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Citizenship in Heaven 하늘의 시민권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3:20
date : August 23, 2020
20.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we eagerly await a Savior from there, the Lord Jesus Christ
SUMMARY
When the apostle Paul says,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he means that the matter of citizenship in heaven is not a matter of personal faith or merit, but a matter of relationship with Jesus and of belonging. This is because it is an area where only the Son of God has entered, and thus is a place only permitted to those for whom Jesus has prepared a place there(John14:2-3). 사도 바울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천국시민권의 문제는 개인의 믿음이나 공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며 소속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들어가신 영역이며 따라서 그분이 그곳에 처소를 예비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곳이기 때문이다(요14:2-3).
Therefore, the common point of those who have been given heavenly citizenship is to realize the change in which a 'self disconnected from God' has become a 'self connected with Jesus'. Their original place was a place where they could never enter into heaven, deserved to die, and were abandoned and cursed by God.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권이 주어진 자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단절된 자아’가 ‘예수님과 연결된 자아’로 바뀐 그 변화를 실감하는 것이다. 그들의 본래 자리는 결코 천국입성이 불가능한 자리였고 죽어 마땅한 자리요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자리였던 것이다.
In fact, the purpose of God's having given the law to Israel, which God established as the representative of mankind, is to inform all human beings of their realities. In other words, it is to show how reckless and vain are their attempts and efforts to be saved or to qualify as Heavenly Citizens. In other words, the Law declares that everyone is not qualified and is 'fallen out' and that the way to the tree of life is blocked. 사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대표로 세우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든 인간에게 자신들이 처한 이러한 실상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구원받고자하는 혹은 천국시민의 자격을 얻어 보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와 애씀이 얼마나 무모하고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다. 즉 율법은 모든 사람은 자격미달이며 ‘탈락’이며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차단되었음을 선언한다.
"Now we know that whatever the law says, it says to those who are under the law, so that every mouth may be silenced and the whole world held accountable to God(Rom.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After he drove the man out, he placed on the east side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a flaming sword flashing back and forth to guard the way to the tree of life(Gen.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Heb.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Therefore,'death' is a decisive word that defines the content and character of human life's efforts, achievements, and struggles in one word. Everyone's lifelong achievements have already been judged as “deserving to die”.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의 일평생의 노력과 업적과 분투의 내용과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결정적인 단어이다. 모든 사람의 일평생의 성과는 ‘죽어 마땅함’으로 이미 판결이 난 상황이다.
In spite of the circumstances, man is still struggling. They imagine a heaven that can be explained and entered by their efforts. This is what they themselves want to hold the key to heaven. They intend to remain their final managers. ; "What good thing must I do to get eternal life?..... All these I have kept, what do I still lack?(Mt. 19:16-20)" 형편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이 발악한다. 그들은 설명가능하며 그들의 노력으로 입성 가능한 천국을 상상해낸다. 이것은 천국의 열쇠를 그들 자신들이 쥐고 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최종 관리자로 남겠다는 것이다. ;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19:16-20)”
This attitude is a frontal challenge to God's intentions, which gave him the law of "so that every mouth may be silenced and the whole world held accountable to God ". It has already been declared by the Lord as "since they did not know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and sought to establish their own, they did not submit to God's righteousness(Rom.10:3)" 이런 태도는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된다. 이것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는 판결이 났다.
Therefore, Jesus, who came to this earth because the Word became flesh, did the work of returning humans to their own position where they deserved to be ; “Judas Iscariot, go to your position of Satan!, Peter, go to your position where you betray me!”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들을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셨다 ; “가룟 유다야, 너는 사단의 자리로 갓!” “베드로야 너는 나를 배신하는 자리로 갓!”
If someone prays, "but deliver me from the evil one(Mt. 6:13)" while thinking that he has the ability to escape evil, the ability to protect God's law, or even a little ability to manage and protect his life, his request is nothing more than hypocrisy and the sound of a clanging cymbal. Only when it is sent to the position of abandonment, the place of curse, the place of loss, the place of the cross of Jesus can man sho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It turns out that it is of no use to say that you will protect yourself and live properly according to the law. And you come to realize that the reason you tried to hold on to yourself was because you were conscious of others, God, and your own gaze. 누군가가 악에서 빠져나올 능력 혹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능력 혹은 자기 인생을 관리하고 지킬 능력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라고 기도한다면 그의 요청은 외식이며 허망한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것이 된다. 버림받은 자리, 저주의 자리, 잃어버려진 자리,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로 보내질 때야 비로소 인간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자신이 자신을 지키겠다는 것과 율법을 따라 바르게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짓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버텨보려고 노력했던 이유가 결국 타인과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The reason for the coming of the Holy Spirit is to put his people on the line of Jesus that proceeds according to God's schedule. It is God's planned schedule that both the resurrection and ascension and the Second Coming occur only at the place of Jesus' death on the cross. Only through Jesus' death on the cross, resurrection, and ascension can the Lord send the Holy Spirit to his chosen people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Now, the Holy Spirit, who has come to the saints, puts "Jesus' completion on the cross" into his people. In other words,'the completion of the cross' comes to the believers. 성령이 오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스케줄을 따라 진행되는 예수님의 노선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기 위해서다. 부활, 승천과 재림 이 모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서만 발생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스케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있어야만 주님은 창세전에 선택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실 수가 있다. 이제 성도를 찾아오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자기 백성 안에 박아 넣으신다. 즉 성도에게 ‘십자가의 완료’가 찾아오는 것이다.
According to the judgment that has came in advance, they come to lose their place, which they had been holding, and they are already dead. All the principles that have sustained themselves so far are shattered, the thickness of all the gazes that have stared at them disappear, and tears of remorse for being deceived by themselves burst with emotion; “Lord, I was fooled by myself! I was the monster. As for myself, I really couldn't get out of the devil.” 그들은 미리 찾아온 심판에 따라 그동안 버티고 있었던 자기 자리를 잃게 되고 이미 죽은 자가 된다. 지금까지 그들 자신을 버텨왔던 모든 원리들은 다 뭉개지고 그들을 응시했던 그 모든 시선들의 두께는 사라지며 그동안 스스로 속아온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 감격 가운데 터져 나온다 ; “주님, 제가 저에게 속았습니다! 제가 바로 괴물이었습니다. 저 자신으로서는 정녕 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An example of how Jesus' route, which follows God's schedule, works on his people is contained in the riddle of Samson. The riddle reflects the nature of his mission, which is eventually dedicated as a Nazirite. Samson went down to Timnah to have one of the Philistines' daughters as his wife, and there suddenly a young lion came roaring toward him, and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him in power so that he tore the lion apart with his bare hands. Then he passed by there again and saw honey coming from the lion's carcass, and he ate it. And he presents this quaintness as a riddle: "Out of the eater, something to eat; out of the strong, something sweet(Judges 14:14).” 하나님의 스케줄을 따라 진행되는 예수님의 노선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삼손이 낸 수수께끼 속에 들어있다. 그 수수께끼는 결국 나실인으로 드려지는 그의 일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삼손은 블레셋 딸 중 한 사람을 아내로 삼기 위하여 딤나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어린 사자 하나를 만나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그 사자를 찢어 죽인다. 그 후 다시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자의 시체에서 꿀이 나온 것을 보고 취하여 먹는다. 그리고 그는 이런 기묘함을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로 제시 한다 ; “먹는 자에게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온다(삿 14:14).”
The lion that Samson killed was a predator and a strong one when he was alive, but when he was torn by someone stronger than him, and died, something to eat, something to give life, and something sweet(honey) was out of the lion's carcass. This means that even while being swallowed by the eater and the strong one, God's work erupts out as an element that the eater cannot digest or hold on to. This was evidenced by the fact that "he killed many more when he died than while he lived(Judges 16:30)." Samson achieved the purpose of the Nazirite's hair joined as a sacrifice by his own death. 삼손이 죽인 그 사자는 살아있을 때는 포식자요 강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 보다 더 강한 자에게 찢김을 당하여 죽자 그것으로부터 살리는 것, 먹을 것, 단 것(꿀)이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은 먹는 자, 강한 자에 의해 삼킴을 당하는 중에도 그 먹는 자가 마저 다 소화시킬 수 없고 움켜쥐고 있을 수 없는 어떤 요소로서 분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삿16:30)’는 사실로써 입증되었다. 삼손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제사의 제물로 합류되는 나실인의 머리카락의 취지를 성취한 것이다.
Jesus' death on the cross was to make a 'place of the Lord' in them by dying the same death as his people's as a fellow of his people, and by resurrecting himself first, to make the dead fellow live again as Jesus' own newness. The Holy Spirit came into this world for this very work. Since his people who are to be saved still remain, the Lord sent the Holy Spirit to make Lord's place in them and keeps taking it back.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기 백성의 동료로서 자기 백성과 같은 죽음을 죽으시고, 자신이 먼저 부활하심으로써, 죽었던 동료를 예수님의 자신의 새로움으로 다시 살게 하여 그들 속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건져야할 자기 백성이 아직 남아 있기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 안에 주님의 자리를 만드시고 그 자리를 회수하는 일을 계속하고 계신 것이다.
And when the time comes when there are no more his people in the world, the Lord will come back to the earth where the Lord left. The Second Coming is a declaration of the Lord's will that "he will not come again now." There is no longer a need for the Holy Spirit to come. The unilateral and coerciveness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upon the saints hints at the weight of God's wrath, or the judgment by fire, that will come upon the earth at the time of Jesus' second coming. Therefore, believers on earth need only wait for the Lord to come according to the Lord's schedule. 그리고 더는 남은 자가 없는 시기가 오게 되면 주님은 주님이 떠나셨던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 재림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주님의 의지의 선언이다. 이제 더는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임한 성령세례의 일방성과 강압성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곧 불 심판의 무게를 힌트해 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성도는 주님의 스케줄대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근호
“이제 더는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더는 구원을 말하지 말아야 자인 것을 아는 자가 비로소 구원을 아는 자이다. 자기 구원을 아는 자는 천국에 필요없는 자이다. 오직 주님의 구원하심만 아는 자가 천국백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