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제9강 율법과의 전쟁

아빠와 함께 2020. 8. 1. 12:02

202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9강-룻기 강해: 율법과의 경쟁

자, 마지막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룻기 전체는 시형제 결혼법, 수혼제도, 형수하고 결혼하는 이 제도가 창세기 38장에 유다 가정에서 가정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 룻기에 들어와서는 개인가정이 아니고 개인가정의 어떤 누가 아니라 근친, 가까운 일가친척까지 확대되어서 후견자가 주입됩니다. 이 제도가 이스라엘 전체까지 확장이 되기 위하여 왕의 자리가 보장이 됩니다. 근데 이거는 개인의 가정문제에서 점차 국가 전체가 하나님의 후견자라는 그 취지를 살려내는 식으로 그동안 없었던 왕의 자리가 확보가 되는 거죠. 왕의 자리가.

왕이라는 것은 안에 내용을 쪼개보면 거기에는 후견자라는 그 정신이 이스라엘 전체를 통할하는 새로운 왕의 입지에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만큼 후견자, 단일체제가 왕의 이름으로 등장함으로서 모든 백성들은 율법에 의해서 배제된 그러한 고아와 과부 같은 신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들 소견대로, 자기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렇게 살았던 그 결과가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충분히 반영이 되지 못했다. 그것을 룻기 전체가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 소견대로 했던 그 증거는 바로, 이름은 거창하게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엘리멜렉 가정이 감히 율법이 없는 장소로 자기 마음대로 이탈을 해버리죠. 율법이 없는 그 세계로 스스로 떠나버렸습니다. 이게 자기 소견대로 옳다고 여겼던 그 결정이었죠. 그것은 율법이 반겨주지 않는다. 율법이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소견 안에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내 인생이라는 것은 나 외에 어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하나님이고 뭐 율법이고 예수고 간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이것이 바로 흉년이 들고 환경이 좋지 않을 때 거침없이 분출되는 거예요. 뭐 수련회 끝나고 돌아가도 마찬가지로 결국 남는 것은 내 인생은 나의 것.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가. 뭐 인생 별거 있어요. 이게 전부죠. 이걸 같은 문장인데 부정적으로 문장을 바꾸겠습니다.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져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을 할 때는 강조가 되어야 해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같은 뜻이지만,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져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 유일하게 내가 기대를 걸고, 내가 여기 있다. 있다고 하는 의미 있는 있음은 오직 나밖에 없다.

옆에 누가 있는 것도 인정하고 저 사람도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진정성 있게 있다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있음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가족도 마찬가지에요. 나만 있음이에요. 그것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나만 있으면. 그러면 이것이 기본 소견으로 인간 속에 장착이 된다면 룻기를 공부하든, 지난번에 에스더를 공부하든, 뭐 성경을 공부하든, 어떤 설교를 듣고 뭘 하든 관계없이 이게 요지부동이죠. 요지부동. 오랜만에 사자성어 나왔습니다. 요지부동. 경상도 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끼꾸도 안 한다, 라는 말이 있어요. 끄떡도 없다. 요지부동이니까 달라질 게 없다.

그런데 이 엘리멜렉 가정이 이렇게 자기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이유가, 환경이 어떤 환경이었는가 하면은 바로 놀랍게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있는 그 환경에서 비로소 이 엘리멜렉은 흉년이 들어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한 거예요. 그런 계기를. 율법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 주제파악을 하게 하는 겁니다. 율법을 이렇게 좀 형편이 나을 때, 여유가 있을 때는 지켜보려고 애를 써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있음, 내가 여기 있음에 심지어 율법이라도 뭔가 건드리면 우리는 여기서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분노를 하죠.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그까짓 것, 나는 하나님 없이도 율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이거는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내 속에서 다른 소리가 튀어나와버리는 거예요. 다른 욕구가 튀어나와버리는 겁니다. 그럼 그동안 교회 한 40년, 50년 다닌 것은 뭐냐 하면은 액세서리에요. 겉치레였습니다. 마치 옷처럼, 더울 때 옷 벗어버리면 그만이듯이. 이거는 아쉬울 것이 없으면 갖다 버리면 그만인 걸레조각 같은 거죠.

“율법 좋지. 서로 지키면 착하고 좋지. 괜찮은 사람이 되니까 좋은 거야. 하지만 내가 여기 있음에 대해서 위협이 될 때, 과연 그럴 때도 이 말씀이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 이게 인간이 각각 갖고 있는 소견. 이 소견이 집대성이 되어서 율법으로 있는, 율법으로 주신 그 이스라엘 땅에 각자의 소견이 집대성이 되어 있는 그러한 이스라엘로 변화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봐야 뭐 여유 있을 때나 지키는 척하다가 아쉬울 때는 갖다 다 버리는 거예요. 인간이 요지부동 변함이 없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친히 움직입니다. 소리 없이 움직이죠.

소리 없이 움직여서 이들 전체를 뭐하느냐 하면은 땅이 있어도 땅이 없는 자, 목숨이 있어도 생명이 없는 자로 간주해가지고 친히 하나님께서 고엘, 후견자의 자리에다가,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만드시고 자기 자신을 거기에다가 앉히시는 겁니다. 그 진행과정 속에서 바로 룻기에 일어났던 그러한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짐으로서 다윗 왕이 출현되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룻기에서 우연히 룻이 보아스를 만나도록 이런 일을 하신 거예요.

성경 룻기를 한번 봅시다. 룻기 4장, 제일 마지막을 보겠습니다. 제일 마지막 4장 18절을 보면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여기에 세라는 경쟁에서 빠졌죠. 제치고 나온 베레스. 제치고 나온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 능력이 더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은 친히 어떤 의인들, 인물들을 앞장세워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인물을 보지 마시고, 그 인물을 그렇게 운명 지어지게 한 것은 배후에 율법이 스스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는 인간도 살지만 약속도 함께 살고 있고, 약속은 율법으로서 자기의 본 뜻을 여기에 사는 이스라엘 거주민 사람들에게 계속 나타냈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결국 율법과 인간과 끊임없이 경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경쟁관계죠. 말씀이 현실이냐, 아니면 인간사회가 현실이냐를, 끊임없이 이렇게 물음을 주고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자체가,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은 그런 물음조차도 없죠.

나는 나지 뭐. 나는 나야. 교회는 뭐 마누라가 가라고 하니까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 한번 가주는 것이고. 그것뿐이에요. 나는 나에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니까요. 이게 사자성어로 요지부동, 오늘 제목을 요지부동으로 할까? 요지부동이에요. 요지부동. 40년 교회 다니고 설교 백날해도 요지부동이에요. 요지부동. 뭐 세례 받고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짓거리는 다 했지만 요지부동이에요. 언제든지 본성 속에 있는 암석은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결국 인간은 경쟁관계기 때문에, 우리가 룻기를 수련회를 하면서, 룻기를 통해서 중요한 거, 항상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율법은 스스로 움직인다. 말씀은 알아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신약에 어디에 나오느냐, 히브리서 11장 3절을 한번 봅시다. 내가 먼저 찾아야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철학과 학문과 과학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무릎을 꿇립니다.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그 보이는 중에 요지부동인 우리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나타난 것이 전부가 아니니라. 다른 말로 하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라는 이런 뜻이에요.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을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들은 “말미암아”를 놓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미암아”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 나타나는 것의 결과인데, 이런 결과를 낳는 원인에 대해서는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모든 수사를, 수사 종결지을 수 없다는 거예요. 탐색종결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문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문제는 거울을 보면 내가 보인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으로 하지 말고, 내가 여기 있으니까 중요히 여기지 말고, 도대체 나는 왜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들을 하라 이 말입니다. 내가 왜 있는가? 다시 말해서 있다고 할 때 있으니까 밥 먹어야지, 라고 하지 마시고. 있음은 반드시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없음이죠. 없음에 의해서 있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이 말이죠. 없음을. 나타나지 않는 것이 나를 나타나게 했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 11장 3절을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대자연은 치마폭에 있는 문양들이에요. 치마폭에 있는 그 문양들, 무늬들, 그것은 바람에 치마가 흔들릴 때마다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배후에 뭐가 있어요. 그러면 배후에 있는 게 뭐냐,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그러니까 나타난 것은, 나타난 그것이 시작점이고 끝점이 아니고. 시작점은 보이지 않는 쪽에 있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쪽에.

룻기를 보면서, 아까 그 요지부동 같은 그러한 인생관을 가지고 산다고 했잖아요.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아무도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내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이것을 룻기에서는 자기 보기에 소견대로 했다. 이게 사사시대기 때문에. 사사시대 중에 있는 것이 룻기거든요. 그러면 이 사사시대에 전부 다 자기 소견대로 자기만 치중하고 집중하고 거기에 집착을 하는 그 속에 하나님께서 열차를 하나 운행해요.

그 열차가 아까 보았던 룻기 마지막에, 그 열차가 어디에 도착하는 열차였습니까? 20절에,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절,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절,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그 다음에 종착점은 어디입니까? “다윗을 낳았더라” 그 종착점이 하나님이 율법의 자발적인, 자체적인 율법의 작용으로 왕의 자리를 친히 마련하신 거예요. 왕의 자리를. 왕의 자리에 잠시 열차가 쉬었다가, 정지했다가 가는 겁니다.

그러면 왕의 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왕의 자리는 그다음부터는, 제가 지난 시간에 봤죠. 여러분도 같이 봤잖아요. 솔로몬 왕이 나오는데, 솔로몬은 요지부동 같은 다윗 계통이 아니고, 그 요지부동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가 등장해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우리아에요. 근데 우리아는 죽었으니까, 없으니까 누가 등장하느냐, 우리아의 죽은 자리를 대체해서 등장하는 것이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없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있음과 없음이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약속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나타나는데, 마리아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어떻게 혼자서 임신을 해요? 이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떻게 여자가 혼자서 남자와 동침함이 없이 애기를 낳았느냐. 이 마리아가 남자 없이 애기를 낳았다는 이 자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특이성을 지닌 그런 여자며 인간 속에 작용하고 있는 요지부동의 원칙에 대해서 예외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내가 전부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 나타나는 것이 전부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인간의 이성의 한계, 범주 안에 있는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현상을 줌으로서, 나타난 것의 원인으로서의 없음을, 있음 자리와 대비가 되는 없음, 있음 자리와 경쟁이 되는 없음에서 마리아를 제공하고, 그 마리아에서 예수님이 출몰했습니다. 등장했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요지부동 하나밖에 모르는 그 인간을 네가 믿을 거냐?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없음에서 출현한 그분을 믿을 거냐? 우리보고 요구하는 거죠. 예수를 믿는다면 신구약성경 해석을 다시 해라. 그동안 네가 해석한 것은 요지부동의 원리원칙에 준해서 해석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아니면 나를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신에게 기도해서, 빌어서, 헌금하고 바쳐서, 순종해서, 결국 목적은 뭐냐, 있는 나를 더 살리고자 하는 그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던가요? 여러분. 교회에 와서. 내 가족 잘되고 내 식구 잘되고. 내 식구 감싸기. 우리 애 말 잘 듣고. 우리 집안이 넉넉해서 내 욕망을 마음껏 교환할 수 있는, 놀러갈 수 있는 돈을 모으는 거죠.

당신 취미가 뭐예요? 이 세상의 취미는 똑같은 취미, 한 취미밖에 없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 돈 모아서 쓰는 재미. 아, 이거 말로만 해도 감격스러워요. 저는. 목사가 되던 집사가 되던 장로가 되던 관계없어요. 교회 교인이든 아니든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은 돈을 제발 원 없이 모아서 원 없이 쓰고 싶은 것. 그 소원 말고 다른 소원이 뭐 있습니까? 그게 안 되니까, “하나님이여, 저를 왜 이렇게 학대하십니까? 힘들게 하십니까?” 이런 소리를 해요. 자기 취미활동을 방해하니까 그렇게 나온 거예요.

룻기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지만, 그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나오미가 도발적인 제안을 했잖아요. 막무가내로 자기 며느리를 첫날 밤 만들라고 집어넣었죠. 여기에서 보아스가 그 도발적인 제안을 거절하는 겁니다. 들이미니까 도로 받아서 밀어버려요. 안됩니다. 이거는 아니죠. 물어볼 사람이 있습니다. 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보아스는 주춤합니다. 그 대신 보아스는 자기가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고려하기 위해서, 룻이 우리 둘이 합궁하기 위해서 가져왔던 그 천, 그 넓은 천에다가 자신의 농산물을 가득 담아서 돌려보내요.

우리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고, 끊어진 것은 아니다. 율법에 준해서 순번이 있기 때문에 그 순번을 지키겠다. 새치기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은 고려해보겠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 대해서 좋은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라고 해줬죠. 평소에도 이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 같으면 다 추수하고 땅에 떨어진 것을 줍는데, 일부러 이 보아스는 룻을 감안해서 특별히 젊은 애들에게 그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단을 대충 묶은 거 있잖아요. 일부러 많이 떨어지게 해가지고 룻이 많이 가져가도록 특혜를 베풀죠. 이것도 직장 내 특혜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베풀어서 호감을 보이는 겁니다.

이 이방여인이 율법이 싫어서 도망친 그 가정 내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전혀 모르는 그 여인을 통해서 율법을 되게 사랑하는 여인으로 만들어서 같이 도로 율법 세계로 집어넣는 그 작업을 했다는 것이 바로 룻기의 중요한 테마가 돼요. 룻기의 테마가. 이래 들었으니까 룻기 다 끝나고서 나는 룻기 모른다고 하지 마세요. 율법이 스스로 움직여서 될 수 있는 대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율법 안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후견자 노릇을 자처해서 나서는 겁니다. 후견자 노릇을.

그 후견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 구체화된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아까 룻기 마지막에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그러한 죽음의 세계, 좀비들의 세계. 좀비들은 뭐냐 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세계에 그 황무지에다가 특급열차 하나를 운행하는 거예요. 그 종착점은 왕의 자리까지. 그 열차에 뭐가 실리는가? 고엘, 후견자의 속성을 가득 싣고 달립니다.

따라서 22절에 보면, 룻기 제일 마지막에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래 되었죠. 여기는 간단하게 되어 있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그러나 사무엘상 16장, 17장을 쭉 보게 되면 이 열차가 그냥 아무 영향 없이 그냥 달리는 게 아니에요. 그 열차 내에서도 바로 요지부동의 원칙,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달리 하면 아무도 나의 인생을 남이 대신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치마폭에 있는, 바람 불면 휘날리는 그러한 문양의 세계죠. 이걸 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러한 인간들의 나타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실루엣이라고 했어요. 실루엣. 실루엣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한옥 같은데 창호지가 있잖아요. 창호지가 있고 그 방에는 촛불이 켜있으면, 바깥에서 이렇게 보게 되면 분명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그 사람의 뚜렷한 입체적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3D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차적인 표면적인 실루엣이 창호지에 얼룩거리죠. 예를 들어서 칼을 가지고 그 방안에 자객이 들어와서 그 대감을 죽이는 사극드라마가 너무 잔인하게 보인다면, 그것을 실루엣 처리합니다. 두 실루엣이 있는데 등치가 큰 실루엣이 칼을 빼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보이는 것은 창호지에 피가 쫙 뿌려지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죠.

그냥 실루엣이에요. 뭔가 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루엣으로 나타난 겁니다. 후견자로 나타나요. 후견자.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는 것. 그게 전부인줄 알고 있는 인간들. 그래서 그들이 배웠던 것이 온 몸에 내성이 된, 습관이 된 것이 뭐냐 하면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에요. 내 인생은 나의 것. 자녀들 보세요. 이거는 귀신입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 것 챙기는 것은 천재들이에요. 타고났어요. 타고났어. 자식들. 형제간에 싸우는 것을 보면요. 살벌합니다. 나중에 부모 죽고 난 뒤에 유산 싸움이 더 본격적으로 되겠지만.

그거는 또 자기 패거리가 있어요. 아들 둘이 유산 싸움하면 아들 뒤에 각자 자기 부인들이 있어가지고 2대 2로 붙어요. 2대 2로. 살벌합니다. 왜냐하면 양보가 미덕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양보하면 이거는 쪼다소리 듣고 병신소리 듣거든요. 그 병신 누구냐? 룻이에요. 룻은 율법의 세계가 좋아서 자진해서 들어온 사람이에요. 물론 뒤에서 하나님이 밀었지만. 문제는 나오미가 철저하게 그 순진무구한 룻을 이용했다는 사실이에요. 자기 가정의 어떤 회복을 위해서.

자기 약점을, 남들에게 약점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약점이 아니고 남들의 기대치가 내 자아라는 통속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때부터 남들에 대한 욕망을 나의 결핍을 대체하기 위해서 나는 추구했고,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나는 따라줬고, 그 결과물로 내 안의 빈 통을 채웠고. 따라서 내 안에 있는 모든 행동은 남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그렇게 대체했고. 남들 보기에 꼴좋다. 남편하고 자식하고 산다고 하더니만 남자들 다 죽이고 오네. 이 불결한 여자야! 너는 여자로서 인생은 끝났어. 종쳤어. 너는 벌 받은 거라는 그러한 비난을 의식하면서 기가 팍 죽어 들어왔고.

자기는 그것에 대해서, 율법의 세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가지고 하나님의 손이 나를 쳐서 나는 나갈 때는 기분 좋게 나오미로 나갔는데, 나오미가 옛날 영화배우라는 것이 이제 생각나요. 나오미로 나갔다가 졸지에 완전히 슬픔의 여인이 되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자기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인생은 나라고 하면 자기 인생 자기대로 살지, 내 인생은 나라고 하면서 딱 깨보니까 내 안에 내가 들은 것이 아니고 남들의 요구조건이 가득가득 들어있어요. 얼마나 인생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참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요. 힘들게. 괴롭게.

이것은 바로 여기에 룻기 4장에 나오는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느니라”라고 할 때에 이 이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에요. 다윗의 아버지도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이러한 원칙, 요지부동인 일반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생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니까. 뭐 건성으로 하나님 믿죠. 흉내 내기로. 근데 바깥에는 그렇게 돼도 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인간은 나타난 치마폭에 있는 문양처럼 일종의 하나의 외피, 껍질, 우리는 껍질만 그냥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 안에 실루엣으로 들어있는 주님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느냐는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오라고 그리스도가 작용하시는, 주님이 작용하시는, 물론 실루엣이지만, 다른 특이한 실루엣을 룻기에서는 룻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거예요. 이방여인에게.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2장 20절에, 시간관계상 다 찾지는 않겠습니다만. 출애굽 할 때에, 여러분! 전에 출애굽이 기억나실 거예요.

너희들도 애굽에 있을 때는 이방인이었고 나그네이었다. 그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 약속의 세계로 들어올 때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하고 있느냐, 라고 물어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너희를 도와주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도와주셔서 노예생활 하는 너희들을 이 약속의 땅에서 자유민으로 이렇게 전환시켰잖아. 그러면 그 요소가 너의 인생 속에 그게 들어있어야지. 그게 남아있어야지. 아니 그걸 쏙 빼느냐 이 말이죠. 그걸 빼버리면 도대체 너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형성이 안 돼버리죠. 그걸 빼면 안 되죠.

나 있다는 것은 인정해주겠는데, 나 외에 타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너도 그걸 자각을 하라 이 말이죠.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너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왜 말을 못해? 왜? 너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너 있다는 것을 왜 못하느냐 이 말이죠. 너는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하느냐 이 말이죠. 이 김정은아! 드라마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이보고 그런 이야기했어요. 왜 말을 못하냐 이 말이죠. 왜 자꾸 너는 홀로 살라고 하느냐. 홀로. 홀로 살라고 하는 것을 욜로라고 하죠. 왜 혼자 살라고 하느냐 이 말이죠.

혼자 살게 되면 결국은 이게 뭐냐, 자살대기조에 포함이 됩니다. 지금 자살할 타이밍을 못 찾아서 못 죽어요. 버티다 버티다가 결국 마지막 가는 길은 뭐냐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도 아니고 장렬하게 자기 자신이 죽는 거예요. 죽을 때도 왜 그렇게 죽느냐 하면은 내 안에 남들의 시선이 있으니까, 남들한테 복수한다고 죽는 거예요. 남을 왜 믿어요? 남을 믿을 게 뭐가 있다고 믿습니까? 다 똑같은 인간들 소견대로 하는 것인데. 그냥 아무 관계없어요. 이 세상은 좀비들 세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결국 인간은 말씀이 철수되면, 쓸모가 없으면 죽어요. 죽는데, 구원이라는 것은 간단해요. 장차 올 죽음을 미리 당하는 겁니다. 어차피 주님이 우리를 죽일 것, 심판할 것, 십자가에 합류해서 그 심판을 미리 당겨서 받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그 처참함 그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는 입장인 것을 미리 간파해서 그 십자가를 수용하는 겁니다. 부활을 수용하지 마시고요. 십자가를 수용해줘야 돼요.

룻기 마지막 그거는 따로 남겨두고요. 찾기 쉽도록. 고린도전서 2장 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2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절,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경쟁적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경쟁하기 때문에 나의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에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는 내 쪽에서 뭔가 손을 썼다는 것이 전혀 없어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손을 썼다는 것이. 교재 3페이지를 한번 봅시다.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인간은 기존의 언어로 이 십자가에 맞서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구분과 대립이 사라진 장소, 존재라고 볼 수 없는 사건이 언어의 땅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를 선언하는 순수한 이름(언약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자리다. 이때의 존재 형식은 공백이다. 언어는 이러한 공백을 포착하기에 무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뭔가 괜찮다 싶으면 전부 다 정보화를 시켜요. 자기 지혜로 전부 다 자기에게 적합하도록 조작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데 십자가 능력만큼을 그렇게 해서 될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는. 왜냐하면 십자가마저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우리의 지혜의 조치, 요지부동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조치를 십자가는 오히려 공격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께서. 십자가 믿으니까 천당가볼까? 하는 그것을 누가 공격하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공격해요. 왜? 우리는 오직 모든 의미가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그걸로 마감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로 마감되기 때문에.

프랭크 시나트라가 열심히 불렀던 그 노래 있잖아요. 마이 웨이. 그 마이 웨이 그 가사를 보세요. 나는 한평생 후회 없이 살았노라. 이제는 나는 죽을 때도 나하고 싶은 대로 내 방식대로 다 살았다. 마이 웨이. 뒤돌아보니까 나는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 친구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간다. 이거라 이 말이죠. 마지막 커튼이 쳐졌을 때. 그 사람은 지금 십자가에 된 통으로 맞아본 적이 없어요. 저는 이 요지부동이라고 하지만 이걸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강화유리. 굉장히 강렬해요. 단단해요. 그런데 한번 깨져보세요. 깨질 때 어떻게 깨어집니까? 그야말로 여지없이 조각조각 나서 그 자리에 조각들이 수북이 쌓이죠. 십자가 뾰족한 것으로 한번 우리 강화유리를 맞아봐야 돼요.

어차피 죽을 것, 십자가 그 모서리가지고 된 통으로 한번 맞아가지고 그 부분만 빵구 나면 안 되고요. 그거는 더 괴로운 것이고요. 나머지 안 맞은 곳까지, 아직까지 살아보지 않은 인생, 모두 다 완전히 와르르하고 조각나서 다 무너져야 해요. 그래야 됩니다. 괜히 이 강화유리 있으면요. 이거 꾸민다고, 인테리어 한다고 색종이 붙이고 이쁘게 하고 이렇게 하거든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나는 내 인생 즐겁다고 사는 것이다. 나만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해가지고 평생을 살면서 온갖 것 다 붙여놨어요. 대부분 집에 가면 그게 무슨 가게냐 하면은 골동품가게에요.

이게 심화되어 치매환자 되면 쓰레기가 한 두 트럭이 나올 걸요. 치매환자들은 괜히 할 일 없으면 밖에 나가서 무조건 쓰레기 모읍니다. 본인은 쓰레기라고 생각 안 하죠. 스티로폼, 버린 쓰레기, 택배상자, 전부 다 집에 가져와서 모을 때, 평소에 있는 게 뭐냐 하면은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밖에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그것이 자동화된 채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수북이 내 것으로 채우는 것, 그것이 나를 나답게 지켜줄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여기는 것.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절에 가도 마찬가지고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마찬가지죠.

교재 4페이지 봅시다. 『인간의 폐위(廢位)는』 인간의 자기 왕노릇 그만두라. 그만 내려오라는 것이죠. 『그동안 진리 점유에 대한 폐위로 이어진다.』 그동안 진리라고 하는 것은 나 잘 되기 위한, 내게 필요한, 내게 진리거든요. 보편적 진리가 아니고. 나만 왕이 되어서 무조건 인정받고자 하는 진리. 또는 타인이 나를 우러러 볼 수 있는 그러한 필요한 재료들을 우리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조작해서 오인해서 우리는 갖고 있는 거예요. 온 쓰레기들을. 이것이 인간들이 사회를, 눈에 나타난 것을, 보이는 것을 해석하면서 그런 식으로 수집해온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폐위를 인정한다면 그동안 인간들의 해석 규칙에 속아 넘어가자. 이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서 도리어 방황하게 된다. 인간이기에 같은 인간들에게 충분히 속자. 그리고 그 속임수에 본인이 충성스레 기여 있음을 인정하고 빠져 나와야 한다.』

인간들의 해석 규칙에 속아 넘어갑시다. 누가 누구한테 속는다? 내가 나한테 충분히 속아 넘어가고. 내가 나한테 “나는 잘났어. 나는 훌륭해. 나는 잘 될 거야. 나는 성공할 거야. 나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나를 살리는 거야.” 그런 구호를 외치면서, 자기 자신에게 주제파악도 안 되고 속였어요. 충분히 속고 그 다음에 강화유리가 십자가에 박혀가지고 완전히 쓰레기로 주저앉았습니다. 그게 주저앉아야 돼요. 율법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 룻이 나오미 앞에서, 소위 속물적인 나오미 앞에서 피해자처럼 움직이듯이. 피해자처럼 움직였거든요. 앵벌이 했잖아요. 앵벌이. 룻이 나오미 앵벌이 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한 것처럼 룻은 스스로 자기를 위한 삶이 없어요. 시어머니가 하는 일조차도 율법세계에서 율법이, 말씀이 나한테 지시하는 지시로 여겼던 겁니다. 똑똑한 체 한 해도 돼요. 룻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냥 멍청합니다. 바보 같아요. 배알도 없고 아무것도 내 것이라는 게 없어요. 뭐 모아놓은 것도 없어요. 이용만 당하죠. 그래서 생기가 발랄한 거예요. 내 게 없으니까. 납작하니까. 그래서 생기가 발랄한 겁니다. “아니, 하나님이여! 내 남편 왜 죽이십니까?” 신세한탄 같은 것은, 이런 것은 다 룻한테는 없어요. 그것도 뭐 주의 뜻이겠죠. 그러니까 룻은 말씀의 외피입니다. 말씀이 이끄는 대로 그냥 자기는 흔들리면 되는 것이죠. 파도타기처럼 재미만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좀 이상하죠.

자, 룻기 마지막에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는 이 말씀을 드리고 모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될 때까지 룻기에서 나오는 룻과 같은 현상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왕으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서는 동일한 속성만 실리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으로 가는 기차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룻기에서 일어난 일,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 동일하게 반복이 돼서 달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제발 강화유리 부서지고 등신 되라고, 바보 되라고 우리보고 하는 겁니다.

다윗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윗이 바로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일은 꼭 룻 같아요. 아무 어떤 대책이 없이, 앞뒤 없이 그냥 달려들었습니다. 어떻게 율법이 없는 자한테 율법 있는 자가 쪼느냐? 쫄아서는 되겠는가? 그거 율법 없어. 할례 받지 못한 자야. 그 골리앗은. 그럼 우리는 할례 받았잖아. 만약에 그 뒤에 말이 있다면 이런 말이죠. 아니, 저 사울 왕과 어른 여러분! 제 말 틀렸어요? 저 사람이 등치가 큰데 허풍입니다. 음식가게 신장개업할 때 전봇대같이 비슷한 풍선해가지고 열심히 흔드는데 땀도 안 흘려요. 흔들리죠. 근데 코드 빼버리면 그냥 주저앉아요. 안이 허풍선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 세상이라는 권력이라는 것에는 율법이 없어요. 복음이 없어요. 십자가가 없어요. 십자가가 없는 것에 우리가 왜 쫍니까? 좀비인데. 등치 큰 좀비, 등치 작은 좀비, 뚱뚱한 좀비, 전부 다 좀비들이거든요. 안 믿는 배우자하고 사시면 좀비하고 사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만 챙기니까. 나만 챙겨요. 그 사람들 자기만 챙겨요. 그게 타고난 본성이거든요. “그래도 뭐, 복음은 몰라도 저한테 얼마나 잘해준다고요. 목사님은 우리 가정을 몰라. 복음은 몰라도 얼마든지 내 비유 맞춰주고 잘해주고 애쓰는데.” 이렇게 하는데, 그 선행은 복수심입니다. 복수심. 뒤에 칼날이 들어있어요. 자기 의미, 자기 의를 축적하는 것. 나를 상대로 자기 의를 지금 통장에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에요. “니는 예수 믿고 천당 가라 나는 착해서 천당 간다.” 지금 그 노릇하고 있다고요.

소년입니다. 소년은 어른에 비해서 힘이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소년 다윗의 의미는 뭐냐, 없음이에요. 없음이고 어른들 보기에는 되게 무모합니다. 소년 다윗은. 그 3미터가 넘는 등치 큰 골리앗에 대해서 청소년 하나가 변변치 않은 무기, 뭐 동물이나 짐승 잡는 무기 하나 들고 와가지고 달려드는 것은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다윗의 무모함 뒤에는, 없음 이외에는 하나님이 할례 입은 백성이 율법대로 시행한다는 하나님의 엄청난 있음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장 미약해 보이는 소년 다윗을 가장 힘 있게 보이는 골리앗과 대결시키는 겁니다.

유대인 학자들은 하여튼 지어내기는 잘 지어내. 그 골리앗의 증조할머니를 누구로 보느냐 하면은 오르바로 봅니다. 오르바. 여러분 오르바가 누구인지 아시죠? 기룐의 부인. 룻기 1장 4절에 나오는. 룻과 동서지간에 있었던,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라면 오르바는 다윗과 결투를 붙었던 그 골리앗의 증조할머니가 오르바가 돼줘야, 이게 소설이 상품이 되죠. 드라마가. 하여튼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신앙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그런 쪽으로 해버려요.

근데 가만히 생각하면 참 재미있는 일이거든요. 역사에서 잠시 헤어졌는데 그 4대 후손이 일대일로 맞짱 뜨는 식으로 나타나서 결국 승리는 누가 했습니까? 다윗이 승리했잖아요.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가 이스라엘 젊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먹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확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성경해석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있음 자체를 강화유리를 만들기 하기 위한 해석이에요. 현재 이스라엘이. 그거는 뭐 이스라엘도 아니고 마귀단체죠. 뭐 이스라엘이 희망을 걸고 제3성전이 세워질 때 재림하신다고 하는데, 그건 정말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는 그러한 정보획득, 기발한 정보획득으로,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 돼요. 끊임없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실루엣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소년 다윗이 승리하고 돌아오니까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년 다윗아 대단하다. 훌륭하구나. 이렇게 하니까 누가 한심스럽고 답답하냐면 소년 다윗이 그런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무엘상 17장에서, “이번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고 실체되시는 만군의 하나님의 전쟁입니다.”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물론 그 언급한 것은 방송에서 편집되어 막 나올 거예요. 이렇게 소년 다윗은 대단하다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보잘 것 없는 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타내심을,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 스스로가 우리의 보호자 되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건이 다윗으로 하여금 드디어 사울 다음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유일한 왕으로서, 그 왕 자리와 소년 다윗을 하나님이 내세움이 일치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오늘날 성도를 뭐라고 하느냐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해요. 너는 십자가 안에 있는 거예요. 십자가는 인간의 나타난 것을 훼손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다시 말해서 나의 모든 것과 경쟁자이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일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있더라도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살아서 복음을 복음대로 십자가 복음만 자랑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쓰여 지고 있다는 거예요. 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육체가 다할 때까지 쓰신다는 주님께만 감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러운 세상을 달리는 기차 안에 저희들이 탑승객이라고 일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기차 안의 원리원칙이, 늘 십자가가 요지부동 같은 나밖에 모르는 것과 싸움이 된다는 사실을 영원토록 주님 나라에 갈 때까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