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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름수련회-천국의틈(룻기)총9강-재정리(수정본) 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아빠와 함께 2020. 8. 30. 21:31

202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룻기) 9강, 율법과의 경쟁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이미아 집사

* 지난 시간을 잠시 정리하면 !!

이제 마지막 시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룻기 전체는 시형제 결혼법, 이것을 '수혼(嫂婚, Levirate Marriage)제도' 라고 하는데, 즉 형수하고 결혼하는 이 제도가 창세기 38장에서는 유다 가정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했는데, 룻기에 들어와서는 개인가정이 아니라, 즉 개인가정의 어떤 누군가가 아니라, 가까운 일가친척까지 확대가 되어서 여기에 후견자가 주입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 제도가 이스라엘 전체까지 확장되면, 여기서 왕의 자리가 보장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가정문제에서 점차 국가전체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후견자라는 취지를 살려내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그동안 없었던 왕의 자리가 확보된다는 겁니다. 왕의 자리가 말이죠.

이 '왕' 이라는 것은, 그 안의 내용을 쪼개보면 거기에는 '후견자' 라는 정신이 이스라엘 전체를 통할하는데, 그것이 새로운 왕의 입지로서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후견자, 그 단일체제가 왕의 이름으로 등장함으로서, 모든 백성들은 율법에 의해서 배제된, 즉 고아와 과부와 같은 신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즉 자기들의 욕구대로 살았던,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던,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겁니까?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이 룻기 전체가 보여준다는 겁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렇게 자기 소견대로 했던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거창하게 "하나님은 나의 왕이다" 라고 이름을 지었던 엘리멜렉 가정이 어떻게 합니까? 감히 율법이 없는 장소로 자기들 마음대로 이탈을 해버린다는 말이죠. 율법이 없는 그 세계로 자기들 스스로 떠나버렸다는 것이죠.

*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

이게 바로 자기 소견대로 옳다고 여겼던 것의 결정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이 반겨주지 않는다. 율법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라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소견에 들어있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한 번 적어보겠는데,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라는 것인데, 즉 "내 인생은 나 외에 그 어떤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하나님이든 율법이든 예수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흉년이 들고 환경이 좋지 않을 때는 거침없이 분출되는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수련회가 끝나고 돌아가도 마찬가지인데, 결국 남는 것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라는 것인데, 인생이란 것이 별 게 없는데, 이게 전부라는 겁니다.

이것을 같은 문장이지만 부정적으로 바꾸면, 즉 "내 인생을 책임져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부정을 할 때는 없다는 것이 강조가 된다는 말이죠. 이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라는 것과 같은 뜻이지만, 자기 인생을 책임져줄 사람은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기대를 걸고,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할 수 있는 의미가 있는, 즉 '있음' 이라는 것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는 말이죠. 물론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진정성이 있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그 '있음'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는 겁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인데, 오직 '나'만 있음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만 챙기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기본적인 소견으로 인간 속에 장착이 된다면, 룻기를 공부하든, 지난번처럼 에스더서를 공부하든, 무슨 성경을 공부하든, 그리고 그 어떤 설교를 듣고, 무엇을 하든 관계없이 이게 '요지부동' 이라는 말이죠. 오랜만에 사자성어가 나왔는데, 경상도 말에 "끼꾸도 안 한다" 라는 것이 있는데,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지부동이니까 달라질 게 전혀 없다는 것이죠.

* 본색을 드러낸 엘리멜렉 가정 !!

그런데 이 엘리멜렉 가정이 이렇게 자기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이유가, 그게 어떤 환경이었는고 하면, 그것은 바로 놀랍게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있는 그 환경에서, 이 엘리멜렉은 기정은 흉년이 들어서 비로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주제파악을 하게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율법을 형편이 그래도 좀 나을 때는, 여유가 있을 때는 지켜보려고 애를 썬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있음, 즉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 그게 율법이라도 건드리면 우리는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말이죠. 그렇게 화를 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이, 그까짓 것이 뭐라고 말이야. 나는 하나님이 없이도, 율법이 없이도 살아갈 수가 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다른 소리가 그만 튀어나와 버렸다는 말이죠. 즉 다른 욕구가 튀어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교회를 50년이나 다닌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악세사리이고 겉치레였다는 말이죠. 마치 외투와도 같은데, 더울 때는 그런 옷은 벗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아쉬울 것이 없으면 갖다 버리면 그만인, 그런 걸레조각과도 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 참 좋지. 서로 지키면 착하고 좋지. 괜찮은 사람이 되니까 좋은 거야. 하지만 내가 여기 있음에 대해서 위협이 될 때, 과연 그럴 때도 이 말씀이 굳이 필요할까?" 라고 하는 생각, 이게 우리 인간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각자의 소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있는, 율법으로 주신 그 이스라엘 땅, 그것이 그만 각자의 소견이 집대성이 되어버리는 이스라엘로 변화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봐야, 그것은 여유가 있을 때나 지키는 척을 하는 것이지, 아쉬울 때는 그만 다 버린다는 겁니다.

* 율법은 친히 움직인다 !!

그렇게 인간이 요지부동 변함이 없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친히 움직이는데, 소리도 없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움직여서 이들 전체를 어떻게 하는고 하니, 땅이 있어도 땅이 없는 자로, 목숨이 있어도 생명이 없는 자로, 그렇게 간주해서 친히 하나님께서 고엘, 즉 후견자의 자리,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만드시고, 자기 자신이 친히 거기에 앉는다는 겁니다.

이러한 진행과정 속에서, 바로 룻기에 일어났던 그런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짐으로서, 다윗 왕이 출현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룻기에서 우연히 룻이 보아스를 만나도록 일을 진행시키셨다는 겁니다. 율법이 개입하도록 해서 말이죠.

* 베레스의 세계 !!

이제 룻기의 제일 마지막 장인 4장을 보겠는데, 18절을 보면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라고 하는데, 여기에 세라는 경쟁에서 빠졌다는 겁니다. 세라를 제치고 나온 베레스인데, 그런데 이렇게 제치고 나온다는 것은 자기에게 어떤 능력이 더 있다가 아니라는 말이죠.

(룻 4:18)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은 친히 어떤 의인들을 앞장세워서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떤 인물 개인을 보면 안 되고, 그 인물을 그렇게 운명지어지게 한 것은 배후에 율법 스스로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는 인간도 살지만 약속도 함께 살고 있고, 그 약속은 율법으로서 자기의 본 뜻을 거기에 사는 이스라엘 거주민들에게 계속 나타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결국 율법과 인간과 끊임없이 경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즉 경쟁관계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말씀이 현실이냐? 아니면 인간사회가 현실이냐?" 라고, 그것을 끊임없이 묻고 있는데, 우리가 그런 물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자체, 그것이 곧 우리는 행복한 사람임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물음조차도 없다는 말이죠.

* 요지부동(搖之不動) !!

그들은 "나는 나야. 교회는 마누라가 가라고 하니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한 번 가주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냥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을 사자성어로 '요지부동'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마지막 시간의 강의제목을 요지부동으로 할까요?

제 아무리 교회를 50년 동안 다니고 설교를 매일같이 들어도, 그야말로 요지부동이라는 겁니다. 물론 세례도 받고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짓거리는 모두 다 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라는 말이죠. 언제든지 본성 속에 들어있는 암석은 튀어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경쟁관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번에 수련회를 하면서, 이 룻기를 통해서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율법은 스스로 움직인다" 라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말씀은 알아서 스스로 움직이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한다는 겁니다.

그게 신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3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그야말로 이 세상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모든 학문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린다는 말이죠.

*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

그러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보이는 것 중에는 요지부동인 우리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나타난 것이 전부가 아니다", 혹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개역성경)

(히 11:3)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현대인의 성경)

그러니 만약에 보이는 것, 그 나타난 것을 전부라고 여긴다면,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말미암아' 라는 것을 놓치게 된다는 말이죠. 이 '말미암아' 라는 것은, 보이고 그 나타난 것은 결과인데, 이런 결과를 낳는 원인에 대해서, 그것을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모든 수사를 종결지을 수 없다는 겁니다. 즉 보이는 것으로는 탐색이 종결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러니 문제는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거울을 보면 자기가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도대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보자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있다' 라고 할 때, "내가 있으니 밥을 먹어야지" 라고 하지말고, 그 '있음'은 여기 3절에 의하면 반드시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것은 '없음' 이란 겁니다. 그러니 없음에 의해서 있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는 것이죠. 즉 "없음, 나타나지 않는 것이 나를 나타나게 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 11장 3절을 쉽게 설명하면,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대자연은 치마폭에 있는 문양들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더 어려운가요? 이 세상은 치마폭에 있는 문양들이고 무늬들인데, 그래서 이것들은 바람에 치마가 흔들리는 것처럼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배후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배후에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는데, 즉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타난 것은, 그 나타난 것이 시작점이고 끝점이 아니고, 그 시작점은 보이지 않는 쪽에 있다는 말이죠.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아까 인간들은 요지부동과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산다고 했는데, 즉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아무도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나 대신 살아주는 사람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를 룻기에서는 "자기 보기에 소견대로 했다" 라고 하는데, 이게 사사시대기 때문에 말이죠. 사사시대 중간에 있는 것이 룻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사시대에 전부가 다 자기 소견대로, 그렇게 자기에게만 치중하고 집중하고 집착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열차를 하나 운행하신다는 말이죠. 그 열차가 아까 보았던 룻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그러면 그 열차는 어디에 도착하는 열차냐는 겁니다.

여기서 룻기의 제일 마지막인 4장 20절에서 22절을 보겠습니다.

(룻 4: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룻 4: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룻 4: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 왕의 자리 !!

여기에 마지막 종착점이 나오는데, 그게 어디입니까? 22절에 "다윗을 낳았더라"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종착점을 하나님께서, 율법의 자발적이고 자체적인 작용으로 왕의 자리를 친히 마련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왕의 자리에 잠시 열차가 정차했다가 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왕의 자리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겁니까? 이 왕의 자리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같이 살펴보았는데 말이죠. 솔로몬 왕이 나오는데, 이 솔로몬 왕은 요지부동의 다윗 계통이 아니고, 그 요지부동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우리야' 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야는 죽었으니까, 없으니까, 그래서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이 우리야의 죽은 자리를 대체해서 등장하는 것이 우리야의 아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야의 아내는 없음을 보여주는데, 그러니 있음과 없음이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 약속의 자식이 된다는 말이죠.

* 예외의 존재, 마리아 !!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나타나는데, 그런데 마리아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여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여자가 자기 혼자서 임신을 합니까? 어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떻게 여자가 남자와의 동침도 없이 혼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마리아가 남자도 없이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이성을 지닌 여자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리아' 라는 여자는, 모든 인간 속에 작용하고 있는 요지부동의 원칙에 대해서 예외의 존재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내가 전부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 나타나는 것이 전부다" 라고 하는, 이런 인간 이성의 한계, 그런 범주 안에 있는 이 세상에서 도저히 생길 수 없는 현상을 줌으로서, 나타난 것의 원인으로서의 없음, 즉 있음의 자리와 대비되고 경쟁이 되는 없음, 바로 그 없음에서 마리아를 제공하게 되고, 그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나 나나 똑같은 요지부동의 하나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을 믿을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없음에서 출현한 그분을 믿을 것인가?" 라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다면 신구약성경을 다시 새롭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는 요지부동의 원리원칙에 준해서 해석을 했다는 겁니다.

* 우리 모두의 취미는, '돈 모으기' !!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아니면 자기를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신에게 기도하고 빌어서, 또한 헌금하고 바쳐서, 그렇게 순종을 해서, 결국 그 목적은 뭐냐 하면, "있는 나를 더 살리고자 한다" 라는 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그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가족이 잘되는, 자기 식구 감싸기라는 겁니다. 자기 아이들이 말을 잘 듣고, 집안이 넉넉해서 자기의 욕망을 마음껏 교환할 수 있는, 그래서 주말마다 놀러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모은다는 말이죠.

"당신의 취미가 무엇인가요?" 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취미는 똑같은 취미인데, 하나의 취미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돈을 모으는 것인데, 돈을 모아서 쓰는 재미, 이것은 말로만 들어도 감격스럽다는 말이죠. 그것은 목사가 되던 집사가 되던 장로가 되던 관계가 없는데, 교회의 교인이든 아니든 그것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돈을 원 없이 모아서 원 없이 쓰고 싶은데, 그 소원이 아니면 달리 무슨 소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하나님이여, 저를 왜 이렇게 학대하십니까?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 취미활동을 방해하니까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 나오미의 도발적 제안, 그리고 주춤하는 보아스 !!

룻기에 중요한 사건이 여러 개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나오미가 도발적인 제안을 했다는 말이죠. 자기 며느리를 첫날밤을 만들기 위해서 마구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나오미의 도발적 제안을 거절하는데, 들이미니까 도로 받아서 밀어버린다는 것이죠. 즉 "아니, 이것은 아니죠. 물어볼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니 말이죠. 즉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보아스는 주춤하게 되는데, 그 대신에 이 보아스는 어떻게 합니까? 그런 나오미의 제안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배려로서, 룻이 보아스와 합궁을 하기 위해서 가지고 왔던 그 넓은 보자기에 자신의 농산물을 가득 담아서 돌려보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율법에 준한 순번이 있기 때문에, 그 순번을 지키겠다. 새치기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은 고려해보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룻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말이죠.

평소에도 이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다른 사람들은 추수하고 땅에 떨어진 것을 줍는데, 보아스는 룻을 감안해서 특별히 젊은애들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리고 단도 대충 묶어서 일부러 곡식이 많이 떨어지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룻이 많이 가져가도록 배려를 했다는 말이죠. 이것도 직장 내 특혜라고 할 수 있는데(ㅋㅋ), 그렇게 해서 호감을 보였다는 말이죠.

* 다시 율법의 세계로 !!

그러니까 율법이 싫어서 도망친 그 가정 내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전혀 모르는 이방 여인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방 여인을 율법을 매우 사랑하는 여인으로 만들어서, 다시 같이 율법의 세계로 집어넣는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룻기의 중요한 테마가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이렇게 들었으니까, 룻기가 다 끝나고 나서 "나는 룻기를 모릅니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율법이 스스로 움직여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율법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후견자 노릇을 자처해서 하게 한다는 것이죠.

그러한 후견자 노릇을 했다는 것,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구체화된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방금 살펴본 룻기 제일 마지막인 4장 22절에 나오는 것인데, 즉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라는 겁니다.

* 계속해서 달리는 '설국열차' !!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그러한 죽음의 세계, 좀비들의 세계에 하나님께서는 특급열차 하나를 운행하신다는 말이죠. 그 종착점은 왕의 자리인데, 그 열차에 무엇이 실리는고 하니, 고엘, 즉 후견자의 속성을 가득 싣고 달린다는 겁니다.

룻기 마지막에서는 이렇게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라고 하면서 아주 간단하게 기록이 되어있는데, 그러나 실제로 사무엘상 16장과 17장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이 열차가 그냥 아무런 영향도 없이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분위기가 살벌한 열차라는 말이죠.

그 열차 내에서도 바로 요지부동의 원칙, 즉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아무도 나의 인생을 남이 대신 할 수 없다" 라는 것, 이것이 마치 치마폭에 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면 휘날리는 문양의 세계, 그것을 사람들은 전부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인간들의 나타남을 두고 '실루엣'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 한옥에 보면 문에 창호지가 발려있지요? 그리고 그 방에 촛불이 켜져 있으면, 바깥에서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뚜렷한 입체적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이차적 표면적인 실루엣이 창호지에 아른거린다는 겁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예를 들어서, 자객이 칼을 가지고 방안에 침입해서 대감을 죽이는 사극의 경우에, 그것이 너무 잔인하다고 여겨지면 실루엣으로 처리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두 실루엣이 있는데, 덩치가 큰 실루엣이 칼을 빼서 싸우는데, 그리고 마지막에는 창호지에 피가 쫙 뿌려지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말이죠.

* 내 인생은 나의 것 !!

다시 말해서, 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루엣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후견자로서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는, 그게 전부인줄 알고 있는 인간들, 그래서 그들이 배웠던 것, 그들의 온 몸에 내성이 되고 습관이 된 것이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게 민해경이 부른 노래제목이기도 한데 말이죠(ㅋㅋ).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세요. 완전히 귀신인데,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은 천재들이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타고났다는 말이죠. 형제간에 싸우는 것을 보면 살벌하다는 겁니다. 나중에 부모가 죽고 난 뒤에 유산싸움을 하면, 그게 더 본격적으로 되겠지만 말이죠.

거기에는 또 자기 패거리가 있다는 겁니다. 아들 둘이 유산싸움을 하면, 아들 뒤에는 각자 자기 부인들이 있어서 2대 2로 붙는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살벌하게 싸우는데, 왜냐하면 양보가 미덕이 아니기 때문인데, 만약에 양보를 하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겁니다.

* 영리한 나오미, 바보 룻 !!

그런데 그런 쪼다병신이 누구냐 하면, 바로 룻이라는 말이죠. 룻은 이 율법의 세계가 좋아서 자진해서 들어온 사람이라는 것이죠. 물론 뒤에서 하나님이 떠밀었지만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나오미가 철저히 그 순진무구한 룻을 이용했다는 겁니다. 자기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면 나오미는 자기 약점을 어떻게 처리를 했습니까? 그런데 이 자기 약점이 남들에게는 약점이 아니고, 남들의 기대치가 자기 자아라는 통 속에 들어와 있으니, 그때부터 남들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자기 결핍을 대처하기 위해서 자기는 그렇게 추구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는 따라주었고, 그 결과물로서 자기 안의 빈 통을 채워나갔다는 말이죠. 따라서 자기 안의 그 모든 행동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자기는 그때그때 대처를 했다는 겁니다.

나오미는 "꼴좋다. 남편과 자식하고 같이 잘 산다고 다른 나라로 가더니만, 남자들은 다 죽이고 오네. 너는 여자로서 인생은 끝났어. 너는 하나님에게 벌을 받은 거야" 라고 하는, 그런 남들의 비난을 의식하면서, 그야말로 기가 완전히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말이죠.

* 슬픔의 여인, 나오미 !!

나오미는 그것에 대해서, 율법의 세계, 즉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 그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쳐서 나갈 때는 기분 좋게 나오미, 즉 기쁨으로 갔다는 겁니다. '나오미' 라는 옛날 영화배우가 이제 생각이 나는데(ㅋㅋ), 아무튼 기쁨의 나오미로 나갔다가 졸지에 슬픔의 여인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나오미가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왜 자기를 기쁨이 아닌 슬픔의 여인이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한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나'를 딱 깨보니까 어떻습니까? 그 안에 '나' 라는 게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남들의 요구조건이 가득 가득히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인생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는데,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 이새도 역시 마찬가지 !!

이것은 바로 여기 룻기 4장에 나오는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느니라"라고 할 때, 이 이새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인데, 다윗의 아버지도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라는 원칙, 그 요지부동의 일반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생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는데, 흉내내기로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깥에는 믿는 척을 해도, 안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치마폭에 있는 문양처럼 일종의 외피이고 껍질인데, 그래서 우리는 그런 껍데기만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실루엣으로 들어있는 주님께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눈에 전혀 들어오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그럴 때 눈에 들어오라고 주님께서 작용하시는데, 물론 실루엣이지만 말이죠. 그런 다른 특이한 실루엣, 그것을 룻기에서는 '룻'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2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도 애굽에 있을 때는 이방인이었고 나그네였다" 라고 하시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 즉 약속의 세계로 들어올 때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느냐?" 라고 물으신다는 말이죠.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 왜 말하지 못해?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다른 사람은 너희를 도와주지 못했지만, 나 여호와 하나님은 노예생활을 하는 너희를 친히 인도해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와서, 그래서 자유민으로 전환을 시켰잖아. 그러면 그 요소가 너희의 인생 속에 그게 들어있어야지. 그게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왜 쏙 빼버리느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쏙 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도대체 너희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는 것이죠.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혀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내가 너희에게 '나' 라는 게 있다는 것은 인정을 해주겠는데, 하지만 그 나 외에 타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너희도 자각하라" 라는 겁니다.

* 너는 내 사람이다 !!

다시 말해서, "네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왜 말하지 못해? 왜 말하지 못해? 네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네가 있다는 것을 왜 말하지 못해? 왜 말하지 못해?" 라는 겁니다. 이것을 보다 더 직선적으로 말하면, "너는 내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죠.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는 겁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왜 말을 못하냐?" 라고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왜 너는 자꾸만 홀로 살려고 하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을 요즘은 '욜로(YOLO)' 라고 하는데 말이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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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욜로(YOLO) - '인생은 한 번뿐이다'를 뜻하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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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은 좀비들의 세계 !!

그렇게 혼자 살게 되면,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 자살대기조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지금 자살할 타이밍을 찾지 못해서 죽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버티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는 길은 뭐냐 하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적군의 총에 전사하는 것이 아니고, 장렬하게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이란 말이죠.

죽을 때도 왜 그렇게 죽느냐 하면, 자기 안에 남들의 시선이 있으니까, 남들에게 복수한다고 그렇게 죽는다는 겁니다. 남을 왜 믿습니까? 믿을 게 뭐가 있다고 남을 믿습니까? 모두 다 똑같은 인간들이 각자가 자기 소견대로 하는 것인데 말이죠.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이 세상은 그야말로 좀비들의 세계라는 겁니다.

* 십자가에서 죽음을 미리 !!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결국 인간은 말씀이 철수되면, 그래서 쓸모가 없으면 죽는다는 말이죠. 구원이라는 것은 간단한데, 장차 올 죽음을 미리 당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겁니다. 어차피 주님이 우리를 죽일 것인데,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합류해서 그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받으면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그 처참함, 그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있는 입장인데, 그것을 우리가 미리 간파해서 그 십자가를 수용하면 된다는 말이죠. 부활을 수용하려고 하지 말고,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수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룻기 마지막은 일단 남겨두고, 고린도전서 2장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는 이게 반드시 경쟁적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경쟁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는, 자기 쪽에서 뭔가 손을 썼다고 하는 것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교재 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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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존의 언어로 이 십자가에 맞서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구분과 대립이 사라진 장소, 존재라고 볼 수 없는 사건이 언어의 땅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를 선언하는 순수한 이름(언약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자리다. 이때의 존재형식은 공백이다. 언어는 이러한 공백을 포착하기에 무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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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뭔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전부 다 정보화를 시키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모든 것을 자기 지혜, 즉 자기에게 적합하도록 조작해서, 그 다음에는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능력만큼은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십자가는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마저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우리 인간의 지혜, 즉 욕지부동을 더욱 더 확고히 하려는 조치, 그것을 십자가는 오히려 공격하는 식으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인데,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제 십자가를 믿어서 천국에나 가볼까?" 라고 한다면, 그것을 누가 공격하느냐 하면, 먼저 십자가가 공격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든 의미가 "오직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 라는 것으로 마감되기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나' 라는 것으로 모든 의미가 종결이 된다는 겁니다.

* 마이 웨이 !!

프랭크 시나트라가 열심히 불렀던 '마이 웨이' 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를 보세요. "나는 한 평생 후회 없이 살았노라. 이제는 나는 죽을 때도 나하고 싶은 대로 내 방식대로 다 살았다. 내가 뒤돌아보니까 후회가 없는 인생이었다. 친구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간다, 마이 웨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 커튼이 쳐졌을 때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사람은 살면서 십자가에 된 통으로 맞아본 적이 없는데, 저는 이것을 '요지부동' 이라고 했는데, 달리 표현하면 '강화유리'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매우 강렬하고 단단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한 번 깨져보세요. 깨질 때 어떻게 깨어집니까? 그야말로 여지없이 조각조각이 나서, 그 자리에 조각들이 수북히 쌓인다는 겁니다.

* 강화유리 인생과 십자가 !!

십자가의 그 뾰족한 것으로 강화유리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제대로 맞아야 한다는 말이죠. 어차피 죽을 것인데, 십자가 그 모서리로 된 통으로 맞아서, 그 부분만 빵구가 나면 안 되고, 그러면 더 괴로운 것이고, 나머지 맞지 않은 곳까지, 즉 아직까지 살아보지 않은 인생까지, 그 모든 것이 다 완전히 조각이 나서 무너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괜히 이 강화유리로 계속해서 버티고 있으면, 이것을 매일같이 닦는다고, 그리고 인테리어를 한다고 난리라는 말이죠. 색종이를 붙이고 예쁘게 하면서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나는 내 인생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산다. 나만 즐거우면 그만이다" 라고 해서, 평생을 살면서 온갖 것을 다 더덕더덕 붙여놓았다는 겁니다.

대부분 집에 가보면, 그게 무슨 가게냐 하면 골동품 가게라는 말이죠. 이게 심화가 되어서 치매환자가 되면, 쓰레기가 한 두 트럭은 나온다는 말이죠(ㅋㅋ). 치매환자들은 할 일이 없으면 괜히 밖에 나가서 쓰레기를 모두 모은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는 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티로폼, 택배상자 등등, 그런 것을 전부 집에 가져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뭐냐 하면,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바깥에 있는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그것이 자동화된 채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수북히 자기 것으로 채우는데, 왜냐하면 그게 자기를 자기답게 지켜줄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 사고방식은 절에 가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인데,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 인간의 폐위(廢位) !!

여기 교재 4페이지에 보면 '인간의 폐위(廢位)' 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인간의 자기 왕 노릇을 그만두어라. 그만 내려와라"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동안의 진리 점유에 대한 폐위로 이어진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동안 진리라고 여겼던 것은, 자기가 잘 되기 위한, 자기에게 필요한, 즉 자기에게 진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보편적 진리가 아니고, 자기만 왕이 되어서 무조건 인정을 받고자 하는 진리인데, 또는 타인이 자기를 우러러 볼 수 있는데 필요한 재료들, 그것을 우리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조작하고 오인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온갖 쓰레기들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사회를, 눈에 나타난 것을, 보이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면서 수집해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 교재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계속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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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위를 인정한다면 그동안 인간들의 해석 칙에 속아넘어가자. 이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서 도리어 방황하게 된다. 인간이기에 같은 인간들에게 충분히 속자. 그리고 그 속임수에 본인이 충성스레 기여 있음을 인정하고 빠져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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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분히 속아넘어가자 !!

그러니 인간들의 해석규칙에 속아넘어가자는 것인데, 누가 누구에게 속는다는 겁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충분히 속아넘어가자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나는 잘났어. 나는 훌륭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 나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나를 살리는 거야" 라고, 그런 구호를 외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기 주제파악도 전혀 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를 속였다는 것이죠. 그렇게 충분하게 속고, 그 다음에는 강화유리에 십자가가 제대로 박혀서, 완전히 쓰레기로 주저앉게 된다는 겁니다. 도저히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게 완전히 깨지고 주저앉아야 하는데, 룻기에 의하면 율법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룻은 바보멍청이지만, 생기발랄해 !!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 룻이 나오미 앞에서, 소위 속물적인 나오미 앞에서 피해자처럼 움직였다는 겁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앵벌이를 시켰다는 말이죠. 그렇게 룻은 스스로의 자기를 위한 삶이 없었는데, 시어머니가 시키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율법이, 그 말씀이 자기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룻은 한 마디로 말하면 바보 멍청이라는 말이죠. 배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야말로 자기 것이 없다는 겁니다. 달리 모아놓은 것도 없는데, 그냥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생기발랄한데, 왜냐하면 자기 것이 없으니까 말이죠.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납작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내 남편을 왜 죽이십니까?" 라고 하는 자기 신세한탄과 같은 것은 룻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그것도 주의 뜻이겠지요"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까 룻은 말씀의 외피라는 겁니다. 말씀이 이끄는 대로, 그냥 자기는 흔들리면 된다는 것이죠. 마치 "야, 파도타기처럼 재미만 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 이제 마지막으로,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

이제 룻기 마지막의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모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될 때까지, 룻기에 나오는 이 룻과 같은 현상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왕으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서는 동일한 속성만 실리기 때문에 말이죠.

천국으로 가는 기차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룻기에서 일어난 일, 다윗에게 일어난 일, 그것이 동일하게 반복이 되면서 달리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제발 강화유리가 부서지고, 그래서 바보가 되고 멍청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다윗과 룻은 똑같아 !!

소년 다윗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윗이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룻과도 똑같다는 겁니다. 아무런 어떤 대비책도 없이,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마구 달려들었다는 말이죠. 즉 "아니 어떻게 율법이 없는 자에게 율법이 있는 자가 쫄면 되겠는가? 율법이 없으면 할례를 받지 못한 자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골리앗과의 대결이란 말이죠. 만약에 그 뒤에 말이 더 있다면 "우리는 할례를 받았잖아" 라고 나왔지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울 왕과 어른 여러분, 지금 제 말이 틀렸습니까? 저 사람은 덩치는 크지만 완전히 허풍입니다" 라고, 다윗이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 속이 텅 빈 키다리 아저씨 !!

왜 가게를 개업할 때 보면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전봇대와 같은 길다란 풍선이 사람 모습을 하고 열심히 몸을 흔들고 있는데, 땀도 전혀 흘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기 코드를 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주저앉는다는 말이죠. 그 안이 텅텅 비어있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권력에는 율법이 없는데, 복음이, 십자가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십자가가 없는데, 거기에 우리가 왜 쫍니까? 좀비들이라는 겁니다. 덩치가 큰 좀비, 은 좀비, 뚱뚱한 좀비, 날씬한 좀비, 전부 다 좀비들이라는 말이죠.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살면 좀비와 같이 사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만을 챙긴다는 겁니다. 그게 타고난 본성인데, 물론 복음을 알아도 자기만 챙기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 엄마는 복음은 모르지만 저에게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몰라요. 목사님은 우리 가정을 너무 몰라요. 엄마는 제 비위도 잘 맞춰주고 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선행은 복수심이라는 겁니다. 그 뒤에는 무시무시한 시퍼런 칼날이 숨어있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하는 표현이 너무 과격한가요?

다시 말해서, 자기 의미, 자기 의를 축적하는 것으로, 그렇게 자기를 상대로 자기 의를 지금 통장에 차곡차곡 열심히 쌓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너는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라. 나는 착하게 살아서 천국에 갈련다" 라고, 지금 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말이죠.

* 소년 다윗과 골리앗 !!

아무튼 다윗은 소년인데, 소년의 특징은 어른에 비해서 힘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년 다윗의 의미는 '없음'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어른들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무모하다는 겁니다. 무려 2미터가 넘는 덩치가 큰 골리앗에 비해서, 청소년 하나가 변변치 않은 무기를 들고서, 사실은 무기도 아닌데, 짐승을 잡는 것을 하나 들고 와서 달려드는 것은, 정말로 무모하기가 짝이 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다윗의 무모함 뒤에는, 즉 없음 이외에는, 거기에는 "하나님의 할례를 입은 백성이 율법대로 시행한다" 라는 하나님의 엄청난 '있음'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장 미약해 보이는 소년 다윗을 가장 힘있게 보이는 골리앗과 대결을 시킨다는 겁니다.

* 유대인들의 '국뽕' !!

여기서 유대인 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아무튼 잘 지어내는데 말이죠. 그 골리앗의 증조할머니를 누구로 보느냐 하면, 오르바로 본다는 말이죠. 이 오르바가 누구인고 하니, 룻기 1장에 나오는 기룐의 부인인데, 룻과 동서지간에 있었던 바로 그 기룐의 아내가 골리앗의 증조할머니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오르바는 다윗과 결투를 붙었던 골리앗의 증조할머니라는 말이죠. 그들이 왜 그렇게 주장을 하느냐 하면,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야 이게 제대로 된 상품이 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이런 쪽으로 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참으로 재미가 있는데,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는 겁니다. 역사에서 잠시 헤어졌는데, 그런데 그 4대 후손이 일대 일로 맞짱을 뜨는 방식으로 해서 다시 만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승리는 누가 했습니까? 룻의 4대 후손인 다윗이 승리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이고, 그리고 오늘날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에게 감동적으로 먹히겠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이다" 라고 하는 정체성이 그만 확 살아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성경해석을 이런 식으로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있음 자체를 더욱 무엇으로 만드는 겁니까? 있음을 강화유리로 만들기 위한 해석이라는 겁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그야말로 마귀단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그들은 "제3성전이 세워질 때 메시야가 재림한다" 라고 하면서 희망을 걸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정보획득이라는 말이죠. 자기를 더욱 더 굳히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식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우리는 실루엣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

아무튼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니, 이 다윗을 보고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뭐라고 합니까? "소년 다윗아, 참으로 대단하구나. 너무나 훌륭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나오니까 누가 한심스럽고 답답해하겠습니까? 소년 다윗은 이것을 그냥 보고 지나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이 골라앗과 싸우기에 앞서서 뭐라고 합니까? "이번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고, 실체가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방송에는 역시 그만 잘리고, "소년 다윗은 대단하다" 라는 식으로 편집이 되어서 나오겠지만 말이죠.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아무튼 다윗은 분명히 언급했는데, 즉 "이번 전쟁은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 스스로가 우리의 보호자 되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라고 말이죠. 바로 이러한 사건이 다윗으로 하여금 드디어 사울 다음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유일한 왕으로서, 즉 왕의 자리와 소년 다윗을 하나님이 내세우는 것이 일치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오늘날 성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너희는 십자가 안에 있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나타난 것을 훼손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즉 우리 자신의 모든 것과 경쟁자이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일하신다는 말이죠.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셔서, 복음을 복음대로,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자랑할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쓰여질 뿐이라는 겁니다. 언제까지 그렇습니까? 그 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즉 우리의 이 육체가 다할 때까지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주님께만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더러운 세상을 달리는 기차 안에 저희들이 탑승객이라고 일러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기차 안의 원리원칙, 이 십자가가 언제나 요지부동으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것과의 싸움이 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영원토록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잊지 않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0,8,23 재정리함 - 녹취 '구'
2020,8,30 재재정리함 - 녹취 '구'


코로나 바이러스로 혼미해지던 몸과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 바이러스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게 해주시니
또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룻의 그 생기발랄함이
삶 속에서 날마다 드러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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