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7a 제주특강 : 요한계시록-사라질 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요한계시록 하겠습니다. 네 시간에 걸쳐서 할 예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특이한 점은 기존의 역사가 그대로 있는 바탕 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덮쳐버렸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돼요. 한 마디로 하면, “영문도 모르게” 영문도 모른 채 성도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최곱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것에 휩쓸려나갈 때 계시라는 홍수에 말려들어가는 게 돼요. 매 삶이 영문도 몰라야 돼요. 사실은 영문도 모르고 살아야 됩니다.
영문도 모른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같은 말로 해석불가, 더 심하게 말해서 해석포기. 나라는 인생을 내가 해석하는 걸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걸 고상하게 말해서 외부적인 상황이에요. 외부적 상황은 어떤 통찰에 의하면 덮침을 당하는 것. 같은 말로 ‘영문도 모르게’가 덮침을 당하는 거고, 이건 해석불가하고. 불가하면 해석을 해야지, 그러잖아요. 그러면 안 되고 해석을 포기해야 되고 외부적 상황이 돼야 되고요.
그러면 이 반대말은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모른다고 친다면 이게 없다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생각하겠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이겁니다.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있다.” 왜 인생이 힘들고 불행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있고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자꾸 내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 이렇게 되고 싶어. 난 이랬으면 좋겠어.” 자꾸 이런 게 생겨나는 거예요.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있어요. 내가 요구하는 바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계속해서 발생이 됩니다. 내가 어쩔 수 없어요. 내가 매일같이 요구하는 바가 어쩔 수 없지요.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내가 여기 있고 내 안에 발생하는 것과 무엇과의 겹침이냐 하면, 영문도 모르는 것과의 대비가 되는 거죠. 이 두 겹침을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현실상황이에요. 성도는 영문을 모르는 게 있고, 성도 아닌 사람은 이것밖에 없어요. 내 안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데 뭔가 자꾸 요구하는 바가 발생되는 거예요. 나를 굉장히 힘들게 해요. 인생이란 것은.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있으니까 본인에게 발생된 것, 자기로부터 출발했으니까 어떡하든 우리 운명은 발생된 것과 엮이고 싶지 않더라도 엮여야 돼요. 발생된 게 결핍이거든요. 모자람이에요. 요구란 게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욕구, 더 나가면 욕망. 욕구, 욕망, 요구란 게 결국 뭐냐 하면, 모자람이 자꾸 새롭게 생산되고 있다.
이게 남의 일로 여기면 편하겠는데 내 안에서 발생되니까 내가 도망칠 수가 없어요. 내 요구에 대해서 내 욕구에 대해서 내가 도망칠 수 없어요. 이민 가도 안 돼요. 유럽에 놀러가도 안 돼요. 유럽에 놀러가도 집에 가스 불 걱정될 수 있어요. 애 놔두고 멀리 와도 이 시간 애가 뭐하는지 걱정될 수 가 있지요.
나는 나 자신을 기존의 나로부터 도피하고 싶은데 요구하는 게 내 안에 발생되기 때문에 어딜 도망쳐도 꼭꼭 숨어도 요구하는 바가 그 현장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만족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계속 결핍이 일어나는 거예요. 모자람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너, 이것 모자라잖아. 이것마저 채워야 행복한 거야. 인생의 숙제야.” 자꾸 무거운 짐, 숙제를 계속 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어떤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들, 지식들, 공부한 것, 새로운 발생 앞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왜? 계속 결핍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산해내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히 철저하게 방어를 한다할지라도 그것은 새로운 발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죠. 적이 밖에 있으면 우리가 도망치거나 대처하면 되는데 내 적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내 안에 있다면 그것도 기존에 나를 무시하고 새로운 숙제와 요구를 나한테 요청한다면 그 숙제 앞에서 우리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어떻게 이걸 해소하느냐, 사도 요한에게 어떻게 해소하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나’ 나가 있기 때문에 요구가 생기고 그게 발생되고 하잖아요. 이 나를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이걸 없애버립니다. 나를 없애버려요.
전에 썼던 [생명의 신호] 26페이지에 보면 동그라미 두 개가 있어요. 여기에 보면 앞에 동그라미 하나는 ‘주체역사’ 뒤에는 ‘환상’이라고 돼있거든요. 이건 여러분들이 아시니까 지우겠습니다. 영문도 모르게, 해석불가. 해석불가하면 해석할 필요 없으니까 해석포기, 외부적 상황, 덮침을 당하여. 이런 개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날 따라오는 것, 계속해서 어딜 가도 따라붙어서 나에게 짐을 지우고 개편을 유발시키는 그러한 나,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는 이 점을 성도에게 어떻게 해소하는가? 이렇게 해소하게 돼있어요. 주체역사라고 해놓고 뒤에 실선으로 해서 이걸 환상이라고 한 겁니다.
요한계시록 첫째 시간에 제일 먼저 중요한 것에 도달했어요. 그게 환상이죠. 역사라 했는데 앞에 주체가 있지요. 역사면 역사지 앞에 주체가 붙느냐 하면, 역사라는 것은 나의 해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먼저 있는 이상은 필히 역사관이 성립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그냥 역사가 아리고 주체역사에요.
그러면 내가 먼저 있고 역사 있으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역사가 또 있는 거예요. 같은가? 같지 않습니다. 왜 같지 않느냐 하면 사람은 역사 속에 세상을 보는 해석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아요. 그래서 그걸 무슨 역사냐? 주체역사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픔이 있는 사람과 아픔이 없는 사람과의 역사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달라요.
어떤 고색창연한 담쟁이넝쿨이 있는 옛날 건물 근처에 살던 아픔이 있는 사람이 그 건물을 십오 년 만에 만난 것과 그 건물 앞을 그냥 지나가는 사람과는 역사관이 달라요. 갑자기 그 건물 보게 되면 과거에 아팠던 것이 한꺼번에 떠오르지요. 프로스트가 지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면 마들렌이라는 흔한 프랑스과자를 먹는 순간 그 냄새와 어릴 때 자기가 살던 동네에 등장인물들 기억나고 확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로 자기가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주체역사가 되고 타인은 그 주체역사에 관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관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환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환상이란 게 없어요. 살아온 그것이 오직 이것뿐이에요. 이게 전부에요. 내가 살아온 내 해석한 역사가 자기의 유일한 현실이 되는 겁니다. 다른 현실은 없어요. 물론 일방적이지만. 유일한 현실입니다. 이게 유일한 현실이라면 다른 현실은 없겠지요.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는 현실의 전부입니다. 전부란 말은 추가적인 현실은 남아있지 않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경험한 그 현실이 유일한 현실이고 다른 현실은 없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 땅에 임진왜란에 있었다, 합시다. 그러면 오늘날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현실이냐고 물어요. 우리는 이렇게 해요. 현실에 넣어줄게, 이렇게 돼요. 현실에 넣어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내가 방금 들었으니까 또는 내가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그것은 현실에 넣어주되, 결국 넣어준다는 말은 뭐냐? 내가 이순신은 아니지만 나의 무슨 역사? 나의 주체역사를 이루는데 일부로 넣어줄게, 라고 돼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는 환상일까요, 현실일까요? 현실이죠. 왜냐하면 내 주체역사에 내가 결정해서 내가 넣어줬으니까. 요새 안중근이 유명한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환상일까요, 실제 현실일까요? 현실이죠.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내 현실에 넣어주는 거예요.
주체역사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들었던 내가 공부하고 여러 가지 있잖아요. 시즈가 어떠니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있잖아요. 그런 걸 다 현재 나를 구성하는 보따리로서 넣어주는 거예요. 이건 환상이 아니고 현실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넣어주고 말고를 누가 결정한단 말입니까?
그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의 보조품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기에 그런 현실도 현실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중요한 의미는 뭡니까? 내가 여기 있다가 바로 현실의 핵심이 되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그걸 주체역사라 하는 거예요. 모든 역사는 주체역사라니까요.
자, 천국이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현실입니까, 현실 아닙니까? 현실이요. 왜냐? 예수 믿으니까 죽어서 간다는 천국이 현실이죠.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간다. 그게 현실이죠. 왜? 성경에서 누가복음 16장에 봤으니까. 봤지만 그 현실은 누굴 위한 현실이에요? 주체역사, 내가 죽고 난 뒤에 갈 세계 현실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 외에 다른 천국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왜? 내가 구성한 현실만이 유일하니까. 이 말 이해 못하면 오늘 강의 못해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유일하니까요.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있다고, 내가 있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 안중근, 미국독립선언, 예수님, 천국, 전부 다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있다, 만이 나에게 유일한 현실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다, 끝. 그거에요. 체험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니까, 내가 느끼지 않는 것은 전부 다 추상이니까 다 배제하고 오직 나는 추상이고 뭐고 다 싫고 현실만 나는 믿습니다, 라고 우리는 매일같이 다짐에 다짐을 하는 거예요. 현실만 믿습니다.
결국은 이 그림에서 환상은 뒤에 가리지요. 주체역사 있고 환상은 뒤에 가리는데 뒤쪽에 있는 환상을 우리는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왜? 환상은 없으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만 독했다는 사람이 있다는데 만 독을 해도 그 사람에게 요한계시록의 세계는 없고요, 내가 아는 요한계시록만 있을 뿐이에요. 결국 이 사람은 남의 현실과 자기 현실이 다르게 되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무슨 현실을 바꾸느냐 하면 주체역사를 없다고 여기는 환상이 와서 바꿔버립니다. 주체역사를 주님의 역사로 바꿔버려요. 아까 조금 전에 누가 있던 자리에요? 내가 있던 자리가 주님의 역사로 바꿔버리죠. 그러면 나는 어디 갔습니까? 나는 없는 거예요. 내가 여기 없는 겁니다.
내가 없으니까 나의 현실도 내가 있어야 현실이 있는데 내가 아는 현실은 뭐가 되느냐 하면 환상이 돼요. 환상은 허망함이 돼요. 쉽게 말해서 거짓이 되고 진실이 아닌 게 되고 가짜가 되고 마치 허망한 꿈같은 게 돼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내가 살아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냐고 하는데 당신 나이가 지금 99.99세로 내일모레 죽는다고 생각해보자.
19일에 만약에 죽는다면 9월 20일에 어디 있습니까? 20일에 내가 있어요, 없어요? 19일에 죽는다면 내가 없지요. 그때는 죽었으니까 없을 것 아닙니까. 없다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는 뜨고 지고 달은 하늘에 별은 빛나고 제주도는 그대로 있고, 이것 누구의 현실입니까, 나는 없다면? 주님의 현실이죠. 그동안 나의 현실이 주님의 현실을 철저하게 가린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뭐냐 하면, 십자가 이후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다루기, 이미 너는 나와 함께 네가 아는 현실을 끝냈고 마감했고 주님과 함께 있는 현실의 입장에서 옛날에 살던 너 같은 인간들이 집결된 그 세계에 다시 한 번 우리로 하여금 그걸 보게 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홀로 있지요. 홀로 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이미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 관계에서 홀로 남은 사람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뜻이고요, 아무도 찾지 않으면 이 인간세계에서 이미 빛이 끊어져버린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존재입니다.
그 사라져버린 존재의 표본으로 모델로 견본으로 사도 요한을 외로움 속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이미 살아 있음에도 사실은 죽은 자로 간주해서 집어넣는 겁니다. 이 세상과 별개의 인물로 사도 요한을 딱 지목한 거예요. 네가 이 세상에 있더라도 너는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별개의 인물로 그러한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겁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영문도 모르는 내용이에요. 영문을 안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해석 가능자, 해석 주체가가 누굽니까? 해석을 내가 하죠.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모든 의미가. 그런데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면 해석에서 안에 뭐가 생겨납니까? 계속해서 결핍이, 내가 해석해놓으면 또 결핍이 올라오고, 내가 해석해놓으면 또 욕구가 올라오고.
그래서 네가 너다울 수 있겠어,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못 살게 구는 거예요. 시어머니 죽으면 시집살이 편하겠다? 시어머니보다 더 독한, 내가 나한테 더 독한 시어머니에요. 시어머니야 죽거나 떨어져 살면 되지만 나는 유럽에 가도 미국 가도 북극에 가도 도대체 나를 놔주질 않아. 미치겠어. 새벽 세 시에도 안 놔주질 않고 건강해도 몸 아파도 도대체 내가 나를 놔주질 않아요. 계속 닦달해요.
지난 번 행동은 너답지 못했잖아. 맨날 너답지 못했데. 아이고, 칠칠맞게. 손 씻으면서 바지 다 적셔놓고. 칠칠맞게 행동하는 것 봐, 이런 식으로 남이 날 지적하기 전에 한 시도 나는 나한테 눈길을 뗀 적이 없어요. 늘 관리대상으로 삼고 감시를 하지요. 게슈타포도 이런 게슈타포가 없고요. 진짜 아이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로마병정보다 더 심하게 우리가 행동 하나 숨 쉬는 것까지 전부 다 간섭하고 간여합니다. 살아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그것이 바로 환상이다. 너는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왜냐? 네가 보는 네 시선만 아느냐?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보는 시선은 왜 네가 모르느냐? 그것은 이미 너는 죽어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죽은 게 돼요. 이걸 달리 표현하게 되면 내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안 나오게 되면 약속이 안 나오면 그거는 이미 죽은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세상이 그를 찾지 않고 그도 세상을 찾지 아니하면 있어도 그는 죽은 거예요. 마찬가지로 천국 나라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 같으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천국 바깥은 제대로 죽음이죠. 지옥이죠. 죽은 자의 세계, 요한계시록에 20장에 의하면 둘째 사망에 해당되는 사람, 둘째 사망이라 했는데 ‘둘째’를 빼버리면 그냥 사망의 세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우리가 대하는 태도는 내가 이 땅에 태어나는 것도 영문도 몰랐고, 손자가 돌을 맞이했지만 본인은 영문도 모르고 잔치를 받는 거예요. 영문도 모르고 어느 것 하나 쥐라고 강요받고 하지요. 본인은 영문도 몰라요. 주위에서 같이 죽을 자들끼리 으샤으샤해서 하루하루 그렇게 해서 지금껏 오십 년, 육십 년 살아온 거예요.
이건 내 건 없고 주위의 시선들의 따갑게 그걸 우리한테 요청했어. 우린 거기에 맞춰준다고 피곤해 죽겠어요. 젊을 땐 맞춰주지요. 몸 아프면 몸 아프다고 닦달 내네. 주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누구 장단에 행진을 해왔습니까? 세상은 뒤에서 앞에서 계속 이야기합니다. 행~진, 행~진하는데 도대체 누가 그 노랠 불러요? 행~진, 행~진하는 거야, 이런다고요. 도대체 어디로부터 어디로 행진하는 데요? 하는 거야, 뭐 어디로 가는 데? 나도 날고 싶다는 거예요. 세상을 쭈그려 앉아있지 말고 나는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거예요. 날개 타고 비상하고 싶다는. 세상에 내가 같이 휩싸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휩싸이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따로 떼어놓지요. 네가 죽은 존재로써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라. 네가 믿는 주님이 세상을 포괄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전개시키는지 네가 보라. 그 모든 것은 바로 쉽게 말해서 나, 예수님의 바디, 배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배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세상=예수님 몸의 속성’이 되는 겁니다. 세상 또는 현실은 몸의 속성이에요.
예수님의 몸에는 어떤 속성이 있느냐 하면,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율법에는 속성이 두 가지 있지요. 뭡니까? 하나는 복, 하나는 저주. 이것은 바로 율법이 인물화된 것이 누구죠? 예수님. 율법이 언약이니까 예수님에게서 뭐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복을 줄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저주 내리시는 권한도 가지시고. 예수님은 복의 나랄 만들 권한도 있고 저주의 나랄 만들 권한도 있고. 그런데 저주라 하는 것은 복의 나라의 그림자로서 복의 나라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주의 나라가 있는 거예요. 저주받으면 복이 임한 줄 알아라, 이 말이에요.
요한계시록 한 구절, 한 구절 하면 시간관계상 못하기 때문에 포괄적인 걸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2장 봅시다. 2장 19절, 누가 읽어볼까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피와 불과 연기로다. 피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포도주 틀을 밟아버리면 붉은 포도주즙이 튀어나오지요. 진노하고 있다는 징조를 남기고, 불과 연기도 마찬가지지요.
이런 걸 생각해보세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내 생각 말고 현상 생각하지 말고 성경만 생각합시다. 노아 때 전부 다 물 심판됐지요. 우리 이 세상은 노아 이후의 세계입니다. 노아 이후의 세계라는 것은 세상은 안 달라졌어요. 그대로 악합니다. 날 때부터 악하니까. 창세기 8장에 나오지요. 악한 데 굉장히 평온해보이지요. 평화롭게 보이지요.
이것은 세상에 부합된 평온이 아니고 악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하나님께서 평화와 평온의 차단막, 더울 때 치는 막이 있지요. 천막, 장막 같은 것을 덮어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선인과 악인에게 묻지도 따지지 않고 그들에게 햇빛과 공기와 단비를 주시지요. 이게 창세기 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이니까.
이러니까 이건 은혜의 담요가 덮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관계없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상관없이 은혜의 담요가 덮였는데 이제 마지막이 되면 이걸 살짝 걷어냅니다. 노아 이후에는 은혜의 담요에 덮여있다는 그 증거로 무지개를 줬지요. 제가 어느 설교나 강의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이 무지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름다워요. 더러움과 대비가 되는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담요를 세상에 덮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아까 배웠으니까 복습해봅시다. 세상의 현실이란 것은, 세상이란 것은 모든 이해가 누구 중심으로 나와요? 내 중심이죠. 나에서 나오는 그 의미와 다른 의미는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덮었다는 것이 불신자한테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은혜란 선물이니까 이거는 외부인이 필요한 거예요.
은혜는 선물이니까 내가 한 행동의 결과 말고 다른 분의 초월적인 분의 프로젝트, 계획으로 말미암아 요청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그것을 포착할 능력이 나한테 있느냐는 겁니다.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나의 존재가 방해하는 거예요. 나의 소경됨이 바른 현실관을 다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혜택은 입으면서도 바보 같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뭐 철학박사, 물리학박사도 마찬가지에요. 아무것도 몰라요. 바보 등신이에요.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은 등신들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지혜의 영이라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에. 지혜의 영을 주사 눈을 떠서. 그냥 하면 안 돼. 눈을 떠야 돼요. 그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다메섹에서 누굴 만납니까? 아나니아를 만나지요. 그때 뭔가 비늘 같은 게 떨어지는 게 있지요. 그때 사울은 눈이 장님이 되었습니다. 세례 받고 난 뒤에서 눈을 떴잖아요. 그러면 그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거예요.
누가 방해했어요? 내가 나의 존재가 방해했어요. 죽고 나면 알겠지요. 인생 잘못 살았다. 지옥 가면 알겠지요. 물이 에비앙 생수가 이렇게 비싸게 친 것을, 이렇게 내가 하찮게 본 것을 그제야 알겠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가 지옥 갔을 때 부자가 얼마나 속으로 애가 타고 답답했는지. 그때 나온 노래가 <애가 타>하는. 왜 애가 타느냐 하면 동생이 다섯 명이었어요. 형제가 다섯 명 있다고.
아까 공부한 것 봅시다. 인간은 이 땅에 관계가 없으면 죽은 존재지요. 지는 죽으려고 하는데 넷째 동생이 와서, 형님, 뭐하고 있습니까, 하면 갑자기 못 죽어요. 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청산되지 않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지요. “아무것도 안 한다.” “그럼 연탄불은?” “밤 구워먹으려고.” “창에 테이프는 왜 붙여놨습니까?” “그건 바람에 연탄불 꺼질까봐.”
이런 식으로 그냥 자식 때문에 부모 때문에 홀로 같으면 죽을 수 있는데 엮여진 것 때문에 나는 죽은 자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에 새로운 세계에 나는 못 죽는 인간, 죽고 싶어도 안 죽는 인간이 되고 살아 있는 인간이 됐어요. 같이 바보로 살아 있는 거죠, 가짜로. 형제 다섯이 있는 거예요. 걱정이 안 될 수 없지요. 그래서 거지 나사로 살려 보내면 행여나 거지 나사로 보고, “놀랍다, 기적이다.” 대한예수교감리교에 보면 기적교회 있어요. 아까 오다가 봤어요.
기적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믿지 않겠느냐. 기적을 보고 믿으면 기적이라 하는 것은, 현재 나는 다치지 않고 나는 소실되지 않고 현재 나 그대로 건사하고 유지되고 있고 플러스알파 놀라운 걸 추가하는 걸 사람들은 기적이라 해요. 그러나 진정한 기적은 뭐냐 하면, 이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 이 자체가 환상이고 이게 죽은 세상에나 통용되는 가짜라는 걸 아는 눈 뜸이 기적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눈 뜨는 게 기적이지요.
내가 있으면 시간과 공간이 나 위주로 연결돼서 시간과 공간을 감지하게 돼있어요. 오늘 며칠이고 내일 며칠이고 여기는 제주도고, 감지하는 이게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어요. 그런데 사도 요한 같이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내 시간과 내 공간이 없지요. 그러면 내 자리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아까 주체 자리에? 예수님이 주체에 들어왔으니까 예수님이 주신 시간, 예수님이 주신 공간인데 이 시간과 공간은 다 이루었다, 에요. ‘다 이루었다’를 증거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다 이루었으니까 심심한데 이런 거나 만들고. 다 이루었잖아. 결핍 없이 만들어요. 하나하나가 결핍 없는 작품이에요. 하다가 손톱자국 나면 그것도 새로운 작품이에요. 뭐든 모자람이 없어. 내 인생에는 모자람이 없어요. 이 그대로가 주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부족할 이유가 없지요. 그걸로 교체가 되는 거예요.
사도 요한은 어떤 경우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 은혜라는 것이 노아언약 때는 물 심판 안 할게, 라는 정도의 은혜라면 이제는 사도 요한 시대의 은혜는 그냥 햇빛 주고 공기주는 정도가 아니고 모든 것이 마감 거기서 넘어버린, 이미 하늘나라에 속해버린 그 은혜 덩어리가 그대로 덮치는 거예요. 이미 죽어도 괜찮다는 것,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이제 더 이상 달라짐이 존재하지 않는 내 인생에서 달라짐이 없다.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이 육신은 점점 더 먼지가 되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이 작업조차 아름답다. 내가 죽는 것조차 아름다워요.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선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은혜의 두꺼운 천막을 요한계시록에서 무슨 은혜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용서의 은혜, 죄 씻음의 은혜.
그걸 요한계시록 7장 14절 봅시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흰 옷 입었다. 왜 옷이 흽니까? 자기 개인적인 역량을 투입해서 흰 게 아니고 유니폼이지요. 똑같이 희지요.
서둘러 흰색 되지 마세요. 서둘러 자기를 하얗게 세탁하려 하지 마세요, 인생을. 흰색 되는 그것도 탁한 흰색, 더러운 흰색이에요. 흰색이 질이 달라요. 나에게서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흰색이라고 주께선 간주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특히 예수 믿고 힘든 것은 서둘러 검은색에서 벗어나서 흰색 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보면 예수님의 피죠. 피 색깔은 무슨 색입니까? 붉은 색인데 옷은 그게 묻으니까 이게 표백이 되는지 붉은 색이 왔는데 옷이 하얗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내 인생으로 보지 않고 주님 자신의 티셔츠로 보는 거예요. 자신의 명품으로 보는 거예요. 심혈을 기울여서 주님이 스스로 입었던 옷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피 묻은 육신에 걸쳐버리는 자기 백성을 걸치듯이 움직이면 주님의 몸이 움직이고 우리는 거기에 덩달아 옷이란 이름으로 그냥 움직이는 거죠.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거죠.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이 옷 입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옷을 입었다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 우리가 예수님 옷 입은 게 성립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주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내용이 뭡니까, 물으면 이 은혜가 자기 용도가 끝났어요. 노아언약이 십자가로 다 이뤘잖아요. 이뤘으니까 이 은혜는 없어도 괜찮겠지요. 왜? 자기 백성은 다 건졌으니까. 은혜를 철거하니까 악함이 그대로 악함으로 노출되는 게 마땅하지요.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 19절에 보면 저주와 불심판과 그리고 모든 인간이 만든 것들은 다 태워지는 그 현상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가 왜 이러십니까, 너무 합니다, 이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입장이 안 되지요.
왜? 그동안 은혜로 겨우 덮어놓은 걸 거죽 데기를 치워버리니까 자기 본색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본색은 뭐냐 하면, 저주받아 마땅한 본색에다 주님의 언약으로 덧입혀진 그러한 모습, 그것을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 현실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한쪽은 피 씻음의 은혜를 받았고 흰옷 입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저쪽은 흰옷이 없지요. 하나님의 은혜의 장막이 벗겨졌으니까 그들의 실상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주체역사가 주님의 주체역사 되게 되면 그동안 가렸던 환상으로 여겼던 것이 환상이 이쪽이 들어와 버려요. 그 그림이 29페이지와 30페이지에 있는데 그걸 여기서 그려보겠습니다. 29페이지에 보면 역사가 있고 그 위에 동그라미로 환상이 있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는 환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으니까 환상이에요. 그냥 꿈이에요. 망상이죠.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망상, 또는 더 심하게 욕하면 광신도. 왜냐하면 광신도라고 그것을 결정짓는 해석하는 주체가 누굽니까? 나거든요. 내가 되기 때문에 광신도지요. 그래서 이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만 있고 요한계시록 같은 그런 내용은 다 헛된 거고 망상이다. 항상 그것부터 늘 출발을 그렇게 하세요. 첫 시작을. 괜히 믿습니다, 해봐야 내가 조작한 거니까 본인이 힘들어요. 본인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억지를 부린 게 된다고요. 오십 년 믿는 육십 년 믿든 복음 안지 사십오 년이 됐든 그것 다 잊어버리고 매일같이 잊어버리고 주님께선 항상 나밖에 없다부터 일이 시작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은혜의 경로가 살잖아요. 은혜가 와서 나에게 무슨 놀라운 일을 벌였는지 일방적인 은혜의 공로로 넘기려면 내가 서둘러서 흰색이 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나는 그냥 흰색이라고 우기는 검은색으로 사는. 이거는 빨래할 때 손빨래하고 그래도 안 되면 넣을 것 다 넣고 세제 넣고 해도 안 빠지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삶아 빨잖아요. 수건과 속옷을 부글부글 나올 때까지 삶아 빨듯이 백날 빨아도 그 흰색 안 나옵니다.
우린 아무리 자기 자신을 닦달내고 억지를 부리고 회개시키고 반성하고 나한테 발로 차고 해도 주께서 인정하는 흰색은 영원히 안 나와요. 주님께서 다녀가셔야 돼요. 다녀가시면 누가 욕을 하느냐? 내가 여기 있는데 주님의 요한계시록 봤잖아요. 우리는 요한계시록 그런 세상없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주도는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없어, 라고 반항들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실감이 나요.
왜 실감이 나느냐 하면 남이 예수님을 욕하는 게 아니고 구원받은 내가 예수님을 매일같이 욕하라고 세상을 더 살게 하는구나. 갈수록 나에 대한 집착이 몇 가지 복음 안다고 해서 떨어질 인간 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처음도 주께서 다룰 문제고 그 다음 날도 죽을 때까지 주께서 다뤄야 될 문제지 항상 잠시만 우리가 정신 차리자, 하면 남는 것은 바로 나만 달랑 남아있다는 이것만 확실해, 라는 쉽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이에요.
왜 그렇게 제가 자신 있게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 3장에 보면 일곱 교회 나오지요. 일곱 교회는 어디 있는가? 아까 배운 대로 하면 일곱 교회는 없어요. 일곱 교회 자체가 없습니다. 교회라는 어떤 예배당은 모르지만 교회라는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세계는 우린 없는 거예요. 눈에는 물론 안 보일뿐더러 그런 해석도 이 땅에서 용납을 하거나 안 하거나 있는데 용납 안 하고, 그게 아니라 아예 없어요. 요한계시록 성경의 세계는 없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라는 것은 세상이 핍박을 해줘야 나타나는 게 교회입니다. 핍박 없는 교회는 없어요. 핍박을 세상이 하느냐? 아니 교회가 교회를 핍박할 때 나타나는 거예요. 일곱 교회가. 그건 아니야. 네가 첫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봐라. 그러면 그게 사데 교회에요. 교회 자체 속에 있는 세상이 그 교회의 순수함을 공격할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교회라는 말을 끄집어낼 기회를 잡는 거예요.
현실은 네가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비로소 숨어있는 환상이란 이름의 현실이 나타난다. 주님, 왜 그렇게 됩니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예수님을 하늘로서 오신 분이 결코 아닌 것을 유대인들은 확신했지요. 유대인뿐만 아니고 헬라인 되는 본디오 빌라도도 확신했어요. 자기 마누라가 꿈자리가 사납다고 하지만 꿈자리 사나운 것과 재판이 무슨 관계있어요. 찝찝하다. 그러면 코로나 때문에 손 씻고 난 뒤에 결정해버리지요. 죽여라.
거기에 누가 합세했습니까? 그 당시 사람뿐만 아니고 현재 저와 여러분도 다 합세하는 거예요. 왜? 그 본디오 빌라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내가 해석해도 그게 옳은 결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란 인물 옆에 두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요리조리 앞뒤 돌아보고 아무리 봐도 절대로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은 아니에요.
왜냐?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그동안 내가 현실이라고 해석했던 모든 그런 수법과 기술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예수는 아니에요. 이거는 광신도에요. 그냥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 사태를 매일같이 반복함으로써 이 현실 속에서 주님의 현실을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듣고 어떤 분이 물을 수 있겠지요. 그러한 새로움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없으면 그 사람 신자 아니지요.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은 주님이 하셔야 되지 내가 흉내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모방도 오십 년 모방한다고 새로운 게 되는 게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한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지요. 양적 팽창은 질적 변화로 이어진다. 예수 오십 년 믿으면 새 사람 된다. 이런 주장이거든요. 이런 것 없어요.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성경공부 많이 해도 질적 변화는 이건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의 소관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사람들만 이 사실을 파악해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 열심히 요한계시록 달달 외우면 되겠지. 그러면 안 되지, 안 돼요. 결국은 그거에요. 서둘러 흰색 된 걸로 자족하고 끝내요. “그래, 나는 피로써 하얗게 되었어.” 그걸로 끝나지 나의 현실은 망상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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