. 송유관 폭발하듯이 폭발시켜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없음 때문에 있어야 되고, 우리는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돼요. 참 말도 어렵다.ㅎ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지 않아야 돼요. 매일같이 살려냄을 당해야 돼요. 그리고 우리는 없음을 위하여 있어야 되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 있음은 한번 있는 인간은 영원히 있어요.
제가 지난 주 설교 했죠? 때려 죽여도 우리는 안 죽는다고. 참, 골칫거리에요. 신천지 그렇게 소리해도 신천지 결국 안 죽습니다. 신천지만 빼면 돼요. 그냥 사람이라니까. 합동 측 통합 측 그냥 다 빼버립시다. 전부 다 죄인만 있는 거예요. 누가 구원받느냐, 누가 의인되느냐, 하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주셔야 되고 성령을 선물로 주게 되면, 누가 내 대신 돌아가신 것만 고백하게 돼 있어요. 너무나 공평합니다. 왜, 다 죄인이기 때문에. 공평하기 위해서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공평이 우리 인간의 공평이 아니고, 사랑할 자는 사랑해 버리고, 미워할 자는 미워함으로써 공평을 이루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이단이고 삼단이고 그 따위 소리는 주님 앞에 안 통합니다. 그건 너희들이 정한 거고, 누가 복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느냐. 참 그거 보면 교회 교단 이것이 자기 패거리가 이게 얼마나 큰 장애되는지 모르겠어요.
10분 쉬고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