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바다의 짐승)130221-14강b -이 근호 목사
제 14강b
구약 다니엘의 짐승이 뭐냐 그 이야기했습니다. 국가 자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힘인데 그 힘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서 힘으로 왔다. 그런데 힘으로 왔는데 그 온 짐승이 사람들을 열댓 명 모아놓고 천명, 만 명 모아놓고 ‘예수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 사도 다 잡아 죽여.‘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니고 그걸 할 때 국가적 형태를 갖춘다는 거예요.
제 말은 바다에서 올라올 때부터 국가적 형태를 갖추는 게 아니고, 올라와서 국가적인 형태로서 조직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의 증인들을 조지는 거예요. 그게 왜냐 하면 그건 다니엘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래요. 다니엘이 속한 나라가 바벨론 나라잖아요. 다니엘은 느부갓네살만 상대하는 게 아니고 느부갓네살을 이걸 모델로 삼는 국가, 앞으로 모든 국가를 염두에 두고 국가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보내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다니엘 개인이 저쪽 국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다니엘 자체가 인자거든요. 영원한 인자의 나라의 하나의 백성으로서 하나의 파숫꾼으로 선지자니까 먼저 도달했고, 이쪽은 예수님 나라 대표자로 왔고, 그 당시 바벨론 당시에, 저쪽의 나라 대표자는 짐승 같은 느부갓네살이 온 거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7년 동안 짐승이 돼서 시베리아 벌판 같은데서 헤매고 다니잖아요.
주께서 뭔가 연극 장치를 만들 경우에는 묵시는 둘 다 안 보여요. 정체는 둘 다 숨기거든요. 아무리 봐도 다니엘만 보이지, ‘내가 여기 있다’ 해도 안 보이거든요. 그런데 언제 보이느냐 하면 죽음에 휩싸일 때 묵시의 존재가 보입니다.
그게 뭐냐, 다니엘 3친구가 불 속에 3명이 들어갔는데 불 속에 몇 명 들어가요? 방금 불 속이기 때문에 보면서도 역사적 인물들이 불이라는 죽음을 안겨주는 그 속에 건너 뛸 수가 없는데 저쪽에서는 4명이죠. 분명히 3명의 역사적 인물이 들어갔는데 묵시적 내에서는 3+1=4명이 되는 거예요. 1이 불 속에서도 3을 살려냈다는 것이 드러나잖아요. 그럼 이쪽에서는 닭 쫓던 개가 되는 겁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불이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다니엘 3친구를 집어넣던 사람들이 먼저 불에 타서 죽었어요. 자기 딴아 방화에 대해서 충분히 대비했는데 불을 지펴도 너~무 지폈어. 7배나 뜨겁게 지펴놓으니까 어떤 인간도 불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마치 홍해바다 같아요.
역사적 존재가 물속에 파도 속에 들어간다. 이건 살아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리고 다니엘 3친구도 살 수가 없어요. 어느 인간이, 인간의 세포는 단백질로 돼 있고 단백질은 기껏해야 120도 정도 되면 다 녹아 버리는데 어느 인간도 250도 되면 다 타버리고 어느 인간도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세포를 못 이기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살았다는 것은 살아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도 이미 불 심판 받는다 쳤을 때 성도에게 뭘 준다? 성령을 주시는 것은 주께서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다니엘 3친구처럼! 우리가 기도 많이 해서 살아지는 게 아니고.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왜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솜씨를 우리를 통해서 자랑하기 위해서. 보이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자도 없으니 사나 죽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든 살든 주를 위해서입니다. 라는 그것만 변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라도 하늘나라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는 죽는 건 없습니다. 그냥 잠자는 거예요. 오늘 밤 자는 것 두려워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잖아요. 잠을 오래 잔다는 것뿐이죠. 그 다음부터 안 깬다는 것뿐이지 본인은 자고 있으면 돼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가 자고 있었어요. 잠 깨어놨다고 마리아 얼마나 구박받았는지.
211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짐승이 올라올 때는 짐승이 아니고 점차로 무슨 형태를 지닌다? 국가 형태를 지닌다. 왜냐 예수님의 나라가 국가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를 맞춰야 돼요. 저쪽도 이런 형태, 여기도 같은 형태. 그래야 대비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 국가 형태라면 예수님의 국가 형태는 역시 예수님의 이스라엘이 모델이 되겠죠. 제사장 나라. 그렇다면 이쪽의 짐승의 나라도 무슨 나라가 되겠습니까? 역시 제사장 나라. 백성들은 중간에 헷갈리죠. 예수님도 뭐 중심? 성전 중심. 그런데 예수님의 성전은 하늘에 있고요. 인간들도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도 뭐 중심? 성전 중심, 이건 년도가 46년 동안 진 거죠. 예수님의 성전은 몇 년 동안 짓는다? 3년도 아니고 달랑 사흘 만에 져버려요. 그러니 제자들이 헷갈리는 게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으니까 그 46년이라는 것은 이 지상의 시간적 개념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도 지상의 시간적 개념을 사용했다니까요.
그럼 제자들은 분명히 선생님이 우리에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겠지. 그러면 예수님이 삼일 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일, 월, 화, 1년, 2년, 3년, 4년, 한 달, 두 달, 그와 동일한 그 간격 중에 하루나 사흘이겠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사흘이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 몸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 몸은 시간과 공간에 둘러싸여 있지만 예수님의 몸은 우리 같은 시간과 공간이 아닌 묵시에 둘러싸인 몸이 되는 겁니다.
왜 이런 몸이냐 하면 영적 몸이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만지지 말라 했습니다.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건 다른 몸체예요. 악마도 바로 예수님 같은 다른 몸체를 갖고 있는 거예요. 악마가 천사거든요. 천사인데 인간적인 몸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눈에는 예수님도 안 보이지만 누구도 안 보인다? 자기 대장 악마도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는데 이상하게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인간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국가 없이는 못 살 것 같고, 가족, 처자식 없으면 이건 실패한 것 같고,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다니까 화들짝 놀라고, 아버지 장례 치르려니까 날 따라오라, 하니 이건 불효자 만드는 거니까 안 되고, 파도가 치니까 예수님이 잠잠하라, 하니 이상하다, 예수님도 같은 몸인데 우리가 하면 안 되는데 예수님은 되게 했고, 모든 게 이상해, 이상해. 뭔가 같은데 아닌 것 같고, 아닌 것 같은데 같고, 우리는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면 한 끼만 먹어도 모자라는데 주께서는 나와도, 나와도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그래서 좋다 싶어서 따라다니니까 더 이상 안 주고, 그게 뭐예요? 줬으면 계속 줘야지, 이거 먹고 싶지? 줄게, 이렇게 나와야 될 텐데, ‘이거 주세요.’ 하니까 “내 피와 내 살을 먹어라.” 이렇게 나오니까 도대체 인간 자신의 것과 주님의 시작을 이어보려고 했는데 자신의 것과 주님의 시작은 이어지지를 않네.
그러니까 내 쪽에서 예수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이게 실패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흘러가는 구름에다 사다리 둘러메고 소방관 돼서 흘러가는 구름에다 사다리를 한번 걸쳐보죠. 구름에 사다리가 걸립니까? 약간의 먼지에 얼음이 묻은 건데 그게 됩니까? 전부 다 안개인데. 안 되죠. 헛짓 아닙니까? 교회 다녀서 사다리로 하늘나라에 걸려고 하는데 걸 데가 있어야 걸지. 다 이게 헛짓 이예요. 헛짓, 헛발질,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똑똑한 목사, 똑똑한 장로들은 이미 어느 정도 목회하고 장로 20년 하고 나면 예수 없다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정도 돼야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그건 모르겠다고 하는 그 정도 돼야 사람이 뻔뻔스러워져요. 진짜 악마가 악마의 제 모습을 나타내는 겁니다. 악마가 예수님보고 벌벌 떨면서 언제 악마 짓 합니까? 주님 앞에서는 벌벌 떨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해야 되죠.
국가의 중책, 국가의 오야봉이 되는 것은 이건 성경에 보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해야 국가의 원수에 올라가는 겁니다. 문재인도 할 수 없어요. 로마서 13장에 보면 권세 자도 하나남이 정하신 것이라 했는데 권세 자가 악마 짓을 해야 돼요. 제대로 악마 짓을 해야 됩니다. 박OO는 그 짓을 제대로 해줘야 돼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그 태고 적 어두운 힘이 땅을 적시면서 활동을 해줄 때 비로소 땅의 사람들은 낯익은 질서로서 마주 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서 개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정리하게 된다.』참 어렵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국가가 있음으로서 개인을 초월하는 그 국가를 뭐로 본다?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고 그리워했던 유토피아, 그것을 인간들은 국가를 통해서 그걸 눈으로 보고자 하는 거예요. 마귀가 한~껏 도와주십니다. 진짜 이상적인 국가가 있다면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 나라에 복종하겠다. 만반의 준비가 돼 있어요. 그 나라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정도. 너무 멀어서 못가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그야말로 거기 가면 복지가 잘 돼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너무 치한도 잘 돼 있고 과외를 안 시키고 사교육도 안 시켜도 되니까 애들을 사교육 지옥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겁니다. 실제로 가보죠.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마약하고 있는데. 뭐 행복해서 마약합니까? 얼마나 행복하지 않았으면 마약을 하겠어요?
이 땅에서 이상적인 나라가 어디 있으며 이상적인 행복한 그러한 성냥팔이 소녀에 나오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게 이 세상에 없어요. 왜냐 하면 그 행복이라는 것이 타인의 불행을, 그러니까 불쏘시개로 만들어서 자기가 행복이라는 불꽃을 피웠거든요. 남의 집에 불을 질러 놓고 그 따뜻한 온기에 의해서 우리는 행복하다 이 말이죠. 오늘도 지하철 타고 오다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하는데 보면 ‘자기애가 대학 떨어졌다. 어떻게 됐다. 시험 떨어졌다.‘ 이 이야기다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할 수 없어 행복한척 하고 있지, 사실은 원하는 대학은 따로 있는데 어쩔 수없이 그 대학 가니까 ’그래, 참자, 참자, 참~자, 그래 괜찮다.참자.…‘ 그저 참는 거예요. 행복해지는 노력 하는 거예요. 따님이 서울 대학에 가 보세요. 입이 귀까지 걸리죠.
행복 안 하니까 억지로라도 행복해야 할 수 없지 뭐, 자포자기해서 아직까지 날아가는 행복의 꼬투리라고 잡아서 그것마저 거두려고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인내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인내성마저 허락지 않을 때는 진짜 부도덕해집니다. 딸내미 그렇게 좋은 대학 가라고 참고 참았는데 더 이상 참나 보라. 시험 앞두고 내가 얼마나 경건했는데 이제 두 번 다시 경건 안 한다. 그래서 자기 본성이 슬슬 나오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니 스스로 속여도 나는 니 수법에 안 넘어간다.’ 왜냐 이미 용서를 했고 이미 구원을 했기 때문에 자꾸 본성 가리는 것을 주께서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그냥 감사하면 돼요. 지 성질 더러운 것도 감사하고 그냥 감사하면 되는데 그걸 개선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행동 어떻게 하면 개선될지, 개선하지 마시고 현재 우리가 하는 것이 사실 주님 보시기에 최선입니다. 합력하여 뭐를 이룬다? 선! 선을 이룬 거예요. 괜히 나답지 않은 짓을 하지 마세요. 현재 가장 나다운 거예요. 내 자신도 몰랐던 나다움이 이 정도입니다. 갑자기 피자 판 나오면 어지러워요.
여기 중간에 『국가란 단지 힘의 뭉치가 아니다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의 파도가 특정 지표를 향하여 치닫는다.』국가는 인간을 다룰 수가 없습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이 매매를 못하게 짐승의 표가 없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했죠? 이 말은 뭔 뜻이냐 국가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혁명이 일어났잖아요? 혁명 될 자는 하나님께서 지정한 자만이 혁명할 수 있어요. 로마의 모든 정권 교체는 이게 신의 뜻이지, 인간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한 인간이 대기업에서 진급하고 임원 되는 것,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면 그는 그 임무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그래요. 자기가 계획한 대로 돼 가지 않아요. 반드시 길을 열어 주셔야 되죠.
어떤 사람은 그 임원 되려고 아무리 해도 이상하게 운이 안 따라주죠. 정말 이상하게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성도뿐만 아니고 비성도도 자기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주관하시는 분이 있어서 결국은 그 사람은 그쪽으로 지옥 가야 되고 염소가 돼야 되고 우리는 기어이 양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양이 되는데 좀 지저분하게 되죠. 완전히 철판에다 온갖 낙서, 유성우가 떨어져서 상처뿐인 인생, 상처뿐인데 구원을 받고 저쪽에서는 깔끔은 혼자 떠는데 지옥 가고 있어요. 아마 지옥 가도 양복 입고 체면 차리고 있을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블랙홀이거든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신약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떴다 하면 반드시 그 주변에 물결이 생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안 오시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고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 했죠? 예수님이 안 오시면 다 구원 받아요. 왜, 다 하나님을 알고 나름 다 노력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에 택한 자만 구원받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가 싫은 거예요. 차라리 예수 없을 때가 편하고 좋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 이야기하면 하나님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만반의 충성할 마음 자세가 돼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떠버리면 저분이 왜 쓸데없이 왜 끼어들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떴음으로 말미암아 점차 저쪽이 짐승이 돼 갑니다. 예수님만 안 오면 다 착한 사람들이고, 옛날의 지도자가 그냥 지도자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사람보다 율법이 뭐라고 지시하느냐 거기 신경 쓰는 사람입니다. 정 석훈 목사님이 새순교회 강의한 걸 들어보면 유대인들의 어떤 단체는 이사야를 통째로 다 외운답니다. 그 두꺼운 이사야를. 얼마나 말씀을 사랑합니까? 그런데 강도가 이사야 다 외워서 구원받았습니까?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까? 강도가 성경 몇 절 외웠습니까? 아마 한 줄도 못 외워서 수련회 점심 때 자장면도 못 먹을 것 같아요. 지금 지도자가 그냥 지도자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윤리와 도덕에 철저한 사람들 이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을 못 가잖아요. 이 바리새인보다 자기관리에 더 철저한 사람 있나 나와 봐라, 이 말 이예요.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 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보고 너희 애비는 뭐라 했습니까? “너희 애비는 마귀다. 악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죄를 지었느냐? 우리는 아브라함 혈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혈통만큼은 죄에 눌리지 않도록 주께서 친히 지켜주십니다.’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하니까 너희들이 악마지.‘ 그런 식으로 하니까.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 구원받아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 그런데 지금 돌을 치려고 하는 사람, 율법을 위반 안 한 사람이 지옥 가는 거예요. 율법 가지고 ’너는 지옥 가야 돼, 너는 돌에 맞아 죽어야 돼. 돌로 치는 우리는 지옥 안 가.‘라는 여기에 누가 등장했다?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주객이 바꿔지는 겁니다. 돌로 치려는 자가 지옥 가고, 돌 얻어맞아야 될 자가 구원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 여자를 품에 안아주거든요. 그러면 그 여자가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위치를 바꿔놓는 그 위력, 예수님의 위력이 그 여자마저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덮쳤다는 말은 예수님의 성령이 덮쳤고 저쪽은 뭐가 덮쳤다? 이미 악령이 덮치고. 그러니까 인간들은 대리전쟁에 불과하고 지금 어느 물바가지를 쓰고 있느냐, 물바가지 덮어 쓴 그 영들의 힘들의 싸움인데 그게 역사적으로서는 국가 대 교회, 교회 대 국가의 싸움. 여기서 교회란 말은 예수님의 영이 있는 교회를 말하지, 기존 모든 교회는 어디 복속됐습니까? 짐승의 국가의 일부로서 이미 편입됐어요. 교회가 하는 짓거리가 국가 행정이나 행정법 거기서 다 가져옵니다. 목사 이런 것이 행정법에 다 따라와요. 그것은 나중에 교회 자체가 땅에 있는 거짓 양의 탈을 쓴, 요한계시록에 보면 뭐라 돼 있죠? 새끼 양이죠. 짐승에 속한 새끼양이라서 기적을 베풀고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한테 간다?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습니다. 국가 말을 잘 들으세요. 하는 그 체제가 바로 로마 체제가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체제 행정법이 지금의 모든 국가의 행정법이 됐어요. 이 국가라는 로마는 공화정입니다. 공화정이라는 것은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을 위한 나라의 최초의 공화정 이예요. 그런데 지금 세상의 모든 민주주의가 사실 어디서 나왔다? 이게 로마에서 나온 거죠. 그전에 그리스에서 있었지만 그것을 법적으로 실현시킨 것은 역사적으로 로마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법의 국가예요. 지금 우리나라는 무슨 국가? 법치 국가. 아테네에서 사실은 그걸 했거든요. 광장에서 토론하면서 그것도 노예들은 안 되고 시민들에게만 해당됐어요. 민주주의라 할 수 없죠.
자, 결국 이렇게 되면 신약에 나오는 성경말씀이 성경말씀으로 은혜 받는다는 말 정도가 아니고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될 문제로 등장하죠. 성경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해야 되고, 정치나 국가라 하는 것은 밑바탕에 뭐냐, 경제가 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분업에 의해서 생산물이 남아도니까 그 잉여분에서 자기는 노동하지 않고 잉여분을 가지고 즐기는 자들이 다른 나라를 그 힘으로 침범해서 노예로 삼아서 그들 위에 자기들은 예술, 문화, 종교, 이런 것을 즐기면서 또 다른 나라까지 침범하려는 이 짐승의 속성! 이빨로 부셔뜨리고 하는 것 다니엘 할 때 했습니다. 네 짐승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타인을 노리는 거예요. 네 가지 짐승의 특징이 항상 공격용이지, 수비용 짐승 봤습니까? 짐승이 색시입니까? ‘부끄러워라’ 이런 짐승 봤어요?
짐승이라 하는 것은 계속 뭔가 외부 것을 잡아먹어야 자기 내부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큰 교회 같아요. 계속 전도해야 되고, 계속 선교해야 되고, 계속 예배당 지어야 되고, 짐승의 속성을 갖고 있어요. 이런 사람도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212페이지 봅시다. 『반복적인 묵시적 힘의 각질은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어 올라와 십자가 사건과 만난다.』실험실에 보면 뽀글뽀글 밑에서 기포가 생겨서 뽀글뽀글 올라오죠. 저는 발꿈치 뒤의 각질로 표현했는데 목욕탕에서 긁어내면 다음에 또 올라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것이 표면이고 어느 것이 내면인지 분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간이 안 되죠. 표면이 내부의 외곽이고 그렇잖아요. 표면마저도 내부에요. 왜, 내부의 외곽일 뿐이지 역시 표면이잖아요. 밑에서 올라오니까. 그래서 이것은 우리 속성이 육의 속성이 매일같이 뽀글뽀글 올라와요. 성질도 분노도 화도 언제 또 뽀글뽀글 자꾸 올라온다니까요. 올라오면서 하는 소리가 ‘하필이면 왜 저에게. 하늘도 무심하시지.’ 맨날 이런 소리 하면서 뽀글뽀글 올라와요.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그런데 올라와서 뭐와 만난다? 바깥에 뭐가 계십니까? ‘이미 다 이루었다.’의 십자가 사건과 맞닥뜨리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짐승에 속한 사람은 분노하게 돼 있고, 성도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내가 사는 게 주님의 희생으로 살았는데 또 잊어버리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런 불평불만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이 당신이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교회 가나 봐‘ 이렇게 나오고, 이렇게 뽀글뽀글 올라오는 이런 모습은 집안의 식구가 4명이라면 물방울이 4개가 올라와요. 다섯 명이면 5개가 올라오고. 2사람이면 2개가 올라오고. 그렇게 보면 우리의 한 개의 한 개의 개인은 마치 주님이 만들어 놓은 수족관 같아. 어항, 수조, 발포 산이라 합니까? 물 부면 부글부글 끓듯이. 항상 우리는 뭔가 끓고 있어요. 뭐가 끓고 있는가? 짐승 때문이 아니고 왜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나한테 얼마나 혜택을 주느냐 하는 그것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짐승이란 눈에 안 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볼뿐인데 보이는 것의 극치가 뭐냐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국가 이런 겁니다. 나를 지키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이상적인 가정, 이상적인 아내, 남편, 이상적인 자식 이런 거, 나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단체 이런 걸 원하죠.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일으키면서』이 묵시적 의미가 십자가 사건이 유발하죠. 그러면 만나고 그냥 헤어집니까? 아닙니다. ‘잘 만났다.’ 하고 드디어 이게 발포 산 돼서 뽀글뽀글 거품을 내면서 표면으로 올라오잖아요. 올라오면 여기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 피가 기다리잖아요. 만나면 그때 다시 내려갈 때면 ‘아이 놀래라’ 하고 다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의미를 담고 다시 이것이 우리 내부로 돌아옵니다. 돌아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을 위하여 다루어지고 있는 인간인 것을,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죠. 내가 하는 이 모든 짓이 주께서 일부러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구나. 왜, 예수님 자신만이 구세주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일부러 집어넣었구나. 뽀글뽀글 이런 식으로 일부러 몰아세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 만나서 다시 들어올 때는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다루어주시지 아니하면 저는 천국이고 뭐고 없습니다.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거죠.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실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이상적인 국가, 미국, 잘 사는 나라, 그리고 잘 사는 집, 재벌가, 이런 걸 자꾸 염두에 두는데, 그러나 묵시를 만나게 되면 주님이 피 흘리고 가신 그 발자국을 우리가 지금 따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뭐 주둥이 튀어나와서 불평불만이지만 하지만 주님께서 요 골목 갔다가 요 골목 가시면 오! 주님 발자국 있네, 저 계단으로, 마치 서울의 미아리나 봉천동의 골짜기처럼, 골목이 있고 골목이 있고, 잊어버렸다가 다시 한 번 주님의 발자국이 보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피 흘린 발자국이 지금 우리 앞에서 어떻게 떨어져서 피 자국이 남아지나 그걸 눈에 보이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그거 보이면 살은 거예요. 이제 숨 쉬어도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부자이더라도 어느새 주의 발자국과 핏자국의 소리가 안 들리고 보이지 않는다면 이건 뭔가 길을 잘못 들었어요. 빠져나가든지 그걸 진짜 답답해하신다면 성도고 그게 신나면 성도가 아니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기도하고 금식할 때가 언젠가 하면 그 주의 발자국이 안 보일 때, 피가 안 보일 때 그게 별로 안 좋아질 때 십자가가 당기지 않을 그때는 밥맛이 떨어지면서 자동금식이 돼요. 먹어도 설사가 나고 사람이 미치는 거예요. 내가 이거 신자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인가? 언제 그런 일이 있는가, 언제 주님을 잊을 때냐 하면 내 하는 기도가 응답되어 잘 될 때 그때가 위기입니다. 응답이 되어 뭐가 잘 될 때, 돈이 생겼을 때, 위기입니다. 큰일 났어요. 그럴 때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좋은 일 생길 때 그리고 주님 잊어버릴 때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주여 저를 고만 살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당하다니, 이건 나한테 합당치 아니합니다. 차라리 나를 죽이소서.’ 깨지는 것이 겁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걸 가지고 내가 왜 좋아해야 되는 이유를, 내가 왜 이걸 좋아해야 될 존재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안타까운 거예요. 스스로. 좀 전까지도 ‘주여 이거 되게 하옵소서.’ 했는데 막상 기도 응답 됐을 때 기껏 이거 가지려고 내가 주님을 이용해 먹었다는 그 자책감, 차라리 종을 죽여주옵소서. 천벌을 내려 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이용할 입장이 안 되는데 그동안 내가 헛소리 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남편이 괴롭혀서 ‘주여, 남편과 헤어지게 하옵소서.’ 그냥 헤어지지 말고 어떤 재벌 3세가 와서 200억 들고 왔을 때 기도했는데 됐을 때 내가 진짜 성도 같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지옥 갈 짓을 왜 했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런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른다 이 말이죠. 성도가 아니면 그런 건 없고 성도일 경우에만 성령께서는 십자가만 보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당신은 그렇게 복 받아도 온유하십니다.’ 한다고요. 속도 모르고. ‘그렇게 일이 잘 돼도 겸손하시네.’ 겸손티를 내는 게 아니고 우리는 지금 죽을 지경이라니까. 십자가가 안 좋아져서. 대학 합격한 게 더 좋고 십자가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 다음에 봅시다. 평소에 심판의 스케줄로 오신 묵시로 오는데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싸우는 게 아니고 심판으로 오시거든요. 그러니까 ‘인간들아, 니가 깔아놓은 게 다 짐승이 깔아놓은 건데 짐승 다루면서 너희도 함께 다루겠다.’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좋아하는 거예요. 처음에 오병이어 하고 물 위를 걸을 때는 자기들이 짐승의 위에 깔린 것을 그들이 좋고 주님도 같이 좋아하는 줄 안 거예요. 부자 되고 잘 되고 하늘나라 높은 자리 앉고, 제자들이 그곳에 갈 때는 평소의 내 생각도 ‘옳았어. 옳았어. 그래’ 했는데 막상 그걸 그렇게 해놓고 십자가 길로 가니까 베드로가 말렸잖아요. ‘주님, 그쪽 아닙니다. 우리 지금 일 잘 되고 있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팬클럽 조성돼서 지금 강남스타일처럼 노래 부르고 있는데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사탄아, 니는 니가 원하는 길, 인간들이 원하는 길, 마귀들이 원하는 길로 나를 몰아넣고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이 따로 있으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마지막에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지 목숨을 잃으면.’ 그건 장사 헛장사 한 거예요. 인생 살아도 괜히 산 게 되는 거예요.
정리해 봅시다. 사람들은 짐승을 모릅니다. 인간들만 모여서 아름다운 국가를 이루려고 애쓰는 거예요. 박근혜 뽑고, 우리끼리 살아가는 거예요. 짐승이고 예수고 필요 없어요. 우리 인간들만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똑같은 인간이 온 줄 알았죠. 랍비 등장한 줄 알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묵시적 존재로 ‘나는 하늘에서 왔다.’고 소개했잖아요. 그럴 때 그런 줄 알았죠. ‘아, 역시 우리 유대 나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병이어 행하는구나.’ 제자들도 그렇게 오해했는데 점점 주님의 공격은 이쪽만 공격한 것이 아니고 제자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할 때 제자들 생각에 이미 깔아놓은 우리 인간들의 노력으로 집대성한 문명화 된 게 아니고 예수님을 근원적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그 사탄이 짐승이 이미 인간을 자기 품에 포로 되게 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양탄자와 그러한 놀이동산의 인간들이 벌써 거기에 태어나고 살고 죽고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한 거예요.
그 안에 경제도 있고 사회, 군사, 외교, 농업, 어업, 다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되라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떠나야 될 자리에서 떠나라 하는데 그 말이 어려운 거예요. 왜냐 하면 지금 예수님하고 붙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하고 붙어 있잖아요. 예수님도 우리 자리에 와 놓고 떠나라면 어디로 떠나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먼저 떠난다. 그리고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은 너도 떠나야 돼. 안 떠나면 안 돼. 성령이 오게 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한다.” ‘그러면 주님이여 우리를 데려가 주소서‘ 하니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는데 지금 남겨 두는 이유는 바로 내가 너를 구원했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들을 아직 세상에서 버리지 않고 떠나게 않게 해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복음서의 흐름 전개를 이해하시겠죠? 묵시적 존재로서 역사적 모습으로 오니까 사람들이 처음에 오해했다니까요. ‘아! 목수의 아들.’ 그런데 이걸 오해했다는 것은 우리도 우리를 안다? 모른다? 모르죠. 우리가 악마에게 속한 것을 본인이 인정을 안 해요. ‘악마 어디 있어? 악마 있으면 나와 봐라. 악마 없는데.‘ 가짜로 귀신 들린 자만 있지 자기는 악마에 안 들렸거든요. 가장 똑똑하고 착하고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너희 아비는 악마고 독사의 새끼들이라 했으니까 제일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독사 같으면 못 배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독사의 새끼들이죠. 보나마나.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악마는 악마가 아니었고 우리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그쪽 배후에 이미 악마가 있었던 거예요. 악마는 우리 편이고 우리는 무조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악마가 다 들어주는 거예요. 예수님은 스스로 했어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그 말을 하지를 않죠. 그 말을 할 것 같으면 아예 기도를 안 하죠. 생각해 보세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 자체를 안 한다니까요. 기도 자체가 내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반드시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벌써 출발이 내 뜻에 출발점이 있는데 그 뜻을 어떻게 포기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한테만 아버지와 관련돼 있고 우리는 아버지도 없이 그저 지 고집과 오기만 아주 대단한 겁니다.
『유대 공동체는 자기를 압박하는 이방민족과 말씀을 사이에 두고, 결코 대척점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일한 목적( 권력이란 허구가 보여주는 효과=영적 지배)을 지향하면서 같이 움직일 뿐이다.』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벨론아, 너희들 권력 가지고 있지? 우리도 아마 하나님이 도와줘서 너희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질 거야.’ 권력이란 점에서 같은 패예요. ‘로마야, 언젠간 우리가 더 센 힘이 메시아가 오면 로마보다 더 큰 힘을 가져서 너희들을 보란 듯이 콧대를 꺾어버릴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이건 뭡니까? 다 같은 이야기가 돼요. 짐승에서 같이 통용되는 이야기의 주제를 논하는 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 같으면 “내가 온 것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라고 돼 있죠. 그렇잖아요. “나는 유대인의 왕이지만 이 세상의 유대인들을 동조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그러면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지.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때 ’로마 왕이여, 지금 로마에 대적하기 위해서 어떤 미친 인간이 자기가 유대나라를 해방한다고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합니다. 우리 대신 혼 좀 내주세요.‘ 그렇게 일러바쳐서 예수님을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누가 로마 압제에서 해방되고 싶습니까? 유대인 본인들이 해방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누구한테 죄를 돌렸어요? 예수님한테 억울하게 돌린 겁니다. ‘메시아가 오기만 해봐라. 너희들 로마 다 죽었어. 너희들 다 죽었어.’ 지금 유대인들이 그걸 소망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 큰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이래요. ‘진짜 당신의 하나님 말씀이 맞다면 큰 교회보다 더 큰 교회 되야지.‘라고 이야기를 해요. ’당신이 큰 교회 안 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안 도와줘서 그런 것이고, 안도와 주는 이유가 큰 교회는 진리를 외치는데 당신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속상해서 교인 몇 명 안 보내줘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를, 교회를 거론하지만 사실은 그 교인이 뭐를 원합니까? 하나님 믿고 보란 듯이 이 땅에서 크게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나님까지 빙자해서 그걸 점검하려는 겁니다. 돌이 떡 되게 되고 사람이 인기 얻고 세상 권력 얻겠다는 것, 이게 대표적인 짐승 들린 자이지, 더 이상 뭐 머리가 뿔나야 됩니까? 짐승 돼야 되겠어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진보 계열에 있는 정당들이 북한을 그렇게 부러워하는 거예요. 북한은 미국 없이도 잘 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미국 없이는 못 살잖아요. 그러니까 민족적 자긍심만큼은 북한을 알아줘야 된다. 참, 짐승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북한 인민이 못돼서 환장한 것이 아니고 김일성이 못 돼서 환장한 인간 이예요. 북한이 부러운 것은 북한의 굶어죽는 인민이 부러운 게 아니고 굶어죽게 만듦으로서 그 인민을 착취하는 그 지도자급을 남한에서 달성하지 못한 그 한 맺힘을 북한에 가서 해보겠다는 그런 정치적 야망입니다. 그런 인간만이 짐승에서 가장 잘 다뤄지는 짐승의 모습으로 주께서는 인도해 주십니다. 될 사람만 되는 거지, 아무나 지도자 되는 게 아닙니다. 뱀의 자손의 지도자가 지도자급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유대집권층을 악마의 자식들로 보았다. 그들은 뱀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이런 논문을 발표하면서 내가 누굴 쳐다보겠습니까? 그 당시, 신학교수들을 이야기했죠. 너희들이 똑같은 인간 이예요. 왜냐 신학교 운영 방침이 국가 정당 운영과 똑같아요. 신학교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신학교에서는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신학교 자체를 권력을 만들어서 크게 키워서 더 큰 신학교 할 때만 유능한 신학자예요. 예수, 신학 박사, 그건 다 빌미고, 권력을 쥐고 힘을 가지는 것, 마귀가 발휘하는 그 속성과 동일한 마귀의 심성을 갖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위대한 신학 교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초반부터 벌써 그들은 심정이 상하게 된 거죠.
여기서 마지막으로 어려운 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인자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잖아요. 몸으로 왔는데, 그 몸이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한다. 이게 뭐냐 하면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이렇게 누워있다고 봅시다. 예수님 몸이 누워있는데 제가 이걸 표현하기를 전 역사를 소급해서 누워있다고 그랬죠. 그러면 덩달아서 인간도 맞춰서 인간의 역사도 같이 누워있어야 되죠. 그래야 전체를 커버할 수가 있죠.
여기에 예수님이 옴으로써, 묵시적 존재가 옴으로써 이 땅도 역사도 역사를 새로 해석하면서 묵시적 안목에서 역사가 해석 받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 해석 받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묵시적 존재에서 나오는 입에서 나오는 묵시적 언어를 이야기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걸 뭐로 받아들입니까? 역사적 언어로 받아서 자꾸 핍박을 하게 하도록 배후에서 누가 누워있다? 숨어있는 악마가 숨어있는 거예요. 악마가, 마귀, 사탄이 여기 숨어서 앞에 숨어서 국가를 조정하는 겁니다. 그럼 백성들은?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나라 없이는 죽는 걸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 예수님, 호산나’ 해도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바뀌죠. 심지어 제자들도 다 가버리죠. 자기 몸은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항상 기대하는 것도 내가 이 정도는 원해요. 역사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적인 희망이 달성되는 것만 예수를 빙자해서 뭐 얻어 챙길까 그걸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내 몸은 어떻게 살아도 묵시적 안목에서 보면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짐승이 원하는 그러한 몸으로만 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예수님만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의 요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몸도 뭔가 먹어야 되고 입어야 되고 잠자야 되고, 우리가 생각할 때는 말씀 생각하지만 몸이 피곤하면 그저 몸이나 편했으면 하는 그 마음뿐인 것을 주께서 잘 아시고, 우리 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살려내셨사오니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