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2020 춘천 여름 특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름 : 정인순 (IP:112.167.88.133)

아빠와 함께 2020. 8. 29. 08:25

2020 춘천 여름 특강 1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근호 목사

저 혼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절에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방금 긴 이야기가 이렇게 순서 지으면 아주 간단합니다. 처음에 공간 나와요. 공간. 두 번째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 나옵니다. 세 번째 나온 게 뭐냐 하면 인물 나와요. 인물.

여기에는 너희, 또는 사랑하는 자들아 그런 식으로 되어있는데 네 번째가 뭐냐 하면 공간→시간→인물, 이렇게 순서로 되어있으면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시간 공간은 인물과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과 결합해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사랑이 생깁니다. 사랑. 그러면 마지막에 사랑 안에는 공간과 시간이 사랑 안에 전부 다 종속돼요. 왜냐하면 맨 마지막이 사랑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사랑하는 사이에는 기다릴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사랑하는 사이에는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에는 기다릴 수 있다는 동시에 사랑하는 사이에는 보낼 수도 있어요. 보낼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물에도 괜찮고 불에도 괜찮아요.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불속에서도 기다리고 물속에서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러면 사랑하는 사이라면 반드시 누가 등장해야하느냐 하면 사랑하고픈 대상, 인물이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걸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시고 신은 무엇인가? 신은 관념이에요. 관념. 관념의 대상입니다. 그냥 추상의 대상이에요. 신은 관념의 대상 추상의 대상이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건 인간이 만들었다, 이렇게 보시면 인간이 만들었다.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신은 인간 속에 복속이 되고 신보다 뭐가 크지요? 인간이 더 크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신을 만들었으니까. 인간은 신을 만들었으니까 신은 피조물이고 누가 창조주? 인간이 창조주고. 인간이 자기의 자기 자신의 평안함과 정신적 안정성을 위하여 신을 만든 거예요. 추상적 관념이니까요. 관념의 대상이니까.

인간이 신을 만들어놓고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을 경배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건 전형적인 트릭을 쓰는 거예요. 트릭 알지요. 속임수. 수요일 날 저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inversion이라고 했어요. inversion, 전치되는 것, 뒤엎는 것, 주객이 뒤엎어지는 것.

인간이 신을 만듦으로서 비로소 인간다워지는 겁니다. 내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인간다움이 뭐냐? 반드시 신을 만들어서 inversion, 다시 말해서 신을 경배함으로서 누가 완성을 보는 겁니까? 인간이, 내가 완성을 보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춘천에 와도 교회가 많은 게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해가지고 오면서 주욱 큰 교회가 그렇게 많은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해가지고 입구에 보면 나오지요.

내가 어디까지 절대화 될 수 있는가? 내가 어디까지 완성될 수 있는가는 같은 인간끼리는 시시해서 안 되고요, 반드시 신을 다루어야 돼요. 신과 협의가 끝났다가 되어야 해요. “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었어.” 그 이야기가 성립이 되어야 되고 전제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이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은 자기의 완전을 향하여 뭘 만든다? 대상이 있어야 되고 그 대상이 그냥 친구 동료 동창생 아는 이웃사람 그래가지고는 인간은 미흡해요. 인간은 영 칩칩해. 인간 같지도 않은 것하고 내가 볼 게 뭐 있노? 그러면 여기 대상에다가 대상을 높인다고요. 그러면 뭐냐? 자식에다가 부모, 그리고 형제 부모한테 잘하고 형제한테 잘하고 자식에게 잘함으로서 내가 좀 더 나아진다, 이것도 괜찮은 방법이지요.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야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영 성이 안 차.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대상에다가 이걸 어렵게 말하면 타자라고 말하는데 신을 집어넣으면 신이 나를 대단한 존재라고 규정을 했다는 것이 신과 이미 협의가 끝났어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로 확정했고 나는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최고의 자리를 신이 보장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최고의 궁극적인 자리에 도달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 없이 부모한테 효도하고 이런 사람, 이래 가지고서는 그래도 이 세상 살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내 성에 영 차지 않는 겁니다. 이왕이면 갈 데까지 가는 거예요. 신마저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 때 가장 인간다움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임수지요. 일종의 트릭인데 트릭이라는 것은 속임수라 하는 것은 내가 위에 있는 분에게 경배한다는 그 자체가 실은 그 위에 있는 분이 내가 다룰 수 있는 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나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전치, 전복 되는 거예요. 갑이라고 하면서 내가 갑이 되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 신에게 겸손하면 할수록 나는 신을 쉽게 다룰 수 있다. 신도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련회 때 했지만 선행은 곧 뭐라 했습니까? 복수심이라 했어요. 남한테 착한 일 한다는 것은 내가 착한 일 한 만큼 나한테 보상하지 않으면 나는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착한 일조차는 너를 위함이 아니고 나를 위함이기 때문에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지옥이고 사탄이고 이 모든 것도 일단 나 건드리면 이렇게 지옥 간다는 이야기지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너희들이 건드렸다.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잘못 봤다. 나를 건드리지 말아야 되는데 건드렸잖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신은 뭐냐 하면 추상적 관념의 대상이다. 관념의 대상이라는 말은 곧 신은 실제로는 신은 없다. 신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신을 만들 때만 신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없다의 반대말은 있다죠. 누가 있느냐? 신을 믿는 내가 있는 거죠. 내가. 나라는 인간이 있는 겁니다. 인간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렇게 신은 없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만드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어디에 오느냐 하면 바로 내가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이 최고의 자리에 하나님이 여기에 들어와 버리죠.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육신이 되었다고 했잖아요.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방금 이야기한 말로, 말씀이 인간이 된 겁니다.

인간이 되었으니까 인간들끼리 섞여있으니까 누가 하나님인지 누가 인간인지 압니까, 모릅니까? 알 길이 없지요. 왜냐하면 신은 추상적 개념이니까. 신은 추상적 개념이니까 허황된 개념이에요. 허황된 개념이니까 허황된 개념은 전부 다 나는 신을 믿어, 나도 믿어. 이건 아무 차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인간 대 인간의 차이예요. 인간 대 인간의 차이.

인간들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인간들 사이가 차이가 있다고 봅니까, 없다고 봅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동양철학이나 어떤 모든 철학에서도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끝. 똑 같다. 살 동안에 얼마나 행복하느냐가 중요하지 죽고 나면 모든 것은 똑같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과연 똑 같을까, 하고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건 제가 하기 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겁니다. 모든 인간은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 inversion 역전이 생기는 거지요. 죽는다는 건 맞아요. 죽는데 여기에 안 죽는다가 아닙니다. 이게 어려워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Ok 맞아. 그래서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도 죽는다에 합류했습니다. 그래, 너도 죽고 예수님도 죽지요. 그러면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다 죽으니까 90 살다가 다 죽어요. 끝났어요. 별 다른 것 없습니다. 특이 사항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아났다가 되어버렸어요. 안 죽고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었는데 살아났다. 죽었는데 살아났다는 이것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초과적인 겁니다. 그럴 수는 없느니라.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전한 복음은 뭐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 동의하지? 동의하지?” 이렇게 한 거예요. 사도가.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자기 손으로 죽였으니까 그거 맞네. 맞아. 죽었는데 그 분이 살아났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명들을 해보시지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해명들을 해보라는 거예요.

어떤 분이 우리 가운데 있는데 어떤 분이 다 같이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살아났다고 한다면 이 지금 생수가 백산수냐 삼다수냐가 문제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이게 지금 곡물이냐 밀가루냐가 문제가 됩니까, 안 됩니까? 전혀 안 되지요. 당신 어느 대학 나왔어? 이게 문제가 돼요, 안 돼요? 지금 그건 전부 다 시시한 문제예요. 너무나 하찮은 문제예요. 사람이 어느 대학이든 죽으면 똑 같은데 그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일이 똑 같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속이 시원한 거예요. 잘 살아봐야 재벌 되어봐야 죽으면 헛되지. 우린 그런 줄 알았지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이거지요. 살아나면 반칙이지요. 우리 가운데 살아나면 안 돼요. 살아나게 되면 처음부터 어느 캔디를 먹을 것이냐부터 문제를 다시 규정을 해가야 되는 겁니다. 다시 규명해야 돼요.

방금 여러분들이 제 말을 이해했다면 이 문제를 내줄 테니까 문제를 풀어보세요. 북대서양 고기압, 이 말을 왜 사용합니까? 북대서양 고기압을 왜 사용하는데요? 정답은 내가 안 죽고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와 의미와 개념은 그냥 단어를 규정하는 게 아니에요. 이걸 앎으로서 내 사는 데 보탬이 되기 때문이에요. 북대서양 고기압 이거 모르면 하와이 낚시하다가 죽는 수가 있어요. 이게 태풍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태풍이 얼마나 강렬하느냐 적으냐 거기에 영향을 주거든요. 오래 가느냐 방향 트는 것까지도 영향이 있다고요.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의미 하나의 개념이라 하는 것은 이건 구분 짓기입니다. 구분을 짓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질서 잡기예요. 질서를 잡는다는 말은 내가 위험한 곳에 덜 가고 더 살기 유리한 곳이 어디냐를 찾을 수 있는 인간들의 WAY, 삶의 방식이에요. 독약과 그리고 독약이 아닌 것, 성경에 나오는 신약과 진짜 약국에 나오는 new drug, 약국의 신약이 같은 한국말인데도 그 차이를 모르게 되면 그 사람은 약사가 아니에요. 교회 와서 신약 안 주고 교회에서 설교하십니까, 이렇게 따질 수가 있어요. 우사당한다고요.

모든 개념의 층층이 누적된 개념은 북대서양 고기압이라는 이 사실을 알면 사는 데 유리하고 정말 초등학교 안 나와가지고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사는 데 불리한 거예요.

예를 들게 되면 회사 면접을 볼 때 뭘 면접을 보느냐 하면 얼마나 그 개념 차이를 촘촘히 구분하느냐를 할 수 있느냐로 뽑아요. 특히 KBS나 이런 언론 매체 할 때 성우 시험까지도 일반상식을 치지요. 일반상식이란 게 뭐냐 하면 촘촘히 개념과 개념 사이를 남들은 두루뭉실하게 하는 걸 촘촘히 구분 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기자 시험 칠 때 단어 선정에 있어서 자칫 하게 되면 잘못 기사를 쓰게 되면 북한의 운명이 바뀔 수가 있거든요. 그 차이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공부할 때 이 개념과 마이밀 바나나하고 바나나 우유하고 차이점 있잖아요. 이런 차이점을 세밀하게 본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세상을 심도있게 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 층층이.

의미 층이, 수요일 날 이야기했는데 그거 할 필요 없고요. 이 세상은 떠돌아다니는 개념의 세상이라고 했지요. 개념 층이 있으면 두루뭉실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 더 밑에 들어가면 이 개념들이 더 심도있게 중간 중간 끊어져서 더 심도있게 나가요. 더 들어가면 더 심도있게 들어가요. 점점 갈수록 더 심도있게 쪼개집니다. 가장 심도있게 쪼개지는 게 뭐냐 하면 법학이죠. 국가 엘리트는 전부 다 법 출신들이에요. 법 출신들은 전부 다 옛날식으로 하면 뭘 다뤘느냐 하면 언어를 다루는 직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트입니다. 언어를 다루는 직업은 전부 다 엘리트라니까요. 개념들.

성경 볼 때 초신자의 특징은 두루뭉실 가요. 지 은혜 받은 것 무조건 우기면서 편지 써가지고 목사들은 회개하라.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했잖아. 요한복은 3장 16절밖에 몰라. 두루뭉실 들어가요. 점점 더 들어가게 되면 더 세밀해져서 그 말씀이 이 말씀하고 충돌 될 때 그러면 두 충돌 되는 개념이 조화를 이룰 때 조화 되는 제 3의 요소는 그 밑에 들어가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모든 성경 개념들을 볼 때 성경을 한 번 쭉 읽었다. 알 것 같지요. 다시 읽어보게 되면 모순 된 게 등장하지요. 그 모순 된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 방법도 성경 안에 더 깊이 들어가면 또 거기 나오거든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전체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뭔가? 이것을 캐낸다는 것은 보는 그 사람의 삶의 의미도 그만큼 안정권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안정권에. 성경 몇 구절가지고 휘둘리고 성질 급하게 감정으로 투여하지 않고 점점 침착한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놀라지 않아요. 세상에 어지간한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않아요. 그런 상태에 들어가요.

그래서 오늘 베드로후서 지금 강의했습니다. 강의 하면서 제가 죽 읽었는데 처음에는 물로 심판했다, 그 다음에는 불로 심판했다.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이야기했고 마지막 9절에서 13절까지는 체질이 모든 물질이 불에 녹아진다. 그러니까 12절에서 13절까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되느냐? 우리가 그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새하늘과 새 땅의 의를 바라보자, 그 내용이거든요.

이 긴 내용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공간부터 먼저 등장해요. 공간부터 등장한다는 말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공간에서 정적 상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상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본질은 변함이 없는 상태, 정적 상태가 공간으로 이미 확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공간은 확정된 거예요.

물로 심판, 그 다음에는 불로 심판. 세상이 아무리 젊은 세상이든 늙은 세상이든 관계없이 심판 된다는 사실은 요지부동 변함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 정적 상태지요. 확정된 대상이고 확정된 운명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게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이 나와요. 공간에서. 봐 줄게. 자꾸 시간이 지연되는 거예요. 봐줄게 하면서. 여기서 뭐냐 하면 시간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서 공간의 소멸, 공간 개념의 소멸이 일어나는 겁니다. 확정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변화가 일어나요. 확정되었는데 변화가 일어나요. 확정된 것에 변화이면서 공간은 보이지 않거든요. 대부분 공간은 보이지 않아요. 공간은 안 보여요. 변화만 보인다고요. 산에 단풍나무 있지요? 단풍나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소나무인지 단풍나무인지. 가을 되면 시간이 흐르면 변하지요. 그러니까 공간이 어디에 종속된다? 시간의 흐름에 공간도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니까 시간이 주가 되고 갑이 되고 공간은 을이 되는, 종속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런가 묻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과연 그럴까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지금 공간이 너희들 보기에는 시간이 우위고 공간은 시간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간은 없고 시간의 흐름 따라서 그냥 흘러가듯이 인생 살면 그만이야, 할 때 과연 공간의 운명은 확정되지 않았을까 되었을까를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거예요. 그 물으시는 것이 뭐냐? 물 심판이고 불 심판입니다.

시간을 허용해놓고 인간에게는 봐주기로 시간을 허용하는 거예요. 시간을 허용 해놓으니까 인간은 뭐라고 곡해하느냐 하면 역시 시간이 주야. 시간이 주고 공간은 시간따라 늘 변하기 때문에 공간 붙들면 안 돼. 시간은 흘러가면 인생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돼,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까?

여기 한 번 봅시다. 3장 4절에 주의 강림하심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 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같이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일부러 의도적으로 잊으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공간이 확정 되었는데 시간을 부여하니까 인간은 공간에 매달리지 않고 시간 가지고 공간을 재해석하는 겁니다. 시간 가지고 공간을 재해석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해석의 주체자가 누구냐 하면 본인이 주체자가 되는 거예요. 본인이 해석의 주체가 된다는 말은 내가 세상에 대한 해석의 주체자가 된다는, 세상의 주체자가 된다는 말은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이에요, 살고 싶다는 말이에요? 살고 싶다는 말이에요. 내가 살고 싶다는 겁니다. 이걸 크게 쓰면 이걸 가지고 세계관, 인간의 세계관. 세계관은 반드시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죽고 싶다가 아니고 살고 싶다를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가 되니까 여기서 반칙이 나오는데 나는 공간에 속하지 않고 공간 바깥에 나가서 공간을 보는 거예요. 심지어 어디까지 보느냐 하면 시간 속의 나가 아니라 시간 밖에 나가서 초월적인 존재로 나를 설정해놓고 시간과 공간을 임의로 내 사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건 인간이 아니고 신 수준이에요. 인간은 날 때부터 애도 신이에요. 거의 신입니다. 안 그래요? 키워보니 그렇지요? 신이에요. 아빠가 목욕탕 가자. 하니까 애가 나는 가기 싫어. 왜 가기 싫은데? 내가 싫다니까.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내가 싫다니까 내가 싫다니까. 거기다가 내가 지금 나이 열두 살까지 누가 키워줬느냐? 그런 논리는 소용없어요. 먹히질 않습니다. 내가 싫다는데. 내가. 왜 싫은데? 그게 애들이 크면 얘기합니다. 그게 나의 세계관이라는 거예요. 나의 세계관이에요. 니 세계관이 뭔데? 나는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해석해. 이렇게 해석한다는 거예요. 그건 나이 70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나이 70 되고 80 되고 90 되어도 마찬가지, 90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홍천에서 농사해도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예요.

제일 인간이 뭐냐 하면 제발 Please 제발 누구든지 나를 해석 좀 해주세요. 제발 내가 누구라고 해석 좀 해달라는 거예요. 여러분 해주면 안 됩니다. 해주면 트릭을 쓴다니까. 신이 하나님이 나를 해석해주면 그 때부터는 내가 그 하나님을 임의로 변개시켜가지고 저 신은 맘에 안 들어. 이 신 말고 다른 하나님 갖고 와. 그 해석을 할 때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는데 막상 해석이 되니까 이상하게 해석 듣는 순간 저 해석은 나한테 맞다 안 맞다가 판단이 개시가 되었어요. 커트가 돼요. 저 해석은 너무나 맘에 안 들어. 다른 해석 가져와.

춘향전에 보게 되면 사또가 있어요. 춘향전의 사또. 변사또지요. 갑자기 변 사또가 왜 거기서 나와. 변씨가 왜 거기서 나와. 춘향전을 해석할 때 춘향이 해석이 있고요, 그 다음 이 도령 해석이 있고요. 그리고 변 사또 해석이 있고 거기 매니저 있잖아요. 이방 해석이 있고 또 이방의 애인이 있다는 그런 설이 있어요. 원래 춘향전의 탐본이 200개 정도 돼요. 백설 공주가 500개 정도 돼요. 아주 엄청나거든요. 모든 탐본이 있어요.

여기서 변 사또 입장에서 한번 봅시다. 변 사또 입장에서 보게 되면 오늘날 너무나 이 도령 춘향이는 현실 세계에 안 맞아요. 변 사또 버전이 해석이 가장 맞아요. 왜냐 하면 그 중에서 계급이 제일 높거든요. 춘향전에서 계급이 제일 높아요. 계급이 높다는 말은 이 세상에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욕하지만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 욕하면서도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 높은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결국 출세 가도를 달려서 그 사람 자리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밑에서 헐뜯는 사람은 그 자리에 못 앉아요. 적어도 서울 시장 되려면 서울시장 되기 전부터 비서실장 때부터 서울 시장이라는 안목을 가져야 서울 시장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이죠. 변 사또가 뭐냐 하면 그 동네에 남원 동네에 아가씨들한테 전부 다 하나씩 앞에 통과시키지요. 임월이! 으음. 춘심이! 으음, 이렇게 고개 저으면서. 이게 변 사또 자리가 수요일 날 왕의 자리고 오늘날 우리의 자리입니다.

베지밀? 으음, 마이밀? 으음. 바나나 우유? 으음. 딸기 우유? 그거! 이게 어린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신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가 중요하지가 않아요. 내 마음에 드는 신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해석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시간에서 공간, 공간에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인물을 등장 시킵니다. 이게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기적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합쳐서 하나의 인물화 되는 거예요. 자연의 의인화, 이것이 제일 기적적인 이야기예요. 성경에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베드로후서 3장 5절에 보면,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세상의 모든 말씀이 자연이 하나의 인물 속에 들어온 거예요.

오늘 이번 강의에 핵심부분에 우리가 접어들었습니다. 핵심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사 부사로 설명하면 꾸역꾸역, 이게 오늘 강의에 핵심입니다. 꾸역꾸역. 종이 신문지 이만한 걸 가지고 내가 손으로 구멍을 만들어놓고 이걸 집어넣을 때 모양새가 어때요? 꾸역꾸역 집어넣지요. 전체가 자연이라는 부분 속에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옵니까? 구겨져서 꾸역꾸역 들어오는 거예요. 꾸역꾸역.

따라서 물 심판이 그게 심판의 다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부분이니까. 전체가 부분이 전체를 보여주는데 기껏 물심판밖에 보여주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물이 아니라 불로서 심판할 때 비로소 그 전체를 심판이라는 양식으로 전체를 보여주는 게 불 심판이에요. 물 심판 때 꾸역꾸역의 그 전모를 다 못 보여줬다는 거예요. 물 심판 때에는. 물로서만 심판했기 때문에 아직 남아있는 게 있어요. 전체가 꾸역꾸역 다 집어넣는데 이걸 다 못 집어넣거든요. 이걸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나중에 새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인물은 작지만 전체를 보여주는 거예요. 작지만 전체를.

인물이 여러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말씀이 육신을, 예수님이죠. 저는 이것을 발전시키겠습니다. 성도입니다. 성도는 부분입니다. 부분인 성도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전체가 나와요. 이게 성도의 고귀한 기능입니다. 개뿔도 아무 것도 아닌데 그냥 보통 인간하고 똑 같아요. 밥 먹고 그냥 늙어 죽는 것하고 똑 같아요. 하지만 그 작은 성도 속에서 전체가 꾸역꾸역 나오는 거예요.

과산화수소 가정에 있는 세제 있잖아요. 그 세제하고 섞어버리면 코끼리 치약 효과라고 해가지고 거품이 풀장을 덮어버려요. 풀장을. 나중에 쉬는 시간에 코끼리 치약 실험 한번 쳐보세요. 그게 어떤 건지. 작은데 온 천지를 덮는 꾸역꾸역이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지구 전체를 삼킵니까? 여기 보면 체질이 불에 왜 녹아집니까? 그것은 이미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한 몸으로 다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설움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그 만한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함유되고 있는 그러한 효과가 이 우주 전체에 확산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지요.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과산화수소를 이만한 데다 집어넣었는데 일부러 실험할 때 풀장에다가 실험해요. 왜? 거품이 풀장을 가득 차니까. 유튜브에 나와요. 제가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MBC 아침에 보니까 해외토픽에 그게 나와가지고 저거다. 바로 저거다! 저게 춘천 강의다. 왜? 작은 데서 전체가 나오니까, 작은 데서. 다 나와서 이 세상 다 휩쓸어버리는 거예요.

성경 히브리서 12장 봅시다. 12장 21절에 보면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산에 등산하는 게 그게 뭐 무섭고 떨립니까? 산에 등산하는 것이. 그런데 거기 보통 산인데 주께서 말씀으로 울라 하니까 그 산 정상이 진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26절에 보니까 그 때에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내가 한 번 아니라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한다, 땅과 하늘이 진동한다는 것은 아까 한 말로 꾸역꾸역 네 자로 설명하면 돼요. 부분이라는 것이 피조 된 부분이 창조자 전체를 감당을 못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베드로후서 3장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천지를 만든 말씀을 만들어진 이 피조 세계가 감당을 못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 공간에 대해서 시간 공간을 이렇게 봐줬거든요. 다시 말해서 공간은 뭐냐? 공간은 이미 확정 된 거예요. 공간은 정적 존재예요. 확정 된 거예요. 심판 받기로.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지연시켜서 시간을 주니까 인간은 시간 이건 본인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가지고 시간 위주로, 공간보다 시간 위주로 나간 거예요. 아직 안 끝났는데 뭐? 아직 안 끝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인물이 오니까 인물은 시간+공간, 시간과 공간을 한 인물이 함축한 인물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예요.

인물이 왔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르게 산다가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해서 그 인물을 나라는 존재가 시간 공간 아무 것도 모르는 누구든지 나를 해석할 사람 없이 나는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온 내가 그 함축된 시간 공간의 모든 걸 말씀으로 함축된 인물을 내가 사랑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해버리면 무엇을 극복한 사람이 돼요? 공간과 시간을 이미 극복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언제 오더라도 지구가 불바다 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이기는 거예요. 사랑이.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간단한 것 같아서 제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노래 하나 준비했어요. 여기에 보게 되면 오늘 강의 내용이 다 나와 있습니다. 제목은 준비 없는 이별.

지난 시간 내 곁에서 머물러
행복했던 시간들이 고맙다고
다시 또 살게 되도 당신을 만나겠다고
아 그 말해야 할 텐데
떠나는 그대라도 편하게 보내줘야 할 텐데

여러분들이 아시는 노래예요. 그 노래 중간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게 줘

이건 뭐냐 하면 공간과 시간을 누가 함축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함축 했지요. 이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순간부터는 시간 해석과 공간 해석이 내 세계관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보통 인간의 세계관, 저 애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의 세계관은 그 전제가 뭐가 깔려 있다고 했습니까? 누가 사는 것, 니가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누가 사는 것? 내가 살기 위한 세계관이에요. 모든 세계관은. 북대서양 고기압 그걸 왜 알아요? 그 단어를 아는 의미가 뭡니까? 그걸 아는 것이 내가 사는 데 보탬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도 모르고 기상캐스터 하려고 이렇게 해가지고 면접시험에서 탈락하는 수가 있어요.

어떤 단어가 하나가 어느 단어를 골랐을 때 어느 단어를 더 세분화할 때 더 섬세하게 해석이 가능하게 한 것이 나로 하여금 이 사회에 더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 그게 공부지요, 공부. 의미 층을 분해해가지고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능력, 그게 공부예요. 물론 철 두드리고 하는 것도 나무 자르는 것도 공부지만 이 세상에 모든 국가를 다루는 엘리트층의 공부는 뭡니까? 말이에요, 말. 법학을 다루는 사람들입니다. 언어. 검사 판사 이 출신들입니다. 국회의원 그 사람들이 주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에요. 법은 모든 변화를 하나로 묶어주거든요. 하나의 의미로 묶어주는 것. 하나의 법이 여러 가지 생길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변화를 묶어줄 때 좋은 법이 되는 겁니다. 법이 많다는 것은 그 법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법이 많다는 것은.

우리 삼촌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축구를 하는데 우리 삼촌이 좀 괴팍한 데가 있어가지고 축구를 보다가 왜 저 월드컵에 축구하는 사람들은 꼭 공이 하나이어야 한다는 그러한 아집에 빠져 있느냐, 선수가 열한 명 스물 두 명이잖아요. 그러면 공을 스물 두 개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각자 잘 놀거라 이 말이죠. 그 말은 맞아요. 각자 잘 놀면 돼요. 그럴 것 같으면 운동장에서 놀 필요 없고 자기 동네에서 놀면 되지요. 공이 하나가 있을 때에 재미가 극대화 돼요. 발로 차고 태클 들어가고 다리 붙들고 왜 이런 게 됩니까? 공이 하나일 때 가능합니다. 공이 하나 일 때 경쟁의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경쟁의 의미, 공이 하나가 될 때.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2천6백만 명을 뽑아보자. 아무 의미 없잖아요.

놀랍게도 복음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누가 종합한 겁니까? 오직 한 분이에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그건 뭐냐? 더 이상 의미 캐는 것은 주님 앞에서 무의미 한 거예요. 의미 캐지 말고 세계관 갖지 말고 사랑하라예요. 주님을 사랑하라. 사랑할 때는 반드시 뭘 미워해야 돼요? 나를 미워해야 되거든요. 나의 세계관을 미워해야 돼요. 나의 세계관 밑에는 뭡니까?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고자 하는 그것에 맞추어서 내가 조립된 억지로 조립시킨 나의 세계관이거든요. 나만의 세계관.

나만의 세계관은 뭘 규정하느냐 하면 공간은 곧 내가 공간이 돼요. 왜? 나는 중요하니까. 시간은 나의 변화예요. 이게 중요해요. 계절의 변화? 그것도 맞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계절의 변화도 중요하지 않고 미국이 어떻고 영국이 어떻고 변화도 중요하지 않고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어떻게 변화되는가 이게 미국의 변화보다 다음 대선에 미국에 트럼프 될까 안 될까 그것보다도 내 강아지가 어떻게 될까가 더 중요해요. 왜? 나와 가까운 근접하는 나의 시선의 원근법에 부합되거든요. 나를 지켜보는, 나의 가까운 내가 지켜보고, 또 나를 주시하는 그 대상이 멀리 있는 트럼프 대통령보다 나한테 더 소중하니까.

모든 것이 누구 중심입니까? 내 중심이지요. 여기서 뭐냐 하면 내 중심이 된 나의 세계관으로 뭘 보느냐? 우리는 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보니까 인간은 무슨 중심이냐? 시간 중심이에요. 주님 오신다면 언제쯤 오십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왜 합니까? 주님 오신다면 언제쯤 오십니까? 왜? 제가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대비해서 뭐 할라고? 그렇게 해서 구원받고 싶어요. 니가 왜 구원받아야 되는데? 여기서 할 말이 없어요. 니가 왜 구원 받아야 되는데? 태양이 둘이 아닙니다. 이미 시간과 공간은 전 세계 모든 의미는 예수님에게 이미 끝장났잖아요. 끝났으면 예수님 밑에 붙어있는 건 다 떨어내는 거예요. 나조차도 예수님 앞에서 이건 나는 산 존재가 아니라 죽은 존재로 떨어져 나가야 돼요. 오히려 주님 하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됩니다. 내 중심으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모세가 올라간 시내산에서 떨었다 이 말이에요. 모세도 무서워 떨었다는 말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 만났을 때 하나님 한 분 모세 한 분 두 사람입니다. 산이 떱니다. 산 정상이 벌벌 떱니다. 벌벌 떨어요. 지진이 일어나서. 그러면 모세가 무서워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워했습니까? 당연히 모세가 무섭지요. 그러면 이건 모세 중심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당연히 시내산에서만 모세중심이 아닌 게 아니고 모세가 산 밑에 내려가서 나중에 식사를 뭘 하든 간에 식사를 하는 모세조차도 그것조차도 모세중심이 아니다 말이에요. 이미 예수님께서는 죽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세상은 누구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이죠. 이 모든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면 하나님이라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것을 시간과 공간에서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냈는데 인간은 자기 세계관 중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변화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찾지를 못 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찾는가? 여기 준비 없는 이별 가사에 보면 하루만 오늘도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나중에 한 번 들어보세요. 시간을 내게 줘, 이렇게 되거든요.

하루만 더 달라는 말은 지금 이 노래 부른 이 남자의 여자가 지금 헤어져요. 헤어지는데 갑자기 헤어졌기 때문에 준비 없는 이별이 된 겁니다. 준비 없는 이별이 되어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발 떠나는 그대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고맙다고 그동안 같이 살게 되어서 고맙다는 말만 해야 되는데 그 말 할 시간도 없이 그냥 훌쩍 떠났어요. 그러니까 이 남자 입장에서는 자기에게는 많은 시간들이 있어요. 하루 하루가 쳐져있고 많이 있지만 진짜 의미있는 하루는 뭐냐 하면 그 여자에게 당신과 사귄 그 시간은 참 좋았어. 내가 그 말 해 줄 때 떠나는 당신이지만 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어, 라고 그걸 채울 수 있는 그 하루만 허락 하면 안 되겠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간의 개념이 인물에 종속된다는 거예요. 그동안 누구한테 종속되었습니까? 나한테 종속되었지요. 내가 내 살기 위한 하루 하루 스케줄 짠 거예요. 직장 회사 모든 것은 나만 살면 그만이에요. 처음에 강의할 때 했잖아요. 신은 왜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추상적 개념으로 신을 인간들이 만들어냈지요. 만들어놓고 인간이 뭐라고 지금 무슨 속임수를 씁니까? 우리의 창조자여 우리의 경배를 받으소서. 하지요. 이게 얼마나 신을 모독하는 일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신을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필요해서 내가 만들었고 내가 믿은 거예요. 왜? 다른 신을 재끼고 그 신만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거예요. 해놓고 경배해주는 거예요. 경배해준다는 말은 경배받아 처먹었으면 이제는 나한테도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채워달라는 거예요. 죽어서 천당 보내달라는 거예요. 이건 결국 인간의 세계관 기존의 세계관에 어떤 변화 없는 세계관 속에 하나의 숟가락 하나 얹은 거예요. 종교라는 걸 하나 얹은 거예요. 이 나라 국가가 무슨 지금 국가가 복음이라는 것은 전혀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코로나가 중요합니까, 복음이 중요합니까? 제가 고린도후서 읽어보고 여러분께 질문해볼게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 정세균 집사한테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한테 묻습니다. 그 집사가 무슨 집사인지 모르겠어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 다 같이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걸 한번 바꿔봅시다.
죽음에 넘기우다 이걸 코로나로 바꿔봅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코로나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이미 코로나로 죽은 우리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정세균이나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게 먹혀들어갈까요? 안 먹혀들어가지요. 왜냐하면 그 세계관은 시간의 세계관이에요. 앞으로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그들은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살다 죽으면 그만이야. 그거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한 게 뭐였습니까? 사람 죽으면 죽었다 끝나는 거야. 이게 본디오 빌라도의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군사 두 명 해가지고 무덤을 지켰거든요. 봉인까지 해가면서 지켰는데 그 다음 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덤이 시신이 없어요. 로마 군대가 추적해가지고 전부 다 시신 숨겨놨다는 제자들에게 다 찾아 갔어요. 제자들도 자기들도 모르는 이야기예요. “살아났어요? 난 모르는 이야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인간의 세계에서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일단 쉬는 시간에 코끼리 치약 실험 한 번 보시고 십분 쉬고 다음 시간에 가겠습니다.

 

2020 춘천 여름 특강 2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근호 목사

좀 더 어려울 수가 있어요. 두 번째 시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지요. 말씀이 천지를 만든, 천지를 만드신 분이 조그만 육신, 요셉의 아들이지요. 목수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로 꾸역꾸역 거기다 다 집어넣은 거예요. 이 안에 다 집어넣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풍랑이 일었다 칩시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날 때 제자들의 세계관은 뭐냐 하면, 첫째 시간 복습해보면 모든 인간의 세계관은 그 밑에 뭐가 전제되어 있습니까? 나 살자. 남이야 죽든 말든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풍랑을 일으켜버립니다. 풍랑을 일으키니까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제자들이. 무서워 떨면서 물 퍼내고 하다하다 안 되어서 그 다음에는 누구를 깨우느냐 하면 예수님을 깨울 때에 이 제자들의 세계관 속에는 본인이 있고 다른 제자들이 있겠지요. 예수님도 여기 있겠지요. 예수님도 여기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게 숫자를 세면 여기 총 몇 명이냐 하면 13명이 있는 거예요. 제자 12명에다가 예수님 한 분, 그 배에 탑승한 인원이 13명이 탑승한 거예요. 13명이.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그런데 1, 1, 1 해서 13개 모였는데 주님의 일은 뭐냐 하면 여기 12의 1과는 다른 1이에요. 왜냐 하면 풍랑이 이는데 그들이 죽음의 위협을 느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잖아요.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계관이거든요. 세계관.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다와 풍랑을 어떻게 하기 전에 먼저 누구를 꾸짖느냐 하면 제자들보고 꾸짖었어요. 제자들의 1 + 1 해서 12는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12는 숫자로 제로가 되어야 됩니다. 0이 0을 보고 1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0은 영이 되어야 해요. 김 0 박 0 최 0 그냥 0은 0일 뿐이지요. 0은 0일 뿐이지 헤아림의 대상이 안 돼요. 왜냐하면 공간 입장에서는 이미 뭐냐 하면 심판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거든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 드리면 물 심판 받고 불 심판 받을 때 이건 결국 이겁니다. 전멸입니다. 전멸,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물 심판도 그렇고. 물 심판 때 8명 남았다 하는데 다 죽은 거예요. 8명 남은 것 같으면 노아 식구에만 물이 안 들어오고 나머지는 물이 차야 되는데 노아 살던 나의 고향 있잖아요. 복사꽃 피는 고향, 거기도 물이 들어왔다니까요. 그러니까 노아는 이 땅에 어떤 곳도 있을 곳이 없어요. 노아는 노아 있는 곳은 물에 잠겼다 이 말이죠.

방주의 의미는 뭐냐 하면 물에 잠겼다는 의미입니다. 방주가. 방주가 따로 높은 산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물에 잠긴 거예요. 심판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의 특징은 뭐냐? 심판은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줄 증인으로서 그들은 살아나야했습니다. 나 잘나서 구원,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너희들 다 죽었어. 우리만 죽은 게 아니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도 지금 무지개로 봐주고 있는 거야. 공간인데 공간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공간의 원리가 취소되거나 변경된 적이 없다는 것을 시간 속에서 알려주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지금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좋게 해석하지 마. 시간은 언제 끝날지 몰라. 하는 그것이거든요.

그러면 옛날로 봐서는 공간이 먼저고 그 다음 시간은 나중인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갑질 하고 있는 거예요. 똑 같네. 해 뜨고 해 지고 그게 시간이거든요. 자연 자체가 시계예요. 해 뜨고 해 지고를 측정해가지고 시간을 나눕니다. 반복되는 질서가 시계예요. 질서가 반복 안 되면 시간으로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왔다갔다 똑 같이 행동으로 보여야 시계로서 구실을 해요. 이래 갔다가 15분 뒤에 오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시간의 균질성을 가지고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에서 공간으로 갈 수가 없지요. 시간에서 공간을 갈 수가 없어요. 자기가 망한다는 것을 시간으로 거기서 찾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기를 무서워해서 물 퍼내고 하지요. 그것은 뭐냐? 우리를 0으로 보지 말고 여기 있음으로 보자는 거예요. 있음은 숫자로 헤아림의 대상이 돼요. 이렇게 있다면 물통 두 개 하나 둘 헤아림의 대상이 돼요. 여기 아무것도 없다면 없는 걸 헤아려서 있고, 없고, 있고 셋이네, 이건 바보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있는 것만 계산에 숫자의 헤아림이 되는 겁니다. 있는 것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1을 제로로 하고 없는 것을 1로 쳐버려요. 없는 것을.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헤아리지 않고 넘어갔다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면서 이 세상은 모두 다 죽어 마땅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그 전의 인간들의 계산에 방주라는 것은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심판도 없는 거고 방주도 없는 거거든요. 없어서 인간의 헤아림에 인간의 숫자 헤아림에 포함이 안 돼요.

그런데 이 숫자 헤아림에, 점점 어렵지요. 할 수 없어요. 헤아림의 특징은 헤아림의 본인을 1로 이미 시작하고 있다는 게 이게 반칙이 되는 겁니다.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나한테 있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세계관입니다. 인간의 믿음관이고 세계관이고 우주관이고 하나님관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필히 나를 구원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왜? 내가 믿어줬잖아. 내가. 내가 믿어줬는데 나를 배제하면 안 되지. 그건 반칙이지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뒤에 무슨 이름 붙입니까? 내 이름 붙입니까, 예수 이름 붙입니까? 예수 이름 붙이지요. 그게 여러분 그렇게 해놓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어제 수요일 날 언급했는데 수요일에 설교 들으셨겠지만 다시 하겠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개념이지요. 컨셉. 기도라는 게 있다 이 말이지요. 성경에 보면 기도하라고 기도가 나오더라 말이죠. 기도가 나오니까 인간은 본인을 이 개념과 일치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기도 안 하는 내가 뭐다? 기도하는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기도 안 하는 내가. 전도 안 하는 내가, 성경에 보면 전도라는 말 나오니까 전도하는 나로 일치시키고 싶은 거예요. 내가. 전도하는 개념으로.

그러면 여기서 기도 안 하는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뭘 보태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을 자기 자신과 행함을 추가를 시킵니다. 기도하는 행위로 되면=기도 성사 됨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개념에 부합된다, 일치된다고 그렇게 하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평소에 내가 나의 세계관이 그렇기 때문에. 나의 해석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지요. 뭘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룬 중에서 주님이 던져준 모든 개념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지요. 그러면 기도는 누가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이루었지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나와요. 예수님 홀로 기도를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으면 여기서 격차가 생기지요. 내가 하는 기도와 주님 하는 기도와 격차가 생깁니다.

그러면 내가 기도를 하겠다는 말은 이건 나의 완전함과 나의 온전함을 추구한 게 되지요. 나의 완전함과 온전함.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기도하라가 율법에 포함되니까 내가 율법을 지킨 자가 되어버려요. 내가 율법을 지킨 자가 된다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율법은 우리를 구원에서 탈락 시키기 위해서 준 것이지 율법 지켜서 구원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어디 아래 있습니까?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이미 공간적으로 이미 피조세계에서 저주 아래 있다 이 말이지요. 저주 아래 있으니까 주님께서 시간별로 모세 그 다음에 다윗, 모세 불러서 말씀 율법을 준 거예요. 이 저주가 저주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이 말이죠. 율법을 준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개념에 부합되기 위해서 우린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답다, 이렇게 해가지고 열심히 율법을 지켰는데 그 결과는 뭐였습니까? 전멸이었지요. 다 죽었어요.

전멸이라는 말은 남은 자를 남길 때 전멸되는 거예요. 남은 자라는 것은 전멸되었음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거기서 남은 자가 생기는 겁니다. 죽었는데 죽은 중에서 (저기 떡 하나 주시기 바랍니다) 죽었는데 주께서 “잠자는 자야 일어나라.” 해가지고 “야 너 죽었다고 아뢰라.” 이 일을 시키는 거예요. 이것을 그래서 제가 여수 강의에서 제목을 뭐라 했느냐 하면 진멸과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진멸과 예속, 진멸과 구원이 아니고 진멸과 누구한테 소속되었다는 진멸과 예속입니다.

성도는 예속 된 자이지 구원된 자가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개념은 주님이 구원 된 거예요. 우리는 구원에 예속 된 사람으로서 구원된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직장 나오지 마라 하면 오면 되지요. 잘리면 되지요. 예속 된 사람이지 내가 내 구원을 내가 소지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나이 구십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90 되어봐야 90살 산 거 다 날아갔어요. 나한테 안 남아있어요. 오래 살면 뭐가 남아있어야 되는데 남아있는 것은 늙은 육신밖에 없어요. 아이고 아파라. 허리 아픈 것 외에는 많이 살았으면 뭐가 남아 있는 게 있어야 될 텐데 망가지는 내 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망가지는 몸도 죽기 전까지 있지 드디어 심장 박동이 찌익 해보세요. 그것도 없어요. 그 기억도 없다고요.

시간은 우리를 속였던 거예요. 우리는 공간에 종속되고 예속 되었는데 시간은 마치 우리에게 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처럼 속여 온 겁니다. 시간이. 그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물을 통해서 시간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인물에서. 인물에서 다시 시간을 주는 겁니다. 이 시간을 줄 때 이미 완성된, 시간을 완성된 분에게서 주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뭐냐 하면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길어요. 이렇게 긴 겁니다.

시간과 공간이 한 인물화 되어야 이 논리가 성립 돼요. 시간이나 공간이나 우주나 한 인물로서 결정된 거예요. 예수님이 모든 피조의 세계의 완성을 한 거예요. 따라서 인간의 행함은 기도함은 나의 완전을 추구하지요. 그러면 주님이 주신 것은 율법이 나오지요. 율법에서 기도하라하고 내가 성취했다고 여기는 기도하고 이 격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이것이 바로 너는 내가 원하는 개념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너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율법 지키고 지옥 가는 겁니다. 율법 지키고 지옥 가는 거예요.

아니. 이미 지옥 갔는데 지옥 간 것을 율법으로 확인 하는 겁니다. 이미 죽어 마땅한 것을. 그래서 살려고 한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노력이에요. 떡을 하나 먹더라도 이건 죽으라고 먹는 거예요. 뭐든지 죽으라 먹는 거예요. 왜냐하면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으니까 이왕 죽는 것 먹고 죽자. 이왕 죽는 것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자 이 말이지요. 결혼 안 하고 뭐건 결혼 하고 살고 하다가 헤어지고 살고 살다가 또 헤어지면 되고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세계관은 나의 세계관은 주께서는 밀어내니까. 나의 세계관. 내가 살고자 하는 세계관은 주께서 인정을 안 해줘요. 주님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모든 걸 인정을 안 해준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다시 봅시다. 오늘 세 번째 부르는데.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게 줘. 안 돼. 지금은 이대로 떠나는 걸 그냥 볼 수는 없어. 차라리 나 기다리라 말을 해, 이렇게 높은 음으로 올라갑니다. 들어보시면.

시간이라는 것이 그전에는 나 혼자의 시간이었는데 나를 떠나는 그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간이 내게 없었던 새로운 시간관이 발생 되는 겁니다. 이건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너를 위한 시간이 내게 없었다는 겁니다. 내 인생을 살면서 주님에게 드릴 주님의 세계관에 합류된 시간은 내게 있었다, 없었다? 없기 때문에 우린 저주 받고 심판 받는 거예요. 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요소가 없느냐 이 말이에요. 왜 하늘의 요소가 없었느냐 이 말이에요.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없는데. 나는 나밖에 없는데 주님 안 계신데 어떻게 하겠어요. 지난 낮 설교에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최종 모든 일을 본인이 다 관리하면서 무슨 십자가가 왔다고? 무슨 멍멍 무슨 그런 개소리가 있느냐 이 말이죠. 이게 욕입니까? 욕이라면 좀 곤란한데, 욕 아니라고 칩시다.

십자가가 들어왔으면 최종 관리자가 내가 아니에요. 나는 다만 최종관리자의 자격으로 십자가 앞에 서있어야 돼요. 그 최종관리자가 안 된다 하면 안 돼요. 최종 관리자 하세요. 하시고 그 앞에 떠나버린 그대가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말씀 지키면 마지막 뜨거운 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할 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거라니까요.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 사랑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대치 개념이에요. 내가 뭘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사랑은 생산됩니다. 그 분이 사랑을 줄 때 나는 사랑의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이건 부모가 애 낳을 때 규격 맞췄어요? 쟤는 낮에 놀러와가지고 과자 껴안고 그런 애 낳게 해달라 그런 계획 세운 적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부부가 사랑했을 뿐이지요. 사랑했는데 결과가 생산됐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사랑의 열매라 하지 않습니까? 낳았다는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사랑은 마찬가지로 나의 세계관에 종속된 거예요. 이건 나 살고자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사랑했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줬냐? 이런 식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내가 없을 때 나보다 먼저 생겨지는 것이 사랑이고 그 다음에 출현하는 것이 바로 나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보겠습니다. 내가 없어지고 등장되는 나, 나와 내가 헤어지고 등장, 이 자리에 있는 나, 그럴 때 뭐냐 하면 두 부부가 있을 때 남편 있고 아내가 있는데 전에는 결혼할 때는 내가 있고 내게 필요한 여자라서 나는 너와 산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없어지지 않고 내가 있잖아요.

내가 있는 한 내 세계관도 같이 있지요. 내 세계관은 누구만 살자? 누구만 왕이다? 누구만 신이다? 나만 신이고 나만 사는 거예요. 그 여자는 그냥 이용하고.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나만 살기 위해서 남자랑 한 거예요. 괜찮은 보디가드 돈 벌어주는 남자까지 자기는 이제부터 행복 시작 불행 끝. 둘 다 착각하고 있는데 내가 없어지고 난 뒤에 내가 없어진다는 말은 내가 나를 떠나버리는 겁니다.

내가 나를 떠나버리면 내가 없어지는 거지요. 내 자리에 내가 없어지게 되면 내가 없어지고 주님에 의해서 질질 끌려가 다시 예속된 자로 내가 왔을 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속된 나, 아무도 예속 되지 않은 나였는데 예속 된 나가 되어버리면 나는 나라는 남편은 저 아내를 볼 때에 그냥 아내가 아니고 나처럼 주님께서 불러준 아내가 되겠지요. 그러면 둘 사이에 뭐로 만납니까? 둘 사이에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두고 만나는 거예요. 주께서 만나게 해줬다 이 말이에요. 이해 안 되시는 얼굴인데요. 주께서 만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아내 볼 때 자기 부인을 하고 남편을 볼 때 자기 부인을 하는 거예요. 자기 부정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는 자로서 내 눈에 보이니까요. 그러면 뭐냐? 상대는 뭐로 보입니까? 나에게 과분한 사랑으로 보입니다. 나한테 과분한 사랑. 과분한 사랑, 물론 과분한 사랑한테 얻어맞아 본 적도 있고 쫓겨난 적도 있겠지만.

가사에 보게 되면 이 가사에서, 제가 이 가사를 못 놓치는 이유가 끝부분에 보면 마찬가지로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해놓고 차라리 나를 기다리라고 말을 해, 그 다음 말이 뭐냐? 마지막 가사가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도록,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도록

그러니까 주님이 있는 아내와 남편 되어야 주님만이 영원하거든요. 주님만이 영원할 때 우리의 사이도 영원한 사이가 되는 거예요. 영원한 부부가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 부부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으니까. 영원한 부부는 아니지만 천국 간다면 우리 사이는 영원하게 헤어질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욕망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아는 나는 나밖에 모르는 나인데 내가 아닌 나를 주님이 일방적으로 등장시킨 나로 바뀌어질 때 그런 나는 영원한 나가 되는 거예요. 하루를 살더라도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영원함이 나와요. 아까 코끼리 실험 봤지요. 하루는 짧지만 짧은 하루에서 뭐가 나온다? 영원을 증명할 수 있고 영원한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신다 이 말이에요. 하루가.

나 당신하고 오늘 살아도 나는 괜찮아. 나는 후회없어. 우리 같이 죽어도 나는 개의치 않아. 당신과 함께 있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상관없어. 설마 당신이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보내줄게. 여기 가사에 나옵니다. 아무것도 미안해 하지 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나는 괜찮아. 그래서 사는 동안 함께 나눈 추억이 있잖아. 다행이야. 감사할게. 감사 막 나와요. 준비없는 이별에 보면, 나레이션 나오는 부분에 나오거든요. 그대를 보낼 오늘이 수월 할 수 있도록 미운 기억을 주지 그랬어. 차라리 날 미워해. 날 미워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왜? 당신 있음 그 자체가 나는 행복이었으니까, 이런 내용. 미친 것 같아. 배알도 없이 이상한 세계관이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도 사랑이 오게 되면 자기가 함몰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크고 전부가 되고 나는 작고 그대의 부분으로도 감사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부분이라도 감사하기 때문에. 그러면 부분은 부분을 안 바라보지요. 부분은 뭘 바라보지요? 전체를 바라보게 되어있어요.

바로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인간은 어떻게 마지막을 대비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이미 성령 받은 베드로가 성령 받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지금 이런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이런 입장, 어떤 입장이냐 하면 세상과 차이나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세상은 본인들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복음 이야기가 자기 것을 잃지 않고 통지표 있잖아요. 통지표 보면 수학 영어 국어 주욱 있고 기독교 학교 같으면 제일 끝에 채플 하나, 딴 거 95점 90점 채플 85점 이렇게 다 붙이는 것처럼 이것도 필요하고 요것도 그다지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기독교 학교니까 해놓으면 좋겠지 해서 선택과목 하나하나가 뭐냐 하면 교회 가기, 복음 듣기 같은 것을 붙여놓는 거예요. 이런 것은 그런 복음은 없어요.

열두 명의 제자가 열두 명의 제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풍랑과 바다를 꾸짖기 전에 먼저 누구부터 꾸짖느냐 하면 열두 제자부터 꾸짖어요. 너희들은 제로야 제로. 제로란 말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영향력을 끼친다는 말은, 진짜 예수님만 1이 되면, 1이 된다는 말은 풍랑과 바다도 어디에 수렴하니까? 어디에 다 모여들어요? 파도를 치든 풍랑을 치든 다 누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겁니다.

골로새서 1장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사도바울의 핵심을 함축한 귀절 중에서도 그 중에서도 하나가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계시니라

여기서 그가 둘이 되겠어요, 하나가 되겠어요? 1이에요. 1이 되면 나머지는 뭡니까? 1이라고 하면 안 돼요. 기도할 때 누구 이름으로 하라 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하지요. 그 말은 기도에 나오는 개념이 우리보고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이루어서 합치시킨 기도 개념이 기도하는 너를 죄인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기 전부터 너는 죄인인 것을 기도를 통해서 밝혀내도록 내가 하겠다 이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최종적인 1로 간주하는데 1로 간주하는 것을 내가 뭐로 만들겠다? 0으로 만들어버리겠다, 제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이에요. 너는 있으나마나 하다. 하지만 니가 여기 있다는 것을 좋아하지 마라. 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니는 없었는데 있다는 말은 너를 있게 한 그 분이 있다는 거예요. 주님이 있음이고 나는 그 있음에 의해서 새롭게 등장한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예속된 나예요. 나를 그냥 나라고 하면 안 되고 내 배후에 누군가가 나를 했다는 것과 겸해서 이야기해줘야 돼요. 주님과 함께 있다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다.

갈라디아서를 함께 볼까요. 3장 26절에 보면 지금 여러분 읽기도 피곤해하니까 제가 대신 희생하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이걸 가지고 세상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다양성이라고 얘기해요.

다양성은 뭐냐 하면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다음에 뭐라 하느냐 하면 숫자로 나와요. 안에서 하나, 하나 하나가 아니라 그 전체는 하나에 복속되는 거예요. 따라서 나를 보고 하나라고 헤아려버리게 되면 2가 되니까 경쟁관계가 되니 그렇게 하지 말고 나는 항상 하나됨에 의해서 오늘도 하나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하나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도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로가 된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책임질 필요가 없지요. 내 인생이 아니니까. 제로가 무슨 제로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까? 1이 제로에 대해서 책임지지요.

다시 베드로후서로 돌아가봅시다. 베드로후서 6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그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멸망, 물이 넘침으로 멸망되었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우리 인간이 1이라고 본다면 멸망할 걸 왜 만들어놨습니까, 라는 말이 성립이 돼요. 우리가 멸망한다니까, 멸망할 걸 왜 만들어놨습니까, 이렇게 되지요.

이 정답은 이렇게 됩니다. 제목 후보감 나왔어요. 제목, 되찾은 시간.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들었어요. 공간도 만들고 시간을 만들었어요. 공간을 만들 때부터 그 공간을 쪼개는 것을 무엇으로 쪼개느냐 하면 보통 피자 쪼갤 때는 칼로 쪼개잖아요. 하나님께서 창조를 구분할 때는 시간으로 구분했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다, 한 날이다. 그 모든 날은 한 날이 되는 그 하루가 된다는 거예요. 하루는 진짜 하루를 겨냥해서 만든 하루예요. 그게 6이라 하는 것은 1+1+1+1+1+1 그러면 여기는 7이 되어야 될 텐데 7은 여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결론이기 때문에 여기 속하지 않고 1이 돼요. 1이 되어버리면 1에서 1의 다양성이 나온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다양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나왔던 것 같이.

유대인에서 헬라인에서 그리고 남자나 여자에서 뭉쳐서 1로 만들 생각하지 마세요. 이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이에요. 이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여기서 무슨 요소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멸망이라는 요소가 날아가 버려요. 멸망이라는 것은 없음입니다. 없음. 없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것이 멸망이에요.

그동안 왜 있었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있게 한 것뿐이에요. 잠시 있게 한 것을 회수한 겁니다. 멸망이라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이건 원망스럽고 기분 나쁘고 하지만 주님께서 그냥 가져간 거예요. 주님께서는 노름할 때 노름판의 오야입니다 화투 해가지고 확 뿌려놓고 그 다음에 거둬가잖아요. 도로 가져가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멸망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주가 돼요. 심판주가 되니까. 내가 심판할 권한이 있음을 뭘 퍼뜨려놔야 증명 할 것 아닙니까? 퍼뜨려놔서 조질 것은 조지고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멸망이라 하는 것은 모든 창조의 원리대로 내가 실시했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게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온 날이 1 1 1이 무슨 날이겠어요? 이걸 창세기 2장에 보면 무슨 날입니까? 마지막 날이 무슨 날이에요? 마지막 날이 이게 창조의 날인데 이 창조의 날이 안식일의 주인이지요. 시간이 뭐가 되지요? 시간=하나의 뭐가 되느냐? 인물이 돼요. 이 공식이 성립 된다고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안식일이야. 내가. 안식일은 언제부터 언제입니까, 라고 따지는 것은 너희들이 인간들 땅의 시간이 아직까지 흐르고 할 때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되지만 안식일이 누구십니까, 묻는 것은 공간+시간+ 이게 인물화 될 때 가능하다 말이죠.

왜 인물화 되어야 됩니까? 인물화 되어야 이게 성립 되거든요. 이게 사랑이. 노래 또 부를까요? 당신이 없는 시간은 내게 시간이 있어도 이건 시간이 아니라는 거지요. 당신과 함께 있는 하루가 내가 이제사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만큼 소중한 하루인지. 하루만, 제발 하루만. 자기도 시간 많으면서? 아니에요. 당신과 당신에게 내가 본마음을 전할 수 있는 단 하루만 허락해주세요. 제발. 내일 가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만 허락해 달라. 당신의 하루에 내가 종속된 하루가 되면 당신의 하루는 1이 되고 나의 하루는 제로가 되고, 나는 시간 없음이 되고. 또 이 말은 당신의 있음 앞에 나는 죽은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에요. 당신이 살아있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주님은 살아있고 나는 죽었고, 그게 믿음이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같이 십자가에 죽었나니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십자가 졌다는 식으로 없어진 내가 그리스도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없는 내가 나의 이름으로 여기 등장해있는 거예요. 그 관계가 무슨 관계? 믿음.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등장했다는 의미에서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믿음에서 행함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 믿음이 주인공을 찾아가는 믿음. 주인공이 퍼뜨려놓은 믿음, 주인공이 뿌려놓은 사랑, 따라서 그 사랑 앞에 그 개념 앞에 우리의 사랑은 그것은 죄가 되는 거예요.

요한 1서에 보면 4장에 보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면 우리가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사랑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아내 사랑한 것이 진실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누구도 통해야 하는 사랑이에요? 주님한테도 사랑이어야 되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안 받는다는 말은 그 성질 그 본성가지고 주님 말고 다른 걸 강아지를 사랑해도 그건 사랑한 게 아니에요. 강아지 아프면 안락사 시켜버릴 거예요. 집어던져 버릴 거예요. 사람은 내가 귀찮으면 다 만사가 귀찮아요. 내 몸 편한 게 최고입니다. 바른 소리 할 땐 좀 적어놓으세요. 사람은 지 몸 편한 게 최고예요. 이게 진리예요.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고 부모고 다 귀찮아요. 내 몸부터 편해야 됩니다. 국민을 위해서? 거지같은 소리 하지 말고.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은 시간은, 되찾은 시간은 인물이에요. 인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되찾은 시간이, 그 분에서 시간이 나오고 공간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왔다는 것은 그 마지막에 물로 불로 진멸할 때 진짜 불로 됩니까? 언제 물로 심판 받았습니까? 묻지 말고 누가 그 일을 하십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지. 나 이거 구십까지 살았다 하지 말고 누가 죽이십니까? 나는 나를 죽일 마음이 없는데 누가 감히 나를 죽이십니까?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누가 건드립니까? 내가 건드린다. 왜? 이렇게 되거든요.

주께서 미리 건드려준 것을 여러분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건 눈 뜨신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건드려줄 때 나를 진멸의 멸망의 대상으로 볼 때 비로소 나는 그동안 몰랐던 아무리 공부해도 몰랐던 내 자신이 누군가를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내 혼자 거울 보고는 몰랐는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버림받아야 할 대상이었구나, 진멸의 대상이었구나.

그런데 왜 지금까지 진멸 안 했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나한테 여유를 시간적 여유를 주신 거예요. 시간적 여유를. 그런데 그 시간이 아무리 천년이 되든 만년이 되든 관계없어요. 그게 단 하루라도 충분해요. 내가 주님께 구원 받는 시간은 단 하루라도 괜찮아요. 왜? 그 하루에서 코끼리 치약처럼 계속해서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부분 속에서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것이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서 전체가 나오니까.

여러분들이 어릴 때 아는 동화 알라딘 램프 있지요? 램프 종 이름이 뭐지요? 지니지요. 그래서 인공지능 이름이 지니인가? 조그만 호리병 거기 안에 들어있는 머슴도 요만한 줄 알았지요. 막상 끄집어내어보니까 목소리가 보통 톤이 아니에요. 뭘 드리겠습니까? 농구 선수 서장훈이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서장훈이가 이 호리병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원초적 목소리 보이스. 태초의 보이스, 창세기의 보이스가 거기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이용하신 거예요. 다시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주님께서 변화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냥 죽은 자가 아니고 율법의 종이 된 거예요. 종의 특징은 율법이 누군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종으로 부여받은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된 거예요.

율법의 종인데 율법 자체가 겨냥하는 것이 아들을 겨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에서 율법에서는 죄의 종이었는데 율법이 추구하는 완성이 뭐냐 하면 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4장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전체가 부분 안에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끄집어내는 거예요. 율법에서 저주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율법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여러분 아시는 것과 같이 저주에서 끄집어낸다, 또는 진노에서 멸망에서 심판에서 끄집어낸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걸 저는 달리 이야기하겠어요. 인간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인물이 되겠지요. 주님과의 합치된 인물이 되겠지요. 인물에서 다시 시간과 공간으로 파견 근무 나갔어요. 파견 근무 나갑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된 채 시간과 공간을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은 곧 불로 망한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시간 계산은 너무나 자기의 이기주의에서의 시간 계산입니다. 주님이 계산한 것과 다르다. 주님은 시간 흘러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 오실 때 시간은 종식 되는 겁니다. 주님이 타이밍 맞춰서 딱 오게 되면 그 동안 시간은 호리병 안에 모든 시간은 거기 다 들어가 버리죠. 이게 천년이 흘렀든 하루가 흘렀든 천년이 하루같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 안에서 같이 여기서 여기서 나왔다, 출두했다, 여기서 시작했다는 그 원초적인 모습을 시간은 우리를 이끌어내는 이정표 역할 하나의 안내판 가이드 역할을 시간이 하는 거예요. 시간이 가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 공간은? 지금 이 세상에는 시간이 주도해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공간은 시간 따라서 전부 다 쇠퇴하게 되어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시간이 흐르면 모든 피조물들이 썩습니다. 시간이 우위에 있지요. 시간을 이길 수 있는 피조 세계는 없어요. 다 쇠퇴하게 되어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는 한 뭐냐? 아까 그 가사에, 차라리 날 기다리라고 말을 해. 영원토록 영원한 곳으로 우리가 생산되어있다. 우리 성도는 바로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생산되었기 때문에 이 쇠퇴하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다시 한번 돌아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보고 다시 갈라디아서 4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3장 11절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라 그럴 때 이렇게 강의를 들었으니까 우리의 태도는 간단해요. 잘하셨습니다. 원래 하던 대로 되는 게 마땅하지요. 원래 세상이 그런 게 아니겠어요? 주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게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걸 사랑하는 자들아 여기 사랑이라고 나오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누가? 주님이 사랑했던 자들아 너희들은 이미 사랑 안에서 너희들은 저렇게 너 자신의 자체가 주님의 작품으로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구상하는 요건과 요소는 다 수입품이에요. 주님한테 주어진 거예요.

경건과 행실이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죄인 됨을 알 때 이건 말려도 경건해요. 부족합니다. 내가 부족한 걸 알고 모든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나한테 과분한 걸 알게 되면 이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에요. 더 이상 뭘 보탤 것이 없어요. 당신 양말 똑 바로 벗어놓으라고 했지. 양말 함부로 벗어놓으니까 내가 죄인이 되어가지고 또 이런 죄를 짓다니. 이런 남편에게 뭘 더 나무래요. 내가 양말 같은 것에 신경 쓰나? 이렇게 나오면 많이 컸다 요새 개긴다. 올라오네. 풀어줬더니만. 이렇게 되겠지만 그게 아니고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그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너무 과분하다. 당신 죽어봐라. 나한테 그런 소리할 사람이 있는가? 그러면 아내가 기분 나빠가지고 당신은 살고 나보고 죽으라고 하는 거냐? 나 죽고 난 뒤에 장가가려고. 이렇게 나오면 이상한 소리를 할 거지만, 본심이 어쨌든 간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잔소리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결론이 이상하게 되는데.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은 하늘의 요소 때문에 지금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땅의 요소, 나 살고자 하는 요소는 나하고 상관없다고 여길 때 그것이 바로 구분된 그걸 거룩이라고 해요. 거룩을 구분, 땅의 사람과 구분되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걸 잠시 잊어버리지만 성령께서 도와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죄라고 지적을 해줘요. 다시 말해서 니가 개념 니가 스스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경건의 개념에 합치하려고 노력했지. 그런 짓 하지 마라. 니는 죄인이야. 죄를 드러내면 그게 경건이야, 라고 주께서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13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한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소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시간적 바라봄이 아니고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기 때문에 시간은 날아가 버렸어요. 공간적, 이쪽 공간에서 하늘을 새 하늘을 바라보는 거예요. 시간이 몇 년이 흘렀든, 살아생전에 못 먹고 죽든 거기에 관계없이 시간은 관계없어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 시간을 따지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갈라디아서 4장 봅시다.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강의를 이렇게 성경 말씀을 하고 모든 것이 말씀으로 물이든 불이든 말씀으로 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하고 4장 8절부터 이것을 놓쳐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복음 전하고 난 뒤에 반드시 이것을 집어넣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에게 종노릇 하였다 이 말이죠. 종이 되었는데 종노릇, 누르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이 세상의 해석이고 의미예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어찌 종노릇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에게 전하고 수고한 것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내가 헛될까봐 걱정된다, 진짜 걱정된다 걱정 돼.

이 말은 주님이 전한 이 복음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일이에요. 주의 일은 특징이 뭐냐? 나의 일이 아니다는 뜻이에요. 주의 일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덮친 거예요. 성령이 와서 덮쳐버린 거예요. 그러면 내가 했던 일은 뭐냐? 본질상 진노의 자녀, 종의 자녀였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꼼짝 못 했느냐 하면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너무 참고 도서 너무 나를 남들 보여주며 살기 위해서 너무 많은 정보와 학습과 학문과 그런 것들로 둘러싸였고 추가적으로 종교에 관한 날과 절기를 지키는 그것을 가지고 나다, 라고 이렇게 규정해 왔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알고는 무엇을 뚜렷하게 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인데요. 복음을 아니까 복음에서 생산된 사랑이 생산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동안에는 전혀 몰랐던 나를 알게 된 거예요. 나를 알게 되니까 나에게서 나오는 내 죄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들어있었네. 요 귀여운 것, 이것 갖다가 배설물로 버리고, 하이데거도 나오고 이것도 버리고 들레쥬도 나오고 소크라테스도 나오네. 수고했다. 신학도 나오고 조직신학도 나오네. 이것도 버리고. 헬라어 히브리어도 나오네. 이것도 버리고 목회는 이렇게 해야 한다.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 그것도 버리고. 버리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어차피 늙어 봐요. 늙으면 알게 되겠지만 늙기 전에 다 버리는 거예요. 내가 나로 경건한 사람 만들고 내가 훌륭한 사람으로 천당 가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지금은 배설물로 아낌없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내한테 잘 보이고 내가 남편한테 잘 보이려고 마음에도 없는 것도 하고. 그거 해놓고 뒤에 이것을 붙이면 돼요. 당신 내가 사랑해. 뒤에 붙이면 돼요. 이거 마음에 없는 소리야. 갖다 붙이는 거예요. 갖다 붙이는 용기, 그 자신감, 그러면 니가 죽으려고? 바로 그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행동할 때 주위에서 그런 소리 들을 때 니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그런 소리를 주위에서 들으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내가 아니고 다른 나를 집어넣고 육신을 옛날 우리의 모습들이 습관화된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두 종류의 나, 하나는 없어질 나, 하나는 새로운 나,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 성경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함, 죽지 않음,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주어지는 이 개념이 남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들어왔던 개념으로 우리 안에 작동하고 활동하고 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는 죽었지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