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14강-바다의 짐승130222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16. 09:00

2013-02-22 01:27:14 조회 : 239         
바다의 짐승 130221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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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70이레 논문(바다의 짐승)130221-14강a -이 근호 목사

제 14강a

시작하겠습니다. 서론부분 해봅시다. 서론부분 210 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짐승이라는  것이 등장할 때는『진정한 짐승의 활동은 특정 신앙공동체와 연루되어 있는 성격으로서 따로 정립시켜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짐승을 따로 ‘요건 짐승이다. 요건 마귀다.’라고 따로 끄집어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짐승은 묵시적 존재, 영적 존재기 때문에 역사화 할 때 ‘이건 역사고 이건 묵시다.’하고 그런 식으로 분리돼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역사 존재를 앞장세워서 뒤에서 밀어붙이기 때문에 ‘너는 짐승이 밀었지’ 라는 게 되는데 ‘비켜봐, 너 말고 뒤에 있는 사람 나와요.’ 이런 식으로 ‘이건 짐승, 이건 역사’ 분류 시킬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그때 무덤가에 있던 청년이었죠. 청년은 귀신 들린 자이지, 청년은 귀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청년은 자기 행동을 본인이 한다고 생각을 못하고 분명히 자기 말고 다른 얼마나 많은 귀신이 들었는지 횡설수설하고 무덤가에서 지내고 쇠고랑 찼는데 이걸 벗기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짐승은 있는데 역사 속에서 짐승이 있다 할 때는 짐승을 앞세운 역사적 존재가 있다. 귀신 들린 청년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짐승이, 악마가 꼭 개인만 상대할 것 같으면 이건 우리가 알겠는데 이게 집단적으로 공동체 집단적으로 상대했을 경우에는 우리는 그걸 짐승이라고, 악마라고 보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저 사람 귀신들렸구나. 세상에, 허리가 꼬부라지다니.’ 이건 이해되는데.

어떤 국가 전체, 어떤 공동체 전체, 가족 전체가 귀신들렸을 때 설마 인간이 한결같이 똑같은 그런 짓을 하겠나, 이렇게 생각을 하더란 말이죠. 나찌 같은 경우에 자본주의 극치 아닙니까? 자본주의와 정치가 만나서 중산층의 승리거든요. 히틀러가 선거에서 압도적인 과반수를 넘어서 총통이 됩니다. 됐을 때 사람들은 그 히틀러에서 희망을 본 거예요.

후진국이었던 독일을 프랑스나 영국이나 네덜란드보다 선진국 될 수 있는 희망을 본 겁니다. 희망을 보고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줄 때 그 히틀러 그 사람이 한 짓이 결국 뭐였습니까? 지지를 해줬는데 자기를 지지한 그만큼 부담감이 있을 게 아닙니까? 부담감이 있는 걸 뭘 만드느냐 하면 공격의 타겟을 정해야 돼요. 공격 타겟을 정할 때 그때 지지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천주교였어요. 이런 사람들의 지지가 같이 한 덩어리 돼서 계속 지지를 유지하려면 그들의 지지가 이게 묵시적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합당합니다.’를 보여줄 수 있는 적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죽였다는 유대인들입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적이었고, 또 지지한 사람들이 중산층 자본주의자들이었어요. 흔히 부르조아들 이예요. 중산층이라 하는 것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 말은 뭐냐 어떤 사람은 아니냐 하면 촌에 농사가 많아서 ‘나는 농사만 질래.’ 이런 사람은 아니다 이 말이죠. 무역이나 오파상이나 해서 빨리 자립하고 나도 대도시에 아파트 얻고 해서 옛날 귀족들처럼 살아보자 하는 이거하고, 느~긋하게 영주가 돼서 넓은 수만 평에 자기는 승마나 하고 사냥이나 하면서 농사를 임대해서 자기는 그것만 먹고 별장에서 노래나 부르고 즐기는 그런 류는 아니다 이 말이죠.

‘너희들만 귀족이냐, 우리고 할 수 있다.‘는 그런 사람들이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정신병자, 그리고 강한 자, 이들을 조지는 겁니다. 이걸 전부 종교적인 이유에 복합시켜 보면 이런 정신병자들이 귀신들린 자들이고 유대인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 그걸 이용해서 정치적인, 그걸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통합을 할 때 너도 나도 거기에 같이 합심을 한 겁니다. 이게 바로 짐승이 사람을 다룰 때 한 사람에게 귀신 들리고 병들게 하는 그 정도가 아니고 집단적으로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대인은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몰아붙였습니까? 뭘 어긴 자라 했습니까? 율법을 어긴 자! 그리고 그들의 주장은 뭐냐 예수는 모세를 모독하고 모세가 준 율법을 훼방하기 때문에 그 당시 대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던 거예요. 왜냐 하면 모세는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하게 독대, 만난 사람이고 모세를 통하지 아니하면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모세를 비껴간다는 것은 이건 아무리 자기가 사랑을 베풀고 귀신 쫓아내도 이건 누가 뭐래고 구원적인 합법성을 얻을 수 없어요. 죽은 모세를 빙자해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엘리야 하고 또 누가 등장하죠? 모세가 등장하죠. 그걸 누가 봤습니까? 제자들이 보고 있잖아요.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등장했는데 제대로 모세도 모르는 인간들이 모세를 거론해서 예수님은 모세를 단순히 우리의 당국자를 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회당이나 이런 시나고개, 그 당시 국회의원이 있었어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비슷하게 있어요. 민주당이나 새누리 당 비슷하게 있는 것처럼. 율법을 중심으로 해야 이 나라가 희망이 있다. 율법 중심으로 해야 메시아가 ‘율법 지키느라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요? 내가 구원해 줄게.’ 이러고 오는 거예요.

성전도 별 볼일 없지, 뭘 지켜야 되느냐, 율법은 지켜야 되는데 그 율법은 누가 준 것이냐, 모세가 준 거예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진도 이렇게 나가다가 10년 지나도 못 나가지 싶은데 난 지금도 나가고 싶은데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1장 17절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렇게 돼 있죠?

모세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어요. 유대인들한테는. 한국 사람은 김치 없이는 못산다 하는데 그 나라 사람은 모세 없이는 못사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준 것은 여기에 율법이라 했거든요. 이 모세가 준 율법의 취지가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온 거라 해서 모세가 준 것은 (  ) (   )는 아니다? 은혜와 진리는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모세를 인정해요. 모세는 인정하지만 모세에게 빠진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은혜와 진리는 모세는 그냥 내다보기만 했지 아니다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모세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은혜와 진리로서 구원을 받는데 그 은혜와 진리라는 것은 율법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이룬 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선물로 주고, 진리를 선물로 주게 되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율법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거예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응시거든요. 응시는 탁 째려보는 거예요. 율법을 줘놓고 째려보는 겁니다.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 해놓고 뒤돌아가는 게 아니고 ‘탐내지 말라’ 해놓고 째려보는 거예요. 째려보게 되면 우리는 ‘이것도 혹시 탐내는 것이 아닌가?’ 라고 탐심을 위반하는 경우가 그 다음부터 안에서 작동을 시작해요. 발동을 거는 거예요. 지금 째려보고는 있지, 우리 속에는 차라리 ‘탐내지 말라’를 것을 몰랐을 경우에는 맘 놓고 살다가 ‘탐내지 말라’는 순간부터 ‘이게 혹시 저촉되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개시입니다. 구원의 터를 그렇게 만들어요.

제가 이걸 쓸 테니까 여러분이 차이점을 알아보세요. ➀나는 뭘 해도 합법적이다. ➁나에 대한 모든 조치는 합법적이다.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같은 늬앙스에요? 다른 늬앙스에요? 다르죠. ➀나는 뭘 해도 합법적이다. 이건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죄 없다. 뭐든지 해도 나는 옳다. 자기 정당성, 자기 의가 되잖아요. 그런데 ➁나에 대한 모든 조치는 합법적이다. 이건 나에 대한 모든 조치는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조치는 합법적이란 말은 나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뜻 이예요. 나는 뭘 해도 죄인이었으면 나를 죄인을 더욱 죄인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법적이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베드로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에 뒤에 말을 첨부 시켰죠. 임금님이 돈 안 갚은 신하를 용서를 해주니까 그 신하가 신나서 자기 집에 가서 자기 종이 몇 푼 안 되는 진 빚 안 갚는다고 다그쳤거든요. 그 소리 듣고 임금님이 용서한 걸 취소시키고 가두고 분노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첨부했느냐 하면 나는 주님의 용서를 받았으니까 구원받는다. 이것은 용서는 취소될 수밖에 없는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용서를 받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은 겁니다. 용서를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는 용서는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차별시켜서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주님의 용서 때문에 나는 구원받는다. 이렇게 돼야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묻는 거예요. 내가! 내가, 내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에 참여보다는 내가 따로 그보다는 내가 용서할 수 있고 용서 받는 사람 돼서 독자적으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를 한 거예요. 이것은 용서뿐만 아니고 비단 믿음도 마찬가지고 예수 믿어서 구원 받겠다 하는 그것도 구원 못 받아요. 믿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모든 것이 죄가 드러나도록 초대받은 겁니다. 이것은 소망도 마찬가지고 내 소망, 내 꿈, 개꿈입니다. 사람이 모든 힘든 것은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희망이라 하는 것은 달성되면 반칙이 되는 거예요. 희망은 절대로 달성되면 안 돼요. 희망이 달성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살합니다. 왜, 희망이 달성되면 희망이 없어지잖아요.

아내가 남편에게 잔소리 할 때 남편을 자꾸 아내 잔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아내가 시키는 것을 다해주는데 그건 아내를 더 화나게 만드는 거예요. 아내입장에서는 계속 남편을 잔소리 감으로 계속 남아있어야 되는데 남편이 잔소리 듣기 싫어서 아내가 두 번 다시 잔소리 못하도록 완벽을 기하니까 그 완벽이 더 미운 거예요. 아무나 그런 건 아니고, 약간 정신병자 끼가 있는 아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쪽에 계신 분들 말고.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거든요. 할 일이 없으니까 나를 보고 잔소리하고 날 나무라는 걸 취미로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거기에 대해서 완벽을 기했다고요. 신발 가지런히 하기, 이제 가지런히 하니까 할아버지가 화가 나는 거예요. ‘니는 왜 잔소리 할 여지를 빼앗아 가느냐.’ 잔소리 하는 사장들도 문제에요. 계속 찾는 거예요. 그걸 보고 직원이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잔소리 안 들을 것만 궁리하는 거예요. 회사 뭐 개판 돼 버리지요, 뭐.

이걸 라캉이란 사람은 뭐라 했느냐, 인간은 날 때부터 부모와 자식 간은 끊어지지 않는다. 평생 가는 거예요. 좀 출세했다고 아버지 묘에 가서 소주하고 오징어 들고 가서 울면서 ‘나 성공했다.’고 하는 그게 평생 아버지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이건 성령이 아니고서야 끊을 수가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아버지가 모델이면서 아버지가 라이벌이 되는 거예요.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잡을 때 그 아들은 너무 슬픈 거예요. 비애를 느끼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아버지가 불쌍해지면서 자기가 목표로 잡을 대상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자기 정신의 중심 잡을 사람이 사라져버리니까. 이게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귀신들렸다 하지만 이걸 집단적으로 할 때는 사람들은 귀신들렸다는 소리를 안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야기합니다. 이 논문에서 집단적인 귀신들림! 그걸 귀신들렸다 하지 않고 짐승의 나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겠죠. 여기서 제가 논문에서 짐승의 나라라 하는 것은 짐승이라고 따로 나오는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어떤 같은 성질의 같은 아담의 성질로 같이 움직여질 때 요게 악마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짐승은 절대로 사람에게 들킵니까? 안 들킵니까? 절대로 안 들키죠. 그런데 안 들키는 짐승을 예수님이 오셔서 들키도록 유도를 하는데 이런 인간들도 미치지만 그 당시 바리새인, 사두새인도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만 그 배후에 있는 악마가 얼마나 미치겠습니까?

그래서 아기예수 태어날 때 사전에 찾아내서 아예 발을 못 붙이도록 해서 그렇게 치밀하게 헤롯을 조장해서 두 살 밑의 애들을 넉넉하게 죽인 겁니다. 세상에 천사로 해서 또 빼내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이 마태복음 2장 이야기에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지금도 그 당시에 예수님을 다루듯이 지금도 하나님이 예수님처럼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항상 우리는 위기가 와요. 귀신은 택하지 않은 백성한테는 그냥 놔둬버립니다. 그런데 택한 백성은 꼭 그걸 청구를 해요. 자기 먹을 거 많으면서도 꼭 남의 밥상에 남의 것을 들고 가듯이 마귀는 맨날 예수님한테 와서 ‘저 베드로만 우리 편이 되게 해주시고 딴 거는 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저 베드로 우리나라에 왔으면 좋겠다.’고 베드로를 청구하는 거예요. 맨날 결재 올려서 ‘베드로 주세요.’ 해서 맨날 청구하면 예수님께서 ‘저리 가’ 하면 악마가 ‘베드로만’ 하면 ‘저리 가’ 맨날 베드로만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베드로가 제자 중에 수제자거든요. 베드로 잡으면 다 잡는 거죠. 가룟 유다는 이미 잡아 놓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베드로야, 니는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묵시에서 노는 걸 니는 모르는 거예요. 역사적 인물은 지만 잘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아는 거예요. 지만 헌금하고 선교회비 내고 기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봉사하고 착한 일하고 구제하고 바자회 열고 이렇게 지만 성실하면 구원되는 줄 아는 거예요.

사실은 구원은 누구와 누구의 협상과 회계고 타협이냐 하면 영적 묵시적 존재에서의 협상이거든요. 협상 하지도 않죠. 마귀하고는. 예수님하고 아버지 사이에 이미 결정 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에 보면 제가 설명한 것은 210페이지 밑에 세 번째 줄에 너무 어려운 이야기예요. 뭐냐 하면 『특이한 존재의 특이한 활동과의 마주치는 현장에서 비로소 그 정체를 내민다.』짧은 문장이지만 되게 어려워요. 짐승은 밖으로 끄집어내는 성질이 아니라 특이한 존재의 특이한 활동과의 마주치는 현장에서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낸다 했거든요. 그 특이성은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라 하잖아요. 하지만 이게 뭐가 빠졌어요. 예수님이 맞기는 맞는데 뭐를 첨가해야 돼요. 악마가 겁내는 예수님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마귀 들려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공동체가 다 같이 예수 믿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귀가 겁낼까요? 예수를 겁낼까요? 안 낼까요?  겁 안 냅니다. 왜, 성공했으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너희들은 지금 다른 예수를 믿고 있다. 그 다른 예수는 누가 만들어 낸 거예요? 그 고린도 교회에서 당회장 목사부터 온 교인이 조작해 낸 예수인 거예요. 그런데 조작해 낸 예수가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까마득히 몰랐는데 특이한 존재, 특이한 인물이 등장할 때 비로소 그 예수가 가짜라는 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 특이성은 사도바울의 개인이 아니고 사도바울 안에 누가 계십니까? 성령이 계신 거예요. 예수님 영이 계신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대리전쟁 이예요. 이쪽에는 예수님, 저쪽에는 뱀, 뱀을 앞장세우는 한 무리와 이쪽의 소수의 무리와 전쟁이 붙는 거예요. 이게 창세가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두 개의 싸움, 그래서 이 논문에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주체라 하는 것은 그냥 주체가 아니고 싸우는 주체! 주체라 하는 것은 싸움하는 현장에서 비로소 나오는 게 주체예요. 우리라는 주체는 뭐냐, 나는 나다. 나는 나다. 이건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부처가 이야기한 거예요. 모든 불교는 이겁니다. 나는 나다. 나는 나니까 그게 진리기 때문에 ‘나는 나인 것을 벗어나서 나는 저 사람 되고 싶어, 이러지 마라, 다시 너 자신에게 돌아오라. 네가 저 사람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이거는 환상이고 허구다.’ 이건 불교입니다.

산은 산이요. 산은 물이 아니다 이 말이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예요. 불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이건 성철이 처음 이야기 한 게 아니고 불교 전에 경전에도 나와요. 물은 물이다. 여기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여기서 세 번째 바뀌는 것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로 바뀌어요. 산은 산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면서 다시 산으로 돌아올 때 그 가운데서 산은 정말 산이고 물은 물일뿐이듯이 나는 누구다? 나는 나다. 부처도 없고 내가 곧 부처고 신이라는 것은 원래도 없고 그런 거예요. 부처가 한 말 중에 옳은 말은 하나밖에 없어요. 신은 없다는 그 말.

그런데 부처가 한 말도 옳은 말도 아니에요. 신이 없다는 말은 누가 신이기 때문에 신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말 이예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필요치 않다는 말이고 내가 신이 없다는 것은 아까 유튜브 동영상 했지만 구원의 세계라 하는 것은 그 전에 죽음의 세계를 전제로 할 때만 부활의 세계예요. 이 세상 말고 저 세상 있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고 저 세상은 부활의 세계에요. 주님 가신 곳은 부활의 세계지 이 세상 말고 저 세상 간 게 아닙니다. 저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 토속 모든 종교에 다 나와요. 주께서는 부활의 세계기 때문에 반드시 이쪽에서는 뭡니까? 자기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부처는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죽어도 자기가 계속 살아있다는 거예요. 이게 다 깨져서. 이게 윤회설 아닙니까? 가루가 될지언정 나는 남아있다는 거예요.

신이 없다 하는 말은 지가 신이라는 말이고 내가 신이 없다는 말은 죽음의 세계에서는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잖아요. 죄의 세계에서 신이나 예수는 전부 다 원래 없는 건데,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 예수요. 삼위일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신은 없는 신이예요. 왜, 있는 것은 나밖에 없는데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믿고 싶은 예수를 만들었으니까 나라는 거예요.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안 죽어야 돼.‘ 가 전제로 돼 있는데.

예수님 십자가는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은 모든 사람이 다 죽은 자로 만들어 버려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산-죽음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산-죽음=괴물. 살아있으나 괴물 이예요. 이걸 잘 이해하려면 에어리언에 나오는 괴물 있잖아요. 분명히 살아있는데 괴물이죠. 외계인처럼. 주님 나라 보기에는 우리는 완전히 일그러진, 완전히 골통이 일그러진 정상이 아닌 좀비는 창백하지만 우리는 창백한 것이 아니고 울퉁불퉁, 멍게 같은 그런 존재예요. 그러면서 욕심은 왜 그리 많은지. 그걸 프랜시스 베이컨이 사람이 그림을 그렸어요.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라는 책에 보면 나오는데 교황을 그려놓을 때 완전히 괴물로 그려놨어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을 볼 때 피부 껍데기 다 벗기고 보는 인간. 흉측하죠. 피부가 덮여 있으니까 화장발이 있어서 화운데이션 바르고 비비크림 발라서 반짝반짝 윤기가 나지만 만약에 그 피부 삼겹살을 벗겨 버리면 어떻겠어요? 이건 어떤 일그러진 기관들의 엉켜진 모습이 나오죠. 그 모습이 바로 분명히 죽었는데, 마치 시계 껍데기 벗겨보면 그래도 시계가 찰칵, 찰칵 돌아가잖아요. 분명히 죽었는데 돌아가는 거예요. 뭐하겠습니까? 죄를 생산하는 거예요. ‘이래서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는 그 표를 다 내는 거예요.

부활의 세계 앞에서 죽음의 세계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죄를 생산하는, 죄를 지는 현장으로서 주께서는 계속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죄 짓는 것을 누가 응시한다? 쳐다보고 누가 응시한다는 거예요? 법이 응시하고 우리는 법이 응시하는 순간 ‘탐내지 말라’가 더 발동을 가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인간이 껍데기도 없는 괴물인 것을 보시고 “내 피와 내 살을 먹어라.‘고 한 거예요. 네 생명은 내 생명으로 교체돼야 네가 영생을 얻는다.

원래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돼 있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생명나무 얻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을 어떻게 갖느냐, 주께서 그 쓰레기를, 그 폐기물을 이용해서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껍데기 위의 생명으로 새롭게 표현한 거예요. 이걸 미술로 하면 오브제, 오브제라 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도화지가 아니고 새로운 물질을 통해서 표현하는 기법 이예요. 자갈이라든지, 나무에 그림을 그린다든지.

우리 죄인에다 주님의 생명을 그려 넣는 거예요. 그렇게 그리니까 예수님의 생명은 어떤 생명이냐 하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일그러진 형체의 예수님, 왜냐 하면 자기가 구원할 인간 자체가 일그러진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거기다 생명이 임해버리면 같이 더욱 더, 더욱 더 일그러진 모습으로 십자가 고난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괜찮다고 보는 사람의 메시아는 어떤가, 항상 인물 좋고 광채 나고 번쩍번쩍하고 머리에 기름 발라서 멋지고 신사답고 돈 많고 이런 메시아를 원하는 겁니다. 그 지 분수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얼마나 일그러지고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도 근사하지만 예수님은 나보다 더 근사하게 구름타고 멋지게 올걸. 아마 지팡이 들고 이렇게 오실걸.’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귀는 거기 맞춰서 멋있는 예수를 보여주는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저는 이걸 걸레라 하겠어요. 걸레 뜻은  온갖 게 다 긁고 지나가요. 저나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는데 온갖 게 다 긁고 지나가요. 온갖 게 다 와서 심정 상하게 만들고 시비 걸게 만들고 차도 새로 샀으면 긁어놓는 것처럼, 내 마음에다 온갖 상처내고 가고 바리스타 됐으면 누가 와서 시비 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지만 우리 마음 판에는 온갖 타인들의 낙서가 수북합니다. 나이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상처가 더 있어요. 하나의 구리판으로 보시면 됩니다. ‘나 여기에 왔노라’ 설악산 바위에 새기듯이. 아파트 들어갔더니 층간 소음이 난다 해서 불 질러서 많은 상처가 되고, 젊었을 때 누구한테 사기 당해서 전세금 250만원 홀라당 날린 적도 있고, 우리 가슴에는 남들이 쏟아놓은 러시아에 바깥에서 떨어진 유성우처럼 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했잖아요. 그처럼 외부에서 오는 죄악 된 유성우가 마구 긁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애들은 술로 노래방으로 이걸 가리는 거예요. 너무 아프니까. 아파도 너~무 아파, 사는 게. 담배로 마약으로 나이트클럽으로. 아프니까. 이젠 결혼하게 되면 자식 봐서, 마누라 봐서 참고 참다보면 너무 무디어져서 어지간히 아파도 그만 ‘내가 입 다물면 되지.’ 하면서 참고. 그걸 참지 못하는 사람은 결혼하고 난 뒤에 우울증 걸리고 산후 우울증 걸려서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나오고.

이게 다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묵시적 존재인 짐승이 우리에게 계속 ‘희망을 가져라. 꿈을 가져라. 꿈이 있어야 니가 살아.’ 이러고, 앞의 예수님은 우리를 응시하면서 ‘니 꼬라지 내가 다 안다.’ 너에 대한 나의 조치는 유일하게 합법적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조치가 합법적이기 보다 뭐가 더 기분좋아하느냐 하면 내가 뭘 해도 다 정당한 걸로, 복 받을만한 짓이 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죠. 빨리 바꾸세요. ➀번에서 ➁번으로 빨리 바꿔야 됩니다. 우리는 뭘 해도 그런 조치를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죠.

동영상 첫 번째 제목이 뭐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거든요. 그래서 제목이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지 말고 그 맞은편에 예수님의 희생이 있더라. 주님의 희생을 모르니까 맨날 자기 생각만 해서 하늘도 무심하지. 하늘도 무심하지,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이 통과해서 나온 주님의 피의 덕분 이예요. 피가 떨어진 거예요. 피의 유성우가 떨어진 거예요. 죄 지면 긁고 지나가면 피가 오고 또 긁고 지나가면 피가 오고, 주님의 희생의 작품으로 살아가는데 우리는 뭐가 그렇게 불평불만인지 하늘도 무심하지, 자기가 비련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드라마 보세요. 전부 다 그거 아닙니까? ‘하늘도 무심하지, 그래 내가 너를 복수 하겠다.’ 복수하는 막장이 왜 그렇게 히트 치느냐 우리한테는 항상 그런 상처가 우리가 죽이고 싶고 손 볼 사람이 각자 한 두 명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한 다스는 될 거예요.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은 수백 명 될 거예요.

특히 여기 특이한 존재는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바리새인하고 싸움할 때 펜싱 했습니까? 씨름했습니까? 태권도, 권투했습니까? 뭐하고 싸웠습니까? 제가 여기 싸우는 주체라 했는데. 주체하는 것은 싸움을 통해서 거기서 밝혀지는 거예요. 종교적인 문제죠. 로마가 다스리고 있으니까. 여러분, 헤롯 왕국은 사실 로마의 속국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다뤘다는 것도 판정을 누가 내린다는 말입니까? 헤롯을 중간 매개체로 해놓고 판정은 빌라도가 판정을 내리죠. 빌라도는 로마에 속한 사람이라니까요. 그래서 다니엘에서 마지막 네 번째 짐승은 로마예요. 그게 한 이레 아닙니까? 인자가 결국은 마지막 짐승한테 그렇게 당하도록 돼 있어요.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로마 나라는 역사적 나라로서의 지역이 확산돼서 묵시적 존재의 바벨론 나라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바벨론 되고 거기 맞은편에는 모든 세상이 바벨론 같으면 바벨론 아닌 나라가 없지 않느냐, 영원한 성도의 나라가 있어요. 다니엘 8장, 여원한 성도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필리핀하고 한국하고 누가 잘사느냐 이 문제가 아니고 로마라는 이미 바벨론 나라의 배후는 누구며 거기에 비해서 이쪽 성도의 나라의 배후는 누구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저쪽 나라를 하나로 가두기 위해서 인을 치죠. 이마, 손에 짐승의 인을 박아버리고, 이쪽에는 예수님의 인, 하나님의 인을 박아버려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질문을 하잖아요. 짐승의 인이 뭡니까? 라고 묻는데 그 답변은 이렇게 하면 간단합니다. 짐승의 인이 뭡니까? 라고 하지 말고 성도가 받은 그리스도인이 뭡니까? 그것만 알면 되죠. 성도가 예수님한테 받은 인이 뭐냐 하면 바로 고린도후서에 보면 성령 이예요. 성령으로 뭐하시니? 인치시니. 성령으로 인 쳤잖아요.

그러면 저쪽의 인은 뭡니까? 성령 빼놓고 나머지 취하는 모든 역사적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조치들, 왜냐, 항상 역사적 존재에서 악령이라 하는 것은 악령이 한다가 아니고 역사적인 산물과 이러한 방법을 앞장세운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죠. 그걸 잊지 마세요. 짐승이 일 한다 할 때는 짐승이 시커먼 뿔 달려서 짐승이다 이렇게 오는 게 아니고 그건 짐승이 만들어 낸 가짜 짐승이고. 저는 어릴 때 화장실이 바깥에 있어서 ‘귀신 나온다.’ 하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가 만든 귀신들 이예요. 진짜 귀신은 숨어 있고 진짜 마귀는 숨어있다 말이죠. 인간들이 겁낼 만한 귀신을 해놓고 내가 빨리 귀신을 피하는 방법은 뭡니까? 빨리 마당을 가로질러서 어디에 합세하면 귀신은 안 따라오죠? 안방에 들어가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가면 귀신은 안 따라오죠. 예수님 입장에서 보세요. 꼭 할아버지, 할머니가 귀신 이예요. 그 동네가 귀신이라. 가짜 귀신 만들어 놓고 진짜 귀신은 숨겨 버리고. 목사님 귀신 쫓아내세요. 귀신 쫓아낸다고 안수하는 그 목사가 진짜 귀신 이예요. 진짜 마귀 들린 자거든요.

그래서 계속해서 ‘당신은 나한테 돈 내고 안수 받지 않으면 계속 병듭니다.‘라고 함으로서 기어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못 보게 만들어요. 어떤 경우라도 기어이 예수님만 떼놓으면 성공이라. 마귀는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요.

다시 한 번 정리할게요. 어떤 현상이 이건 귀신 들린 거고, 어떤 현상이 귀신 안 들린 게 아니고 모든 현상은 귀신이 자기를 숨기기 위한 거룩을 빙자하든 흉측한 걸 빙자하든 그건 전부 다 역사라 하는 것은 묵시를 숨기기 위한 악마의 수작에 불과한 겁니다.

성령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나타내서 우리 죄를 책망하는 거예요. ‘주여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저는 불법이고 그런 불법을 조치한 주님만이 합법입니다. 모든 자랑을 예수님만 자랑해요. 모든 공로를 이미 이루었던 예수님 희생만 자랑할 때 그게 성령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말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집사님, 오늘 흰머리 좀 있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귀 들린 이야기고, ‘주께서 조치를 그렇게 하셨네요.’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말할 때마다 붙입니까? 또 마귀도 붙여서 하도록, 유전학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전제가 항상 ‘주께서 그렇게 하셨네요.’ 다 같이 찬양하고 다 같이 감사합시다. 결혼식에 가서 역시 주님을 집어넣어서 ‘주께서 둘이 고난 받도록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결혼을 감사하는지 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210페이지 제일 밑에 『짐승의 의미는 특정 정치적 공동체나 종교적의 내부 활동을 관분석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서 파생되는 활동으로 인하여 비로소 판정 기준이 세워진다.』이제 아시겠죠.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짐승은 계속 자기 정체를 안 드러내요. 그런데 예수님 입에서 경유해서 뭐가 나왔으면 짐승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그걸 부정하는 식으로 뭔가 일을 꾸밀 게 아닙니까? 그 일이 그동안 숨겨져 있던 악마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랑은 복음전파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최고의 사랑 이예요.

촌에 명절 돼서 백화양조 정종 들고 가는 게 사랑이 아니고, 그냥 복음 들고 가는 거예요. 복음 들고 가서 ‘우리는 뭘 해도 죕니다.’ 이야기할 때 그동안 그렇게 예쁘게 보던 엄마의 낯빛이 변하면서 속에 귀신 들린 표를 내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자비롭고 하늘이 내린 천심이라고 소문난 엄마가 복음만 전해버리면 천심이 아니고 마귀심이 돼서 ‘그 소리 하지 마. 그런 소리 하려면 명절에 내려오지도 마.’ 갑자기 그걸 발작을 일으킨다 하죠. 윤 집사님은 발작을 유도하는 느낌이 들어요. 자연스럽게 해야지 유도하면 안 돼요. 정말 복음 전하면 그것도 사랑으로 전했는데 저쪽은 발작을 일으킵니다.

또 한 가지 예는 개혁주의 성화론 자들, ‘너희들은 막 살면 되겠어? 이웃을 사랑해야지.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그게 잘못인가? 서로 사랑하고 온유 하라 했느니 해야지.’ 한다고요. 그래서 그 개혁주의 성화론 자한테 ‘십자가는 이렇습니다.’ 하면 그쪽에서 화내고, 방금 ‘사랑해야지’ 해놓고 화내버리죠. 그러니까 자기 정체가 얼마나 말씀을 빙자해서 어떻게든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이렇게 호작질 하려고 이 상처만 남아 있는 상처뿐인 이 구리판 같은 우리 마음은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이게 안 돼요. 찬송가에 그게 있죠. ‘십자가의 피만 바라보며‘ 하는 노래가 있거든요. 예수님의 피만이 용서가 되지, 다른 대일밴드에다 후시딘 연고 발라서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교회 올 때 위로받으려고 오는데 절대로 그걸 위로하면 그 사람을 망치는 거예요. 외로워서 오는 사람도 많고 말 벗 찾아서 오는 사람도 많고 자기 자랑 들어달라고 오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들 우리교회 다 나갔습니다. 앞으로서 나갈 사람 있겠지만. ‘뭐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느니“ 사랑은 ’당신 죄인이야.‘ 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큰 사랑은 없어요.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 소리 하니까 눈물 난다. 정말. 그렇게 사랑해줬건만 사랑이 없다 하니, 뭐 어떤 사랑? 어떤 사랑, 뽀뽀해줄까. 그럼. 뭐 어떤 사랑.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 시킬 때 그게 바로 사랑의 극치라고 보는 겁니다. ‘니 대신 내가 죽었다고 피 흘리는 거’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랑 앞에서 사랑 받을 자만 사랑을 알고, 아까 동영상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공로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인정하는 사람은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밖에 없었잖아요. 나머지 모든 사람은 예수가 필요 없어. 왜 다 잘났으니까. 밑지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고 했잖아요. 예수님 말을 잘 들어보세요. 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아니 용서를 많이 왜 하는데? ’그래야 의인되거든‘ 그러니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우리는 용서를 못 합니다. 왜냐 하면 마음속에 딱 용서했다는 걸 기억해서 ‘이렇게 용서했는데 네가 그렇게 나오면 앞으로 내가 3배, 4배, 7배나 갚아 주리라.’ 라멕이 튀어나와요.

211페이지 넘어갑시다. 도저히 이러면 안 되고 띕시다. 『구약 성경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형성된 채 육지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 적‘의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이렇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바다라는 그것이 H₂O가 모인 그런 집합인 바다를 의미하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 하면 초반에 이렇게 기초 닦는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어렵더라도 여러분 참아 주세요. 방금 이야기했듯이 역사 말고 모든 묵시에 관한 것은, 역사는 원인과 결과로 돼 있어요.

묵시에서는 반드시 누가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등장하셔야 묵시가 그때 얼굴을 빼꼼이 내놔요. 예수님이 등장 안하면 묵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역사에서 역사로 처리해요. 과거에 이렇게 했으니까 과거의 관행대로 하는 게 옳습니다. 이게 모든 우리나라 행정, 우리나라 국가, 전 세계 모든 인간의 역사가 다 그런 거예요. 회사에도 다 매뉴얼이 다 있어요. 선배들이 한 그걸 보고 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창작하면 위험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여기 바다란 말을 할 때 이것은 그냥 바다라 하지 말고 왜냐 하면 그냥 바다라고 해봐야 땅이라는 범주 안에서의 바다와 땅이 되잖아요. 이게 무슨 의미 있어요? 바다에서는 어디서나 괴물이 올라옵니까? 바다에서 오징어 올라오고 고래 올라오면 그게 짐승 이예요? 땅 개념이 이미 뭐가 됐다? 묵시화 됐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가면 예수님이 없는 땅이 아니고 예수님이 있는 땅이 돼 버리면 이 땅은 묵시적 의미를 품게 돼요. 묵시적 개념을 품었을 때 바다의 개념은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묵시적 개념을 받았을 때 바다의 의미는 뭐냐, 예수님께서 새삼스럽게 불러내기 위해서 어떤 예수님의 하신 조치에 의해서 비로소 그걸 반대하기 위해서 그동안 지배력을 갖추기 위해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땅은 뭐냐 하면 바로 이 땅에 예수님과 함께 계신 교회가 이 땅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땅이 되면서 교회,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이스라엘. 구약에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그건 역사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은 역사와 함께 무너질 것이고, 신약의 교회,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7별을 잡고 계신 분이 이스라엘 되거든요. 그럼 이스라엘 되면 이스라엘 있는 곳이 땅 이예요. 이 땅이 이스라엘이 등장하니까 짐승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이방나라가 공격하게 했죠. 구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어떤 점유된 현재 팔레스타인 땅, 블레셋, 가나안 땅이죠. 점유한 실체가 있는 그런 국가이라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적들은 뭐냐 실제로 그 주변에 땅을 점유한 암몬, 모압,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 로마 그런 나라들이죠. 그때는 뭐냐, 그냥 육지에서 육지로 싸움을 벌이는 거예요. 그리고 언약궤가 앞장서니까 저쪽은 물러가고 그런데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감당 못할 입장 같으면 언약궤 혼자 나가서 블레셋을 다 쳐부수고 다시 언약궤는 마치 부메랑처럼 다시 어디로 오는가, 다윗의 손에 들어오잖아요. 오벧에돔에 돌아왔다고 다윗이 기뻐서 춤을 추니까 미갈이 체통도 없이 춘다 하니까 미갈은 임신도 못하고,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언약이라는 것이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배후에는 뭐가 있다? 묵시적인 어떤 주의 이름이 여기에 게재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의 땅이라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한 땅이니까 이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이 되는 거예요. 여기 약속의 땅에 대해서 짐승은 어딜 이 세상을 주님이 차지하도록 둘 줄 아나? 하고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바다와 땅이라는 것은 물결 넘치고 갈매기 날고 있는 그게 바다가 아니고 교회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복음 전파하는 그 현장에 대해서 그걸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이 바다에서 온 짐승이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입니다. 힘이죠. 그래서 그들은 뭘 하느냐, 매매를 못하게 하고 666 숫자, 이쪽에서는 144.000, 이쪽에서 144.000 카드 내놓으니까 저쪽에서는 666카드 내놓고, 이게 뭐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모든 숫자들 가지고 묵시적으로 재편성한, 역사적 숫자나 역사적 지명을 사용하면서 사실은 하나의 배후의 실제적으로 묵시적인 힘들과 힘들의 충돌,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2.222) 13-03-10 22:50 
가락교회-70이레 논문(바다의 짐승)130221-14강b -이 근호 목사

제 14강b

 구약 다니엘의 짐승이 뭐냐 그 이야기했습니다. 국가 자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힘인데 그 힘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서 힘으로 왔다. 그런데 힘으로 왔는데 그 온 짐승이 사람들을 열댓 명 모아놓고 천명, 만 명 모아놓고 ‘예수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 사도 다 잡아 죽여.‘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니고 그걸 할 때 국가적 형태를 갖춘다는 거예요.

제 말은 바다에서 올라올 때부터 국가적 형태를 갖추는 게 아니고, 올라와서 국가적인 형태로서 조직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의 증인들을 조지는 거예요. 그게 왜냐 하면 그건 다니엘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래요. 다니엘이 속한 나라가 바벨론 나라잖아요. 다니엘은 느부갓네살만 상대하는 게 아니고 느부갓네살을 이걸 모델로 삼는 국가, 앞으로 모든 국가를 염두에 두고 국가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보내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다니엘 개인이 저쪽 국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다니엘 자체가 인자거든요. 영원한 인자의  나라의 하나의 백성으로서 하나의 파숫꾼으로 선지자니까 먼저 도달했고, 이쪽은 예수님 나라 대표자로 왔고, 그 당시 바벨론 당시에, 저쪽의 나라 대표자는 짐승 같은 느부갓네살이 온 거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7년 동안 짐승이 돼서 시베리아 벌판 같은데서 헤매고 다니잖아요.

주께서 뭔가 연극 장치를 만들 경우에는 묵시는 둘 다 안 보여요. 정체는 둘 다 숨기거든요. 아무리 봐도 다니엘만 보이지, ‘내가 여기 있다’ 해도 안 보이거든요. 그런데 언제 보이느냐 하면 죽음에 휩싸일 때 묵시의 존재가 보입니다.

그게 뭐냐, 다니엘 3친구가 불 속에 3명이 들어갔는데 불 속에 몇 명 들어가요? 방금 불 속이기 때문에 보면서도 역사적 인물들이 불이라는 죽음을 안겨주는 그 속에 건너 뛸 수가 없는데 저쪽에서는 4명이죠. 분명히 3명의 역사적 인물이 들어갔는데 묵시적 내에서는 3+1=4명이 되는 거예요. 1이 불 속에서도 3을 살려냈다는 것이 드러나잖아요. 그럼 이쪽에서는 닭 쫓던 개가 되는 겁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불이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다니엘 3친구를 집어넣던 사람들이 먼저 불에 타서 죽었어요. 자기 딴아 방화에 대해서 충분히 대비했는데 불을 지펴도 너~무 지폈어. 7배나 뜨겁게 지펴놓으니까 어떤 인간도 불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마치 홍해바다 같아요.

역사적 존재가 물속에 파도 속에 들어간다. 이건 살아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리고 다니엘 3친구도 살 수가 없어요. 어느 인간이, 인간의 세포는 단백질로 돼 있고 단백질은 기껏해야 120도 정도 되면 다 녹아 버리는데 어느 인간도 250도 되면 다 타버리고 어느 인간도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세포를 못 이기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살았다는 것은 살아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도 이미 불 심판 받는다 쳤을 때 성도에게 뭘 준다? 성령을 주시는 것은 주께서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다니엘 3친구처럼! 우리가 기도 많이 해서 살아지는 게 아니고.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왜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솜씨를 우리를 통해서 자랑하기 위해서. 보이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자도 없으니 사나 죽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든 살든 주를 위해서입니다. 라는 그것만 변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라도 하늘나라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는 죽는 건 없습니다. 그냥 잠자는 거예요. 오늘 밤 자는 것 두려워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잖아요. 잠을 오래 잔다는 것뿐이죠. 그 다음부터 안 깬다는 것뿐이지 본인은 자고 있으면 돼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가 자고 있었어요. 잠 깨어놨다고 마리아 얼마나 구박받았는지.

211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짐승이 올라올 때는 짐승이 아니고 점차로 무슨 형태를 지닌다? 국가 형태를 지닌다. 왜냐 예수님의 나라가 국가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를 맞춰야 돼요. 저쪽도 이런 형태, 여기도 같은 형태. 그래야 대비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 국가 형태라면 예수님의 국가 형태는 역시 예수님의 이스라엘이 모델이 되겠죠. 제사장 나라. 그렇다면 이쪽의 짐승의 나라도 무슨 나라가 되겠습니까? 역시 제사장 나라. 백성들은 중간에 헷갈리죠. 예수님도 뭐 중심? 성전 중심. 그런데 예수님의 성전은 하늘에 있고요. 인간들도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도 뭐 중심? 성전 중심, 이건 년도가 46년 동안 진 거죠. 예수님의 성전은 몇 년 동안 짓는다? 3년도 아니고 달랑 사흘 만에 져버려요. 그러니 제자들이 헷갈리는 게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으니까 그 46년이라는 것은 이 지상의 시간적 개념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도 지상의 시간적 개념을 사용했다니까요.

그럼 제자들은 분명히 선생님이 우리에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겠지. 그러면 예수님이 삼일 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일, 월, 화, 1년, 2년, 3년, 4년, 한 달, 두 달, 그와 동일한 그 간격 중에 하루나 사흘이겠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사흘이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 몸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 몸은 시간과 공간에 둘러싸여 있지만 예수님의 몸은 우리 같은 시간과 공간이 아닌 묵시에 둘러싸인 몸이 되는 겁니다.

왜 이런 몸이냐 하면 영적 몸이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만지지 말라 했습니다.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건 다른 몸체예요. 악마도 바로 예수님 같은 다른 몸체를 갖고 있는 거예요. 악마가 천사거든요. 천사인데 인간적인 몸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눈에는 예수님도 안 보이지만 누구도 안 보인다? 자기 대장 악마도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는데 이상하게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인간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국가 없이는 못 살 것 같고, 가족, 처자식 없으면 이건 실패한 것 같고,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다니까 화들짝 놀라고, 아버지 장례 치르려니까 날 따라오라, 하니 이건 불효자 만드는 거니까 안 되고, 파도가 치니까 예수님이 잠잠하라, 하니 이상하다, 예수님도 같은 몸인데 우리가 하면 안 되는데 예수님은 되게 했고, 모든 게 이상해, 이상해. 뭔가 같은데 아닌 것 같고, 아닌 것 같은데 같고, 우리는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면 한 끼만 먹어도 모자라는데 주께서는 나와도, 나와도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그래서 좋다 싶어서 따라다니니까 더 이상 안 주고, 그게 뭐예요? 줬으면 계속 줘야지, 이거 먹고 싶지? 줄게, 이렇게 나와야 될 텐데, ‘이거 주세요.’ 하니까 “내 피와 내 살을 먹어라.” 이렇게 나오니까 도대체 인간 자신의 것과 주님의 시작을 이어보려고 했는데 자신의 것과 주님의 시작은 이어지지를 않네.

그러니까 내 쪽에서 예수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이게 실패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흘러가는 구름에다 사다리 둘러메고 소방관 돼서 흘러가는 구름에다 사다리를 한번 걸쳐보죠. 구름에 사다리가 걸립니까? 약간의 먼지에 얼음이 묻은 건데 그게 됩니까? 전부 다 안개인데. 안 되죠. 헛짓 아닙니까? 교회 다녀서 사다리로 하늘나라에 걸려고 하는데 걸 데가 있어야 걸지. 다 이게 헛짓 이예요. 헛짓, 헛발질,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똑똑한 목사, 똑똑한 장로들은 이미 어느 정도 목회하고 장로 20년 하고 나면 예수 없다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정도 돼야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그건 모르겠다고 하는 그 정도 돼야 사람이 뻔뻔스러워져요. 진짜 악마가 악마의 제 모습을 나타내는 겁니다. 악마가 예수님보고 벌벌 떨면서 언제 악마 짓 합니까? 주님 앞에서는 벌벌 떨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해야 되죠.

국가의 중책, 국가의 오야봉이 되는 것은 이건 성경에 보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해야 국가의 원수에 올라가는 겁니다. 문재인도 할 수 없어요. 로마서 13장에 보면  권세 자도 하나남이 정하신 것이라 했는데 권세 자가 악마 짓을 해야 돼요. 제대로 악마 짓을 해야 됩니다. 박OO는 그 짓을 제대로 해줘야 돼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그 태고 적 어두운 힘이 땅을 적시면서 활동을 해줄 때 비로소 땅의 사람들은 낯익은 질서로서 마주 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서 개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정리하게 된다.』참 어렵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국가가 있음으로서 개인을 초월하는 그 국가를 뭐로 본다?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고 그리워했던 유토피아, 그것을 인간들은 국가를 통해서 그걸 눈으로 보고자 하는 거예요. 마귀가 한~껏 도와주십니다. 진짜 이상적인 국가가 있다면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 나라에 복종하겠다. 만반의 준비가 돼 있어요. 그 나라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정도. 너무 멀어서 못가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그야말로 거기 가면 복지가 잘 돼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너무 치한도 잘 돼 있고 과외를 안 시키고 사교육도 안 시켜도 되니까 애들을 사교육 지옥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겁니다. 실제로 가보죠.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마약하고 있는데. 뭐 행복해서 마약합니까? 얼마나 행복하지 않았으면 마약을 하겠어요?

이 땅에서 이상적인 나라가 어디 있으며 이상적인 행복한 그러한 성냥팔이 소녀에 나오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게 이 세상에 없어요. 왜냐 하면 그 행복이라는 것이 타인의 불행을, 그러니까 불쏘시개로 만들어서 자기가 행복이라는 불꽃을 피웠거든요. 남의 집에 불을 질러 놓고 그 따뜻한 온기에 의해서 우리는 행복하다 이 말이죠. 오늘도 지하철 타고 오다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하는데 보면 ‘자기애가 대학 떨어졌다. 어떻게 됐다. 시험 떨어졌다.‘ 이 이야기다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할 수 없어 행복한척 하고 있지, 사실은 원하는 대학은 따로 있는데 어쩔 수없이 그 대학 가니까 ’그래, 참자, 참자, 참~자, 그래 괜찮다.참자.…‘ 그저 참는 거예요. 행복해지는 노력 하는 거예요. 따님이 서울 대학에 가 보세요. 입이 귀까지 걸리죠.

행복 안 하니까 억지로라도 행복해야 할 수 없지 뭐, 자포자기해서 아직까지 날아가는 행복의 꼬투리라고 잡아서 그것마저 거두려고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인내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인내성마저 허락지 않을 때는 진짜 부도덕해집니다. 딸내미 그렇게 좋은 대학 가라고 참고 참았는데 더 이상 참나 보라. 시험 앞두고 내가 얼마나 경건했는데 이제 두 번 다시 경건 안 한다. 그래서 자기 본성이 슬슬 나오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니 스스로 속여도 나는 니 수법에 안 넘어간다.’ 왜냐 이미 용서를 했고 이미 구원을 했기 때문에 자꾸 본성 가리는 것을 주께서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그냥 감사하면 돼요. 지 성질 더러운 것도 감사하고 그냥 감사하면 되는데 그걸 개선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행동 어떻게 하면 개선될지, 개선하지 마시고 현재 우리가 하는 것이 사실 주님 보시기에 최선입니다. 합력하여 뭐를 이룬다? 선! 선을 이룬 거예요. 괜히 나답지 않은 짓을 하지 마세요. 현재 가장 나다운 거예요. 내 자신도 몰랐던 나다움이 이 정도입니다. 갑자기 피자 판 나오면 어지러워요.

여기 중간에 『국가란 단지 힘의 뭉치가 아니다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의 파도가 특정 지표를 향하여 치닫는다.』국가는 인간을 다룰 수가 없습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이 매매를 못하게 짐승의 표가 없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했죠? 이 말은 뭔 뜻이냐 국가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혁명이 일어났잖아요? 혁명 될 자는 하나님께서 지정한 자만이 혁명할 수 있어요. 로마의 모든 정권 교체는 이게 신의 뜻이지, 인간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한 인간이 대기업에서 진급하고 임원 되는 것,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면 그는 그 임무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그래요. 자기가 계획한 대로 돼 가지 않아요. 반드시 길을 열어 주셔야 되죠.

어떤 사람은 그 임원 되려고 아무리 해도 이상하게 운이 안 따라주죠. 정말 이상하게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성도뿐만 아니고 비성도도 자기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주관하시는 분이 있어서 결국은 그 사람은 그쪽으로 지옥 가야 되고 염소가 돼야 되고 우리는 기어이 양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양이 되는데 좀 지저분하게 되죠. 완전히 철판에다 온갖 낙서, 유성우가 떨어져서 상처뿐인 인생, 상처뿐인데 구원을 받고 저쪽에서는 깔끔은  혼자 떠는데 지옥 가고 있어요. 아마 지옥 가도 양복 입고 체면 차리고 있을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블랙홀이거든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신약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떴다 하면 반드시 그 주변에 물결이 생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안 오시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고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 했죠? 예수님이 안 오시면 다 구원 받아요. 왜, 다 하나님을 알고 나름 다 노력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에 택한 자만 구원받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가 싫은 거예요. 차라리 예수 없을 때가 편하고 좋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 이야기하면 하나님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만반의 충성할 마음 자세가 돼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떠버리면 저분이 왜 쓸데없이 왜 끼어들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떴음으로 말미암아 점차 저쪽이 짐승이 돼 갑니다. 예수님만 안 오면 다 착한 사람들이고, 옛날의 지도자가 그냥 지도자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사람보다 율법이 뭐라고 지시하느냐 거기 신경 쓰는 사람입니다. 정 석훈 목사님이 새순교회 강의한 걸 들어보면 유대인들의 어떤 단체는 이사야를 통째로 다 외운답니다. 그 두꺼운 이사야를. 얼마나 말씀을 사랑합니까? 그런데 강도가 이사야 다 외워서 구원받았습니까?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까? 강도가 성경 몇 절 외웠습니까? 아마 한 줄도 못 외워서 수련회 점심 때 자장면도 못 먹을 것 같아요. 지금 지도자가 그냥 지도자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윤리와 도덕에 철저한 사람들 이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을 못 가잖아요. 이 바리새인보다 자기관리에 더 철저한 사람 있나 나와 봐라, 이 말 이예요.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 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보고 너희 애비는 뭐라 했습니까? “너희 애비는 마귀다. 악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죄를 지었느냐? 우리는 아브라함 혈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혈통만큼은 죄에 눌리지 않도록 주께서 친히 지켜주십니다.’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하니까 너희들이 악마지.‘ 그런 식으로 하니까.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 구원받아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 그런데 지금 돌을 치려고 하는 사람, 율법을 위반 안 한 사람이 지옥 가는 거예요. 율법 가지고 ’너는 지옥 가야 돼, 너는 돌에 맞아 죽어야 돼. 돌로 치는 우리는 지옥 안 가.‘라는 여기에 누가 등장했다?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주객이 바꿔지는 겁니다. 돌로 치려는 자가 지옥 가고, 돌 얻어맞아야 될 자가 구원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 여자를 품에 안아주거든요. 그러면 그 여자가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위치를 바꿔놓는 그 위력, 예수님의 위력이 그 여자마저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덮쳤다는 말은 예수님의 성령이 덮쳤고 저쪽은 뭐가 덮쳤다? 이미 악령이 덮치고. 그러니까 인간들은 대리전쟁에 불과하고 지금 어느 물바가지를 쓰고 있느냐, 물바가지 덮어 쓴 그 영들의 힘들의 싸움인데 그게 역사적으로서는 국가 대 교회, 교회 대 국가의 싸움. 여기서 교회란 말은 예수님의 영이 있는 교회를 말하지, 기존 모든 교회는 어디 복속됐습니까? 짐승의 국가의 일부로서 이미 편입됐어요. 교회가 하는 짓거리가 국가 행정이나 행정법 거기서 다 가져옵니다. 목사 이런 것이 행정법에 다 따라와요. 그것은 나중에 교회 자체가 땅에 있는 거짓 양의 탈을 쓴, 요한계시록에 보면 뭐라 돼 있죠? 새끼 양이죠. 짐승에 속한 새끼양이라서 기적을 베풀고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한테 간다?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습니다. 국가 말을 잘 들으세요. 하는 그 체제가 바로 로마 체제가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체제 행정법이 지금의 모든 국가의 행정법이 됐어요. 이 국가라는 로마는 공화정입니다. 공화정이라는 것은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을 위한 나라의 최초의 공화정 이예요. 그런데 지금 세상의 모든 민주주의가 사실 어디서 나왔다? 이게 로마에서 나온 거죠. 그전에 그리스에서 있었지만 그것을 법적으로 실현시킨 것은 역사적으로 로마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법의 국가예요. 지금 우리나라는 무슨 국가? 법치 국가. 아테네에서 사실은 그걸 했거든요. 광장에서 토론하면서 그것도 노예들은 안 되고 시민들에게만 해당됐어요. 민주주의라 할 수 없죠.

자, 결국 이렇게 되면 신약에 나오는 성경말씀이 성경말씀으로 은혜 받는다는 말 정도가 아니고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될 문제로 등장하죠. 성경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해야 되고, 정치나 국가라 하는 것은 밑바탕에 뭐냐, 경제가 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분업에 의해서 생산물이 남아도니까 그 잉여분에서 자기는 노동하지 않고 잉여분을 가지고 즐기는 자들이 다른 나라를 그 힘으로 침범해서 노예로 삼아서 그들 위에 자기들은 예술, 문화, 종교, 이런 것을 즐기면서 또 다른 나라까지 침범하려는 이 짐승의 속성! 이빨로 부셔뜨리고 하는 것 다니엘 할 때 했습니다. 네 짐승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타인을 노리는 거예요. 네 가지 짐승의 특징이 항상 공격용이지, 수비용 짐승 봤습니까? 짐승이 색시입니까? ‘부끄러워라’ 이런 짐승 봤어요?

짐승이라 하는 것은 계속 뭔가 외부 것을 잡아먹어야 자기 내부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큰 교회 같아요. 계속 전도해야 되고, 계속 선교해야 되고, 계속 예배당 지어야 되고, 짐승의 속성을 갖고 있어요. 이런 사람도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212페이지 봅시다. 『반복적인 묵시적 힘의 각질은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어 올라와 십자가 사건과 만난다.』실험실에 보면 뽀글뽀글 밑에서 기포가 생겨서 뽀글뽀글 올라오죠. 저는 발꿈치 뒤의 각질로 표현했는데 목욕탕에서 긁어내면 다음에 또 올라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것이 표면이고 어느 것이 내면인지 분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간이 안 되죠. 표면이 내부의 외곽이고 그렇잖아요. 표면마저도 내부에요. 왜, 내부의 외곽일 뿐이지 역시 표면이잖아요. 밑에서 올라오니까. 그래서 이것은 우리 속성이 육의 속성이 매일같이 뽀글뽀글 올라와요. 성질도 분노도 화도 언제 또 뽀글뽀글 자꾸 올라온다니까요. 올라오면서 하는 소리가 ‘하필이면 왜 저에게. 하늘도 무심하시지.’ 맨날 이런 소리 하면서 뽀글뽀글 올라와요.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그런데 올라와서 뭐와 만난다? 바깥에 뭐가 계십니까? ‘이미 다 이루었다.’의 십자가 사건과 맞닥뜨리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짐승에 속한 사람은 분노하게 돼 있고, 성도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내가 사는 게 주님의 희생으로 살았는데 또 잊어버리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런 불평불만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이 당신이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교회 가나 봐‘ 이렇게 나오고, 이렇게 뽀글뽀글 올라오는 이런 모습은 집안의 식구가 4명이라면 물방울이 4개가 올라와요. 다섯 명이면 5개가 올라오고. 2사람이면 2개가 올라오고. 그렇게 보면 우리의 한 개의 한 개의 개인은 마치 주님이 만들어 놓은 수족관 같아. 어항, 수조, 발포 산이라 합니까? 물 부면 부글부글 끓듯이. 항상 우리는 뭔가 끓고 있어요. 뭐가 끓고 있는가? 짐승 때문이 아니고 왜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나한테 얼마나 혜택을 주느냐 하는 그것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짐승이란 눈에 안 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볼뿐인데 보이는 것의 극치가 뭐냐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국가 이런 겁니다. 나를 지키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이상적인 가정, 이상적인 아내, 남편, 이상적인 자식 이런 거, 나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단체 이런 걸 원하죠.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일으키면서』이 묵시적 의미가 십자가 사건이 유발하죠. 그러면 만나고 그냥 헤어집니까? 아닙니다. ‘잘 만났다.’ 하고 드디어 이게 발포 산 돼서 뽀글뽀글 거품을 내면서 표면으로 올라오잖아요. 올라오면 여기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 피가 기다리잖아요. 만나면 그때 다시 내려갈 때면 ‘아이 놀래라’ 하고 다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의미를 담고 다시 이것이 우리 내부로 돌아옵니다. 돌아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을 위하여 다루어지고 있는 인간인 것을,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죠. 내가 하는 이 모든 짓이 주께서 일부러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구나. 왜, 예수님 자신만이 구세주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일부러 집어넣었구나. 뽀글뽀글 이런 식으로 일부러 몰아세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 만나서 다시 들어올 때는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다루어주시지 아니하면 저는 천국이고 뭐고 없습니다.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거죠.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실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이상적인 국가, 미국, 잘 사는 나라, 그리고 잘 사는 집, 재벌가, 이런 걸 자꾸 염두에 두는데, 그러나 묵시를 만나게 되면 주님이 피 흘리고 가신 그 발자국을 우리가 지금 따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뭐 주둥이 튀어나와서 불평불만이지만 하지만 주님께서 요 골목 갔다가 요 골목 가시면 오! 주님 발자국 있네, 저 계단으로, 마치 서울의 미아리나 봉천동의 골짜기처럼, 골목이 있고 골목이 있고, 잊어버렸다가 다시 한 번 주님의 발자국이 보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피 흘린 발자국이 지금 우리 앞에서 어떻게 떨어져서 피 자국이 남아지나 그걸 눈에 보이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그거 보이면 살은 거예요. 이제 숨 쉬어도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부자이더라도 어느새 주의 발자국과 핏자국의 소리가 안 들리고 보이지 않는다면 이건 뭔가 길을 잘못 들었어요. 빠져나가든지 그걸 진짜 답답해하신다면 성도고 그게 신나면 성도가 아니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기도하고 금식할 때가 언젠가 하면 그 주의 발자국이 안 보일 때, 피가 안 보일 때 그게 별로 안 좋아질 때 십자가가 당기지 않을 그때는 밥맛이 떨어지면서 자동금식이 돼요. 먹어도 설사가 나고 사람이 미치는 거예요. 내가 이거 신자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인가? 언제 그런 일이 있는가, 언제 주님을 잊을 때냐 하면 내 하는 기도가 응답되어 잘 될 때 그때가 위기입니다. 응답이 되어 뭐가 잘 될 때, 돈이 생겼을 때, 위기입니다. 큰일 났어요. 그럴 때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좋은 일 생길 때 그리고 주님 잊어버릴 때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주여 저를 고만 살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당하다니, 이건 나한테 합당치 아니합니다. 차라리 나를 죽이소서.’ 깨지는 것이 겁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걸 가지고 내가 왜 좋아해야 되는 이유를, 내가 왜 이걸 좋아해야 될 존재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안타까운 거예요. 스스로. 좀 전까지도 ‘주여 이거 되게 하옵소서.’ 했는데 막상 기도 응답 됐을 때 기껏 이거 가지려고 내가 주님을 이용해 먹었다는 그 자책감, 차라리 종을 죽여주옵소서. 천벌을 내려 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이용할 입장이 안 되는데 그동안 내가 헛소리 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남편이 괴롭혀서 ‘주여, 남편과 헤어지게 하옵소서.’ 그냥 헤어지지 말고 어떤 재벌 3세가 와서 200억 들고 왔을 때 기도했는데 됐을 때 내가 진짜 성도 같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지옥 갈 짓을 왜 했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런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른다 이 말이죠. 성도가 아니면 그런 건 없고 성도일 경우에만 성령께서는 십자가만 보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당신은 그렇게 복 받아도 온유하십니다.’ 한다고요. 속도 모르고. ‘그렇게 일이 잘 돼도 겸손하시네.’ 겸손티를 내는 게 아니고 우리는 지금 죽을 지경이라니까. 십자가가 안 좋아져서. 대학 합격한 게 더 좋고 십자가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 다음에 봅시다. 평소에 심판의 스케줄로 오신 묵시로 오는데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싸우는 게 아니고 심판으로 오시거든요. 그러니까 ‘인간들아, 니가 깔아놓은 게 다 짐승이 깔아놓은 건데 짐승 다루면서 너희도 함께 다루겠다.’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좋아하는 거예요. 처음에 오병이어 하고 물 위를 걸을 때는 자기들이 짐승의 위에 깔린 것을 그들이 좋고 주님도 같이 좋아하는 줄 안 거예요. 부자 되고 잘 되고 하늘나라 높은 자리 앉고, 제자들이 그곳에 갈 때는 평소의 내 생각도 ‘옳았어. 옳았어. 그래’ 했는데 막상 그걸 그렇게 해놓고 십자가 길로 가니까 베드로가 말렸잖아요. ‘주님, 그쪽 아닙니다. 우리 지금 일 잘 되고 있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팬클럽 조성돼서 지금 강남스타일처럼 노래 부르고 있는데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사탄아, 니는 니가 원하는 길, 인간들이 원하는 길, 마귀들이 원하는 길로 나를 몰아넣고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이 따로 있으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마지막에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지 목숨을 잃으면.’ 그건 장사 헛장사 한 거예요. 인생 살아도 괜히 산 게 되는 거예요.

정리해 봅시다. 사람들은 짐승을 모릅니다. 인간들만 모여서 아름다운 국가를 이루려고 애쓰는 거예요. 박근혜 뽑고, 우리끼리 살아가는 거예요. 짐승이고 예수고 필요 없어요. 우리 인간들만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똑같은 인간이 온 줄 알았죠. 랍비 등장한 줄 알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묵시적 존재로 ‘나는 하늘에서 왔다.’고 소개했잖아요. 그럴 때 그런 줄 알았죠. ‘아, 역시 우리 유대 나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병이어 행하는구나.’ 제자들도 그렇게 오해했는데 점점 주님의 공격은 이쪽만 공격한 것이 아니고 제자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할 때 제자들 생각에 이미 깔아놓은 우리 인간들의 노력으로 집대성한 문명화 된 게 아니고 예수님을 근원적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그 사탄이 짐승이 이미 인간을 자기 품에 포로 되게 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양탄자와 그러한 놀이동산의 인간들이 벌써 거기에 태어나고 살고 죽고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한 거예요.

그 안에 경제도 있고 사회, 군사, 외교, 농업, 어업, 다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되라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떠나야 될 자리에서 떠나라 하는데 그 말이 어려운 거예요. 왜냐 하면 지금 예수님하고 붙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하고 붙어 있잖아요. 예수님도 우리 자리에 와 놓고 떠나라면 어디로 떠나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먼저 떠난다. 그리고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은 너도 떠나야 돼. 안 떠나면 안 돼. 성령이 오게 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한다.” ‘그러면 주님이여 우리를 데려가 주소서‘ 하니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는데 지금 남겨 두는 이유는 바로 내가 너를 구원했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들을 아직 세상에서 버리지 않고 떠나게 않게 해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복음서의 흐름 전개를 이해하시겠죠? 묵시적 존재로서 역사적 모습으로 오니까 사람들이 처음에 오해했다니까요. ‘아! 목수의 아들.’ 그런데 이걸 오해했다는 것은 우리도 우리를 안다? 모른다? 모르죠. 우리가 악마에게 속한 것을 본인이 인정을 안 해요. ‘악마 어디 있어? 악마 있으면 나와 봐라. 악마 없는데.‘ 가짜로 귀신 들린 자만 있지 자기는 악마에 안 들렸거든요. 가장 똑똑하고 착하고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너희 아비는 악마고 독사의 새끼들이라 했으니까 제일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독사 같으면 못 배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독사의 새끼들이죠. 보나마나.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악마는 악마가 아니었고 우리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그쪽 배후에 이미 악마가 있었던 거예요. 악마는 우리 편이고 우리는 무조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악마가 다 들어주는 거예요. 예수님은 스스로 했어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그 말을 하지를 않죠. 그 말을 할 것 같으면 아예 기도를 안 하죠. 생각해 보세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 자체를 안 한다니까요. 기도 자체가 내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반드시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벌써 출발이 내 뜻에 출발점이 있는데 그 뜻을 어떻게 포기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한테만 아버지와 관련돼 있고 우리는 아버지도 없이 그저 지 고집과 오기만 아주 대단한 겁니다.

『유대 공동체는 자기를 압박하는 이방민족과 말씀을 사이에 두고, 결코 대척점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일한 목적( 권력이란 허구가 보여주는 효과=영적 지배)을 지향하면서 같이 움직일 뿐이다.』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벨론아, 너희들 권력 가지고 있지? 우리도 아마 하나님이 도와줘서 너희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질 거야.’ 권력이란 점에서 같은 패예요. ‘로마야, 언젠간 우리가 더 센 힘이 메시아가 오면 로마보다 더 큰 힘을 가져서 너희들을 보란 듯이 콧대를 꺾어버릴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이건 뭡니까? 다 같은 이야기가 돼요. 짐승에서 같이 통용되는 이야기의 주제를 논하는 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 같으면 “내가 온 것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라고 돼 있죠. 그렇잖아요. “나는 유대인의 왕이지만 이 세상의 유대인들을 동조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그러면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지.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때 ’로마 왕이여, 지금 로마에 대적하기 위해서 어떤 미친 인간이 자기가 유대나라를 해방한다고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합니다. 우리 대신 혼 좀 내주세요.‘ 그렇게 일러바쳐서 예수님을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누가 로마 압제에서 해방되고 싶습니까? 유대인 본인들이 해방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누구한테 죄를 돌렸어요? 예수님한테 억울하게 돌린 겁니다. ‘메시아가 오기만 해봐라. 너희들 로마 다 죽었어. 너희들 다 죽었어.’ 지금 유대인들이 그걸 소망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 큰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이래요. ‘진짜 당신의 하나님 말씀이 맞다면 큰 교회보다 더 큰 교회 되야지.‘라고 이야기를 해요. ’당신이 큰 교회 안 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안 도와줘서 그런 것이고, 안도와 주는 이유가 큰 교회는 진리를 외치는데 당신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속상해서 교인 몇 명 안 보내줘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를, 교회를 거론하지만 사실은 그 교인이 뭐를 원합니까? 하나님 믿고 보란 듯이 이 땅에서 크게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나님까지 빙자해서 그걸 점검하려는 겁니다. 돌이 떡 되게 되고 사람이 인기 얻고 세상 권력 얻겠다는 것, 이게 대표적인 짐승 들린 자이지, 더 이상 뭐 머리가 뿔나야 됩니까? 짐승 돼야 되겠어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진보 계열에 있는 정당들이 북한을 그렇게 부러워하는 거예요. 북한은 미국 없이도 잘 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미국 없이는 못 살잖아요. 그러니까 민족적 자긍심만큼은 북한을 알아줘야 된다. 참, 짐승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북한 인민이 못돼서 환장한 것이 아니고 김일성이 못 돼서 환장한 인간 이예요. 북한이 부러운 것은 북한의 굶어죽는 인민이 부러운 게 아니고 굶어죽게 만듦으로서 그 인민을 착취하는 그 지도자급을 남한에서 달성하지 못한 그 한 맺힘을 북한에 가서 해보겠다는 그런 정치적 야망입니다. 그런 인간만이 짐승에서 가장 잘 다뤄지는 짐승의 모습으로 주께서는 인도해 주십니다. 될 사람만 되는 거지, 아무나 지도자 되는 게 아닙니다. 뱀의 자손의 지도자가 지도자급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유대집권층을 악마의 자식들로 보았다. 그들은 뱀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이런 논문을 발표하면서 내가 누굴 쳐다보겠습니까? 그 당시, 신학교수들을 이야기했죠. 너희들이 똑같은 인간 이예요. 왜냐 신학교 운영 방침이 국가 정당 운영과 똑같아요. 신학교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신학교에서는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신학교 자체를 권력을 만들어서 크게 키워서 더 큰 신학교 할 때만 유능한 신학자예요. 예수, 신학 박사, 그건 다 빌미고, 권력을 쥐고 힘을 가지는 것, 마귀가 발휘하는 그 속성과 동일한 마귀의 심성을 갖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위대한 신학 교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초반부터 벌써 그들은 심정이 상하게 된 거죠.

여기서 마지막으로 어려운 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인자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잖아요. 몸으로 왔는데, 그 몸이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한다. 이게 뭐냐 하면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이렇게 누워있다고 봅시다. 예수님 몸이 누워있는데 제가 이걸 표현하기를 전 역사를 소급해서 누워있다고 그랬죠. 그러면 덩달아서 인간도 맞춰서 인간의 역사도 같이 누워있어야 되죠. 그래야 전체를 커버할 수가 있죠.

여기에 예수님이 옴으로써, 묵시적 존재가 옴으로써 이 땅도 역사도 역사를 새로 해석하면서 묵시적 안목에서 역사가 해석 받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 해석 받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묵시적 존재에서 나오는 입에서 나오는 묵시적 언어를 이야기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걸 뭐로 받아들입니까? 역사적 언어로 받아서 자꾸 핍박을 하게 하도록 배후에서 누가 누워있다? 숨어있는 악마가 숨어있는 거예요. 악마가, 마귀, 사탄이 여기 숨어서 앞에 숨어서 국가를 조정하는 겁니다. 그럼 백성들은?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나라 없이는 죽는 걸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 예수님, 호산나’ 해도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바뀌죠. 심지어 제자들도 다 가버리죠. 자기 몸은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항상 기대하는 것도 내가 이 정도는 원해요. 역사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적인 희망이 달성되는 것만 예수를 빙자해서 뭐 얻어 챙길까 그걸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내 몸은 어떻게 살아도 묵시적 안목에서 보면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짐승이 원하는 그러한 몸으로만 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예수님만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의 요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몸도 뭔가 먹어야 되고 입어야 되고 잠자야 되고, 우리가 생각할 때는 말씀 생각하지만 몸이 피곤하면 그저 몸이나 편했으면 하는 그 마음뿐인 것을 주께서 잘 아시고, 우리 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살려내셨사오니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