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수특강-극단-
[ 질의와 응답 ] - A -
* 질문 - ? ? ?
* 답변 - 죄책감이라는 자기 스스로가 "나는 나쁘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변수가 빠졌다는 겁니다. 이 '변수' 라는 것은, 어떤 결과가 나올 때 여러 가지 요인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죄책감이라는 것에는, 그게 그만 빠지고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강원도의 80이 넘은 할머니가 감자를 캐는데, 그런데 그 할머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강원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강원도 할머니와 광주 518과의 관계는 어떠하냐는 겁니다. 관계가 있는데, 그래서 그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북한을 예로 들면, 북한 원산에 사는 할머니가 감자를 캐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그 할머니과 김정은이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김정은이 실시하는 경제체제가, 그 할머니가 캐는 감자 값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죠.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산 속에 자기 혼자 있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닌데,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라는 말이죠. 지리산에서 약초만 캐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나름 순수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약초를 가지고 5일장에 내려와서 팔려고 하니, 중국산이 들어와서 그만 약초 값이 반값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당연히 화가 나는데, 하지만 그것은 결국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도발이란 겁니다. 자기가 산다는 것 자체가 죄인데, 그러면 그동안 그것을 왜 몰랐는고 하니, 변수를 몰랐다는 말이죠. 자기가 여기에 있기까지 수많은 원인과 결과들이 둘러 쌓여서, 지금 자기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또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밤에만 일을 하러 나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들이 밤에 아버지가 나갈 때, "아빠,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밤에 남의 집 가스관을 타는 것인데(ㅋㅋ), 아버지가 힘을 내야 가스관을 잘 탈 수 있다는 말이죠. 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벌어온 돈으로 자기가 잘 먹고 살아야, 그것이 정의가 된다는 겁니다.
다른 가정도 마찬가지인데, 남편에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돈만 잘 벌어와서 자기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것이죠. 자기 남편이 회사에서 한 일들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얼마나 생기던지 간에, 그런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이 뭐라고 합니까? "김일성이 뭐가 나쁜데?"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자기들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북한은 '유교 공산의주의' 라고 할 수 있는데, 유교는 아버지 체계라는 말이죠. 그래서 지도자를 '아버지 수령'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남한의 경우에도 이 유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우리가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뽑아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를 뽑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둘 다 그냥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닌데, 북한은 유교 공산주의이고, 남한은 유교 민주주의라는 말이죠.
일본 위안부의 경우에도, 그 가족들이 팔아먹은 것인데, 물론 위안부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몰랐겠지만 말이죠. 일본은 돈이 있고, 그래서 돈을 벌어오라고 보냈다는 겁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나 가난했으니 말이죠. 물론 좋은 직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전문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유교체제이기 때문에, 그게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들이 증언하기를 "하루가 지긋지긋하고, 지옥과 같았다" 라고 하는데, 지금 대기업에서 일하는 과장들이 뭐라고 합니까? 역시 그들도 "하루가 지긋지긋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오면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역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죠.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들을 보는 것이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아이돌의 경우에도, 출세를 하려면 그 얼마나 경쟁이 심한지 모르는데, 훈련도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경쟁이 지긋지긋하다는 것인데, 경쟁은 무엇 때문에 합니까? 자기는 살리고 남들은 죽이겠다는 것인데, 자기와 자기 가정은 살리겠지만, 그 이외에는 다 죽인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인간이 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까지 갈 필요도 없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니 옛날 농경사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일단 인간이 손을 대면 다 버려놓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어설프게 공부를 하니, 마치 유기농을 하면 자연을 살릴 것 같은데, 그것은 진리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마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라도 해도 자본이 회전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어도 땅을 작살내는데,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선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알았는데, 사도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냥 "나는 누구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경유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살고자 해서 내가 죽었다. 너는 사는 것을 추구하지만, 나는 죽는 것을 추구한다. 네가 사는 죄와 내가 죽는 의가 서로 만나게 되면, 그것이 곧 천국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받은 면류관조차도 반납하는 곳이라는 말이죠.
교회를 마치 무당집처럼 생각해서, 천국도 더 살려고 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다만 말씀에 입각해서, "제가 지금 죽어도 당연한데, 왜 자꾸만 이 죄인을 살리십니까? 참 이상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야 하는데, 천국에 가기 위함이 아니고 말이죠. "나는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라고, 그 이야기를 하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지켜야하고, 무엇을 조심해야하고, 그런 것을 계산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교회는 이미 끝났는데, 중요한 것은 "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십니까? 왜 찾아오십니까?" 라고 하는, 그 이야기라는 겁니다.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왜 찾아와서는 자기의 피를 주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느냐는 말이죠.
그런 것은 우리 아이디어에는 없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이 타고 다니는 가마, 즉 운반체인데, 그래서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도 다 주님의 것으로서 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 이야기를 하라고 우리를 오늘도 이렇게 살려놓았다는 겁니다.
* 질문 - ? ? ?
* 답변 - 우리가 놓치는 변수가 많은데, 공부를 아무리 해도 놓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극한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변수라고 해도, 자기는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죠.
* 질문 -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서 좀 설명해주세요.
* 답변 -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로 만나는데, 알파는 오메가를 향해서 달리고, 그것은 다 오메가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알파와 오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창세기 1장을 보면 7일인데, 그게 얼른 보면 수평이지만, 사실은 동그라미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시간의 순환이라고 하는데, 즉 "1,2,3,4,5,6,7,1,2,3,4,5,6,7, …",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1에서 6까지는 인간의 노동이고, 7은 노동이 없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노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주님의 노동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주님의 극한,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노동해야 한다는 말이죠. 죄를 짓기 전에는 노동이 힘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는 힘들었다는 겁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무엇인가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 노동했음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즉 노동하지 않음에서 구원과 은혜가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노동하지 않음은 주님의 노동하심인데, 즉 주님의 희생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왜 지옥에 가는고 하니, "이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되는데, 그 소자는 주님의 노동으로 인해서 존재하는데, 그러니 주님의 노동을 모르는 자는 주님과 같이 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이 없는 곳으로 보내는데, 그곳이 바로 영벌, 즉 지옥이라는 말이죠.
순환이 되는데, 그것을 전체로 보면 알파와 오메가라는 겁니다. 즉 알파에서 오메가로 가고, 오메가에서는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데, 즉 끝에서부터 거꾸로 시작이 된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을 이스라엘이 안식일의 반복을 통해서, 즉 율법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인데, 즉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노동의 극한, 즉 십자가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외에는 일체 알기 않기를 원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중간에 놓여있는데, 자기가 무엇을 해도 다 노동이라는 겁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노동인데, 그런 우리의 노동과 주님의 노동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노동은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죄가 된다는 것이 주님의 노동을 반영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도 다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인데, 남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도 남들처럼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것인데, 그 인간다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연장인데, 그 노동이 주님의 노동을 가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가리움이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그 죄를 지적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핑계를 댑니까? "이것을 제가 여수특강에서 다 배웠습니다. 이것도 다 주님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웃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앎으로서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것인데, 그런 의도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가볍게 만드는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챙겨봐야 곧 들통이 난다는 겁니다. 숨길 것이 없는데, 그러면 더 이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없다는 말이죠. 자기 뜻이 아니라, 그 뜻마저도 상위개념인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위개념인, 자기가 자기를 살려야한다는 짐은 한결 가벼워진다는 말이죠.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치 삼계탕을 드럼통에 부으면 그만 잠기고 마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은혜에 충만하면 할수록, '나' 라는 존재는 점점 더 작아진다는 겁니다. 고민해도, 좋아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부자가 되어도 아무 것도 아니고, 가난해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참새와 같은 삶이고 들풀과 같은 삶이라는 말이죠. 솔로몬의 그 화려한 옷도 들풀보다 못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안목이라는 말이죠. 처음 답변은 변수를 놓친 것이고, 이번에는 순환이라는 겁니다. 은혜를 받고 또 죄를 짓고, 그렇게 순환이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이론이고 실습이 남아있는데, 요양사 시험에 걸렸다고 하면 이제는 실습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분들을 잡고 일으키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죠. 여자의 몸으로 병원에 가서 일을 해보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는데, 집에 오면 그만 파김치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요양사는 친절해야 합니다.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고, 실습은 무엇입니까? "이런 영감탱이가 어디서 더럽게 오바히트를 하고 난리야? 나도 집에 가면 귀한 몸이야" 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서 실습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빨리 죽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은 쭈쭈바에 구멍이 난 것인데, 그런데 집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얼른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니 살고 싶은 욕망이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좋은 약이 있다고 하면 귀가 솔깃하고 말이죠.
자기 마음이 자기 것이 아닌데, 주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살면 되는데, 남들을 모방하지 말고 말이죠. 즉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남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면 된다는 것이죠. 이미 빵구가 났으면, 남들은 몰라도 그 빵구를 주님이 내셨다는 것을 자기는 안다는 말이죠. 그 빵구를 통해서 영생이 주어지는데, 그러면 다 되었다는 겁니다.
==========================================
[ 질의와 응답 ] - B -
* 질문 -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에 대해서 좀 설명해주세요.
* 답변 - '7' 이라고 할 때,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개념이 다른데, 시간이 구약에서는 반복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수평적으로 보면 "일, 월, 화, 수, 목, 금, 토", 이렇게 되는데, 여기서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높아지면서 "7×7=49", 그렇게 되는데, 여기서 "49+1=50", 이렇게 되어서 희년(50년)이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수평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 예수님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구약이 다 빨려서 올라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데, 전에 구약에서는 수평적으로 순환이 되다가 신약에서는 수직적으로 된다는 겁니다. 즉 "다 이루었다" 라고 하면서 순환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직도 구약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7'을, 1년, 2년, 3년, 그렇게 본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시간의식도 살아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골로새서 3장 3절에 의하면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는데, 그러면 시간의식도 없다는 겁니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렇게 되면 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사건만 있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보인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때는 십자가 사건 이후인데, 이미 15년이나 지났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적이 없는데, 그때 사도바울은 다소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현장에 없었다는 말이죠.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것은 마치 "지금 네 눈앞에 이순신 장군이 보이지 않는가?" 라는 것과 같은데,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의 인물인데, 그때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여기가 여수라서 관계가 있지 싶은데, 저기 거북선에 올라가다가 두 명이 죽는 사고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지요? 저도 가보았는데, 저는 아직 때가 아니라서 이렇게 살아있고 말이죠.
이순신 장군은 지금 없는 게 맞는데, 서울 종로구에 살고 있다고 교과서에 나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과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이 살던 어떤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의 현실에는 예수님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금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겁니다. 어디에 살아있습니까?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그 현장을 가지고 십자가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죽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는 겁니다. 자기는 죽어도 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었기에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약의 용어를 끌어당겨서, 그 해석은 신약적으로 해버린다는 겁니다. 여기 '7'과 같은 숫자는 다 구약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그런 구약적 용어는 그냥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7년 환란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없는, 예수님을 떠나보낸 이 세상 전부를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3년 반으로 쪼개던 말던 상관이 없는데, 이 세상 전부가 7년 환란이고, 7인이고, 7나팔이고, 666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행할 것은 없는데, 지하벙크를 만들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이란을 공격해서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면, 그러면 그게 핵전쟁이 되고, 그러면 방사능을 피해서 지하로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데, 그럴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리비아와 에디오피아와 러시아가 한 팀이 되고, 그러면 북쪽의 터키가 공격을 하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시나리오를 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깨어라!" 라고 하는데, 666 바코드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전부가 다 사기인데,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천년왕국은 없다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천년인데, 그것은 이미 예수님이 묵시적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이미 죽었다고 하는데, 왜 살 궁리를 하느냐는 것이죠. 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는데, 왜 살아야 하느냐는 말이죠. 구원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느껴서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주님의 도구인데, 주님이 다르면 그만이지, 굳이 자기가 느끼고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아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구나"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마귀가 인간들을 인간의 자기 구원욕망으로 붙잡아 두려고 하는 짓인데, 그래서 성경을 보더라도 문자적으로 보게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약처럼 지켜야하고, 피해야하고, 조심해야하고, 그런 식으로 요한계시록도 해석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언제 "조심하면 구원이 된다" 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내 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인데, 조심한다고 해서 그게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의라는 겁니다. 변수를 모르는데, 어디까지 조심을 해야하느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만 살겠다" 라고 하는 구원의 욕망이, 그것이 구원파인데, 그게 곧 마귀의 이론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이기주의인지 모르는데, 주님은 다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라 자신과 관련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이 되어서,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전에는 그것을 몰랐는데, 자기가 사는 게 하나님의 영광인 줄 알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살고자 하는 것은 주님의 살려주심을 모독하는 것인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처럼 우리는 핍박하는 존재이지,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핍박했다고 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핍박을 하지 말아야 하지"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렇게 뒤처리를 할 자격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데, 이미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살면 되는데, 그리고 그게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죄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동안 잘난 척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나야 복이 오니까 그렇게 했는데, 이 지긋지긋한 자기 집구석을 만회해보려고 말이죠, 남들은 교회에 가서 그렇게 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기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에 다닌 게 아니고 무당집을 다닌 것이란 말이죠.
다만 자기가 살아온 것은 주님이 살려주셔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자기는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데, 집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삽니까?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은 없는데, 다들 살려고 하다가 죽었다는 말이죠. 출근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한다는 겁니다. 사고를 낸 사람도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그만 18명이나 죽고 말았는데, 그러자 제자들이 "휴, 정말로 다행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뭐야, 다행이라고?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된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러면 그 공식에 우리가 맞추면 된다는 것이죠. 죄인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기쁘게 넣으면 되는데, 의인이 되어서 복을 받을 생각은 하지말고 말이죠. 죄인에게 그런 게 주어졌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억지로 하면 악령의 일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성령의 일이라는 겁니다.
* 질문 - 그러면 목사님, 성경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 답변 - 아까 시추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통로를 사용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악마에 갇혀있는데, 그래서 인간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죄가 왕 노릇을 하기 때문인데, 왕은 모든 것을 다 지배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 신은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데 전력을 다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훌륭한데,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믿나?" 라고 하는데, 요즘 교회가 그렇게 가르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제 여러분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세요. 하늘나라 확장에 전력을 다하세요" 라고 하는데, 그게 같은 의미라는 것이죠. 물론 교회가 그런 말을 하는 것에는 항상 제일 뒤에 "돈을 바치세요" 라는 것이 들어가 있고 말이죠.
그게 바로 악마의 짓인데, 아직 뭔가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은 미진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면 거기서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감사를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일종의 자기 전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거기에 구멍을 뚫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하셨는데, 소위 윤리 도덕적으로 잘났다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이죠. 금식을 한다는 것은 주술적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 주막에서 막거리를 한 잔 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도망을 갔다는 말이죠. 주님은 항상 극단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제자들이 몰랐다는 겁니다. 극단이라도 너무나 극단인데, 자기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극단이라는 겁니다. 돌아올 희망이 없는데,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말이죠.
그 극단 속에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들어있는데, 그 극단으로 인해서 인간의 모든 죄가 다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오기 이전까지는 너희가 죄인이 아니었으나, 내가 옴으로서 비로소 다 드러났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 거기에는 말씀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말씀이 우리를 보고 "너는 이래서 죄인이다" 라고 율법적인 기능으로 지적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중심의 해석인데, 그러면 우리는 "아하, 나는 이래서 죄인이구나" 라고 하면서,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제가 지금 보니까 한 쪽 눈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햇빛 때문에 그런가요?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햐여금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오른 눈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둘 중에서 하나라는 겁니다.
단 한 번도 자기 눈으로 죄를 지은 적이 없던지, 꿈속에서도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빼야하는데 아까워서 빼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른 손이 범죄하면 자르라고 하셨는데, 다들 오른 손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것도 둘 중에 하나인데, 죄를 지은 적이 없던지, 아니면 아까워서 자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죠.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오른 눈을 빼고 오른 손을 자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잘난 척을 하는 죄를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오른 눈을 범죄했다고 빼고 오른 손이 범죄했다고 자른다면, 그러면 우리 몸에서 남아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예수님 자신의 오른 쪽 눈과 오른 쪽 손, 그렇게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뽑히고 잘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내부에 있어야하는 피가 바깥으로 나왔는데, 그렇게 피와 죄가 섞여서, 즉 용서와 죄가 섞여서 흘러 넘친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우리의 몸을 적시면 되는데, 그게 마지막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약속을 수행하시면, 우리는 피로 온 몸을 뒤집어쓰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자기 죄와 예수님의 피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만을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게 하루에 2초, 혹은 이틀에 2초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게 짧고 길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구멍이 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멍을 통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인생을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운반체로서, 우리 인생이 아닌 주님의 인생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정상인데, 즉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세례요한 자체가 비정상인데, 십자가에서 보면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의 해석이라는 겁니다.
* 질문 - "깨어 있어라" 라는 의미에서 대해서 한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답변 - 첫 번째는 변수, 그리고 두 번째는 순환을 몰랐는데, 세 번째는 요한계시록의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깨어 있어라" 라는 것은 명령인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룬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이 우리를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의의 왕' 인데, 왕은 그 주특기가 명령이라는 겁니다. 이전에는 죄의 왕이 명령을 했는데 말이죠.
엄마가 아이에게 "이 문을 열지 말라" 라고 하면, 아이는 집에 와서 그 문부터 먼저 연다는 겁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하지 말라" 라고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이 "하고 싶다" 라는 것으로 전환을 시킨다는 말이죠.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탐내지 말라" 라고 하면, 그 순간 탐심이 우리를 덮친다는 겁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라고, 이게 양귀자가 쓴 젠드폭력을 다룬 소설인데,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말이죠. 금지한 것이 없으면 소망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시하기 때문에 말이죠. 류현진이라는 야구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잘 던지지 못하면 관심이 없는데, 그런데 지금 방어율이 제일로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보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그것을 소망하기게 말이죠.
사람이 살다가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나 둘 잘라내어야 하는데, 유럽여행도 가고 싶고 해도 참아야 한다는 겁니다. 처녀시절이라면 연차를 내서 어떻게 해보겠는데, 지금은 아이들도 있고 돈이 많이 들어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불똥이 남편에게 튀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케이블TV에서 매일 광고를 하니 그게 눈에 보이는데, 그러면 그것을 하고 싶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기에 참는데, 열심히 돈을 벌어야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살림살이가 겨우겨우 이어지니 그것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골프를 몰랐는데, 그런데 TV에서 방영하는 골프프로를 보다가 보면, 그것을 하고 싶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람은 계속해서 뭔가 잡아당기는 것이 있는데, 그러면 그것이 없어집니까? 계속해서 눌려져 있습니까? "돈만 있으면, 내가 다 한다" 라고, 그렇게 눌려져 있는데, 그게 바로 정신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위선자가 되는데, 사이코패스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자들이 전화기를 붙들면 2시간이 기본이란 겁니다. 그것을 언어로 풀어야 하는데, 들어보면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같은 레퍼토리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한 바퀴를 도는데 보통 한 시간이 걸리는데, 조금 더 친한 친구면 그게 늘어져서 2시간이 되고, 3시간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전화로 실컷 이야기해놓고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라고 하는데(ㅋㅋ),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나게 되면, 이야기할 것이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은데, 또 생긴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현장성인데, 시도 때도 없이 자꾸만 생긴다는 겁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언어를 남에게 전달하면 자아를 잊어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마음의 고통도 어느 새 없어진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다리가 조금 아픈데, 그런데 불이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제일 먼저 뛰쳐나간다는 겁니다(ㅋㅋ).
인간은 급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서열화를 시켜서, 그 급한 것부터 먼저 처리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쉬운 것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만의 비밀창고를 만들어서, 거기에 차곡차곡 보관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만의 보물창고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그 뾰족한 십자가가 어디로 지나가겠습니까? 우리가 대충 폼으로 앞에 내세운 것으로 지나가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만의 창고에 그만 꼽혀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빵구가 나게 되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자기가 고이고이 감추어놓은, 즉 "주여,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거기에 십자가가 정통으로 박혀버린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데, "형이 그만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다 챙겨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덤으로 잔소리(?)까지 들었다는 겁니다.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것이 바로 부자 이야기인데, 그 부자는 농사를 짓은 농부였는데, 풍년이 들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창고를 크게 지어놓고는,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말라. 이제는 먹을 것이 얼마든지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2시 46분에 주님이 그 영혼을 데리고 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창고에 있는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것인데, 그것을 찾아온 그 사람에게 도로 묻는다는 겁니다.
상당을 하러 왔다가 오히려 질문을 받았는데, 즉 "네가 바로 그 꼴이다"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네가 예수를 우습게 보았다" 라는 것이죠. 즉 "네가 네 자신을 챙기기 위해서 나 예수를 이용했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피를 주셨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잃어버린 돈을 다시 찾으라고 교회에 온다는 말이죠.
"목사님, 저는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고치지 말라는 겁니다. 천성이 그러한데 왜 고치느냐는 말이죠. 다만 그것이 발각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런 개만도 못한 인간에게, 주님이 귀한 피를 흘리셨구나" 라고 말이죠. 물론 그게 2초인데, 어떤 사람은 5초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는 주님이 살아계심에 매일 감사하면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참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깨어 있어라" 라는 것은 명령인데, 2초 동안의 말이죠. 그것은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가 너를 2초 동안 깨어있는 도구로서 현실화를 시키겠다" 라고, 그렇게 주님이 사용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깨어있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명령은 주님이 친히 행하시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할 때 했고 말이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보면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은 예수님을 경유해야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죠.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어떻게 질문에 답변이 되었습니까? 더 이상 다른 질문은 없지요? 배가 고파서 더 이상 못하겠는데, 완전히 본전을 다 뽑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그러면 이상으로서 이번 여수특강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9,17 정리함 - 녹취 구
질의응답 시간이 이렇게 긴 것은 처음입니다.
목사님이 중단을 시키지 않았으면 계속 진행되었을 듯합니다. ㅋㅋ
----'질문응답'은 기존녹취에서 빠진 부분입니다-------
'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특강-사라질 자a (0) | 2020.09.23 |
---|---|
인자의 형상-구득영 (0) | 2020.09.22 |
2020 춘천 여름 특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름 : 정인순 (IP:112.167.88.133) (0) | 2020.08.29 |
여수특강2 (0) | 2020.08.26 |
200824 여수특강, 인자의 형상(에스겔 1장, 10장) 1강, 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 (IP:61.84.208.92) (0) | 2020.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