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나 대신에

아빠와 함께 2020. 12. 1. 07:06

광주강의20201127a 마가복음15장 40-41절(나 대신에)-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40절-41절 말씀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시킨 주도세력들은 전부다 남성들이겠죠. 남성들은 율법에 의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고 율법의 세계 안에서 여성의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거의 남성들이 주도해서 벌인 예수님의 처형 현장 중심부에서 빠져 있는 사람, 이것을 주변부라고 하는데 주변부는 중심부와 대비가 되겠죠. 주변부,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갖다버린 분이 있죠. 중심부에서 “꺼져라”하는 식으로 처리한 겁니다.

유대사회가 이렇게 있다면 여기(가운데) 중심부, 핵심부가 있겠죠. 핵심부 주변에 주변부가 있는데 성전 자체도 그런 구분이 있어요. 여성의 뜰, 남성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이렇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핵심부에서 최종 처리해서 예수님을 떨궈 내버린 겁니다. 그럼 이 핵심부는 예수님을 제거한 세력권이 되겠죠, 세력자들이 되겠죠.

여기(핵심부)에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다가서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다가설 때에 그 여성들이 뭐를 생각해서 다가섰느냐. 두 개의 중심부를 생각하는 겁니다. 현재 실권을 갖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거기에서 정치적으로 밀려버린 살해당한 예수님. 여기에 여성들이 모여 있습니다. 주변부가 이렇게(예수님께로) 가는 거예요.

이렇게 가게 되면 여기(중심부)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권력으로 장악되어 있습니다. 그럼 중심부에서 떨궈져나간 예수님은 권력 제로, 권력이 전혀 없는 분이 되겠습니다. 권력이 없으니까 이 주변부에 있는 여성들이 권력 없는 자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겠죠. 자기도 주변부니까, 권력에서 멀리 있는 위치니까 뭔가 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변부로 밀린 본인들이나 주변부에서 아예 퇴출당한 예수님의 공통점은 기존의 이 세상 권력으로부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자들이라는 그런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갔다는 이 이야기를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기존의 이런 세상, 기존의 이 세상에서는 더 살아도 소용없다. 이 세상에서는 계속 살아봐야 의미 없다. 소용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심부로부터 배척받을 때 고난 받았죠.

기존의 중심부, 주변부로 굳어져 있는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희망 같은 것은 없는 거죠.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이들은 갈릴리부터 따라왔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잘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본인들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더 이상 없죠. 더 살아도 소용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잘릴 때 우리는 이걸 고난이라 하잖아요, 고난.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자체가 권력이 없으니까 텅 빈 공백의 상태이고 세상 사람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그 빈자리를 여성들은 찾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은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아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느냐.”

인간의 자아는, 자아를 뚫으려고 한다면 자아는 자꾸 주춤주춤 물러가기 때문에 자아를 뚫을 수가 없어요. 자아를 뚫었다고 했지만 이미 자아가 뚫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주춤 뒤로 물러가있기 때문에 처음에 자아가 있던 지점은 뚫었지만 그 지점에 가니까 자아는 저만치 또 물러서가지고 “여기까지 뚫어야 뚫은 거야”라고 자꾸 부르는 것 같죠.

그러니 인간의 자아는 뚫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뚫리지 않지만 인간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자아가 뚫고 나면 거기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가, 그게 이제 궁금한 거예요. 내가 없는 세계. 이 자아가 ‘나’거든요. 내가 없는 세계에 무슨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이것이 궁금하다는 것은 이 문제 해결 안 되면 백날 자아들이 웅성거리는 세계, 자아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코로나 걸리는 이 세계에서 더 살아도 아무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거죠. 해답이 없죠.

그런데 갈릴리에 있는 여인들은 해답이 있을 수 있다는 어떤 낌새를 얻은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추방이 됐다는 말은 이 분이 이 세상의 끝, 그 뒤에도 계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감지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받아줄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받아줄 수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 세상의 끝자락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일 수가 있는 겁니다. 또 다른 세계의 시작.

개인이 “이 자아의 끝을 보고 싶다. 자아를 뚫고 가면 뭐가 있을까”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제대로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이게 같은 말이에요. 내 뒤에 뭐가 있고, 내 앞에는 뭐가 있다. 앞에는 우리가 알잖아요, 우리가 경험한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데 내가 뚫렸을 때, 더 쉽게 말해서 내가 죽은 다음에 나는 어느 세계에 도달되어 있을 거냐. 라는 것까지 알아줘야 제대로 나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뚫어져서 관통되어서 내가 하나의 칸막이처럼 되어있는데 이게 문풍지처럼 찢어지고 난 뒤에 어떤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나를 지금 있게 한, 나를 여기 있게 만든 세계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세계를 마저 알아야 지금 내가 제대로 나에 대해서 전부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아이고, 갈 때까지 가보자.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무책임한 짓이죠, 갈 때까지 가보자 하는 것은.

칠십을 살고, 여기 팔십 가까이 사신 분도 계시지만, 팔십을 살고 구십을 살아봐야...구십 살이 됐다 칩시다. 그러면 구십 살 되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테스 형, 구십까지 사니 어떻습니까? 나도 모르지. 구십 한 살 안 되었으니까 나도 모르지. 그럼 구십 한 살 되면 테스 형 아십니까. 내가 안 죽어봐서 모르지. 죽어봤을 때 어떻게 되는가. 그런 질문을 근원적으로 인간은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살아있는, 이 중심부/주변부 이러한 구조는 산 사람들의 세계 아닙니까. 산 사람들의 세계에서 특이하게 배척받았다. 죽음에 넘기웠을 때에 그 분이 죽었으니까 그 분의 자리는 빈 자리가 되죠. 공백이죠. 공백의 자리, 고난 받고 공백의 자리에 갔을 때 만약에 여성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애틋해하면서 그분의 죽으심을 잊지 못하고 그 현장까지 갔다는 말은 이것은 단순히 고난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보다 더 중요한 게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고난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고난이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낯섦, 생소함. 생소하다. 생소한 세계에요, 상상도 못한 세계. 여기 중심부에 있는 사람이 다 똑똑한 사람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 서울 법대 나온 사람들이에요. 인간이 아는 지식을 농축해서 누적해서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판단이라는 것은 인간을 대표하는 판단이죠. 인간의 지혜를 대표하는 판단이에요. 그 판단에 의해서 추방되었을 때에 인간의 대표, 이것은 자아의 대표죠, 자아를 대표하는 이것들이 추방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자아의 끝이 추방된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갈릴리에서 따라오던 여인들이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 자리까지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놀이동산에 가면 귀신의 집이라는 게 있죠. 귀신의 집이라는 걸 저는 돈이 아까워서 안 가봤습니다만, 귀신의 집이라는 게 있답니다, 놀이동산에. 사람들이 귀신의 집 갈 때에 동떨어진 세계죠. 번잡스러운, 바깥의 복잡한 그런 세계보다도 귀신의 집 가면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귀신이 나오니까 동떨어진 세계잖아요. 그 동떨어진 세계에서 이 바깥에 있는 거리에 애들, 풍선 들고 하는 그 놀이동산의 복잡한 큰 대로변에서 귀신의 집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쪽(귀신의 집 바깥) 세계는 산 사람의 세계거든요. 산 사람의 세계에서 1,2,... 숫자가 500명 왔다면 한 500명, 1500명 오는데 이 귀신의 집에서는 이 숫자가 다 의미가 없어집니다.

지금 여기 여성이 몇 명입니까.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또 살로메 세 명이잖아요, 세 명. 이 세 명이 여기 귀신의 집에 들어가 버리면 3이라는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고 전부다 한 세트가 돼요, 한 세트가 됩니다. 그러면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 죽은 자의 집이죠, 죽은 자의 세계. 산 사람 세계에서 보는 프레임,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프레임, 액자, 틀, 이 프레임을 이쪽 귀신의 집에서는 산 사람끼리의 프레임은 다 버려야 돼요. 새로운 프레임을 부여받는 겁니다, 새로운 프레임을.

그러니 이 귀신의 집은 세상의 마지막 페이지, 이 세상의 마지막 페이지죠.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시대에 가장 배제당하는 여성들이 이 마지막 페이지로 다가서고 있어요. 그러면 이 여성들이 가는 곳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뒤따라가는 겁니다. 귀신의 집으로. 개개인 자아라는 것은 다 희석되고 소멸되는 세계. 여성들이 인도하는 거예요. 그 시대에 십자가의 사건으로 우르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선도해서 지금 앞장세워 가는 거예요.

여성들은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존의 권력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권세를 잡아서 편하게 살겠다는 그런 생각이 없고 나의 한도, 자아의 한도, 내 뒤에 내가 끊어지고 내가 마지막 페이지라면 내 마지막 페이지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예수님 죽으시는 그 현장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실 때 여성들이 있었다는 말은, 여성들 입장에서 십자가에 다가서는 것이 되지만 우리 주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의미가 여성들을 통해서 일부 개방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여성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십자가가 고정된 어떤 지점만의 십자가, 한 시점의 사건으로의 십자가에서 벗어나서 이 여성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에게 십자가가 개방되었다. 자아의 끝자락, 그 뒤의 세계를 주님 쪽에서 허용하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특히 이 막달라 마리아 같은 경우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면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 제 이스라엘 방문 사진에 보면 갈릴리 호숫가에 영어로 ‘막달라’ 간판 커다랗게 지어 놨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여기서 살았다고 되어있어요. 아주 유명하죠. 이스라엘에서는 장사 아주 잘하고 있죠.

그 일곱 귀신 나간 막달라 마리아. 귀신의 집이 고향인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 들렸는데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럼 이 세상을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제가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이라고 이렇게 음침한 곳으로 설정했지만 따지고 보게 되면 멀쩡하다고 하는 이쪽이 귀신의 집이 되고 귀신에서 풀려난 막달라 마리아가 앞장서서 뭔가 우리 성경 보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는 곳, 그 곳은 멀쩡하다는 사람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 권세와 권력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이 있는 사람은 갈 수 없는 그 곳, 그 곳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권세와 권력은 인간의 자아성을 더욱더 강화시키고 돈독히 하는 겁니다. 더 단단하게 만들죠. 인간의 자아를 설명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하나는 뭐냐 하면 과거의 집합체.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의 집합체 또는 과거 기억의 집합체, 이런 식으로 설명되고요. 그리고 경제적 입장에서는 'property'라 해서 소유 또는 소유성, 소유된 재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재산이 없으면 자아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적으로 보면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 기억의 집합체가 자아에요. 내가 살아오면서 기억나는 것 있잖아요. 기억나는 것을 다 모아놓으면 그게 자아가 되는 겁니다. 만약 차사고 나서 두뇌의 일부가 다쳐서 갑자기 기억이 날아가 버리면 그 가운데 있었던 자아가 다 날아가 버리죠.

그래서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의 집합체, 모아놓은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과거의 집합체, 기억이라 하는 것은 자아가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죠. 기억이니까 실체가 아니고 그냥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이미지가 우리와 무관한 게 아니에요. 옛날 내가 살던 동네에 가면 갑자기 어릴 때 내 모습이 생각나고 기억나지 않았던 장소들이, 그 때 뛰놀던 곳이, 기억이니까, 기억의 다발이니까, 기억의 다발이 적당하네요, 기억의 다발이 자아니까 다시 ‘나’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기억의 다발이니까 자아는 다른 타인과 일치됩니까, 일치가 되지 않습니까? 절대로 일치되지 않죠. 본인만의 기억이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아요. 이거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교회 다니면서 그 때 일곱 살 때 예수의 기억, 일곱 살 때 들었던 설교, 아홉 살 때 들었던 것, 이런 기억들이 집대성되어서 예수님이라고 규정해버리거든요. 그러니 이것은 나 혼자 알고 있는 예수기 때문에 이 예수는 ‘나만의 예수’가 되는 거예요.

한번 적어볼게요. 나만의 예수. 나만의 예수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는 나의 것’이 되죠. 예수는 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엉터리 예수죠. “너희는 예수님의 것이다” 할 때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이게 틀린 말입니다. 정답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것은 예수님의 것이다” 이게 정답이거든요. 아니 몸이고 뭐고 내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2005년도 8월 22일 여기 광주강의에 나왔던 녹취된 내용이에요. 아까 책상 앉아서 보니까 이게 나왔데요. 고린도전서 강의할 때 나온 거예요. 너희는 예수의 것이 되어버리면 예수는 나의 것이 되어버려요. 기억 속에, 내가 일곱 살 때부터 주일학교 갔는데 주일학교 때 들었던 선생님, 목사님 설교, 거기서 들었던 이미지, 예수라는 이미지를 긁어모아서 예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가상 이미지가 되고 실체는 누가 돼요? 내가 실체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에게서 나왔던 이미지, 내가 투사한 이미지, 내가 가상으로 만들어놓은 나의 이미지가 되는 거예요. 나의 이미지가 예수가 되면 이것은 완전히 엉터리죠.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온 여성들도 갈릴리에서부터 따라다녔으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기억 속에 있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있어요.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게 아니고 예수님의 무얼 만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만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건을 만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산 사람이 자기가 죽지 않으면서 산 채로 예수님의 세계를 만난다는 게, 이게 가능합니까?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거기 글로바라는 사람이 있어요. 24장 18절에 글로바가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화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 이름이 글로바라는 거예요. 이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지금 죽은 채로 만났습니까, 산 채로 만났습니까? 산 채로 만나죠. 산 채로 죽음의 세계를 만나는 거예요.

보통 죽어야 죽음의 세계를 만나잖아요.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은 구원의 기회, 시효가 끝나버렸어요. 죽고 난 뒤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 때는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구원이라는 것은 산 채로 주님을 만나야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산 채로.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미리 주는 거예요, 우리 죽기 전에. 죽기 전에 성령주시는 이유가.

마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셨잖아요. 시작이 뭐냐 하면 여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현장에 가서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세상에서 감당이 안 되어서 강제로 추방시킨 그 분의 죽음을 보러, 그 분의 살아있음을 보는 게 아니고 그 분의 죽음을 보러 가는 거예요. 이런 마음의 자세가 장차 성도에게 성령이 왔을 때에 마음 자세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죽었던 예수님이 진짜 지금 나를 있게 하는 나의 세계라면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예수님의 세계에 비해서 죽음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접할 수 있다는 이 아이디어를, 이런 생각을 세 명의 여성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죽은 예수를 만나는 거예요. 나중에 사도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죽은 하나님이죠. 죽은 하나님이 되지만 이 여성들은 아직 성령 안 받았으니까 거기까지는 모르고 어째든 간에 세상이 감당 못할 분이 죽으셨다면 그 분이 가신 그 죽음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진짜 세계라는 겁니다, 이 세 명의 여인에 의하면. 진짜 세계는 살아서 권력 쥐고 까부는 이 세계가 아니라. 주변부에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 여인이 기존의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했지만 자기는 권력이 없으니까, 소유한 게 없으니까 굳이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 없죠.

두 번째, property, 인간이 소유가 있을 때 자아가 있는 겁니다. 소유가 그 자아를 대변해주는 거예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 자아라는 것이 살아도 죽은 모습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그래서 소유, 소유물, 소유재산 이것이 자아를 대표한다면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이 세상 인간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생산과 소비, 수입과 지출을 적당하게 균형 맞추는 것. 월 300들어오면 200만원 쓰고 100만원 저축하고, 있잖아요.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수입은 100만원인데 200만원 쓰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property, 자기 소유가 고갈되면 내가 죽은 자가 되잖아요.

인간들은 소유, 힘, 권세, 이것이 있어줘야 자아가 생성되는 겁니다. 하나의 자아는 정신적으로 기억의 다발을 자아라 하고 또 하나는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적으로 자아라 하는 것은 소유가 있어야 돼요.

그럼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이 여성들은 균형 잡힌 삶, 생산과 소비가 유지되는 균형 잡힌 삶일까요, 아니면 화목일까요? 화목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거기에 대한 평화. 진노하심에 대한 해결책이 화목이잖아요. 로마서 3장에 나오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 했죠. 그런데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전부다 균형 잡힌 삶을 원해요. 이것은 이 여성들처럼 자아의 끝을 보는 게 아니고 그냥 자아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자아만. 계속 자아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러니 참 어리석은 거죠.

그 자아가 뚫렸을 때에 그 뒤에 어떤 세계가 있느냐는 것은 귀신 들렸다가 풀려나온 막달라 마리아의 주도 하에 움직이는 이 여성들은, 자아는 1,2,3,4...가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죽음 앞에서는 ‘1,2,3 우리는 세 명 갔다’가 의미 없어요. 새로운 프레임, 그 죽음 앞에 우리 세 쪽은 전부다 하나가 돼요. 하나가 된다고요, 동질이 돼요, 동질이.

네가 어떻게 살았든 너는 어느 동네 살았고 네 고향이 어디든 관계없이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는 전부다 우리는 귀신 들렸다가 귀신에서 떠난, 구원받은 그러한 새로운 동질, 하나의 동질이 된다고요. 너, 나의 구분, 우리가 설정했던 나와 남이라는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의 분류는 의미 없다.” 이 말입니다.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 너는 북한 사람이냐 남한 사람이냐, 너는 좌파냐 우파냐 이 자체 분류가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는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 의미가 없어요,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는. 복음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이 모두는, 죽음에 합류하는 자들은 이미 분류 당할 이유가 없어요. 그들은 자기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는 분류에 자꾸 신경 쓰는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이렇게 복음으로 살지만 복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면... 복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때가 있잖아요. 사실 성도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간혹 복음이 생각 안 날 때가 있어요. 목욕탕 들어갔는데 갑자기 물이 뜨거울 때, 이럴 때 “아이 뜨거워라.” 이러지, “복음이 뜨거워라. 복음이 뜨겁게 하셨다.” 그런 생각 안 든다고요. 그것은 한 5초 뒤에 “아, 주님이 뜨겁게 하셨구나.” 이렇게 되지 처음에는 “아이고 뜨거워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고구마 삶았는데 왜 이리 맛이 없어.” 이것은 복음 생각 안 한거잖아요.

그래서 기대가 죄죠. 뭔가 기대하면 죄가 돼요. 자꾸 마귀는 관심사를 복음을 빼버리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은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는 뭘 하느냐 하면 분류를 해요. 내가 선한 쪽인지, 내가 지금 제대로 잘 살고 있는 쪽에 속하는지, 내가 훌륭한지, 내가 악한 고기인지 선한 고기인지, 양인지 염소인지 자꾸 본인을 분류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자아가 구멍 뚫린 게 아니고, 자아 뒤편에 가있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자아에 목매는, 자아를 어떻게 처리해볼까, 자아를 제대로 어떻게 간수해볼까 하는 자기 자아 간수에 몰두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아까 얘기한 자기의 기억이, 쌓아온 평생이 분류 당하고 또 자기가 분류 당한대로 분류해왔던 그런 인생을 보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류하는 세계가 친숙한 세계죠. 그런데 자아가 구멍 뚫린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낯섦의 세계. 아주 낯설어요. 친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벌벌 떨죠. 벌벌 떤다고요. “Dangerous~" 마이클잭슨 춤추는 것처럼 자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위험이라는 말 자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반대로 쓰고 있어요. 내가 망치니까 위험한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나는 당연히 망치기 때문에 내가 망치는 것을 가지고 dangerous, 위험하다고 하면 안돼요. 주님 세계에서 내가 이런데, 복음 빠진 이 세상에서 좋게, 괜찮게 분류된 자아로 규정하려는 이게 위험한 거죠.

이걸 아주 쉽게 이해하려고 하면, 저는 제목으로 괜찮지 싶은데요, 오늘 제목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고, <계곡의 수영장>. 잘 만들어진 수영장 말고 계곡의 수영장, 지리산 계곡. 무허가 상인들이 지 마음대로 수영장 만들어놓고 구청의 허락도 없이 평상 펴놓고 돈 받아먹고 백숙 팔아먹고 그런 거 있잖아요, 계곡의 수영장. 계곡의 수영장은 어설프게 비닐로 떡 막아놓고 아이들 빠지지 말라고 한 1m50cm 해놓고 계곡에다가 간이 수영장 만들어 놓는 거예요. 간이 수영장에 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애들 들어가고 자기도 들어가고 해가지고 돈 한 만원 주고 백숙도 먹고 여기서 논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간이 수영장에 있으면서 이 물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지는 아무도 관심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것(계곡의 수영장)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하죠. 현실은 계곡의 수영장 같은 거예요. 이 현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현실이 어떻게 나중에 망가지는지 아무 관심이 없어요. 그저 이 현실 속에서 자아의 집단에서 권력 찾기, 돈 찾기에 따라서 인간을 분류시키고 못난 놈, 인생 잘난 놈 이렇게 분류하는데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이 속에서 뭘 느꼈느냐 하면 이게 바로 귀신들린 존재다. 막달라 마리아 입장에서는 이게 귀신들린 존재에요. 자기가 이런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귀신으로부터 놓였기 때문에 갈릴리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과거가 보이는 거예요, 계곡의 수영장에서. 이게 어디서 흘러들어옵니까?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흘러 들어와서 예수님의 심판대로 빠지는 거예요. 이 수영장 안의 내부가 얼마나 오인되었으면, 모든 게 착각 속에 있었으면 예수님을 감당 못하는 거예요. 이 현실이 다 인줄 알고.

그래서 계곡의 수영장, 이 현실이요. 수영장을 현실이라고 할 때 소위 일반 사람들은 여기서 돈 벌고 재미나게 우리 아이들 행복하고 우리 가정이 행복하면 최고지 뭐. 나는 임영웅이나 들을란다. 뭐 이래가지고 살면 그만이지만 소위 공부깨나 했던 철학자들은 여기서 뭘 보느냐 하면 ‘시간의 흐름’을 알아요.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여기서 한 팔십, 구십 살면 나중에 죽죠. 어린애가 죽는다는 말은 그동안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시간을 당해내지 못하는 겁니다. 시간에 다 쭈글쭈글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철학자들은 ‘시간의 멈춤’을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시간이 멈춰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 때 진리가 나온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SF드라마 같은데 보면 나와요. 전지현이 미남배우와 스위스마을에서 촬영한 거 있는데, 400년 전의 어떤 남자를 만났을 때 거기서 둘이 만나는 것만 움직이고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전부다 정지가 되는, stop되는 장면이 있잖아요. <별에서 온 그대>라는 그 드라마 보면 만나는 순간은 모든 게 정지되고 그것만 보여요.

그래서 이 철학자들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그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걸 stop시키고 모든 원인의 원인이 되는, 궁극적인,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그 진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과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원천의 원천. 그런데 문제는 어떤 특정, 영원한 것을 모델로 정했으면 모델이 가만히 있으면 그걸 그림으로 그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모델이 막 뛰어다닌다면? 진리를 얻고자 하는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양심이라는 것, 도덕이라는 것, 칸트는 이걸 진리라 여기고 이걸 찾으려고 했거든요. 인간 속에 양심이 있고 인간 속에 도덕이 있다. 인간 속에 별처럼 영원한 게 있다. 그런데 이게 시대에 따라서 양심이고 도덕이고 윤리고 다 변해요. 시대에 따라서 문화에 따라서 문명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그래서 요즘에는 인간의 자아를 영원한 것으로 하려 하는데 이 자아를 정신분석학에서 조사해보니까 ‘미지의 a’라고 하는데 미지의 자아가 따로 있고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가짜 자아인데 이 가짜 자아를 상상계라 합니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를 남들에게 자꾸 보이는 것과 동반해서 본인도 모르는 진짜를 자꾸 뒤로 빼는 거예요. 빼면서 이 자아가 뭔지를 본인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럼 과학자들은 뭐냐. 과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진리는 두뇌 세포의 활동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이미지나 형상,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두뇌에서 나왔다. 그러면 내가 슬프다. 슬프려고 하면 두뇌에다가 약물 주입하면 기쁘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과학자들이 이걸 연구하면서 자기들도 나가 떨어졌어요. 왜냐하면 왜 이 약물이 슬픈 감정을 기쁘게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약품 중 어느 하나가 딱 맞아떨어지면 되는데 왜 그런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왜 그런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것을 양자물리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것은 관찰하는 시선이 진리 사태를 망쳤다는 겁니다. “한번 볼까” 하고 보는 순간 관찰되는 대상의 입자가 “나 너네 말 안 들어. 삐쳤어.” 이게 불확정성 원리에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요게 입자야, 파동이야?” 보는 순간 입자 보여주고 싶으면 입자 보여주고 파동 보여주고 싶으면 파동 보여주니까 도대체 불확정. 진리는 영원히 미궁에 빠진 겁니다.

아, 그냥 써먹기만 하자. 써먹기만 하는데 진리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라고 할 인간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르잖아요. 알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이 일곱 귀신 들렸어요. 도대체 자아가 뭔지를 계속 파보는 거예요. 파보면 악마가 만든 자아가 계속 뒤로 물러가면서 완전히 귀신의 집이에요. “이리로 오너라~이리로 오너라” 네가 아무리 공부하면 할수록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참 이런 경우가... 복음을 파헤치겠다고, 십자가가 뭔지 연구하겠다고 성경 들여다보는 사람들, 백날 들여다봐도 알겠다는 본인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진리는 그들의 구미를 맞춰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에 개혁주의 <다니엘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 논문 할 때 그 때 그 논문의 제일 앞부분 서론, 영문 초록 한번 보세요. 성경은 우리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을 막습니다. 거기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분노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오목사님도 같이 분노했고. 초록 올려놨어요, 십자가마을에 제가 올려놨죠. 하나님은 당신들이 접근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것은 뭐냐. 주님 쪽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없으면 인간이 이성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은 진리를 내놓지 않습니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일곱 귀신이 나간 자만이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마르크스가 하는 이야기인데,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교환행위이다. 무엇을 교환하느냐 하면 나를 가치 있게 하도록 항상 바꿔치기하는 교환의 세월, 이게 뭐냐 하면 인생입니다. 저 남자하고 사는 것 말고 갈아탈까. 내가 저 남자말고 다른 남자하고 있으면 더 가치 있을 건데. 항상 교체를 생각하는 거예요. 바꿔치기를 생각하는 거예요, 항상.

시장에 간다. 시장에 왜 갑니까? 바꿔치기하려고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농기구 만드는 작은 회사를 만든다. 농기구를 만드는 작은 회사해서 돈을 벌죠. 그 돈 가지고 마트에 가서 만두를 산다. 이게 뭡니까? 뭐 한 거예요? 교환하는 거예요. 집에서 삽 뜯어먹으려고 하면 이빨 나가서 안 되잖아요. 삽 뜯어먹어도 배도 안 부르고 굶어죽죠. 그러니까 삽을 마트에 가서 만두나 쌀로 바꾸죠. 이게 교환이에요.

인간은 늘 바꿔칠 준비하는 겁니다. 이게 수요일에 얘기한 것처럼, 담요 펴놓고 화투패가 돌아가는데 어떻게 거기서 발을 뺍니까. 어떻게 발을 빼요. 삼성전자 빼가지고 LG전자로 바꿀까. 맨날 이 생각하고 있는데요. 주식 이거해서 이걸로 바꾸고. 1% 정기예금 빼서 펀드 넣을까. 맨날 이런 생각하잖아요. 포트폴리오, 여러 가지 운빨이 분산되면 어느 하나도 폭삭 망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아이디어. 전부다 누굴 가치 있게 한다? 나를 가치 있게 해서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정도 가치 있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어요, 영원히 미지입니까? 영원히 본인을 모르는 거예요. 아무리 죽을 둥 살 둥 살아보려고 해도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자기 가치를 모른다고요. 이 가치를 어디서 바꾸느냐 하면 같이 살아있는 인간들끼리 남의 손에 있는 괜찮은 것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하고 두 명의 여인은 무엇하고 바꿉니까? 자아와 뭐와 바꿔요? 예수님의 죽음과 바꿔버리잖아요. 그것은 본인이 바꾼 게 아니에요. 십자가가 그 여인에게 흘러 들어와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이상 바꿀 필요도 없이 확정된 진리체제로. 진리체제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습니다. 그 죽음 안에 있는 것을, 이 세 명의 여인은 살아있는 채로 지금 예수님의 죽음, 자아의 원천을 계곡 수영장에 물 들어오는 그 장소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보고 뒤에 따라오는 거예요. 코로나 이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코로나 걸렸다, 안 걸렸다 그런 분류하지 말고 아예 그런 분류조차 의미가 없는 십자가의 죽으심에 다가서는 겁니다. 산 채로 주님의 세계를 만나게 하는 것. 이게 지금 세 명의 여인이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변부이기 때문에 별로 기대하거나 할 필요 없죠. 이 세상은 전부다 오인의 세계거든요.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오인의 세계>. 착각의 세계. 착각이라는 건 딴 얘기가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 가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오인하고 있다. 내가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존재인가. 앞에 뭐가 붙어요? ‘내’가 붙죠. 이걸 십자가가 없애버립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01127b 마가복음15장 40-41절(나 대신에)-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은 여인들이 정확히 진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정확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진리가 무엇이냐’ 할 때 흔히 십자가, 복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여인이 이야기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무엇이냐. “진리란 나를 대신하는 것”. 진리란 나를 대신한다. 나를 대신하는 거예요.

더 이상 변동하고 바꾸고 내가 나의 가치를 날마다 더 좋은 가치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서 돈 벌어가지고 그 돈으로 아파트 옮기고 더 좋은 가치로 바꿀 필요 없을 정도로, 아예 나 자체를 대신하는 분을 만나는 것, 이게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진리란 이 세상에서 추방되는 분, 이 세상이 하나가 되어서 추방한 분, 그 분이 진리가 되죠. 그 분이 바로 진리,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필히 추방되셔야 되죠. 진리가 진리답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대표하려면 이 세상에서 추방되셔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라면 성도도 예수님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야 되겠죠.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공격해서 “너도 십자가에서 죽어라” 하고 체포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포기해야 되죠. 나를 대신하는 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얼마든지 포기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포기를 안 한다면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나의 교체멤버로 사용할 수가 있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게 아니고 보다 더 가치 있는 나를 위해서 예수 믿는 수가 생긴다니까요. 예수 믿어서 뭐 어쩔 건데? 괜찮은 나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옛날에 진리가 없는, 귀신 들린 자의 행세를 또다시 계속해서 지속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런 짓을 많이 하죠. 교회 다니고 새벽기도 듣고, 라디오로 TV로. 이게 전부 뭐냐 하면 교체해서 질적으로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해버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대신한 분이 계시기에 이제는 미련 없이 나를 버려도 상관없는 거예요. 여인들이 산 채로 십자가에 갔다는 말은 예수님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세자의 편이 아니고 그 권세자에게 내침을 당한 저쪽으로 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 따라 오세요. 우리가 진리의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본인들은 그러한 의도가 없지만 주님에 의해서 이 세 명의 여인은 예수님 죽는 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 당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권력자가 무서워서 감히 그리스도하고 거리두기를 하잖아요. 그래, 괜히 예수님 옹호했다가 나만 또 잡혀간다. 그런데 주변부에 있는 이 여인은 잡아가려면 잡아가고 나는 예수님께 가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 또 하나 있어요. 여기 43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당돌히”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뭘 달라고 합니까?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예수의 시체, 그 당시 언론의 표현에 의하면 사형 당해도 마땅한 자의 시체를 달라는 거예요. 조두순의 시체를 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는 과대망상증이다. 우리 민족의 번영과 안정과 발전에 지대한 장애물이 된다. 곧 나의 장애물이다. 예수는 누구냐? 나의 장애물이다. 안 믿는 가장들 보세요. 예수 믿는다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예수는 우리 집안의 행복을 박살내는 사람이다. 내 장애물이다. 그렇게 하잖아요. 둘 다 예수 믿는다고 웃지 마세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냐, 우리 가정의 행복이냐?” 딱 물으면 어느 쪽입니까. 우리 가정을 건사해서 나중에 5년 후, 10년 후 더 가치 있는 가정으로써 바꿔치기할 수 있는 여지를 그래도 좀 남겨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 그 생각이 바로 귀신들린 자들의 생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옛날에 귀신 들릴 때 했던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죠. 사람들이 예수님을 쓰레기로 취급할 때 단호하게 “그래. 나도 쓰레기 될래.”하고 거기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진리 쪽으로 가죠. 그 분만이 나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죽었던 그 분이 살아있는 나를 대신한다면 내가 살았다는 자체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내가 살았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죽으신 예수님이 나한테 더 의미 있지,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는 나는 의미가 없어요. 내가 바라보는 곳은 내가 아니라 주님 쪽이다 이 말이죠.

마귀는 자꾸 우리로 하여금 관심사를 우리 자신에게 자꾸 쏘아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잠시 우리가 놓치는 순간 그 자리가 그냥 비어있는 게 아니에요. 확 다 메워버리죠, 메꾸죠, 그걸. 나는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확 밀려온다고요. 지금 이 행동이 나를 가치 있게 할까, 행동 안하는 게 더 가치 있을까? 갑자기 내가 주인공이 되면 뭐가 빠집니까? 대신하심. 대신하심이 누락이 되잖아요. 대신하심이 날라가 버린다고요.

자, 예수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나를 대신했다는 생각을 악마가 와서 파내버린 거예요. 그럼 나를 대신하는 사람이 없다면 여전히 내가 주인공이고 중요한 거예요. 내가 다치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아프면 안 되고 내가 가난하면 안 되고. 그게 바로 막달라 마리아 입장에서는 귀신 들린 자의 모습이에요.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사형당한 시체를 달라고 해서 뭐하려고요? 박제 할라고 하나, 뭐하려고 합니까? 여기 43절에 보니까 그는 무엇을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죠. 여기서 이러한 변화, 대신하신 분을 만났을 때 아낌없이 나를 포기하는 그 변화는 첫째 강의에서 내 자아를 감싸고 변호하고 위로하려고 하는데 자아에다가 아예 구멍을 뚫어서 나 자체가 구멍 뚫렸으니까 쓸모없는 거예요.

나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을 한번 가져보세요. 그래야 대신 있음이 부각되잖아요. 나를 대신하심이 부각된다는 말은 나는 구겨져버리고 쓸모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나의 작은 이벤트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어떤 노래가사를 제가 적어왔는데, 제 주특기 중에 하나죠, 이 노래가사가 어떻게 되는가 한번 보세요. 노래가사를 보세요.

당신
김정수

내 품에 안기어 곤히 잠든 그대여
어느 덧 그대 눈가에도 주름이 졌네
내 가슴에 묻혀 꿈을 꾸는 그대여
야위어진 그댈 바라보니 눈물에 솟네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마디 원망도 않은 채 긴 세월을 보냈지
나 맹세하리라 고생 많은 당신께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마디 원망도 않은 채 긴 세월을 보냈지
나 맹세하리라 고생 많은 당신께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

라고 옆에 있는 남편이 아내보고 이렇게 노래할 때, 아내가 볼펜 들고 이걸 구멍 뚫어버리는 거예요. 구멍 뚫려야 이게 이벤트인데. 나는 이런 여자를 포기했거든. 이렇게 남편한테 애절한 애정공세 받는 이 여자를. 이게 자아가 찢어지는 순간이에요, 자아가. 자아가 찢어지는 순간이에요. 만약에 이 여인이 이 가사처럼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한 사람이에요. 이거 귀신 들린 거예요. 이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이게 팍 뚫어졌어야 됐는데...어째든 이게 찢어졌어요. 이런 나를 잊어주세요. 남한테 사랑받기 원하는 나를 잊어주세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유행가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시겠지요. 바로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그런 가사를 딱 불러주게 되면 그래, 저게 내가 되고 싶은 나였어! 갑자기 복음은 사라지고 복음은 없어지고 보다 가치 있는, 남편한테 사랑 안 받던 내가 사랑받는 나로 교환, 교체될 생각하는 겁니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있잖아요, 김목경이 불렀던. 가사 한번 들어보세요. 아내가 죽었던 모양이죠. 죽었는데 남편이 후회해가지고 당신을 이제 떠나보내리라. 임영웅이 노래 부르면 눈물 흘리고 훌쩍훌쩍해요. 그리고 또 임영웅이 <바램>이라는 노래 부르면 두 손 모아서 ‘사랑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입니다’하면 흑흑...

이게 뭔가 본인을 건사하고 곱게 유지하려고 하면서 십자가를 알려고 하면 십자가는 자꾸 도망을 가는 거예요. 뚫어져야 너 대신인데 우리는 너 대신이 아니고 나는 그대로 있고 여기다가 덮치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포장하려 하고 예수님의 복음으로 포장해서 가치 있는 나로 바꿔치기하려고 시도하면서 성경을 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성령을 안 받으면. 성령 안 받고 악령 들려버리면 맨날 이런 식이에요. 그래놓고 뭐 칠십, 팔십 살았다, 구십 살았다, 백 살았다 그러면 뭐 합니까. 세 살 때 하고 똑같은데요. 어릴 때부터 똑같이 달라진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죽으신, 이미 죽었다는 십자가 현장을 끝까지 찾아가는 것은 결국 이런 이야기에요. “아무 문제없다.”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합류된 사람의 특징은 인생에 대해서 아~무 문제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럼 자기는? 나는? 있는 둥 없는 둥. 나는 있는 둥 없는 둥. 이걸 쉽게 말하면 아까 처음에 말씀하셨죠. 멍청한 나. 되게 편해. 사모님이 고백했잖아요, 되게 편하다고. 멍청해. 아무것도 몰라. 이걸 두 자로 이야기하면 ‘허당’. 본인 딴에는 되게 똑똑한데 사기 당하고 보이스피싱 당하고 허당이에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내요.

자 그렇다면 요셉은 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려고 하는가. 요셉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세상은 비어있는 곳이 아니다.” 무엇으로 꽉 채워져 있는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사건이 새로운 현실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거예요. 모든 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흘러나오는 힘으로 꽉 차있다는 것을 요셉이 알게 된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하늘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 나라가 자기의 본색을 다 보여주고 여기서 손 털고 나가야 되니까 그런 겁니다. 이 세상의 끝자락이 되어야, 이게 구약에 있는 선지자의 종말 아닙니까, 이 세상의 끝자락이 될 때 비로소 등장하는 그 나라여야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를 했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

천국은 뭐냐. 이 세상이 어떤 절차를 거쳐야 돼요? 이 세상 자체가 허망하다는 것. 그것을 분명히 하고 난 뒤에 하늘나라가, 심판의 나라가 오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그 세상나라가 왜 허망한지를 알아야 되겠죠. 우리가 이 세상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그걸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나는 왜 아무것도 아닌가. 날마다 제대로 된 내가 되려고 애쓰는 이 행동과 이 시도가 왜 아무것도 아니고 헛짓인가, 헛발짓인가, 허구냐.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절하게도 이 세상을 헛되게 만든 요소들을 주님 쪽에서 다 끌어 모았어요. 수사극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경찰서에 귀한 다이아몬드가 있을 때 경찰서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도둑이 털기 위해서는 그 경찰서 관내에 있는 경찰들을 모조리 어떤 사건 안에 몰리게 해놓고 텅텅 비어있는 경찰서를 터는 수밖에 없죠.

예수님께서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허접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세상의 권력이 자기 쪽에 쏠리도록 그렇게 유도하신 겁니다. 다 해가지고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세상이라는 것이 이 허접스러움으로 인하여 진짜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인 것을 다 보여줌으로써, 세상 포기는 어렵고요, 뭘 포기해야 돼요? 이 세상에 속한 나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가치로 되겠다는 그 자체를 포기해야 되죠. 구멍 뚫려야 되겠죠.

이것은 우리 자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요. 아리마대 요셉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두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진짜 현실인 것을, 이끌린 사람만이 허당처럼 있는 둥 없는 둥 그리고 이 세상 문제가 전혀 문제거리가 안된다는 사실을 성도만큼은 알죠. 그러니까 굉장히 용맹하죠. 사람들 눈치 안보고 시체 달라고 하고 또는 예수님을 사형시킨 현장에 여인들이 가까이 가면서 끝까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하는 그러한 용기는 예수님 쪽에서 이미 마음 굳혔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갈릴리부터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되는 거죠. 이러한 마가복음의 기록들은 바로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신약시대에 성령 받으면 십자가의 재현이기 때문에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세상에 살면서 거기서 산 채로, 아 이거 정말 중요한 건데, ‘산 채’로 누굴 만난다? 예수님을 만난다. 어떻게 만나는가. 수요일 설교에 여호와를 찾으라 했죠. 여호와를 껴안고 막 이럽니까? 어디서 만납니까? 피에서 만나죠, 피에서. 십자가 피에서 만나는 거예요. 산 채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만나게 되면 이 피는 지식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심이죠, 피가. 이 피 흘린 분의 생명이 내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목숨을 대신하는 분이에요. 그래서 산 채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자살하면 돼요, 안돼요? 자살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죠. 산 채로 만날 수 있는데 왜 죽어서 만나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죽어서 만나봐야 이거는 끝났지 뭐.

두 번째 시간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까 내가 적었어요.

이 세상은 텅 빈 세상이 아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하는 것처럼 그냥 꽂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실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서, 가정주부의 일부터 직장 다니는 사람 모든 일에서 뭘 만날 수 있습니까? 텅 빈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힘을 만납니까? 복음의 작용을 우리는 모든 순간에 만날 수 있습니다.

애를 키우든지 젖을 준다든지 밥을 먹는다든지 밥을 짓는다든지 전기밥솥이 칙~하고 뺑뺑뺑 돌아가는 그 가운데에서도 복음의 작용과 접촉하는 거예요, 꽉 차있으니까.

꽉 차있다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이미 많이 언급된 거예요. 옛날 중세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도 사람들은 이 세상이 비어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옛날 사람들,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공기 있음을 반구의 실험으로 비로소 안다고요. 이 공간이 공기로 꽉 차있고 공기는 질소 몇%, 산소 몇%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실체가 되면 실체는 고유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기압, 공기압, 대기압이 발견된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은 텅 빈곳이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지금 천문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이 세상은 수소원자들이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요.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한번 보세요. 마스크 왜 합니까? 이 바이러스가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세균들이 엄청 많거든요. 이 세상은 뭔가 꽉 차있어요.

멀리서 보게 되면 산이 참 아름답죠. 제가 아침마다 산책하는 우리 동네, 팔공산 자락에 있는 산에 올라가보세요. 제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가본 적 있습니다. 그곳 못지않습니다. 그 산에 들어가면 도로만 있고 첩첩산중이에요. 도로 때문에 내가 접근할 수 있지만 사람이 아무도 없는 풍경을 보면 정말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 고향인 잘츠부르크,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그 배경, 그 동네 못지않아요. 정말 가을 이럴 때 보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숲이 그렇게 좋잖아요. 막상 숲에 들어가 보세요. 벌써 방해물들이 등장합니다. 벌레 달려들죠, 가시가 여기서 쏘죠. 마치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요. 전원주택이 좋다고 가죠. 전원주택의 나쁜 점은 모기, 파리, 잡초, 벌 떼. 잡초 뽑는 것은 가사노동이라고 하는데 가사노동은 임금을 주지 않는 노동이거든요. 노동해도 누가 월급을 안주는 게 가사노동이에요. 무의미한 노동이라니까요. 전원주택 껴안는 그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 되어버렸어요. 잡초는 올라오죠. 네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 그런 뜻이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나를 죽였다. 두 번째는 그 중에 나를 반기는 자들이 있어야 된다. 주님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빈 공간이 아니고 빈 역사가 아니고 빈 시간이 아니고 십자가를 꽂아버리면 이 두 가지 상황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복음적 상황이에요. 복음적 상황이라는 말은 좋은 것만 온다는 뜻이 아니고 복음을 유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사태가 한시도 거르지도 않고, 참 부지런해 성령께서, 한시도 쉬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찾아와요, 끊임없이. 내 다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네가 나를 죽였잖아. 네 자아가 나를 죽였잖아.

그렇게 되게 되면 하나님 나라는 소유가 아니죠. 하늘나라는 우리가 과정과 흐름 속에 말려들어간 겁니다. 하늘나라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도 막달라 마리아, 오늘도 막달라 마리아, 내일도 막달라 마리아. 세상에서 쫓기면서 겁내지 않고 십자가만 쳐다보는 그 모습을 우리는 매일같이 이 연극무대에서 하는 거예요. 어제라는 연극무대, 오늘이라는 연극무대, 내일이라는 연극무대. 매일같이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 또는 아리마대 요셉, 계속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걸 매일같이 과정과 흐름 속에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제가 이런 문자를 보낸 적이 있거든요. “주님께서 온종일 비천한 내 몸 안에서 수고가 많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면서 기도할 때 들판에서, 저 멀리 자그만 예배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그 가운데에서, 감자농사 짓는 농부 부부가 모자를 벗어요. 저쪽 노을 석양이 져있고(밀레의 <만종>). 모자를 벗으면서 감사기도를 할 때, 보던 사람은 오늘도 내가 일하게 해줘서 감사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주님께서 온종일 비천한 내 몸 안에서.

그러니까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온종일 감자 캐면서 자기가 일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자기는 일 안했죠. 누가 일했어요? 내 안에서, 비천한 몸 안에서 누가 비천한 일을 했습니까? 주님이 비천한 일을 해야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 된다니까. 주님만이 ‘나’가 돼요. 나는 뭐냐. it(그것)이 돼요. 사물, 기계, 물건이 되죠. 주께서 작용하는 기계가 되는 겁니다.

매트릭스 3탄에 보게 되면 돔 구멍 뚫고 기계들이 공격할 때 예수 안이 박살난 거예요, 시온성이 박살나가지고 구멍 뚫고 들어왔을 때 사람이 조종하게 되면 커다란 기계가 총을 막 쏴요. 사람은 안에서 조종하고 기계는 바깥에서 막 총 쏘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바깥에 있는 외형의 기계가 되고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온종일 비천한 몸 안에서, 하루 종일 감자 캔다고 수고가 많아요. 우리의 비천한 몸을 입으시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에요.

그 요셉이 당돌하다는 말은 관심사가 이 세상에 있다, 없다? 이 세상에서 내일은 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관심 하나도 없고 아예 자기를 포기한 거예요. 뭐로 바꿔치기했습니까? 예수님이 날 대신한 걸로 본 거예요. 이 세상에 내가 가치 있다는 자체가 나는 망하고 있는 중이니까. 이 세상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예수그리스도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권세로써 협박과 겁박을 주는 이 세상에서, 요새 전부다 겁박 아닙니까, 겁박, 협박 요새 정치판이 전부 이런 거 아닙니까, 협박하는 가운데서 굴하지 아니하고 멍청하게 등신같이, 권력이 뭐에요? 이런 식으로. 거기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주님이 날 대신했음을 현재 이 자리에서 마음껏 보여주는 겁니다. 힘없는 여인들이. 어떤 이방사람 아리마대 요셉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방인은 아니지만 이방사람이에요, 전혀 권력과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44절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여기서 빌라도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은척하고 살아났겠어요, 안 그러면 확실하게 죽고 난 뒤에 시체를 넘겨 줬겠습니까? 확실하게 죽었죠.

이것은 뭐냐 하면 ‘절단성’.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어딜 봐도 통하는 구석이 전혀 없다. 이 세상은 자아의 세계 아닙니까. 나의 프레임의 세계거든요. 나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서 늘 살피는 세계 아닙니까. 이 자아의 세계에서 자아 뒤쪽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내가 잘되려고 하는 이 자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야 되는데 어떤 경우라도 자아가 무의미하게 되는 경우는 없어요.

자아를 무의미하게 하려는 노력을 어디서 하느냐면 한 쪽은 불교에서 하고 한 쪽은 천주교에서 하고 있잖아요. 방법은 비슷해요. 둘 다 방법은 참선이죠. 또는 명상. 명상과 참선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시간의 정지.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사람들은 이걸 영원성이라 보고 영원성은 진리 그 자체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체가 잘못 된 게 참선, 명상 해봐야 밥 먹으러 나와야 되고 점점 늙어간다는 거예요. 참선하는 본인이 시간에서 정지하고 싶은데 이미 시간에 떠 밀려 가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이거 제목으로 괜찮은데...<계곡의 수영장> 너무 은유라서 말을 못하겠다만, 계곡의 수영장에서 이 시간이 계속 여기서 적용되는 거예요. 헤엄치다가 하나 둘씩 장례식장으로 관속에 묻히고 또 다른 사람 뛰어들고. 이 계곡의 현실이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들어온 곳 모르고 가는 곳 모르면 간단히 말해서 이렇게 되죠. ‘모른다’가 되죠.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그냥 모르는 거예요.

모르면 입 다물어야죠. 그런데 모르면서도 입 안 다문다고요. 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안다. 보다 가치 있는 걸로 바꾸고 싶은 이 악마의 충동, 이건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건 멈출 수가 없어요. 추미애 장관한테 네가 누구냐고 물으면 몰라요. 모르지만 윤석열을 떨쳐내야 한다는 그것만 알아요.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누구냐?”고 하면 몰라요.

거리 난전에 시장 장사하는 사람이나 포장마차 하는 사람들, 초밥 뷔페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누구냐고 하면 몰라요. 그럼 초밥 이거 얼마입니까? 하면 그건 잘 알아요. 25000원입니다. 이건 또 잘 안다고요. 그러면 그건 왜 알아야 되는가. 그 상품의 25000원이 뭡니까? 가치가 붙잖아요, 상품의 가치가 붙는다고요. 얼마를 해야 이 단가가 높은가를 늘 생각하잖아요. 단가 알아서 뭐하는데? 돈을 벌잖아요. 돈을 벌면 뭐하는데? 돈 벌면 내가 잘 되지. 네가 잘 되서 뭐할 건데? 그 다음에는 답변이 없어요. 네가 잘 되서 뭐할 건데? 행복할 건데. 그럼 행복이 뭐냐? 몰라요.

행복이 뭐냐고 물었던 사람이 있어요. 테스 형. 소크라테스가 맨날 물었던 게 그거 시비한 거예요. 행복을 이야기하니까 “행복이 뭔데?” 온 사람마다 다 쫓아다니는 거예요. 정의가 무엇인가. 온 사람 다 묻고 다니고 얼마나 귀찮게 했으면 잘라냈을까요. 그만 그만 그만! 사람들이. 아니야, 내가 그걸 알아야 되겠어. 누가 알아야 된다고? ‘내’가 알아야 되겠어.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본인을 알고 싶어서 남을 귀찮게 한 겁니다. 남자만 여자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구냐를 알고 싶어서.

그거 포기하면, 내가 누구냐는 그냥 있는 둥 없는 둥 살면 돼요. 주님이 무슨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분류되는가, 어느 쪽에 분류되는가, 그건 의미 없고 아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멍청한 사람 되자. 허당. 오늘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오인의 세계>죠.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끊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절대로 다가갈 수 없는 세계.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 그걸 어떻게 아느냐. 십자가로 보여준 겁니다. 그럼 그 당시에 여기서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간단하게만 생각해봅시다. 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극구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서 그렇게 난리를 쳤습니까? 그것은 하늘나라가 둘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양이 둘 될 수 없잖아요.

일단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죠. 이건 인간이 갈 수 있는 나라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갈 수 있는 나라라고 하늘에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은 갈 수 있는 나라, 그게 그들은 하나님 나라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 사람들보고 무슨 자식이라 했습니까? 독사의 새끼라고 했어요. 요새 같으면 명예훼손으로 걸립니다, 이거. 독사의 새끼, 뱀의 새끼다.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두 번째 하늘나라는 뭐냐. 두 번째 하늘나라는 제가 이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두 번째 하늘나라는 없어요. 없습니다. 없는데 인간이 갈 수 있는 나라에서 핍박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생기는 나라에요.

그럼 아까 했던 응용문제 해봅시다. 우리가 태어날 때 자아가 있죠.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자아라 하는 것은 무엇의 다발? 기억의 다발. 또 자아라 하는 것은 내 것, 내 소유가 있어야 그게 자아다. 자아가 어렵습니까? 그럼 나. 내가 속한 나라는 뭡니까? 인간이 갈 수 있는 첫 번째 하늘나라에 속하겠죠. 그러니까 내가 누굴 핍박해야 돼요? 내가 나를 핍박하지 않으려 하고, 내가 나를 버리지 않으려고 하고, 내가 나의 가치를 유지하게 될 경우에 그때 갈수 없는 나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건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성도에게만.

그래서 우리 육의 본성상 내 가치를 포기 못하잖아요. 포기 못할 때 그때 성령이 하늘나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오잖아요. 오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바보로 만들어버리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허당이고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뭘 할 수 있느냐면 ‘확인’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나라 가는 게 아니고 이건 아무도 못가요! 다시 강조합니다. 어느 인간도 하늘나라 못갑니다. 못 가는데 성령이 와버리면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 속했음을 확인하게 되죠.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죠. 주님의 것으로서의 주님의 것이 된다 했죠. 주님의 것으로서의 주님의 것. 그런데 주님의 것이 되게 되면, 그것 가지고 또 육신을 살게 되면 이 주님의 것이 곧장 누가 되어버립니까? ‘나’가 되어버리죠. 그럼 또 성령이 와가지고 또 이런 사태, 우리 몸이 여기 속하니까 죽을 때까지는 이 세상에 속해있으니까 단짝 돼가지고 우리는 괜찮은 분류, 또 구원받은 분류에 속했다고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또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서 주일에 했던 어려운 것 한번 해봅시다. 강둑이 이렇게 있어요. 강둑이 있고 물이 있고 또 강둑이 있는데 이 두 강둑 사이에 뭐가 흐르냐 하면 예수님의 구원 정보가 흐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여기 흐르고 있어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다시 아버지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그 정보가 흐르거든요. 이 정보는 말씀 성취 관점에서 이 정보가 흘러요.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아담 안의 강둑에서 주님의 강둑으로) 가려면, 우리가 참깨라면 우리 속에서 말씀을 끄집어냅니다. 이걸 참기름이라 했죠. 참기름을 빼내는 거예요. 그럼 주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로마서 8장 9절~11절의 말씀 같은 것, 너희 속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는 죽은 자라도 성령에 의해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준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지식으로 받고자 하잖아요. 지식으로 받고자 하면 이게 안돼요.

그 말씀이 나와야 되는데, 아까 자아의 특징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의 특징은 자꾸 지식을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소유하게 되면 전에 없을 때보다 내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생각하면 안 되는데 자꾸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내 가치를 포기 안하고 괜찮은 가치로 발전하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장 가치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고 이 악마의 세계에서는 주장했잖아요. 막달라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귀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보였죠. 귀신 들린 자가 어디서 가치 있다고 내 앞에서 하느냐. 그런 식으로 우습게보죠.

그래서 이 주도권이 성령으로 넘어가면 여기서 말씀을 끄집어낸다고요. 말씀을 끄집어 낼 때 아까 것을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첫째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거죠. 저주의 자리까지 버림받은 거죠. 이게 하나의 방향을 이루는 겁니다, 방향. 두 번째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부활 되었죠. 이것도 하나의 방향을 이루죠. 이 두 방향이 서로 반대방향이죠. 이 반대되는 두 방향이 강둑을 건너가면서 우리한테 계속 반복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도 마귀가 활동해줘야 되고 지금도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해서 조금 좋으면 좋다고 까불고 “은혜 받은 거 같아요.” 이렇게 하다가 조금 뭐하면 “나는 죽을 거 같아요. 내가 하나님을 막 방해하는 것 같아요.” 하고. 아주 Dangerous~해가지고 아주 위험해요. 이 방향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이유가 그렇게 왔다갔다 함으로써 뭐를 떨궈내느냐 하면 주도권이 ‘내가 늘 은혜를 유지해야지’ 라는 주도권자로서의 내 자격이 박탈당하는 겁니다.

대신. 제목을 바꾸고 싶다. 주님이 나를 대신하는 거예요. ‘대신’ 이게 중요한데. <나 대신에>. 그러니까 내가 가는 게 아니고 누가 가게 한다? 나에게서 참기름, 말씀을 끄집어내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때문에 우리는 껍데기로, 하나의 기계로 사용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살아생전동안에 우리를 통해서 충분하게 보여주시고 이제 보여줄 거 다 보여줬다 싶으면 이주일처럼 죽는 거예요. 뭔가 보여드릴까요? 하다가 보여준 것도 없이 죽었잖아요. 자기 폐암 걸린 것만 보여줬는데.

뭔가 보여줄 거 다 보여주고 개판인 거 다 보여 주시고 “가자,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하고 데려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이 사도바울이 말하기로는 뭐냐. 내가 약한데서 강함이라. 나는 약한데서 강함이라. 내가 약해지는 것이 은혜다. 이런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나와요 (고린도후서 12장 5절~10절). 내가 약한 데서 기뻐하노니 약한 이것이 나한테는 은혜다. 약했기 때문에 자아의 가치 추구를 할 엄두가 안 난다 이 말이죠.

몸이 아픈데 빼달라고 빼달라고 기도를 세 번 했거든요. 쉽게 예를 들면 우리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아플 때 치과에 가면 시간 아깝고 무엇보다 돈 아깝고. 또 치료받는다고 몸살 나고. 주께, “좀 쉽게 갑시다, 주님. 기도할 테니까 안 아픈 기적 줘서 나도 기적 받았다고 기적 받은 주의 종 되고 싶습니다.” 뭐 그러한, 지금보다 더 가치 있는 주의 종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고요. 기도 세 번해도 안 들어줬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너는 처음 방향으로 저주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다시 터치해줘야 그 자리에서 죄 사함이라는 게 얼마나 귀한 긍휼인지, 귀한 사랑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방향이 왔다갔다 해줘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늘 놓치지 않고 감격하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최적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적절하고 적당합니다. 최적의 상태.

끝으로 46절 봅시다.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여기서 아리마대 요셉이 사실은 예수님을 최종 처리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요셉 보기에도 예수님은 확실하게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을 뻔하고 뭐 기절한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죽었어요.

이 말은 사람이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고 예수님이 스스로 확실하게 죽음의 세계, 자기 세계에 들어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산 사람으로서는 주님의 세계를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다만 그 당시에 아리마대 요셉이나 마리아 등 세 명의 여자들은 방향이 눈에 보이는 이쪽 방향이 아니고 저쪽 방향,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쪽이 이게 바로 진실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확실하게 넣었는데 여기 47절에,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았더라” 확실하게 최종적인 증인은 뭡니까? 아까 교류 방향에서 예수님은 확실하게 죽었더라. “예수님은 확실하게 죽었다.” 같은 말은 “나는 확실하게 이미 죽었다.”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의 나를 포기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나를 포기하고 육신은 여기 있지만 나의 ‘나’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 쪽에 내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확실하게 죽었다는 말은 내가 확실하게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확실하게 죽었다는 방향이 끝입니까? 그 뒤에 빈 무덤 나오죠. 안식일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보니까 무덤이 비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방향이 저주 방향에서 도로 부활의 방향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같은 말이 “나는 확실하게 살았다.”가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있으면 이미 산 사람이에요.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성령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에요. 인간은 늙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늙은 거예요. 이미 죽은 거예요. 죽어가는 게 아닙니다. 이미 죽은 거고 그걸 반대로 바꾸면 이미 성령이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자가 부활되어 가는 자가 아니라 이미 산 자에요. 첫째 부활이죠. 이미 산 자, 부활된 자가 돼요. 둘째 부활은 남아있지만.

둘째 부활은 뭐냐 하면 옷 갈아입는 시간이에요, 옷 갈아입는 시간. 흙에서 영적으로 옷 갈아입는 시간. 그걸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 보세요. 확실하게 시체가 들어갔는데 사흘 뒤에 여기 확실하게 시체가 없어요. 그 시체가 살아났어요. 기절초풍할 지경이죠. 예수님보고 기절초풍하지 말고 저와 여러분 자신보고 기절초풍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믿다니. 이건 내가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제목 <기절초풍>.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과 조작과 오인과 가짜만이 있는 세계인 것을 저희들이 모르고 거기서 남한테 출세했노라, 잘났노라, 괜찮은 사람으로 분류받기를 원했던 저희들입니다. 정말 사람의 능력으로 믿을 수 없는 기절초풍할 이 내용을 저희들이 담대하고 과감하고 자신만만하게 자랑스러워하면서 십자가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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